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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철학

라캉을 만나다 12

by 8866 2008. 11. 25.

라캉을 만나다 12

[에크리]를 통해 라캉을 만난다

 글쓴이: 한살림

http://cafe.daum.net/9876/3Mhq/23

 

라캉의 <정신분석학에서 공격성>을 읽고

 

라캉의 <Aggressiveness in Psychoanalysis>를 읽었다. 이 논문은 라캉이 1948년 5월에 Brussels에서 열린 어떤 정신분석학회 모임에서 발표한 것이다.

 

당시 우리나라는 삼년간의 미군정을 끝내고 명목상으로나마 독립국가가 되는 시점이었다. 이 시기에 프랑스는 제2이차세계대전 동안 겪은 상처를 치유하느라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한국과 프랑스는 어떤 점에서 비슷한 역사적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 4년과 36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와 한국(남한)은 전후에 동일한 문제에 직면하였다. 점령기에 적에 협조하여 동족을 착취한 사람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프랑스와 한국이 이들을 처리한 방식은 표면상으로는 차이가 있었지만 본질적으로는 비슷했다.

 

냉전체계가 가속화되는 시점에서 프랑스의 ‘구원자’가 된 미국은 프랑스가 철저한 과거 청산의 과정에서 좌파 정부가 힘을 얻기를 원하지 않았다. 게다가 비씨정부에 적극 협조하지 않았던 많은 프랑스인들도 범죄 공모자로서의 죄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이는 불의의 시대에 자폭하지 못한 채 살아남은 자들의 죄스러운 ‘슬픔’이다.) 프랑스인들은 비씨 정부의 수단 등 책임자를 서둘러 처단함으로써 과거를 신속하게 덮어버리기를 원했다. 독재자의 이미지를 풍기는 드골은 이런 작업에 적격이었고 그는 놀라운 지지율로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런 사태를 지켜보는 프랑스의 (좌파) 지식인들은 깊은 무력감과 절망을 느끼지 않았을까? 한국 전쟁을 전후하여 무수한 남한의 지식인들이 월북을 감행하도록 만든 분위기가 전후 프랑스를 무겁게 덮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프랑스 (좌파) 지식인들이 안착할 수 있는 곳은 없었다. 소련은 스탈린에 의해 절단나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이 중국을 사모한 것은 당연하였지만 중국은 유럽에서 (심리적 인종적 문화적으로) 너무나 멀었다. 아직 약속으로만 매력적인 나라이기도 했다. (제2의 소련이 되지 않을까? 마오쩌뚱의 문화혁명…) 그들은 프랑스에 머물었다. 전후 20년 동안 프랑스는 급속하게 우경화되었고 좌파 지식인들은 겨우 숨만 쉬면서 살았다. 싸르트르나 까뮈 같은 이들이 노벨문학상을 받았다는 것은 희극적인 구석이 있다. (온실효과의 주범이면서 이를 막는 데 가장 비河뗌岵?미국의 앨 고어가 노벨평화상을 받는 것과 마찬가지로… 미국은 떨뜨름하다. 미운 놈 떡 하나 더 받은 것처럼…)

 

프랑스에서 1968년에 일어난 ‘이른바’ 혁명이란 현실로 존재하는 프랑스를 극복하려는 노력이라고 볼 수 있다. (전반적으로 이는 우리나라에 거의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당시 일본제국의 하급 장교 출신이었던 박정희가 군사부일체의 망각한 힘으로 근대화를 서두르고 있었다.) 이 사건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4년 점령의 업보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프랑스인들이 사회의 전면에 등장하게 되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프랑스가 해방된 1944년에 소년기를 보낸 사람들이 대략 삼사십대가 되던 시점이었다. 이들은 어렸기에 나찌의 부역에 연루되지 않을 수 있었다.

 

한국의 상황이 즉각 떠오른다. 한국에서는 왜 1968년 또는 1970년 즈음에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던가? 1960년 사월에, 1980년 오월에, 1987년 6월에… 남북한의 대치 상황과 냉전체계에서 한국이 차지하고 있던 왜소한 지위 등등으로 하여 우리는 혁명 다음에는 반동의 시절을 살아야 했다. (원래 한국인은 혁명하는 민족이다. 너무 자주 외세가 개입하여 역사를 꺼꾸로 돌리는 바람에 잠시 냉소와 패배주의에 빠져 있을 뿐이다.)

 

심리학적인 입장에서 프랑스인과 한국인이 조상과 부모에 대해 생각하는 바의 차이를 생각해 본다. 프랑스인(서양인)에 비해서 한국인(동양인)은 부모와 자식 사이에 존재하는 공동의식( 공동체주의 또는 집단주의 또는 가족주의)가 매우 강하다. 조상 또는 부모의 죄는 곧 나의 죄이기도 하다. 이와 관련하여 영화 [뮤직박스]와 [맹자]와 비교해 볼 수 있다. 젊을 때 나찌 군인으로 민간인을 학살한 경력을 속인 채 미국에서 자상한 아버지이며 할아버지로 살아가는 노인과 그를 고발하는 변호사인 딸… 이것이 프랑스의 1968년 혁명을 이해하는 한 단서가 될 수 있다. (영국과 미국과 독일에서는 왜 비슷한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는가… 미국의 반문화 운동은 프랑스의 68혁명과는 성격을 달리 한다.) 우리들의 경우에는?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경우를 보라. 우리는 아직도 우리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저지른 범죄를 훌훌 털어버리지 못한다. 그것은 곧 우리들의 범죄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라캉이 이 논문을 발표하던 시절을 그려보다가 너무 멀리 왔다.)

 

라캉이 당시 프랑스와 유럽에 대해 느꼈을 법한 감정들이 논문의 구석구석에 나타난다. 라캉은 사르트르나 까뮈와 같이 ‘레지스탕스’로 독일에 적극적으로 저항하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활동을 중단하고 납작 엎드려 지냄으로써 나찌에 연루되지 않을 수 있었다. 일종의 ‘무저항 불복종’이지만 이 일로 하여 예민한 라캉이 받았을 심리적 갈등을 생각해 본다. 정신분석학자는 자신의 심리가 민감한 정도에 따라서만 내담자의 심리적 상황을 정확하게 해석할 수 있다. 감정이 무딘 예술가만큼 감정에 무딘 정신분석가를 상상할 수 없다. 라캉은 분명 이 4년 동안 프랑스에서 겪었던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많은 불면의 밤들을 보내야 했으리라. 이런 생각을 하면서 라캉이 1948년에 발표한 <Aggressiveness in Psychoanalysis>를 읽는다. 그의 나이 마흔 여덟이었다. 라캉의 결혼 생활이 파국을 향하고 있던 시기이기도 했다. …

 

이 논문은 1950년대 중반부터 나오기 시작한 그의 논문들에 비해 쉽다. 노암 촘스키는 포스트모더니즘을 (거의 감정적으로) 공격하면서 라캉에 대해 짧게 언급하였다. 촘스키는 라캉이라는 인물에 대해 전혀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는 라캉의 초기 글들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 경우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은 ‘옳다’는 함축을 갖는다. 촘스키가 말하는 초기 글들은 [에크리]에 수록된 것들을 지칭한다. 라캉이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어려운 글을 썼다는 것에는 동의한다.

 

나는 [에크리]보다 “세미나”가 읽기 쉽다는 듯이 말하는 지젝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나의 독서 경험에 따르면 “세미나”들은 매우 어렵다. 지젝의 말은 다음의 경우에만 옳다. 라캉은 1960년을 전후하는 시점에서 정신분석학에 대한 이론을 ‘완전히’ 새로 정립하였다. 이전의 정신분석학적 사유는 정밀하지 못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부정확하다. 심하게 말하면, [에크리]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 글들이 어렵기 때문이 아니라 틀렸기 때문이다. 이 글들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라캉이 후기에 정밀하게 정립한 사유를 거쳐야만 한다.

 

라캉도 [에크리]를 편집하면서 <Aggressiveness in Psychoanalysis>를 II부에 배치하면서 <On My Antecedents>라는 짧은 소개글을 덧붙였다. 이는 라캉이 1966년에 이 논문들이 자신의 사유를 정확하게 담아내지 못했다고 여겼음을 보여준다. 그렇다고 하여 라캉의 초기 논문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1948년에 이 논문을 썼을 때 라캉은 자신의 정신분석학이 틀렸다고 믿지 않았을 테고 그는 자신의 사유를 정밀하게 표현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과거의 작업들을 보는 거장들의 불편함은 보편적 현상이다. 나는 1948년에 라캉이 발표한 논문을 읽으면서 많은 것을 생각한다. 일단은 그것으로 족하다. 그의 사유가 어떤 질적인 변화를 겪었는지를 알기 위해 나는 우선 그의 초기 사유들에 집중한다.

 

이 논문 전반에 멜라니 클라인의 영향이 짙게 나타난다. (아버지 프로이트와 어머니 클라인과 아들 라캉.) 최근에 클라인의 논문 몇 편을 읽은 후에 그녀가 이 시절 라캉에 미친 영향을 더욱 뚜렷하게 본다. 이 논문에 클라인의 이름이 자주 등장하고 있다. 라캉은 클라인이 ‘지배하고 있던’ 정신분석학을 배우기 위하여 1945년에 영국으로 갔다. 아마도 이 논문은 그 때 받은 문화 충격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는 것도 같다.

 

이 시기에 라캉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과업의 하나는 에고심리학자의 학습을 극복(un-learning)하는 것이었다. 라캉은 1953년 로마 강연에서 <The Function and Field of Speech and Language in Psychoanalysis>을 발표함으로써 이 과업을 성공적으로 완수했음을 ‘자축하고’ 있다. 라캉이 이 과업을 수행하는 데 있어 클라인의 정신분석학을 원용했다.

 

1960년대 후반에 들어 라캉의 사유에 중대한 변화가 있다는 평가가 맞다면 이는 그가 멜라니 클라인의 정신분석학과 결정적으로 결별했음을 의미할 지 모른다. 이는 그의 후기 글들을 세밀하게 읽음으로써만 확인할 수 있겠지만 몇 가지 정황은 이를 뒷받침한다. 한 때 라캉의 주변에 매우 많은 프랑스 여성주의 정신분석학자들 (크리스테바 등등)이 모였었다. 라캉은 프랑스 여성주의 운동의 대부와도 같았다. 그런데 지젝 등이 라캉의 고유한 사유가 나타났다고 하는 시점에서 이들은 라캉을 격렬하게 비판하면서 그와 결별하였다. 크리스테바의 최근 저서에 [멜라니 클라인]이 있다. 또한 들뢰즈와 가따리가 [Anti Oedipus]를 쓰면서 클라인을 참조하고 있다. … (나는 이런 추측을 해본다.)

 

<Aggressiveness in Psychoanalysis>는 클라인의 대상관계이론에 기초한 정신분석학적 해석이다. 클라인만큼 인간의 공격성(aggressiveness)에 대해 깊이 관찰한 정신분석학자는 드물다. 양차 세계 대전을 경험한 라캉의 세대에 있어서 공격성만큼 명백한 것도 달리 없었다. (지금도 그렇다.) 중요한 것은 이 공격성을 설명하는 이론이다. 프로이트, 에고심리학, 대상관계이론 (클라인), 자기심리학 (코핫), 라캉주의 등등 모든 정신분석학자들은 공격성을 설명한다. 그들의 설명을 통해 그들이 갖고 있는 정신분석학의 전제(metapsychology)를 알게 된다.

 

프로이트-클라인-라캉의 대척점에 서 있는 인물은 빌헬름 라이히이다. 라이히는 프로이트도 결국에는 버린 리비도일원론 (pan-sexualism)을 고수하였다. 프로이트는 소위 ‘죽음의 본능(death instinct)’를 도입하면서 이원론(Love/Hate)에 안착하였다. 라이히는 사랑이 유일한 욕망이며 미움은 문화적 왜곡이라고 주장하면서 자신의 길을 갔다. (참고로 에리히 프롬은 약간 애매한 입장을 취하기는 하지만 라이히의 편에 선다. 하인쯔 코핫도 단순하게 파악하면 라이히를 따른다. 라이히와 마르크스를 함께 혁명 이론으로 파악하는 견해도 일리가 있다. 그들은 근본에 있어 성선론(性善論)을 따른다. 이와 관련하여 하워드 진(Zinn)의 [오만한 제국Declarations of Independence]에 실린 몇 개의 논문을 참조할 수 있다.)

 

멜라니 클라인은 라이히의 다른 쪽 극단에 서 있다. 클라인에게 있어서 사랑보다 미움(공격성)이 유아 (그리고 성인)의 마음을 압도적으로 지배한다. 이는 문화의 영향이 아니라 타고난 바탕 때문에 그렇다. 대상관계이론으로 함께 묶이는 정신분석학자들 사이에도 이에 대한 입장이 아주 다르다. [에크리]에서 라캉이 대수롭지 않게 언급하고 D. W. 위니캇(Winnicott)은 클라인의 영향을 깊이 받았는데 공격성에 대해 입장을 달리하고 있다. (그의 책이 몇 권 한글로 번역되었다.)

 

오늘 읽은 논문인 <Aggressiveness..>만 놓고 볼 때 라캉은 클라인의 입장에 동의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이 논문에서 라캉이 완전히 클라인주의자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이 논문은 프로이트의 짧은 글인 <On Narcissism: An Introduction>과 [Beyond the Pleasure Principle]과 [Group Psychology and the Analysis of the Ego] 등의 전통에 속한다. 클라인은 나르시시즘에 대해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라캉의 <Aggressiveness…>는 나르시시즘의 이론이다. (나는 여기에서 라캉과 하인쯔 코핫이 ‘함께’ 작업하고 있는 영역을 발견한다.) 나르시시즘이 없는 대상관계와 나르시시즘에 기초한 대상관계는 판이하게 다르다. 따라서 내가 위에서 라캉이 클라인주의자라고 말한 것은 정확한 말은 아니다. 라캉이 클라인의 사유를 이용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라캉은 대상관계(object relations)가 아니라 자기대상관계 (selfobject relations)라고 코핫이 칭하는 현상에 주목하고 있다. (이것은 내가 익숙한 코핫과 아직은 낯선 라캉을 이어보려는 시도에 지나지 않는다.)

 

라캉의 <Aggressiveness..>에 대해 상세한 노트를 달 시간이 없음이 안타깝다. 이 논문은 매우 ‘아름답다.’ 전쟁이 끝나고 라캉이 ‘동료들’ 앞에서 자신의 정신분석학을 ‘다시’ 발표하고 있다. (물론 이 사이에 몇 편의 논문을 쓴 것으로 보인다.) 이 논문은 단순히 실제 정신분석이 이루어지는 정신분석가와 내담자의 관계를 넘어서서 정신분석학의 입장에서 사회를 비판하는 결론을 담고 있다. 매우 전통적인 논문처럼 구성되어 있다.

 

마르크스의 [자본]을 읽은 후에 이 논문의 결론을 읽는 감회는 색다르다. 한 대목만 소개하는 것으로 이 노트를 마감하려고 한다. “Indeed, Darwin’s success seems to derive from the fact that he projected the predations of Victorian society and the economic euphoria that sanctioned for that society the social devastation it initiated on a planetary scale, and that he justified its predations with the image of a laissez-faire system in which the strongest predators compete for their natural prey” (영역본 p.98; 불어본 p.121). (이 문장에서 … the fact that he projected…, and that he justified… 의 구조만 생각하면 해독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전체 논문에서 이 부분은 라캉의 ‘이론’이라기 보다는 ‘적용’에 해당된다. (두어 시간 동안 노트를 작성한 후에 눈이 흐릿해져 정작 그의 ‘이론’에 대한 논평을 정리하지 못해 애석하다.)

 

제대로 된 [에크리]의 한글 번역본이 나와서 많은 사람들이 라캉의 글을 읽고 나의 생각들에 이의를 제기하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그 때까지는 불어본 영역본 일어본 등등으로 읽어야 하거나 말거나… 초역본이 있다고 하니 라캉의 지식으로 어느 정도는 일용할 양식을 해결하는 사람들이 역자나 출판사에 압력을 가해 보는 것은 어떨까? 다른 프랑스 사상가들의 책들이 ‘쉽게’ 번역되어 출간되는 것을 보면 기이한 기분을 떨치기 힘들다. 라캉을 지극히 미워하는 사람들이 한글 번역을 위한 판권을 독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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