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의미의 공간
  • 자연과 인간
서양철학

라캉을 만나다 10

by 8866 2008. 11. 3.

라캉을 만나다  10

[에크리]를 통해 라캉을 만난다

글쓴이: 한살림 http://cafe.daum.net/9876/3Mhq/18

 

초기 논문에 있어 정신분석학적 대상(object)

 

(독서노트의 효용은 무엇일까? 대개 독서 노트는 지극히 사적인 목적에서 작성된다. 텍스트를 이해하려는 몸부림의 기록이거나 후에 쓰여질 글을 위한 자료를 모은다는 의도를 갖는다. 그래서 노트에는 독서자의 좌절과 욕망이 비교적 솔직하게 드러난다. 이 노트들은 원래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줄 목적으로 쓰여지지 않는다. 그런데 글이 컴퓨터 파일로 저장되고 인터넷이라는 공간에 출판하는 것이 지극히 용이한 시대에 사적인 노트들이 공적으로 공유되기도 한다. 다행한 일은 인터넷이 공개된 공간이기는 하지만 나처럼 유명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사적인 토론이 가능한 곳이 된다. 그렇다고 하여 이 공간에 공개된 글들이 친구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토론처럼 책임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다. 인터넷에 유통되는 정보들은 언제나 글을 쓰는 사람에게 책임을 지도록 강요할 수 있다. 이메일을 통해 ‘민감한’ 이야기를 나누어서는 안된다는 것은 이제 상식이 되고 있다. 기록되어 공개된 글들은 날카로운 시선을 피할 수 없다. 벌써 몇 년에 걸쳐 이런 저런 글들을 비평고원에 올렸다. 나는 얼마의 무게를 느끼면서 이런 글들을 올리는 것일까? 비록 가명 뒤에 숨기는 하였지만 나의 글임에는 분명하기에 누군가 나에게 책임을 강요한다면 고스란히 짊어져야 함을 안다. 삶과 사유의 고결과 일관성을 중히 여기는 사람은 우울과 고독의 무게를 견디면서 아무 글이나 올리는 것을 자제할 것이다. 삶과 사유를 하나로 사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가릴만큼 가리고 잘 가공하여 보여주는 기술이 필요하다. 그런데 나는 내 목소리를 듣는 사람이 있다는 확인에서 느끼는 위안 때문에 아무 글이나 올리고 만다. )

 

라캉은 <Beyond the “Reality Principle”>을 1936년 8월에서 10월에 썼다고 말한다. 그는 그해 8월 제14 차 국제정신분석학회 모임에서 ‘거울 단계’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였다. [에크리]에 수록된 거울 단계에 대한 논문은 1949년 재차 발표된 것이다. 그래서 <Beyond…>는 정신분석학에 대한 라캉의 초기 사유를 가늠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논문이다. [에크리]에서 연대기적으로 이 논문 다음으로 오래된 것은 1945년에 쓰여졌다. 라캉처럼 열심히 읽고 사고하는 사람에게 십년은 상당한 세월이다. 이 사이에 라캉의 사유가 어떻게 전진하였는지를 추적하는 일은 라캉 ‘전문가’에게는 중요할 것이다. 라캉의 사유를 이해하기 위해 버벅거리는 입장에서 노트를 적고 있는 나에게는 <Beyond…>만으로 벅차다.

 

이 짧은 논문을 관통하고 있는 핵심어는 image (心想)이다. 문득 ‘심상’이라는 말보다는 ‘이미지’라는 말이 훨씬 자연스러운 시대를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런데 이미지라는 말은 너무나도 다양한 방식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래서 이제는 낯설은 ‘심상’이 image의 번역어로는 더 적절해 보인다. 심상은 정신분석학의 전문용어로는 대상(object)을 의미한다. 내 생각으로는 대상이 무엇인가를 파악하는 일이 정신분석학을 이해하는 관건이다.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대상은 클라인의 말을 빌면 “내적 대상 (internal object)”이니 심상이다. 클라인은 1928년에 정신분석학의 역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논문인 <Early Stages of the Oedipus Complex>를 발표하였고 영국에서 대상관계이론이라는 학파를 개창하였다. 라캉은 이 학파의 이론을 잘 알고 있었던 점을 감안하면 그가 <Beyond…>에서 대상 대신에 심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음은 흥미있다. 라캉은 이 논문에서 정신분석학을 경험론적 연상주의에 대조하여 고찰하고 있기 때문에, 대상보다는 심상이 훨씬 자연스럽게 담론의 장(場)을 연다.

 

연상주의(associationism)은 로크나 흄 등의 경험론에 기초한다. 흄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All the perceptions of the human mind resolve themselves into two distinct kinds, which I shall call impressions and ideas. (모든 심상은 두 종류로 구별할 수 있는데, 나는 인상들과 이념들이라고 부를 것이다.)” ([인간본성론], Book 1, Part 1, Section 1). 흄 등에 따르면 심상을 배열하고 종합하는 등등에 의해 복잡한 지식들이 구축된다. 라캉은 논문의 초두에서 경험론을 격하게 비판하고 있다.

 

그러면 라캉이 주장하고 있는 심상론을 살펴보자. 라캉의 말을 직접 인용하면, “Let us now consider the problems of the image. The latter, which is no doubt the most import!ant phenomenon in psychology due to the wealth of concrete data we have about it, is also import!ant due to the complexity of its function, a complexity that one cannot attempt to encompass with a single term, unless it is with that of ‘information function’” (영역본 p.62; 불어본 p.77).

 

여기서 라캉은 심상을 경험론보다 훨씬 좁은 의미로 사용한다. 편이상 특권적 심상이라고 부를 수 있다. 대부분의 정신분석학의 사유는 대상이라고 부르는 특권적 심상의 존재에 동의한다. 라캉의 사유의 발전은 심상론 또는 대상론을 중심으로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소타자’니 ‘대타자’니 하는 용어들을 일괄하여 특권적 심상으로서의 대상이라고 할 수 있다.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심상 또는 대상은 경험론이 말하는 복합관념이 아니다. 다시 말하?심상은 단편적인 감각 정보들을 일반화함으로써 나타나는 명목론적 명칭이 아니다. 편이상 ‘아버지’라고 불리는 정신분석학의 대상은 “정보 기능(information function)”으로 환원된 ‘아이를 갖고 있는 남자’ 등등과는 다르다. 이 경우에 우리는 심상이 기호(sign)이 아니라 상징(symbol)임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외부 대상을 정확하게 지칭하기 위해서 기호가 만들어진다면, 인간의 복잡한 마음 세계를 표현하기 위하여 상징이 나타난다.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말은 상징이 갖는 의미와 감정의 풍부함을 잘 파악하고 있다. 정신분석학은 기호가 아니라 상징을 다룬다.

 

(일반적으로 정신분석학의 대상은 아이가 생후 6개월에서 18개월 사이에 부모와 갖는 관계에서 형성된다. 프로이트는 3세에서 5세 사이에 대상이 아이의 마음에 정착된다고 말하지만 현대의 정신분석학자들은 클라인이 제시한 6개월-18개월설을 지지한다. 이 차이는 단순히 대상의 문제만은 아니다. 프로이트에게 있어 가장 특권적 대상은 아버지인데 비하여 클라인에게 있어서는 어머니가 된다. 나는 개인적으로 클라인의 입장에 동조한다. 어머니가 아이를 최초로 양육하는 사람인 한에서 사람의 삶에서 어머니가 차지하는 역할은 결정적이다. 대상에 대해 프로이트와는 매우 다른 입장들이 있으며 나는 그 중의 하나를 따른다.)

 

여기서는 프로이트의 이론만 간략하게 논의한다. ‘남자’ 아이가 태어나면 서너 살에 이를 때까지 그는 어머니와 공서적 합일 (symbiosis)의 상태에 놓여 있다. (여자 아이는? 이는 정신분석학에서 매우 복잡한 문제를 야기한다.) 아이와 어머니는 여전히 정신적 탯줄로 연결되어 있어 다른 개체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다. 서너 살이 되면 아이는 문득 어머니와 독립된 존재라는 것을 알면서 어머니에 대해 강렬한 성욕 (incest lust)을 경험한다고 한다. 아이가 성욕을 느끼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인데 핵가족의 상황에서 아이의 첫번째 성적 대상이 어머니가 되는 것도 당연하다. 어머니는 아이에게 있어서 원형적 성적 대상이 된다. 이 대상에 비하여 볼 때 다른 모든 대상들은 흐릿한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이와 관련하여 여성에 대한 플라톤의 이론이나 융의 이론은 흥미있는 주제이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먹고 살기 위한 노동이라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사람의 모든 활동은 성욕을 중심으로 움직인다. 과장하여 말하면, 모든 성생활은 어머니를 전유하기 위한 활동으로 환원된다. 가령 고고학자의 활동이란 무엇인가? 이들에게 있어서 땅 속에 깊이 묻힌 보물은 무의식에 있어서 어머니이다. 등등.

 

그런데 아이가 어머니를 처음으로 성적 대상으로 파악하는 것과 동시에 아이는 아버지의 존재를 발견한다. 아이에게 아버지는 누구인가? 후기 프로이트에게 있어서 아버지는 보호자의 역할도 담당하게 되지만 기본적으로는 ‘거세하는 공격자’라는 대상이다. 즉 아이는 어머니를 향한 성욕을 좌절시키는 사람으로 아버지를 파악한다. 아이는 어머니에 대한 성욕을 노출하는 경우에 아버지에 의해 거세될 것이라는 공포 (castration fear)를 느낀다. 아이는 어머니의 ‘거세된’ 성기를 목도함으로써 이 공포는 현실일 수 있음을 안다. 이 시절에 아이는 어머니에 대한 성욕과 아버지에 대한 공포를 동시에 경험하면서 지옥같은 한 시절을 보낸다. 이를 프로이트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고 부른다. 모든 남자아이들이 이 경험을 한다. 프로이트에게 있어서 정상과 비정상이 갈라지는 지점은 여기이다.

 

아이는 아버지와의 동일시(identification)을 통해 어머니에 대한 성욕을 효과적으로 억압함으로써 '정상적인' 남자가 된다. 아버지는 아이의 마음에 수퍼에고로 구조화된다. 아이의 마음에는 원형적 성적 대상으로서의 어머니와 원형적 거세자로서의 아버지가 특권적 심상(대상)으로 자리잡는다.

 

이후로 남자 아이가 갖는 모든 성경험은 본질에 있어서 근친상간이다. 가령 나이가 든 남자가 어떤 여자를 만난 경우에 이 여자는 불완전하게나마 어머니를 대신한다. 그러면 그가 이 여자와 성관계를 가지려고 할 때 그녀는 어머니이기에 필연적으로 내면에 존재하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내면에 대상으로 존재하는 아버지가 허락하지 않을 경우에 성관계는 성공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이 점에서 오이디푸스기는 아이가 (성)관계와 관련하여 허용되는 것과 금지되는 것을 경험적으로 습득하는 시기이다. 아이(남자)에게 아버지의 금지가 너무 심각하거나 너무 느슨한 경우에 자연스러운 (성)관계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프로이트에 있어 아이-어머니-아버지의 삼자관계는 인생 전체에 걸쳐 ‘거의 변화없이’ 반복된다. 치료로서의 정신분석은 이 삼자관계를 정상적인 형태로 재조직하는 데 목적이 있다.

 

<Beyond …>에만 집중하면, 라캉의 사유는 프로이트의 대상론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라캉의 말을 인용하면, “Its therapeutic action, on the contrary, must be essentially defined as a twofold movement through which the image, which is at first diffuse and broken, is progressively assimilated with reality, in order to be progressively dissimilated from reality, that is, restored to its proper reality” (영역본 p. 69; 불어본 p. 85).

 

여기서 현실(reality)은 남자에게 있어서 성생활이 이루어지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현실은 어머니이면서 동시에 어머니가 아닌 것으로 파악되는 경우에만 남자에게 ‘만족스러운’ 성경험의 장(場)이 된다. 현실이 ‘전적으로’ 어머니로 파악되는 경우에 아버지에 개입으로 성관계는 전연 불가능해진다. 따라서 정신분석은 주체에게 현실이 어머니와 동일한 것은 아님을 믿게 만든다.

 

반면에 현실이 ‘전적으로’ 어머니가 아닌 것으로 인식하는 주체는 그 현실에 대해 성적인 관심(libido cathexis)를 가질 이유를 느끼지 못한다. 이 경우 주체는 거의 불가능한 억압으로 자신의 성욕(=생명에너지)과 단절된 삶을 산다. 따라서 정신분석은 주체에게 현실이 어머니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믿게 만든다.

 

이 두 과정에 긴밀하게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대상이 거세하는 동시에 추인하는 아버지이다. 주체에게 있어서 아버지가 전적으로 거세자인 경우나 아버지가 전적으로 추인자인 경우에 소위 증상들이 나타난다. ‘전적으로’ 거세자인 경우에 주체에게 있어 성생활은 불가능하다. 전적으로 추인자인 경우에는 주체는 근친상간의 현실적 가능성에 대한 불안에 시달린다.

 

정신분석가는 주체가 어떤 아버지를 가지고 있는가를 정신분석의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전이현상(transference)을 통해 알게 된다. 다시 말하면 주체는 정신분석가를 아버지의 자리에 놓는다. 정신분석가는 새로운 형태로 변주되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분석함으로써 정신분석적 주체를 ‘정상적으로 기능하는’ 남자로 변모시킨다.

 

이 과정을 라캉은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Let us simply say that, as the subject pursues his analysis and the lived process in which the image is reconstituted, his behavior stops mimicking the image’s suggestion, his memories reassume their real destiny, and the analyst sees his own power decline, having been rendered useless by the demise of the symptoms and the completion of the personality” (영역본 p.68; 불어본 p.85).

 

라캉이 언급하고 있는 정신분석가의 힘 (“his own power”)은 주체에 의해 분석가가 특권적 심상인 대상이 되는 전이관계에서 나온다. 주체는 정신분석가를 ‘아버지’와 중첩시키면서 그가 오이디푸스 시기에 경험한 것들을 반복할 것이다. 만약 정신분석가가 주체의 아버지라면 그가 발휘하는 무소불위의 힘은 당연한 것이다. 정신분석이 진전됨에 따라 점차적으로 이 전이관계가 해소되면서 정신분석가의 힘도 약화된다(“decline”). 전이관계의 해소는 주체가 정신분석의 주체(환자)에서 벗어나서 대부분의 사람들과 비슷한 방식으로 대인관계를 맺을 수 있는 심리구조를 가졌다는 증거가 된다. 이로써 전통적인 정신분석은 종료된다. 라캉은 이를 “증상의 해소와 인격의 완결”로 요약하고 있다.

 

'서양철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라캉을 만나다 12  (0) 2008.11.25
라캉을 만나다 11  (0) 2008.11.19
라캉을 만나다 9  (0) 2008.10.27
라캉을 만나다 8  (0) 2008.10.22
라캉을 만나다 7  (0) 2008.10.16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