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형상론」 소고
김 성 수
(외대 철학)
“질료는 형상을 끊임없이 그리워하고, 형상과 같아지려 한다.”
-아리스토텔레스
Ⅰ. 학(學)적인 위치
‘형이상학(Metaphysic)’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여러 가지 학문(철학)의 영역 중에서 자연학과 연계되어 영혼, 신 개념을 모두 포괄하고 있는 철학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형이상학(제일철학)을 “존재(자)로서의 존재(자)를 연구하며, 그리고 그것의 본성에 의해서 존재(자)로서의 존재(자)에 속하는 속성들을 연구하는 학문이다.”{Mt.4 1003a21}라 정의한다. 이렇게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형이상학의 시작을 존재론이라 명시한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의 시작은 형이상학 첫머리에 나온대로 “본래적으로 모든 인간은 알려고 한다.”{Mt.1 980a21}라는 명제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러나, 그의 형이상학은 이렇게 단순히 인간이 세계에 대해 알려고 하는 그러한 보편적인 지식을 넘어서서 ‘사물의 존재’와 ‘세계’, 그리고 이것들과 항상 더불어 있는 ‘인간’과의 관계를 규정함으로서, 모든 존재자의 존재 및 존재 원인등을 논리적인 철저성 속에서 체계적으로 밝혀 서술해 내려는데에 있게 된다. 그럼에 있어 형이상학 1권에 나오는 「지혜」는 이미 보통의 지혜가 아니라 「모든 사물의 제일 원리」를 탐구하려는 ‘형이상학으로서의 지혜’인 것이다.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은 일반 형이상학과 특수 형이상학으로 구분될 수 있다. 일반 형이상학은, 곧 존재론으로서 존재(자)와 관련된 형상(morphe, eidos, forma)과 질료(hyle, materia), 운동의 원인(aitia) 및 목적(telos)등을 다루는 것이며, 특수 형이상학은 ‘존재론’을 넘어 신(神)과 영혼(psyche), 시‧공간적 세계(kosmos)등의 개념에 관한 것이다. 그런데, 널리 알려진 바대로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은 자연학에서부터더욱 자세히 말하자면, 생물학에서부터비롯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은 그 이전의 여러 철학자들이 다루었던 여러 가지 철학적인 ‘아르케(arche)’들과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는데, 바로 고대 이오니아 학파에서의 ‘형상’과 ‘질료’의 문제인 것이다. 물론, 이러한 의미에서 그의 형이상학은 형이상학의 본래적인 성격인 `모든 사물의 제일원리’라고 규정할 수 있으며,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형상론(hylemorphism)」이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중에서 가장 핵심되는 개념이 되며, 또한 이것에 의해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이 ‘자연학의 (본질)존재론적인 대상들이 총괄적으로 내포되어 있는 것으로서의 메타-자연학(meta-physic)’이라는 학적 위치의 부여가 타당할 수 있을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존재하는 물체 및 실체(ousia), 그리고 기체(hypokeimenon)등의 개념들은 물론, 변화(metabole)와 운동(kinesis)으로서의 가능태(dynamis)와 현실태(energeia)로서의 모든 자연을 넘어서는 ‘초월적인 자연’의 문제에까지 필연적으로 연결되는 개념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본래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형상론」은 엘레아 학파에 대한 반대에서부터 시작되어, 이오니아적 전통을 수용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이나, 결국 플라톤의 이데아 철학을 반대하는 경향에서 발생되었다고 단언해도 조금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즉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플라톤이 주장하는 이데아(idea)론인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이데아론에서 자연을 구성하고 있는 ‘질료-형상’이 적절하지 못하게 설명되어 있다고 하는 결론을 도출해내는데, 곧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이 그의 이데아론에서 질료의 개념이 형상개념과 떨어뜨려져 규정되어 있다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이 그의 이데아나 형상을 소크라테스와는 달리 개별적인 사물들과 분리된 것으로서의 독립적으로 존재함이라 규정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고 비판하는데,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플라톤의 이데아, 또는 형상이라는 것은 소크라테스의 보편자(to katholou)를 다르게 부른 것이라고 한다.고 이해하는 것이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을 소크라테스와 비교했을 때, 소크라테스는 ‘자연 전체’에 관하여는 신경을 쓰지 않았으므로 보편자를 단지 개념에 한해서 사용했지만, 플라톤은 보편자라고 할 수 있는 이 이데아 내지 형상을 ‘자연 전체’와 연결시키려 한데서 문제가 발생하였다고 비난한다. 즉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이데아에 대하여 “이데아론자들은 이데아들을 보편적인 것으로 만들뿐만 아니라 동시에 개체들로부터 분리되는 것으로 만든다. 그런데, 이러한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전에 논의된 적이 있었다.(스페시우스의 경우) 그 이유는 그들이 실체를 감각적인 것들과 동일시하지 않았다는데 있다.‧‧‧‧‧감각 대상들인 개체들은 흐름의 상태에 있어서, 그 어떤 것도 불변 상태로 남아 있지 않으므로 별도의 보편자가 있어서 감각적인 것들과는 다른 어떤 보편자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 그의 정의를 통해 이런 생각에 영향을 미치기는 하였지만, 소크라테스는 이 보편자들을 개체와 분리시키지 않았으며, 그러한 한에 있어서 그는 옳았다.”{Mt.8 1086a32}라고 하며, 소크라테스와 비교하여 냉혹한 비판을 내리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이데아의 비판과 더불어서 플라톤의 형상에 대한 비판도 계속되어지는데, “형상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여러 방식 중, 그 어느 것도 정당하지 않은 것 같다. 왜냐하면, 어떤 경우에는 추론이 전혀 성립되지 않고, 또 어떤 경우에는 형상이 없는 것들에도 형상이 생기기 때문이다.”{Mt.1 990b1}라며 비판의 강도를 더 높혀간다 .이것에 대한 단적인 예는 ‘제 3인간’에 대한 비판일 것이다.
이와 같은 비판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의 보편성이 단순히 개개의 ‘어떤 것’을 지시한다기 보다는 <어떠하다는 것>을 지시하는 것이었기에 가능할 수 있었는데, 이러한 비판은 그의 질료형상론의 입장에게 있어서는 매우 타당한 것처럼 보인다. 만일 플라톤이 주장한 것처럼, 본질이나 보편적인 것이 개체들에 앞서초월적으로있는 실체라면, 예를 들어 선의 본질과 선 자체가, 동물의 본질과 동물 자체가 각각 다른 것이 되므로, 선 자체에 선의 본질이 속하게 된다든가, 선의 본질에 선한 것의 특징이 속한다는 일이 없게 되기 때문인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어떤 사물에 대해 알 수 있다는 것은 그 사물의 본질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라는 점에 비추어 보아서도 매우 불합리한 것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 즉 어떻게 그 본질을 인식하지 못하면서 그 사물에 대해 이러저러 하다고 판단할 수 있으며, 그리고 그것이 그 사물이라 생각되어질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그러한 한에 있어서 “플라톤의 질료로서의 기체(基體)적 존재는 오히려 수학적인 것이어서 그것은 질료라기보다는 실체를 진술하기 위한, 즉 질료의 특이성일 뿐인 것이다.”{Mt.1 992b1}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단언한다. 바꾸어 말하면, 플라톤에게 있어서의 질료는 형상의 기반으로서의 성격을 띄지 않고 존재하는 자연학 내에서의 자체 개념에 더 가까웠던 것이며, 그리고, 또 그러함에 있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운동과 변화라는 개념이 없는 비현실적인 학설이며, 자연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 학설로 간주했던 것이다. 즉 이렇게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결국 ‘자체’란 이름의 학문이라 평가절하한다. 플라톤의 이데아 역시 일종의 감각물로서, 이러한 감각물에 ‘영원’이라는 말을 붙여 ‘영원한 감각물’로서의 ‘감각물 자체’등의 표현을 붙여 이데아라 칭했을 뿐이라는 결론에까지 이르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위와 같이 예지계와 감각계를 분리했던 플라톤의 견해를 비판하면서, ‘질료는 형상과 떨어져서 존재하지 않으며, 형상은 질료를, 질료는 형상을 서로 반드시 수반하는 것’이라 파악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떠한 개별적인 사물이라도 그 사물이 구성되어 있는 재료와, 그 사물의 ‘특수한’ 종류(형태와 용도에 있어서)에 속하는 형성과 배열의 구조적 법칙이라는 두가지 요소를 찾을 수 있다고 하는데, 바로 이것이 질료형상론의 요체인 것이다. 즉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는 모든 형상이 질료와 완전히 화해하여 현실태인 개체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간단한 예를 들자면, 집을 어떤 사물로서의 형상으로 간주할 때, 목재의 위치는 질료가 되는 것이며, 또 목재를 어떤 사물로서의 형상으로 간주할 때, 원목은 질료의 위치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해석은 집 위로도, 원목 아래로도 계속해서 진전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한가지 혼동하지 말아야 할 것은 형상이 질료들의 합성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즉 질료가 어떤 비가시적인 형상에 의해 현현된다는 표현이 더욱 더 적당할 것이다.(사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질료를 두가지로 구분하여 파악한다. 첫째로는 이미 형성되어 있는 것으로서의 목재와 같은 것으로서의 소위 제이질료이고, 둘째로는 곧 형상에 대응하는 원리로서의 제일질료인 것이다.)
어쨌거나 앞서 이미 말한 것처럼, 이러한 구조 속에서 중요한 형이상학적 개념들이 필연적으로 도출되어질 수 밖에 없게 되는데, 그것은 위의 예의 극단적 양 끝에 대한 문제이고, 그리고 이러한 질료와 형상이 가능할 수 있는 것으로서의 가능태와 현실태 개념과 관련된 변화와 운동이라는 문제와 연결되며, 결국 형이상학적 개념에서 가장 으뜸이 되는 실체(ousia)라는 개념으로 귀결되어진다는 것이다.그리고 이러한 면에 있어서 질료형상론의 학적인 입지가 강화되어진다.
Ⅱ. 배후 타당성(‘운동으로서의 변화’) 확보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형상론이 도출되었던 배경 및 논리적인 타당성을 찾기 위해서는 먼저 그의 자연학에서의 연구에 대하여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자연은 두가지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질료와 형상이다‧‧‧‧.”{Ph.2 194a12}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은 모든 사물을 파악함에 있어서, 외적으로 내재되어지는 형상과 그것의 내적 차원에서의 발현 되어지는 구성물인 질료를 확연하게 나누어서 생각하였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이 질료와 형상이라는 구별이 가능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일까?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질료와 형상의 증명 문제를 해결 하기 위하여 ‘변화’, 즉 ‘운동으로서의 변화’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이 질료와 형상의 관계는 질료에서 형상으로 넘어감(변화함/운동함) 속에서만 그 구분이 절대적인 타당성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인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그의 질료와 형상이 자연의 두 구성요소로서 간주되기 위해서는 질료가 형상이 되어지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원동력」의 규명이 반드시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곧 ‘「원동력」이라는 의미로서의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우선적으로 제기될 수 밖에 없게 되는데, 이를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언어-논리적 논증을 고찰하는 것이 선행되어져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말의 사용으로부터 지혜에 대한 이상을 끌어내려했기 때문이다.물론, 이러한 언어학적인 방책은 극복되어 실제 지혜에로 반드시 넘어가야 할 것이라 아리스토텔레스 본인도 인정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다(있다 einai ,esse)’라는 개념을 도입하는데, 이것은 파르메니데스를 중심으로 하는 엘레아 학파의 “존재는 하나이며, 불변한다.”라는 견해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박과 동일 선상에 놓여지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다(있다)’는 여러 가지의 의미로 쓰인다.”{Ph.3 185a21}라 주장한다. 즉 사물의 성질과 분량들은 모두 똑같은 의미로 있거나 현존할 수 없다는 점을 말하는데, 아리스토텔레스의 견지에서는 이렇게 모든 것들(물체, 빛, 시간, 공간, 색, 인간등)이 다 동일한 성질이나 분량들일 수는 없으므로, 당연히 존재는 하나일 수 없고, 다의적 개념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는 파르메니데스등의 일원론자들에 대하여 언어의 논리-구조적인 면에서 비판을 제기하는데, 일원론자들의 주된 논변들 가운데 ‘하나’가 의존하고 있는 상정은 x와 y가 두 갈래의 것이라면, x는 y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를 근거로 일원론자들은 특성을 사물에 귀속시키는 언명이나 사물의 가변성을 주장하는 언명을 무시하고 있다. 예를 들어, ‘철수는 뚱뚱하다.’라는 언명에 있어서, ‘철수’와 ‘뚱뚱’의 의미가 서로 상관없는 갈래들의 의미들이라면, 위의 언명은 거짓일 수 밖에 없게 되는데, 즉 이 말은 ‘철수는 철수이다.’라는 아무 의미 없는 말과 같은 것이 되고 마는 것이다. 또한 ‘철수’와 ‘뚱뚱’의 의미가 같은 갈래들에서 관련된 것이어서 위의 언명이 참이라고 한다면, 결국 ‘철수는 뚱뚱하지 않다.’라는 언명은 거짓일 수 밖에 없게되므로, 따라서 ‘철수는 뚱뚱하지 않았다가, (지금은) 뚱뚱하게 되었다.’라는 언명은 비합리적인 언명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이러한 일원론자들의 「변화」 부정에 대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다(있다)’의 개념이 동일성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라 비판한다. 예를 들어, ‘철수는 착하다.’라는 언명에서, 철수는 ‘착함’이라는 어떤 개별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지, 철수가 곧 ‘착함’이라는 의미는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언명에 있어서의 동일적 언명(‘철수는 철수이다.’)과 비동일적‧특성적 언명(‘철수는 학생이다.’)을 구분해야 하는데, 곧 후자에서의 「특성」은 그 자체로도 이미 어떠한 뜻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철수라는 존재는 이러 저러하게 여러 가지 특성을 가진 다의적인 존재인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다의적 존재로서의 표현이 가능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이러한 측면에서 현실태와 가능태의 차이도 당연히 생겨날 수 밖에 없는데, 예를 들어, 철수는 학생도 될 수 있고, 군인도 될 수 있고, 더 나아가 선생님도 될 수 있다는 각각의 표현이 가능하게 되므로, 현실태로서의 철수와 가능태로서의 ‘철수의 특성’의 발현 양태가 나타나는 것이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의 ‘변화’에 대한 타당성은 이러한 일상적인 언어 습관을 기초로 하는 논리적 언명 속에서 당연할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 이러한 의미들은 세계와 세계 내에서의 ‘변화’라는 개념을 주장하는 여러 비일원론자들의 견해와도 비슷한 논리처럼 보인다.
아리스토텔레스에 견해에 의하면, 이러한 ‘변화’ 개념은 4가지 형태로 구별되어진다. 즉, 사물들은 실체에 관한, 성질(質)에 관한, 양(量)에 관한, 장소에 관한 변화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변화(광의의 운동)실체와 관계됨‧‧‧‧‧생성, 소멸(단적인 의미로서)
양(量)에 관계됨‧‧‧증대, 감소
성질에 관계됨‧‧‧‧‧변질 운동(협의의, 엄밀한
장소에 관계됨‧‧‧‧‧이동 의미에서)
첫째로, 실체에 관해서의 변화는 존재(자)로의 생성과 존재에서부터의 나감, 곧 생성과 소멸을 말하는데, 예를 들면, 인간의 생‧사문제나, 조각상의 만들어짐과 파괴됨의 문제이다. 두번째로, 질에 관해서의 변화는 변경이나 수정이란 의미와 상통한다. 예를 들면, 어떤 식물이 양지에서는 푸르게 자라지만, 음지에서는 시드는 것을 말한다. 세번째로, 수량에 관해서의 변화는 증가와 감소를 말한다. 예를 들면, 자연의 대상물들이 전형적으로 증가하고 감소하는 것에 의해 시작된다는 문제와 연결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장소에 관한 변화 문제의 운동(곧 장소이동)인 것이다. 또한, 이런 맥락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변화’ 개념은 ‘자연(physis, natura)'에 내재하는 원리로서, 그는 “자연이란, 자신이 애초부터(즉자적으로) 속해 있는 것 중에서의 움직이는 존재(자)와 움직이지 않고 남아있는 존재(자)에 대한 근원과 원천이며, 이것은 그 자체에 의한 것이지, 어떤 부수하는 특성들에 의한 것이 아니다.”{Ph.2 192b22}라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이 변화 개념은 여러 가지로 세분되어질 수 있으나, 사실 이러한 세분이 있기 전에의 `하나의 변화’가 자연이라는 면에서(자연학적 측면에서) ‘운동’이라 규정되어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학 3권에서 “자연은 ‘운동과 변화의 원리’로서 정의되어지며,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연구에 주제이다.”{Ph.3 200b10}라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아리스토텔레스는 변화와 운동을 동일 선상에서 다루며, 또 그것을 ‘자연’에 내재하는 존재(자)의 구조적 성질로 파악하는 것이다. 여태까지의 서술을 종합한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을 구성하는 존재자는 곧 질료와 형상이며, 그 자연 구성의 구조는 곧 운동으로서의 변화>라 파악하고 있으며, 이러한 견지에서 「‘운동’은 생성되고 있는 존재(자)의 존재 방식」이라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운동을 ‘가능적인 존재(자)가 현실적으로 되는 것(되게 하는 것)’이라고 정의 내리는데, 이러한 정의는 일반적인 운동 개념을 뛰어 넘는 것이다. 이 ‘운동’개념 아래, 사물들이 현재의 상태로 되고, 또 이전의 상태로 거치는 모든 과정들이 포함되는 것이다.
이러한 ‘운동’개념의 확보는, 자연적 대상의 지향적인 구성 원리 및 형이상학에서의 여러 형이상학적 개념들의 지평을 열어 놓음으로서의 가능성을 확보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자연은 질료가 최고 형상을 향해 움직이고 있는 합목적적인 과정」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 구성론을 고찰함에 있어서, 자연적 대상의 ‘자연’내적 변화(운동)의 근원을 형상에 두어야 할지, 질료에 두어야 할 지에 대한 두가지 입장이 문제가 된다. “이것이 곧 자연이 언급되는 한 방식이다. 자기 자신 속에 운동과 변화의 근원을 갖고 있는 것은 각각의 물질적 기저에 가로 놓여 있는 질료로서 말이다.”{Ph.2 193a28} “또다른 설명은 ‘자연’이 사물의 정의로서 특성화 되어지는 형상 또는 형체인 것이다.”{Ph.2 193a30}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형상론은 두 측면을 전부 채택하고 있는데, 곧 질료와 형상 모두를 ‘자연’ 개념으로 수용하고 있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자연’이라는 말은 양의적으로 쓰일 수 있으며, 그 각각 나름대로의 용도에 달려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는데, 이 말은 자연 상태의 모습을 질료 자체로도, 질료의 결정체인 형상으로도 파악할 수 있다는 뜻이다.
여태까지 논술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는 모든 사물을 철저히 의인화 함으로서 비로소 가능할 수 있게 되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의인화를 통하여 세계관을 제시하며, 인간과 그 목적에서 연유하는 합목적성으로서 철학의 전체 체계를 지배하려 시도한 것이다. 또한 이러한 관점에서, 집이나 배를 만들 때 갖는 인간의 목적개념을 자연에까지 적용시키려 하였으며, 세계를 하나의 유기체처럼 간주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의 질료형상론은 이러한 일종의 유기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함에 있어서의 ‘변화‧운동’을 통해서 구성되는 것이다.
Ⅲ. ‘실체’의 기반으로서의 질료와 형상
앞서 대략 서술 했듯이, 일반적으로 형이상학이라는 학문을 논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존재(자)란 무엇인가?”라는 논제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논제를 “개별자(개체 hekaston)란 무엇인가?”여기에서 개별자란, 개별적으로 이해가능한 존재(자) 하나하나를 말하는데, 위의 예에 의한다면, 집 ,목재, 철수등으로서의 하나하나를 말한다. 그리고 이 개체의 ‘본질’이 곧 ‘실체(ousia)’라는 개념과 연결된다.라는 문제에로 국한시켜 간다. 즉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처럼 이데아들을 인정하지 않는 대신, 형상(forma)이 사물 속에 내재하며, 사물을 그 사물이게끔 하는 개별적인 본질 내지는 본성이 있다라고 파악한다. 그런데 여기서 ‘본질(essentia)이란 무엇인가?’ 라는 중요한 문제가 대두되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본질을 우선 “<그 자체에 있어서> 있는 것이다.”{Mt.5 1029b13}라 규정한다. 이것은 “X의 본질은 X자신에 있어서 X인 것이다.”라는 의미이며, 더 나아가 본질을 “이 어떤 것이 어떤 것인 바의 것”이라고 규정한다. 또한 이것은 곧 본질의 개체성을 지적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거나 위와 같은 전제하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사물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하나의 구체적인 개체의 존재론적인 분석을 통해 실체가 범주에 나타나는 존재론적인 구조를 연구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리고, 그러함에 있어서 존재(자)의 문제는 「존재(자)-실체」의 문제가 되며, 또 이러한 실체라는 의미의 문제가 대두 됨으로서, 존재(자) 안에서 형상과 질료라는 구조 또한 그려지게 되는 것이다.
본래 ‘실체(ousia)’는 희랍어 einai의 여성 분사형으로 “자기가 소유하는 것”이라는 의미인데, 아리스토텔레스는 범주론에서 ‘실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단어의 가장 참되고, 제일적이며, 가장 명확한 의미하에서 실체란 주체의 서술적인 것이 아니라, 항상 주체적인 것이다.”{Ca.5 2a11} 또한 형이상학에서 ‘실체’는 “①단순한 물체이다.(물, 불, 흙, 공기등의 4원소와 유사한 종류인) ②동물에 있어서의 정신과 같이 내재하는 존재의 원인이다. ③모든 사물들을 개별자로서 한계 짓고, 규정짓는 것이다. ④‘본질’이다.”등으로 설명되어지고 있는 것이다.{Mt.5 1017b10} 즉 ‘실체’는 모든 사물의 존재 형태 및 성격등을 규명하려 시도하는 형이상학의 궁극적 시작점이자 종착점을 모두 포함하고 있는 것이며, 곧 활동의 주체자체이고, 미리 존재하는 어떤 주체 자체 안에서가 아니라, 자신에 의해서 자신을 근거로 하여 존재할 수 있는 것 또는 ‘본성’이라고 정의해야 할 것이며, 언명적인 면에 있어서도 피동적인 서술 대상으로서의 것이 아니라, 능동적인 주어 개념인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 개념 역시 비엘레아적 전통에 더 가까운물론, 플라톤도 파이돈 등의 대화편에서 실체에 대해 언급한다. 그러나 플라톤은 ‘실체’를 ‘본래의 존재’로 간주하는데, 곧 실체를 ‘이데아’와 같은 것으로 간주한다.것이다. 게다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오니아 학파의 시조로 추앙되고 있는 탈레스를 철학의 시조로 간주하는데, 곧 아리스토텔레스는 탈레스가 최초로 존재의 문제로서 ‘아르케’를 논리적인 판단을 통해 다루었다고 간주하는 것이다.
이렇게 아리스토텔레스가 스승이었던 플라톤의 견해와는 차이가 있는 방식으로 ‘존재’의 문제를 다루었던 이유가 서로 다른 <인식>의 순서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점에 기초한다. 바꾸어 말하면, 플라톤은 ‘존재(자)’를 다소 관념적 경향으로 파악하여 실재적인 경향들을 무시하는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재적(아르케적)인 것으로부터 관념적인 것으로 파악해 나가려는 경향이 더 짙었다. 그럼에 있어서,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세계의 모든 구성원리 및 본질을 탐구하는 데에 있어 먼저 자연 세계를 기준점으로 삼아, 여기에서 형이상학적 세계로 들어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점이 바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가 가장 첨예하게 대립되고 있는 부분 중의 하나인 것이다. 어쨌거나 이러한 견해들과 무관하지 않게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체를 제일실체와 제이실체로 구분하여 파악한다. 제일실체는 “어떤 주체에 대하여 서술적인 것도 아니고, 그 주체를 나타내려는데 있는 것도 아니라, 예를 들면 어떤 특정한 인간 또는 말(馬)이다.”{Ca.5 2a11-13} 즉, 제일실체는 가장 우월한 것이며, 언명적으로도 본래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개별자를 말한다. 이에 대해, 제이실체는 “1차적 의미에 있어서의 실체를 그 안에 내포하고 있는 종(種, eidos ;다양한 개체들에게 공통적인 것. 개체들의 동일성 안에서 이 개체들에게 획일적으로 해당되는 것으로서,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그런 의미로 ‘본질’개념과 연결되며, 원래 eidos라는 의미에서의 ‘종’과 ‘형상’은 일맥상통하는 것이다.)개념이고, 다시 이와 같은 종 개념을 그 안에서 포섭하고 있는 유(類, genus ;여러 가지 종(種)들에게 특수화되어 있는 보편성이다.)개념이다.”{Ca.5 2a14-18} 이와 같은 의미를 언어-논리적인 면에서의 예를 들어 살펴본다면, ‘실체’라는 단어를 사용함에 있어서, “우리가 인간이다. 또는 부케팔로스(Bucephalus)는 말이다.”라고 할 떄처럼, 술어들 중 보편 명사의 특수한 집합으로서 사용하는 것이 제이실체이며, 반면 기초적인 의미에 있어서의 실체는 절대적으로 개별적인 사물, 즉 ‘이 사람’ 또는 ‘이 말’을 의미함으로서의 이것을 개체, 제일실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참된 실체>는 제일실체이며, <개념>은 제이실체인 것이다.
이러한 ‘실체’의 의미를 살피는 데에 있어서, 또 한가지 중요한 것은 `기체'(hypok -eimenon)의 개념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기체는 어떤 의미에서는 ①질료라 생각되기도 하고, ②형상이라 생각되기도 하고, ③질료와 형상의 합성체라 생각되기도 한다. 그러나 ①에서의 질료는 무한정한 것이어서 한정적인 실체의 특성인 독립성과 개체성이 없으며, ②에서의 형상은 플라톤의 이데아곧 보편성의 의미와 비슷하다는 이유로 타당하지 못하기 때문에, 결국 ③이 가장 ‘실체’에 가깝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판단하며 기체는 질료와 형상의 합성체로 고려되어야 한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주장한다. 즉 실체는 제 1차적 존재로서 곧 기체와 의미가 상통하고, 따라서 이와 같은 맥락에서 ‘실체’에는 형상과 질료가 이미 내재되어 있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가장 중요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일반 형이상학 중에서 실체라는 개념을 다룸에 있어서 반드시 뒤따르게 되는 중요한 개념은 <4원인(aitia)>과 <현실태(energeia)-가능태(dynamis)>이다. 이 개념에 의해서 결국 ‘실체’가 ‘실체’일 수 있으며, ‘질료’와 ‘형상’이 곧 ‘실체’와 부합될 수 있기 때문이다.
먼저 4원인에 대하여 살펴보자.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 5권에서 사물 및 세계가 구성되는 한에 있어서의 네가지의 원인을 규정하였다. “첫째는 어떤 것을 이루고 있는 구성 요소 및 물질로서의 ‘질료인’, 둘째는 형상이나 원형으로서의 질료가 성장하거나 발전해주는 것을 규제하는 법칙으로서의 ‘형상인’, 셋째는 운동이나 정지의 제일 근원으로서의 ‘작용인’(후기 아리스토텔레스 주의자는 이것을 ‘능동인’이라 함), 넷째는 목적이나 종국 목적으로서의 ‘목적인’이다.”{Mt.5 1013a24-29 참조} 처음 두 원인은 내적인 것으로서의 <운동되는 것>이며, 나중 두 원인은 외적인 것으로서의 <운동하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서의 원인들(aitia)에 대한 네가지 분류는 곧 세계 질서의 궁극적인 원인에 대한 물음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결론인 것이다.
원래 원인들(aitia)라는 단어는 aition이라는 단어의 복수이다. 또한 aition의 본래 뜻은 “어떤 주어진 사태에 대한 법적 책임을 떠 맡는 것”이라는 뜻이며, 이러한 의미에서의 aitia는 어떤 행위(것)에 대한 책임들을 말하는 것이다. 어쨌거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세계내 사물의 원리를 4원인으로서 모두 규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예를 들면, 첫째로 어떤a라는 식물이 바로 그 a라는 식물이기 위해서 잠재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것으로서의 aʾ라는 종자등의 ‘질료인’이 있어야 하고, 둘째로 어떤 a라는 식물을 내재하고 있는 aʾ종자등의 질료가 바로 그 a라는 식물의 특징을 가지고 있는 방식으로 성장하는 한에 있어서의 ‘형상인’이 있어야 하며, 셋째로는 그 어떤 a라는 식물의 aʾ라는 종자등이 또 다른 어떤 식물로부터 왔으며, 결국 그 aʾ라는 종자등은 바로 그 a라는 식물이 되어, 또 다른 aʾ등의 종자를 낳게 된다는 한에 있어서의 식물의 ‘작용인’인 것이며, 넷째로 이런 a라는 식물의 성장 과정 자체가 향하는 바에 있어서의 완성적인 것이라는 의미, 즉 더 이상 성장하지 않으며 새로운 종자등이나 열매들을 생산해 내는 것으로서의 ‘목적인’인 것이다. 위와 같은 의미로서의 4원인론에 의해서도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의 근본 바탕이 생물학과 매우 밀접하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앞서도 이미 말한 것처럼, 그의 형이상학은 생물의 존재 원리를 설명하려는 자연학에서부터 비롯되었고, 더 나아가 그 생물이 살고 있는 세계를 규명하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현실태’와 ‘가능태’라는 문제는 더욱 더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의 핵심으로 접근해 나아가게 한다. 즉 질료-형상이라는 개념이 존재를 정(靜)태적인 원리에서 파악하려는 것이었다면, 그에 필수적으로 수반하는 가능태-현실태라는 개념은 존재를 동(動)태적인 원리로서 파악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다시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앞서 말한 `기체'(hypokeimenon)의 문제이다. 앞서 이미 질료는 형상의 개발이 일어나기 전에 계속적으로 밑바탕에 깔려 있는 것이라 하였다. 그렇다면 기체는 사실 이러한 형상이 바탕이 되는 그 무엇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기체는, 형상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질료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같이 생각되는 것이다. 그러나 기체는 실체와 일맥상통한다는 의미에서, 또 아리스토텔레스가 실체를 ‘질료와 형상의 합성적인 것’이라 강조하였다는 점을 감안하여 볼 때, 기체 역시 이와 동일한 논리로서 고려되어야 하리라 생각된다. 그렇다면 가능태와 현실태란 무엇인가? 사실 가능태와 현실태라는 개념은 어떤 유(類)에 포함되는 개념이 아니고, 이제까지 존재의 개념을 파악해 왔던 것같이 유비적으로 파악되는 것이다. 앞서 든 예로서 설명한다면, 어떤 a라는 식물의 종자인 aʾ는 아직 현실적으로 a라는 식물이 되지 않기는 했으나 a라는 식물이 된다는 의미에서 즉 아직 현현되어지지 않은 a라는 식물로서의 가능태이며, 또한 aʾ라는 종자가 현실태로 존재하므로 a라는 식물이 존재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aʾ라는 종자의 현실태인 것이다. 즉 하나의 형상을 형성시켜주는 과정 그 자체를 현실태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위와 같은 논리에서 결국 ‘완전태(entelecheia)’라는 개념이 도출된다. 이 완전태란 본래 ‘그 자체 안에 자기의 목적을 갖는 것’이라는 뜻으로서 그 형성된 형상의 현현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다. 곧 완전히 질료가 실현되는 형상, 그리고 가능태가 현실태화된 것을 말하는 것이다. 본래 이런 형식의 사물 및 세계 구현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체계 전체가 ‘목적론’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해 주는 점인데, 이러한 맥락에서 영혼이나 신(神)등의 문제등도 필연적으로 나오게 된다.
Ⅳ. 특수 형이상학으로의 확대
여태까지는 어떤 사물이나 그 사물이 속한 세계를 살펴봄에 있어서 한 사물이 아직 완결되지 않은 조건과 완결된 조건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구분을 통해 모든 생성과 변화라는 것이 질료인과 형상인이 작용하는, 즉 질료가 형상을 향하여 움직이고 있는 관계라는 그의 존재론을 알아 보았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이러한 질료와 형상의 문제를 넘어서지만, 절대적으로 질료-형상의 개념을 내포하는 영혼론 및 신(神)론을 질료형상론의 연장선 상에서 간략하게나마 살펴봄으로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형상론」이 최종적으로 나아가고 있는 바에 대해 고찰하고자 한다.
이미 살펴 보았듯이, 아리스토텔레스 「질료형상론」의 내재적 원리는 ‘운동’이지만, 사실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전체의 근거는 ‘목적론’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적으로 생겨나 존재하는 것들에게는, ‘무엇인가를 겨냥하고’ 있음이 현전해 있다.”{Ph.2 198b45}라 주장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사물의 구성원리는 물론이거니와 구성, 그 자체라는 면에 있어서도 ‘어떤 것으로의 향함’이라는 개념을 특별히 취급한다. 이것이 곧 그의 목적으로서의 세계 구조라는 그의 세계관인 것이다.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이미 질료와 형상이라는 개념을 내포하고 있는 ‘변화‧운동’의 개념도 필연적으로 수반되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바로 이런 세계관이 그의 영혼론이나 신(神)론 의 근원이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만약 어떤 특정 d라는 동물이 존재하고 있다면, 특정 d라는 동물은 그 d라는 동물들의 유(類)에서 하나의 구성원이라는 것을 주장함으로써 그 개체를 능가하고 있는 어떤 무엇을, 즉 그 d라는 동물들의 유(類)라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며, 바로 특정 d라는 동물로서의 개별적 생명의 의미 자체가 그 d라는 동물의 삶 자체를 영위하고, 또 그 d라는 동물들을 지탱시켜 나가게 한다는 점에서 목적론은 타당성을 확보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로, 우주 내에 존재하고 있는 온갖 것들은 그것들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신의 불변적인 행동을 모방한다는 점, 즉 예를 들면 동물들은 그 자기 자신의 유(類)를 지탱하려 하고, 또 별들은 늘 같은 원을 그리며 운동함으로서, 그리고 원소들은 한결 같이 자신의 속성을 드러내 보임으로써 그러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종국적으로 만물은 <신을 겨냥하고> 있다는 것이 그의 철학의 가장 주된 결론으로 귀착인 것이다,
위와 같은 면과 밀접히 연결되어,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서의 영혼론은 그의 철학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본래 ‘영혼(psyche, anima)’은 어원상 ‘(생명의) 숨결, 호흡’을 뜻하며 모든 식물과 동물이 가지고 있는 어떤 내재적인 성질의 ‘힘’이고, ‘누우스(nous)’를 내포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영혼’을 질료-형상론에 비추어서 ‘신체의 형상’이라 규정하여, 영혼을 물질적인 원자로 보는 데모크리토스의 유물론적 견해나 영혼을 신체와 외적으로만 결합되어 있다고 보는 플라톤 등의 극단적 이원론을 극복하는 견해를 주장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기본적으로 영혼을 유기체의 본질적‧작용적‧형성적 원리(energia적, entelecheia적)로서 질료로서의 신체와 통일을 이루고 있는 ‘형상’임을 주장하고, 그런 한에서 영혼은 살아있는 모든 존재자의 비가시적인 실체적 모습을 띤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혼은 물리적인 신체의 제일 완전태’라 설명할 수 있게 되며, 그리고 가능태와 현실태라는 측면에서도 영혼은 신체에 대한 가능태로, 좀 더 복잡한 기능인 누우스에 대한 현실태라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러한 질료와 형상이라는 맥락에서 결국 ‘영혼’개념 역시 ‘운동’ 개념에 연관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운동’이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영원하고 무한한 운동이라 하며, 그의 ‘신(神)’ 개념으로 확장시켜 나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와 같은 의미에서 우리는 영원하고 움직이지 않는 실체가 있다는 것이 필연적이다라고 주장해야 한다.”{Mt.12 1071b4}라 말한다. 이것이 바로 ‘부동의 원동자(to proton kinoun akneton)’이다. 그리고 이라스토텔레스는 또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는데, “왜냐하면 존재(자)들 가운데에서 제일적인 것은 실체들인데, 만약 그것이 모두 가멸(可滅)적이라면 모든 것이 다 가멸적이게 된다. 그러나 운동은 생겨날 수도 중지될 수도 없는 것이며(항상 존재해 왔으므로), 시간도 역시 마찬가지이다.”{Mt.12 1071b6} 이렇게 아리스토텔레스의 ‘부동의 원동자’라는 개념의 근거는 ‘운동과 변화’라는 개념에서 찾아지는 것이지, 어떤 인격적인 신이나 숭배의 대상으로서의 종교적인 신과는 명확히 구별되어지는 것이다. 즉 아리스토텔레스가 내세운 ‘부동의 원동자’로서의 신은 세계에 특정 의미를 부여하는 신도 아니고, 세계를 염려하는 그런 신도 아닌 일단은 존재론적으로서 파악될 수 밖에 없는 제일근원으로서의 존재(자)인 것이다. 그러므로 신적인 존재(자)로서의 ‘부동의 원동자’는 결국 세계의 ‘질료’ 속에 잠재해 있는 ‘형상’들을 현실적으로 나타나게 하는 한에 있어서의 궁극적인 작용자이며, 그런한에 있어서의 질서 체계 그 자체인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이 신은 모든 질료와 형상의 복합체가 아니라 그와는 완전히 독립되어 존재하며, 단지 존재함으로서 자연을 운동시키는 그런 초월적인 비물질적 존재(자)인 것이다.
따라서 결국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부동의 원동자’의 본성을 ‘순수형상’으로 파악하는데, 곧 모든 생성이 형상으로 되는 것이고, 또 모든 형상들의 형상들이 되어야하는 것이며, 원인의 원인이라는 ‘최종적 원인’이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부동의 원동자’의 작용을 “사랑 받는 자가 사랑하는 자를 움직이는 것처럼 움직임을 낳는다.”{Mt.12 1072b3}라 표현한다. 이런 식으로 ‘부동의 원동자’가 세계를 작용토록 하고, 질서 지우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신적인 초월성이 누우스(nous)와 동일한 것이라 아리스토텔레스는 주장하며, 그리고 이렇게 순수한 누우스의 집합체인 신은 곧 영원 그 자체이고, 복됨 그 자체로서의 존재(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은 많은 면에서 플라톤의 생각들과 가까운 것 같기는 하다. 그러나 플라톤은 ‘데미우로고스(demiourgos)’라는 개념하에 신 자체의 최고성을 말하기를 주저하며 창조라는 개념을 집어넣는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신을 지고지순(至高至順)의 존재(자)이지만 시작도 끝도 없는 존재(자)라는 것을 확언하고 있다는 점에서 양자의 큰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Ⅴ. 결어
이 글에서 필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방대한 형이상학 체계를 ‘질료-형상’의 관계로서 일부분이나마 나름대로 살펴보려 하였으며, 부족하나마 그의 형이상학 체계의 단초가 되는 흐름을 「질료형상론(hylemorphism)」이라 규정하려 시도하였다. 그러나 사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체계를 이렇게 한 몫에 꿰뚫어서 파악하는 것은, 필자에게 있어서는 분에 넘치는 시도였고 무리한 시도였었다는 점을 솔직하게 시인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이나 언명들이 그의 연령이나 작품들에 따라 약간씩 상이하게 주장되었다는 점만으로 미루어 볼 때에도 여기서와 같은 필자의 시도가 거의 별 의미를 찾을 수 없는 시도라고 비판받을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한 철학자의 학문 체계를 단지 하나의 흐름을 통해 파악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러한 비판을 무릅쓰고 필자가 이와 같은 시도를 통해 더욱 더 얻고자 했었던 것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필자 자신의 ‘사유의 길’을 모색하려는 ‘필자 자신의 어설픈 몸부림’이었다고 변명하고 싶다.
어쨌든 필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을 「질료형상론」과 연결하여 살펴보려 노력하였으며,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형상론」 역시 여러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는 이론이라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즉 본래 아리스토텔레스 의도는 플라톤 등의 이데아론이 전혀 현실적이지 않다는 점을 비판하려던 것이었으나 오늘날의 관점은 물론, 과거의 관점에서도이렇게 보는 것이 무리가 있을 지라도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의 이론들 또한 비현실적이었다는 사실은 더욱 더 많은 철학적 해석 및 새로운 철학적 사유의 여지들을 남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들은 스승이었던 플라톤의 주장에 대해 반대하려는 입장이었는데, 많은 후대의 학자들이 지적하고 있듯이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보다 더욱 플라톤적이다.」라고 하는 판단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의 난해함과 더불어 어느 정도의 한계성도 지적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끼친 영향으로 미루어 볼 때, 그의 철학은 희랍철학, 더 나아가 서양철학의 전반적 체계 전체에 대해 분할할 수 없는 거대한 산의 또다른 면(한쪽 면은 플라톤)이라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흡사 ‘철학’이라는 거대한 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인 형이상학에로 올라가는 또 하나의 큰 길이라 보는 것이 더욱 더 적당한 비유일 것 같다.
분명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스승이었던 플라톤과는 매우 다른 사유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그 길은 플라톤의 길이 없었다면 생길 수 없었던 길이 었을 것이다. 플라톤이 기하학등의 수학적인 대상들로부터 형이상학에로 나아가려 시작한 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길은 자연과학, 특히 생물학에서부터의 시작이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러한 결론은 너무나도 당연한 결론일 것이다. 게다가 비록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크게 받았던 아퀴나스의 경우도 그의 사유의 시작은 기독교적 신학이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를 필두로 하여 고대 철학 전체를 비판하였던 하이데거 사유의 길이 훗설의 현상학이 훗설의 현상학은 수학과 심리학의 배경에서 발생하기 시작하였다.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미루어 볼 때, 그들의 길은 그 나름대로 당연한 결론들이었으리라 판단된다.
이와 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형상론」이 아주 놀랄만한 형이상학 체계라는 데에는 누구도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특정 내용에 대한 문제점이나 해석에 관한 문제는 일단 접어두고서도 말이다. 우리는 보통 플라톤의 단계에서 우리가 사유할 수 있는 모든 철학적 대상 및 문제점들이 거의 다 제기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철학에 있어서의 아리스토텔레스의 공로는 헤겔 등은 물론, 최근에는 마르쿠제 등까지 강조하는 ‘앞선 이론에 대한 과감한 비판’을 시작하였다는 점에서 실제로 철학을 부흥시킨 철학자라 평하는 것도 그리 큰 무리가 따르지 않는 평가라 생각된다. 즉 비록 철학의 시작은 탈레스부터 였었고(이 견해는 다른 이론들이 분분하지만), 철학적 정신의 실제적 구현은 소크라테스의 공로였었으며, 철학적 물음의 이론화 및 논리 체계화는 플라톤의 업적이었지만, 그들에 못지않게 아리스토텔레스가 서양철학과 또 기타 다른 학문이 오늘날까지 올 수 있도록 하였던 ‘비판적 방법론’을 제공한 철학자였다는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어쨌거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플라톤과 더불어 후세에 굉장한 영향을 미쳤다. 그가 내세웠던 제일철학으로서의 학문은 그의 의도대로 철학은 말할 나위도 없고, 물리학‧생물학‧천문학등의 자연과학은 물론, 중세의 신학, 그리고 기타 여러 학문에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는 제일학문이 되었다.(사실 오늘날까지도 어떤 학문 분야에서든 그의 학문을 공부하지 않으면 안될 정도이다.) 비록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덕택으로 천문학등 일부의 학문체계가 근세까지 정체되어지는 현상을 낳기도 하였고, 또 바로 위의 언급처럼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형상론」과 같은 이론들 자체도 플라톤적이냐, 아니냐는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더 거시적으로 보았을 때 플라톤의 ‘이데아론’에 대한 반기를 들고자 했던 그의 철학은 실제로 모든 철학에 모범이자 한 방법론이 되었던 영웅적인 ‘반기의 효시’라 평가해야 마땅할 것이고, 그런 하에 있어서 그의 학문은 죽은 학문이며 한물 간 철학이 아니라, 20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생생하게 숨쉬고 있는 <살아있는 철학>이라 평가 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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