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캉을 만나다 11
[에크리]를 통해 라캉을 만난다
글쓴이: 한살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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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의 거울단계 논문에서 실존주의 비판
‘거울단계’에 대한 라캉의 짧은 글을 읽었다. [에크리]에 실린 <The Mirror Stage as Formative of the I Function>은 1949년에 열린 국제정신분석학회 모임에 발표된 것이다. 라캉은 1936년에 ‘거울단계’에 대한 내용을 발표하였지만 그것이 글의 형태로 보존되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거울단계’는 처음 발표될 때부터 정신분석학자들로부터 상당한 관심을 끌었던 점은 분명하다. 라캉은 [에크리]에 실린 글에서 이 개념이 프랑스에서는 상당한 정도로 논의되고 있다고 말한다.
영어로 불과 여섯 페이지에 지나지 않은 글은 쉽게 읽히지 않는다. 이미 오십을 바라보고 있는 라캉의 지적 여정이 압축된 글이니 그럴 법도 하다. 당시 사상계의 주요 문제들이 한두 줄로 요약되고 있어 라캉처럼 방대하게 글을 읽지 않은 나에게는 매우 난해하다. ‘거울단계’가 정확하게 무엇인가 하는 점보다는 훨씬 넓은 맥락에서 논문을 살펴본다. (이 넓은 맥락이란 많은 경우에 문제되고 있는 글을 정확히 읽을 능력이 없음을 숨기는 술책에 지나지 않는다.)
이 논문은 1940년대에 프랑스 또는 유럽이 직면하고 있던 문제들을 배경으로 나왔다. 첫문단에서 라캉은 말한다. “It should be noted that this experience sets us at odds with any philosophy of directly stemming from the cogito” (영역본 p.75; 불어본 p. 93). 이는 20세기 프랑스 사상가들에게는 이미 낡은 데카르트의 철학을 공박하는 것이 아니다. 이 짧은 논문의 말미에 나오는 실존주의에 대한 라캉의 언급을 고려해야만 한다. 그는 당시 프랑스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현상학과 실존주의를 정신분석학의 입장에서 비판하고 있다.
(나의 추측이지만) 훗설의 현상학은 데카르트 철학의 현대적 해석이다. 현상학은 하이데거를 거쳐 사르트르 등에 의해 실존주의로 변형되어 프랑스를 휩쓸고 있었다. 이 계열에 속하는 모리스 메를로-퐁티가 라캉의 절친한 친구였던 사실도 의미심장하다. 사르트르와 까뮈와 시몬 보봐르 같은 작가들이 세계적 명성을 누리던 시절이었다. 사르트르는 1905년에, 메를로-퐁티는 1908년에, 까뮈는 1913년에 태어났다. 라캉은 1901년생이니 이들에 대해서 매우 복잡한 감정을 느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시대를 주름잡는 사상가들과 작가들과 예술가들이 거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비견할만한 강렬한 감정들로 엮이는 경우는 많다. 단순히 같은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들 사이에 형성될 법한 친밀함과 라이벌의식을 넘어서서 심한 애증으로 질퍽거린다. 과도한 자존심을 가지고 있던 라캉은 화려한 조명을 받던 동시대의 사상가들에 대해 매우 복잡한 감정들을 경험했을 것이다. 이 감정들은 창조적인 사상가들을 평생에 걸쳐 ‘더’ 깊고 높은 사상을 탐색하도록 추동하는 경향이 있다.
어쨌든 ‘거울단계’를 쓰는 시절에 라캉은 프랑스의 사상 조류를 두 가지로 압축하여 제시한다. 현상학-실존주의 대 정신분석학. 현상학-실존주의는 의식(consciousness)의 사유이며 정신분석학은 ‘의식됨’의 철학이다. 현상학-실존주의에서 의식은 출발점이지만 정신분석학에서 의식은 중간 정거장이며 결코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한다.
이와 관련하여 이 논문에 나오는 라캉의 말을 인용한다. “… existentialism can be judged on the basis of the justifications it provides for the subjective impasses that do, indeed, result therefrom: a freedom that is never so authentically affirmed as when it is within the walls of a prison; a demand for commitment that expresses the inability of pure consciousness to overcome any situation; a voyeuristic-sadistic idealization of sexual relationships; a personality that achieves self-realization only in suicide; and a consciousness of the other that can only be satisfied by Hegelian murder. [para.] These notions are opposed by the whole of analytic experience, insofar as it teaches us not to regard the ego as centered on the perception-consciousness system or as organized by the “reality principle” – the expression! of a scientific bias most hostile to the dialectic of knowledge – but, rather, to take as our point of departure the function of misrecognition that characterizes the ego in all the defensive structures so forcefully articulated by Anna Freud.” (영역본 p. 80; 불어본 p.99)
해독에 상당한 부담을 주는 긴 문장들이다. 그렇지만 문장이 아니라 생각의 복잡성이 해독을 어렵게 만든다. 우선 첫 문장에서 “subjective impasses”는 실존주의가 주장하는 (또는 증거하는) 부조리한 인간 상황을 의미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라캉은 다섯 개의 항목을 소개하고 있다. 라캉은 복잡한 철학을 매우 간명하게 요약하는 데 탁월하다. 다음 문장에서 실존주의가 에고를 ‘의식’ 또는 ‘현실 원칙’과 관련하여 파악하지 않고 ‘the function of misrecognition’을 출발점에 놓는다면 정신분석의 경험은 전적으로 실존주의와 반대된다고 라캉은 주장한다. (한글 번역을 제공할 수 없어 미안한 마음이 든다.)
라캉은 이 논문에서 에고가 ‘the function of misrecognition’임을 환기한다. 이것이 한글로 어떻게 번역되고 있는지 모르겠다. 실존주의 (또는 마르크스주의)에서 말하는 허위의식(false consciousness)와 비슷한 의미를 갖는다고 일단 생각해 보자. (라캉은 모든 의식이 ‘허위’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허위의식은 결국 참의식과 대비해서 사용된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episteme와 doxa의 이분법을 벗어나지 못한다. 진리와 허위의 이분법은 서양사상사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 라캉이 위의 문장에서 실존주의를 비판하는 대목은 이와 관련된다.
이를 에고심리학에서 핵심인 에고의 방어기제들 (A. Freud) 에 한정하여 생각해 보자. 방어기제 때문에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에고와 방어기제 없이 현실을 ‘그대로’ 파악하여 ‘잘’ 적응하는 에고가 있을 것이다. 에고심리학에서 정신분석의 목적은 이 방어기제(허위)에 종속된 에고를 자율성(진리)을 갖는 에고로 만드는 (또는 재발견하는) 것이다.
라캉은 진리와 허위의 이분법에 이의를 제기한다. 에고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진리와 허위를 구별할 수 없다. 에고는 ‘전체로’ misrecognition(誤認)일 따름이다. 이 점에서 미셀 푸코의 진리-권력 분석은 라캉의 정신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물론 푸코는 프로이트에서 에고심리학의 관계를 왜곡 또는 배신이 아니라 논리적 귀결로 보는 것 같다. 그래서 푸코는 정신분석학 전체가 진리와 허위에 기반하여 인간을 통제하는 새로운 공학이라고 비판한다. (이 점은 아마도 라캉과 푸코-들뢰즈-가타리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할 것이다.)
이 짧은 논문에서 라캉은 “의식은 무엇인가” 하는 결정적인 질문을 던지고 자신의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라캉은 플라톤에서 데카르트와 흄과 칸트를 거쳐 훗설과 사르트르에 이르고 있는 ‘의식의 철학’과 맞서는 자리에 프로이트를 놓는다. 라캉에 의하면 칼 융과 에고심리학은 다른 우회로를 돌아서 다시 ‘의식의 철학’이 된다. 이는 프로이트의 반(反)-의식의 철학을 심대하게 왜곡하는 것이다. 따라서 ‘프로이트로 돌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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