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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철학

라캉을 만나다 13

by 8866 2008. 12. 13.

 

라캉을 만나다 13

[에크리]를 통해 라캉을 만난다

글쓴이: 한살림

http://cafe.daum.net/9876/3Mhq/24

 

공격성, 하워드 진과 바디우와 라캉

 

우연한 기회에 구입한 하워드 진( Howrad Zinn)의 Passionate Declarations를 읽었다. 1990년에 Declaration of Independence로 출간된 것인데 2003년에 제목을 바꾸어 짧은 “서문”과 함께 재출간되었다. 한글로도 오래전에 번역되었는데 확인해 보니 [오만한 제국]이라는 제목?달고 있다. 이 제목은 우리들의 시각에서는 보다 적절한 것일는지 모르지만 진의 진심을 오도하는 면이 있다.

 

원저의 청중은 명백히 미국인들이다. 하워드 진이라는 ‘양심적인’ 미국인이 동료 미국인들의 각성을 촉구하고 있다. 하워드 진은 ‘미국을 사랑한다’는 전제에서 이 에세이들을 쓰고 있다. 그런데 ‘오만한 제국’이라는 제목은 마치 식민지의 한 지식인이 제국을 향해 격렬히 항의하는 느낌을 유발한다. 미국인 Zinn씨와 한국인 모씨 사이에 명백하게 놓인 간극이 지워진다. 유창한 Zinn씨가 벙어리 모씨를 대변하고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기도 한다. 대변(representation)은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이 출간된 후 탈식민주의 논쟁에서 핵심 이슈의 하나가 되었다.

 

나는 하워드 진의 에세이 <Vioence and Human Nature> 등을 읽으면서 진한 감동을 느꼈다. 뜨거운 눈물 몇 방울도 흘렸다. 이 글들이 나에게 감동을 준 것은 그의 미국 비판이 적절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폭력으로 얼룩진 사회를 살아가야 하는 한 지식인의 고통스러운 자기 반성의 글이었기 때문이다. 진은 폭력과 파괴의 일상을 살아가면서도 사람 – 극적으로?자신-을 신뢰할 수 있는가를 솔직하게 모색하고 있다. 진은 마키아벨리즘이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는 미국에 어떤 희망이 있는가를 묻는다.

 

최근에 읽은 바디우의 Polemics (Verso 2006)에 실린 짧은 “서문”이 즉시 떠오른다. 철학적 상황(philosophical situation)이란 무엇인가? 바디우에 따르면 철학이란 권력에 맞서 진리를 드러내는 활동이다. 바디우는 말한다. “Philosophy is not worth an hour’s effort if it is not committed to the fact: the true life be present.As Regards circumstances, true life is presented in choices, in distiances and in events.” (p. 9) 선택은 권력과 진리 사이에 이루어지며, 거리는 권력을 멀리 하는 것이며, 사건은 선택의 결과가 현실로 드러나는 것이다. 사건은 진리가 권력의 지배 밖에 있다는 것을 확신하면서 이를 고집하다가 권력에 의해 살해되는 순간에 극명하게 나타난다. 바디우는 이를 패배라고 하지 않고 새로운 정치/사랑/예술/과학의 창조라고 부른다. 바디우는 플라톤의 대화편에서 권력과 맞서는 철학을 포착한다. 소크라테스.

 

철학을 압사하는 권력은 오늘날 마키아벨리즘으로 요약된다. 마키아벨리즘은 제국의 정치적 행동을 지배하고 정당화하는 논리일 뿐만 아니라 식민지들이 공유하고 있는 입장이기도 하다. “우리가 이렇게 착취당하는 것은 힘이 없어서야. 그래서 힘을 길러야 해!” 그런데 ‘오만한 제국’에 대한 비판이 마키아벨리즘에 기초하는 한에 있어서 우리를 지배하는 것은 철학이 아니라 권력이다. ‘부국강병’은 마키아벨리즘의 표현일 때가 많다.

 

우리의 삶도 마키아벨리즘에 의해 지배될 때 ‘제국’을 비판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일까? 약육강식이라는 진화론적 입장이 제국 뿐만 아니라 식민지에서도 ‘진리’로 받아들여지는 경우에 식민지 백성들의 비판이란 역사란 냉혹한 투쟁에서 패배한 자의 넋두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오만한 제국’을 짙게 물들이고 있는 마키아벨리즘을 비판할 때 우리는 어떤 철학에 기초하고 있는가를 반성하지 않을 수 없다. 적어도 바디우의 의미에서 이것이 철학하는 사람들의 임무이다.

 

바디우가 말하는 ‘철학적 상황’이 서양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이천년 이상 동양에서 플라톤의 대화편들과 비슷한 역할을 한 [맹자]는 양혜왕과 맹자의 논쟁으로 시작된다. 양혜藍?맹자를 청하여 부국강병의 묘안을 물었다. 맹자는 철학자는 인의(仁義)가 있을 뿐 이익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고 공박한다. (何必曰利.) 이 간단한 대화는 플라톤의 대화편을 관통하는 철학적 문제를 요약한다. 맹자는 목숨을 보존했지만 이는 역사의 우연 탓일 게다. 맹자는 양혜왕으로 상징되는 동양의 왕자(prince)를 위해 이데올로그로 사용될 것을 명백하게 거절한다.

 

이와 관련하여 라캉이 Michel Cenac와 공동작업으로 발표한 <A Theoretical Introduction to the Function of Psychoanalysis in Criminology>의 한 대목을 읽는다. 이 논문은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인 1950년 5월에 한 정신분석학 모임에서 발표되었다. “In the Gorgias, Socrates refutes infatuation with the Master, which is incarnated in a free man of Athens, whose limits are marked by the reality of the Slave. This form marks the shift to the free man of Wisdom, by admitting the absolute nature of Justice, he being trained in it by solely by virtue of language in the Interlocutor’s maieutic. Thus Socrates – by making the Master perceive the dialectic (which is bottomless like the Danaids’ vessel) of man’s passions for power and recognize the law of his own political being in the City’s injustice – brings him to bow before the eternal myths that express the meaning of punishment, as a way of making amends for the individual and of setting an example for the group, while he himself, in the name of the same universal, accepts this own destiny and submits in advance to the insanely harsh verdict of the City that makes him a man.” (영역본p.105; 불어본 p. 128)

 

이 문단은 쉽게 읽히지 않는다. 세번째 문장은 길다. 그렇지만 여러 번 읽어 의미를 파악할만 가치가 있는 문장이다. 바디우의 윤리학이 라캉의 사유에 정초하고 있음을 명백하게 보여준다. 라캉-바디우의 윤리학에서 철학은 마키아벨리적 군주의 이익에 봉사하는 모든 지적 활동에 맞선다. 어떤 면에서 바디우의 철학은 푸코의 진리-권력의 담론 외부에 존재한다. 이 때 라캉-바디우는 억압당하고 핍박당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이야기하지 않는다. 라캉이 Wisdom과 Justice로 부르는 것은 보편(the universal)이다. 이 보편의 자리에서 소크라테스적 철학자는 마키아벨리적 군주와 그들의 이데올로그들과 대립한다.

 

라캉-바디우의 입장에서, 하워드 진이 주목하는 것은 강대국이 약대국을 착취하는 현상이 아니다. 그가 주목하는 것은 철학적인 상황이다. 현재 마키아벨리즘은 현재 전세계를 휩쓸고 있다. 마키아벨리즘은 권력이 삶을 지배하는 한 가지 양식일 따름이다. 진은 권력이 삶을 규정하지 않는다고 항의한다. 진리가 우리를 구원한다.

 

플라톤은 철인국가를 꿈꾸었다. 예수는 하느님의 나라를 꿈꾼다. 이 꿈을 바디우는 사건(event)이라고 부른다. 사건은 결코 제도화되지 않는다. 사건은 번득이는 꿈과 이에 대한 ‘개인적’ 헌신에서 드러난다. 그런데 제국이 꿈꾸는 사람들의 삶에 깊숙히 들어올 때 이들은 오직 두 가지 선택에 직면한다. 죽음을 각오하고 제국에 맞서거나 아니면 제국의 도구가 되거나. 전두환이 광주의 학살과 더불어 권력을 잡았을 때 한국 신문들을 화려하게 장식한 ‘구국의 영웅’ 운운에서 제국/권력에 봉사하는 이데올로그들의 노골적인 모습을 발견한다. 이 신문들이 라캉-바디우적인 철학을 수행하는 역할을 한 번도 하지 않았기에 민중의 여망을 배신 운운할 수는 없으리라. 바디우는 철학을 진리-권력의 밖에다 위치함으로써 미셀 푸코나 루이 알튀세르의 절망적인 결론에 대항하여 비판의 자리를 마련한다.

 

하워드 진은 마키아벨리즘의 이데올로기로 사용되는 사회생물학과 정신분석학을 비판한다. 그의 주된 비판은 공격성을 인간 본성으로 파악하는 경향이다. 삼류 소설에 가끔 선전 문구로 등장하는 ‘살인 본능’ 따위를 말한다. 피에 굶주린 인간 등등. 하워드 진은 생물학과 심리학이 ‘공격 본능’이라는 가설을 뒷받침하기 위해 역사를 이용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여자는 원래 지성이 모자라. 왜? 지난 수천년간 훌륭한 사상가들 가운데 여자는 몇 명 안되잖아?” 유사한 궤변. 역사는 언제나 다양한 읽기를 허용한다.

 

진은 전쟁의 문제를 다룬다. 왜 사람들은 전쟁터로 나가는가? 피맛을 보기 위하여 등등. 이에 대해 진의 대답은 전쟁터에 젊은이들이 가는 이유는 그들이 갖고 있는 드라큐라적 본성 때문이 아니다. 어릴 때부터 사회와 권위에 순종하는 것이 착하다고 배운 탓에 부당한 일에도 ‘아니오!’라고 대답할 수 없어 ‘부당한’ 전쟁에 동원된다. 이 현상을 이해하는데 알튀세르의 Ideological State Apparatuses 와 호명(interpolation) 이론을 참조할 수 있다. 알튀세르는 라캉의 정신분석학에 깊이 의존한다.

 

진이 주목하는 것은 전방위에 걸친 순응교육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양심’에 따라 불이익을 감수하면서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에게 있어 역사는 이들을 발굴하여 마키아벨리즘의 오류를 비판하는 것이다. (계란으로 바위치기지만 기적이 일어나기도 할 것이다.) 마키아벨리즘이 철옹성이 아니라는 사실은 거의 모든 나라들이 청년들을 전쟁터로 내몰면서 ‘보편적인 이유들’에 기댄다는 사실이다. “인간 사냥을 떠나자”고 축제를 벌이는 경우는 거의 없다. 가령 애국애족이니 민주주의니 등등의 기치를 걸고 나간다.

 

흔히 미국에서는 미국의 국익을 훼손하는 대표적인 인물로 거론되는 하워드 진은 오직 라캉-바디우의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다. 이차 세계 대전에 미군 비행기를 몰고 독일 마을을 폭격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고 고백하는 진의 떨림이 글에 나타난다. 이 떨림 때문에 울었다. 제국이 식민지를 착취하는 일은 분명 올바르지 않다. 그러나 무엇에 기초하여 올바르지 않는가? 이라크전에서 미국 (또는 전세계)의 젊은이들과 이라크의 시민들이 매일 죽고 있는 데 도대체 이는 무엇을 위한 전쟁인가? 라캉-바디우나 진은 이를 비판함에 있어서 약자의 편에 서지 않는다. 그들은 보편에 기대어 발설한다. 이 때문에 그들은 이라크의 폭력과 함께 미국의 폭력을 동시에 비판할 수 있는 자리를 확보한다.

 

정신분석학자로서 라캉은 바디우나 지젝만큼 멀리 가지 않았다. 도처에 번득이고 있는 그의 사회철학은 오직 파편으로만 남아 있다. 그렇지만 그 파편들은 가끔 보석처럼 빛난다. 원래 라캉의 초기 논문들에 나타난 공격성에 대한 논평을 염두에 두고 시작한 글인데 너무 멀리 왔다.

 

공격성을 이해하는 첫걸음은 공격성이 성욕과 마찬가지로 인간적 현상임을 아는 것이다. 다윈의 책들과 더불어 콘라드 로렌쯔의 [On Aggression]과 사회생물학자들의 이론에 따르면 공격성은 자연적 본능이다. 음식과 영토와 교미 대상을 둘러싼 미묘한 균형은 공격성이 본능이 아니라면 설명되지 않는다고 주장된다. 맞는 말일 것이다. 그렇지만 동물의 세계에는 종족 학살이나 잔인한 폭력 등등을 ‘자연스러운 상태’에서 목격하기 어렵다. 이 점에서 인간의 공격성은 설명을 요구한다. 앞서 살펴본 진의 논문은 이에 대한 하나의 이론을 제공한다. 이제 라캉의 보다 정밀한 정신분석학적 설명을 들여다 본다.

 

라캉의 공격성에 대한 초기의 정신분석학적 이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용어들을 알아야만 한다. 동일시(identification)과 나르시시즘(narcissism)과 거울단계 (mirror stage)와 육체적 미성숙 (prematurity). 라캉에 따르면 생후 6개월 정도에 인간의 삶에 매우 중요한 일이 벌어진다. 이 시기가 되면 아이는 문득 거울 속에 비친 자기의 모습에 엄청난 흥미를 느낀다. 이와 관련하여 하필 이 시기인가를 생각해 본다. 생후 1개월이나 2개월이 아니고… 6개월 이전에는 아기들이 거울을 보면서 ‘아하!’하는 현상이 나타나지 않는다. 라캉은 이 단계를 ‘거울단계’라고 지칭한다. 참고로 클라인에 따르면 생후 6개월에서 18개월에 이르는 시기에 수퍼에고가 형성된다.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기 (3-5세경)은 이 오랜 과정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라캉의 ‘거울단계’는 이미 클라인의 정신분석학과는 구별된다. 클라인은 나르시시즘의 문제에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이 시기에 아이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어머니의 유방이었다. 아기의 환상에서 어머니는 좋은 유방과 나쁜 유방으로 갈라진다. 이것이 아기의 마음 안으로 투사되고 재투사되고…

 

그런데 라캉이 주목하는 출발점은 거울에 비친 아기 자신의 이미지이다. 거울에 비친 이미지가 아기의 내면으로 투사되면서 – 이를 동일시라고 할 수 있다 – 아기의 마음에는 에고와 이상아가 형성된다. 환상으로 완벽해진 이미지. 거울 단계를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단서가 되는 것은 이행증(transitivism)이라고 불리는 현상이다. 이는 아기가 외부에 존재하는 것들을 자신의 이미지로 파악하는 데서 나타난다. 어린 아이들 A와 B가 있다고 하자. A는B를 때린다. A는 자신이 맞았다고 운다. 이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A는 B를 자신(의 이미지)라고 생각한다. 어른이 거울을 보고 얼굴에 멍든 자국을 발견하고는 갑작스럽게 기분이 나쁘지는 것과 흡사하다. 이 순간에 그는 자신이 무엇엔가 맞았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반응한다. 아이에게는 아직 자신과 세계가 ‘적절하게’ 분리되지 않았다고 가정해 보자. 이 경우에 아이 A는 B를 자신으로 생각할 것이다. 따라서 A가 B를 때린 것은 자해일 것이다.

 

이 현상은 아이들의 관계에서만 이루어지지는 것은 아니다. 옛날 옛적 현모의 설화들에 의하면 말을 듣지 않는 아이에게 회초리를 가하는 이야기들. 때로는 어머니가 회초리로 자신의 다리를 직접 때리고 놀란 아들이 울고… 뭐 이런 이야기들. 이 이야기들에서 어머니와 아들의 동일시라는 현상이 바탕에 놓여있다.

 

거울단계의 주체는 (또는 자아는) 현단계를 속인다 (misrecognition). 이 시기에 아이는 거울에서 보는 이미지의 총체성에 걸맞는 운동성을 확보하지 못한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원래 상태는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아이라는 사실을 ‘잊고’ 자신을 ‘완벽한’ 성인으로 파악한다. 이 파악이 자리잡는 곳이 라캉이 말하는 상상계이고 이를 통해 ego가 출현한다. 따라서 ego는 엄밀하게 말하면 자신의 현 상태에 대한 부인(negation)으로 꼴을 갖춘다.

 

불완전한 육체를 지우고 자신의 완결성을 현실로 확보하려는 노력이 있을 수 있지 않는가? 공격성은 이와 관련하여 나타난다. 따라서 공격성의 형태로서 자살과 살인이란 자신의 불완전성을 환기하는 것을 제거함으로써 자신의 완결성을 확보하려는 움직임이라고 할 수 있다. 라캉이 주목하고 있는 공격성은 이 점에 있어서 나르시시즘의 현상이다.

 

이를 하인쯔 코핫의 정신분석학을 이용하여 이해해본다. (어쩌면 이는 라캉을 심하게 왜곡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인쯔 코핫은 나르시시즘의 정신분석학자이다. 그는 라캉의 용어들을 사용하지는 않지만 인간에게 중요한 영역은 나르시시즘이라고 주장한다. 나르시시즘과 관련하여 상처를 입는 경우에는 영원히 잊을 수 없다. 흔히 대를 이어가면서 이루어지는 복수 등등은 이와 관련된다. 엄밀히 공격성이란 나르시시즘에 가하는 공격이다. 아버지에 대한 복수.. 이는 아들이 아버지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아버지가 입은 피해를 자신의 피해로 파악하는 일에서 가능하다. 그래서 코핫은 공격성을 “자기애적 분노 (naricsisstic rage)”라고 부른다. “자존심이 상했다.” 그런데 자존심의 상처를 아무에게서나 입지는 않는다. 많은 경우에 나 자신에 있는 무엇인가를 외부로 투사하고 이 투사된 대상이 다시 나에게 상처를 입힌다. 이를 축약하면 내가 나 자신에게 상처를 입히는 셈이다.

 

이는 크리스테바의 에브젝트(abject)라는 클라인주의적 현상을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간단히 내가 이해한 바를 정리한다. 에브젝트는 원래 나 자신의 안에 있는 것이다. 클라인의 용어로 사용하면 ‘나쁜 유방’이 내면화된 것이다. 그런데 이는 나 자신에게도 견딜 수 없기에 해소해야만 한다. 아무에게나 해소되는 것이 아니다. 나의 에브젝트를 환기하는 것들 (가령 유태인 흑인 여성 등등)을 ‘사악한 것’으로 파악한다. 외부에 존재하는 것을 제거하고자 폭력을 가한다. 에브젝트는 강자가 약자에게 가하는 보편적인 사디즘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를 라캉의 용어를 빌면 ‘죽음의 본능’이다. 아직 이 시절에 라캉의 이론은 이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이론상의 정밀함을 획득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라캉이 거울단계를 통해 주체와 이미지의 관계를 파악하는 것은 중요할 것이다. 자살적 충동과 타살적 충동은 동전의 양면이다. 이는 현실을 지우고 이미지에 충성라려는 활동이다. 이미지에 비해서 우리는 불완전하다. 그렇다면 이 불완전은 잊혀져야만 한다. 이 드라마를 해결함으로써 -이는 단순히 부인이나 억압과는 다르다 - 인간은 ‘정상적인’ 인간으로 나타난다.

 

(중구난방인 대로 글을 올린다. 라캉의 이론을 파악하려는 노력이라는 의미에서만 이런 글들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를 이해하기 위한 버벅거림. 라캉을 이해하는 사람들은 결국에는 직접 버벅거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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