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의미의 공간
  • 자연과 인간
서양철학

라캉을 만나다 14

by 8866 2008. 12. 17.

 

라캉을 만나다

[에크리]를 통해 라캉을 만난다

글쓴이: 한살림

http://cafe.daum.net/9876/3Mhq/29

 

라캉은 사생결단을 촉구한다 (그리고 광기에 대해)

 

언제쯤 라캉의 글을 제대로 읽을 수 있을까? 오랫만에 마음의 여유가 생겨 [에크리]에서 <Presentation on Psychical Causality>을 읽었다. 이전에 멈춘 부분에 이어 읽기 시작하였다. 라캉은 이 논문을 1946년에 어떤 학회에서 발표하였다. 라캉은 Henri Ey (1900-1977)의 organo-dynamism에 대한 비판을 중심으로 자신의 입장을 전개하고 있다. 주요한 주제는 광기(madness)의 해명으로 보인다. 영역본으로 38페이지에 달하는 짧지 않은 논문이다. 3부로 이루어진 논문에서 처음 두 부분을 읽었다. 끝까지 읽고 글을 쓰는 것이 좋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몇 자 적고 싶은 마음이 든다. 라캉의 논문을 읽는 데서 오는 깊은 좌절을 해소하려는 의도가 작동하고 있는 것도 같다.

 

많이 읽지 못했다. 십여페이지를 읽었다. 경탄과 좌절이 번갈아 일어났다. 빛나는 문장들이 나에게 말을 건다. 그렇지만 이 부분에 감동하였다고 해서 내가 라캉을 제대로 파악했다는 보장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런 방식으로만 라캉을 조금씩 알아간다.

 

[에크리]는 여러 번 읽어야 한다. 이제 세번째 읽고 있는데 ‘라캉의 사유’가 문제되는 한에 있어서 나는 안다고 주장할 수 없다. 그렇지만 라캉을 빌미로 이런 저런 것들을 생각하고 쓴다는 사실에 비추어보면 [에크리]를 읽는 일이 고역스럽지만 무익한 것은 아니다. 나는 미련한 지도 모른다. 라캉의 기본 이론을 잘 정리한 책을 골라서 읽는 것이 좋을 것도 같다. 그러나 나는 그냥 읽는다. 라캉의 텍스트를 읽다보면 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막대한 흥미를 준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래서 나는 라캉의 개론서들을 읽는 대신에 라캉의 책을 직접 읽는 지도 모른다.

 

[에크리]를 읽다가 ‘뭐 이래’ 하고 던져 버리는 사람은 라캉에 대해 알 도리가 없을 것이다. 라캉이 [에크리]의 서문을 맺고 있는 문장에 주목한다. “… I want to lead the reader to a consequence in which he must pay the price with elbow grease” (영역본 p.5; 불어본 p. 10). 이것은 매우 심각한 말이다. 옛날 도제가 심각하게 훈련을 받는 것을 일컬어 ‘elbow grease‘라고 한다고 한다. 무술을 배우기 위하여 고수를 찾아갔더니 삼년간 물을 긷고 나무를 하고 밥을 하고… 이 과정을 견디지 못하면 쫓겨나고… 라캉은 [에크리]의 첫머리에 엄포를 놓고 있다. 이런 각오를 한 사람만이 자신의 책에서 건질 것이 있을 것이라고..

 

라캉은 [에크리]를 읽는 자 가운데 얼마는 옛날의 의미에서 자신의 제자가 되기를 바라고 있는 셈이다. 제자란 무엇인가? 스승은 '도'를 전수하는 사람이다. 도는 나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일 터이고.. 이는 쉽게 포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쉽게 포기할 수 없는 때 나는 나의 혼신을 다하여 백 번이 아니라 천 번이라도 스승의 어록을 읽어야 한다. 라캉은 [에크리]를 이렇게 읽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다. 독자들은 이런 초대를 받아들거나 거절할 자유를 가질 것이다.

 

얼핏 생각나는 영화가 있다. [로렌조 오일]. 병에 걸린 외아들을 포기하지 못하여 스스로 처방전을 찾아나서는 부모의 이야기를 그렸던 영화였다. 아들을 포기할 수 없는 부모의 투쟁. 내가 다니고 있는 교회에는 얼핏 보기에도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아이가 있다. 안스러운 마음이 생기기는 하지만 크게 고민하지 않고 잊어버린다. 만약 그 아이가 나에게 주어진 하나의 과제라고 생각해 보자. 그 아이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나의 미래가 온전히 달려 있다고 하자. 그렇다면 나의 행동이 지금처럼 강건너 불구경하는 것이 될 것인가? 이 지점에서 나는 스승과 제자가 어떤 문제를 둘러싸고 벌이는 드라마를 이해하게 된다. 사생결단.

 

오늘 내가 읽은 부분을 조금 세밀하게 들여야 본다. 이 독서노트들은 앞에서도 이야기하였지만 전체를 파악하지 못한다. 사실 그런 필요를 요즘은 느끼지 못한다. [에크리]는 나의 생각들을 풀어내는 뮤즈(Muse)와 같은 역할을 한다. 아직 사생결단을 할만한 마음이 되지는 못했다. 그래도 나는 거듭 [에크리]를 읽으며 라캉의 사유를 비교적 '그의' 입장에서 파악하는 날이 오기를 바라고 있다.

 

이 논문에서 라캉이 다루는 문제들 가운데 하나는 광기(madness)이다. “Thus rather than resulting from a contingent fact – the fragilities of his organism – madness is the permanent virtuality of a gap opened up in his essence. [문단바뀜] And far from being an ‘insult’ to freedom, madness is freedom’s most faithful companion, following its every move like a shadow. [문단바뀜] Not only can man’s being not be understood without madness, but it would not be man’s being if it did not bear madness without itself as the limit of his freedom.” (영역본 p. 144; 불어본 p.178)

 

이 세 개의 문단이 매우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명확한 해석을 제시하는 데 도달하지는 못했다. 강독은 텍스트를 제대로 이해했는가를 판가름하는 데 있어서 긴요하다. 물론 무지를 여지없이 드러낸다는 점에서 난처한 작업이기도 하다. 떠도는 생각들을 몇 개 적어 둔다.

 

우선 첫번째 문단에서 라캉은 Ey의 입장을 반박하면서 자신의 입장을 요약하고 있다. 광기(madness)는 생물학적인 요인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이 부분은 쉽다. 그러나 다음 부분은 어렵다. “… madness is the permanent virtuality of a gap opened up in his essence.” 이 문장에서 essence 는 무엇인가? 나는 이것을 아래 ‘man’s being’과 동의어라고 파악한다. 이 논문의 앞부분에 하이데거의 이름이 나온다. being은 분명 하이데거의 사유와 연관하여 사용된다. 내가 하이데거를 전혀 모르는 한에 있어서 이 추측은 나의 이해를 돕기는 커녕 오히려 방해한다. 이 문장에서 ‘virtuality’는 ‘reality’에 대비되는 말로 흔히 ‘가상현실’을 의미한다. 아래 문장에 있는 ‘a shadow’와 짝을 이룬다. 두번째 문장에 나오는 ‘insult’는 Ey등의 입장인데 그들은 육체적 질병이 몸의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방해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광기도 자유를 방해한다고 주장한다. 라캉은 동의하지 않는다. 마지막 문단은 광기가 있는 곳에 자유가 있고 자유가 있는 곳에 광기가 있다는 식으로 읽힌다. 이 문장들이 나에게 해명을 촉구하지만 나는 아직 대답할 수 없다.

 

나의 노트는 별로 내용이 없지만 내가 인용한 라캉의 텍스트는 깊이 숙고할 가치가 있다. 라캉이 광기의 문제를 다루면서 언급하고 있는 철학자와 예술가는 데카르트, 파스칼, 스피노자, 헤겔, 하이데거, 플로베르, 몰리에르 등등이다. 특별히 몰리에르의 [The Misanthrope]의 분석이 상세하다. 광기를 다룬 부분에 이어 라캉은 다시 이마고(imago)와 동일시과 가상계의 문제를 다룬다. 여기서 라캉의 ‘거울 단계’ 등등 초기 이론이 다시 거론되고 있다. (좀더 많은 생각들이 떠오르지만 잘 시간이라서 여기서 멈춘다.)

'서양철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라캉을 만나다 16  (0) 2009.01.07
라캉을 만나다 15  (0) 2008.12.25
라캉을 만나다 13  (0) 2008.12.13
라캉을 만나다 12  (0) 2008.11.25
라캉을 만나다 11  (0) 2008.11.19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