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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 들뢰즈의 철학을 요약할 수 있는 네 가지 공식 ( 2003/12/06 )
* 글쓴이 : 르네 쉐레(René Schérer) . 1996년 4월 13일
* 출 처 : Angelaki 2(3) (1996) : 173-177. 이 글은 René Schérer, Regards sur Deleuze, Paris: kimé, 1998에 재수록되어 있다.
* 옮긴이 : 김상운(sanggels@freechal.com)
* 철학자 질 들뢰즈는 1925년 1월 18일 파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69년부터 1988년까지 파리8대학인 벵센느/생드니에서 철학을 가르쳤다. 불치병은 1995년 11월 4일, 그의 생명을 스토아적으로 끝내게 만들었다. 미셸 푸코가 "천둥번개를 동반한 폭풍[fulguration]"이라고 규정했던 그의 철학은 사유의 전통적인 습관과 이미지를 뒤흔들었다. {차이와 반복}(1968), {의미의 논리}(1969), 이후 펠릭스 가타리와 함께 쓴 {안티 오이디푸스}(1972)와 {천 개의 고원}(1980)은 모든 세대들에게 강렬한 영감을 불어 넣어주었다. {철학이란 무엇인가?}(1991)는 이러한 혁명적 저작 중에서 최고의 것이다.
1. 내재성이란 무엇인가? 삶...
- Gilles Deleuze, "L'immanence: Une Vie..."
이것은 포괄적인 공식이다. 이것은 질 들뢰즈의 사유 대상과 적용 분야와는 무관하게 그의 사유가 지닌 구도(design)와 정향(orientation)을 제공하는 공식이다. 생각한다는 것은 내재성을 성취한다는 것, 내재성의 평면을 구성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존재들 사이에는 어떠한 위계도 없고 원래적인 원칙도, 신도 없다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모든 것은 똑같은 수준에서, 똑같은 평면 위에서 동등한 존엄성을 가지고 있다 ― 인간은 물론이고 동물, 식물, 사물도 그렇다. 어떠한 위계질서도 없고, 이해관계와 의미화(significance)에 있어서, 그리고 중요도에 있어서 차이만이 있을 뿐이다. 전투를 관찰할 때보다 곤충, 진드기를 관찰할 때 더 많은 의미가 있을 수 있으며, 모든 것은 사유의 내재성의 장에서 펼쳐진다. 우리는 아주 많은 장애물처럼 내재성의 장에 홈을 내고 그로부터 솟아 나오는 초월의 착각에 의해 멈추어지지 않고서도 그것을 가로질러가는 방법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들뢰즈와 같은 사상가에게 존재는 일의적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우월한 것도 열등한 것도 없으며 유비에 의한 존재도 없고 심지어 분리되어 있는 실체도 없으며 단지 사건들만이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존재의 장 위에서 주름이 잡혀지는, 주름을 잡는 사건만이, 표면 효과만이 있다.
들뢰즈의 철학은 이러한 긍정 때문에, 내재성에 대한 이러한 계속적인 주장 때문에, 그리고 지배를 갈망하고 존재의 장을 소유하고자 갈망하는 ― 무엇보다도 두드러지는 것은 의식, 주체, 기표이다 ― 모든 초월에 반대하기 때문에 현대철학에서 쉽게 식별할 수 있는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내재성의 긍정은 단순한 승인이 아니다. 그것은 개척정신, 믿음, 제도, 그리고 모든 종류의 권력을 무너뜨리는 행위(act)이며, 사물들을 체념하여 받아들이는 것에 반대하는 저항과 혁명의 행위이다.
들뢰즈는 실체로부터 내재성을 분리할 때를 제외하고는 스피노자의 계보[유산]을 강조한다. 스피노자는 "아무 것에도 내재하지 않는 내재성", 순수 내재성을 발명하고 이것을 삶과 동일시한다. "순수 내재성에 관하여 그것은 하나의 삶(A Life)이라고 말해질 것이다." 이것은 들뢰즈의 사유를, "생의 철학", 즉 Lebensphilosophie로 만드는 것일까? 한가지 의미에서는 그렇다. 하지만 우리는 이 점을 분명하게 해야만 한다. 그것은 니체 이후의 모든 위대한 현대철학들이 그러하듯이, 베르크손의 철학에서 후설과 사르트르의 철학에 이르기까지, 생철학이라는 제목으로 집결된다. 이 모든 경우에서, 문제로 되는 것은 실제로는 생명이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나타나는, 우리가 그것을 궁지에 내몰게 하는 의식의 작은 영역의 관점으로부터 이해된 생명이다. 의식의 생명, 산 것. 니체의 철학은 예외로, 들뢰즈는 생명을 의식으로 환원하는 것을 거부하고, 또한 이것을 넘어서서 개인, 주체, 인간으로 환원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을 스피노자는 물론이고 니체와 연결시킨다.
들뢰즈는 前-주체적이고 비-주체적인, 前-유기적이고 비-유기적인, 前-개체적이고 비-개체적인 생명을 통해서 사유한다. 그는 그것을 사물, 형식, 추상화로 확장한다 : "추상적인 선분"의 생명.
내재성과 생명은 주권적 주체(초월)도, 인격(persons)도, 유기적인 개체성도 알지 못하며 오로지 사건들, 단독성들[특이성들], "이것임(haecceities)"만을 안다. 이것을 넘어서는 세계는 없다. 소위 "깊이"와 강렬도들. 내재성의 장, 표면은 긴장[장력, tension]에 의해 가로질러지며, 입자들에 의해 거주된다(populated). 들뢰즈는 주체의 표면과 객관적 세계에 집중된 사유의 이미지를 제거한다. 그는 주체/객체 대립을 넘어서며, 그가 활력없고 비생산적이라고 생각한 현상학적 철학의 확실성으로 나아간다. 일격에 이미지를 깨뜨리면서 들뢰즈는 주체의 도달범위와 그 환원을 넘어서, 이것들을 생명의 내재적 흐름으로 내던지면서 인상, 사건, 이미지 자체로 (영사기의 이미지로 생각된 이미지) 움직여간다. 그는 그것을 근본적 경험론, "초월론적(transcendental) 경험론"라고 불렀다. 왜냐하면 그것은 주체의 초월, 객체의 초월 등 모든 초월을 탈피하는 장에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지를 파괴하며 봄과 말의 신선함을 회복한다. 지배적인 주체가 없이 모든 것은 재집결되고 보충되었으며, 모든 것은 내재성과 생명으로 가득 차 있다.
2. 욕망은 주체 안에 없으며 기계가 욕망에 있다.
- Gilles Deleuze와 Felix Guattari, Anti-Oedipus 285
이것은 욕망의 공식이다. ― 펠릭스 가타리와 공동으로 쓴 그의 철학의 일부분이다. 이 공식은 비-전문가적 청중들을 직접적으로 변용(affect)시키며[영향을 미치며], 일상의 삶과 습관에서도 역시 발견된다. 1970년대부터 들뢰즈의 철학은 사라들에게 욕망의 사유와 욕망의 정치학으로 제시되었다. 해석으로서일 뿐만 아니라 정치학으로서도. 이것이 그의 독창성, 예외성이 놓여 있는 지점이다. 당시에, 현대철학은 욕망을 둘러싼 모든 것을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의 손아귀에서 처리해 왔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욕망을 이것으로부터 떼어냈다. 이들은 철학에 욕망을 말할 수 있는, 다르게 말할 수 있는 권리를 주었다. 욕망에 재갈을 물리거나 중성화시키거나 또는 욕망을 소규모 핵가족의 가족 내부적 극장에 가두는 것이 아니라 욕망을 생산으로, 개체와 집단을 연결접속하는 힘으로 다루는 것이다.
{안티 오이디푸스}는 욕망에 관한 책이다. 욕망이 지닌 특성은 ― 욕망이 가지고 있는 생산성을 별도로 하면 ― 욕망이 해석의 관할구역에 속하지 않으며 결여로 이해될 수도 없다는 것이다.
해석은 욕망을 있는 그대로의 것이 아닌 것으로 환원시키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욕망이 긍정하는 것의 특정성(specificity)을 오인한다. 이에 대한 가장 명료하고 불변적인 예는 (동물, 친구, 거리 등등의) 외부를 향하도록 되어 있는 욕망으로서 표현된 어린아이의 욕망이 아버지나 어머니에 관한 가족내부적 고착화로 전환되는 것이다. (이는 프로이트, 클라인, 후대의 계승자들이 연구했던 것이다.) 욕망에 관한 들뢰즈의 사유의 실타래는 그의 전체 작업을 관통한다. 프로이트적 정신분석학은 원래의 운동에서 떼내어진다. 욕망을 파괴하고 거세하고 마침내 욕망을 더 이상 사유될 수 없는 죽음에 종속시킬 때까지 계속해서 욕망을 드러낸다. -- 죽음 자체를 욕망으로, 또는 정신내부적 욕구로 인식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될 때까지. 들뢰즈는 죽음을 사유했으며, 죽음을 그의 철학에 통합시켰다. 하지만 스토아적 성향에서 도으이로서, 자유로운 결정으로서 생명의 사랑은 죽음을 수용하는 지점으로까지 나아간다.
욕망에는 배타적인 인격주의적 고착화도 부정성도 없다. 바로 이 때문에 욕망을 결여로 정의내리는 것은 쓸모없는 것이며, 아무런 중요성도 지니지 않은 진부한 말일 뿐이다. 욕망은 새로운 결합으로, 존재자와 사물의 공생으로, 상이한 체제들(regimes)로 생산적으로 나아간다. 타자를 향한 이러한 이동이 되기이다. 여성-되기, 아이-되기, 동물-되기, 식물-되기, 요소들로 해체되기, 지각불가능하게 되기. 욕망에 의해 생산된, 그리고 욕망을 정의할 수 있는 그러한 결합이 배치이다. 배치, 되기, 욕망은 하나의 동일한 실재를 지닌 것의 다양한 측면이며, 상이한 각도나 관점에서 본 측면이다. 욕망은 결코 배치없이는 지낼 수 없다. 욕망과 욕망의 배치가 정확한 공식이다.
배치는 기계적 욕망(ce que le desir machine), 혹은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 현실화에 있어서 "욕망하는 기계(desiring machine)"이다. "욕망하는 기계"라는 표현은 실제로는 이해가 되지만 또한 오해를 낳고 있다. 이것은 인간 존재를 기계로 환원하거나 생명을 기계로 환원하는 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이것든 단독적[특이한] 배치들에 의해서 영원히 새롭게 생산된, 참된 개체적 생명[삶]과 집단적 생명[삶]을 가리킨다. 배치되는 것은 인격(person)이 아니라 단독적[특이한] 특징들, 생성을 생산하는 특징들(features)이다. 수천가지 예 중에서 한 가지 예 : 점잖은 사랑, 기사도의 우화, 남성과 말, 남성과 등자(stirrup), 남성과 전투, 남성과 성적인 것, 남성과 여성의 배치/생성의 결실.
정신분석학의 속박에서 풀려난 욕망은 모든 지점에서 성의 사소한 비밀, 동일화, 구조, 제한을 초과한다. 그것은 생성을, 배치의 선들을, 특히 삶의 의미를 담지하고 있으며, 삶에 의미를 주는 그러한 배치들과 생성들을 발명함으로써 모든 방향으로 활성화시킨다 : "언표행위의 집단적 배치", 즉 문학.
3. 우리는 항상 삶에 어떤 것을 부여하는, 삶을 덫에서 자유롭게 하고, 탈주선을 추적해가는 글쓰기를 한다
-- Gilles Deleuze, "철학에 관하여"
어떤 방식으로는, 들뢰즈의 전체 작업은 글쓰기 이론, 문학이론, 특히 영미문학이론으로 여겨질 수 있다. 프루스트, 아르토, 클라이스트, 도스토예프스키 등을 길게 연구하고 언급하면서, 이들 중에서 어느 누구도 배제하지 않고, {대화}의 한 장을 "영미문학의 우수함에 관하여"라고 부른다. 그는 특히 프랑스 문학과 관련지어 볼 때, 영미문학을 심리주의(psychologism)와 도덕주의, 주체와 인격(person)을 제거할 수 있는 유일한 것으로, 그 자신을 넘어서는 어떠한 정당화도 필요로 하지 않은 삶, 자기 충족적인 삶에 새로운 표현을 제공할 수 있는 유일한 것으로 여긴다.
들뢰즈에게 문학은 참고(reference)이자 원천이다. 그는 프로이트보다는 D.H.로렌스, 헨리 밀러, 자허-마조흐에서 많은 것을 끌어온다. 왜냐하면 이들은 "섹슈얼리티에 대한 더욱 정확한 가치평가"를 하기 때문이다.({안티 오이디푸스} 292쪽). 버지니아 울프나 샤를로뜨 브롱떼(Charlotte Bronte)에게서 인용한 구절은 "주체의 분산(dispersion)", "유물론적 단독성들[특이성들]", 입자들의 산종(dissemination), 그리고 욕망을 구성하는 분자들, 무의식적 기계들, "분자적" 기계들에 관한 개념화를 분명하게 한다. 물리적 자연에 토대를 둔 것에 덧붙여, 이것들은 글쓰기에 상응한다. 글쓰기는, 그 가변적인(volatile) 기호의 배치에서 사건의 비물체성(incorporeality)을 포획하고 표현한다. 글쓰기는 "몰적인" 것을 벗어난 단독성들[특이성들]을 포획하고 성취한다 ― "몰적인 것"은 일상의 발화가 사물의 실재성으로서 전달하는 객체와 존재자들(entities)의 대량적인 형성체이다. 단독성들[특이성들], 이것임만이 중요하다. 작가는 글자 그대로 받아들여져야만 한다. 그는 삶에 일치하는 예술[기예, art]을 안다. 왜냐하면 그는 소위 "탈주선"이라고 불리우는, 스스로 전념하는 선을 따르는 생성의 비밀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 하지만 상상적인 것[상상계]으로 도주함으로써 세계를 비현실화하기 때문에 공고한 정체성들[동일성들]의 경로를 넘어서서 변신(metamorphoses)의 경로에 헌신하는 방법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글쓰기는 생성과 분리할 수 없다." ... 생성은 어린이-되기, 여성-되기, 동물-되기이지 결코 남성-되기가 아니다. 반대로 "남성이라는 것을 부끄러워함"이 작가로 하여금 탈주선에, 살아 있는 것을 가치있게 만드는 삶의 추구에 헌신하게 한다. 글쓰기는 결코 자기자신의 목표가 아니다. "글쓰기의 유일한 목표(fin)는, 글쓰기가 끌어들이는 조합을 통한 삶이다."
정신의학, 도덕, 여론, 국가와 관련해서 작가는 "임상(clinical)"이라는 표제로 이것들을 끌어들인다. 내재성의 철학자가 필연적으로 아나키스트, 혁명가이듯이, 작가는 정신병자, 분열증자이다. 비평적인 것과 임상적인 것 ― 들뢰즈는 프로이트적 정신분석학과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적 정신분석학의 이러한 설명(후자는 전자를 너무 충실하게 따른다)이 실패한 것에 대한 반응으로 두 가지를 결합시키려고 했다. 들뢰즈는 해석이나 기표작용 없이, 철학이 자신의 개념을 구성하기 위해서 파악해야만 하는, 삶의 전례없는 경험, 열린 윤곽, 추상적이고 "고딕풍의" 유목적인 선과 같은 어떤 것을 위한 교훈을 생성에서(멜빌의 {모비딕}에서처럼 그 중에서 동물-되기는 종종 패러다임적이다), 그것들의 선에서 발견한다.
4. 판사보다는 길거리 청소부가 되는 것이 더 낫다
-- Gilles Deleuze, Dialogue 8
내가 쉽사리 채택할 수 있는 마지막 공식은 철학의 공식 자체이다. 철학은 그 단독성[특이성]에 있어서 다른 분과학문과 관련되며, 그 궁극적인 의미에 있어서 삶과 지배에 관련된다.
철학의 특정성은 개념에 놓여 있다. 개념은 반성과 일반화의 질서가 아니라 사건과 구성의 질서... 창조의 질서에 속한다. 개념은 사건에, 개념이 선언하는 도래할-사건에 윤곽(contour)을 제시한다. 사건들의 윤곽으로서, 따라서 선으로서의 개념 -- 배치의 선, 연구의 선, 논쟁적 무기의 선, 전쟁무기의 선. 가장 좋은 예의 하나가 주름(fold)이다. 주름은 세계가 세계를 표현하는 모나드로 말려지거나 주름잡히는 방식을 정의하거나 계보를 그리는 것이다. 욕망의 비유기적[비기관적] 삶을 표현하는 "기관들 없는 신체"는 앙토넹 아르토에게서 빌려온 개념이다. 얼굴의 전제적 기계(얼굴의 공포-효과)에서 봄(the look)의 초월을 분명하게 만드는 "검은 구멍"은 천문학에서 기원하는 개념이다. "선", 추상적인 선은 기하학에 그 원천을 두고 있는 개념이다. 각각의 사례에서 들뢰즈는 바로 이러한 점을 주장한다. 즉 개념들은 은유가 아니며, 다시 말해서 이러한 "이미지들"은 "~으로서" 도입되지 않았다. 그것들은 의미되는 바를 정확하게 지칭하지만, 그 기원적 영역과는 다른 영역에서 지칭한다. 개념들은 "탈영토화"되었다.
한가지만 요약하자. 들뢰즈의 전체 철학은 바로 이 지점에서 모여진다[응축된다]. 들뢰즈는 과학, 문학, 예술에서 자의적으로가 아니라 매번 특수한 문제에 반응하기 위해서 개념들의 전체 레퍼토리의 탁월한 창조자, 걸출한 장인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러한 분과학문 사이에서 들뢰즈의 개념은 간섭(interference)의 결절점(node) 위치를, 이국적인 음악적인 선들이 교차하고 서로 공명하기 시작한 지점을 차지한다. 주목을 받는 철학자는 외부에서 온 이처럼 사유에 의해 풍부해진다. "그 모든 것은 주거나 받는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들뢰즈는 자신을 거리의 청소부로, 내재성의 평면 위에서 가공할만한 스캐너를 작동하는 사람으로 제시하는 것을 좋아했다. 국가의 권력을 향하는 소모적인 유머를 제외하면 "판사가 되기보다는 거리의 청소부가 되는 것이 낫다"는 것을 아르토, 니체, 카프카의 편에서 볼 때, 국가 모델에 기반해서 세워진 모든 철학에 대한 도전이다. 국가 모델에서 사유한다는 것은 판단한다는 것, 포함시킨다는 것, 억누른다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들뢰즈는 사랑, 삶, 창조의 공개적 투쟁을 설정한다. "비밀은 어쩌면 이것이다. 즉 판단을 통과하는 것이 아니라 실존하게 하는 것이다." 똑같은 공식의 다른 버전[판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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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쉐레의 글 제목은 Kant's Critical Philosophy : The Doctrine of the Faculties, trans. Hugh Tomlinson and Barbara Habberjam (London: Athlone, 1984), vii-xiii의 서문인 "On four poetic formulas which might summerize the Kantian philosophy(칸트의 철학을 요약할 수 있는 네 개의 시적인 공식에 관하여)"를 연상시킨다.
2) Michel Foucault, "Theatrum Philosophicum", Language, Counter-Memory, Practice : Selected Essays and Interviews, ed., Donald F. Bouchard, trans. Donald F. Bouchard and Sherry Simon (Ithaca, NY: Cornell UP, 1977), 165-196, 196.
3) Philosophie 47, Gilles Deleuze 특집호(1995년 여름), 3~7, 5.
4) Philosophie 47, 4.
5) Anti-Oedipus: Capitalism and Schizophrenia, trans. Robert Hurley, Mark Seem and Helen R. Lane (London: Athlone, 1984).
6) Raymond Bellour and Francois Ewald, Negotiations, 1972-1990, Gilles Deleuze, trans. Martin Joughin (New York: Columbia UP, 1995), 135-155, 141 인터뷰
7) Gilles Deleuze, "Literature and Life", trans. Daniel W. Smith and Michael A. Greco, Critical Inquiry 23.2(1997 겨울), 225-230, 225.
8) Ibid.
9) Gilles Deleuze, Dialogues, by Gilles Deleuze and Claire Parnet, trans. Hugh Tomlinson and Barbara Habberjam (New York: Columbia UP, 1987), 6.
10) Gilles Deleuze, "Mediations", interview with Antoine Delaure and Claire Parnet, Negotiations, 121-134, 125.
11) Gilles Deleuze, "Pour en finir avec le jugement", Critique et clinique, 158-169, 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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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 들뢰즈의 철학을 요약할 수 있는 네 가지 공식 ( 2003/12/06 )
* 글쓴이 : 르네 쉐레(René Schérer) . 1996년 4월 13일
* 출 처 : Angelaki 2(3) (1996) : 173-177. 이 글은 René Schérer, Regards sur Deleuze, Paris: kimé, 1998에 재수록되어 있다.
* 옮긴이 : 김상운(sanggels@freechal.com)
* 철학자 질 들뢰즈는 1925년 1월 18일 파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69년부터 1988년까지 파리8대학인 벵센느/생드니에서 철학을 가르쳤다. 불치병은 1995년 11월 4일, 그의 생명을 스토아적으로 끝내게 만들었다. 미셸 푸코가 "천둥번개를 동반한 폭풍[fulguration]"이라고 규정했던 그의 철학은 사유의 전통적인 습관과 이미지를 뒤흔들었다. {차이와 반복}(1968), {의미의 논리}(1969), 이후 펠릭스 가타리와 함께 쓴 {안티 오이디푸스}(1972)와 {천 개의 고원}(1980)은 모든 세대들에게 강렬한 영감을 불어 넣어주었다. {철학이란 무엇인가?}(1991)는 이러한 혁명적 저작 중에서 최고의 것이다.
1. 내재성이란 무엇인가? 삶...
- Gilles Deleuze, "L'immanence: Une Vie..."
이것은 포괄적인 공식이다. 이것은 질 들뢰즈의 사유 대상과 적용 분야와는 무관하게 그의 사유가 지닌 구도(design)와 정향(orientation)을 제공하는 공식이다. 생각한다는 것은 내재성을 성취한다는 것, 내재성의 평면을 구성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존재들 사이에는 어떠한 위계도 없고 원래적인 원칙도, 신도 없다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모든 것은 똑같은 수준에서, 똑같은 평면 위에서 동등한 존엄성을 가지고 있다 ― 인간은 물론이고 동물, 식물, 사물도 그렇다. 어떠한 위계질서도 없고, 이해관계와 의미화(significance)에 있어서, 그리고 중요도에 있어서 차이만이 있을 뿐이다. 전투를 관찰할 때보다 곤충, 진드기를 관찰할 때 더 많은 의미가 있을 수 있으며, 모든 것은 사유의 내재성의 장에서 펼쳐진다. 우리는 아주 많은 장애물처럼 내재성의 장에 홈을 내고 그로부터 솟아 나오는 초월의 착각에 의해 멈추어지지 않고서도 그것을 가로질러가는 방법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들뢰즈와 같은 사상가에게 존재는 일의적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우월한 것도 열등한 것도 없으며 유비에 의한 존재도 없고 심지어 분리되어 있는 실체도 없으며 단지 사건들만이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존재의 장 위에서 주름이 잡혀지는, 주름을 잡는 사건만이, 표면 효과만이 있다.
들뢰즈의 철학은 이러한 긍정 때문에, 내재성에 대한 이러한 계속적인 주장 때문에, 그리고 지배를 갈망하고 존재의 장을 소유하고자 갈망하는 ― 무엇보다도 두드러지는 것은 의식, 주체, 기표이다 ― 모든 초월에 반대하기 때문에 현대철학에서 쉽게 식별할 수 있는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내재성의 긍정은 단순한 승인이 아니다. 그것은 개척정신, 믿음, 제도, 그리고 모든 종류의 권력을 무너뜨리는 행위(act)이며, 사물들을 체념하여 받아들이는 것에 반대하는 저항과 혁명의 행위이다.
들뢰즈는 실체로부터 내재성을 분리할 때를 제외하고는 스피노자의 계보[유산]을 강조한다. 스피노자는 "아무 것에도 내재하지 않는 내재성", 순수 내재성을 발명하고 이것을 삶과 동일시한다. "순수 내재성에 관하여 그것은 하나의 삶(A Life)이라고 말해질 것이다." 이것은 들뢰즈의 사유를, "생의 철학", 즉 Lebensphilosophie로 만드는 것일까? 한가지 의미에서는 그렇다. 하지만 우리는 이 점을 분명하게 해야만 한다. 그것은 니체 이후의 모든 위대한 현대철학들이 그러하듯이, 베르크손의 철학에서 후설과 사르트르의 철학에 이르기까지, 생철학이라는 제목으로 집결된다. 이 모든 경우에서, 문제로 되는 것은 실제로는 생명이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나타나는, 우리가 그것을 궁지에 내몰게 하는 의식의 작은 영역의 관점으로부터 이해된 생명이다. 의식의 생명, 산 것. 니체의 철학은 예외로, 들뢰즈는 생명을 의식으로 환원하는 것을 거부하고, 또한 이것을 넘어서서 개인, 주체, 인간으로 환원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을 스피노자는 물론이고 니체와 연결시킨다.
들뢰즈는 前-주체적이고 비-주체적인, 前-유기적이고 비-유기적인, 前-개체적이고 비-개체적인 생명을 통해서 사유한다. 그는 그것을 사물, 형식, 추상화로 확장한다 : "추상적인 선분"의 생명.
내재성과 생명은 주권적 주체(초월)도, 인격(persons)도, 유기적인 개체성도 알지 못하며 오로지 사건들, 단독성들[특이성들], "이것임(haecceities)"만을 안다. 이것을 넘어서는 세계는 없다. 소위 "깊이"와 강렬도들. 내재성의 장, 표면은 긴장[장력, tension]에 의해 가로질러지며, 입자들에 의해 거주된다(populated). 들뢰즈는 주체의 표면과 객관적 세계에 집중된 사유의 이미지를 제거한다. 그는 주체/객체 대립을 넘어서며, 그가 활력없고 비생산적이라고 생각한 현상학적 철학의 확실성으로 나아간다. 일격에 이미지를 깨뜨리면서 들뢰즈는 주체의 도달범위와 그 환원을 넘어서, 이것들을 생명의 내재적 흐름으로 내던지면서 인상, 사건, 이미지 자체로 (영사기의 이미지로 생각된 이미지) 움직여간다. 그는 그것을 근본적 경험론, "초월론적(transcendental) 경험론"라고 불렀다. 왜냐하면 그것은 주체의 초월, 객체의 초월 등 모든 초월을 탈피하는 장에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지를 파괴하며 봄과 말의 신선함을 회복한다. 지배적인 주체가 없이 모든 것은 재집결되고 보충되었으며, 모든 것은 내재성과 생명으로 가득 차 있다.
2. 욕망은 주체 안에 없으며 기계가 욕망에 있다.
- Gilles Deleuze와 Felix Guattari, Anti-Oedipus 285
이것은 욕망의 공식이다. ― 펠릭스 가타리와 공동으로 쓴 그의 철학의 일부분이다. 이 공식은 비-전문가적 청중들을 직접적으로 변용(affect)시키며[영향을 미치며], 일상의 삶과 습관에서도 역시 발견된다. 1970년대부터 들뢰즈의 철학은 사라들에게 욕망의 사유와 욕망의 정치학으로 제시되었다. 해석으로서일 뿐만 아니라 정치학으로서도. 이것이 그의 독창성, 예외성이 놓여 있는 지점이다. 당시에, 현대철학은 욕망을 둘러싼 모든 것을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의 손아귀에서 처리해 왔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욕망을 이것으로부터 떼어냈다. 이들은 철학에 욕망을 말할 수 있는, 다르게 말할 수 있는 권리를 주었다. 욕망에 재갈을 물리거나 중성화시키거나 또는 욕망을 소규모 핵가족의 가족 내부적 극장에 가두는 것이 아니라 욕망을 생산으로, 개체와 집단을 연결접속하는 힘으로 다루는 것이다.
{안티 오이디푸스}는 욕망에 관한 책이다. 욕망이 지닌 특성은 ― 욕망이 가지고 있는 생산성을 별도로 하면 ― 욕망이 해석의 관할구역에 속하지 않으며 결여로 이해될 수도 없다는 것이다.
해석은 욕망을 있는 그대로의 것이 아닌 것으로 환원시키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욕망이 긍정하는 것의 특정성(specificity)을 오인한다. 이에 대한 가장 명료하고 불변적인 예는 (동물, 친구, 거리 등등의) 외부를 향하도록 되어 있는 욕망으로서 표현된 어린아이의 욕망이 아버지나 어머니에 관한 가족내부적 고착화로 전환되는 것이다. (이는 프로이트, 클라인, 후대의 계승자들이 연구했던 것이다.) 욕망에 관한 들뢰즈의 사유의 실타래는 그의 전체 작업을 관통한다. 프로이트적 정신분석학은 원래의 운동에서 떼내어진다. 욕망을 파괴하고 거세하고 마침내 욕망을 더 이상 사유될 수 없는 죽음에 종속시킬 때까지 계속해서 욕망을 드러낸다. -- 죽음 자체를 욕망으로, 또는 정신내부적 욕구로 인식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될 때까지. 들뢰즈는 죽음을 사유했으며, 죽음을 그의 철학에 통합시켰다. 하지만 스토아적 성향에서 도으이로서, 자유로운 결정으로서 생명의 사랑은 죽음을 수용하는 지점으로까지 나아간다.
욕망에는 배타적인 인격주의적 고착화도 부정성도 없다. 바로 이 때문에 욕망을 결여로 정의내리는 것은 쓸모없는 것이며, 아무런 중요성도 지니지 않은 진부한 말일 뿐이다. 욕망은 새로운 결합으로, 존재자와 사물의 공생으로, 상이한 체제들(regimes)로 생산적으로 나아간다. 타자를 향한 이러한 이동이 되기이다. 여성-되기, 아이-되기, 동물-되기, 식물-되기, 요소들로 해체되기, 지각불가능하게 되기. 욕망에 의해 생산된, 그리고 욕망을 정의할 수 있는 그러한 결합이 배치이다. 배치, 되기, 욕망은 하나의 동일한 실재를 지닌 것의 다양한 측면이며, 상이한 각도나 관점에서 본 측면이다. 욕망은 결코 배치없이는 지낼 수 없다. 욕망과 욕망의 배치가 정확한 공식이다.
배치는 기계적 욕망(ce que le desir machine), 혹은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 현실화에 있어서 "욕망하는 기계(desiring machine)"이다. "욕망하는 기계"라는 표현은 실제로는 이해가 되지만 또한 오해를 낳고 있다. 이것은 인간 존재를 기계로 환원하거나 생명을 기계로 환원하는 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이것든 단독적[특이한] 배치들에 의해서 영원히 새롭게 생산된, 참된 개체적 생명[삶]과 집단적 생명[삶]을 가리킨다. 배치되는 것은 인격(person)이 아니라 단독적[특이한] 특징들, 생성을 생산하는 특징들(features)이다. 수천가지 예 중에서 한 가지 예 : 점잖은 사랑, 기사도의 우화, 남성과 말, 남성과 등자(stirrup), 남성과 전투, 남성과 성적인 것, 남성과 여성의 배치/생성의 결실.
정신분석학의 속박에서 풀려난 욕망은 모든 지점에서 성의 사소한 비밀, 동일화, 구조, 제한을 초과한다. 그것은 생성을, 배치의 선들을, 특히 삶의 의미를 담지하고 있으며, 삶에 의미를 주는 그러한 배치들과 생성들을 발명함으로써 모든 방향으로 활성화시킨다 : "언표행위의 집단적 배치", 즉 문학.
3. 우리는 항상 삶에 어떤 것을 부여하는, 삶을 덫에서 자유롭게 하고, 탈주선을 추적해가는 글쓰기를 한다
-- Gilles Deleuze, "철학에 관하여"
어떤 방식으로는, 들뢰즈의 전체 작업은 글쓰기 이론, 문학이론, 특히 영미문학이론으로 여겨질 수 있다. 프루스트, 아르토, 클라이스트, 도스토예프스키 등을 길게 연구하고 언급하면서, 이들 중에서 어느 누구도 배제하지 않고, {대화}의 한 장을 "영미문학의 우수함에 관하여"라고 부른다. 그는 특히 프랑스 문학과 관련지어 볼 때, 영미문학을 심리주의(psychologism)와 도덕주의, 주체와 인격(person)을 제거할 수 있는 유일한 것으로, 그 자신을 넘어서는 어떠한 정당화도 필요로 하지 않은 삶, 자기 충족적인 삶에 새로운 표현을 제공할 수 있는 유일한 것으로 여긴다.
들뢰즈에게 문학은 참고(reference)이자 원천이다. 그는 프로이트보다는 D.H.로렌스, 헨리 밀러, 자허-마조흐에서 많은 것을 끌어온다. 왜냐하면 이들은 "섹슈얼리티에 대한 더욱 정확한 가치평가"를 하기 때문이다.({안티 오이디푸스} 292쪽). 버지니아 울프나 샤를로뜨 브롱떼(Charlotte Bronte)에게서 인용한 구절은 "주체의 분산(dispersion)", "유물론적 단독성들[특이성들]", 입자들의 산종(dissemination), 그리고 욕망을 구성하는 분자들, 무의식적 기계들, "분자적" 기계들에 관한 개념화를 분명하게 한다. 물리적 자연에 토대를 둔 것에 덧붙여, 이것들은 글쓰기에 상응한다. 글쓰기는, 그 가변적인(volatile) 기호의 배치에서 사건의 비물체성(incorporeality)을 포획하고 표현한다. 글쓰기는 "몰적인" 것을 벗어난 단독성들[특이성들]을 포획하고 성취한다 ― "몰적인 것"은 일상의 발화가 사물의 실재성으로서 전달하는 객체와 존재자들(entities)의 대량적인 형성체이다. 단독성들[특이성들], 이것임만이 중요하다. 작가는 글자 그대로 받아들여져야만 한다. 그는 삶에 일치하는 예술[기예, art]을 안다. 왜냐하면 그는 소위 "탈주선"이라고 불리우는, 스스로 전념하는 선을 따르는 생성의 비밀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 하지만 상상적인 것[상상계]으로 도주함으로써 세계를 비현실화하기 때문에 공고한 정체성들[동일성들]의 경로를 넘어서서 변신(metamorphoses)의 경로에 헌신하는 방법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글쓰기는 생성과 분리할 수 없다." ... 생성은 어린이-되기, 여성-되기, 동물-되기이지 결코 남성-되기가 아니다. 반대로 "남성이라는 것을 부끄러워함"이 작가로 하여금 탈주선에, 살아 있는 것을 가치있게 만드는 삶의 추구에 헌신하게 한다. 글쓰기는 결코 자기자신의 목표가 아니다. "글쓰기의 유일한 목표(fin)는, 글쓰기가 끌어들이는 조합을 통한 삶이다."
정신의학, 도덕, 여론, 국가와 관련해서 작가는 "임상(clinical)"이라는 표제로 이것들을 끌어들인다. 내재성의 철학자가 필연적으로 아나키스트, 혁명가이듯이, 작가는 정신병자, 분열증자이다. 비평적인 것과 임상적인 것 ― 들뢰즈는 프로이트적 정신분석학과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적 정신분석학의 이러한 설명(후자는 전자를 너무 충실하게 따른다)이 실패한 것에 대한 반응으로 두 가지를 결합시키려고 했다. 들뢰즈는 해석이나 기표작용 없이, 철학이 자신의 개념을 구성하기 위해서 파악해야만 하는, 삶의 전례없는 경험, 열린 윤곽, 추상적이고 "고딕풍의" 유목적인 선과 같은 어떤 것을 위한 교훈을 생성에서(멜빌의 {모비딕}에서처럼 그 중에서 동물-되기는 종종 패러다임적이다), 그것들의 선에서 발견한다.
4. 판사보다는 길거리 청소부가 되는 것이 더 낫다
-- Gilles Deleuze, Dialogue 8
내가 쉽사리 채택할 수 있는 마지막 공식은 철학의 공식 자체이다. 철학은 그 단독성[특이성]에 있어서 다른 분과학문과 관련되며, 그 궁극적인 의미에 있어서 삶과 지배에 관련된다.
철학의 특정성은 개념에 놓여 있다. 개념은 반성과 일반화의 질서가 아니라 사건과 구성의 질서... 창조의 질서에 속한다. 개념은 사건에, 개념이 선언하는 도래할-사건에 윤곽(contour)을 제시한다. 사건들의 윤곽으로서, 따라서 선으로서의 개념 -- 배치의 선, 연구의 선, 논쟁적 무기의 선, 전쟁무기의 선. 가장 좋은 예의 하나가 주름(fold)이다. 주름은 세계가 세계를 표현하는 모나드로 말려지거나 주름잡히는 방식을 정의하거나 계보를 그리는 것이다. 욕망의 비유기적[비기관적] 삶을 표현하는 "기관들 없는 신체"는 앙토넹 아르토에게서 빌려온 개념이다. 얼굴의 전제적 기계(얼굴의 공포-효과)에서 봄(the look)의 초월을 분명하게 만드는 "검은 구멍"은 천문학에서 기원하는 개념이다. "선", 추상적인 선은 기하학에 그 원천을 두고 있는 개념이다. 각각의 사례에서 들뢰즈는 바로 이러한 점을 주장한다. 즉 개념들은 은유가 아니며, 다시 말해서 이러한 "이미지들"은 "~으로서" 도입되지 않았다. 그것들은 의미되는 바를 정확하게 지칭하지만, 그 기원적 영역과는 다른 영역에서 지칭한다. 개념들은 "탈영토화"되었다.
한가지만 요약하자. 들뢰즈의 전체 철학은 바로 이 지점에서 모여진다[응축된다]. 들뢰즈는 과학, 문학, 예술에서 자의적으로가 아니라 매번 특수한 문제에 반응하기 위해서 개념들의 전체 레퍼토리의 탁월한 창조자, 걸출한 장인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러한 분과학문 사이에서 들뢰즈의 개념은 간섭(interference)의 결절점(node) 위치를, 이국적인 음악적인 선들이 교차하고 서로 공명하기 시작한 지점을 차지한다. 주목을 받는 철학자는 외부에서 온 이처럼 사유에 의해 풍부해진다. "그 모든 것은 주거나 받는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들뢰즈는 자신을 거리의 청소부로, 내재성의 평면 위에서 가공할만한 스캐너를 작동하는 사람으로 제시하는 것을 좋아했다. 국가의 권력을 향하는 소모적인 유머를 제외하면 "판사가 되기보다는 거리의 청소부가 되는 것이 낫다"는 것을 아르토, 니체, 카프카의 편에서 볼 때, 국가 모델에 기반해서 세워진 모든 철학에 대한 도전이다. 국가 모델에서 사유한다는 것은 판단한다는 것, 포함시킨다는 것, 억누른다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들뢰즈는 사랑, 삶, 창조의 공개적 투쟁을 설정한다. "비밀은 어쩌면 이것이다. 즉 판단을 통과하는 것이 아니라 실존하게 하는 것이다." 똑같은 공식의 다른 버전[판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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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쉐레의 글 제목은 Kant's Critical Philosophy : The Doctrine of the Faculties, trans. Hugh Tomlinson and Barbara Habberjam (London: Athlone, 1984), vii-xiii의 서문인 "On four poetic formulas which might summerize the Kantian philosophy(칸트의 철학을 요약할 수 있는 네 개의 시적인 공식에 관하여)"를 연상시킨다.
2) Michel Foucault, "Theatrum Philosophicum", Language, Counter-Memory, Practice : Selected Essays and Interviews, ed., Donald F. Bouchard, trans. Donald F. Bouchard and Sherry Simon (Ithaca, NY: Cornell UP, 1977), 165-196, 196.
3) Philosophie 47, Gilles Deleuze 특집호(1995년 여름), 3~7, 5.
4) Philosophie 47, 4.
5) Anti-Oedipus: Capitalism and Schizophrenia, trans. Robert Hurley, Mark Seem and Helen R. Lane (London: Athlone, 1984).
6) Raymond Bellour and Francois Ewald, Negotiations, 1972-1990, Gilles Deleuze, trans. Martin Joughin (New York: Columbia UP, 1995), 135-155, 141 인터뷰
7) Gilles Deleuze, "Literature and Life", trans. Daniel W. Smith and Michael A. Greco, Critical Inquiry 23.2(1997 겨울), 225-230, 225.
8) Ibid.
9) Gilles Deleuze, Dialogues, by Gilles Deleuze and Claire Parnet, trans. Hugh Tomlinson and Barbara Habberjam (New York: Columbia UP, 1987), 6.
10) Gilles Deleuze, "Mediations", interview with Antoine Delaure and Claire Parnet, Negotiations, 121-134, 125.
11) Gilles Deleuze, "Pour en finir avec le jugement", Critique et clinique, 158-169, 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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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두이노의 悲歌
글쓴이 : 다리우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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