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상거래 취급 품목
취급 품목
1. 가죽
1. 유피(富皮) : 가죽에서 털을 제거하고 유성(富成)한 것
2. 피혁(皮革) : 날가죽과 유피를 총칭
3. 모피(毛皮) : 털이 붙어 있는 채로 유성한 것
4. 우피 : 다른 동물의 가죽보다 질기고, 특히 한우의 가죽은 질이 좋아서 그 용도가 대단히 많았으며, 우리 나라에서는 가죽다리기가 일찍부터 발달하여, 삼국시대에는 기술자가 일본에 건너가서 기술을 전파할 정도였다. 용도는 다양하여 가죽신•가방•옷•지갑 등의 공산품 제조에 이용.
- 전거: 成宗實錄, 明宗實錄, 經國大典, 耳溪集, 星湖僿說.
2. 갓
시속에 따라 갓모자의 높이와 양태의 넓이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갓의 모양이 구체적으로 논의된 것은 1485년(성종 20) 3월 “입자의 모양이 승립(僧笠)과 같으니 이를 개정하라.”고 하는 기록에서부터이다.
당시의 갓은 모자의 정상이 둥그렇고 테가 넓은 형태였다. 연산군 초에는 둥글던 모정(帽頂)이 조금 뾰족하게 변하였고, 이 후부터 모자의 모양이 위는 좁고 아래는 넓은 원통형으로 된 것이라 생각된다.
1504년(연산군 10) 5월에는 모자가 높고 양태가 작은 새로운 형태의 갓을 만들도록 하였으나, 잘 지켜지지 않았다. 따라서, 1530년(중종 25) 5월에는 모자의 높이나 양태의 넓이를 절충한 새로운 형태의 갓을 만들도록 하였다.
그러나 중종 말기에는 모자의 높이가 극도로 높아지고 양태는 극히 좁아졌으며, 명종초에는 모자의 높이와 양태의 넓이를 적당히 가감하여 만든 경쾌한 형태의 ‘김순고입자(金舜皐笠子)’가 등장하였다. 그러다가 곧 다시 모자는 점점 낮아지고 양태는 우산을 펼친 모양처럼 넓어졌다.
1556년(명종 1) 입제(笠制)의 개정이 다시 논의되었으나, 주로 모자가 낮고 양태는 극히 넓은 형태의 갓이 명종 말기까지 쓰였다. 그러나 선조 때에는 초년부터 모자가 높고 양태가 좁아지기 시작하여 말년까지 계속되었다.
광해군 때에는 그와 반대로 양태가 극히 넓어지고 모자가 아주 낮아져 안반처럼 넓은 양태에 마치 주발을 엎어놓은 것 같은 모양의 갓이 유행되었다. 넓은 양태의 갓이 인조 말부터는 갑자기 모자도 높아져서 이른바 ‘큰갓’이 되었으며, 효종 때까지 변함없이 사용되었다.
또, 숙종 때는 한때 모자가 낮고 양태가 좁은 ‘작은갓〔小笠〕’이 유행했다. 그러나 영•정조 때의 갓은 그 시대의 풍속도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양태가 비교적 넓었다. 거기에 밀화나 호박•대모 등으로 만든 갓끈을 가슴 밑으로 길게 늘어뜨려 그 멋을 한층 더하였다.
순조 말기에는 양태가 더욱 넓어져서 종전의 어깨를 덮을 정도에서 앉은 사람을 완전히 덮을 정도가 되었는데, 흥선대원군 집정 이후 사회개혁의 일환으로 종래의 ‘큰갓’은 ‘작은갓’으로 변화되었다
(1) 진사립 : 머리카락보다 더 가늘게 다듬은 죽사(竹絲)로 갓모자와 양태를 네겹으로 엮고, 그 위에 중국산 촉사를 한올한올 입혀서 칠을 한 것으로, 왕이나 귀인이 착용하던 극상품(極上品)이다. 왕이 쓰는 이른바 어립(御笠)에는 은각 밑뿌리에 당사(唐絲)를 물들여서 꼰 홍사(紅絲)를 감는다.
(2) 음양사립 : 갓모자는 말총으로 곱게 엮고 양태만 죽사에다 촉사를 올려 옻칠한 것이다. 진사립의 다음 등품이며, 은각 밑뿌리에는 청사(靑絲)를 두른다.
(3) 음양립 : 말총으로 만든 갓모자인 총모자에 양태는 죽사를 쓰나 양태 위는 촉사 대신 생초(生錞)를 입혀 옻칠한 것이다. 음양사립 다음 등품이며, 음양립부터 아래 등품의 것은 은각 밑뿌리에 녹사(綠絲)를 두른다.
(4) 포립 : 총모자와 죽사로 엮은 양태로 되어 있고, 양태 위는 명주나 얇은 베를 입혀 옻칠한 것이다.
(5) 마미립 종립(汐笠), 혹은 마종립(馬汐笠)이라고도하며, 말총으로 갓모자와 양태를 엮어 만든 것임
-전거: 朝鮮王朝實錄, 大東野乘, 五洲衍文長箋散考, 增補文獻備考, 林下筆記, 人間文化財(芮庸海, 語文閣, 1963), 韓國服飾史(石宙善, 寶晉齋, 1971), 韓國의 冠帽(沈載完•李殷昌, 嶺南大學校新羅伽倻文化硏究所, 1972).
3. 금
15세기의 금광업은 조정에서 국용과 사대에 필요한 금을 얻기 위하여 농민들의 부역에 의한 관영형태로 운영되었으며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의 금광업은 민간자본가와 농민들이 영리와 생계를 위하여 영위한 것이다.
15세기에 조선정부는 국용과 사대를 목적으로 하는 금을 조달하기 위하여 국내의 민간에 소장된 금을 거두어들이는 정책과 각지의 금광을 개발할 정책을 동시에 실행하였던 것이다.
정부는 금광개발정책을 위하여 채방사(採訪使)를 각처의 산금지(産金地)에 파견하고 현지 농민들을 징발하여 부역노동시킴으로써 시채작업(試採作業)에 착수하였다. 그리하여 태조 초부터 성종 말에 걸쳐 개발된 금광은 33개 읍에 달하였다.
당시의 금광은 대부분이 사금광이었고 그 가운데 연간 2백 냥의 금을 채납하던 함경도의 단천•영흥•안변 산금지와 강원도의 정선•회양 산금지가 가장 산출량이 많은 곳이었다.
1782년(정조 4)에는 평안도 성천•자산 사금광이 개발되면서 곧 청천강 남북의 사금광이 개발되었고, 18세기 말에는 함경도•황해도•경기도•강원도•전라도까지, 그리고 19세기 초에는 전국 각지에서 사금광이 개발되었다.
1782년에서 수령수세제(守令收稅制)하의 물주경영형태(物主經營形態)가 금광업에 적용되기 시작한 1806년(순조 6)까지26년간은 호조•장용영(壯勇營)•비변사(備邊司)•군기시(軍器寺)에서 사금광을 실점수세(設店收稅)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금광이 호조의 소관하에 있었고, 호조가 계사(計士)를 파견하여 설점수세하였으므로 이 시기를 계사제(計士制) 하의 사금광업기라 할 수 있다.
계사제하의 금광업정책은 농민들의 사금광개발을 크게 억제하지 않았고 오히려 사금광에 투입된 농민들 곧 금군(金軍)으로부터 일정량의 세금을 받는 데에 역점을 두고 있었다.
계사제하의 호조와 영(營)•읍(邑), 계사와 물주, 계사와 금군 간의 이해가 대립되어 관리 경영상 모순이 심화되는 한편,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사금광의 잠채(潛採)가 만연되어 잠채광산에 대한 호조의 수세가 불가능하였으며, 금군의 갖가지 분쟁•불법행위를 제재할 조처가 없게 되자 이에 정부는 물주제에 의한 금군의 단속과 수세원(收稅源)의 확보를 기대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결국 1806년에는 호조판서 서영보(徐榮輔)가 수령수세제하의 물주경영을 사금광에 적용하도록 제청하여 결정된 것이다. 물주자본에 의하여 금광산이 설치, 운영되던 수령수세제하의 설점수세제는 서울과 지방상인으로 구성된 물주가 호조 또는 영•읍의 허가를 받아 금광채굴권을 확보한 뒤 금군을 모집하고 덕대(德大)를 선정하여 광산경영을 위임하였다.
덕대는 금광의 실질적인 경영자로서 물주의 자본으로 광산을 경영하였으며, 금군은 광산에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모여든 이농민(離農民)들이었다.
-전거: 韓國考古學槪說(金元龍, 一志社, 1977), 韓國文化史新編(中央文化硏究院, 1975), 李朝開港前後의 鑛業政策硏究(柳承宙, 亞細亞硏究, 1976), 韓國金屬工藝(秦弘燮, 一志社, 1980), 國寶 Ⅰ―古墳•金屬―(韓炳三編, 藝耕産業社, 1980), 資源總覽(動力資源硏究所, 1985), 金工(藏田藏, 中野政樹, 小學館, 1974), 朝鮮後期 金銀銅鑛業의 物主制硏究(柳承宙, 韓國史硏究, 1982), 韓國의 地質과 鑛物資源(延世大學校 地質學科同門會, 1982)
4. 나전칠기
조선 초기의 나전칠기는 고려시대 이래의 의장(意匠)을 계승하였지만, 그 잔손질한 솜씨가 성기고 거칠어졌으며 무늬의 정연함도 점차 잃어간다. 즉, 섬세한 국당초무늬보다는 꽃잎과 이파리가 굵직굵직한 모란당초 또는 연당초무늬 하나로 기물의 모든 면을 처리하는 예가 많고, 구도가 복잡하면서 꽉 짜여지기보다는 대칭이 흐트러지고 공간을 많이 남기며 전체적으로 어색한 일면을 가지고 있다.
소수의 귀족 취향에 영합하여 정교하고 우아하던 특성이 점차 민중적 취향으로 바뀌어 신선한 감각을 새롭게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따라서 대모의 복채나 금속판을 재단한 모진 단선의 사용은 자취를 감추고, 대신 15, 16세기의 청화백자에 등장하는 매화와 대나무나 꽃과 새를 배치하여 회화적 효과를 시도하는 새로운 경향이 나타났다.
그래서 시대가 내려올수록 대범하고 거친 표현의 회화적 의장이 정착되어 분청사기의 박지분청(剝地粉靑)이나 조화분청(彫花粉靑)의 맛을 느끼게 한다.
조선 전기 나전칠기의 전형적인 당초무늬 의장은 장방형의 납작한 의함(衣函)에 표현된 모란당초무늬를 통하여 접하게 된다. 만개한 꽃과 꽃봉오리를 전복자개로 오려붙이고 자유분방하게 뻗어나간 덩굴줄기도 자개를 끊어 이어붙였다. 그래서 종횡으로 뻗어나간 모습은 율동감을 주며 속도감을 느끼게 하여 중국이나 일본 것과는 전혀 다른 독특한 아름다움을 보여 준다.
이러한 모란당초무늬의 의장성은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일본의 나전칠기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임진왜란 후에는 당초문•쌍봉문•쌍용문 등이 한결 후퇴하고, 새로 소나무•대나무•매화•사슴•학 등 십장생을 주제로 하는 서정적인 도안이 부각되었다.
이러한 도안은 회화적인 요소를 잃지 않고 있는 것이 특색이다. 이들 나전 기물은 문방구에 이용되는 경우는 적고, 화장구•재봉구•소반•장롱 등의 가구로 확대되어 대중화하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말기인 19세기에는 나전기법이 좀더 다양해진다. 문양보다 자연의 사실묘사가 더 많아지고 끊음질수법으로 귀갑문(龜甲紋) 같은 기하학적인 무늬를 기물 전체에 씌운다든지 산수풍경을 표현하는 것이 많아진다.
-전거: 漆器工藝論(金鍾太, 一志社, 1976), 고려나전칠기의 연구(곽대웅, 미진사, 1984), 韓國의 木工藝 上•下(李宗碩, 悅話堂, 1986), 중요무형문화재현황(문화재관리국, 1998).
5. 남성용 장신구
1. 상투관 : 상투에 씌우는 관으로 왕과 사대부가 집안에서 사용하였으며, 재료는 뿔•나무•종이•가죽에 흑칠을 하였다. 망건을 쓴 다음 상투관을 쓰며 비녀를 꽂아 상투를 고정시켰다.
2. 망건•관자•풍잠 : 망건은 상투를 할 때 머리가 흘러내리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이마에서 뒷통수에 걸쳐 두르는 것이었으며, 주로 말총을 엮어서 만들었다.
망건의 부속물인 관자와 풍잠의 재료에 따라 신분의 구별을 하기도 하였으며, 관자는 망건을 졸라 매는 끈인 당줄을 걸어 넘기는 것으로 망건 위의 양 옆 관자놀이에 달려 있으며, 권자(圈子)라고도 하였다.
신분이 높은 사람은 금•옥 등을 사용하고 정3품 이하 서민들은 골각•대모•마노•호박 등을 사용하였다. 말기의 유물을 보면 신분이 높을수록 금•옥 조각이 없는 간소한 관자를 사용하였다.
풍잠은 망건 앞에 다는 장식품의 일종으로 갓을 고정시키는 역할을 하였고, 상류층에서는 대모•호박•마노 등을 사용하였고 일반은 골(骨)•각(角)을 사용하였다.
3. 살쩍밀이 : 남자가 상투를 틀고 망건을 쓸 때 관자놀이와 귀 사이에 난 머리털(살쩍)이 흩어져 내리는 것을 막기 위하여 망건 속으로 밀어 넣을 때 쓰던 물건으로 재료는 대나무나 뿔로 만들며 형태는 얇고 길었다. 나비 1.5㎝, 길이 8∼10㎝ 정도로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수시로 머리를 정돈하였다.
4. 동곳 : 상투를 고정시키기 위해서 사용하던 것으로 기혼 남자의 머리장식품의 일종으로 끝이 두 갈래로 갈라져 현대의 머리핀 처럼 생겼다.
5. 갓끈 : 갓을 매는데 사용하는 끈으로 옥•마노•호박•산호•수정•밀화•헝겊•대나무 등의 여러 가지 재료가 사용되었으며 신분의 따라 차이가 있었다.
6. 광다회•세조대•각대 : 각대는 조선시대 관복에 하던 띠로서 허리에 두르는 것으로, 신분에 따라 각각 그 재료가 달랐다. 주머니•매듭•띠•노리개•유소 등에 사용하는 끈은 다회라고 한다. 실을 합사하여 두가닥 혹은 세가닥 이상으로 꼬는 끈과 네가닥 이상의 여러 가닥으로 쳐서 짜는 끈으로 나뉜다.
광다회는 폭이 넓고 납작하여 평직으로 짜서 허리띠 등에 사용하였고, 세조대는 실을 엮어 끈으로 짠것으로 광다회에 비해 얇고 좁으므로 세조대라고 하였다. 딸기술이나 봉술을 매달아서 마무리를 했는데 주로 전복 등에 씌였고 품위에 따라 색깔을 달리 하여 당상관은 홍색 또는 자색을, 당하관은 청색 또는 녹색을, 서민은 흑색을, 상제는 백색을 띠었다
7. 호패끈 : 조선시대 남자들의 신분증인 호패를 매달았던 끈으로, 신분에 따라 끈의 장식과 술의 모양이 달랐다
9 선추 :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사용하던 부채 끝에 달던 장식품으로 백옥•비취•호박•나무 등의 재료에 십장생 등의 무늬를 조각하고 매듭으로 마무리하였다. 선추 장식은 관직이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장식품이었다.
- 전거: 韓國服飾史(石宙善, 寶晉齋, 1971), 韓國裝身具美術硏究(黃閱根, 一志社, 1976), 한국복식사연구(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1976), 한국복식의 역사(이은창,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78), 伽倻の古墳(金基雄, 學生社, 1979), 한국의 장신구(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 1991), 국립경주박물관도록(국립경주박물관, 1992), 한국복식2천년(국립민속박물관, 1995
6. 놋그릇(유기)
놋쇠로 만든 생활도구. 유기(鍮器)라고도 한다. 놋쇠는 구리에다 주석이나 아연•니켈을 섞은 합금으로 청동기시대의 청동도 놋쇠의 일종이다. 조선시대에는 초기부터 국가에서 동을 채굴하여 유기의 생산을 장려하였다. ≪경국대전≫의 공조(工曹)편을 보면, 유기를 전담하여 놋그릇을 생산하는 유장(鍮匠)이 국가공무원으로서 본조(本曹)와 내수사(內需司)•상의원(尙衣院)에 각각 소속되어 있었으며, 지방관아의 공방에도 유기공들이 소속되어 있었다. 이밖에도 민간인 유기장들이 많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중기 이후에는 놋점 또는 놋전이라고 불리는 유기점이 따로 있어 각종 식기류와 풍물류의 놋그릇을 판매하였다. 6•25 전까지는 개성•안성을 비롯하여 김천•남원•운봉•전주•홍성•박천•평양•사리원•정주•서울 등지에서 놋그릇을 많이 만들었으나, 6•25 이후 연탄이 사용되면서 연탄가스에 변질되기 쉬운 놋쇠의 성질 때문에 차츰 없어지기 시작하였다.
주물유기로 가장 유명한 곳은 개성과 안성지방인데, 안성의 유기는 조형미가 아름다워 ‘안성맞춤’이라는 속담이 나올 만큼 품질이 좋았다.
또 순천지방에는 옥성기라는 놋그릇 형태가 있는데, 이것은 일명 궁구름옥성기 또는 옥바리라고 하며 근래에 와서는 일반적으로 반방짜라고 부른다. 이것은 그릇의 절반쯤은 손쉬운 주물식으로 만들고 그릇의 끝부분은 집게로 집어가면서 오목하게 두드리거나 짓눌러 만드는 방법의 그릇이다. 일반적으로 북한 산간지방의 놋그릇은 비교적 그릇이 크고 거칠며, 남한의 평야지방의 놋그릇은 작고 아담하며 섬세하다. 놋그릇의 종류로는 크게 식기류•혼사용구•제사용구•불기류•난방용구•등잔류 등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식기류는 숟가락•젓가락 외에 칠첩반상기(七─飯床器)•구첩반상기(九─飯床器)가 있다. 칠첩반상기란 그릇의 종류가 모두 뚜껑까지 32개가 한벌로 된 밥상의 식기를 말한다.
혼사용 유기로는 식기대접 두벌, 숟가락•젓가락 두벌, 사랑요강•안방요강, 큰 세숫대야(어린애 출산용), 작은 세숫대야 등이 있으며, 제사용 놋그릇으로는 구삼벌•제주발•갱기•수저•제잔•잔대•탕그릇•적틀•편틀•포틀•약기•제종지•제접시•모사기•퇴주그릇•주전자 등이 있다. 불기의 종류로는 대•소 불기, 놋동이•향로•촛대•향합•바라•범종•옥수기 등이 있다. 난방용구로는 화로•부젓가락•부삽, 등잔류로는 유경등잔•나비촛대 등이 있다.
이들 놋그릇은 시간이 지나면 푸른 녹청이 생기게 된다. 그러므로 이를 깨끗하게 닦는 것은 여인들의 일과이자 풍속으로, 암키와를 곱게 빻은 것을 수세미에 묻혀 윤이 반질반질하게날 때까지 닦았다.
- 전거: 世宗實錄, 成宗實錄, 肅宗實錄, 經國大典(法制處譯註, 一志社, 1981), 安城鍮器의 傳來(金鍾太, 安城郡廳, 1982), 鍮器匠(金鍾太, 文化財管理局, 1982).
7. 담배(연초)
우리 나라에는 1618년(광해군 10) 일본을 거쳐 들어왔거나, 중국의 북경(北京)을 내왕하던 상인들에 의하여 도입된 것으로 추측된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 나라 재래종의 품종명이 일본에서 도입된 것은 남초•왜초(倭草)였으며, 북경이나 예수교인에 의하여 도입된 것은 서초(西草)라한 것으로도 입증된다. 이렇게 전래된 담배는 1921년까지 300여 년간은 자유경작을 하다가 그 뒤 전매제도로 바뀌었다.
-전거: 俗談辭典(李基文, 民衆書館, 1962), 韓國民謠集 Ⅰ(任東權, 集文堂, 1974),
8. 당목
콩과의 상록교목. 동인도원산으로 따뜻한 곳에서 재배하는데, 높이는 4m가량 줄기에 잔가시가 있고 봄에 나비모양의 노란꽃이 핌. 목재는 활을 만드는데 쓰고 속의 붉은부분은 염료 및 약재로 씀 우리 나라에서 산출되지 않았으므로 세종 때에는 9년간에 7만여 근이 수입되기도 하였다. 소방목이라고도 함.
-전거: 大韓植物圖鑑(李昌福, 鄕文社, 1982). 두산세계대백과사전(두산동아, 1997)
9. 대구
《신증동국여지승람》등에 의하면 경상도 , 강원도 , 함경도에서 어획되는 것으로 되어 있다. 1776년(정조 즉위년)에 간행된 《공선정례 供膳定例》에 의하면 진상품 중에 건대구어 , 반건대구어 , 대구어란해 , 대구고지해 등이 보인다. 대구 건제품과 알이나 내장으로 담근 젓갈이 고급식품으로 취급받았음을 알 수 있다.
-전거: 東醫寶鑑, 新增東國輿地勝覽, 韓國水産誌 1(農商工部水産局, 1908), 한국수산업사(박구병, 정음사, 1975), 한국어도보(정문기, 일지사, 1977), 해양수산통계연보(해양수산부, 1998).
10. 도자기
분청사기 : 문양은 상감•인화•박지•조화•철화•귀얄•담금분장의 7종류가 있으며, 상감과 인화와 박지와 조화 중 두 가지 또는 세 가지를 함께 시문하는 경우도 있다. 상감문은 조선조 초에 전국적으로 나타나며, 어느 것이나 힘차고 활력에 넘치며, 15세기 중엽 후반경의 면상감을 곁들인 작품은 신선하고 건실하다. 인화문도 전국적으로 분포되었으나 특히 영남지방에서발달하여 시문이 치밀하고 조밀하여 백토와 담청색이 엮어내는 신선함이 있다. 그리고 박지문•조화문은 자유분방하고 활달 대범한 공예의장의극치를 이루면서 호남지방에서발달하였으며, 철화문은 자유분방하고 활달 대담한 회화적 필선에 담긴 운치와 활력이 넘치는데, 충청도의 계룡산에 가마가 있다. 귀얄문〔刷毛目〕과 담금분장은 분청사기후기의 현상이며 주로 호남지방에서 발달하고 영남지방의 서부 일대와 일부 충청도지방에서 보이고 있다. 분청사기는 16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점차 쇠퇴하여 백자로 흡수되기 시작하면서 16세기 말 임진왜란으로 그 맥이 끊기고 말았다.
백자 : 백자에 대한 높은 기호는 전기로부터 중기를 거쳐 후기까지 변함이 없으나, 후기에 오면 일부 지식인 사이에 국가가 시책으로 사치풍조를 엄금하고 검약한 생활을 하여야 한다고 국령으로규정한 데 그 원인이 있다고 이를 통렬하게 비판한 예도 있다. 그러나 국가에서 금령(禁令)으로 문양이 있는 화사한 자기를 만들지 못하게 하고 갑번(匣燔)은 왕실 이외는 못쓰게 하였으나, 화사한 도자기보다는 좋은 흰색인 갑번의 수요가 계속 늘어서 가장 아름다운 흰색을 선호하는 풍조는 이때까지 거의 변함이 없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전기 이래도 청화백자의 선호는 순백자 다음으로 높았으며, 후기에 와서는 청화백자의 생산이 백자에 비하면 얼마 되지 않지만, 전기•중기에 비하면 큰 폭으로 늘어났음을 알 수 있고, 기형과 문양이 매우 다양다종해져서 자기에 대한 선호도도 어느 정도 바뀌고 있고, 엄한 금령이 융통성 있게 운용되고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전거: 韓國靑磁陶窯址(崔淳雨,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82), 國寶 3―靑磁•土器―(崔淳雨, 藝耕産業社, 1983), 高敞雅山댐水沒地區發掘調査報告書(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 1985), 莞島海底遺物(문화재관리국, 1985), 韓國의 美 4―靑磁―(崔淳雨, 中央日報社, 1985), 李王家博物館所藏品寫眞帖(李王職, 1912)
11. 땔감
한국은 오랫동안 온돌에 의한 난방법을 쓰고 있었고 어느 가정이나 안방에 붙은 부엌은 음식을 만들기 적당한 구조로 설계하고 있다. 아궁이에 화목(火木) 또는 시목(紫木)(땔감)을 태워서 방고래로 열기가 통과하게 하는데 그 아궁이에 부뚜막을 구축하여 대 • 중 • 소의 무쇠솥을 걸어 놓고 물도 데우고 밥도 짓고 국도 끓이게 설계하였다. 사랑방과 같은 곳은 부엌이 없고 함실아궁이라고 하여 솥밑을 통과하지 않고 바로 불길이 방고래로 들어 가도록 설계하였다. 아궁이에 지피는 연료는 농촌에서는 벗짚이나 콩깍지, 낙엽 솔가지, 장작 등 닥치는 대로 쓰고 도시에서는 솔가지나 장작 등이 사용되었다. 부뚜막에 걸어 놓은 솥으로 대부분의 음식을 만들지만 따로 풍로나 화로에 장작불에서 얻어진 숯불이나 참숯을 담고 남비 석쇠 등을 이용하여 음식을 만들기도 하였다
일본인들이 들어오면서 화로에 참숯을 피우는 일이 더욱 많아졌다. 한국은 아궁이에 불이다 타면 질화로나 놋화로에 벌건 숯불을 부삽으로 옮겨 담아 조리에도 쓰고 방안에도 들여 놓는 습관이 있었다.
조선후기 서울지역에서는 마포의 토정지역, 두모포, 용산, 용산의 올리지역, 서강, 서강의 흑석리지역, 뚝섬등지에서 땔감 및 땔감류를 판매하였다.
-전거: 《서울육백년사》 , 〈서울시사편찬위원회〉. 1996
이태진외, 서울상업사, (태학사, 2000)
12. 마미
말의 꼬리를 뜻하는 말로서 마미총이라고도 한다.
조선시대에는 망건도 이 마미총 또는 말총으로 만들었는데, 마미총으로 만든 것을 마미립이라 하였다. 마미립은 당상관이 쓰는 화미한 갓으로 조선후기 갓의 대표적인 것이다.
-전거: 《서울육백년사》 , 〈서울시사편찬위원회〉. 1996
13. 망건
상투를 틀고, 머리카락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머리에 두르는 장식품. 따라서 관모라기보다는 머리장식의 하나로서, 그 위에 정식의 관을 쓴다. 망건은 당•편자•앞•뒤의 네 부분으로 구성되며, 앞이 높고, 옆쪽이 조금 낮은 모양으로 되어 있다.
재료로는 말총〔馬尾毛〕이나 인모(人毛)를 사용하나, 인모는 일반적인 것은 아니고 해진 망건을 수리할 때 쓰인다. 망건은 명나라에서 전래되었다고 하나, 재료나 용도•형태가 중국의 것과 다르다.≪세종실록≫ 2년 경자조에 마미망건(馬尾網巾)을 명나라 사신에게 증여한 기록이 있고, 1488년(성종 19)에 왔던 명나라 사신 동월(董越)의 ≪조선부 朝鮮賦≫에도 조선의 망건은 모두 말총으로 만든다고 적고 있다. 그러므로 망건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토착화된 뒤, 말총을 재료로 사용하는 방법은 도리어 중국으로 역수출된 것으로 여겨진다.
-전거: 한국복식사연구(柳喜卿, 梨花女子大學校出版部, 1975), 복식사전(도서출판 라사라, 1991).
14. 먹
벼루에 불을 붓고 갈아서 그리거나 글씨를 쓰는 데 쓰는 서화 용구(書怜用具). 검은색의 고형체로서 벼루에 갈아서 사용하는 것으로 문방사우(文房四友)의 하나이다.조선 정조 때의 대제학 서명응(徐命膺)의 ≪고사신서 攷事新書≫에는 조림매묵법(造林煤墨法)이 자세히 적혀 있다.“송연 열 근과 아교 네 근, 물 열 근을 배합하여 먹을 만든다. 구체적으로는 물 아홉 근에 아교를 담가 동분(銅盆)에 넣어 녹인 다음 연(煙)이 섞일 때까지 나머지 한 근의 물로써 씻어 별기(別器)에 담아 물을 뿌리면서 수없이 찧어 만들어낸다.”는 내용이다.
우리 나라에 있어서 송연묵(숫먹•개먹)으로는 양덕(陽德)의 산품이 유명하고, 유연묵(참먹)은 해주의 것이 유명했다. 그리고 한림풍월(翰林風月)을 비롯하여 초룡주장(草龍珠張)•부용당(芙蓉堂)•수양매월(首陽梅月) 등이 상품(上品)이었다. 대개 목판 인쇄에는 송연묵을썼으며, 금속 활자 인쇄와 서예에는 주로 유연묵을 사용하였다.
-전거: 攷事新書(徐命膺), 輟耕錄(陶宗儀), 墨史(陸友)
15. 명란
명태의 알을 소금에 절여 삭힌 젓갈. 명란을 먹기 시작한 것은 명태가 많이 잡히기 시작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명태어업은 조선말의 어획고에 있어서 단연 수위를 차지하던 중요한 어업이었다.
명란젓이 문헌에 기록되기는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부터이고, 제조법은 1800년대말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되는 ≪시의전서 是議全書≫에 기록되어 있다.
-전거: 韓國水産發達史(水産業協同組合中央會), 1966, 韓國漁業史(朴九秉, 正音社, 1975), 韓國飮食-歷史와 調理-(尹瑞石, 修學社, 1983).
16. 명태
명태 어업이 본격적으로 발달하기 시작한 것은 조선 후기부터였으며, 명태라는 명칭이 널리 통용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효종 3년(1652)의 기록에 명태라는 이름이 보인다. 강원도에서 진상하는 대구 어란에 명태 어란이 첨입(添入)되어 있어 문제로 삼았는데 이 때 명태라는 이름이 사용되고 있다.
이 무렵에는 명태라는 이름이 널리 사용되고 있었던 것 같으며, 잡히기도 많이 잡혀 명태 어란은 귀하지 않은 식품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9세기에 있어서는 명태 어업이 가장 중요한 어업의 하나로 등장하고 있었음이 확증된다.서유구(徐有梏)의 ≪난호어목지 蘭湖漁牧志≫에는 명태를 한자로 명태어(明姝魚)라고 쓰고 속칭 생것은 명태, 말린 것은 북어라고 한다고 하고, 명태가 다산하여 전국에 넘쳐 흐르며 우리 나라 수산물 중에서 명태는 청어와 더불어 가장 많이 나는 것이라고 하였다. 명태의 자원이 아주 풍부하였고, 우리 나라 사람이 이를 아주 좋아했기 때문에 명태 어업이 대성황을 이루었던 것이다. 한말에 일본인들이 저술한 각종 서적에도 당시 명태 자원이 놀라울 만큼 풍부하였음을 이구동성으로 말하고 있다.
17. 모시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저마•구승백저포•십이승백저포•별승백저포•극상세저포•극세저포•상저포•흑저포•황저포•황세저포•홍세저포•자세저포•청저포•아청저포•예단백저포•진헌백저포 등의 기록이 각종 문헌에 나타나 있다.
조선시대 이후의 기록에는 생저(生苧)•백중저(白中苧)•백세저•장성저(長城苧)•장저(長苧)•청양저(靑陽苧)•한산저(韓山苧)•명산저(鳴山苧)•황저포 등의 기록이 있으며, 백당저•생당저•세당저 등의 기록도 있어, 중국 모시의 유입 현상도 나타난다.
모시의 생산 지역은 삼베의 전국 분포와는 달리 충청도와 전라도 지역으로 극히 국한적이다. 특히 충청남도 서천 지역의 모시가 품질과 제직 기술이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중에서도 한산의 세모시가 유명하다. 한산의 세모시 짜기는 중요 무형 문화재로 지정되어 모시의 재배•제사•제직의 기능을 이어가고 있다.
-전거: 高麗史, 朝鮮王朝實錄, 織物의 種類에 대한 硏究(閔吉子, 國民大學校, 敎育論叢 6, 1987)
18. 모자
조선시대에는 왕을 비롯하여 서민에 이르기까지 계급에 따라 다양한 모자가 있었으며 그 유물과 기록도 많이 전해지고 있다. 조선시대의 모자로는 면류관•원유관(遠遊冠)•통천관(通天冠)•익선관(翼善冠)•전립•복두•공정책(空頂岫)•양관•제관(祭冠)•탕건(宕巾)•초립•감투•평량자(平凉子)•갓•방립(方笠)•이암〔耳掩〕•유각평정건•조건•동파관(東坡冠)•충정관(沖正冠)•정자관(程子冠)•복건(幅巾)•방건(方巾)•와룡관(臥龍冠)•유건(儒巾)•휘항(揮項)•풍차(風遮)•만선두리(滿老頭里)•송낙•고깔•대삿갓•화관(花冠, 華冠)•족두리(簇頭里)•여자용 전립 등이 있었다.
-전거: 麗史, 高麗圖經, 韓國服飾史硏究(金東旭, 亞細亞文化社, 1973), 한국복식사연구(柳喜卿, 梨花女子大學校出版部, 1975), 복식사전(도서출판 라사라, 1991).
19. 목기
목기(木器)는 남원지방의 특산품으로서 특유의 향기와 정교하고 아름다운 모양, 그리고 단단한 목질과 벗겨지지 않는 옻칠 등으로 일찍이 조선 초기부터 그 명성이 알려져 왔다. 목기의 제품으로는 대부분 제기(祭器)인데, 그 외에 찬합(饌盒)•찻잔•상(床)•쟁반 등 각종 공예품과 바리때도 생산한다. 바리때는 전국 사찰의 85%를 이곳 남원에서 공급하고 있다. 원자재는 오리목•물푸레나무•박달나무•은행나무 등이며 그 재료에 따라 쓰임새가 다르다.
특히 남원 목기장의 특징으로는 옻칠목기를들 수 있다. 옻칠목기는 무공해자연칠로서 2∼3년이 지나면서 더욱 짙은 적색이 살아난다. 또한 방수는 물론 살균효과도 있으며 오랜 세월이 지나도 좀이 슬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전거: 文化財(全羅北道, 1997).
20. 목재
건축•가구•보드류•펄프•종이 등을 생산하는데 필요한 나무재료로서, 때로는 필요한 치수와 형태로 만들어 냈다.광복 이전의 우리 나라 목재공업은 1909년 통감부 영림서에 의하여 관영제재사업으로 시작되었다. 당시의 관영제재사업은 신의주 영림서의 경영하에 주로 군수용을 비롯한 연초포장상자 또는 침목 등의 공급을 맡았다.이 때에도 일부 원목이 해외로부터 도입되었는데, 1929년의 경우 남북한 총 목재공급량 239만 6,000㎥중 13%에 해당하는 외재를 미국•일본•필리핀 등지로부터 수입하였다. 광복 이전의 목재공업은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대체로 원시적인 제재형태를 벗어나지 못한 소규모의 수공업형태였으며, 산간지대를 중심으로 전국에 약 2,500여 개의 제재소가 난립하였다.
-전거: 韓國의 産業(韓國産業銀行, 각 해당 연도), 鑛工業統計調査報告書(經濟企劃院, 각 해당 연도), 産業合理化方向(韓國産業銀行, 1977), 한국목재공학회 20년사(한국목재공학회, 1992) 한국의 목재수급실태(임업연구원, 1997).
21. 미곡
쌀을 말한다. 조선후기에 이르러 도시와 농촌이 분리되면서 곡물시장이 형성됨에 따라 미곡 또한 주요한 상품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쌀을 파는 곳을 미전이라하는데 서울을 보면 상․하미전 두 곳만 있었던 미전은 남문미전․마포미전이 신설되어 네 곳으로 늘었다. 미곡은 백성의 주식이었다. 또한 상업의 발달에 따라 그 수요도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 들은 인구증가에 따른 곡물소비량이 증가되었다. 정조 7년의 경우 서울의 미곡 소비량은 대략 100만석정도로 추정되고 있었는데, 이 가운데 公家所出量 20여만석, 居京士大夫 私穀 20여만석을 제외한 60여만석이 미곡상인에 의하여 공급되는 정도였다.
-전거: 오성, 조선후기 상인연구(일조각, 1989)
22. 백삼승
흰무명
23. 벙거지
조선시대 궁중 또는 양반집 군노(軍奴)나 하인이 쓰던 털로 만든 모자. 짐승의 털을 다져서 전(氈)을 만들고, 그것을 골에 넣어 위는 높고 둥글며 전이 편평하고 넓게 되어 있는 평량자형의 쓰개이다.
전립(戰笠, 氈笠) 또는 병립이라고도 하는데, 전립(戰笠)이라고 할 때는 무관(武官)이나 대관(大官)이 쓰는 안울림벙거지도 포함된다. 벙거지는 대개 흑의(黑衣)와 병용하거나 전령복(傳令服)에 사용하였다. 안올림벙거지는 양테 안쪽에 남색 운문단으로안을 하였다. 일반 벙거지는 아무 장식도 없는 만듦새로 그 재료는 돼지털을 사용하였다. 또한, 벙거지는 일반 모자를 속되게 부르는 말이기도 하다.
-전거: 한국복식사연구(柳喜卿, 梨花女子大學校出版部, 1980).
24. 비단
조선시대에도 잠실(蠶室)을 두어 양잠을 발전시켰으며 왕비가 친잠례(親蠶禮)를 거행, 양잠을 장려하였다. 뿐만 아니라 ≪잠상집요 蠶桑輯要≫와 같은 문헌을 펴내어 기술 지도도 하였다. 그러나 ≪증보산림경제≫에서는 누에고치에서 실을 켜기 위해 끓는 물에 누에고치를 집어 넣었을 때 고치가 뱅그르르 도는 것은 번데기가 살고자 하는 것이므로 재산을 늘리기 위해 그러한 일을 하는 것은 인자의 도리가 아니니 늙은이의 옷이나 수의로 쓸 만큼만 누에를 치라고 하였다. 자애로운 선인들의 마음과 근검한 마음이 드러나는 기록이다.
조선시대에는 각색 주(紬)가 중국으로 수출되었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주가 많이 생산되어 남녀의 일상 의료(衣料)로서 흔하게 사용되었다. 주는 단조롭고 섬세한 것으로서 우리 민족의 미적 의식에 적합해 선호되었던 것이다. 오늘날 생산되는비단은 주•사•나•단이 주종을 이루는데, 특히 양단•숙고사•갑사•생고사•항라•유동 및 각종 수직주 등이 많이 이용된다. 이 밖에 실크스크린에 의한 염색 비단도 생산되고 있다. 비단은 주단(綢緞)이라고도 하여 비단가게•주단가게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조선시대 궁중 또는 양반집 군노(軍奴)나 하인이 쓰던 털로 만든 모자. 짐승의 털을 다져서 전(氈)을 만들고, 그것을 골에 넣어 위는 높고 둥글며 전이 편평하고 넓게 되어 있는 평량자형의 쓰개이다.
전립(戰笠, 氈笠) 또는 병립이라고도 하는데, 전립(戰笠)이라고 할 때는 무관(武官)이나 대관(大官)이 쓰는 안울림벙거지도 포함된다. 벙거지는 대개 흑의(黑衣)와 병용하거나 전령복(傳令服)에 사용하였다.
-전거: 農桑輯要, 林園經濟志, 織物의 種類에 관한 硏究(閔吉子, 國民大學校 敎育論叢 6輯, 1986), 韓國傳統織物의 纖維學的 特性에 관한 硏究(閔吉子, 漢陽大學校大學院, 1987).
25. 빗
① 얼레빗 : 빗살이 성긴 큰 빗으로 월소(月梳)라고도 하며 엉킨 머리를 대충 가지런히 할 때에 사용된다. 반월형 또는 각형의 등마루에 빗살이 한쪽에만 성글게 나 있는 형태이다. 오늘날에도 짧게 깎은 머리나 퍼머넌트한 머리를 가볍게 빗어 넘기는 데에 사용되고 있다
② 참빗 : 빗살이 아주 가늘고 촘촘한 대빗으로 진소(眞梳)라고도 한다. 머리를 정갈하게 다듬는 데 사용하며 크기에 따라 대소•중소•어중소•밀소로 구분한다. 이 중에서도 중소가 가장 많이 쓰였는데 머리형태의 변화와 더불어 요즈음에는 일상생활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실정이 되었다
③ 면빗 : 살쩍을 빗어 넘기는 데 쓰이는 작은 빗으로 면소(面梳)라고도 한다.
④ 음양소 : 빗살이 한쪽은 성기고 한쪽은 빽빽한 빗으로 다용도로 쓸 수 있는 이점이 있다. 이러한 형태의 빗은 근래에도 볼 수 있는데 주로 남자들이 머리 정리에 사용하고 있다.
⑤ 상투빗 : 상투를 틀 때 머리털을 정리하던 조그마한 얼레빗 모양의 것이다.
⑥ 살쩍밀이 : 망건(網巾)을 쓸 때에 빠져 나온 살쩍을 망건 밑으로 밀어 넣는 데 사용하는 것으로, 대나 뿔로 얇고 갸름하게 만들었다.
-전거: 한국복식사연구(柳喜卿, 梨花女子大學校出版部, 1980), 韓國化粧文化史(全完吉, 열화당, 1987).
26. 산호
자포동물문(刺胞動物門) 산호충강에 속하는 동물의 총칭. 우리 나라에서도 조선시대부터 비녀•관자•단추•노리개 등으로 많이 애용되었다. ≪오주연문장전산고≫의 〈오주서종〉에는 산호류 항목이 있어, 산호에 홍색인 것, 청색인 것, 선홍색인 것이 있는데, 담홍색에 가는 세로무늬가 있는 것이 상품이라 하였고, 진짜와 가짜를 가리는 법〔辨眞暮法〕, 가짜 산호를 만드는 법〔制假珊瑚法〕을 기록하였으며, 우리 나라의 동해와 호남의 제주에 산호가 난다고도 하였다. ≪규합총서 閨閤叢書≫의 〈동국팔도소산〉란에서는 제주에서 산호지(珊瑚枝)가 생산된다고 하였다. 오늘날 제주도해역에서는 뿔산호목에 속하는 해송이 나는데, 그 검은 골축으로 목걸이•귀걸이•브로치•단추•넥타이핀•머리핀•담배물부리•반지•도장•지팡이 등 여러 가지의 세공토산품을 만들고 있
-전거: 五洲衍文長箋散稿(李圭景, 明文堂, 1982), 閨閤叢書(憑虛閣李氏 著, 鄭良婉 譯, 寶晉齋, 1984), 動物分類學(金熏洙•李昌彦•盧粉祚, 集賢社, 1982).
27. 삼베
예로부터 삼베는 포폭에 일정한 규격이 있었는데 조선시대의 ≪국조오례의 國朝五禮儀≫에 상복(喪服)의 포폭이 ‘1척 6촌’이라는 기록이 있으며, 또 ‘고자포폭활 2척 2촌(古者布幅闊二尺二寸)’이라고 하는 기록이 있다. 또 조선 말의 ≪탁지준절 度支準折≫에는 마포의 포폭이 7촌이라고 기록되어 있다.≪국조오례의≫의 계량척은 주척(周尺)이며 ≪탁지준절≫의 계량척은 조선시대의 포백척인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하여 이전에는 포폭이 약 50㎝였고 조선시대에는 36㎝ 정도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고려시대 유풍포의 포폭이 36㎝ 정도인 것으로 보아 ≪국조오례의≫의 고자란 적어도 고려시대 이전이라고 하겠다. 중국의 경우도 포폭이 2척2촌이었으므로 우리 나라와 같았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북포(北布)•영포(嶺布)•안동포(安東布)•강포(江布) 등 좋은 품질의 삼베가 제직되었다. 북포는 발내포(鉢內布)라고도 했는데, 밥바리 안에 한 필의 베가 다 들어갈 정도로 섬세하다고 하여 이와 같이 명명된 것이라고 한다. 이 밖에 아청포•청포•홍포•황포•흑포 등 염색포도 있었다.
-전거: 國朝五禮儀, 布帛名物, 우리나라 織物製織技術에 對한 硏究(閔吉子•李淳先, 韓國衣類學會誌 8-2, 1984), 織物의 種類에 關한 硏究(閔吉子, 敎育論叢 6, 國民大學校敎育硏究所, 1987).
28. 소목
한방에서는 행혈(行血)•지혈•구어혈(驅瘀血)•진통•소종(消腫)의 효능이 있어 심재(心材)를 약재로 사용한다. 주로 부인기혈심복통(婦人氣血心腹痛)•경폐(經閉)•산후어혈복통(産後瘀血腹痛)•파상풍•옹종(癰腫) 등의 증상에 사용한다. 대표적인 처방으로는 소목탕•소방음•소방산•독성산 등이 있다. 적황색 목재 부분은 홍색계 염료로 쓰이고, 뿌리는 황색염료로 쓰인다. 우리 나라에서 산출되지 않았으므로 세종 때에는 9년간에 7만여 근이 수입되기도 하였다. 회즙매염으로는 적자색, 명반매염으로는 적색, 철매염으로는 자색이 염색된다. 조선시대에는 홍의 염색에 주로 충당된 염료이다.
-전거: 大韓植物圖鑑(李昌福, 鄕文社, 1982), 原色天然藥物大事典(金在佶, 南山堂, 1984).
29. 솥
솥은 용도에 따라 물솥•밥솥•국솥•쇠죽솥으로도 부르며, 크기에 따라 큰솥•중솥•작은솥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무쇠솥을 새로 구입할 때는 맑은 소리가 나는 것이 상등품이다. 또한 새로 사다 설치한 무쇠솥은 먼저 깨끗하게 솔질하여 닦아 말린 다음에 뭉근하게 불을 지피고 돼지고기 기름을 녹여 솥 안에 고르게 입힌다. 기름에 녹아 흐르는 무쇳물을 제거하고 깨끗하게 한 다음에 사용하기 시작한다. 솥뚜껑은 솥바닥에 붙은 솥검댕을 묻히면서 기름행주로 닦는다. 솥은 한 가정의 주방을 대표하는 용구이므로 집을 새로 짓거나 이사를 할 때에는 우선 부뚜막에 솥부터 건다.
①무쇠솥의 형태는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다리가 세 개이고 솥바닥이 비교적 편편하며 주변이 직선형이다. 그리고 주둥이가 약간 넓게 퍼진 모양에 뚜껑이 솥전보다 약간 커서 잘 밀착되게끔 만들어진 것이다. 영•호남지방에 많다. 다른 하나는 다리가 없고 솥바닥이 둥근 편이며 주둥이가 좁고 솥전이 오므라든 것이다. 뚜껑이 역시 솥전 위에 빈틈 없이 얹힌다.
② 놋새옹은 솥바닥이 평면이고 배가 부르지 않아 주변전이 직선으로 올라 있고 뚜껑이 약간 크다. 뚜껑에는 선 문양이 있으며, 크기는 보통 주발로 한두그릇 정도의 용량이다. 따라서 여기에 밥을 지어 새옹채로 상에 올리는 경우가 많다.
③곱돌솥은 오석이나 청백석을 깎아 만든 솥이다. 용량이 적어 1, 2인용 밥을 짓거나 찌개를 끓이는 데 쓴다. 열이 더디게 전도되는 반면에 쉽게 식지 않으면서 음식이 무르게 잘 익는다. 밥이나 찌개를 특별히 정성들여 만들 때에 흔히 쓴다.
④왜솥은 돌려가며 전이 달리고 밑이 뾰족하며 둘레는 거의 수직을 이룬다. 오늘날의 알루미늄솥은 모두 이와 같은 형태이다. 두멍솥은 물건을 삶아 건져내거나 국물을 자주 퍼내기 좋도록 아가리가 벌어진 솥이다. 뚜껑도 두꺼운 나무로 짜서 손잡이를 붙인다. 대체로 반쪽씩 열게 된 것이 많다.
-전거: 林園經濟志, 韓國民俗大觀 2(高麗大學校民族文化硏究所, 1980).
30. 술
(1) 누 룩 좋은 술을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좋은 누룩부터 만들어야 한다. 조선 초기의 ≪사시찬요초 四時纂要抄≫에서는 보리•밀가루를 녹두즙과 여뀌와 더불어 반죽하여 잘 밟아서 ‘막누룩(떡누룩)’을 만들고 있다. 1680년(숙종 6)경의 ≪음식지미방≫에서는 밀기울을 반죽하여 꼭꼭 밟아서 만든다 하였으니 이른바 막걸리용의 거친 ‘막누룩’이다. 어디까지 단단하게 밟아야 좋은 막누룩을 만들 수 있느냐에 대해서는 고사가 여럿 남아 있다. 1766년(영조 42)의 ≪증보산림경제≫에는 술빚는 방법이 집대성되어 있는데, 여기서는 우선 누룩을 디디는 데 좋은 날을 택하고 있다. 누룩의 재료는 밀과 쌀이 주가 되고 녹두가 다음이며 보리는 드물다. 밀은 잘게 쪼갠 알갱이를 쓰고, 쌀은 곱게 가루내어 이용하고, 쌀알갱이에 밀가루를 부착시킨 것도 있다. 재료 처리는 가볍게 찐 것도 있지만 거의 전부가 날 것을 쓰고 있다. 누룩의 형태는 대부분 떡처럼 생긴 ‘막누룩’이지만(약 90%), 일부는 쌀알갱이를 그대로 쓰는 ‘낱알누룩’(약 10%)도 있다. 쌀누룩•낱알누룩은 우리 전통의 것이 아니고 일본의 것이라고 착각하기 쉽지만 조선시대에는 이런 누룩들도 다채롭게 쓰이고 있었다. 1823년(순조 23)의 ≪임원경제지≫에는 여러 종류의 중국 누룩이 소개되어 있지만 우리 나라에서 뿌리를 내리지는 못하였다.
(2) 술의 종류 및 제조법 조선시대의 술은 우선 발효주와 증류주로 크게 나누어진다.
①발효주와 증류주의 두 가지를 혼용한 술
②약재나 꽃향기•색소•감미료 등을 첨가한 재제주(再製酒)
③특수한 방법으로 만든 술 등으로 나눌 수 있다.
④순발효주로는 백하주(白霞酒, 방문주)•삼해주(三亥酒)•연엽주(蓮葉酒)•소국주(小麴酒)•약산춘주(藥山春酒)•경면녹파주(鏡面綠波酒)•벽향주(碧香酒)•부의주(浮蟻酒)•일일주(一日酒)•삼일주(三日酒)•칠일주(七日酒)•잡곡주(雜穀酒)•하향주(荷香酒)• 이화주•청감주(淸甘酒)•감주(甘酒)•하엽주(荷葉酒)•추모주(秋牟酒)•죽통주(竹筒酒)•두강주(杜康酒) 등이 있다.
⑤꽃•열매•약재 등을 넣고 함께 발효시키는 것으로는 도화주(桃花酒)•지주(地酒)•포도주(葡萄酒)•백자주•호도주(胡桃酒)•와송주(臥松酒)•백화주(百花酒)•구기주 (枸杞酒)•오가피주•감국주(甘菊酒)•석창포주(石菖葡酒) 등이 있다. 순발효주에 약재의 성분을 우려내는 것으로는 소자주(蘇子酒)•지약주(漬藥酒)•감국주•구기주•복령주(茯洛酒) 등이 있다.
⑥단양 또는 이양의 순발효주의 술밑에 용수를 박아서 그 속에 괸 술을 퍼낸 것이 ‘청주’이다. 이것을 조선시대부터는 ‘약주’라 이르게 되었다. 약재가 들어가지 않으면서 왜 약주인가에 대해서는몇 가지 설이 있다. 그 중에서 서성(徐賂)의 어머니가 남편을 잃고 가난하여 술장사를 하게 되었다. 그 집의 청주가 매우 좋았고, 서성의 호가 약봉(藥峰)이며, 그가 살고 있던 곳이 약현(藥峴)이어서 청주를 약주라 부르게 되었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백하주•향온주(香倍酒)•소국주•경면녹파주•벽향주•청명주•석탄주(惜呑酒) 등이 약주에 속한다.
⑦섬세한 방법으로 여러 번 덧술한 청주 이름에 중국의 당나라 시대에는 ‘춘(春)’자를 붙였으므로 우리도 그에 따라 ‘춘’을 붙였다. 호산춘(壺山春)•약산춘(藥山春) 등이 이에 속한다. 비록 ‘춘’자가 붙지는 않아도 그런 무리의 술로서 삼해주(三亥酒)•백일주(百日酒)•사마주(四馬酒)•법주(法酒) 등이 있었다.
⑧탁주는 그 말의 개념이 매우 애매하다. 일반적으로 맑은 약주에 비하여 흐린 술을 통틀어 말한다. 쌀누룩이나 가루누룩을 써서 발효시킨 뻑뻑한 술밑까지 먹는 것이 순탁주이다. 이화주•사절주(四節酒)•혼돈주(混沌酒) 등이 있다. 일본의 순탁주인 백주(白酒)는 밥알 그대로 발효시킨 것을 갈아서 제품으로 삼는데 젖 같이 희고 맛이 달다. 또 청주 찌꺼기에 물을 부어가면서 손으로 주물러 짜낸 뿌연 술도 탁주이다. 제주도로 유배된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어머니가 만든 ‘모주 (母酒)’가 그것이다.
⑨술을 빚는 데 쓰는 연모나 방법이 일반 발효와 다른 특이한 것을 이양주(異釀酒)라 한다. 여기에는 와송주•죽통주•지주•동양주(冬陽酒)•청서주(淸署酒)•봉래춘(蓬來春) 등이 있다.
⑩약주에 향기를 주기 위하여 복숭아꽃•송화•송순•연잎•매화•동백•두견화 등을 이용하는 가향주(加香酒)로는 도화주•송화주•송순주(松筍酒)•하엽청(荷葉淸)•연엽양•화향입주방(花香入酒方)•두견주(杜鵑酒) 등이 있다.
⑪약주를 빚을 때 약재를 미리 넣거나 만들어진 약주에 약재의 성분을 우려내는 재제주로는 자주(煮酒)•구기주•오가피주•도소주•밀주(蜜酒)•송절주•거승주(巨勝酒)•벽력주(霹靂酒)•호골주(虎骨酒)•무술주(戊戌酒)•양고주(羊羔酒)•서여주(薯岳酒)•창포주 등 많은 종류가 있다
-전거: 星湖僿說, 靑莊館全書, 東國歲時記, 三峯集, 鄕飮酒禮, 士小節, 燕巖集, 眉巖日記, 孤山遺稿, 松江歌辭, 小學, 三國志, 高麗圖經, 韓國의 銘酒(劉太鍾, 中央新書 3, 1977), 傳統酒를 만드는 도구(朴垈洵, 文藝振興, 1982), 韓國食品社會史(李盛雨, 敎文社, 1984), 韓國食生活風俗(姜仁姬•李慶馥, 三英社, 1984), 국역 동국이상국전집(民族文化推進會, 1985), 朝鮮前半期의 繪怜(三省出版社, 東洋의 名怜 Ⅰ, 1985), 朝鮮後半期의 繪怜(三省出版社, 東洋의 名怜 Ⅱ, 1985)
31. 약재류
≪향약본초 鄕藥本草≫•≪향약집성방 鄕藥集成方≫ 등 향약을 이용하는 약방서를 편찬, 출간하였다. 또한 향약채취의 적정한 시기 및 방법을 지도하는 ≪향약채취월령 鄕藥採取月令≫을 간행하는가 하면 희귀 수입약재인 용뇌(龍腦)•사향(麝香)•주사(朱砂)•소합유(蘇合油) 등의 사용을 제한시켰으며 남방 열대산 약재인 안식향•영릉향(零陵香) 등을 제주도 등에서 재배 또는 대용품 개발의 시험연구를 실시하였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시책 중에서 향약과 당약을 비교, 검토시킨 결과를 보면 1423년 계묘 3월조의 ≪세종실록≫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大護軍 金乙玄, 司宰副正 盧仲禮, 前敎授官 朴堧等 入朝質疑, 本國所産 藥材六十二種, 內與中國所産 不同, 丹參•漏蘆•柴胡•防己•木通•紫莞•威靈仙•白干•厚朴•芎誇•通草•獨活•京三稜十四種, 以唐藥比較 新得 吾者六種, 命與中國所産不同鄕藥, 丹參•防己•厚朴•紫莞•芎誇•通草•獨活•京三稜 今後勿用”62종의 향약을 휴대하고 명나라에 가서 대조시험을 하여본 결과 ‘단삼(丹蔘)•방기(防己)•후박(厚朴)•자완(紫莞)•궁궁(芎誇)•통초(通草)•독활(獨活)•경삼릉(京三稜)’의 8종 향약은 사용할 수 없음을 알았다는 내용인데 오늘날의 과학적 생약학에서도 위 8종의 생약은 기원식물이 모두 일정하지 않아 문제가 많다는 사실과 비교할 때 당시의 감정이 꽤 정확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430년에도 다른 약에 대해서 대조시험을 한 기록이 있다. 남방계 약재인 안식향의 대용품으로 제주도의 붉나무(궂나무과의 작은 낙엽 활엽 교목) 수지(樹脂)를, 영릉향도 당약 대신에 제주도산을 사용하도록 〈제주도소산 약재진상법〉을 제정한 것 등은 놀라운 일이다. 우리 나라의 약재자원조사를 실시한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한반도에서 산출되는 생약자원의 분포상태가 일목요연하게 나타나있다. 조사된 생약은 303종이며, 그 중 식물성 생약 243종, 동물성 생약 46종, 광물성 생약 14종으로 되어 있는데, 오늘날 보아도 가치 있는 자료임을 알 수 있다
-전거: 東醫寶鑑, 醫零(丁若鏞, 丁茶山全書, 文獻編纂委員會, 1960), 韓國醫學史(金斗鍾, 探求堂, 1966), 한국藥業史(洪鉉五, 藥業新聞社, 1972), 北學議(朴齊家, 韓國名著大全集, 大洋書籍, 1973), 燕巖漢文小說(朴趾源, 韓國名著大全集, 大洋書籍, 1973), 藥工三十年史(大韓藥品工業協會, 1976), 藥史散攷(洪文和, 東明社, 1980).
32. 어물
①북어•②관목(貫目 : 말린 청어)•③꼴뚜기④민어⑤석어(石魚 : 조기)⑥통대구(通大口)⑦광어⑧문어⑨가오리⑩전복⑪해삼⑫가자미⑬곤포(昆布)⑭미역⑮김 파래•우뭇가사리 등 각종 수산물을 지칭. 육의전에서는 내․외어물전에서 이러한 물품을 거래하였다.
-전거: 李朝魚物廛硏究(林仁榮, 淑明女子大學校出版部, 1977), 서울 六矣廛硏究-李朝 都市商業의 一考察-(劉敎聖, 歷史學報 7•8, 1954).
33. 어염
해산물을 통틀어 이르는 말
34. 얼음
조선왕조실록에는 얼음에 관한 많은 기록이 나타난다. 1398년(태조 7)에 얼음을 저장하였고, 1449년(세종 31)에는 사대부의 시제(時祭)에 얼음을 내렸다.
- 1450년(문종 즉위년)에는 당상관(堂上官)의 집에 얼음을 고루 내리도록 하였다.
- 1454년(단종 2)에는 얼음저장을 금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 1456년(세조 2)에는 해마다 70세 이상의 당상관에 얼음을 내리도록 명하였다.
- 1470년(성종 1)에는 절의 공양에는 동빙고의 얼음을 사용하게 하였다.
- 1504년(연산군 10)에는 예조에서 얼음을 더 많이 내려 달라고 청하였다.
그러나 왕은 궁중에서 쪽물염색에 얼음을 쓰기 때문에 허가하지 않았다.
- 1546년(명종 1)에는 문소전(文昭殿)에 빙반(氷盤)을 배설하여 실내를 써늘하게 하였다.
1768년에는 산릉(山陵)의 제사에는 얼음을 쓰지 못하게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한강 강변에 동서 두 빙고를 두었다. ≪한경지략 漢京識略≫에 의하면 “동고는 ○개(豆毛浦 모두포: 지금의 옥수동)에 있다. 제사용 얼음만 진공하고, 서고는 둔지산(屯智山 : 지금의 서빙고국민학교 근처)에 있다. 궁중의 부엌과 백관(百官) 등에 공급한다.”는 것이다. 1746년에 봉상시(奉常寺)에서는 동빙고의 얼음은 제사에만 쓰라고 가르치고 있다.
1470년에는 부처를 공양하는 데에 동빙고의 얼음을 쓰라고 하였다.
≪용재총화 劣齋叢話≫에서는 “중랑천(지금의 청계천)의 더러운 물을 피하여 두모포와 저자도 사이의 강물이 4치쯤 얼었을 때에 잘라 낸다.”고 설명하였다. 그런데 동빙고는 연산군 때 사냥터를 확장하기 위하여 서빙고 동쪽으로 이전하니 사실상 서빙고에 통합되고 말았다. 서빙고는 1898년까지 존속되었다.
≪한경지략≫에서 말하기를 “해마다 섣달에 사한제(司寒祭)를 올리고 한강의 얼음을 깨어다가 보관하였다. 춘분에 개빙제(開氷祭)를 올리고 얼음을 진공한다. 또, 내빙고(內氷庫)가 있어서 어공(御共)만 전문으로 맡아본다.”는 것이다. 그리고 ≪대전회통 大典會通≫에는 얼음공급의 시기•양•대상인물 등에 관한 규정이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조선시대의 빙고 속의 얼음은 계절이나 보관법에 따라 달라진다. 얼음은 막대한 양이었고, 이것을 녹지 않게 보관하기 위한 백성들의 부역이 가혹하였고, 빙고의 얼음을 누빙(漏氷)이라고까지 불렀다고 한다.
≪용재총화≫에는 “얼음을 채취하는 데에 많은 군인이 동원된다. 빙고의 얼음을 꺼낸 뒤 8월에 군인들을 빙고에 보내어 빙고 내부를 수리한다. 겨울철에는 칡줄기를 얼음 위에 깔아 미끌어지지 않게 한다. 강가에 장작불을 피우고 의약을 준비하여 얼음을 넣을 준비를 한다. 또, 압도(鴨島)에 가서 갈대를 베어서 빙고의 아래위와 사방을 덮도록 한다. 그러면 얼음이 잘 녹지 않는다.
그런데 빙고관리의 관리들이 밤낮으로 술을 마시고 일을 아전들에 맡기더니 계축년에 얼음저장이 소루하여 파면되었다. 갑인년에 관리들은 성의를 다 하였다. 그래서 을묘년에는 나라의 대상(大喪)과 사신들에 대한 잔치에 얼음이 부족하지 않았고 가을에도 빙고에 얼음이 남아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빙고는 경주의 석빙고 외에도 경상남도의 창녕, 경상북도의 성주•안동•현풍•청도, 황해도의 해주 등지에도 있었고, 우리 나라에는 경상북도 의성군 빙계동, 경상남도 밀양군 산내면 등과 같이 여름철에도 고드름이 달리는 빙혈이 도처에 있었고 빙고 이상의 냉장•냉동의 구실을 하였다.
얼음은 냉장•냉음료•실내냉장•치레 등 가지가지 용도가 있다. 1881년(고종 18)의 〈동궁마마 가례시 기명발기〉에 얼음전용의 빙도(氷刀)가 나왔으며 김칫독을 얼음이 들어 있는 궤 속에 넣어 저장하는 저빙궤(菹氷櫃)가 나왔다.
얼음의 저장과 국가기관에 의하는 각 빙고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빙고는 동빙고․서빙고․내빙고 두 곳 등 모두 네 곳이 있었다. 동빙고는 두모포에 있었고 여기서는 각종 제사용 얼음 1만244정을 저장하였는데, 봉상시에서 관리하였다. 서빙고는 한강 하류의 屯之山麓에 있었다. 御廚와 宗親, 文武 정 2품 이상의 고위 관료, 그리고 여러 상사에게 나누어주는 얼음 13만 4974정을 저장하였고, 군기감(軍器監)․군자감(軍資監)․예빈사(禮賓寺)․내자사(內資寺)․내섬사(內贍寺)․제용감(濟用監)에서 주관하였다. 한편 궁궐 안에 있는 두 곳의 내빙고는 한성부와 자문감(紫門監)에서 각각 하나씩 관리하였는데, 여기서는 어용(御用)에 쓰일 얼음을 저장하였다.
- 전거: 高麗以前韓國食生活史硏究(李盛雨, 鄕文社, 1978). 고동환 조선후기 서울상업발달사연구 중 제 2장 경강지역 상업발달의 양상 (지식산업사, 1998)
35. 여성용 장신구
1. 비녀〔簪〕와 뒤꽂이 : 조선시대 여인에 있어 비녀는 쪽진 머리의 부녀자 수식의 하나로써 누구나가 다 사용하였다.
비녀는 조선왕조 후기 영조의 발제개혁 이후 다양한 모습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여성들의 머리모양이 다리〔月子〕를 사용하여 모양이 점차 화려해짐에 따라 여러번 사치금지령과 가체금지령이 내려졌지만 잘 시행되지 않았다. 이에 영정조 시대에 궁중의 머리 모양인 쪽머리를 일반에도 허용을 하면서 여러종류의 비녀가 발달하게 되었다.
2. 첩지와 떨잠 : 첩지는 부녀가 예장할 때 머리 위에 꾸미는 것으로 첩지는 얹은머리에는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영조의 발제개혁 이후 얹은머리 대신 쪽진머리를 하게 하고 이에 더하여 족두리를 하게 한데서 시작되었다. 수식과 족두리, 화관 같은 것을 쓸 때에 걸려서 고정시키게 하기 위하여 사용하였다.
첩지에는 도금으로 만든 봉 첩지가 있고 도금 또는 은, 아니면 흑색으로 만든 개구리 첩지가 있는데 그 형태와 질로서 품위를 가리었다. 도금 봉첩지는 왕비의 것이고 기타의 것은 계급에 따라 내명부 또는 상류층 외명부들이 사용하였다. 첩지의 사용은 상류계층이라 할 지라도 예장을 갖출 때 이외에는 별로 하지 않았는데 궁중에서는 평상시에도 하고 있었다.
떨잠은 떨철반자라고도 하였는데, 궁중의식 때 왕비를 비롯하여 상류계급에 한해서 큰 머리나 어여머리에 꽂았던 장식품으로 중국 명나라에서 도래한 것이라는 추축이 있다. 떨잠에도 원형•각형•접형 등 여러 가지 모양이 있어 큰머리나 어여머리의 중심과 양편에 하나씩 꽂았는데, 이것은 최고의 수식품으로 각종 형태의 옥판에 칠보•진주•보석 등으로 장식을 하였고, 은사로 가는 용수철을 만들어 나비와 새 모양의 장식을 하는데 이것을 떨이라고 하며 이 떨이 있는 장식잠을 떨잠이라고 하였다.
3. 댕기 : 머리를 단정하게 하기 위하여 묶는 것에 사용되는 것을 말하며, 끝이 뽀족하게 생긴 제비부리 댕기는 처녀아이들을 위한 것으로 주로 붉은 색 종류이며, 나이든 혼인한 사람은 자주색 댕기를, 과부는 검정색 댕기를 사용하였다. 이 외에도 혼인할 때 예복과 함께 사용하는 패물로 장식한 큰 댕기(도토락 댕기)가 있으며, 족두리나 화관을 착용할 때 큰댕기와 함께 앞에 드리는 앞 댕기가 있었다.
4. 지환 : 지환에는 가락지와 반지가 있었으며, 흔히 말하는 쌍가락지는 가락지라고 하고 하나만 끼는 것은 반지라고 하였다. 조선시대 지환은 도금 또는 은을 많이 사용하였고, 칠보•옥•마노•호박•비취•진주•동으로 만든 것이 있어 그 종류에 따라 계절에 맞추어 끼기도 하였다.
36. 오지그릇
붉은 진흙으로 만들어 볕에 말린 뒤 위에 오짓물을 입혀 구운 그릇. 오지그릇의 ‘오지’는 오자기(烏瓷器)의 준말로 검은빛을 띤 고화도로 구워진 그릇을 칭하는 말이다
오지그릇은 부엌용구 외에 필통•연적•벼루•문진•등잔•등잔대•촛대•재떨이•담배통•연초함•화분•수반•화로•풍로•요강 등의 문방구를 비롯한 실내용구들도 있다.
1. 항아리 : 아래위가 좁고 배가 몹시 부른 형태.
2 독 : 운두가 높고 중배가 부르며 전이 달린 형태.
3. 중두리 : 독보다 조금 작고 배가 부른 형태.
4. 바탱 : 중두리보다 배가 부르고 키가 작음.
5. 소래기 : 굽 없는 접시 모양의 넓은 그릇으로 독의 뚜껑으로도 쓰임
6. 자배기 : 둥글넓적하고 아가리가 짝 벌어진 형태.
7. 버치 : 자배기보다 조금 깊고 큰형태.
8. 두멍 : 물을 길어 붓고 쓰는 큰 동이.
9. 동이 : 몸이 둥글고 아가리가 넓으며 양옆에 손잡이가 달려 있음.
10. 옹자배기 : 아주 작은 자배기.
11. 푼주 : 아래는 뾰족하고 위는 짝 바라진 형태.
12. 밥소라 : 위가 좀 벌쭉하고 밑에 높직한 굽이 달려 있으며 양쪽에 손잡이가 달려 있음.
13. 귀때동이 : 귀가 달린 그릇.
14. 동방구리 : 동이보다 배가 부른 그릇.
15. 단지 : 자그마한 항아리로 배가 부르고 목이 짧은 형태.
-전거: 경국대전(經國大典)
37. 옹기(독)
1. 항아리 : 간장을 저장하는 용기.
2. 물항 : 옛날에는 냇물이나 마을의 공동우물에서 물을 길어다 식수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집집마다 물을 저장하는 항아리가 필요하였다. 부엌의 한켠에 세워 두거나 부뚜막의 한 부분을 파서 묻고 사용하였는데, 물항은 대체로 전이 넓은 것이 특징이었다.
3. 술항 : 일제가 강점한 이후 술은 관의 허가를 받은 술도가에서만 만들게 함으로써 술항도 이전의 독특한 형태에서 규격화된 것으로 대체되었다.
4. 쌀항 : 곡식 저장용 용기로서 광이나 대청에 놓고 사용하였다.
5. 똥항 : 재래식 화장실(칙간)의 바닥을 파고 이를 묻어 분뇨를 저장하던 것으로 이 항아리에 분뇨가 가득 차면 똥장군 등에 퍼담아 밭에 내다 거름으로 이용하였다.
6. 목욕통 : 집집마다 목욕시설이 갖추어 있지 않았던 시절에는 소래기 따위를 사용하여 몸을 씻었는데, 이것은 특별히 제작된 전용 목욕통이다.
7. 동이 : 물을 길어 나르는 데 쓰던 용기로 그 형태가 길다란 것과 둥그런 모양이 전형을 이루며 양쪽에 손잡이가 달려 있다는 특징이 있다.
8. 청수통이(청수단지) : 매우 작으면서도 양쪽에 손잡이가 달린 것이 특징이고, 가정 신앙의 하나로 장독대를 관장하는 철륜님께 지성을 드릴 때 사용되었다.
9. 소래기 : 지역에 따라 소래, 소라, 비래, 비치라고도 불리는 소래기는 집안 대사 때에 조리용구로 많은 양의 채소류를 씻거나 절일 때, 또는 목욕통이나 커다란 항아리의 뚜껑 등으로 대용되는 등 다용도로 쓰였다.
10. 널박지 : 낮은 키에 옆으로 넓게 퍼진 용기로 채소를 씻거나 빨래감 등을 담는데 많이 사용되었다.
11. 옴박지 : 널적지보다 작은 용기로 옴배기, 옹배기라고도 불린다. 주로 쌀이나 보리, 깨 등을 씻거나 설거지를 하는 데에 많이 쓰였고 민간신앙의 한 형태로 집안에서 동티잡이를 하는 경우에 이용되기도 하였다.
12. 촛병 : 어깨에 주구(注口)를 달아 액체를 따를 수 있도록 만들어진 식초를 넣는 용기.
13. 좀도리 : 식량을 아끼기 위한 것으로 밥을 하기 위해 펴낸 곡식을 한 움큼씩 덜어서 담아 놓던 용기.
- 전거: 빛깔있는 책들-옹기(이훈석•정양모•정명조, 대원사, 1991), 아름다운 우리 도자기(윤용이, 학고재, 1996), 옹기와의 대화(정병락, 옹기민속박물관, 1997), 甕器小論(조정현, 陶藝硏究 9,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1987.6.), 호남지방의 옹기문화(원광대학교박물관, 1997), The Korean onggi potlei(Robert sayers and Ralph Rangler, Smithsonian Folklif studies : No.5, Washington D.C, Smithsonian lnstitute Press, 1987).
38. 은
임진왜란 후 은산(銀山)의 민영이 다시 허가되었으므로 1651년(효종 2)에는 주화정책이 재개되어 주화재료로서 은이 곳곳에서 산출되었고, 은산 채굴장인 은점(銀店)을 허가하여 처음으로 세수하였다. 그러나 그것도 관영•민영으로 반전을 거듭하여 숙종•영조에 이르기까지 쇠퇴일로를 걸어 폐점하는 곳이 늘어났다.
-전거: 五洲衍文長箋散稿.
39. 인삼
≪정조실록≫에 의하면 박유철(朴有哲)이 앞장을 서서 인삼의 일부재배(日覆栽培:햇빛을 가리고 재배함)를 기업적으로 실시하였다. 차세(Chasse,E.U.)에 의하면 1610년에 최초로 인삼이 네덜란드 사람에 의하여 유럽에 소개되었다. 1653년 난선(難船)으로 제주도에 표류하여 1666년까지 우리 나라에 체재한 네덜란드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인 하멜(Hamel,H.)이 저술한 ≪하멜표류기≫ 가운데 조선특산품으로서 인삼이 기록되어 있다. 또 그들이 우리 나라를 떠나 1667년 일본의 나가사키(長崎)에 들렀을 때, 그곳 관헌과 회견하며 인삼에 관한 문답을 한 것이 기록에 남아 있다.
일본 관헌이 “인삼을 어떻게 발견하며 무엇에 사용하며, 또 어디에 수출하는가?”라는 질문에 네덜란드 사람은 “인삼은 북부지방에서 발견되며, 그들에 의하여 약으로 사용되고, 또 매일 타타르(獗厥:지금의 중국 동북지구, 즉 만주이며 고구려시대에는 우리의 판도였다)에 공물로 보내며 상인에 의하여 중국과 일본에 수출된다.”고 대답하고 있다.
그러나 인삼의 생태 및 약효를 스스로 관찰하여 상세하게 보관한 기록은 예수회의 선교사로 중국에 파견되었다가 중국 황제의 명으로 타타르지방의 지도 작성에 종사하던 프랑스인 자르투(Jartoux,P.)가 1711년 4월 12일자로 본국에 보낸 서신에 적혀 있다. 이 보고가 계기가 되어 캐나다의 몬트리올을 중심으로 북미 동부지역에 인삼 호경기를 불러일으켜, 채취한 인삼을 중국에 수출하여 막대한 수입을 획득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피스(Griffis,W.E.)의 ≪Corea, The Hermit Nation≫(1907)에 의하면, 1750년대에는 벌써 북경(北京)이나 광둥(廣東)에서 미국이 인삼을 둘러싸고 조선과 무역상의 경쟁국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와 같은 인연으로 미국이 조선과의 통상을 서두르게 되었고, 드디어 1882년 5월 22일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조인하기에 이르렀다.
전문 14관(款)인 이 조약의 제8관에 미국인이라 하더라도 홍삼을 해외로 가지고 나갈 경우 처벌한다는 문구가 있는 것을 보더라도 한미간에 인삼이 중요한 문제였음을 알 수 있다.
그 이듬해 민영익(閔泳翊)을 전권대신으로 하는 11명의 특사단이 미국을 방문하였을 때 그리피스가 뉴욕에서 그들을 만났는데, “특제 인삼의 커다란 보따리를 내어 놓았다. 이 조용한 아침의 나라의 사람들로서, 인삼을 가지지 않고 외국에 나간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미 두 나라의 국교 개시에 있어서 인삼이 중요한 매체 구실을 한 것이다.
-전거: 三國史記, 朝鮮王朝實錄, 韓國醫學史(金斗鍾, 探求堂, 1966), 韓國人蔘심포지엄(韓國生藥會, 1974), 高麗人蔘(高麗人蔘硏究所, 1978), 韓國人蔘史 上•下(韓國人蔘耕作組合聯合會, 1980), 藥學散考(洪文和, 東明社, 1980), 人蔘史(今村昞,鮮總督府專賣局, 1939), 朝鮮醫學史及疾病史(三木榮, 富士精版印刷株式會社, 1963), 朝鮮後期商業史硏究(오성, 한국연구원, 2000).
40. 잡목
조선시대에는 인구증가가 계속됐고, 그에 비례해서 소나 무의 이용가치가 더욱 늘어났다. 특히 소나무는 궁궐이나 가옥을 짓는데 필요한 건축재는 물론 당시에 가장 중요한 수송수단이었 던 배를 만드는 목재로 충당되었다.
이 때문에 조선왕실은 소나무 목재를 원활하게 공급하기 위해서 특히 솔숲을 엄중히 보호하였고, 조선왕조는 수백 년 동안 일반 백성이 소나무를 함부로 벨 수 없게 하는 정책을 폈다. 또한 소나무 외의 나무는 쓸모 없는 나무(잡목)로 취급하여, 일반 백성들은 잡목으로 취급된 활엽수를 자유롭게 채취하여 사용하였다. 따라서 소나무 숲에서 자라는 활엽수를 베 어다 쓰고, 숲 바닥의 낙엽을 연료로 채취하였다.
-전거: 문화일보2003년 3월 20일 기사
41. 젓갈
조선시대에는 젓갈의 종류가 현재보다 다양하였다. 젓갈을 담글 때 술이나 누룩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미루어 젓갈은 주조법 (酒造法)에서 연유한 것으로 추측된다.
현존하는 어리굴젓처럼 고춧가루를 이용한 것이 없는 것은 고춧가루의 이용이 지금보다 적었음을 알려주는 것이라 하겠다.
또, 소금•누룩가루•천초•파•술을 버무린 데에다 생선을 넣어 담그는 주국어법 (酒蚣魚法)이 없어진 것은 좋은 양조주의 품귀도 한 요인이겠다. 그러나 우리 나라 사람들의 식성이 보다 담백한 것을 좋아하는 데에서 기인한 것으로 여겨진다.
조선시대 후기에 가장 많이 잡힌 어종은 명태•조기•청어•멸치•새우이다. 이렇게 많이 잡힌 어류는 건조시키거나 젓갈로 만들어서 전국에 널리 유통, 보급하였다. 이러한 어패류의 젓갈은 유류(乳類)가 귀하였던 우리 음식에서 칼슘의 급원식품으로서 요긴한 것이었다.
젓갈은 예로부터 반찬으로 이용되었으며 궁중뿐 아니라 일반 민가의 크고 작은 제사상에도 올랐다.
젓갈의 종류 - 어육장(魚肉醬), 식해, 청어젓, 생굴젓, 자하젓, 게젓
- 전거: 三國史記, 韓國水産發達史(水産業協同組合中央會, 1966), 韓國의 味覺(黃慧性, 宮中飮食硏究院, 1971), 韓國食品史硏究(尹瑞石, 新光出版社, 1974), 魚貝類(李應昊, 한국식품연구문헌총람, 한국식품과학회, 1977), 高麗以前韓國食生活史硏究(李盛雨, 鄕文社, 1978), 韓國食經大典(李盛雨, 鄕文社, 1981)젓갈 국제연구문전.
42. 종이
가.제지기술의 변천과 개요
우리 나라의 제지기술은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활판인쇄술의 재발명으로 종이의 수요가 증가됨에 따라 대량생산의 단계로 발전을 거듭하였다.
1415년(태종 15)에는 국영 제지공장이며 종이제조 사무담당기구이기도 한 조지소(造紙所)가 설치되어 제지기술과 합리적 생산관리에 관한 일이 맡겨지고 지질(紙質)의 개량과 생산원가의 절하를 위한 노력이 경주되었다.
서울의 중앙 제지공장에는 2인의 제조(提調)가 기술적인 책임을 지고 배치되었고, 사지(司紙) 1인과 별제(別提) 4인의 기술관리 및 85인의 지장(紙匠)과 95인의 잡역부가 배치되어 있었다.
지방공장에는 모두 698인의 지장이 각 도에 소속되어 있었으며, 제지기술자들은 법적인 우대를 받도록 규정되어 생활보장을 받는 특전이 부여되었다.
조지소의 설치와 함께 조선시대에는 외국 제지기술의 장점을 도입하였고, 이때까지 종이의 주원료는 여전히 저(苧)였다. 1439년(세종 21)에는 일본 저의 품종을 도입하여 재배하게 하는 등 원료인 저의 다량생산과 품질개량에도 힘썼다.
이러한 조지소의 설립은 그 초기에는 본래의 설립목적에 따라서 제지업을 발달시키고 여러 가지 새로운 종류의 종이를 개발하는 등 많은 노력을 하였지만, 한지 수요와 생산이 가장 활발하던 시기는 15∼16세기이다. 이 시기는 고려시대이래 지속되어 온 지소와 조지부곡이 폐지되고 관영제지소인 조지소가 1415년(태종 15) 설립되어 제지생산을 국가가 주도하였다.
이 시기는 중국으로부터 제지 기술을 도입하고 닥나무 생산을 확대하려는 노력뿐만 아니라 부족한 닥나무 대신 쑥대•밀•보릿짚〔孟麥節〕•대껍질〔竹皮〕•삼대〔麻骨〕•버드나무(柳木皮)•짚(蒿精)•초절목피(草節木皮)•잡초(雜草)•수태(水苔) 등을 혼용지료로 활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국가에서 운영했던 관영제지소인 조지소는 공납제의 폐단과 지장(紙匠)에 대한 지나친 신역(身役)의 강요로 결국 관영수공업이 쇠퇴하는 원인으로 이어졌다. 여기에 국가 재정이 결핍되고 관리의 부정부패가 더해지면서 관영제지수공업은 15세기 후반부터 쇠퇴하기도 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관영수공업이 쇠퇴한 반면 사찰을 중심으로 하는 사찰제지업이 활기를 띠었고, 또한 사장(私匠)에 의한 민간에서의 제지생산도 활발해지는데 이는 조선 전기에는 찾아 볼 수 없는 변화상들이었다. 점차 시간이 흐름에 따라 지장들은 연구에 태만하게 되고 지방에 있는 경외지장들은 소규모의 민간 제지업을 압박하는 등 많은 폐단을 남겨 제지업은 쇠퇴기를 맞게 되었다.
나. 크기에 따른 종이의 종류
백지(白紙)•장지(壯紙)•대호지(大好紙)•소호지(小好紙)•삼첩지(三疊紙)•용선지(囊扇紙)•죽청지(竹淸紙)•선익지(蟬翼紙)•백면지(白綿紙)•설화지(雪花紙)•원백지(原白紙)•배접지(接接紙)
다. 염색에 따른 종이의 종류
황염초주지(黃染草注紙)•아청초주지(鴉靑草注紙)•옥색저주지(玉色楮注紙)•홍색저주지(紅色楮注紙)•초록저주지(草綠楮注紙)•청저주지(靑楮注紙)•황저주지(黃楮注紙)•취지(翠紙)•납지(蠟紙)•은면지(銀面紙)•청색지(靑色紙)•금분지(金粉紙) 등이 있었다.
라. 용도에 따른 종이의 종류
간지(簡紙)•주지(周紙)•반절지(半折紙)•봉투지(封套紙)•도배지(塗褙紙)•장판지(壯版紙)•도광지(塗壙紙)•시전지(詩箋紙)•봉물지(封物紙)•시지(試紙)•초지(草紙)•자문지•혼서지(婚書紙)•표지(表紙)•인지(印紙)•책지(冊紙)•약폭지(藥幅紙)•창호지(窓戶紙)•화본지(怜本紙)•선자지(扇子紙) 등
1. 표전지:표전지는 나라에 길흉의 일이 있을 때 임금에게 아뢰는 글을 쓰는 데 사용하는 종이.
2. 자문지 : 중국과 왕래하는 문서에 사용되던 종이.
3. 고정지:귀리나 보리짚을 주원료로 주로 인지(印紙)와간지(簡紙)로 많이 쓰였으며, 특히 함경도 부령(富寧)의 것이 유명하였다고 한다. 이 고정지는 저를 절약하고 또 종이를 튼튼하게 하기 위하여 만들어졌다고 추측된다.
4. 마골지:저를 절약하기 위하여 쓰였는데, 이것은 껍질 벗긴 삼대(麻骨) 5푼에 저 1푼을 섞어 만든 것.
5. 순왜지:우리 나라의 고유한 종이는 아니며, 1428년(세종 10)에 일본에서 배워온 제지술에 의하여 만들어진 종이를 가리키는 것.
6. 유목지•유엽지•의이지:각각 버드나무의 줄기나 잎, 율무를 원료로 하여 만들어진 종이.
7. 태지(苔紙) : 이끼에 저를 섞어 만드는 것으로 어린 태(苔)에는 저를 많이 섞고 늙은 태에는 저를 덜 섞어서 만든 종이.
- 전거:
43. 짚신
짚신은 신의 형태별 분류에 의하면 운두가 낮은 이(履)에 해당하는 것으로 재료에 따라 짚신•삼신〔麻履〕•왕골신〔菅履〕•청올치신〔葛履〕•부들신〔香蒲履〕 등으로 불리웠다. 옛 문헌에 의하면 ≪통전 通典≫ 변방문(邊防門) 동이J19683(東夷J19683) 마한조(馬韓條)에 ‘초리(草履)’가 나오고, ≪진서 晋書≫ 사이전(四夷傳) 마한조에 ‘초교(草槁)’가 나오는 것으로 미루어 이미 삼국시대부터 착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짚신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지닌 북방의 화(靴)와 대응하는, 남방계통 최고(最古)의 신이라 하겠다. 짚신을 삼는 방법은 짚으로 새끼를 한발쯤 꼬아 넉줄로 날을 하고, 짚으로 엮어 발바닥 크기로 하여 바닥을 삼고, 양쪽 가장자리에 짚을 꼬아 총을 만들고 뒤는 날을 하나로 모으고, 다시 두 줄로 새끼를 꼬아 짚으로 감아 올려 울을 하고, 가는 새끼로 총을 꿰어 두르면 발에 신기에 알맞게 된다. 먼길을 갈 때와 들일을 할 때 착용하였으며, 생삼을 짚과 섞어 삼은 삼신은 상제(喪制)가 신었고, 그 밖의 것은 선비들이 맑은 날 가까운 나들이에 착용하였다.
- 전거: 通典, 晋書, 三國志, 北史, 舊唐書, 高麗圖經, 朝鮮服飾考(李如星, 白楊堂, 1947), 韓國服飾史硏究(金東旭, 亞細亞文化社, 1973), 한국복식의 역사(李殷昌, 교양국사총서 29, 1978), 靴制(趙孝順, 韓國의 服飾, 文化財保護協會, 1982)
44. 채소
죽순해(竹筍**)는 죽순을 소금에 저려 두었다 쓰는데 호남의 노령(蘆嶺, 장성) 이남에서 잘 담는다.
황화채(黃花菜)는 훤초(萱草) 즉 원추리꽃을 따서 말린 것으로 의주사람이 중국인에게 배워서 잘 만들고 맛이 좋다.
순(蓴)은 순채로 호남 • 해서 것이 좋고 석순(石蓴)은 영동(嶺東)에서 많이 나고 가장 좋다.
목숙은 거여목인데 원주 것이 은줄기 같이 희고 맛이 좋고, 요(蓼, 여뀌나물)는 이태원에서 나는 것이 좋다.
산갓김치(山芥菹)는 함경도 회양 • 평강 등에서 나는 것이 맵고 상쾌하다.
강(薑)은 전주산이 좋고 담양 창평 것이 다음 간다.
갓(芥)은 해서 것이 가장 맵다.
총(蔥)은 경기도 삭녕 것이 좋다.
달래(小蒜) • 유(萸, 호유나물, 고추풀) • 원수(園鬚)도 삭녕에서 나는 것이 모두 좋다.
마늘(蒜)은 영월 것이 좋고 먹고나서 훈기(마늘내)가 안난다.
동아(冬瓜)는 충주 것이 좋다.
토란(芋)은 호남 • 영남 것이 크고 좋고 낙동강 아래로는 작으나 맛이 좋다.
삼포(蔘脯, 인삼을 말린 것)는 영평 철원사람이 잘 만드는데 모양이 쇠고기 포와 같다.
고추장(椒鼓)은 황주 것이 좋다.
궐미(蕨薇, 고사리와 고비) • 아욱(葵) • 곽(藿, 국을 끓이는 콩잎) • 미나리(芹) • 배추(白菜) • 송이(松) •참버섯(眞菌) 등은 각처에서 많이난다.
표고(標古)는 제주산이 좋고 오대산 • 태백산에서도 난다.
무우(蘿蔔)는 나주산이 극히 좋아 배맛 같다.
움에서 키우는 것은 당귀싹(當歸芽) 소루쟁이싹이 있다.
보통 채소들로는 배추 • 무우 • 순무우 • 갓 • 미나리 • 시금치 • 상치 • 아욱 • 쑥갓 • 우엉 • 두릅 • 부추 • 염교 • 마늘 • 파 • 쪽파 • 신검초 • 산갓 • 박하 • 평지 • 거여목 • 차조기 • 황화채 • 소루쟁이 • 피마잎 • 순 • 삽주 • 도라지 • 더덕 • 율무 • 토란 • 감자 • 고구마 • 마 • 고사리 • 고비 • 비름 • 쑥 • 냉이 • 달래 • 돌나물 • 물쑥 • 오미자 • 결명자 • 구기자 등이 기록되어 있다. 또 채소의 조리법으로는 김치법과 장아찌가 있다.
- 전거: 屠門大嚼(허균, 1611(광해군3),서울육백년사 서울시사편찬위원회, 1995
45. 화문석
화문석의 수요는 조선시대에 이르러 급증하였으며, 특히 외국인의 애호열은 더욱 높아졌다. ≪통문관지 通文館志≫에 따르면 한 번의 동지사행(冬至使行) 때 중국에 보낸 화문석이 124장에 달하였으며, 우리 나라에 오는 관리들에게도 적지 않은 양을 선사하였다. 화문석의 조달을 담당한 기관은 장흥고(長興庫)로서, 이곳에서는 각 지방으로부터 필요한 수량을 거두어들였다.
화문석은 예로 부터 용수초지석•오채용문석(五彩龍紋席)•용문염석(龍紋簾席)•오조용문석(五爪龍紋席)•만화석(滿花席)•각색세화석(各色細花席)•채화석(彩花席)•잡채화석(雜彩花席)•황화석(黃花席)•화석(花席) 등 여러 가지로 불렸다. 용수초지석이라는 이름은 왕골이 용의 수염처럼 생긴 데에서 왔다. 그리고 오채용문석•용문염석•오조용석은 용모양의무늬를 넣어 짠 데서 왔다. 오채용문석은 다섯 가지 색으로 짠 용무늬 꽃자리이고, 오조용문석은 다섯 개의 발톱이 달린 용무늬 꽃자리라는 뜻이다. 이러한 것들은 극상품이어서 앞에서 말한 대로 왕실에서 중국에 보내는 선물용으로 생산되었다. 용문염석은 용무늬 발로서 역시 궁중에서 썼으리라고 짐작된다.
-전거: 인간문화재(이용해, 어문각, 1963), 韓國民俗大觀 5(高麗大學校民族文化硏究所, 1982).
46. 후추
후추는 매우 귀중한 것이었기에 일부 특권층에서만 이용되었으며, 대부분의 서민은 천초(川椒:초피나물)•겨자•마늘 따위를 향신료로 사용하였다. 그리고 한방에서는 후추가 온중(溫中)•건위(健胃)•구풍(驅風)•발한(發汗)의 효능이 있다고 하여 소화불량•위허약•번위(反胃)•구토•하리(下痢) 등의 증상에 약재로 이용하였다.
- 전거: 高麗以前韓國食生活史硏究(李盛雨, 鄕文社, 1978), 韓國食品文化史(李盛雨, 敎文社, 1984)
47. 흑각
물소의 검은뿔
조선시대에는 활의 장식이나 대의 장식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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