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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시장

by 8866 2009. 11. 13.

 

조선시대의 시장

 

서울(한양)

 

뚝섬 
 
서울특별시 성동구 성수동과 광진구 자양동•노유동 일대의 지역을 가리키는 지명이다. 뚝도•살꽂이벌•전관•전교•동교 등으로 불리며 한자로는 둑도〔纛島〕라고 표기한다. 실제로 섬은 아니나 동쪽에서 흘러오는 한강이 뚝섬 지역을 둘러 서쪽으로 흐르고 북쪽에서 흐르는 중랑천은 한강 본류와 뚝섬 서쪽에서 만난다. 지역 전체가 낮고 평탄하며, 한강에 의해서 형성된 범람원으로 홍수 때에는 많은 피해를 입었다.
조선 시대에는 특히 장안평(長安坪 : 지금의 동대문구 장안동)과 더불어 관마(官馬)의 목마장이었고, 군대의 열무장(閱武場)이기도 하였다. 특히, 자마(雌馬 : 암컷 말)를 풀었으므로 '자마장'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전거 :서울시600년사(1981), 증보문헌비고, 한국지명총람(1983)>
 
마포 
 
서울특별시 마포구 마포동 지역에 있었던 포구를 가리킨다. 용산강이 합류하는 한강의 북안에 위치하였다. 조선시대에 마포는 교통상 중요한 구실을 수행하던 지역이었다. 즉 마포 건너편에 있는 하중도인 여의도를 지나 육로로 시흥과 연결되는 도로상에 위치하였던 나루터였으며 한강에 위치하였던 오강(五江) 중의 하나로 수운에 큰 역할을 하던 포구였다. 한강은 조선시대에 각 지역과 연결되는 우리 나라 중부 지방의 수운을 담당하던 중요한 강이었다.
한강에 뚝섬〔纛島〕•노량•용산•마포•양화진 등의 오강을 설치하여 각 지역에서 오는 산물의 하역 및 저장을 담당하게 하였다. 마포는 용산•양화진과 함께 주로 삼남 지방에서 오는 곡식을 풀어내려 저장하던 곳이었다. 또한, 황해에서 어획되는 새우•조기 등의 수산물을 풀어놓던 곳으로 농수산물의 재분배 기능을 담당하였다.

<전거:신증동국여시승람, 서울시600년사(1981)>
 
부평 
 
조선시대에는 부평의 영역이 인천과 김포 사이에 있어 해안지방에 면해 있었다. 진산(鎭山)인 안남산(安南山)에는 옛 성이 있었고, 해안지방의 축관봉수(杻串烽燧)는 김포의 백석산봉수(白石山烽燧)를 통해 서울과 연결되었다. 금륜역(金輪驛)은 인천•김포•양천 등지와 연결되는 도로상에 발달하였다. 당시에는 강화도와 함께 서울의 서쪽을 방어하는 군사적 요충지였다.

<전거 :신증동국여지승람, 증보문헌비고>
 
서빙고 
 
조선시대 서울 용산구 서빙고동에 설치, 운영하였던 얼음창고. 지금의 서빙고동 둔지산(屯智山) 기슭 한강가에 있었다. 고려시대의 관습에 따라 조선 건국초에 설치되었다. 얼음의 채취․보존․츌납을 관장하기 위하여 설치된 관서이다.
여기에는 8개의 저장고가 있었고 총 134,974정(丁)의 얼음이 저장되었는데, 이는 동빙고(東氷庫)의 12배, 내빙고(內氷庫)의 3배가 넘는 규모였다. 이 곳을 관리하던 관원으로는 무록관(無祿官)인 별제(別制) 1인, 별검(別檢) 1인, 서원(書員) 1인, 군사 2인이 배정되어 있었으나, 조선 후기는 서원과 군사가 각기 3인씩으로 증치되었다.
동빙고가 국가 제사용 얼음, 내빙고가 궁중전용 얼음을 저장한 데 비해, 서빙고는 궁중, 문무백관 및 환자나 죄수들에게 나누어줄 얼음까지 저장하였다.
얼음의 저장은 한강이 4치의 두깨로 어는 12월(양력 1월)에 시작되었고, 이듬해 3월부터 빙고를 열고 반출하기 시작하였다. 얼음을 저장하고 반출할 때는 먼저 사한신(司寒神)인 현명씨(玄冥氏)에 대한 제사의식이 있었다. 서빙고의 얼음 저장과 시설 관리를 위해서 연간 쌀 1,000여석의 예산이 소요되었다.
장빙(藏氷)을 위해서는 겨울철에 강물이 두껍게 얼었을 때 채빙해 빙고까지 운반해야 했고 여기에는 목재•볏짚•솔가지 등 잡물이 필요했으므로, 동빙고에 10명, 서빙고에 40명의 빙부(氷夫)를 배치하였다. 또한 장빙은 단기간 내에 이루어져야 하므로 인근의 백성과 정병(正兵)을 동원하기도 했고 침몰 •동상 등에 대비, 의원을 배치하였다. 또, 제향에 쓸 얼음을 장빙할 때는 빙고의 관원 외에 봉상시(奉常寺)의 관원이 감독하였다.
빙고에 저장된 얼음은 비변사•승정원•홍문관•시강원(侍講院) •익위사(翊衛司) •춘추관•병조•내의원(內醫院) •양현고(養賢庫) 등 제사(諸司)와 종친•문무당상관•내시부당상관, 70세 이상 한산당상관이나 활인서(活人署)의 환자, 그리고 의금부․전옥서(典獄署)의 죄수에게도 지급했는데, 제사는 5월 15일부터 7월 14일까지, 그 밖에는 6월 한 달 동안 지급하였다. 단, 제향을 위한 공빙(供氷 : 상급관청이나 고관에게 얼음을 올림.)은 3월 1일부터 상강일까지, 대궐의 각전(各殿) 공상(供上 : 상급 관서나 高官에게 바침.)은 2월 1일부터 10월 말일까지로 하였다.
만일 빙고에서 얼음을 잘못 저장해서 중추(仲秋) 이전에 얼음이 다하면 담당 관원은 처벌을 받았다. 또 겨울에 얼음이 두껍게 얼기를 기원하는 사한제(司寒祭)를 지내기도 하였다. 궐내에는 따로 내빙고를 두었다. 
 
송파 
 
지금의 송파구 석촌호수 부근에 있던 나루터를 중심으로 서던 시장. 이 지역 부근에는 본래 조선초기 이래 삼전도(三田渡)가 나루터로 개설되어 있었지만 병자호란 이후 쇠퇴하였으며, 대신 이 송파진이 주된 나루가 되어 수어청(守禦廳)에서 파견된 별장(別將)에 의해 관리되었다.
송파진은 하중도(河中島)를 끼고 있어 삼전도보다 물이 풍부하여 좋은 포구 조건을 가졌고, 맞은 편에 있는 뚝섬의 조건이 좋지 못하였기 때문에 크게 번성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상공업의 발달로 물화(物貨)의 유통량이 크게 늘어난 조선 후기에 송파는 원주•춘천•충주•정선•영월•단양 등 한강상류지역에서 내려오는 각종 물화의 집산지가 되었다. 강운(江運)뿐만 아니라 서울에서 이곳을 지나 판교•용인을 거쳐 충청도•강원도로 가는 길, 또 용인을 거치지 않고 광주•이천을 거쳐 충주나 여주•원주를 거쳐 대관령•강릉으로 가는 길이 열려 있어 사람과 말의 통행이 번잡하였다. 그리고 도성(都城)에서 20리밖에 떨어지지 않았으므로, 강상(江商)은 물론 이현(梨峴) •칠패(七牌) 등 각 시장의 상인과 중개상인, 그리고 주민들이 장을 이용할 수 있었다. 송파시장이 번영하자 인근 70~80리 지역의 상인과 주민이 장에 나오기도 하였다.
이러한 지리적 요건이 송파시장을 발달시킨 이점이기도 하지만, 송파가 행정구역상 서울이 아닌 광주유수부에 소속되어 금난전권(禁亂廛權)이 미치지 못하였던 점도 중요하다. 시전상인들은 도성 안에서는 독점권을 철저하게 행사했지만, 이곳은 그런 제약이 없었으므로 한강의 사상도고(私商都賈)는 물론이고 전국 각지의 상인들이 자유롭게 상거래를 할 수 있었다.
송파시장은 ≪만기요람≫에서 전국 15대 장시의 하나로 꼽힐 만큼 대규모의 시장이었고, 5일•10일장이라고 하였으나 상설시장화하였다. 노천의 가점포가 있던 장터는 취락의 한가운데 자리잡았고, 그 주변에는 여각•객주•술집•대장간 등 각종 수공업점포가 즐비하였다. 이렇게 흥청거리는 시장에서 광대들은 〈송파산대놀이〉를 벌였다.
짐을 보관하는 창고와 10~20여 개의 객실과 마방(馬房)을 갖춘 여각이 두 곳 있었고, 수십 칸의 객주 한옥이 있었다. 객주는 여각보다 건물의 규모가 작고, 취급물품도 부피가 작았다. 중개상인에게 물품판매를 위탁한 지방상인은 대금을 받을 때까지 이곳에 유숙하였다. 송파시장의 남쪽, 즉 광주(廣州)와 판교 쪽으로는 우시장이 있었는데 특히 대구와 안동에서 많은 소장수들이 올라왔다. 그리고 나루터 오른편 버드내에는 도살장이 있었다.
거래된 물품은 미곡•잡곡•소•포목•과실•재목•땔감•연초•잡화 등 다양하였다. 또한 함경도•평안도•황해도 등지의 물산도 서울을 거치지 않고 이곳으로 운송되어 거래되었다. 그 거래의 주도권은 강상 중에서도 송파상인이 잡았다. 영조 때 시전상인들이 자신들의 상권을 위협하는 송파시장의 폐지를 주장한 사실에서도 송파상인의 재력과 거래규모가 상당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천 
 
동쪽은 여주, 서쪽은 용인, 서남쪽은 충청도 음성, 북쪽은 광주와 접하고 있다. 광주산맥의 지맥이 동북부지방을 지나고 남쪽은 차령산맥에 인접해 있어 북쪽과 서쪽은 높은 산이 발달하고 있으나 동쪽과 남쪽은 비교적 낮은 산지가 발달하고 있다. 이들 산지 사이에는 이천의 중심 하천인 복하천과 그 지류가 북쪽 또는 동북쪽으로 흘러 여주군으로 향하다가 남한강으로 흘러 들어간다. 하천유역에는 작은 규모의 평야와 구릉지가 발달하고 있는데, 이들 평야는 땅이 기름져 예로부터 농업이 발달하였다. 연평균기온은 10.7。C, 1월 평균기온 -5。C, 8월 평균기온 26。C로 한서의 차가 30。C를 넘는 대륙성 기후에 속한다. 연강수량은 1,218mm이다. 서리는 10월 초순부터 내리고 이듬해 4월 초순에 끝난다.
1413년(태종 13)에는 음죽현(陰竹縣)이 경기도에 편입되었다. 이천은 이 때부터 인구가 늘어나고 벼농사가 잘 되어 1444년(세종 26) 도호부로 승격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당시 이천도호부의 호수는 1,026호, 인구는 3,898인이었다. 1895년 지방관제 개편 때 이천은 부(府)에서 군이 되었으며, 음죽현과 더불어 충주부 관내에 귀속되었다. 당시의 호수는 4,967호, 인구는 2만5338인이며, 15개 면 98개 이로 늘어났다. 전 토지의 43.8%가 경지이고 42.4%가 임야이다. 주요 농산물은 쌀 이외에 밭작물로 무•배추 등을 많이 재배하였다. 그리고 이 지역은 고령토가 많이 생산되어 옛날부터 도자기 공업이 발달했다.
상업활동은 ≪임원경제지≫에 따르면 1830년대에 이천읍에는 매월 2•7일에 열리는 이천읍의 부내장(府內場) 또는 읍내장이 있었고, 3•8일에 열리는 대월면의 군량장(郡梁場)이 있었다.

<전거: 신증동국여시승람. 경기도지(1955), 이천의 맥박(1982)>
 

 

경기도


가평(가평장) 
 
고구려시대에는 근평군(斤平郡) 혹은 병평군이라고 하였다. 757년(신라 경덕왕 16) 가평군(嘉平郡)으로 개칭되었고, 1018년(고려 현종 9) 강원 춘성군에 속하였다.
1396년(조선 태조 5) 조종현을 폐합하고 1413년(태종 13) 개례(改例)에 따라 강원에서 경기로 편입하였으며, 1525년(중종 20) 종래의 현이 군으로 승격되었으나, 1697년(숙종 23) 다시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707년 다시 군으로 승격하였다. 그 후 1888년(고종 25) 춘성부(春城府)에 속하였다가 1894년 경기도에 다시 소속되면서 포천군에 속하게 되었다.
1895년 5월 26일 전국을 23부로 구획하는 지방제도 및 관제개혁 때에도 한성군(漢城郡) 관할 포천군에 그대로 포함되었으나 다음해인 1896년(건양 1년) 8월 4일 관제개혁으로 전국을 13도로 분할하면서 경기관찰사 소관에 포천군으로부터 분리하여 가평군이 되었다.
2001년 현재 가평읍 및 설악면(雪嶽面)•외서면(外西面)•상면(上面)•하면(下面)•북면 등 1읍 5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 군내장(郡內場)[5일, 10일]: 미(米), 어염(魚鹽),
- 콩•조•밀 등을 많이 재배하며, 한우 사육이 성하다. 농가부업으로 잣•밤•대추•도토리 등이 생산되는데, 잣은 전국 생산량의 25%, 경기도의 약 50%를 차지하고 있다.

<전거:신증동국여지승람, 가평군읍지(1899)>
 
개성 
 
경기도 북서부에 위치하고 있다. 동쪽은 장단, 서▪남▪북쪽은 개풍과 접하고 있다. 고려의 옛 도읍지로 문화유적이 많은 역사도시이며, 서울에서 북서쪽으로 78㎞ 떨어져 있다. 동경 126°31′~126°35′, 북위 37°57′~38°에 위치하고 있다.
마식령산맥의 말단부가 북에서 남으로 뻗어내려 있고, 남쪽 일부는 한강과 예성강의 하류지역으로 좁은 분지를 이룬다. 북쪽에 천마산(天摩山), 그 남쪽에 시의 진산인 송악산(松岳山, 488m)이 있고, 그 밖에 동남쪽에 용수산(龍岫山, 178m), 서남쪽에 진봉산(進鳳山, 310m)이 있으며, 남쪽에 한강이 흘러 평야가 이루어져 마치 부산대수(負山帶水)의 지세를 형성하고 있다.
연평균기온 10.4℃, 1월 평균기온 -6.2℃, 8월 평균기온 25.3℃ 내외로 한서의 차가 심한 대륙성기후이나, 같은 위도상의 다른 지역에 비하면 온화한 편이다. 연평균강수량은 1,253㎜이며, 서리는 대개 10월 초순부터 내리기 시작해 이듬해 4월 하순에 끝난다
기후조건이 좋고 토양이 비옥, 농산물 재배에 적합한 지역으로, 쌀▪보리의 주곡 외에 콩,수수 등의 잡곡이 생산되며 배추▪사과▪참외▪감▪복숭아 등의 생산이 많다. 가축으로는 돼지의 사육이 많으며, 특히 토질이 인삼재배에 적합해 고려인삼의 생산지로 국내는 물론 외국에도 잘 알려져 있으며, 전국 인삼재배면적의 약 절반을 차지할 정도였다. 특산물로서 개성배추 이외에 송고직(松高織)은 질기고 물이 빠지지 않는 옷감으로서 중국 및 유럽 등지에까지 수출되었으며, 개성소주도 유명하였다.
상업활동은 국제무역항의 구실을 했던 예성강 입구의 벽란도(碧瀾渡)가 가까이 있어 예로부터 외국사신의 왕래에 의한 공무역과 내․외국 상인간의 사무역이 번창해 일찍부터 상업도시로서 발달하였다. 고려 초부터 설치한 개성 시전(市廛)은 국내외의 교역을 도맡아하였고, 서울의 육의전과 맞서 발전을 거듭하였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와서 민간상인에 의한 무역을 금지해 일시 타격을 받았으나, 워낙 상재에 능한 개성인은 전국의 행상을 조직, 그 기반을 다져 조선 중기에는 전국 제일의 상업도시로 발전하였다. 상권을 전국적으로 확대, 조직화해 송방(松房)을 두고 지방생산품의 수집과 상품매매를 하였다. 특히 포목,피혁,지물 등의 상권을 독점하고 상업자본을 축적, 전국시장의 경제권을 장악하였다.

<전거 :신증동국여지승람, 경기도지(1956), 개성(1970)>
 
경기도(이천장) 
 
삼국시대에 백제의 영토였으나 477년(장수왕 63) 고구려로 귀속되어, 지금의 마장면을 중심으로 남천현이 설치되었다. 551년 신라 제24대 진흥왕 때 남천주로 군주를 두었다. 757년(경덕왕 16) 황무현으로 개칭되어 한주(지금의 광주)에 속하게 하였다. 고려 태조가 후백제를 정벌할 때 한때 이천군이라 이름한 적이 있다.
1257년(고종 44) 영창현으로 개칭하였다가 1390년(공양왕 8) 남천군으로 승격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이천현으로 재차 격하되었다가 1444년(세종 26) 도호부로 승격되어 부사가 상주하였고 관아도 현재의 이천시로 이전하였다. 1895년 충주부 이천군으로 되었다가 1896년 도제가 부활되면서 경기도 이천군이 되었다.
2001년 현재 관할구역은 창전동•관고동•중리동과 장호원읍•부발읍과 신둔면•백사면•호법면•마장면•대월면•모가면•설성면•율면 등 2읍 8면 3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 부내장(府內場)[2일, 7일]: 미(米), 면포(綿布), 마포(麻布), 과물(果物), 어염(魚鹽), 우독(牛犢), 옹기(瓮器), 목물(木物)
- 쌀은 시 전역에서 고루 생산되며, 농작물 생산량의 95% 이상을 차지한다. 특히 남부의 장호원읍과 북부의 부발읍이 2대 중심산지이다. 부발읍의 경우 경지율이 58%에 달하며, 논과 밭의 비율이 비슷하여 논농사와 밭농사가 동시에 성하다. 쌀 외에 주요농작물로 잎담배가 있는데, 남부 청미천 유역의 장호원읍•설성면•율면에서 많이 재배되고 있다.
 
고양(신원장) 
 
고양시는 고구려 때는 달을성현(達乙省縣), 신라시대에는 고봉현(高峰縣)이라 하였고, 고려시대에는 고봉•덕양•부원•황조현을 합쳐 덕양현(德陽縣)이라 하였다. 조선시대 1394년(태조 3) 처음으로 감무를 고봉에 두어 3현을 다스렸으며, 1403년(태종 3) 고봉•덕양을 합쳐 고양현으로 개칭하고 1470년(성종 1) 군으로 승격하였다. 그러나 1504년(연산군 10) 연산군이 군을 폐하고 유행처(遊行處)로 만들었다.
1914년 군면 폐합에 따라 경성부로부터 8개 면, 양주군으로부터 1개 면이 편입되었다가 1936년 4월 행정구역 변경으로 용강(龍江)•연희(延禧)•한지(漢芝)의 3개 면이 경성부에 편입됨으로써 9개 면이 되었다. 1949년 다시 은평(恩平)•숭인(崇仁)•뚝섬의 3개 면이 서울시로 편입되어 6개 면이 되었으며, 1967년 화전(花田)출장소를 설치하였다.
2001년 현재 덕양구와 일산구 2구와 35개 동을 관할하고 있다.
- 신원장(新院場)[4일, 9일]: 미(米), 두(豆), 모맥(牟麥), 면포(綿布), 마포(麻布), 과물(果物), 어염(魚鹽), 연초(煙草)
- 주로 벼농사와 낙농업이 이루어져 왔으나 일산에 신도시가 건설되면서 농경지가 택지로 많이 바뀌었다. 총 6,372㏊의 경지면적 가운데 논이 3,225㏊, 밭이 3,147㏊를 차지한다. 예로부터 한강유역과 구릉성 산지 등 지형적 조건이 농업에 유리하여 식량 생산량도 비교적 많고, 특히 쌀의 질이 좋기로 유명하였으나, 최근에는 농가 가구수가 계속 줄어들고 식량 생산도 감소하고 있다.
주요생산작물은 고구마•감자•보리 등이고, 구릉지에는 관상수의 수목원이 조성되어 있다. 또한 서울 대도시를 소비시장으로 하여 채소•화초•과수 등이 재배되는 근교농업 지대를 이룬다. 그 밖에 대규모의 양계•양돈•젖소 등의 축산업도 활발하다.
(전거:
고구려 때 김포는 검포현, 양천은 제차파의현이라 하였다. 검포현은 통일신라 경덕왕 때 김포로 고쳐져 장제군의 영현이 되었다.
1018년(현종 9)에 분리되어 명종(明宗) 때 감무를 두었으며, 1198년(신종 1)에 이르러 현령을 두었다. 1414년(조선 태종 14)에 양천(陽川)을 합하여 금양현이라 하였고, 나중에 다시 양천은 금천에, 김포는 부평부에 합하였다가 16년에는 다시 현으로 복귀시키고 현령을 두었다.
한편 제차파의현은 통일신라 경덕왕 때 공암으로 고쳐져 율진군의 영현이 되었으며, 1018년에 수주에 속하였다. 그 후 1310년(충선왕 2) 다시 양천으로 고치고 현령을 두었다. 1414년(태종 14) 양천현은 김포현에 합하여졌고, 나중에 금천에 합하였다가 1416년에 다시 현으로 복귀시켜 현령을 두었다. 1895년(고종 32)에 김포군이 되었으며 1914년에 양천현을 흡수하였다.
1998년 4월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김포군이 시로 승격되었고, 김포읍을 폐지하여 김포 1•2•3동을 두었다. 2001년 현재 행정구역은 고촌•양촌•통진•대곶•월곶•하성면과 김포 1•2•3동의 6면 3동을 이룬다.
- 신장(新場)[1일, 6일]: 미(米), 면화(綿花), 면포(綿布), 과물(果物), 어염(魚鹽), 석자(席子), 부정(釜鼎), 옹기(瓮器)
- 한강 상류에서 운반된 토사가 퇴적되면서 형성된 넓은 평야는 농경지로서 최적조건을 이루고 있다. 김포평야의 일부인 이 지역은 경기도의 다른 근교농업지대와는 달리 주로 벼농사 위주의 농업 형태를 보인다. 이곳에서 나는 기름진 김포쌀은 통진미로 유명하며, 수원•평택 지역과 함께 주요 쌀농사 지대를 이루어 경인지방의 주요 식량공급지가 되고 있다. 쌀•보리와 채소 외에 특기할 만한 산물은 인삼이다.

<전거 : 신증동국여지승람, 고양군읍지(1899), 증보문헌비고>
 
과천 
 
광주산맥의 말단부에 위치한 이 지역은 서북부와 동남부는 500m 이상의 높은 산지가 병풍처럼 솟아 있고 북부에는 100~300m의 구릉이, 남부에는 100m급의 곡저평야가 길게 펼쳐져 있다. 연평균기온은 11.30℃, 1월 평균기온은 -6.6℃, 8월 평균기온은 26.4℃로 연기온차가 30℃를 넘는다. 연강수량은 1,491mm이다.
산지가 전 토지의 2/3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많다. 주요 농산물은 쌀 이외에 채소류로 상추•배추•무•고추•파•오이•등이 생산된다.

<전거:신증동국여지승람, 경기도지(1956), 경기도사(1979)>
 
광주(송파장) 
 
송파의 동 이름은 송파나루터에서 비롯되었다. 조선 문종(文宗) 때, 부근에 있던 삼전도(三田渡)보다 연파곤(淵波昆)의 물살이 빠르지 않으니 그곳을 나루터로 하겠다는 경기관찰사(京畿觀察使)의 요청이 있어, 연파곤이 소파곤으로 변하였고, 이것이 소파리(疎坡里)로 되었다가 차츰 송파진(松坡津)으로 불리게 되었다.
조선 후기까지 경기도 광주군 중대면에 속하였고, 1914년 중대면 송파리였다. 1963년 서울특별시 성동구에 편입되면서 송파동으로 바뀌었고, 1975년 강남구, 1979년 강동구를 거쳐 1988년 송파구 관할로 되었다.
법정동인 이 동은 행정동인 송파1•2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조선시대에 송파는 군사상의 요충지로 한강변 5진(鎭)의 하나인 송파진이 있어 삼전도별장(三田渡別將) 대신 송파별장(松坡別將)을 두었다. 한강 남쪽의 나루터로서도 유명하여 서울에서 판교, 용인, 충주로 가려는 사람들이 송파진을 많이 이용하였다.
일제강점기에 송파장(松坡場)은 우시장으로 유명하여 각 지방의 소장수들과 서울의 정육업자들이 많이 몰려들었다. 조선 중기 이후에는 큰 규모의 정기시장으로 바뀌었다. 현재의 석촌호수 남쪽 언덕에 있었다.
- 송파(松坡)[5일, 10일] 
 
김포(신장) 
 
고구려 때 김포는 검포현, 양천은 제차파의현이라 하였다. 검포현은 통일신라 경덕왕 때 김포로 고쳐져 장제군의 영현이 되었다.
1018년(현종 9)에 분리되어 명종(明宗) 때 감무를 두었으며, 1198년(신종 1)에 이르러 현령을 두었다. 1414년(조선 태종 14)에 양천(陽川)을 합하여 금양현이라 하였고, 나중에 다시 양천은 금천에, 김포는 부평부에 합하였다가 16년에는 다시 현으로 복귀시키고 현령을 두었다.
한편 제차파의현은 통일신라 경덕왕 때 공암으로 고쳐져 율진군의 영현이 되었으며, 1018년에 수주에 속하였다. 그 후 1310년(충선왕 2) 다시 양천으로 고치고 현령을 두었다. 1414년(태종 14) 양천현은 김포현에 합하여졌고, 나중에 금천에 합하였다가 1416년에 다시 현으로 복귀시켜 현령을 두었다. 1895년(고종 32)에 김포군이 되었으며 1914년에 양천현을 흡수하였다.
1998년 4월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김포군이 시로 승격되었고, 김포읍을 폐지하여 김포 1•2•3동을 두었다. 2001년 현재 행정구역은 고촌•양촌•통진•대곶•월곶•하성면과 김포 1•2•3동의 6면 3동을 이룬다.
- 신장(新場)[1일, 6일]: 미(米), 면화(綿花), 면포(綿布), 과물(果物), 어염(魚鹽), 석자(席子), 부정(釜鼎), 옹기(瓮器)
- 한강 상류에서 운반된 토사가 퇴적되면서 형성된 넓은 평야는 농경지로서 최적조건을 이루고 있다. 김포평야의 일부인 이 지역은 경기도의 다른 근교농업지대와는 달리 주로 벼농사 위주의 농업 형태를 보인다. 이곳에서 나는 기름진 김포쌀은 통진미로 유명하며, 수원•평택 지역과 함께 주요 쌀농사 지대를 이루어 경인지방의 주요 식량공급지가 되고 있다. 쌀•보리와 채소 외에 특기할 만한 산물은 인삼이다.

<전거 : 신증동국여지승람, 김포군지(1976)>
 
삭녕 
 
경기도 연천과 강원도 철원 지역의 옛 지명이다. 조선시대는 삭녕이 임진강의 지류인 우화강(羽化江)변의 산간분지에 자리잡고 있어 장현(場峴)을 넘어 안협(安峽)과, 우화정진(羽化亭津)을 건너 마전(麻田)․적성(積城)과 연결되었다. 서쪽으로는 석현(席峴) •동점(東岾)을 지나 토산(兎山)과, 동쪽으로는 갈마현(渴馬峴)을 통하여 철원과 연결되었다. 
 
삼전도 
 
서울특별시 송파구 삼전동에 있었던 나루로, 삼밭나루라고도 불렸다. 한강 상류의 남안에 위치하여 서울과 부리도(浮里島, 또는 蠶室島인 현재의 잠실지역)를 연결하는 나루터로서 교통의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였다. 삼전도는 1439년(세종 21)에 신설되었는데 이는 한강에 설치된 최초의 나루터 중 하나였다.
삼전도는 서울에서 경기도 광주의 남한산성(南漢山城)에 이르는 길목에 있었고, 영남로(嶺南路)를 지나는 사람 중에서 특히 상인들이 주로 이용하였던 교통의 요지였다. 주로 사람과 말이 건너던 곳이었고 우마(牛馬)의 집결지였으며, 판교(板橋)와 연결되는 상업도로로서의 기능도 수행하였다.
처음은 도승(渡丞)이 한명 배치되었으나 뒤에 별장(別將)으로 고쳤으며 어영청(御營廳)의 관할이었다. 한말에 이르러 도진회사(渡津會社)가 설립되어 관할하게 되었다. 이에 속하였던 선박은 최고 여섯척까지 운영되었으나 보통 세척의 관선(官船)이 배치되었으며, 도진회사가 관할할 때는 두척으로 감소하였다. 
 
수원 
 
경기도 중남부에 위치하고 있다. 동북쪽과 동쪽은 용인, 서쪽과 남쪽은 화성, 서북쪽은 의왕에 접하고 있다. 광주산맥의 발달부인 광교산맥이 통과해 곳곳에 높고 낮은 구릉이 나타난다. 지형은 대체로 동북에서 남서 방면을 향해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다. 하천은 광교산에서 발원한 장지천(長芝川) •원천천(遠川川) •수원천(水原川)이 남류해 황구지천(黃口池川)에 합류한 뒤 남류한다. 지질구조는 화강암과 화강편마암이 전 지역에 분포하고 있다. 기후는 연평균기온 11℃, 1월 평균기온 -5.6℃, 8월 평균기온 26℃이며, 연평균강수량은 1327㎜이다. 10월 초에 첫서리가 내리고 4월 하순에 마지막 서리가 내린다.
전 토지의 31.5%가 경지이고 29.6%가 임야이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 이외에, 밭작물로 배추•무•상추•호박•오이, 특용작물로 참깨 등이 생산된다. 
 
수원(수원장) 
 
수원시는 고구려 때는 매홀군(買忽郡), 통일신라 경덕왕(景德王) 때는 수성군(水城郡)이라고 하였으며, 고려시대 성종(成宗) 때는 이곳에 도단련사 (都團練使)를 두었다. 1018년(현종 9)에 수주지사(水州知事)를 배치, 1271년(원종 12)에 수원도호부(水原都護府)로 고쳤으며, 1310년(충선왕 2) 수원부가 되었다.
1362년(공민왕 11)에는 군으로 환원되었다가 조선시대 1413년(태종 13)에 다시 도호부로 고쳐지고, 세조(世祖) 때는 진(鎭)을 두어 한성(漢城)을 수호하는 4진 중의 하나로 삼았다. 1793년 수원유수부로 바뀌었으며, 1895년(고종 32) 한때 인천부(仁川府) 관할의 수원군이 되었다가 1896년 경기도의 2등군이 되었다.
1914년 3월 수원군 수원면(水原面)이 되었으며, 1931년 수원면이 수원읍으로 승격되고, 1949년 수원군을 분할하여 수원시로 승격시키고 수원군을 화성군으로 개칭하였다. 1963년 주변의 20개 리를 편입하였으며, 1967년 6월 서울시에 있던 경기도청이 수원시로 이전되었다
1995년 권선구 곡선동이 권선동과 곡선동으로 나뉘고, 화성군 태안읍 신리와 망포리 일원이 팔달구 매탄3동에 편입되었다. 2001년 현재 3개 구 37개 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 부내장(府內場)[1일, 6일]: 미(米), 면포(綿布), 과물(果物), 어염(魚鹽), 우독(牛犢), 연초(煙草),
- 수원시는 황구지천(黃口池川)•서호천(西湖川)•원천천(遠川川) 등 소하천 주변에 충적평야가 발달해 있고, 서호•일왕(日旺)•원천•광교(光敎) 저수지 등 수리시설이 일찍부터 완비되었을 뿐만 아니라 농촌진흥청을 비롯한 농업관련기관이 밀집해 있어 한국 농업의 핵심도시 역할을 해왔다.
과거 수원성 안팎으로 큰 규모의 5일장 2곳(城內場•城外場)이 있었으며 곡선동(谷善洞)에는 큰 우시장(牛市場)이 열렸을 정도로 일찍부터 상업이 활발하였다. 5일장은 오래 전에 상설시장으로 바뀌었고, 우시장은 규모가 크게 줄어든 채 아직도 개설된다. 2000년 현재 9개 백화점을 비롯해 36개 상설시장이 수원과 인근지역을 상권으로 하면서 성업 중이다
 
안성 
 
경기도 남단에 위치하고 있다. 동쪽은 이천•음성, 서쪽은 용인•평택시, 남쪽은 천안•진천, 그리고 북쪽은 용인과 접하고 있다. 북부 산록지대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안성천(安城川)은 도중에 한천(漢川)을 합류하고, 서북부에서 발원하는 도곡천•도량천은 남진하면서 한천에 합류한다. 고남저수지에서 발원하는 한천은 남서진하는 안성천과 합류한다. 군의 중북부에서 발원하는 모두천•기술천 등이 안성천에 합류하고 남부의 금광저수지의 물과 청중천은 서진하면서 안성천과 합류하고 있다.
그리고 안성천은 황구지천(黃口池川) •청룡천(靑龍川)과 합치면서 천안으로 들어간다. 이들 하천은 하천지역에 넓은 충적 평야인 안성평야를 만들고 있다. 동북부에는 청미천이 흐르는데 하천 주변에는 죽산분지가 발달하고 있다.
지질은 화강암과 화강편마암으로 되어 있으며, 기후는 대륙성기후에 속한다. 연평균기온은 11.5℃, 1월 평균기온 -4.9℃, 8월 평균기온 26.6℃이며, 연강수량은 1,200mm 내외이다.
전 토지의 50%이상이 산지로 구성되어 있으며, 경지는 34.7%이다. 주요 농산물은 쌀 이외에 옥수수•콩•팥•녹두•감자•고구마와, 채소류로 고추•무•배추•파•마늘•당근, 특용작물로는 참깨•들깨 등이 생산되고 있다. 산지가 많은 이 지역에는 밤•도토리•은행•대추 이외에 표고버섯이 생산되고 있다.
상업시설은 일반시장이 3개가 있는데 읍내에 있는 유기 시장이 잘 알려져 있으며 상설시장의 개설에도 불구하고 안성장(5일장)이 열리고 있다. 안성은 충청도•전라도•경상도를 잇는 교통의 요지로 농산물의 집산지로 안성장은 2•7일에 열리는데 안성장은 전국을 상대로 하는 장이다. 이 곳에서는 곡류•유기제품•제지류•과일•채소류가 판매되고 있다. 그리고 이 곳에서는 열리는 우시장도 활기를 띠었다. 안성장 이외에 죽산면의 죽산장이 3•8일, 일죽면의 일죽장이 5•10일에 열리고 있다.

전거: 신증동국여지승람, 증보문헌비고, 여지도서
 
안성(안성장) 
 
고구려 시대에는 내혜홀(奈兮忽), 신라 경덕왕(景德王) 때는 백성군(白城郡), 고려 초에는 안성현(安城縣)이라 일컬었으며, 1018년(고려 현종 9)에 수주(水州)에 속하였다가 후에 천안부(天安府)에 이속되었다. 1171년(고려 명종 2)에 감무를 두었고 1362년(공민왕 l1)에는 군으로 승격되었다. 1413년(조선 태종 13)에 충청도에서 경기도로 이관되었고, 1914년 3월 안성(安城)•양성(陽城)•죽산(竹山)의 3개 군을 병합하여 안성군이라고 하였다.
2001년 6월 공도면이 공도읍으로 되어 현재의 행정구역은 공도읍과 원곡•양성•고삼•삼죽•죽산•일죽•보개•금광•서운•미양•공도•대덕면, 안성1•안성2•안성3동의 1읍 12면 3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 군내장(郡內場)[2일, 7일]: 미(米), 두(豆), 모맥(牟麥), 면포(綿布), 마포(麻布), 과물(果物), 어염(魚鹽), 우독(牛犢), 석자(席子), 철물(鐵物), 유기(鍮器), 사기(沙器), 목물(木物), 유기(柳器)
- 경기도 남단의 내륙에 위치해 기후•토질이 좋고 수자원이 풍부하여 농업비중이 크며 벼농사•과수•특용작물•시설원예 등 다양한 작목을 재배하는 전형적인 농업생산 지대이다. 특히 수계(水系)가 조밀하게 발달되어 있어서 경기도 내에서도 손꼽히는 곡창지대이며, 안성쌀은 예로부터 고급 쌀로 유명하여 임금님께 바치던 공물이었다. 주요 작물로는 쌀을 비롯해 포도•배•시설채소•고추•화훼•인삼 등이 있다. 인삼은 보개•양성면에서 많이 재배된다. 일죽과 죽산 등지에서는 5일장이 열리고 있으며, 현대식 상설시장도 개설되어 있다. 
 
양성 
 
경기도 안성 지역의 옛 지명이다. 지명의 유래는 사복홀의 사복이 차음(借音)으로 '새밝이'어서 새밝골 또는 새밝성이 되어 이 것이 양곡(陽谷) 또는 양성이 된 것이다. 적성의 적(赤)도 '밝'과 관계가 있다.
조선시대에는 치소(治所)가 진산인 천덕산(天德山)과 남쪽의 백운산(白雲山) 사이에 자리잡고 있어 외부와는 선원천(禪院川)을 건너 안성과 연결되었다. 서해안에 월경처인 괴태길곶(槐台吉串)이 있어 양성의 세곡(稅穀)은 이곳을 통하여 경창(京倉)으로 운송되었다. 
 
여주 
 
동쪽은 양평, 강원도의 원주, 충청도 충주, 서쪽과 남쪽은 이천, 충청도 음성, 북쪽은 양평과 접하고 있다.
이 지역의 중앙을 흐르는 한강은 강원도와의 경계에서 섬강, 남서부의 평지를 흐르는 청미천•양화천•복하천, 북쪽에서 흐르는 금당천과 각각 합류하여 북서방향으로 흐르면서 이 지역을 강남과 강북으로 나누고 있다. 내륙에 분포하고 하천이 많아 기화열로 인하여 여름은 덥고 겨울은 춥다. 연평균기온 11℃, 1월 평균기온 -6℃, 8월 평균기온은 26℃이며, 연강수량은 1,173㎜이다.
전 토지의 54.6%가 임야이고 경지는 29.2%에 불과하다. 주요 농산물은 쌀 이외에 녹두•고구마가 생산되고 채소류로 고추•배추•무•참외•수박•오이•호박•가지•파 등이, 특용작물로는 땅콩•참깨•들깨가 등이 생산되고 있다. 임산물로는 밤•도토리•대추•은행 이외에 표고버섯이 생산되고 있다.
상업활동은 가남장이 1•6일, 여주장이 5•10일, 대신장이 4•9일이 있다. 주요 거래품목으로는 고구마•고추•땅콩 등이 유명하다. 과거에는 남한강을 이용하는 하천교통이 발달했으나 현재는 없어지고 이포나루가 있을 뿐이다. 이포나루는 이천과 양평을 연결하는 나루터로 이용되고 있다.

<전거:신증동국여시승람, 여주읍지, 여주군지(1989)>
 
여주(여주장) 
 
940년(고려 태조 23)에 황려현(黃驪縣)이 된 후 1018년(현종 9)에 강원 원주에 영속되었다가 1214년(고종 1)에 영의(永義)로 개칭되었다. 1305년(충렬왕 31)에 여흥군(驪興郡)으로 승격한 후 1401년(조선 태종 1)에 음죽현(陰竹縣)의 북부를 편입하여 여흥부(驪興府)로 승격되면서 관할이 충청에서 경기로 변경되었다. 1414년(태종 13)에는 도호부(都護府)가 설치되었고 1469년(예종 1)에 세종대왕 능인 영릉(英陵)을 현 능서면 왕대리(旺垈里)로 옮기면서 천령현(川寧縣)을 병합, 여주목(驪州牧)으로 하고 목사(牧使)를 주재시켰다.
1501년(연산군 7)에 여주목의 관할구역을 없애고 충주부(忠州府)의 관할하에 두었다가 1895년 충주부 여주군으로 칭하였다. 1914년 부•군•면 폐합 때 경기 여주군이 되어 1개 읍 9면을 관장하였다. 1963년 개군면(介軍面)을 양평군으로 편입시키고, 1970년 금사면 산북출장소가 설치되었다. 1989년 금사면의 산북출장소(山北出張所)를 산북면(山北面)으로 승격시켰으며, 1992년 북내면 오학출장소를 설치하였다. 1994년 강천면 대둔리가 강원도 원주시로 편입되었다.
2001년 현재 여주읍과 점동면(占東面)•가남면(加南面)•능서면(陵西面)•흥천면(興川面)•금사면•대신면(大神面)•북내면(北內面)•강천면(康川面)•산북면(山北面)의 1읍 9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 부내장(府內場)[2일, 7일]: 미(米), 두(豆), 모맥(牟麥), 면포(綿布), 마포(麻布), 과물(果物), 어염(魚鹽), 연초(煙草), 치계(雉鷄), 부정(釜鼎), 사기(沙器), 목물(木物), 지지(紙地)
- 특산물로는 일명 경기미로 불리는 여주쌀과 고구마•땅콩•참외가 있다. 그 밖에 금사면의 오이, 점동면의 토마토, 가남면의 복숭아, 흥천면의 배도 상당한 생산량을 올리며, 여주읍•가남면•능서면 등지에서 사과도 산출된다. 여주읍•가남면•점동면•강천면 등 남동부에서는 잎담배의 생산이 많으며, 가남면에서는 축산도 성하다.
도자기 제조는 여주군의 대표적인 산업으로 여주읍에서 서북쪽으로 북내면의 오금리•현암리•오학리•천송리•지내리 일대에 2001년 현재 약 600여 개의 도자기 공장이 밀집되어 있다.
 
용인 
 
동쪽은 광주•이천, 서쪽에는 수원•, 남쪽은 안성, 북쪽은 광주와 접하고 있다. 동북부에 광주산맥이, 동남부에는 차령산맥이 지나고 있다. 동북부와 동남부에는 400~500m의 산지가 솟아 있고 서남부지역에는 낮은 구릉과 평야가 펼쳐져 있다. 중앙의 금학천•경안천•진위천을 따라 남북방향으로 저지대가 형성되고 있다. 군의 동남부에는 남한강으로 흘러드는 청미천이 동남쪽으로 흐른다. 연평균기온은 10.3℃ 내외, 1월 평균기온 -4.8℃, 8월 평균기온 26℃로 한서차가 30℃가 넘는다. 연강수량은 1,300㎜내외이다.
전 토지의 60.2%가 임야이고 농경지는 전체토지의 23.7%이다. 주요 농산물은 쌀 이외에 밭작물로 배추•무•고추•오이•호박•수박•마늘•파 등이 있다. 옛날에는 연근•면화 등이 생산되기도 했다.

<전거 :신증동국여지승람, 용인군지(1899), 경기도사(1979)>
 
용인(용인장) 
 
백제 때의 멸오현을 475년(장수왕 63) 고구려의 구성현으로 개칭하였다가 다시 신라 경덕왕 때 거서로 개칭하였다. 944년 고려시대에 거서를 용구로 개칭하였다.
1395년 용구현과 처인현이 병합되었다. 용구현은 본래 고구려의 구성현으로 고려 전기에 용구로 개칭되었으며 현종 때 광주에 속했다가 명종 때 현이 되었다. 처인현은 본래 수원부의 처인부곡으로 1397년(태조 6)에 현이 되었다.
1914년 당시의 양지군은 본래 수주의 양량부곡이었으나 1399년(정종 원년)에 양산현으로 개칭되었고, 1413년(태종 13)에 다시 추계현으로 개칭됨과 동시에 충청도에서 경기도로 이속되었다. 그 후 이천시에 속하는 양지현이 되었다.
1895년 5월 23일 부제 실시에 따라 충주부 용인군이 되었다가 1896년 8월 13일 도제 실시로 경기도 용인군이 되었다.
2001년 현재 행정구역은 기흥읍•수지읍•구성읍과 포곡면•모현면•남사면•이동면•원삼면•백암면•양지면과 중앙동•유림동•역삼동•동부동의 3읍 7면 4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 현내장(懸內場)[2일, 7일]: 미(米), 면포(綿布), 마포(麻布), 과물(果物), 어염(魚鹽), 우독(牛犢), 연초(煙草), 유기(鍮器), 옹기(瓮器), 사기(沙器), 유기(柳器), 지지(紙地)
- 특산품으로는 팽이버섯•이수자반상•옥로주•소리고을•청동오리쌀•순지오이•포곡상추•전통한지•백암순대가 유명하다.
장터로는 김량장•백암장•용인장이 있으며, 한국민속촌 내에서 열리는 용인장은 지역의 큰 명물로 통할 정도로 유명하다. 항시 사람들로 붐비는 이 장터에서는 인절미며 증편 따위의 고유 떡과 파전•도토리묵•식혜•빈대떡 등 한국 고유의 갖가지 음식이 팔리고 있다.
 
인천 
 
인천은 근대에 들어와 문호개방과 통상을 요구하는 열강과의 관계에서 갑자기 각광을 받기 시작하였다. 1883년 인천이 개항됨으로써 서양의 근대문물을 수입하는 수도의 관문으로서 우리 나라 근대화에 이바지하게 되었다.
지형은 해안매립지와 간척지를 제외하고는 기복이 작은 구릉지 또는 낮은 산지로 구성되어 있다. 구해안선에 인접한 남북방향 산지의 동쪽에는 굴포천, 청천천 등 하천이 관통하며, 이를 따라 충적평야가 넓게 발달해 굴지의 곡창지대로 손꼽혔다. 인천의 구중심지를 동서방향으로 가로지르는 구릉성 고립산지 주변의 곡지는 예전에 바닷물이 드나들던 갯골이었고, 이 갯골 일대는 넓은 간석지가 발달해 간척에 의해 염전과 농경지로 활용되었다. 인천은 경기만 깊숙이 자리잡고 있어 해양의 영향은 비교적 적다. 연평균기온은 11.7℃, 1월 평균기온 -1.7℃, 8월 평균기온 25.7℃이며, 연강수량은 1,170㎜이다. 
 
장단(장단장) 
 
래 고구려의 장천성군(長淺城郡)인데, 신라 경덕왕(景德王) 때에 장단으로 개칭, 우봉군(牛峰郡)의 영현(領縣)이 되었다. 고려시대 목종(穆宗) 때에는 시중(侍中) 한언공(韓彦恭)의 고향이라 하여 단주(湍州)로 승격시켰으나, 그 후 다시 장단현(長湍縣)이 되었고, 문종(文宗) 때에는 개성부(開城府)에 직속되었다. 조선시대 태종(太宗) 때에는 이웃 임강현(臨江縣)과 합쳐서 장림군(長臨郡)이 되었는데, 세종 때 또다시 장단현이라 칭하게 되었다.
세조(世祖) 때에는 중궁(中宮)의 3묘(三廟)가 이 땅에 있다 하여 군(郡)으로 승격시키고, 치소(治所)를 당시의 백악산(白岳山)의 남록(南麓) 임진(臨津)에서 도원역(桃源驛)으로 옮겼다. 그러나 광해주(光海主) 때 다시 옛 터로 돌아갔다. 예종(睿宗) 때 도호부(都護府)로 승격된 후 대체로 변경이 없다가 조선 후기인 1895년, 지방관제 개정으로 지금과 같이 되었다. 별칭(別稱)으로 장천성(長淺城) •야야(耶耶) •야아(夜牙) •단주(湍州) •장림(長臨) •임단(臨湍) 등이 있다. 관할구역은 장단 •군내(郡內) •진서(津西) •소남(小南) •대남(大南) •강상(江上) •대강(大江) •장도(長道) •장남(長南) •진동(津東)의 10개면이고, 군청소재지는 장단면 도라산리(都羅山里)이다.
- 부내장(府內場)[3일, 8일]: 미(米), 면포(綿布), 우독(牛犢), 옹기(瓮器)
- 주민의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하여 주산업은 농업이다. 경작지는 남반부의 임진강 연안에 발달하였으며, 논으로도 이용되어 쌀의 생산이 적지 않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밭이 탁월하여, 경기의 유수한 잡곡지대이다. 특히 콩은 이웃 연천군의 콩과 함께 장연대두(長漣大豆)로 불리는데 질이 좋기로 전국적으로 유명하다. 그 밖에 밀 •보리 •조 •팥 •메밀 등의 산출량도 비교적 많다. 특용작물로는 인삼(人蔘) 재배가 성한데, 개성의 인삼 재배지대의 연장이라 하겠다. 잎담배 재배, 양잠업도 다른 군에 비해 활발하다. 도자기 제조 •주물 등의 가내공업도 성하다.

<전거: 신증동국여시승람, 한국지명요람(1982)>
 
진위 
 
경기도 평택지역의 옛 지명이다. 지명의 유래는 부산(釜山)의 부의 훈(訓)이 솥을 뜻하고 송촌활(松村活)은 뭍이 되어, '솟을땅'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진위는 이 말의 뜻을 바꾼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안성천(安城川)의 지류인 장호천(長好川)변에 자리잡고 있었으며, 북으로 진산인 부산을 등지고 있었다.
남쪽에 해창(海倉)이 있어 남양만을 통하여 서울로 세곡을 운반하였다. 평택에서 이곳을 거쳐 용인•수원을 지나 서울에 이르는 도로가 발달하였다.

<전거:신증동국여지승람, 경기도지,(1956), 개성(1970)>
 
파주(봉일천장) 
 
파주시는 고구려 때인 475년(장수왕 63)에는 파주사현(坡州史縣)이라 칭하였다. 조선시대인 1398년(태조 7)에 서원군(瑞原郡)과 파평현(坡平縣)을 병합하여 원평군(原平郡)이라 하고, 1415년(태종 15) 교하현(交河縣)을 폐지시켜 이에 병합하여 도호부(都護府)로 승격, 뒤에 교하현을 다시 복구시켰으나 도호부는 그대로 두었다. 1459년(세조 5)에 파주목(牧)으로 승격하였으며, 1504년(연산군 10)에 본주(州)를 유행지소(遊幸之所)로 삼고 나머지 땅은 인접 고을에 소속시켰다. 1506년(중종 1) 다시 파주목으로 복귀, 1895년 군이 되었다. 1996년 3월 파주군 전역이 시로 승격되면서 금촌읍이 금촌1동과 금촌2동으로 분할되었다. 2001년 현재 관할구역은 금촌1•2동과 문산읍•파주읍•법원읍•월롱면•탄현면(炭縣面)•교하면•조리면(條里面)•광탄면•파평면•적성면 등 3읍 7면 2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 봉일천장(奉日川場)[2일, 7일]: 미(米), 면포(綿布), 마포(麻布), 어염(魚鹽), 우독(牛犢), 석자(席子), 옹기(瓮器), 사기(沙器), 목물(木物), 유기(柳器)
- 총면적 중에서 경지면적이 차지하는 비율은 32.4%이다. 파주시의 북동부•동부•남동부 지역은 산지가 많아 농경지의 비율이 낮으나, 서부 지역은 한강과 임진강을 비롯해 교하면 서쪽으로 흘러가는 곡릉천이 만든 기름진 충적평야가 발달하여 농경지의 비율이 비교적 높다. 그러나 논의 비율은 계속 줄어 1992년 총경지면적의 57.6%에서 현재는 20%에 불과하다. 주요농산물은 쌀•보리이며, 채소와 과수 등의 원예농업도 널리 이루어진다. 특용작물로는 들깨•참깨•땅콩 등이 재배되며, 특산물로는 파주쌀•버섯•인삼•장단콩•참외•양봉•장미 등이 있다. 
 
포천(송우장) 
 
포천군은 삼한시대에 마한(馬韓)에 속하였고, 삼국시대에는 마홀군(馬忽郡)으로 고구려에 속하였다. 통일신라 이후에는 견성군(堅城郡)으로 불리다가 고려시대인 995년(성종 14)에 포천군으로 개칭되었다. 고려 현종 때에는 양광도(楊廣道) 양주군(楊州郡)으로 속하다가 조선시대인 1413년(태종 13) 8도제가 실시되면서 다시 포천군이 되었다.
1895년(고종 32) 8도제 폐지와 더불어 영평군(永平郡)이 포천군에 병합되었다가 그 이듬해 다시 분리되었다. 1914년 3월 행정구역 개편 때 영평군은 포천군에 다시 합병되었다. 영평군은 본래 고구려의 양골현(梁骨縣)인데 신라 경덕왕 때 동음(洞陰)으로 고쳐서 견성군의 영현(領縣)이 되었다. 1018년(고려 현종 9)에 동주(東州:鐵原)에 속했다가 1106년(예종 1)에는 감무(監務)를 두고, 1269년(원종 10)에 영흥(永興)으로 고쳐 현령(縣令)을 두었다.
조선시대 1403년(태종 3)에 영평(永平)으로 고치고 문종 때에 군으로 승격하였으며, 1914년 포천군에 병합되었다. 1945년 38°선으로 남북이 나뉘면서 청산(靑山)•창수(蒼水)•영중(永中)•영북(永北)•이동(二東)•일동(一東)면의 일부지역이 포천군에서 제외되었다. 1954년 10월 관내 12면 88개 리가 완전 수복되었다. 1963년 5월 먼 곳에 사는 주민의 편의를 위하여 내촌면(內村面)에 화현(花峴)출장소를 두었다.
2001년 현재 관할구역은 포천읍•소흘읍과 군내면(郡內面)•내촌면•가산면(加山面)•신북면•창수면•영중면•일동면•이동면•영북면•관인면•화현면의 2읍 11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 송우장(松隅場)[4일, 9일]: 미(米), 면화(綿花), 면포(綿布), 마포(麻布), 과물(果物), 우독(牛犢), 연초(煙草), 부정(釜鼎), 목물(木物)
- 주요작물인 쌀•보리 이외에 특용작물로 참깨와 들깨가 생산되는데, 참깨는 일동면, 들깨는 포천읍과 영북면에서 많이 생산된다. 그 밖에 느타리버섯 재배와 양계업이 활발하다. 인삼과 잣이 많이 재배되며, 영북면의 사과와 배는 예로부터 유명하다.
 
 
충청도


공주 
 
동쪽은 연기, 서쪽은 예산•청양, 남쪽은 논산•부여, 북쪽은 천안과 접하고 있다. 북쪽과 남쪽은 산지를 이루고 중앙부의 하천유역에는 평야가 전개된다. 전라도 무주•장수 부근에서 발원한 금강은 공주의 중앙부를 대체로 동쪽에서 서쪽으로 관류하면서, 많은 지류와 합류하고 양안에 비옥한 범람원을 이루어 놓았다. 대개의 지류는 능선들의 방향과 평행하게 흘러 금강과 거의 직교하여 유입하나, 유구천(維鳩川) •대교천(大橋川)•용성천(龍城川) •구곡천(九曲川) 등은 사행천이다. 신풍면과 청양의 경계에는 실운리고개•솔치고개, 유구읍과 아산 사이에는 각홀고개, 정안면과 천안을 잇는 장고개•개치고개•이수원고개, 유구읍과 예산을 잇는 차령고개가 있다. 그리고 정안면에서 국사봉에 이르는 데재고개•사기소고개 등이 있다.
내륙지역에 위치하므로 기후는 한서의 차가 큰 대륙성기후를 나타낸다. 연평균기온 12.0℃, 1월 평균기온 -3.0℃, 8월 평균기온 26.2℃이고, 연강수량은 1,162.5㎜로 비교적 많은 편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당시 공주목의 호구는 2167호에 1만49명이었다 한다. 1598년(선조 31) 충청감영이 공주로 이전되어 호서 지방의 4개 목 35개 현을 관할하여 호서의 중심지가 되었다. 1624년(인조 2)에 이괄의 난으로 인조가 공주로 피난을 오기도 했으며, 1646년에 유탁(柳濯)의 난으로 공주가 공주현으로 강등되었다가 곧 환원되기도 하였다. 조선후기 공주목은 추로지향(鄒魯之鄕)으로 김장생(金長生) •김집(金集)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 •이유태(李惟泰) •권시(權魅) •윤증(尹拯) •유계(兪棨) 등 조선 후기 정계와 학계를 주름잡은 유명한 인물을 많이 배출하였다.
공주의 외곽부는 산지가 많지만, 금강과 그 지류유역의 저지대는 대부분 농경지로 이용된다. 쌀을 비롯, 보리•콩•고구마•감자 등의 식량작물과 고추•참깨•들깨•표고버섯의 생산량이 많다. 가내수공업으로는 명주와 면직이 생산되었으나, 현재는 유구읍에서만 겨우 명맥을 유지할 정도이다.
정기시장은 현재 시중심지의 공주장, 계룡면의 경천(敬天) •월암(月巖)장, 정안면의 광정(廣亭)장 등 4개소가 유지되고 있다. 이 중 공주장은 1일과 6일에 상설시장일대에서 개시되어 상설시장의 상업활동에 주기적으로 활기를 불어넣고 있다. 경천장은 2•7일에, 월암장은 4•9일에, 광정장은 5•10일에 각각 열린다. 본래, 공주시에는 장기면의 한다리〔大橋〕장, 사곡면의 호계(虎溪)장, 탄천면의 삼각(三角)장, 신풍면의 산정(山亭)장, 유구읍의 석남(石南)장, 반포면의 공암(孔巖)장 등 여러 개의 5일장들이 있었다. 그러나 중심지의 성장, 교통망의 확충, 교통수단의 보급, 농촌지역의 인구감소 등의 원인으로 1980년대를 거치면서 모두 폐장되어버렸다.
근대적 교통로가 개설되기 이전에는 금강을 이용한 내륙수로가 주요 교통수단이었으나, 자동차교통의 발달과 더불어 수운이 완전히 쇠퇴하였다.

<전거 :신증둥국여지승람, 공주군지(1979)>
 
공주(공주장) 
 
공주시는 삼한시대에는 마한의 불운국(不雲國)이었고, 백제가 위례성(慰禮城)에서 웅진으로 도읍을 옮긴 475년(문주왕 1) 이후 538년(성왕 16) 부여로 천도하기까지 약 60년간 백제의 수도였다.
백제가 멸망한 후 중국 당(唐)나라가 웅진도독부(熊津都督部)를 두었고, 670년(문무왕 10) 신라가 차지한 후, 686년(신문왕 6) 웅천주(熊川州)를 설치하여 13개 군 29개 현을 통할하게 하였다.
757년(경덕왕 16)에는 웅주로 개칭하였다가 940년(태조 23) 공주로 개칭하였다. 983년(성종 2) 공주목이 되었으며, 993년에는 하남도(河南道)에 속하였고, 1341년(충혜왕 2)에는 목으로 승격되었다.
조선 세조 때에는 공주에 진관이 설치되었으며, 1598년(선조 31) 충청감영이 충주에서 공주로 이전되었다. 그 후 1895년(고종 32) 공주군으로 개편되었고 이듬해에는 충청남도의 도청소재지가 되었다. 1931년 도청이 대전으로 이전하였고, 1938년 공주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1986년 1월 공주읍이 공주시로 승격되면서 공주시와 공주군으로 분리되었고, 1995년 1월 다시 통합되어 도농복합형(都農複合型)의 공주시로 되었다. 1998년 봉화동이 중앙동에 통합되고, 금호동이 신관동에 통합되었다. 2001년 현재 유구읍과 계룡•반포•사곡•신풍•우성•탄천•의당•이인•장기•정안면, 중학•산성•웅진•금학•옥룡•신관동 등 1읍 10면 6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 읍내장(邑內場)[1일, 6일]: 미(米), 두(豆), 면포(綿布)
경천장(敬天場)[2일, 7일]: 미(米), 두(豆), 맥(麥), 과물(果物), 어염(魚鹽), 면화(綿花), 면포(綿布), 연초(煙草), 석자(席子), 지지(紙地)
- 주요 농작물은 쌀•콩•고구마•감자•잎담배 등이 많이 재배된다. 특산물은 정안의 밤, 유구의 고랭지채소, 신풍의 표고, 계룡의 딸기 등 1면 1특화작목을 집중 육성하고 있다.
축산업은 낙농•양계•양돈 등이 활발하며, 한우는 계룡•우성•정안면, 젖소는 유구읍•의당면•우성면, 돼지는 우성•정안•계룡면, 닭은 탄천•계룡면에서 많이 사육된다.
지하자원으로는 토상흑연•금 등이 산출되며, 유구읍의 광산에서 활석이 약간 채굴된다.

<전거:신증동국여지승람, 공주군(1979)>
 
단양(단양장) 
 
구석기시대(약 70만 년 전)부터 인류가 살아온 선사문명의 발상지로 지금의 단양군은 옛 단양군에 영춘현이 병합된 곳이다. 단양읍•매포읍•대강면•적성면은 옛 단양군 지역에, 영춘면•가곡면•어상천면 일대는 옛 영춘현 지역에 해당한다.
삼한시대에는 마한에 속했으며, 삼국시대에는 본래 고구려 적산현(赤山縣), 혹은 적성현(赤城縣)이었다가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내제군(奈堤郡:현재의 제천시)의 영현이 되었다. 551년(진흥왕 12)에 백제와 신라의 공동작전으로 신라의 영토가 되어 진흥왕이 순시할 때 세운 적성비가 남아 있다.
940년에는 단산현(丹山縣)으로 고치고, 1018년(고려 현종 9) 원주에 속했다가 뒤에 충주로 이속되었고, 고종 때 고을 사람들이 합단(哈丹)의 침입을 물리친 공으로 감무(監務)를 두었으며, 1318년(충숙왕 5) 단양으로 이름을 바꾸고 지군사(知郡事)로 승격되었다. 1413년(조선 태종 13) 단양군(郡)이 되었고, 1895년(고종 32) 충주부(忠州府)가 관할하다가, 1914년 군면폐합에 따라 영춘군(永春郡)을 병합하여 단양군이 되었다.
영춘군은 고구려의 을아단현(乙阿但縣)으로 신라 경덕왕 때 자춘(子春)이라 개칭하여 내성군(奈城郡:현재의 제천시)의 영현이었고, 고려 때 영춘으로 고쳐서 원주(原州)에 속하였으며, 1399년(조선 정종 1) 충청도에 이관하여 감무(監務)를 두었고, 1413년(태종 13)에 현감(縣監)을 두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영춘군이 되어 충주부 관할이 되었다가 1896년 충청북도에 속했다.
영춘군 지역은 영춘•가곡•어상천•차의곡의 4개 면으로 구분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단양군에 통합되었다. 단양군 성립 이후 면의 개칭 및 폐합이 있었고, 1976년 영춘면 서부지역 5개 리에 별방(別芳) 출장소를 설치하였다. 1979년 단양면, 1980년 매포면이 각각 읍으로 승격하였고, 1992년 1월 구(舊)단양출장소가 단성면으로 승격하였다.
2001년 현재 단양읍•매포읍과 단성면•대강면•가곡면•영춘면•어상천면•적성면 등 2읍 6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 매포장(梅浦場)[?]: 마포(麻布)
- 농경지는 남한강 연안과 북동부의 영춘면, 북서부의 매포읍 부근을 중심으로 분포하고 밭이 논보다 훨씬 많다. 주요농산물은 쌀•콩류•잡곡 등의 식량작물과 마늘•고추•담배 등의 특용작물이 있는데, 그 중 쌀 생산량이 절반을 차지한다. 채소류는 배추•무 등이 재배된다. 임야면적은 6만 4640ha로 군 전체면적의 82.6%를 차지하는데, 사유림이 46.0%, 국유림이 38.8%이다. 그 가운데 입목지가 94.1%를 차지해 임상이 우수한 편이며, 임상별 입목지는 혼효림(混淆林)이 38.3%, 침엽수림이 31.4%이다. 임산물로는 밤•대추•송이버섯•약초 등이 많이 재배된다.

<전거:신증동국여지승람, 단양군지(1977)>
 
대전 
 
동쪽은 보은•옥천, 서쪽은 공주•논산, 남쪽은 금산, 북쪽은 연기•청원과 각각 접하고 있다. 대전은 갑천(甲川) 유역의 거대한 침식분지에 자리하고 있다. 대전은 내륙분지에 위치해 한서의 차가 큰 전형적인 대륙성기후를 보인다. 연평균기온은 12.8℃이며, 1월 평균기온 -3℃, 8월 평균기온 26.9℃로 여름과 겨울의 연교차가 30℃에 이른다. 연강수량은 1,120mm 정도이며, 70%가 여름에 집중적으로 내린다.
1413년(태종 13) 전국을 8도로 하여 군현을 개편할 때 대전지방은 공주군•진잠군의 일부에 속하고 대전(大田 : 한밭)이라고 불렸다. 
 
보은(보은장) 
 
삼한시대에는 마한에 속하였고, 삼국시대에는 백제와 신라의 국경 분쟁지였다가 신라가 70년(자비왕 13)에 삼년산성(三年山城)을 축조하여 백제와 국경을 이루었다. 502년(지증왕 3) 삼년산군(三年山郡)이라 하였다가 742년(경덕왕 1) 삼년군(三年郡)이라 개칭하였다.
927년(고려 태조 10) 보령(保齡)으로 고쳤다가 얼마 후에 보령(保令)으로 다시 고쳤다. 1018년(현종 9)에 경상도 상주(尙州)에 속하게 하였고, 1172년(명종 2)에는 감무(監務)를 두었다.
1406년(조선 태종 6) 보령(保令)이 충청남도의 보령(保寧)과 발음이 같다 하여 보은(報恩)으로 고치고 현감을 두었으며, 1413년(태종 13)에 경상도에서 충청도로 옮겼다.
1790년(정조 11) 순조의 태실(胎室)을 속리산에 봉안하여 그 봉우리를 태봉(胎峰)이라 하고, 1895년(고종 32) 현에서 군으로 승격시켰다. 1914년 3월 군폐합으로 회인군(懷仁郡)을 병합하여 회남면(懷南面)•회북면(懷北面)으로 하고, 충청남도 대덕군 오동령리를 편입하였다.
회인은 본래 백제의 미곡현(米谷縣)이었으나 신라 경덕왕 때에 매곡현(昧谷縣)으로 고치고 연산군(燕山郡)에 예속시켰다. 그 뒤 고려 초에 회인으로 고치고, 1018년(현종 9) 청주에 속하게 하였으며, 1383년(우왕 9) 감무를 두었다. 1413년(조선 태종 13) 현감(縣監)을 두고, 1895년(고종 32) 승격시켜 군수를 두었다가 1914년 3월 일부는 청주로 이속시키고 나머지 대부분은 보은군에 예속시켰다.
1947년 2월 속리면을 내속리면(內俗離面)•외속리면(外俗離面)으로 분할하고, 1973년 7월에 보은면이 읍으로 승격하였고, 1991년 보은군 내북면 염둔리를 없애고 행정구역을 조정하였다.
2001년 현재 보은읍과 내속리•외속리•마로(馬老)•탄부(炭釜)•삼승(三升)•수한(水汗)•회남(懷南)•회북(懷北)•내북(內北)•산외(山外)면의 1읍 10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 관기장(官基場)[1일, 6일]: 미(米), 과물(果物), 우독(牛犢), 면화(綿花)
- 특용작물로는 참깨•들깨 등이 생산된다. 대추는 이 지방 특산물이다.

<전거:신증동국여지승람, 증보문헌비고, 보은군지(1970)>
 
예산(예산장) 
 
백제시대에는 오산현이라 불리다가 신라 때 고산이라 칭하고 임성군에 딸린 현이 되었다. 고려시대에 들어와 919년(태조 2) 예산현이라 개칭하였다. 1018년(현종 9) 천안부에 속했으며, 후에 다시 감무를 두었다.
1413년(조선 태종 13) 예산현으로 고치고 현감을 두었으며, 1895년(고종 32)에 군으로 승격하여 군수를 두었다. 1914년 대흥군•덕산군을 통합하여 예산군을 설치하고 12면을 관할하였다. 1940년 예산면이 읍으로 승격하여 1읍 11면이 되었다. 1973년 삽교면이 읍으로 승격하여 2읍 10면이 되었다.
1983년 오가면 효림리와 월곡리 일부를 월산리로, 좌방리 일부를 방아리로 개칭하여 삽교읍에 편입하였다. 2001년 현재 예산읍•삽교읍과 고덕면•광시면•대술면•대흥면•덕산면•봉산면•신암면•신양면•오가면•응봉면 등 2읍 10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 입석리장(立石里場)[2일, 7일]: 미(米), 두(豆), 우독(牛犢), 면화(綿花), 연초(煙草)
- 전통적으로 농업이 융성한 지역으로서 예로부터 예당평야에서 생산되는 예산쌀은 밥맛이 좋기로 유명하다. 특산물인 예산사과가 있다.

<전거:신증동국여지승람, 택리지, 임원경제지>
 
제천(제천장) 
 
삼국통일 후인 757년(경덕왕 16) 내토군은 내제군(奈堤郡)으로 개칭되었고, 청풍현은 내제군의 영현(領縣)이 되었다. 지방제도를 9주 5소경으로 정비함에 따라 9주의 삭주(朔州:지금의 춘천), 5소경의 북원경(北原京:지금의 원주)에 속하였다.
고려가 건국되자 제천 지방은 내제군으로 고려에 속하게 되었고 940년(태조 23) 제주군(堤州郡)으로 개칭되었다. 985년(성종 2) 지방제도가 12목으로 완비되면서 충주목사 관할하의 원주에 속하게 되었다. 992년에는 의천(義泉)•의원(義原)으로 불렀고, 995년(성종 14) 지방행정구역이 10도로 개편되면서 중원도(中原道)에 속하였다. 외관 설치규정에 따라 자사(刺史)가 파견되었으나 1005년(목종 8) 10도제가 유명무실화됨에 따라 외관직인 자사제도는 폐지되었다. 1018년(현종 9) 지방제도가 5도 양계로 재편됨에 따라 원주의 속현이 되었다. 1106년(예종 1)에는 양광도(楊廣道)에 속하였는데, 현령을 둘 수 없는 작은 현에 두었던 감독관인 감무(監務)를 두었고, 하급 행정구역으로 향•소•부곡을 두었다.
조선시대인 1395년(태조 4) 양광도를 충청도로 개편하면서 충주목(忠州牧)에 속하였고, 1413년(태종 13)에는 제주를 제천이라 개칭하고 현감(縣監)을 두었다. 1896(고종 33) 충북 제천군이 되었으며, 청풍면은 청풍군으로 독립하였다. 현종 때에 이르러 명성왕후(明聖王后)의 관향(貫鄕)인 관계로 도호부(都護府)로 승격, 부사를 보내 다스렸다.
1914년 조선총독부령에 의거 청풍군과 덕산면 일원이 제천군에 병합되었다. 1940년에는 제천면이 읍으로 승격하였고, 1979년 충주댐 건설로 인해 5개 면 61개 리가 수몰되었다. 1980년 제천읍이 시로 승격하면서 제천군은 제원군으로 분리되었다. 1983년과 1987년에 제원군 금성면 일부와 단양군 어상천면(魚上川面) 자작리(自作里)를 각각 편입하고, 1989년에는 제원군 금성면 대랑리(大郞里)를 제천시에 편입하였다.
1991년 1월, 제원군에서 제천군으로 환원한 뒤 1995년 1월 제천시와 제천군을 합침으로써 도농복합형(都農複合型) 통합시를 이루었고, 봉양면이 읍으로 승격하였다. 1998년 제천시의 일부 동을 통폐합하여 2001년 현재 봉양읍과 백운•송학•금성•청풍•한수•수산•덕산면, 교•중앙•명서•의림•용두•동현•청전•화산•영천동 등 1읍 7면 9동을 관할한다.
- 읍내장(邑內場)[2일, 7일]: 과물(果物), 우독(牛犢), 마포(麻布), 철물(鐵物)
-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콩•팥•수수•옥수수 등이며, 고추•잎담배•마늘•약초•인삼 등을 생산한다. 식량작물은 미곡이 생산량의 74.3%를 차지하는데, 특히 석회암질 토양에서 자란 마늘은 단단하고 맛이 좋다한우•젖소•돼지 등 축산업은 봉양읍•백운면•송학면 등 북부지역에서 활발하다. 임야는 전면적의 73.8%인 6만 5148ha로, 이 중 사유림이 절반을 차지한다. 입목지(立木地)는 침엽수림이 39.1%, 혼효림(混淆林)이 31.2%를 차지한다.

<전거:제천군지(1969), 제천, 제천시사(1988)>
 
조치원 
 
원래 충청도 연기군에 있던 원(院)이었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원은 일반여행자나 상인을 위한 주막촌(새주막거리)으로 발달한 가촌(街村)이었다.

<<전거:신증동국여시승람, 한국지명요람(1982)>
 
진천(광혜원장) 
 
고구려 때는 금물노군(今勿奴郡:또는 今勿內郡)•수지군(首知郡)•신지군(新知郡)이었다가 신라의 북진으로 만노군(萬弩郡)이 되었다. 통일신라시대 신문왕 5년(685) 전국을 9주로 나눌 때 한산주 흑양군(黑壤郡)이 되었고, 도서현(都西縣)과 음성현(陰城縣)을 영현으로 관할하였다. 나중에는 황양군(黃壤郡)으로 불렀다.
고려 초에 이르러 한때 강주(降州)로 부르다 다시 진주(鎭州)로 개칭하였다. 995년(성종 14) 전국을 10도 12주로 개편할 때는 중원도에 속하였고, 군사적 요충지로서 자사(刺史)를 두었다가, 1005년(목종 8) 폐지하였다. 1018년(현종 9) 전국을 5도 양계로 개편하면서 양광도 청주목(淸州)의 속현이 되었다. 1259년(고종 46) 창의현(彰義縣)으로 바꾸고 현령(縣令)을 두었다. 1269년(원종 10) 의령군(義寧郡)으로 승격해 지군사를 두었다가, 후에 진주현으로 강등되었다.
조선시대 초에 상산(常山)으로 칭하다가 1413년(태종 13) 군현제 개편에 따라 진천현(鎭川縣)으로 개명하고 현감(縣監)을 두었다. 1505년(연산군 11)에는 경기도에 이속되었다가 중종(中宗) 초 다시 충청도에 환원되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에 따라 충주부 진천군이 되었다가, 1896년 충청북도 진천군이 되었다.
1914년 군면통합 때 경기도 죽산군 가척리와 동주리가 만승면 광혜원리와 실원리에 편입되었고, 기존의 14개 면을 진천•덕산•초평•문백•백곡•이월•만승 7개 면으로 통합하였다. 1945년 청원군 북이면(北二面)의 일부가 초평면(草坪面)에 편입되었다. 1973년 진천면이 진천읍으로 승격해 1읍 6개 면을 관할하게 되었다.
2000년 1월 1일 만승면이 광혜원면으로 명칭 변경되어, 2001년 현재 진천읍•덕산면(德山面)•초평면•문백면(文白面)•백곡면(栢谷面)•이월면(梨月面)•광혜원면 등 1읍 6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 광혜원장(廣惠院場)[3일, 8일]: 미(米), 두(豆), 면화(綿花), 연초(煙草)
- 진천은 자연조건이 좋으며, 넓고 기름진 농토에, 비록 큰 강은 없지만 관개시설이 발달해 일찍부터 농업이 성하였다. 진천읍을 중심으로 넓게 펼쳐진 진천평야에서는 주곡농업인 벼농사가 이루어지는데, 전국에서 질이 좋기로 유명한 진천쌀이 바로 이곳에서 생산된다. 그 가운데서도 덕문이 쌀은 맛과 빛깔이 일품이다. 초평저수지•이월저수지•백곡지 등을 통해 농업용수를 공급받는다.
주요 농산물은 쌀•고추•콩•인삼•팥•고구마•옥수수•채소 등이고, 이 밖에도 사과•배•복숭아 등 과실류와 잎담배가 유명하다. 사과는 덕산면•진천읍•이월면, 배는 이월면•백곡면, 복숭아는 진천읍•덕산면 등지에서 많이 생산된다.
특용작물로는 참깨•들깨•땅콩 등이 있으며, 연초는 덕산면•백곡면•이월면, 고추는 덕산면•이월면 등지에서 많이 생산된다. 
 
천안 
 
충청도 북동부에 위치해 있다. 동쪽은 진천과 청원, 서쪽은 아산, 남쪽은 연기•공주, 북쪽은 안성•평택과 접하고 있다. 차령산맥이 북동에서 남서방향으로 달리고 있어 대부분 지역이 산지로 이루어져 있다. 남부에는 공주•논산으로 통하는 관문인 차령(車嶺)이 있다. 입장천(笠場川) •성환천(成歡川)이 북서부를 북류하여 안성천(安城川)에 유입하며, 병천천(竝川川)이 지류인 광기천(廣基川) •산방천(山方川) 등을 합류, 동부를 남동류하여 미호천(美湖川)에 합류하고 있다. 이들 하천유역에는 풍세들•기미들•새교들•마루들 등의 평야가 형성되어 있으나 넓은 평야는 없다. 기후는 한서의 차가 큰 대륙성기후의 특징이 나타난다. 연평균기온 11.3℃, 1월 평균기온 -4.7℃, 8월 평균 기온 25.8℃이며, 연강수량 869.2㎜이다. 서리는 10월 초순부터 내려 이듬해 4월 중순에 끝난다.
지금의 천안지역은 청주목(淸州牧)에 속했던 천안군, 목천현, 직산현의 지역이었다. 천안의 호구는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506호에 2,385명이었다. 목천의 호구 수는 ≪세종실록≫ 지리지에 따르면, 404호에 2,286명이었다. 직산의 호구는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553호에 2,111명이었다.
주요 농산물은 쌀•고추•배•참외•호두• 등이다. 쌀은 생산량은 적으나 질이 좋다. 배는 평택과 교통이 편리한 성환읍•직산면에서, 성환읍의 참외는 이 지방 명산물이다. 호두는 광덕면에서 많이 재배된다.
상업활동은 예로부터 삼남대로가 갈라지던 곳이어서 일찍이 사람의 왕래와 물자교환이 활발하였다. 성환장에서는 쌀•마늘•고추 등 농산물 거래가 많으며, 그 밖에 수산물•가공식품•의류•신발류•농기구 등이 거래되고 있다. 입장•병천장에서는 지역 주민들의 농산물과 의류•생활필수품 등이 거래되고 있다. 
 
천안(삼거리장) 
 
한시대에는 마한의 땅이었고, 백제의 대록군과 감매현•순치현이었다가 고구려의 사산현 지역이 되었고, 통일신라시대에는 대록과 백성의 영현이었다.
고려시대인 930년(태조 13)에 3국의 요충지라 하여 천안부(天安府)로 개칭하고 군병을 주둔시켜 도독(都督)을 두었다. 목종 때 이를 폐지했다가 현종 때 천안이라 하고 지사부(知事府)를 두어 다스렸으며, 충선왕 때 영주(寧州)로 고치고 공민왕 때 천안부로 다시 고쳤다.
조선시대인 1413년(태종 13) 영산군(寧山郡), 1416년 다시 천안군으로 개칭하고 문종 때 명산(明山)으로 불렀다. 1895년(고종 32) 지방관제를 개정하여 모산•돈의면을 아산군에, 덕흥은 신창군에, 신종은 예산군과 당진군에 편입시켜 공주부 천안군이 되었고, 1896년 충청남도에 속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 때 목천군•병천군을 합하여 천안군이라 불렀고, 1963년 천안읍과 환성면이 합쳐져 천안시로 분리되었다. 1973년 수신면 복다회리와 동면 용두리를 병천면으로 편입하였고, 성환면을 읍으로 승격하였다.
1983년 풍세면 구룡리를 천안시로 편입하였고, 1985년 성거면을 읍으로 승격하였으며, 1989년 입장면 도하리를 성환읍에 편입하였다. 1991년 천원군을 천안군으로 환원하였으며, 1995년 쌍봉동을 쌍용동과 봉명동으로 분동하였고, 천안군과 천안시가 통합되어 도농복합형의 천안시가 되었다.
2001년 현재 성환•성거읍과 광덕•동•목천•병천•북•성남•수신•입장•직산•풍세면 및 봉명•중앙•성정1∼2•문성•원성1∼2•쌍용1∼2•신용•청룡•신안•부성동의 2읍 10면 13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 풍서장(豊西場): 과물(果物)
- 농업은 평택평야(平澤平野)•풍세평야(豊歲平野)•성거평야(聖居平野)에서 이루어진다. 주요농작물은 쌀•고추•사과•배•참외•포도•호두•잎담배 등이다.
풍세면에서는 고추•잎담배•호두, 광덕면에서는 밤•호두, 입장면에서는 포도재배가 성하다.
 
청주 
 
청원군 낭성면 국절봉(564m)에서 발원한 무심천(無心川)이 북류하면서 청주의 중앙부를 통과해 청원군 강서면 원평리에서 미호천에 합류하고 있다. 무심천은 동쪽의 산지와 서쪽의 구릉지를 끼고 남북방향으로 곡저평야를 형성하게 되었고 대부분의 평야는 범람원으로 비옥한 충적평야를 이루고 있다. 남쪽의 방서리 부근의 대머리평야와 북쪽의 무심천 하류의 오창평야는 비옥한 곡창지대를 이루고 있다.
지형이 풍수지리상 행주형(行舟形)이므로 용두사 철당간을 세워 청주의 발전을 도모했다고 하며 청주를 주성(舟城)이라고 한 것도 이 때문이다. 내륙분지에 위치하고 있어 한서의 차가 심한 대륙성 기후를 나타내고 있으며 대청댐의 조성으로 안개가 가끔 끼고 있다. 연평균기온은 13.3°C, 1월 평균기온 -1.5°C, 7월 평균기온 27.7°이며, 연강수량은 1,012mm이다.
청주의 경지면적은 논이 밭보다 훨씬 많다. 주요 농작물로는 대머리평야와 무심천 하류의 평야에서 미곡을 비롯해 무•배추•오이•호박의 채소류를 많이 생산하고 있다.

동쪽은 제천, 서쪽은 음성, 남쪽은 괴산, 북쪽은 강원도 원주와 경기도 여주에 접하고 있다. 동부는 태백산맥의 여맥인 구릉지대, 남부는 소백산맥, 북부는 차령산맥이 있어 대부분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중앙부는 충주분지를 이루고 있다. 북부와 서부에는 500m 이상의 높은 산들이 솟아 있고 도처에 구릉의 기복이 심하다. 달천(達川)이 속리산에서 발원하여 곡류하고, 충주에서 북류하여 탄금대 부근에서 합류하면서 달천평야를 형성하고 있다. 요도천이 신니면•주덕면을 지나면서 곳곳에 넓은 평야를 이루고 있다. 복성천이 앙성평야를 이루며, 봉황천과 한포천이 노은평야를 이루고, 원곡천이 산척평야와 엄정평야를 형성하여 미곡을 비롯한 농업지대를 이루고 있다. 내륙에 위치하여 대륙성 기후의 성격이 강하다. 연평균 기온 11.8°C, 1월 평균기온 -3.5°C, 8월 평균기온 25.9°C 이며, 연강수량은 1,200mm 이다. 그러나 높새바람의 영향으로 여름철에 가끔 가뭄 피해가 심하다.
남한강과 달천강유역의 충주평야는 미호평야와 함께 충청북도의 2대 평야로서 많은 미곡을 생산하고 있다. 그리고 요도천(堯渡川)과 복성천(福城川) 및 한포천•원곡천(院谷川) 등에는 유역평야가 있어 논농사가 성하나, 부근의 선상지•구릉•산록에는 상전이나 밭으로 이용하고 있다.
상업활동은 과거 1•6일의 개시일인 신니시장과 수안보시장이, 3•8일이 개시일인 주덕장•노은장•엄정장, 2•7일이 개시일인 앙성장과 산척장, 4•9일이 개시일인 동량시장 등의 정기시장이 있었다. 
 
청주(조치원장) 
 
삼한시대에 마한의 땅이었다가 백제시대에 상당현(上黨縣), 일명 낭비성(娘臂城) 또는 낭자곡(娘子谷)이라고도 하였다. 신라시대인 685년(문무왕 5) 서원소경(西原小京)을 두었고 757년 서원경(西原京)으로 승격하였다. 고려시대인 940년(태조 23) 청주(淸州)로 지명을 고쳤고 983년(성종 2) 청주목이 된 뒤 995년에는 절도사를 두었다.
조선 세종은 한때 관찰사를 두었으나 세조는 진(鎭)으로 격을 낮추어 도호부를 설치하였고 선조가 청주목으로 승격시켜 2군 9현을 관할하게 하였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를 개정하고 전국을 8도로 개편함에 따라 공주가 충청도의 수부(首府)가 되자 청주목을 폐지하고 군이 되었으며 이듬해에는 충청도가 남북으로 분리되어 충주에 관찰사를 두면서 청주는 소속군이 되었다.
1906년 관찰사를 충주에서 청주로 이전함으로써 비로소 충청북도의 주도(主都)가 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지방관제를 개편할 때 청주면(淸州面)이라 개칭하였고 1931년 4월에는 지방제도 개정에 따라 읍으로, 1946년 6월에는 청주부(淸州府)로 승격하였다.
1949년 8월 15일 지방자치법에 따라 청주시로 개칭하였고 1963년 1월 1일 청주시를 둘러싸고 있는 청원군 사주면을 병합하여 64.91㎢에 21개의 행정동을 관할해 왔다. 1983년 2월 전국 행정구역 조정으로 청원군 강서면(江西面) 전역을 비롯하여 낭성면(琅城面) 산성리(山城里)와 강내면(江內面) 석소리(石所里) 및 남일면(南一面) 방서리(方西里)를 받아들이게 되어 청주시 지역이 크게 확대되었다.
1989년 7월 동부•서부 출장소가 설치되었고, 1995년 1월 동부•서부 출장소가 동부는 상당구(上黨區)로, 서부는 흥덕구(興德區)로 승격하였다.
2001년 현재 상당구•흥덕구 2개 구가 있고, 상당구의 중앙•내덕1•내덕2•탑대성•용담명암산성•성안•영운•용암용정방서•우암•율량사천•금천•오근장동과 흥덕구의 사직1•사직2•운천신봉•성화개신죽림•봉명1•봉명2송정•산미분장•복대1•복대2•사창•수곡1•수곡2•가경•강서1•강서2•모충동 등 모두 28개 동이 있다.
- 읍내장(邑內場)[?]: 미(米), 과물(果物), 유기(鍮器)
조치원(鳥致院)[4일, 9일]: 미(米), 두(豆), 맥(麥), 연초(煙草)
 
충주(가흥장) 
 
선사시대부터 높은 문화수준을 이루었는데, BC 4∼BC 3세기에는 마한에 속하였다. 그 뒤 마한이 백제에 병합되었으나, 다시 고구려에 속해 475년(장수왕 63) 국원성(國原城)이라 하였다. 신라 때인 557년(진흥왕 18) 국원소경(國原小京)이라 하였고, 757년(경덕왕 16) 중원소경(中原小京)이라 개칭하였다.

고려시대에는 940년(태조 23) 충주라 개칭하였고, 983년(성종 2) 충주목(忠州牧)이라고 하였다. 995년(성종 14) 중원도에 예속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1395년(태조 4) 충청도 관찰사를 두었으며, 1896년(고종 33) 충청북도의 수부(감영)로서 관찰사를 두었다.

1908년(순종 2) 경부선에서 벗어나 있어 교통이 불편하다 하여 도청을 청주로 이전시키고 군수를 두었다. 1917년 충주군 읍내면이 충주면으로 개칭되었고, 1956년 7월 충주읍이 시로 승격되면서 나머지 지역은 중원군으로 분리되었다. 1963년 괴산군 상모면이 중원군에 편입되었다. 1989년 중원군 살미면 목벌리(木伐里)와 이류면 만정리(萬井里) 일부를 충주시에 편입하였다. 1995년 도•농 통합정책으로 충주시와 중원군이 통합하여 충주시가 되었다.

2001년 현재 주덕읍, 가금•금가•노은•동량•산척•살미•상모•소태•신니•앙성•엄정•이류면과 성내충인•교현안림•교현2•용산•지현•문화•호암•달천•봉방•칠금•연수•목행동 등 1읍 12면 12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 서문외장(西門外場)[?]: 과물(果物), 어염(魚鹽), 면화(綿花)
내창장(內倉場)[3일, 8일]: 미(米), 두(豆), 맥(麥), 과물(果物), 우독(牛犢), 어염(魚鹽), 면포(綿布), 마포(麻布), 명주(明紬), 석자(席子)
- 특용작물은 땅콩•참깨•들깨 등이 생산된다.
전국 제일의 사과 산지로 유명하다.

<전거:세종실록, 신중동국여지승람, 중보문헌비고, 만기요람>
 
평택(평택장) 
 
평택시는 고구려 장수왕 때는 부산현(釜山縣)이었으며,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인 757년(경덕왕 16)에 진위현(振威縣)으로 개칭되었다. 고려시대인 940년(태조 23)에 수성군(水城郡)에 편입되었으며 동시에 평택현으로 개칭되었다. 조선시대인 1413년(태종 13) 현감을 두고 1505년(연산군 11)에 처음으로 충청도에서 경기도로 이속(移屬)되었다.
중종 초에 충청도로 환원, 1596년(선조 29)에 직산현(稷山縣)에 예속되었다가 1610년(광해군 2)에 복구하여 현이 되었다. 1895년(고종 32)에 군으로 승격하여 1914년 경기도 진위군에 병합, 1924년 진위군이 평택군으로 개칭되었다. 1981년 7월 송탄읍(松炭邑)이 시로 승격하여 분리되었다. 1983년 2월 행정구역 조정에 따라 안성군 원곡면(元谷面) 용이리(龍耳里)•죽백리(竹柏里)•청룡리(靑龍里)•월곡리(月谷里)와 공도면(孔道面)의 소사리(素砂里)가 평택읍에, 용인군 남사면(南四面) 진목리(眞木里) 일부와 봉명리(鳳鳴里) 일부가 진위면에 각각 편입되었으며, 1986년 평택읍이 시로 승격되었다.
1995년 5월 평택군•평택시•송탄시가 다시 합쳐 도농복합형(都農複合型)의 통합시가 되었다. 2001년 현재 관할구역은 팽성읍 및 진위•서탄•고덕•오성•청북•포승•현덕•안중면의 1개 읍 8개 면과 중앙•서정•동부•지산•송북•신장1∼2•신평•원평•통복•비전1∼2•세교동의 13개 동이다.
- 관문상장(官門商場)[?]: 미(米), 두(豆), 맥(麥), 우독(牛犢), 면포(綿布), 마포(麻布), 연초(煙草)
- 평택평야는 지형이 평탄하고 남양호•평택호 등 대단위 수리시설이 갖추어져 있어 농업용수가 풍부하다. 특용작물로는 참깨•들깨•땅콩 등이 재배되며, 이밖에 보리•콩•목화•채소•잎담배•과실류가 생산된다. 임산물로는 밤•대추•도토리•은행 등을 들 수 있다.
 
한산(한산장) 
 
서천군은 백제시대에는 설림군(舌林郡) 또는 남양(南陽)으로 불렀는데 신라 경덕왕 때 서림군(西林郡)으로 고치고, 1018년(고려 현종 9) 가림현(嘉林縣)에 예속시켰다가 후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1314년(충숙왕 1) 서천으로 고쳐 군으로 하였고 1413년(조선 태종 13) 서림군(西林郡)은 서천군(舒川郡), 한산현(韓山縣)은 한산군(韓山郡)으로 개편하였다. 1895년 비인현(庇仁縣)은 비인군(庇仁郡)이 되었으며, 1914년 비인군(庇仁郡)•한산군(韓山郡)을 병합하였다. 1938년 10월 서남면(西南面)과 마동면(馬東面)의 일부가 장항읍(長項邑)으로 승격되었고, 1979년 5월 서천면은 서천읍으로 승격되었다. 1983년 문산면 등고리•금덕리가 판교면에 편입되었다. 1995년 기산면 내동리 일부가 화양면 금당리에 편입되었다.
2001년 현재 장항읍•서천읍과 마서면(馬西面)•화양면(華陽面)•기산면(麒山面)•한산면•마산면(馬山面)•시초면(時草面)•문산면(文山面)•판교면(板橋面)•종천면(鍾川面)•비인면•서면(西面)의 2읍 11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 장발장(長發場)[?]: 어염(魚鹽)
- 동•서부의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이 평야지대로 경지정리가 잘 되어 있다. 단상천(丹上川) 상류의 축동지를 이용한 관개시설도 잘 정비되었다. 쌀•보리 중심의 주곡농업이 성하다. 저마를 원료로 생산하는 한산모시는 예로부터 으뜸가는 여름 옷감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근래에는 외국으로도 수출한다. 
 
홍주(홍주장) 
 
홍주는 본래 고려의 운주(運州)로 995년(성종 l4)에 도단련사(都團練使)를 두고, 1012년 지주사(知州事)로 고쳤다가 홍주로 다시 고쳤다. 1358년(공민왕 7)에 목(牧)으로 승격하여 1368년(공민왕 17) 지주사를 두었다가, 1371년 다시 목이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여러 차례의 변혁을 거쳐 1895년(고종 32)에 군이 되었고, 1914년 옛 결성군을 합쳐 홍성군이 되었다. 결성은 본래 백제의 결사현(結巳縣)인데 신라 때 결성(潔城)으로 고쳐 서림군(西林郡)의 영현(領縣)이 되고, 고려시대인 1018년(현종 9) 운주에 이속되었다가 1172년(명종 2)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우왕(禑王) 때 왜구의 침입으로 주민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1390년(공양왕 21)에는 진성(鎭城)을 두고 유민(流民)을 정착시켰다. 1413년(조선 태종 13) 현감(縣監)을 두었다가 1895년 군으로 승격, 1914년 홍주군•결성군 및 보령군의 일부를 통합하여 홍성군이 되었다.
1941년 홍주면이 홍성읍으로 승격하고, 1942년 광천면(廣川面)이 읍으로 승격하였다. 1983년 2월 전국 행정구역 조정에 따라 서산군 고북면(高北面) 대사리(大寺里)와 결성면(結城面) 와리(臥里)를 갈산면(葛山面)에, 홍동면 월림(月林)•대평(大坪)•운용리(雲龍里)를 광천읍에, 결성면 중리(中里)를 서부면(西部面)에, 홍북면 내법리(內法里), 홍동면 구룡리(龜龍里)를 홍성읍에 각각 편입하였다.
2001년 현재 홍성읍•광천읍 및 갈산•결성•구항(龜項)•금마•서부•은하(銀河)•장곡(長谷)•홍동•홍북면 등 2읍 9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 읍내장(邑內場)[1일, 6일]: 미(米), 두(豆), 맥(麥), 과물(果物), 우독(牛犢), 어염(魚鹽), 연초(煙草)
예전장(芮田場)[4일, 9일]: 미(米), 두(豆), 어염(魚鹽), 석자(席子)
- 낙농•양계•양돈은 홍성읍•홍북면•홍동면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는데 특히 양계는 기업화되어 있다.
 
 
전라도


강진(강진장) 
 
강진군은 도강(道康)과 탐진의 병합으로 이루어졌고, 군명도 두 지명에서 유래되었다.
도강현은 백제의 도무군(道武郡)으로, 신라 경덕왕 때 양무군(陽武郡)으로 바뀌었고, 고려시대에 도강으로 고쳐서 영암(靈岩)에 속하게 하였다. 탐진현은 원래 백제의 동음현(冬音縣)이었는데, 신라 경덕왕 때 탐진으로 고쳐서 양무군에 예속시켰다.
고려시대에 영암에 속하게 했다가 뒤에 장흥(長興)으로 이속(移屬)시켰다. 1417년(태종 17) 각 병마절도사영을 도강 구치(舊治)에 이설(移設)하고 도강현과 합쳐서 강진군을 설치하여, 탐진에 치소(治所)를 두었다. 1895년 나주부(羅州府) 관할에 들어갔고, 1913년 백도면(白道面) 월성리•항리•만수리•좌일리•금당리•내봉리•동리•중산리•방축리•남촌리의 일부를 해남군에 속하게 하는 한편, 완도군 군내면 가우도(駕牛島)를 이 군에 속하게 하였다. 1936년 7월 1일 강진면이 강진읍으로 승격하였다.
1983년 신전출장소가 면으로 승격되었고, 1989년 마량출장소가 면으로 승격되었다. 1990년 해남군 옥천면 봉황리 일원이 도암면에 편입되었다.
2001년 현재 강진읍 및 군동면(郡東面)•칠량면(七良面)•대구면(大口面)•도암면(道岩面)•성전면(城田面)•작천면(鵲川面)•병영면(兵營面)•옴천면•신전면(薪田面)•마량면(馬良面) 등 1읍 10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 읍내장(邑內場)[2일, 5일, 9일, 9회 개시] : 미(米), 면포(綿布), 면화(綿花), 마포(麻布), 명주(明紬), 토기(土器), 과물(果物), 어염(魚鹽), 석자(席子)
- 농업은 탐진강 유역에 있는 비옥한 충적지에서 주로 이루어지며, 이곳에서는 쌀•보리 등의 곡물을 주로 재배한다. 남해안 내륙 깊숙이 파고 들어온 강진만은 파도가 세지 않아 훌륭한 어업근거지를 이루고, 연안에는 조개류와 해조류를 비롯한 양식업이 발달하였으며 비교적 염전이 넓게 펼쳐져 있다.
 
광주 
 
동쪽은 담양, 서쪽은 함평, 남쪽은 나주, 화순, 북쪽은 장성과 접하고 있다.
동쪽의 산간부와 서쪽 평야부의 경계지역에 위치하며, 서쪽은 비교적 낮은 구릉에 의해 비옥한 전남평야와 연접하고 있다. 무등산 골짜기서 발원해 시가를 관류하는 광주천은 서북쪽으로 흐르다가 서부경계지대에서 극락강과 합류하고, 장성군에서 흘러내리는 황룡강과 만나 다시 영산강으로 흘러든다.
기후는 한반도의 남서부에 위치하므로 비교적 한서의 차가 작아 온화하다. 1990년 이후 연평균기온 13.6℃, 1월 평균기온 1.1℃, 8월 평균기온 26.1℃이며, 연강수량은 1,127mm이다. 1980년 중반의 통계치와 비교해 보면 1월 기온은 0.5℃ 상승, 8월 기온은 1.1℃ 상승, 연강수량은 약 100mm 가량 적게 내리고 있다. 기온이 쾌청일수 71일, 강수일 122일, 강설일수 29일로 겨울에 눈이 많이 내린다.
호남지방의 행정․상업 및 교통의 중심지일 뿐 아니라 호남문화의 산실이기도 하다. 주요 농산물로 쌀•보리•콩•수수와 면화•대마 등이 생산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종이•가구•붓•먹•화살•활통•북 등 생활용품의 자료와 완제품들을 만들어내는 공장들이 있었다. 광주북•진다리붓•각궁(角弓) 등은 현재도 전통공업으로서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전거:신증동국여지승람, 증보문헌비고, 전라남도지(1984)>
 
광주(읍내장) 
 
광주시는 삼한시대에는 마한(馬韓)에 속했다가 백제(百濟) 건국(BC 18) 이후에는 백제 3주(百濟三州)의 하나인 무진주(武珍州)가 되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 757년(신라 경덕왕 16) 무주(武州)라 개칭하여 9주도독(九州都督)의 하나로 삼았다. 후백제(後百濟)의 군주를 자처한 견훤(甄萱)이 892년(진성여왕 6)에 이곳에서 독자적인 기반을 닦았던 사실(史實)도 있다.
고려 건국 이래 940년(태조 23) 군현(郡縣)을 정비할 때 처음으로 광주(光州)라 개칭하였다. 그 뒤 966년(성종 15)에 해양현(海陽縣)이라 불렀고, 1259년(고종 46)에 기주(冀州:일명 冀陽州)라 했다가 약 50년 후, 1275년(충렬왕 1)에 다시 무주(武州)라 개칭하였다.
그 후 1310년(충선왕 2)에 화평부(化平府), 1362년(공민왕 11)에 무진부(武珍府), 1373년(공민왕 22)에 광주목(光州牧) 등으로 지위가 여러 번 바뀌다가, 1430년(세종 12) 무진군(武珍郡)으로 강등되었으며, 1351년(문종 1)에 다시 광주목이 되었고, 1389년(성종 20) 광주현(光州縣)으로 격하되었다가 1501년(연산군 7)에 광주목으로 회복되었다.
그 후 1624년(인조 2)에 광산현(光山縣)이라 개칭하였다가 1634년에 다시 광주목으로 환원하고, 1895년(고종 32) 전국을 23부로 나눌 때 나주부(羅州府)에 속하는 광주군(光州郡)이 되었으며, 1896년 13도제(道制)로 개정함에 따라 전라남도의 도청소재지가 되어 행정 중심지가 되었다.
1911년 기례방(奇禮坊:현재의 대인동 일대)•공수방(公須坊:현재의 순기동 일대) •부동방(不動坊:현재의 삼성동 일대)•성내방(城內坊:현재의 충장로•대의동 일대)을 합쳐 광주면(光州面)을 신설하고, 1923년 인근 서목면(瑞牧面)•효천면(孝泉面)•지한면(池漢面)의 각 일부를 편입하여 행정구역을 확장한 후, 1931년 읍면제(邑面制) 실시에 따라 광주면은 광주읍(光州邑)으로 승격되었다. 계속된 발전으로 1935년에 이르러 인근 서목면•효천면•지한면의 나머지 부분을 합하여 광주읍은 광주부(光州府)로 승격하고, 광주군은 광산군(光山郡)으로 개칭되었다.
1949년 지방자치제 실시에 따라 광주시(光州市)로 개칭되었고, 1973년 도시 행정기능을 효율적으로 이루기 위해 구제(區制)가 실시되면서 종래 6개 출장소(대촌•서창 출장소는 광산군에 환원) 중에서 중부•동부•북부 출장소를 합하여 동구(東區), 남부•서부•지산 출장소를 합하여 서구(西區)를 신설하였다. 그해 주변지역 24개동을 관할하는 석곡•지산 출장소를 아울러 신설하였다가 1980년 두 출장소를 합쳐 북구(北區)를 신설하고, 1983년 2월에 장성군 남면 삼대리 일부를 북구 오룡동(五龍洞)에 편입하였다.
1986년 11월 직할시로 승격되었고, 1988년 1월 송정시와 광산군을 흡수하여 광산구(光山區)를 신설하였다. 1995년 3월 시역의 변동 없이 직할시를 광역시로 개칭하였고, 서구가 서구와 남구로 분리되었다. 2001년 현재 동구•서구•남구•북구•광산구 등 5구, 83개동이 있다
- 부동장(不動場)[?] : 미(米), 두(豆), 맥(麥), 면포(綿布), 저포(苧布), 마포(麻布), 생마(生麻), 토기(土器), 자기(磁器), 철물(鐵物), 목물(木物), 죽물(竹物), 지지(紙地), 연초(煙草), 어염(魚鹽), 지마(脂麻), 수소(水蘇), 철정(鐵鼎), 석자(席子)
- 과거에는 쌀•맥류•목화•고치 등이 농산물의 주종을 이루어 왔다.
 
군산 
 
금강과 만경강의 하구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동쪽은 익산, 서쪽은 서해, 남쪽은 만경강(萬頃江)을 경계로 김제, 북쪽은 금강을 경계로 충청도 서천과 접하고 있다. 대표적인 평야지대의 하나로 대부분의 지역이 퇴적층이 두꺼운 충적평야와 낮은 구릉지로 이루어져 있다. 기후는 남부서안형 기후구에 속하며, 바다의 영향으로 겨울에 북서계절풍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눈이 많이 내리고, 여름에는 온난습윤하다. 연평균기온 13°C, 1월 평균기온 -1. 5°C, 8월 평균기온 25°C이며, 연강수량은 1,200mm이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따르면, 당시 옥구현의 호수는 257호, 인구는 1,194인이었다. 조선시대 이 지방은 서해안 방어의 요지로 중시되어 많은 성들이 축성되었으며, 고려 말 왜구의 잦은 침입과 약탈로 인하여 중단되었던 조운이 재개됨에 따라 다시 전라도 조운의 중심지가 되었다.
금강과 만경강의 하구에 위치하여 인접한 익산•김제와 함께 호남평야의 중심을 이루어 일찍부터 미곡농업이 발달하였다. 대부분 지역이 충적평야로 서부해안지역과 남부지역은 옥봉(玉峰) •수산이곡(壽山耳谷)․임옥(臨玉) 등 넓은 평야가 분포하고 있다. 벼농사 중심의 주곡농업이 이루어진다. 긴 해안선과 많은 도서가 있어 부안과 함께 전라도 북부 서해안 어업의 중심지이다. 주요 어종은 갈치•홍어•가자미•대하•게 등이다. 해안과 도서 지방에서 조개류와 미역•김 등 해조류의 채취도 활발하였다.
조선 전기부터 조운•조창의 중심지였으나 본격적인 상업 기능은 조선 후기에 금강 수운을 이용한 교역이 활기를 띠면서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개항 이전의 상업활동은 경포시장과 경장장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군산부(群山府) 밖 경포리에 있던 경포장은 수로가 흐르는 교통의 요충지로서 일대의 산물이 거래되었다. 미면 경장리(지금의 경장동)에 있던 경장장은 경포천을 거쳐 금강과 통하였으므로, 수운을 이용하여 상류 지방의 상품과 하류 지방의 산물이 거래되었다. 장날은 음력 10일이며 거래품은 쌀•콩•노두•면화•깨•마포•어패류•건어물 등이었고, 특히 미면에서 생산되는 백염(白鹽)이 거래되었다.

<전거:전라부도지(1969),군산시사(1975)>
 
금산(금산장) 
 
전라남도 고흥군 남서쪽에 있는 거금도(居金島)와 소수의 작은 섬으로 이루어진 면. 1914년 완도군의 득량도(得粮島)와 돌산군의 봉래(蓬萊)•옥정(玉井) 등의 면과 함께 고흥군에 편입되었다.
- 읍내장(邑內場)[2일, 7일] : 미(米), 두(豆), 면포(綿布), 면화(綿花), 생마(生麻), 토기(土器), 자기(磁器), 목물(木物), 과물(果物), 우독(牛犢), 지마(脂麻), 수소(水蘇), 석자(席子)
- 금산(錦山); 높이 681m. 원래는 신라의 원효(元曉)가 이 산에 보광사(普光寺)라는 절을 세웠던 데서 보광산이라 하였는데, 고려 후기 이성계(李成桂)가 이 산에서 100일기도 끝에 조선왕조를 개국한 그 영험에 보답하는 뜻으로 산 전체를 비단으로 덮었다 해서 금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산에는 조선의 태조(太祖)가 기도했다는 이씨기단(李氏祈壇)을 비롯하여, 삼사기단(三師祈壇) •쌍룡문(雙龍門) •문장암(文章岩) •사자암(獅子岩) •촉대봉(燭臺峰) •향로봉(香爐峰) •음성굴(音聲窟) 등 천태만상의 기암괴석과 울창한 숲, 그리고 눈 아래로 보이는 바다와의 절묘한 조화는 명산으로서 손색이 없다.
남해 금산은 1974년 12월 28일 경상남도기념물 제18호로 지정되었다.

<전거: 신증동국여지승람, 금산군읍지:금산군지(1969)>
 
나주 
 
동쪽은 화순, 서쪽은 무안•함평, 남쪽은 영암, 북쪽은 광주와 접하고 있다. 나주는 대부분이 20~50m의 구릉지와 10m 이하의 평야로 이루어져 있다. 나주평야는 전라남도의 곡창지대를 이룬다. 특히, 지석천 연안에 남평들과 산포들이 넓게 분포되어 있다. 남평읍 소재지에서 화순군 능주 사이를 흐르는 지석천은 일명 ‘드들강’이라고도 부른다. 이 부분은 길이가 4km이며, 유역에 발달된 남평평야와 화순평야 등의 주요 미곡산지를 관개한다. 기후는 대체로 온난하나 대륙성 기후를 나타낸다. 연평균기온은 13.8℃이며, 1월 평균기온 1.1℃, 8월 평균기온 28℃이다. 연강수량은 1,491㎜로 하절기인 6•7•8•9월에 70~80% 이상이 내린다. 서리는 11월 초순부터 내려 이듬해 4월 초순에 끝난다.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목으로서 전라도 남부의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였다. ≪경세유표≫에는 조선 후기 나주목의 토지결수가 2만8000결로 전국 제일이라 하였다. 나주를 관류하는 영산강을 따라 나주평야가 발달해 있다. 따라서 벼농사가 발달되어 있으며, 이곳에서 생산되는 쌀은 옛날부터 품질이 매우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밖의 주요 농산물은 보리•조•수수•옥수수•콩•팥 등이다. 또, 배•복숭아 등의 과일이 예로부터 특산물로 생산되고 있다. 특히, 배와 복숭아는 맛이 좋기로 유명하다. 옛날에는 남평면과 다도면 일대에서 질이 좋은 남평숯이 많이 보급되기도 하였다.
또한, 품질이 좋은 인초 돗자리의 특산지이고, 수공예인 나주반(羅州盤)과 부채도 유명했다. 세지면에서 생산된 토하젓은 조선시대 궁중진상품으로 유명하다. 한때 영산강은 밀물 때면 바닷물이 상류 광탄(廣灘)까지 거슬러올라와 장어(구진포 장어) •숭어•명란(明卵) •해파리 등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상업활동은 한때 육로와 수운이 편리한 영산포시장이 유명했으나 1975년 영산강 하구언 축조로 목포에서 들어오는 물길이 끊기고 육로교통이 급속도로 발달하면서 그 기능을 상실하였다. 정기시장으로는 나주장(4•9일) •영산포장(5•10일) •동창장(2•7일) •반남장(4•9일) •공산장(1•6일) •동강장(3•8일) •다시장(3•8일) •문평장(1•6일) •남평장(1•6일) •봉화장(4•9일)이 남아 있다. 이 가운데 다시장은 맛이 좋기로 유명한 다시쌀을 거래하는 장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남평장은 소의 거래로, 반남장은 돼지의 거래로 유명하다.

<전거:대동지지, 나주군읍지(1899), 나주군지(1980)>
 
나주(나주장) 
 
전라남도의 다른 시군에 비해 행정구역 변경이 잦은 편이다. 청동기시대부터 현전하는 많은 지석묘의 유적으로 보아 서남해지방의 중심지였음을 알 수 있고 마한시대에는 대형 옹관고분 유적•유물로 보아 마한의 지배세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백제시대에는 발라군이었다가, 신라 경덕왕이 금산군으로 고쳤다. 후백제시대에는 견훤이 이곳을 본거지로 삼았고, 후에 고려 태조 왕건이 점령하여 나주라 개칭하였다.
1018년(고려 현종 9)에 거란의 침입으로 왕이 일시 이곳에서 피난한 인연이 있어 목으로 승격되었다. 조선 세조 때에 나주목사는 진을 두고 영암•영광의 2군과, 함평•고창•광산•장성•진원•무장•남평•무안의 8현을 관할하였다.
조선 후기 면리제가 정비되면서 나주목은 38개 면과 현 신안군 일대 30여 개 이상의 도서를 관할하는 목사고을로 많은 호구와 전결을 보유하고 교통으로 청암도와 조은으로 영산창을 가진 큰 고을이었다.
1895년(고종 32)에 지방제도 개혁으로 전국을 23부로 구분하면서 나주부가 되어 관찰사가 주재했다. 이듬해에 다시 전국 행정구역을 13도로 개편하면서 나주부가 폐지되고 나주목이 나주군이 되어 전남의 1등군이 되고, 전라남도 행정중심이 광주로 옮겨졌다.
1906년에는 4개 면이 함평군으로 각각 이속됨으로써 모두 10개 면이 영암군•무안군•함평군으로 이속되고 나주군은 30개 면을 관할하게 되었다.
1914년에 행정구획 개편으로 나주군내 30개 면이 14개 면으로 통합되고, 이때에 남평군지역이 나주군에 병합되면서 남평군 12개 면이 5개 면으로 통합되어 나주군은 합계 19개 면으로 개편되었다.
1927년 7월에 영산면이 영산포읍으로 승격하고, 1931년 11월에 나주면이 읍으로 승격되어 2읍 16면이 되었다. 1949년 8월 15일에는 삼도면•평동면•본량면이 광산군으로 이속되어 2읍 13면이 되었고, 1981년 7월 1일에 나주읍과 영산포읍이 합쳐서 금성시로 승격되었으며, 나주군은 여타 13개 면을 관할하게 되었다.
1986년 금성시는 나주시로 다시 개칭되었으며, 1995년 1월 나주군과 나주시가 합쳐 도농복합형의 통합시가 되었다. 1998년 과소동 통폐합에 따라 5개 동을 축소 조정하여 1읍 12면 6동으로 개편되었다.
2001년 현재 현재 남평읍과 세지•왕곡•반남•공산•동강•다시•문평•노안•금천•산포•다도•봉황의 12개 면과 송월•영강•금남•성북•영산•이창의 6개 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 읍내장(邑內場) : 미(米), 두(豆), 맥(麥), 면포(綿布), 면화(綿花), 저포(苧布), 마포(麻布), 토기(土器), 자기(磁器), 철물(鐵物), 목물(木物), 죽물(竹物), 지지(紙地), 어염(魚鹽), 우독(牛犢)
- 영산강 양안의 구릉지는 과수원으로 이용되어 배를 비롯한 복숭아•포도•사과•감 등의 과일이 생산된다. 특히 나주는 일찍부터 품질이 우수한 나주배 산지로 유명한 전국 제1의 배 산지이며 영산강 동안의 금천면이 그 중심이다. 또 왕곡면•산포면•남평읍에서는 시설원예농업에 의한 오이•고추•무•배추 등의 산출이 많고, 마늘•양파•생강 등이 생산된다.

 
남원(남원장) 
 
백제시대에 고룡군이었다가 196년(초고왕 31)에 백제의 5방 중 대방군이 되었다. 685년 통일신라시대에 9주 5소경의 하나로 남원소경을 설치하여 757년(경덕왕 16)에 남원으로 개칭되어 오늘에 이른다.
일찍부터 전라도의 중심지로 신라시대에는 소경, 고려시대에는 5현을 관할하는 남원부가 설치되었고, 조선시대에는 남원도호부로서 1부 1군 9현(지금의 전남 담양•곡성•창평•구례 및 전북 순창•임실•무주•진안•장수 등)을 관할하였다.
1457년에는 남원진영을 두어 6현(곡성•옥과•구례•창평•장수•운봉)의 군사를 관장하게 했고, 1654년에는 전라좌영을 설치하여 순창•장수•운봉•옥과•구례•곡성•창평 등 현의 군사를 관할했으며 1895년에 전라 4부 중 하나인 남원관찰부가 되었다.
1910년 남원 48방을 22개 면으로 통폐합하고 1914년 남원군으로 개칭하였다.
1931년 남원읍으로 승격되어 1개 읍 16개 면이 되었다. 1981년에는 남원읍이 시로 승격하여 남원시와 남원군으로 분리되었다가, 1995년 1월 구남원시와 남원군이 합쳐 도농복합형의 통합시가 되었다.
1998년 동면을 인월면으로 고쳤으며 2001년 현재 동충•죽항•쌍교•노암•금•왕정•향교•용정•도통의 9개 동과 운봉읍 및 주천•수지•송동•주생•금지•대강•대산•사매•덕과•보절•산동•이백•인월•아영•산내의 15개 면으로 총 1읍 15면 9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 부내장(府內場)[4일, 9일] : 미(米), 두(豆), 면포(綿布), 면화(綿花), 저포(苧布), 마포(麻布), 명주(明紬), 생마(生麻), 유기(鍮器), 토기(土器), 철물(鐵物), 죽물(竹物), 지지(紙地), 연초(煙草), 과물(果物), 어염(魚鹽), 우독(牛犢), 지마(脂麻), 수소(水蘇), 철정(鐵鼎), 석자(席子)
- 동부의 요천주변에는 충적평야가 발달되어 예로부터 농경지로 이용되어 왔다. 시 전역에서 주곡농업이 행해지고 있는데, 운봉읍•동면 등의 동부 산간지대에서는 고랭지농업으로 농가소득수준이 높다.
주곡농업 외에 금지면에서 딸기, 산동면•이백면•대강면•대산면 등에서 산송이버섯, 산내면에서 토종꿀과 약초가 많이 생산된다. 양잠은 생사(生絲)의 수출부진으로 생산량이 계속 줄고 있지만, 이백면•금지면•대강면•사매면 등에서 약간 행해지고 있다.
동부 산간권을 중심으로 산지를 이용한 축산업이 발달하여 소•돼지•면양 등 가축이 많이 사육되고 있는데, 특히 운봉읍은 국립종축원을 중심으로 면양과 육우가 많이 사육된다. 임야가 넓어 밤•산수유•약초•산나물 등 다양한 종류의 임산물이 많이 생산된다.

<전거:신증동국여지승람, 남원지(1972)>
 
담양(담양장) 
 
조선시대의 담양도호부(潭陽都護府)와 창평현(昌平縣)이 1914년 병합된 곳이다. 봉산면•무정면 이북지역은 대체로 옛 담양도호부 영역이고, 창평 고서면•대덕면•남면•수북면 등 남부는 옛 창평현 지역에 해당한다. 1895년 지방제도 개정으로 담양과 창평은 군이 되어 남원부 관할이 되었다가 1896년 13도제 실시로 전라남도에 속했다. 1906년 월경지 정리에 의해 창평군의 두입지(斗入地)인 갑향면이 장성군에 편입되었다.
봉산면 제월리 등 담양군 여러 지역에서 출토되는 유물로 보아 이 지역에는 신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 같다. 또 화순 등 인근지역에서는 청동기 및 철기시대의 유물이 발굴되고 있다. 조선시대 1758년(영조 34) 추성지는 지금의 무정면 일대를 삼한시대의 술지현(述只縣) 자리라고 전하고 있다.
백제 때의 27개 군 200개 성 중에서 추자혜군을 말하며 지금의 창평면은 전라남도 동북쪽에 위치하여 굴지현(屈支縣)에 속하였다. 금성산성과 담주산성도 200개 성 중의 하나인 듯하다. 조선시대의 추성지는 금성산성이 삼한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전하고 있다.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추자혜군에서 추성군으로 개칭하였다. 백제 때의 율지현(栗支縣)은 율원현(栗原縣)으로 바뀌어져 추성군에 속했다. 창평은 기양현(祈陽縣)으로 개칭하여 무주(현 광주)의 영현이 되었다. 995년(고려 성종 14) 추성군을 담주라 개칭하고 도단련사를 두었다가 1018(현종 9) 담주 도단련사를 없애고 담양군이라 개칭하였다. 동시에 율원현 및 창평현과 함께 무주(현 광주)에서 나주로 소속되었다. 1172년(명종 2)에는 감무(監務)를 두었고, 1391년(공양왕 3)에는 원율현(현 금성면 원율리)을 병합하였다.
조선시대 때 국사 조구의 고향이라 하여 1395년(태조 4)에 군으로 승격되었으며, 1413년(태종 13)에는 담주에서 담양으로 개칭되어 도호부가 되었다. 그러나 1728년(영조 4)에 현(縣)으로 강등되었다. 1895년(고종 32) 전국을 23부(府) 331군(郡)으로 나눌 때 남원부(南原府) 관할하에 있었으며, 1905년(광무 9)에 담양부를 담양군으로 고치고 1908년(순종 2)에 폐지된 옥과군 일부가 담양군에 합하여졌다. 1914년 군면폐합 때 창평군이 폐지되고 군내 12개 면이 5개 면으로 폐합되어 담양군에 병합되었다. 이때 광주군의 갈전면•대치면과 장성군 갑향면이 대전면으로 개칭되어 이관됨으로써 담양군은 13개 면으로 조정되었다. 1918년에는 무면(武面)과 정면(貞面)이 무정면으로 통합되고, 구암면을 봉산면으로 개칭하여 12개 면이 되었다. 1931년 구암면을 봉산면으로, 1932년 무면과 정면을 합하여 무정면으로 개칭했다. 1943년 담양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1961년 10월 1일자로 담양군 동리 명칭과 구역에 관한 조례(제2호), 담양군 이장정수조례(제3호)를 각각 제정공포하여 1읍 11면 139리를 관할하였으며, 1973년에 담양호와 광주호 건설로 용면 산성리와 청흥리가 수몰됨으로써 2개 리가 줄어 137개의 법정리를 이루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2001년 현재 담양읍과 봉산면•고서면•남면•창평면•대덕면•무정면•금성면•용면•월산면•수북면•대전면 등 1읍 11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 부내장(府內場)[?] : 미(米), 두(豆), 맥(麥), 면포(綿布), 면화(綿花), 마포(麻布), 죽물(竹物), 지마(脂麻), 수소(水蘇)
- 죽세공예•창평엿•한과,•죽엽청주•추성주 등도 주요특산물이다. 임산물로는 대나무 생산이 전국 제일이며, 죽제품과 함께 죽순회가 유명하다. 죽순을 껍질 채 뜨거운 물에 약간 익힌 다음 껍질을 벗겨서 가늘고 얇게 쪼개어 초고추장에 버무린 음식으로 술안주로 그만이다. 죽순은 대개 5~6월경에 움이 트는데 식용으로 쓰기에는 땅 위로 솟은 후 7일 정도 자란 것이 좋다. 조선시대에는 궁중진상품으로 쓰이기도 했다.

<전거:신증동국여지승람, 담양군읍지(1899), 담양문헌집(1980)>
 
목포 
 
전라도 남서단 영산강 하구에 위치하고 있다. 동쪽과 남쪽은 영산호(榮山湖)에 면해 영암군을 마주하고 있으며, 서쪽은 많은 도서들로 이루어진 신안, 북쪽은 무안과 접하고 있다. 연평균기온은 14.9℃이고, 1월 평균기온 2.5℃, 8월 평균기온 27.8℃이고, 연강수량은 708.1㎜이다.
목포는 조선 말기까지도 무안현에 딸린 작은 포구에 지나지 않았으나 1897년 개항된 이래 식민지 거점도시로 이용되면서 급속히 성장한 항구도시이다. 호남에서 생산되는 쌀•목화•누에고치 등이 이곳에 집산되어 일본 고베〔神戶〕 항으로 실려 갔으며, 일본에서 가공된 물자는 여기서 하역되어 철도를 타고 내륙으로 흘러들어갔다. 이런 과정으로 일제시대에 목포는 광주보다 훨씬 번성한 도시였다.
농업은 쌀•보리 생산 외에 동목포 부근에서 무•배추 등의 소채재배가 행해지고 있다. 한편, 항구의 특성상 수산업이 발달해 어가인구가 농가인구의 3배에 달한다. 상업활동은 조선 말기까지만 해도 무안현의 작은 항구에 지나지 않아 별다른 것이 없었다. 그러다가 일제강점기 때 식민지거점 항구도시로 발전하면서 그 상세(商勢)가 전국적으로 신장되었다.

<전거 :신증동국여지승람, 목포사(1974), 전라남도지(1982~4)>
 
부안(부안장) 
 
백제 때는 개화현(皆火縣)이었으며, 통일신라 때는 부령현(扶寧縣) 혹은 계발(戒發)이라 하여 고부군에 속해 있었다. 1414년(조선 태종 14) 보안현(保安縣)과 부령현(扶寧縣)을 합하여 부안현(扶安縣)이라 하다가, 조선 후기 고종 때 부안군으로 승격되었다.
1914년 위도(蝟島)는 전라남도 영광군에, 비안도는 옥구군에 편입시키고, 고부군의 백산(白山)•거림(巨林)•덕림(德林)의 3개 면을 편입하였다. 1943년 부령면(扶寧面)이 부안읍으로 승격되어 1개 읍 9개 면이 되었다.
1963년 1월 전라남도 영광군의 위도면이 편입되어 1개 읍 10개 면이 되었고, 그해 7월 산내면(山內面) 등 해안지방의 교통이 불편하여 곰소만 지대에 진서출장소(鎭西出張所)를 신설하였다. 계화도(界火島)의 간척 공사로 광대한 농경지를 얻게 되자 1976년 계화출장소를 신설하였다. 1983년 계화면(界火面)이 신설되었고, 산내면(山內面) 진서출장소가 진서면(鎭西面)으로 승격되었다.
2001년 현재 부안읍과 주산•동진•행안•보안•변산•백산•상서•하서•줄포•위도•계화•진서면의 1읍 12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 하장(下場)[?] : 미(米), 토기(土器), 어염(魚鹽), 석자(席子)
- 계화면 등 동진강 하구에 속한 동부지역에서 논농사가 주로 이루어지며, 변산면 등 서남부 산지의 구릉지역에서 밭농사가 많이 행해진다. 주곡농업 외에 변산면•상서면•보안면•하서면 등의 산간지대에서는 잎담배•약초•산나물재배와 축산업 등이 이루어진다.

<전거: 신증동국여지승람, 대동지지, 강진향토지(1980), 강진군읍지(1899)>
 
 순천(순천장) 
 
순천시는 백제시대에는 함평군이었으나 신라 경덕왕 때 승평군으로 고쳤으며, 996년(성종 15)에는 승주군으로 바꾸었다가 1036년(정종 2) 승평군으로 환원하였다. 1309년(충선왕 1)에는 승주목으로 승격하였으나 이듬해에 순천부로 다시 강등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세종 때에는 순천진을 설치하여 부사가 병마절도사를 겸하도록 하였으며 그 산하에 낙안•보성•광양•고흥•능주•동복•구례 등 8읍을 관할하게 하였다. 1895년(고종 32) 순천군으로 개칭하였다. 8•15광복 후 1949년 8월 순천읍과 도사면 일부 해룡면 일부를 통합하여 순천시가 되고 종래의 순천군은 승주군으로 개칭하였다.
1995년 1월 순천시와 승주군을 통합하여 도농복합형(都農復合型)의 새로운 순천시가 되었다. 2001년 현재 승주읍 및 주암•송광•외서•낙안•별량•상사•해룡•서면•황전•월등면, 향•매곡•삼산•조곡•덕연•풍덕•남제•저전•장천•중앙•도사•왕조동의 1읍 10면 12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 부내장(府內場)[2일, 7일] : 미(米), 두(豆), 맥(麥), 면포(綿布), 면화(綿花), 목물(木物), 죽물(竹物), 지지(紙地), 연초(煙草), 어염(魚鹽), 석자(席子)
- 조계산을 비롯한 여러 산지들이 서로 중첩되어 있어 평야는 발달하지 못했다. 주요 농산물은 쌀•쌀보리•맥주보리•콩 등 이다.
 
영광(영광장) 
 
영광군은 백제 때 무시이군(武尸伊郡)이었는데 통일신라시대인 757년(경덕왕 16)에 무령군(武靈郡), 고려시대인 995년(성종 14)에 영광군(靈光郡)이라고 하였다. 1018년(현종 9)에 강남도(江南道:현 전북)와 해양도(海陽道:현 전남)를 통합, 전라도라 개칭했는데 이때 영광군이 전라도 관할로 되었고 그 후 현(縣)으로 강등되었다가, 군(郡)으로 복귀하기를 몇 차례 거듭하였다.
1896년(고종 33)에 전국을 13도(道)로 개편할 때 전라남도가 생기면서 여기에 속하게 되었으며 그 후 외동면(外東面)•삼남면(森南面) 등 몇 개의 면을 장성군으로, 위도면(蝟島面)•낙월면(落月面)을 지도군(智島郡)에서 영광군으로 편입시켰다.
1955년 6월 영광면이 읍으로 승격하고, 1963년 1월 위도면이 전라북도 부안군에 편입되었다. 1967년 5월 안마출장소가 설치되었다. 1980년 12월 1일 백수면(白岫面)이 읍으로 승격하였으며, 1985년 10월 홍농면(弘農面)이 읍으로 승격하였다.
2001년 현재 영광읍•백수읍•홍농읍과 대마면(大馬面)•모량면(畝良面)•불갑면(佛甲面)•군서면(郡西面)•군남면(郡南面)•염산면(鹽山面)•법성면(法聖面)•낙월면(落月面) 등 3읍 8면 및 안마(鞍馬) 출장소로 이루어져 있다.
- 읍내장(邑內場)[1일, 6일] : 미(米), 면포(綿布), 저포(苧布), 마포(麻布), 토기(土器), 자기(磁器), 어염(魚鹽), 석자(席子)
- 주요농산물로는 쌀•보리•고구마•콩•녹두•잡곡 등 식량작물을 비롯하여, 채소류와 땅콩•참깨 등이 생산되며, 포도나 딸기 등의 과수재배도 활발하다. 쌀은 간척지가 많은 백수읍과 염산면 등지에서 많이 생산되고, 특용작물에서는 참깨의 재배면적이 가장 넓고, 영광읍과 대마•군서면 등지가 주산지인 땅콩은 전국에서 그 비중이 높은 특용작물로 알려져 있다.

<전거:신증동국여지승람, 신팔도기(1987)증보문헌비고>
 
임실(임실장) 
 
`- 마한에 속하여 청웅현이라 칭하였다. 통일신라 때에 임실군이었다가, 고려 때는 전라도 전주목 밑에 임실군을 두었고, 조선시대에는 임실현이 되었다. 1896년 다시 임실군이 되어 남원부의 6개 면이 편입되었다.
1906년 지사면•둔남면 등이 남원군에서 임실군에 편입되어 24면이 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면의 통폐합에 의해서 12면으로 조정되고, 1935년 오천면을 관촌면으로 개칭하였다.
1965년 섬진강 다목적댐의 건설에 따라서 운암면이 갈담저수지를 사이하여 2개로 분리되어 갈담저수지 남쪽에 하운암출장소를 신설하였다(12면 1 출장소). 1979년 임실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1990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관촌면 금성리가 임실읍으로 편입되었고, 1992년 둔남면을 오수면으로 개칭하였다. 199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삼계면 신정, 망전리가 임실읍으로 편입되었다.
2001년 현재 임실읍과 청웅면•운암면•신평면•성수면•오수면•신덕면•삼계면•관촌면•강진면•덕치면•지사면 등 1읍 11면의 행정구역을 이룬다.
- 읍내장(邑內場)[1일, 3회 개시] : 미(米), 두(豆), 맥(麥), 생마(生麻), 토기(土器), 자기(磁器), 철물(鐵物), 연초(煙草), 과물(果物)
- 특산품에 목기류•석기•한지•땅두릅•느타리버섯•꿀•장미•양란 등이 있다.

<전거:신증동국여지승람, 임실군사(1977)>
 
전주(읍내장) 
 
전주는 마한시대 이래 호남지방의 규모가 큰 읍으로 마한의 원산성(圓山城)에서 유래한다. 원(圓)은 '온'의 차음(借音)이어서 백제 때에는 완산(完山)이라 불렸으며, 통일신라시대인 756년(경덕왕 15)에 '완(完)'을 의역하여 전주(全州)라고 고쳤다. 900년(효공왕 4)에는 견훤이 후백제를 세우고 이곳을 도읍으로 하였다. 그 후 40여 년간 후백제의 수도였다가, 고려 태조가 후백제를 멸망시키고 나서 한때 안남도호부라 하다가 다시 전주로 환원하였다. 공민왕 때는 원나라 사신을 가둔 일 때문에 부곡으로 강등하였으나, 다시 완산부가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이씨 왕조의 선조가 살았던 고향이라는 이유로 완산유수부로 개칭하였다가 1403년(태종 3) 다시 전주부가 되었다. 그 후 전라도 관찰사의 소재지로서 현재의 전라남도•전라북도를 관할하다가, 1896년 행정구역이 13도로 개편됨에 따라 전북만을 관할하였다. 1914년 부군통폐합 때 전주면이 설치된 뒤 1931년 읍으로 승격되었으며,1935년 부로 승격되면서 완주군에서 분리되었다. 1949년 지방자치법 실시에 따라 전주시로 개편되고, 1957년 완주군 초포면•우전면의 전역과 조촌면•용진면•상관면의 일부가 전주시로 편입되었고, 1973년에는 용진면 산정리의 일부를 우아동에 편입시켰다. 1983년 2월의 전국 행정구역 재조정으로 완주군 상관면 대성리•색장리와 용진면 산정리 일부를 이관받았다.
1987년 완주군 조촌읍이 전주시에 편입되고, 1989년 완주군 용진면 산정리, 금상리 및 구이면 중인리, 용복리, 석구리, 원당리 등이 전주시에 편입되었다.
2001년 현재 덕진•완산의 2개 구와 중앙동•경원동•풍남동•전동•다가동•고사동•교동•태평l∼2가동•중노송1∼2가동•남노송동•서노송동•진북1∼2동•동완산동•서완산동•동서학동•서서학동•중화산동•인후1∼3가동•덕진동•금암1~2•서신동•팔복동•우아동•호성동•전미동•평화동•삼천동•효자1~3동•남고동•송천동•조촌동•동산동의 40개 동으로 행정구역을 이룬다.
- 부내장(府內場)[부남(府南) - 2일 3회, 부서(府西) – 7일 3회, 부북(府北) – 4일 3회, 부동(府東) – 9일 3회] : 미(米), 두(豆), 맥(麥), 면포(綿布), 면화(綿花), 저포(苧布), 마포(麻布), 생마(生麻), 유기(鍮器), 토기(土器), 자기(磁器), 철물(鐵物), 목물(木物), 죽물(竹物), 지지(紙地), 연초(煙草), 과물(果物), 어염(魚鹽), 우독(牛犢), 석자(席子)
- 쌀•보리 등 주곡작물이 주로 재배되며, 무•배추 등 채소류와 복숭아•배 등 과실류, 참깨 등의 특용작물이 있다.

<전거:신증동국여지승람, 여지도서, 전주시사(1974)>
 
정읍(정읍장) 
 
삼한시대에는 마한 54개 부족국가 중 초산도비리국이 있었던 지역이다. 백제 때는 고부군의 시산현과 인의현으로 나뉘어 있다가, 통일신라시대인 757년(경덕왕 16)에 정읍이라 개칭되어 태산군(지금의 태인면)에 속하게 되었고, 고려시대 다시 고부군에 속하였다.
조선시대인 1409년(태종 9) 태산군과 인의현이 합하여 태인군이 되었고, 정읍현이 정읍군이 되었다.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정읍군 8개 면, 고부군 15개 면, 태인군 18개 면이 정읍군으로 통합되어 19개 면으로 변경되었다. 1931년에 정주면이 정주읍으로 승격하였고, 1940년에는 신태인면이 신태인읍으로 승격하였다. 1981년에는 정주읍이 시로 승격하여 정주시와 정읍군으로 나누어졌다. 1995년 1월 정주시와 정읍군이 합쳐 도농복합형의 통합시가 되었다.
1997년 부안군 일부와 시군간 경계조정으로 면적이 692.6㎢가 되었다. 1998년 정읍시 상동과 내장동을 내장상동으로, 시기1동과 시기2동을 시기동으로, 농소동과 정일동을 농소동으로, 상평동과 과교동을 상교동으로 통합하였다.
2001년 현재 신태인읍 및 북•입암•소성•고부•영원•덕천•이평•정우•태인•감곡•옹동•칠보•산내•산외면, 수성•장명•내장상•시기•시기3•연지•농소•상교동 등 1읍 14면 8동의 행정구역을 이룬다.
- 읍내장(邑內場)[2일, 7일] : 미(米), 저포(苧布), 철물(鐵物), 목물(木物), 죽물(竹物), 연초(煙草), 우독(牛犢), 석자(席子)
- 지역 특산품으로는 알로에•사과•배•참외•느타리버섯•무농약쌀•삼베•자기•도자기•분재 등이 있다.
농업지역은 지역별로 크게 3부분으로 구분되는데, 신태인읍•고부면•영원면•덕천면•이평면•정우면•감곡면 등 동진강 하류와 고부천 유역의 넓은 충적평야가 발달한 논농사 중심의 주곡농업지역과, 태인면•옹동면•북면•소성면 등 구릉이 많아 논과 밭이 각각 반반인 중간형 농업지역, 그리고 남동부의 노령산맥 서사면 지역인 산외면•칠보면•산내면•입암면•과교동•농소동•내장동 등 밭농사 중심지역이다.
주곡작물 외에 고추•무•배추 등 채소와 땅콩•참깨 등의 특용작물, 사과•감 등의 과일이 많이 생산된다. 특히 북면을 중심으로 생산되는 사과는 전라북도 전체의 60%를 생산한다. 이 밖에도 인삼•잎담배 등이 재배된다.

<전거:신증동국여지승람. 증보문헌비고>
 
해남(해남장) 
 
이 지역은 신석기시대 후기 즐문토기인이 현산면 두모리에 출현하였고, 삼한시대에 마한 54국 중 소위건국 등 4∼5개의 마한 소국 세력이 성립하였던 곳이다.
538년 백제 때 새금현이었고, 통일신라시대에 침명으로 고쳐 양무군 영현으로 삼았다. 940년 고려시대에 해남현으로 고쳐 영암군에 속하였다.
조선시대인 1409년(태종 9)에 진도현과 합하여 해진군이라고 하였다. 1437년(세종 19)에는 현감을 두고 해남현이 되고, 또 수군전라우수영을 두어 남쪽 해상 방비의 요지로 삼았고, 1895년(고종 32)에 현이 폐지되고 해남군이라 하였다. 1896년 다시 전라남도 해남군으로 개편하면서 부근 도서를 완도군으로 이속시켰다.
1914년 강진군 백도면 일부 및 완도군 노화면 삼마도가 해남군 화산면에 병합되고, 1921년 완도군 군외면 어불도가 송지면에 병합되었다.
1955년 해남면이 읍으로 승격하고, 1973년 송지면 월송리가 현산면에, 마산면 복평리가 해남읍으로 편입되었다. 1983년 북평면이 북평면과 북일면으로 나뉘고 마산면 맹진리 일부가 계곡면 덕정리로 편입되었다. 1990년 옥천면 봉황리가 강진군 도암면으로 편입되었다.
2001년 현재 해남읍•삼산면•화산면•현산면•송지면•북평면•북일면•옥천면•계곡면•마산면•황산면•산이면•문내면•화원면 등 1읍 13면의 행정구역을 이룬다.
- 읍내장(邑內場)[5일, 10일] : 미(米), 두(豆), 면포(綿布), 면화(綿花), 목물(木物), 죽물(竹物), 어염(魚鹽), 지마(脂麻), 수소(水蘇)
- 연안의 해역으로는 김•미역•굴•고막의 양식업을 많이 하고 낙지•삼치 등의 수산물도 풍부하다.
 

경상도


가덕도 
 
남해안으로 흘러드는 낙동강 하구에 위치하고 있다. 면적에 비해 높은 산지가 많은 것이 특징이며, 연대봉(煙臺峰, 459m)과 국수봉(269m)에서 뻗은 사면은 급경사이고, 해안은 북안을 제외하고는 가파른 해식애로 100m 이상에 달하는 것도 있다.
북동단에 가로놓여 있는 눌차도(訥次島)는 북동에서 서남으로 뻗는 사주에 의해 형성된 육계도이며, 내만은 천성만(天城灣)이라 불리는 석호이다. 해안선은 비교적 단조로우나 북서단에 만입된 천성만은 좋은 항구를 이룬다. 섬의 동안,남안,서안은 수심이 매우 깊으나, 북안은 얕은 갯벌로 되어 있다.
기후는 해양의 영향으로 온난하며, 연평균기온 13.8℃, 1월 평균기온 1℃, 8월 평균기온 26.6℃이며, 연강수량은 1,464㎜이다. 상록활엽수림과 낙엽활엽수림이 혼생한다.
통일신라시대 당나라와의 무역에 있어서 주요 귀항지의 하나였으며, 조선시대에는 웅천군(熊川郡)에 속하였다.

<전거:『한국지명 총랍(1980)』, 『한국연안수로진』(1981), 『도서지』(1985)>
 
경주(경주장) 
 
삼한시대에는 진한의 12국 가운데 사로국(斯盧國)이 있었던 지역이다. BC 57년 박혁거세(朴赫居世)가 이곳을 중심으로 서라벌(徐羅伐)을 세웠다. 이 나라가 307년(기림왕 10)부터 신라로 개칭 •발전하였는데, 이후 992년간 신라의 왕도 역할을 하였다.
고려가 신라를 합병한 935년(태조 18) 처음으로 경주라 불렀으며, 940년(태조 23) 영남지방의 행정 관청인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가 설치되었다. 987년(성종 6) 동경(東京)으로 바꾸고, 유수사(留守使)를 두었으며 1012년(현종 3)에 다시 경주가 되었다. 한동안 경주부에 설치된 경상좌도(慶尙左道)의 감영(監營)이 1601년(선조 34)에 대구로 이동된 후 경주의 지위는 약화되었다.
1895년(고종 32) 23부제(府制) 실시로 경주군으로 개편되고, 1931년 4월 경주면이 읍으로 승격되었으며, 1937년 7월 양북면(陽北面)에서 감포리(甘浦里) 외 8개리가 감포읍으로 분리 승격되었다. 1949년 5월에는 강서면(江西面)이 안강읍으로 승격되었다. 1955년 9월 경주읍이 경주시로 승격되어 군과 분리되었고, 군의 명칭이 월성(月城)으로 바뀌었다.
1973년 7월 서면(西面)의 건천리(乾川里) 외 10개리가 건천읍으로 승격 분리되었고, 1980년 12월 외동면(外東面)이 읍으로 승격되었으며, 1989년 1월 월성군의 명칭이 경주군으로 환원되었다. 95년 1월 경주시와 경주군이 합쳐 통합시가 되었다.
현재 경주시는 구(舊)경주시의 성내 •성동 •황오 •중앙 •성건 •탑정 •황남 •인교 •선도 •도동 •보황 •용황 •동천 •정래 •불국 •보덕의 16개동과 감포 •안강 •건천 •외동의 4개읍 및 양북 •양남 •내남 •산내 •서 •현곡 •강동 •천북의 8개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 부내장(府內場)[2일, 7일] : 미(米), 면포(綿布), 마포(麻布), 저포(苧布), 유기(鍮器), 철물(鐵物), 토기(土器), 자기(磁器), 지물(紙物), 연초(煙草), 어염(魚鹽), 과물(果物), 우독(牛犢), 석자(席子)
- 농산물로는 쌀 •보리 •콩 외에 사과와 각종 채소류가 생산된다. 이 밖에 양송이 •산수유 •밤 •표고버섯 •약초 •밤 •대추 등도 생산된다. 축산은 한우 •젖소 •닭의 사육이 많이 이루어지고 있다. 수산업은 어항인 감포읍을 중심으로 주로 꽁치 •오징어 •가오리 등의 어획과 함께 어류 양식업도 행해진다.

<전거:신증동국여지승람, 경상도읍지, 경주시지(1971)>
 
고성(고성장) 
 
고성군은 본래 6가야 중 소가야(小伽倻:42?∼532)의 수도였으며, 통일신라시대에 고자군이라 불리다가 고려시대에 철성부(鐵城府)•고주•고성현으로 불렸다. 조선시대에 고성현이 되었으며, 1870년(고종 7)에 부(府), 1895년(고종 32) 부제실시에 따라 진주부 고성군이 되었다.
1900년 진남군이 설치되어 도선면•광이면•광삼면이 진남군에 편입되었으며, 1906년 진주군 문선면•남양면•영현면•영이곡면•오읍곡면•개천면이 고성군에 편입되었다. 1912년 남양면이 사천군에 편입되고, 1914년 진주군으로부터 영현(永縣)•영오(永吾)•개천(介川)의 3개 면이 편입되어 14개 면이 되었으며, 1938년 고성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1973년 마암면 좌연리가 개천면에, 동해면 감서리가 거류면에 편입되었다. 1983년 삼산면 이당리•대독리가 고성읍에, 개천면 나선리 선동이 구만면 화림리에 편입되었다.
2001년 현재 관할구역은 고성읍 및 삼산(三山)•하일(下一)•하이(下二)•상리(上里)•대가(大可)•영현(永縣)•영오(永吾)•개천(介川)•구만(九萬)•회화(會華)•마암(馬岩)•동해(東海)•거류(巨流)면의 1읍 13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 읍내장(邑內場)[1일, 6일] : 미(米), 면포(綿布), 죽물(竹物), 어염(魚鹽), 우독(牛犢)
- 고성군은 북쪽을 제외한 3면이 남해로 둘러싸여 해안선의 굴곡이 심하고 연근해에 많은 섬이 흩어져 있는 한려수도의 중심지이다. 연근해는 청정수역으로 어획 및 양식 등 수산업이 발달했고, 경지는 해안 저지에 좁게 펼쳐져 있다. 특산물로는 버섯•방울토마토•유자•참다래 등을 재배한다. 특히 굴 생산량이 많다. 주요 어획물은 멸치•갈치•도미•전어 등이다.

<전거:신증동국여지승람, 고성군읍지(1871),대동지지, 고성지(1975)>
 
김천 
 
동쪽은 구미와 칠곡, 서쪽은 소백산맥을 경계로 충청도 영동과 전라도 무주, 남쪽은 성주와 거창, 북쪽은 상주와 접하고 있다. 동북부는 모두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서쪽에는 소백산맥의 줄기를 따라 추풍령(1,111m) •삼도봉(1,177m) 등의 높은 산이 솟아 있으며, 삼도봉은 충청북도•전라북도•경상북도의 경계가 되고 있다. 남쪽에는 대덕산에서 갈라져 나온 가야산맥이 성주•거창과의 경계가 되고 있다. 동쪽에는 금오산(977m)이 솟아 있어 구미와의 경계를 이루며, 영암산(782m)은 김천•칠곡•성주의 경계가 되고 있다. 또한 추풍령 등의 고개는 높은 산지를 가로지르며 인접지역으로 통하는 주요 육로가 되고 있다.
상주의 지형은 화강암질의 낮은 구릉지와 감천•직지천이 이루어 놓은 충적평야인 금릉평야가 발달되어 있다. 황악산에서 발원한 직지천(直指川)과 대덕산•우두령에서 발원한 감천(甘川)이 주요 하천이다. 감천은 남서부에서 동북부로 시의 중앙을 관류하며, 직지천•아천(牙川) •율곡천(栗谷川) •부항천(釜項川) 등과 합류, 구미시로 빠져나가 낙동강으로 흘러든다. 감천과 직지천이 이루어 놓은 금릉평야와 개령평야는 들이 넓고 기름져 일찍부터 농업이 발달했고, 이 지방 농업을 위주로 하는 1차산업의 터전을 이루고 있다. 감천 하류는 조선 말기까지 낙동강 하구에서 소금배가 올라올 정도로 수심이 깊었다.
기후는 소백산맥의 영향으로 겨울에는 북서계절풍이 차고 건조한 바람으로 넘어 올라오며, 여름에는 남동풍이 복사열을 받아 더운 바람이 되어 불어오므로 몹시 덥다. 연평균기온 15.2℃, 1월 평균기온 0.9℃, 8월 평균기온 29.1℃로 비교적 연교차가 크다. 연강수량은 567.5㎜이다.
조선초기 농업의 발달과정에서 이 지역 역시 토지가 비옥해 농업생산력이 급격히 증가했으며, 여러 개의 제언(堤堰)이 축조되는 등 물산이 풍부한 곳으로 지목되었다.
금릉평야와 개령평야를 중심으로 한 쌀•보리 등의 주곡 이외에 참깨•들깨•아주까리 등의 작물이 많이 생산된다. 지례면 상부리에는 매장량이 많은 규석의 노천광이 있다. 광산물의 생산을 살펴보면 규석은 지례면•봉산면•대덕면, 고령토는 구성면•대덕면, 장석은 조마면에서 산출된다.
전통적인 제조업으로는 갈포벽지•영신당 붓•김천유기(金泉鍮器) •과하주(過夏酒)가 있다. 갈포벽지는 베처럼 짠 갈포를 염색하고 뒷면에 종이를 바른 것으로, 벽지라기보다는 가벼운 돗자리처럼 보이는 고급벽지로 방음•방습•광택이 뛰어나 각광을 받고 있다. 족제비털•양털•노루털을 재료로 여러 번의 잔손질을 거쳐 생산되는 붓은 전국적으로 이름이 나 있다. 김천은 경기도 안성과 같이 예로부터 유기(鍮器)로 유명했으며 소리를 생명으로 하는 징과 꽹과리가 대표적이다. 과하주는 남산동 지게마을 서쪽에 있는 과하천의 물•누룩•찹쌀로 빚어 내는 김천지방의 전통민속주로 향긋하고 담백한 맛이 난다.
상업활동을 보면 김천은 예로부터 경상북도지역 육로의 주요 경유지로서 역이 설치되어 상업이 발달해 왔다. 조선시대에는 78개 상설점포가 개설되었고, 정기시장도 형성되어 충청도•전라도•경상도의 3도 상인이 모여들었다. 따라서 김천장은 조선시대 중기부터 말기까지 대구•평양•전주•강경과 더불어 전국 5대 시장으로 꼽혔으며, 지금도 3도에서 곡식과 과일이 모여들어 삼도시장(三道市場)이라는 별명과 함께 활기를 띤다. 1830년대에는 매월 2일과 7일에 남면•개령읍•아산, 3•8일에 이수천, 4•9일에 금산읍•추풍•지례읍, 5•10일에 김천장 등의 5일장이 각각 열려 주로 농산물과 소•건어물•마포•종이 등이 거래되었다. 일제강점기인 1928년경에는 김천•지례•대덕 등의 정기시장만 남게 되었다.

<전거: 신증동국여지승람, 경북향토자료지(1972),내 고장 우리향토(1985)>
 
대구 
 
동쪽은 경상북도 경산, 서쪽은 성주와 고령, 남쪽은 청도와 창녕, 북쪽은 칠곡과 군위 및 영천과 접하고 있다. 지형은 분지(盆地)적 지형으로서 남부 산지, 북부 산지, 중앙부와 서남부 저지(低地)로 이뤄져 있다. 남부와 북부의 산지 사이에 해당하는 동서 방향으로 넓은 중앙부와 낙동강(洛東江) 연변의 서남부는 거의 대부분이 평야이고, 곳곳에 구릉성 산지가 분포하고 있다. 낙동강과 그 지류인 금호강(琴湖江) 및 이에 유입되는 신천(新川)과 팔거천(八減川) 주변에는 범람원(氾濫原) 성격의 넓은 충적평야가 발달해 있다.
기후는 전형적인 내륙분지성기후로서 한서의 차가 크며, 강수량은 적은 편이다. 연평균기온은 14.1℃이고, 1월 평균기온은 0.4℃, 8월 평균기온은 28.6℃이며, 연강수량은 970.9㎜이다.
조선 건국 후 비옥한 평야지대를 끼고 있는 대구는 농업의 중심지로서 가구수가 증가하고 점차 거읍(巨邑)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세조대 이후 영남 내륙교통의 요지로 잡은 대구는 진관체제(鎭管體制) 하의 용양위(龍蚊衛)의 중부가 설치된 군사적 중심지로도 자리잡았다. 1601년(선조 34) 경상도감영이 설치되면서 대구는 명실상부한 영남지방의 중심지가 되었다.
주요 농작물로는 쌀이 생산량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보리․콩․감자․고구마 등의 작물도 다소 생산된다. 특용작물로는 참깨의 생산이 많다.
조선후기의 대구는 약령시의 한약도매업 등이 크게 번창하였다. 정기시장(5일장)은 가장 오래된 소매기관으로서 1960년대 말까지는 발달해왔으나 1970년대 이후 급격히 쇠퇴해 공설(公設)시장으로는 북구 칠곡에 1개소와 달성군의 6개소가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대구(대구장) 
 
조선시대 들어 비옥한 평야지대를 끼고 있는 대구는 농업의 중심지로서 인구가 점차 증가하였다. 1394년(태조 3)에 수성현•해안현•하빈현이 대구현에 영속되었고, 1419년(세종 1) 5월 대구현은 대구군(大丘郡)으로 승격되었다. 1448년(세종 30) 군수 이보흠의 사창법이 실시되었고, 1466년(세조 12)에 진(鎭)을 설치하여 도호부(都護府)로 하고, 종래 경주에 있던 경상도 관찰사영(觀察使營)을 대구로 옮김으로써 대구는 경상도의 행정중심지 및 군사상의 요지가 되었다.
1592년(선조 25)에 일어난 임진왜란(壬辰倭亂) 이후 경상도를 좌우양도(左右兩道)로 분할•폐합시킨 것을 비롯하여 여러 차례 행정구역을 개폐하였으나 1601년(선조 34) 다시 대구에 경상도감영(慶尙道監營)을 설치하였다. 경상도 관찰사는 대구부사(大丘府使)를 겸임하였고, 감영의 운영비를 충당하기 위하여 경산현(京山縣)•하양현(何陽縣)의 2현(縣)과 성주 소속의 화원현(花園縣)을 대구부에 편입시켜, 지금의 경산시 안심면•경산면•고산면•남천면•하양면과 진량면의 일부, 그리고 달성군의 월배면•화원면•옥포면이 대구부에 포함되었고 거대 도시가 되었다. 1607년(선조 40)에 하양현과 경산현은 대구에서 다시 분리되었다. 1639년(인조 17) 가산산성이 축조되었고, 1736년(영조 12)에 대구읍성이 축조되었다.
대구의 한자 표기가 ‘大丘’에서 ‘大邱’로 표기가 바뀐 것은 1780년대부터이다. 이보다 이전인 1750년(영조 26) 대구의 유생 이양채(李亮采)가 ‘丘’자는 대성 공자(大聖孔子)의 휘(諱)자이므로 이를 개칭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으나 왕의 승낙을 얻지 못하다가 1780년대부터 점차 ‘大邱’로 쓰이기 시작하였다.
오랫동안 경상도감영의 중심지적 위치를 누려온 대구는 1895년(고종 32)의 지방관제 개혁 때 큰 변화를 맞게 되었다. 이때 경상도는 대구부•안동부•진주부•동래부의 4부로 나뉘어졌는데 대구에 있던 경상감영이 폐지되면서 대구군으로 개편되어 부청 소재지가 되었다. 또 대구부의 관할구역은 23개군으로 줄어들었다.
1896년 다시 지방관제가 개정되어 경상도를 남•북 양도로 분할하고 관찰사와 군수를 두었다. 1910년에는 대구이사청(大邱理事廳)과 대구군을 폐지하여 대구부(府)라 부르고, 1911년 11월에는 시가지의 일부 동명을 변경•개칭하였다. 1914년 3월 부제의 실시로 시가지만 부(府)의 행정구역으로 정하고, 그 외는 달성군에 속하게 되었다.
개화의 물결로 1899년 달성학교가 설립되면서 여러 초등교육기관이 세워졌고, 1906년에는 중등교육기관인 계성학교, 1907년에는 신명학교가 설립되어 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1907년에는 서상일(徐相日)•김광제(金光濟)가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하엿고, 이후 금연•금주•절미로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국권을 되찾으려는 노력은 전국적인 운동으로 번져 나갔다. 1915년 서상일은 영남지역의 독립투사들을 모아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였고, 훗날 이 단체는 대구지역 3•1만세운동을 주도하였고, 파리장서사건에도 깊이 관여하였다.
1918년에 달성군의 봉덕동•대명동 일부를 시역(市域)에 편입시키고, 1937년 5월 대구부의 시가지 계획이 공고되자 부역(府域) 확장을 계획하여 1938년 10월에 달성군의 수성면 •달서면 •서북면을 편입하여 공장지대를 조성하였다. 8•15광복과 더불어 해외 귀환 동포와 월남 피난민의 정착으로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였고, 대구의 가로(街路)와 동(洞)의 명칭을 바꾸고 대도시로 성장하였다. 1949년 7월 지방자치법의 실시에 따라 대구부를 대구시로 개칭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시에는 낙동강 방어작전의 최후 보루지로 역사에 길이 남을 전투가 있었다.
1958년 달성군의 공산면•등촌면•가창면•성서면•월배면을 편입하여 시역은 463.19 km2로 대폭 확장되었다. 그러나 동변동과 서변동을 제외한 공산면과 파동을 제외한 가창면•성서면•월배면 등은 농촌지대이므로 1962년 달성군에 환원하였다.
1960년 이승만 정권의 독재하에서 대구지역의 학생들이 2•28학생의거를 일으켰고, 이것은 4•19의거로 이어져 우리나라 민주주의 역사에 큰 분수령이 되었다. 1963년 1월 구제(區制)를 실시했고, 1969년에는 인구가 103만 4000명으로 늘어, 인구 백만의 도시로 성장하였다.
1981년 7월 1일 6개구의 대구직할시로 승격하고, 인접지역인 월배읍•성서읍•칠곡읍•안심읍의 4개읍과 공산면•고산면의 2개 면을 편입하였다. 1988년 달서구가 신설되어 7개구가 되었다. 1995년 1월 중앙정부 직할의 직할시를 광역시로 개칭하면서 지방화 시대의 원년을 맞았다. 같은 해 3월 인접지역인 달성군을 편입하여 7개구 1개군이 되었다.
- 부내장(府內場)[1일, 6일] : 미(米), 면포(綿布), 면화(綿花), 마포(麻布), 유기(鍮器), 철물(鐵物), 토기(土器), 지물(紙物), 연초(煙草), 어염(魚鹽), 과물(果物), 우독(牛犢), 석자(席子), 계돈(鷄豚)
- 대구는 영남 내륙지방의 중앙에 위치한 낙동강 유역의 핵심도시로서 서울과 부산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에 있는 도시이다.
옛날에는 평양•강경과 더불어 한국 3대 시장의 하나였다.

<전거:신증동국여지승람, 대구읍지>
 
동래 
 
부산광역시 동래 지역의 옛 지명이다. 조선시대에는 일본과의 관계로 이곳이 군사적으로 중시되었던 곳이다.
이곳에는경상도의좌수영(左水營)이있어부산포(釜山浦)•다대포(多大浦) •서생포(西生浦) •개운포(開雲浦) •두모포(豆毛浦) •서평포(西平浦) •걸이포(乞伊浦) 등의 속진(屬鎭)을 직접 관할하였으며, 65척의 각종 전함(戰艦)이 있었다.
육군은 효종 때 동래진(東萊鎭)•독진(獨鎭)을 설치하여 도호부사(都護府使)가 겸임하면서 양산(梁山) •기장(機張)을 관할하였다. 당시에는 부산포 부근에 왜관(倭館)이 설치되었으며 부산창(釜山倉)을 설치하여 동래•울산•기장의 세곡(稅穀)을 거두어 왜국과 거래하는 데 사용하도록 하였다. 동래 온천장은 신라 때부터 이용하였고, 조선 숙종 이후 숙박 시설을 설치하였다. 
 
동래(동래장) 
 
부산과 경남 양산군의 일부 지역을 차지하던 행정구역. 경남 남동단에 위치하여 삼국시대 이전부터 소국을 이루어 장산국(山國) 또는 내산국(萊山國)이라 하다가 신라가 점령하여 거칠산군(居漆山郡)으로 개칭하고, 삼국통일 후에 비로소 동래군이라는 명칭이 생겼다.
고려시대에는 1018년(현종 9) 울주(蔚州:蔚山)에 예속시켜 뒤에 현령(縣令)을 두었다가 조선 개국과 더불어 진(鎭)을 두어 병마사가 현판사(縣判事)를 겸하게 하였다. 세종 때는 절제사(節制使)가 다스리다가 명종 때는 현령을 폐지하고 부(府)를 두어 부사(府使)가 다스렸다.
1910년 국권침탈 후 부산부에 딸리고, 1914년 부산부에 속하지 않게 된 구역과 기장군(機張郡) 일원을 병합하여 동래읍 및 남 •동 •서 •북 •구포(龜浦) •사상(沙上) •사하(沙下) •기장 •일광(日光) •장안(長安) •정관(鼎冠) •철마(鐵馬) 등 면으로 동래군을 이루고 군수를 두었다.
1936년 서면과 사하면의 암남리(巖南里)가 부산부에, 1942년 동래읍 및 남면 •사하면과 북면의 장전리(長箭里) •반곡리(盤谷里), 8 •15광복 후에는 사상면 •구포면 등이 부산에 편입되었다. 1973년 나머지 구역이 모두 양산군에 편입됨으로써 동래군의 행정구역명칭은 소멸되었는데, 부산에 편입된 대부분은 동래구에 속한다. 동래군(부)은 조선시대를 통하여 대일외교 사무를 총관하던 중요 관문이었고, 군사상으로도 경상 좌수영(左水營) •독진(獨鎭)을 둔 요충지였다.
- 부내장(府內場)[2일, 7일] : 미(米), 두(豆), 맥(麥), 면포(綿布), 마포(麻布), 유기(鍮器), 부정(釜鼎), 자기(磁器), 지물(紙物), 목물(木物), 죽물(竹物), 연초(煙草), 어염(魚鹽), 우독(牛犢), 석자(席子)

<전거:신증동국여지승람, 증보문헌비고, 부산시지(1974)동래부읍지(1899)> 
 
마산 
 
동쪽은 진해만 안쪽의 마산만을 경계로 하여 창원•진해, 서쪽은 함안•고성, 남쪽은 남해, 북쪽은 함안과 접하고 있다. 무학산(761m) 등 산들은 주로 남북의 외곽 지역을 둘러싸고 있어 함안군 및 고성군과의 경계를 이룬다. 이들 산지의 산기슭이나 구릉지역에 취락이나 경지지역이 발달해 있다. 마산만 및 진해만이 내륙 쪽으로 깊이 들어와 있는데, 이들 만의 연안지역이 평지부를 형성하고 있다.
마산만은 자연적인 양항의 조건을 고루 갖추어 일찍부터 군사요새지로 이용되었다. 고려시대에는 몽고군이 일본 원정을 위한 기지로 사용하였다. 조선 말기에는 러시아의 남진기지로 활용하기 위한 조차지로 지정된 적도 있다.
기후는 남해 난류의 영향을 받는 난대성기후로 연평균기온 14℃, 1월 평균기온 1.2℃, 8월 평균기온 26.4℃이며, 연강수량은 1,468.8㎜이다.
1601년에 창원대도호부(昌原大都護府)로 승격되었고, 1663년 대동법이 시행됨에 따라 낙동강 하류 유역 13군의 조공미를 서울로 조운하는 격납고인 조창(지금의 남성동 제일은행 지점 자리)이 설치되었다. 그리하여 이 일대에 중성리•동성리•오산리•서성리•성산리•성호리 등 6개 마을이 형성되면서 오늘날 마산의 기반이 이루어졌다. 한편 조창 설치 이후 공관과 민가가 번성하면서 '산호포'(山湖浦 : 일명 •牛山津•이라 불림)라 불리었다.
상업활동으로 5일장이 서며, 진동면의 진동장이 4•9일, 진북면 지산장이 1•6일, 진전면 오서장이 3•8일에 열린다. 주요 거래품목은 미더덕•장어 등의 생선류와 조개류 등이다.

<전거 :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상남도지(1980)>
 
문경(문경세재) 
 
신라 진흥왕 때 상주의 호측현에 속했다가 757년(경덕왕 16) 호계현으로 개칭하면서 고령군에 속하였다. 983년(성종 2)에는 상주목에, 1413년(태종 13)에는 문경현에 병합되었다. 1895년(고종 32)에는 현감제를 폐지하고 군수제를 실시하였다. 1896년 23부 체제가 다시 13도로 개편되고 문경군이라고 하였다.
1906년 예천군의 동로면과 화장면이 문경군에 편입되었고, 상주군의 산서•산남•산동•산북•영순면이 편입되었다. 1914년 용궁군의 서면, 함창읍의 동면 일부를 편입하였고, 1933년 신북면이 문경면에 통합되었다. 1956년 7월 8일 호서남면이 점촌읍으로 승격하고, 1963년 1월 농암면 삼송리가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으로 편입되었다. 1973년 7월에는 문경면이 읍으로 승격하고, 가은면과 상주군 이안면 저음리를 합쳐 가은읍이 되었다. 1986년 1월 점촌읍과 문경군 호계면 오암리 일부가 합쳐져 점촌시로 승격, 분리되었고, 1989년에는 상주군 함창읍 윤직리 일부를 편입하였다.
1995년 1월 점촌시와 문경군이 합쳐 도농복합형의 통합시가 되었다. 1996년 산북면 거산출장소, 동로면 수평출장소를 폐지하였다. 2001년 현재 점촌•중앙•신흥•신평•모전의 5개 동과 문경•가은의 2개 읍 및 영순•산양•호계•산북•동로•마성•농암의 7개 면의 행정구역을 이룬다.
- 읍내하장(邑內下場)[2일, 7일] : 미(米), 두(豆), 맥(麥), 면포(綿布), 마포(麻布), 토기(土器), 자기(磁器), 연초(煙草), 어염(魚鹽), 과물(果物), 우독(牛犢), 지마(脂麻), 수소(水蘇)
- 농경지는 금천•조령천•영강 유역 등의 충적지에 주로 발달하였다.
농산물은 쌀•보리•잎담배•누에고치 외에 무•배추•사과 등을 생산한다.

<전거:신증동국여지승람, 문경군지(1965), 경북향토자료집(1972)>
 
밀양(밀양장) 
 
경남 북동부, 부산과 대구의 중간에 위치하여 1895년 이래 1994년까지 존속하여온 행정구역. 면적 764.19km2. 삼국시대에 추화군(推火郡), 통일신라시대에 밀성군(密城郡), 고려시대에 들어 밀주(密州) •밀성군으로 이어져 오다가 1390년(공양 2) 밀양부가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부(府) •도호부 •현 등이 설치되다가 1985년 5월 밀양군이 되어 일제강점기와 광복 뒤에도 그대로 내려왔으며, 1989년 1월에는 밀양읍이 시로 승격되어 밀양군에서 분리되었다. 1995년 1월 기존 밀양시와 합쳐 새로운 통합시로 개편되었다. 통합 당시의 인구는 8만 6000명을 헤아렸다.
- 읍내장(邑內場)[2일, 7일] : 미(米), 두(豆), 맥(麥), 면포(綿布), 면화(綿花), 마포(麻布), 저포(苧布), 토기(土器), 자기(磁器), 연초(煙草), 어염(魚鹽), 우독(牛犢), 석자(席子), 지마(脂麻), 수소(水蘇)
- 특용작물 등의 재배가 활발하여 딸기•고추•참깨•무•배추 등의 생산이 많다. 산지가 많아 대추•단감•사과•복숭아•포도•밤•버섯 등의 재배가 성하고 한우•돼지•오리•산양 등의 사육도 성하다.

<전거:신증동국여지승람, 밀양군읍지(1899),경상남도지(1977)>
 
부산포 
 
조선 세종 때 좌도수군도안무처치사 본영(左道水軍都按撫處置使本營)을 부산포에 두었다. 수군절도사영(水軍節度使營)으로 이름이 바뀐 것과 울산의 개운포(開雲浦)로 영을 옮긴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부산포로 다시 옮긴 것은 1635년(인조 13)이었다. 그 뒤 1652년(효종 3)에 영을 다시 개운포로 옮겼다. 부산포는 왜국(倭國)과 가까워 일찍부터 군사시설을 강화하였는데, 이곳에는 부산진(釜山鎭)이 함께 있었다. 부산포진은 군사체제상 동래도호부사의 지휘를 받았으며 부산포진 첨사(僉使)가 다스리는 부산진성은 주위가 5,356척이고 높이가 13척이나 되었다. 현재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에 있는 정공단(鄭公壇) 터가 성의 남문이 된다. 성 안에는 130여 명의 상주군(常駐軍)이 있었고 6척의 군선(軍船)이 있었다.
부산참(釜山站)은 위급 사항을 알리는 군사시설이었으며 부산창(釜山倉)에는 왜관(倭館)의 비용을 쓰기 위하여 동래▪울산▪기장(機張)에서 수납한 세미(稅米)를 보관하였다. 부산포진 안에 있는 염전(鹽田)은 영내의 비용을 충당하는 데 이용하였다. 세종 때 허가한 왜관은 부산진의 성 밖에 울타리를 치고 살도록 하였는데, 그 수가 늘어 중종 때 300여 명에 달하였다.

<전거 :여지도서, 대동지지, 지방행정지명사(1982)>
 
상주 
 
경상도 서북부에 위치해 있다. 동쪽은 예천•의성, 서쪽은 충청도 옥천과 보은, 남쪽은 선산, 북쪽은 문경와 접해 있다. 남서북은 고지대로 큰 산들이 솟아 경계를 이루며, 산간분지에 전답이 분포되어 있다. 또한 동쪽은 저지대로 낙동강이 남류하면서 평야를 이룬다. 동쪽에는 낙동강이 흐르는 지역으로, 위천(渭川) •이안천(利安川) •석천(石川) •동천(銅川) •북천(北川) •남천(南川) 등의 하천 유역에 넓은 평야가 형성되어 있다. 특히, 함창평야와 상주평야는 예로부터 곡창지대로 이름이 나 있다. 또한, 청리•공검•낙동•공성 등에 넓은 들이 펼쳐져 있으며, 그 밖의 지역은 대부분 산간지대로 계곡을 따라 평야가 좁게 형성되어 있다. 이안천은 하류인 이안면과 함창읍에 넓은 충적평야인 함창평야를, 남천은 공성들•외남들과 상주평야를 형성한다. 남부의 내륙산간분지에 위치해 대륙성기후가 뚜렷하게 나타나며, 연평균기온 10.9℃, 1월 평균기온 -3.4℃, 8월 평균기온 26.4℃이고, 연강수량은 1,475㎜이다.
조선시대의 상주는 화령현•중모현•산양현•단밀현 등을 속읍으로 거느린, 도 이름에 그 이름이 차용될 정도로 큰 영남의 읍이었다. 게다가, 물산이 풍부하고 농경지가 넓으며, 많은 문과 급제자를 배출한 학문의 중심지이기도 하였다.
상주는 산간분지로서 곡창지대로 손꼽히는 지역으로, 밭농사보다는 논농사가 활발하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콩 등이다. 그 밖에 특용작물로 잎담배를 재배한다. 함창읍 증촌리는 신라시대부터 명주산지로 유명하다. 명주는 함창읍과 이안면 일대에서 많이 생산되며, 품질이 우수해 고급 한복지로 쓰이고 있다.
상주는 예로부터 '삼백(三白)'의 고장이라고 불릴 만큼 쌀•누에고치•곶감의 산지로 유명하였다. 오랫동안 이것들이 상주를 대표해 왔으며, 그 명성 그대로 상주쌀은 전국 최고급으로 인정받고 있다. 삼백곶감 역시 당분함량이 높고 육질이 쫄깃거려 전국 각지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상주참기름은 순수 토종참깨로 짜 고소한 맛이 오래 간다.
장날은 낙동장은 5•10일, 청리장은 4•9일, 공성장은 1•6일 등 각각 다르나 모두 5일장이다. 화령장•함창장•화북장•용화장•은척장에서는 고추가 많이 거래된다. 특히, 함창장에서 거래되는 재래식 비단은 이 지방의 특산물이다. 
 
안동(안동장) 
 
지금의 안동 지역에 있던 부족국가 창녕국(昌寧國)을 비롯한 구령국(驅令國)•소라국(召羅國) 등은 초기 신라의 속국으로 되어 있다가, 그 후 신라의 고타야군(古陀耶郡)으로 고쳐졌다.
757년(경덕왕 16)에 고창군(古昌郡)으로 고쳐졌고, 930년(태조 13)에는 안동부(安東府)로 개칭 승격되었다. 시대에 따라 지명이 바뀌고 승격과 강등을 거듭하다가, 1895년(고종 32)에 23관찰부제에 따라 경상도 동북부 17개 군을 관할하는 관찰부(觀察府)가 설치되었으며, 이듬해에 13도제(道制)에 따라 경상북도의 안동군(郡)으로 개편되었다.
1914년에 예안군을 병합하여 19개 면으로 편성되었으나, 1931년에 안동면이 읍으로 승격됨과 동시에 일부 면의 통폐합으로 1읍 15면이 되었다. 1963년에 안동읍이 시(市)로 승격 분리되었고, 1973년에는 풍산면이 읍으로 승격되었으며, 1974년에는 안동댐 건설로 월곡면이 폐지되었으며, 1983년에 안동군의 일부지역이 안동시로 편입되었다. 1995년 1월 안동시와 안동군이 다시 합쳐 도농복합형(都農複合型)의 통합시가 되었다. 1997년 7월 중구동과 동남동을 중구동, 명륜동과 안막동이 명륜동, 옥률동과 신흥동이 동구동, 대흥동•대신동•당북동을 서구동으로 통합하였다.
1998년 12월 중구동과 동구동이 중구동, 용성동과 송천동이 용성동, 서구동과 강남동이 서구동으로 통합되었다.2001년 현재 풍산읍 및 와룡•북후•서후•풍천•일직•낙후•남신•임하•길안•임동•예안•도산•녹전면, 중구•명륜•용성•태화•법상•평화•안기•옥•송하•서구동의 1읍 13면 10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 부내장(府內場)[2일, 7일] : 미(米), 두(豆), 맥(麥), 면포(綿布), 면화(綿花), 마포(麻布), 저포(苧布), 유기(鍮器), 철물(鐵物), 지물(紙物), 연초(煙草), 어염(魚鹽), 과물(果物), 우독(牛犢), 계돈(鷄豚), 지마(脂麻), 수소(水蘇)
- 쌀은 낙동강과 반변천 주변에서 많이 생산하며, 그 외 지역에는 참깨•고추•담배•마와 같은 밭작물을 많이 기른다.
특히 마는 전국의 70%를 생산하며, 마를 잘게 찢어 찐 다음 베틀에서 실을 짜 만든 삼베는 발이 고와 예로부터 임금에게 올렸던 진상품이었다. 안동포는 여름옷과 수의용으로 비싸게 팔린다. 안동소주도 안동포만큼 유명한데, 이 술은 맛이 은은해 찾는 사람들이 많다. 안동간고등어 역시 독특한 맛으로 지역 특산물로 자리잡았다. 임산물로는 밤•버섯•도토리•약초 등이 생산된다. 축산은 한우의 사육이 성하며, 특히 풍산면과 서후면에서 이루어진다. 
 
양산 
 
경상도 동남부에 위치하고 있다. 동쪽과 남쪽은 동래, 서쪽은 밀양와 김해, 북쪽은 울주와 접하고 있다. 지형상 특징은 태백산맥의 여맥이 남쪽으로 뻗어 내리면서 고봉준령이 상당한 범위에 걸쳐 있다. 이들 산지부의 곡저부에는 곳곳에 분지형 저평지및 하천유역의 침식평야 지구가 전개되고 있다. 북서부에서 남쪽으로 낙동강이 남류하며 이들 산지부에서 흘러 내리는 당곡천•염포천•원동천•상림천•양산천 등을 이루면서 모두 낙동강에 합류되고 있다. 한편 북동부에는 회야강이 대운 및 원효산지에서 발원해 북류해 울산만쪽으로 흘러가며, 또한 원효산지 및 철마산지간을 수영강이 발원해 남류하다가 부산의 수영만으로 흘러든다.
기후는 남해안에 근접함으로 난대성의 남해안 기후에 속하나 내륙의 산간지구는 한서의 차가 큰 편이다. 연평균기온은 13~14℃내외이며, 1월 평균기온 -0.1℃, 8월 평균기온 25~26℃내외, 연강수량은 1,264.2㎜이다. 식생은 온대의 특성을 보여 편백•오동나무 등이 자라고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세종 때의 호구수는 양산군이 425호 937명, 동평현이 108호 342명, 기장현이 174호 397명이었다. 1592년(선조 2)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1599년에 끝이 났으나, 이로 인해 군이 황폐해져 동래부에 폐합되었다가 1603년에 복구되었으며, 기장현 역시 1599년 동래부에 폐합되었다가 1617년(광해군 9) 현을 복구하였다. 1771년(영조 47) 양산군의 호구수는 2,079호 1만 2178명이었고 1759년 기장현의 호구수는 2,687호 1만 630명이었다.
주요 작물로는 주곡인 쌀을 비롯해 보리․콩․잡곡 등이 재배되며 참깨․들깨․피마자 등의 특용작물이 경작되고 있다. 상업활동은 여러 개의 정기시장이 있었으나 현재는 웅상읍 서창장과 상북면 석계장이 4•9일에, 웅상읍 덕계장과 하북면 신평장이 3•8일에, 물금읍 물금장이 5•10일에 열리는데 주요 거래품목은 어류인 갈치•고등어•게와 밤•감 등이 거래된다. 
 
영산(영산장) 
 
경남 창녕군에 병합된 조선 후기의 행정구역. 삼국통일 이전, 신라에서 서화현(西火縣)이라 하다가 757년(경덕왕 16) 상약현(尙藥縣)으로 고쳤다. 고려시대에 들어 이곳을 흐르는 영산천(靈山川, 또는 郡泉川)을 따서 영산현으로 고쳐 감무(監務)를 두었으며, 조선 태종 때(1413년) 현감을 두었다. 1631년(인조 9) 창녕현을 병합하였다가 다시 분리하고 1895년 영산군으로 승격하였으나, 1913년 창녕군에 병합되어 그 일부 지역은 영산면으로 남아 있다. 영산 신씨(辛氏) •문씨(文氏)의 관향으로 알려져 있다.
- 읍내장(邑內場)[5일, 10일] : 미(米), 두(豆), 맥(麥), 면포(綿布), 마포(麻布), 우독(牛犢), 지마(脂麻), 수소(水蘇)
- 북쪽으로 계성면(桂成面), 서쪽으로 남지읍, 동남쪽으로 도천면(都泉面)과 각각 접한다. 9개리로 이루어져 있다.
남서쪽과 북서쪽에 이웃 면에 연속되는 평지가 열리고, 동부에 영취산(靈鷲山:681.5m)•함박산•종암산(宗岩山) 등의 높은 산지가 있으며 서부에는 100m 이하의 구릉군이 산재한다. 종암산에서 발원한 도천천(都泉川)이 남서류하면서 하곡과 유역평야를 발달시키고 남서부에는 장척호(丈尺湖)가 있어 주변의 농지를 관개한다. 특산물로 양파•시설원예•단감•송이버섯 등이 생산된다. 면의 서부를 구마고속도로가 달리고, 여러 지방도를 연결하는 교통의 분기점이 되고 있다. 신라 때 비사벌(比斯伐)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보물을 비롯하여 유형•무형의 문화재가 많이 남아 있다.

<전거:신증동국여지승람, 증보문헌비고, 대동지지>
 
영천(영천장) 
 
삼한시대에 이미 골벌국이라는 부족국가가 형성되어 있었다. 236년 신라에 항복하여 영천과 신령지방은 각기 신라의 절야화군과 사정화군이 되었다. 그 후 임고군 또는 고울부로 고쳐 부르다가 고려시대에는 영주군, 신령현으로 불렀다. 1414년(태종 14)에 영주군이 영천군으로 바뀌었다.
1914년 부•군 폐합시에 신령현이 영천군에 통합되었고, 1933년에는 영천면이 영천읍이 되었고, 1973년에는 금호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1981년 7월 영천읍이 다시 시로 승격되어 군과 분리되었다. 1986년에는 화북면 삼창출장소가 화남면으로 승격되었다.
1995년 1월 영천시와 영천군이 합쳐 도농복합형의 통합시가 되었다. 2001년 현재 행정구역은 금호읍 및 청통•신령•화산•화북•화남•자양•임고•고경•북안•대창의 10개 면과 동부•중앙•서부•완산•남부의 5개 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 읍내장(邑內場)[2일, 8일] : 미(米), 두(豆), 맥(麥), 면포(綿布), 면화(綿花), 유기(鍮器), 부정(釜鼎), 토기(土器), 자기(磁器), 연초(煙草), 어염(魚鹽), 과물(果物), 우독(牛犢), 석자(席子), 계돈(鷄豚)
- 주요 농산물은 쌀•사과•마늘•보리•양파•포도•복숭아•고추•참깨•콩 등이다. 이 밖에 담배와 누에고치의 생산도 많다.

<전거:신증동국여지승람, 영천읍지, 신녕읍지, 여지도서>
 
울산(울산장) 
 
삼한시대 진한의 굴아화촌(掘阿火村)으로 불리다가 삼국시대에는 신라의 중심지를 이루었다. 고려 태조 때 흥례부로 승격되었다가 공화현으로 강등되었다.
1018년(현종 9) 울주로 개칭하여 방어사를 두었다가, 1397년(태조 6)에 진을 두고 병마사가 지주사를 겸임하였다. 1413년에 울산으로 개칭하였고, 1599년(선조 32) 도호부로 승격한 뒤, 1895년(고종 32) 도호부가 군으로 바뀌었다.
1914년 부•군을 정리폐합하는 지방제도 개편시 언양군을 울산군에 병합하였다.1931년 울산면이 읍으로 승격하였고, 1934년 동•면을 읍으로 올려 방어진읍으로 승격했다. 1962년 울산읍이 시로 승격함에 따라 시•군이 분리되었고, 1991년 울주군이 울산군으로 개칭되었다.
1995년 1월 울산시와 울산군이 합쳐 도농복합형 통합시가 되면서, 울산군 전역이 울주군으로 개칭되었다.
1997년 7월 15일자로 울산광역시로 승격하였으며, 2001년 현재 중구•남구•북구•동구•울주군의 4구 1군 체제로서 4읍 8면 46개 동의 행정구역을 이룬다.
- 부내장(府內場)[5일, 10일] : 미(米), 두(豆), 맥(麥), 면포(綿布), 마포(麻布), 저포(苧布), 철물(鐵物), 토기(土器), 목물(木物), 연초(煙草), 어염(魚鹽), 수소(水蘇)
- 농가 인구가 적고 경지율도 낮지만 근교에서는 기계화가 잘 이루어져 쌀•보리•콩 등의 곡물뿐만 아니라 근교농업도 발달해 고추•무•배추•파•참깨•감•대추 등의 재배가 성하고, 한우•돼지•젖소•닭•사슴 등의 사육도 성하다. 전국적으로 알려진 배는 공업화로 인한 재배면적의 축소와 공해로 인해 명맥만을 겨우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동해안에서는 극소수의 주민들이 영세적인 연안어업에 종사하여 어류와 연체동물을 어획하고 있으나 생산량은 많지 않다.

<전거:신증동국여시승람, 울산울주지(1971)>
 
진주(진주장) 
 
조선시대 1392년(태조 1)에 한때 진양대도호부(晉陽大都護府)가 되기도 하였으나 1402년(태종 2)에 진주목으로 환원되어 서부 경남 일대를 관할하였다. 임진왜란 때 진주성싸움 등으로 진주가 정치•경제•행정•군사 요지임이 확인됨에 따라 1603년(선조 36)에 경상우도병마절도사영이 창원에서 진주로 옮아왔다. 당시에는 진주를 진강(晉江)•청주(菁州)•진산(晉山)이라고도 하였다.
1895년 23부제 실시에 따라 진주부(晉州府) 진주군이 되었고, 1896년 13도제 실시로 경상남도 진주군이 되어 도청소재지로서 관찰사가 상주하였다. 1910년에 진주군 진주면(晋州面)이 되었다가 1925년에 도청소재지가 부산으로 이전하였다.
1931년 진주면이 읍(邑)으로 승격한 데 이어 1938년에는 진주군 도동면(道洞面)과 평거면(平居面)의 5개리, 내동면(奈洞面)의 1개리가 편입되었다. 1939년 도동면•거평면을 편입하여 진주읍이 진주부가 되고 나머지 지역은 진양군으로 개칭되었다. 1949년에 진주부가 진주시로 개칭되었으며, 1973년에는 진양군 정촌면(井村面) 가좌리(加佐里)와 호탄리(虎灘里), 내동면의 귀곡리(貴谷里)를 이관받았다.
1995년 1월 지방자치선거를 앞두고 실시된 전국행정구역개편으로 진주시와 진양군이 합쳐져 도농 복합형 통합시가 되었다. 1997년 7월 구(舊)진주시의 행정동 통폐합과 경계지역 조정으로 26개 동에서 21개 동으로 되었다.
2001년 현재 문산읍 및 망경•강남•칠암•성지•중앙•봉안•상봉동•상봉서•봉수•옥봉•상대1•상대2•하대1•하대2•상평•초장•평거•신안•이현•판문•가호의 21개 동과 내동•정촌•금곡•진성•일반성•이반성•사봉•지수•대곡•금산•집현•미천•명석•대평•수곡의 15개 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 주내장(州內場)[2일, 7일] : 미(米), 두(豆), 맥(麥), 면포(綿布), 면화(綿花), 마포(麻布), 저포(苧布), 명주(明紬), 유기(鍮器), 철물(鐵物), 토기(土器), 자기(磁器), 지물(紙物), 목물(木物), 연초(煙草), 어염(魚鹽), 과물(果物), 우독(牛犢), 석자(席子), 지마(脂麻), 수소(水蘇)
- 농업특산품으로는 전국 최고 품질의 진주배와 단감을 비롯해 오이•딸기•고추•수박•피망•파프리카•호박 등 원예작물을 생산하여 일본과 동남아시아 등지로 수출하고 있다. 연간 농산물수출액은 501만 달러에 달한다. 주요 공산품은 실크•농기계부품 그리고 은장도 등의 공예품이다
 
풍기(풍기장) 
 
`-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지방의 조선시대 행정구역. 신라 때에는 기목진(基木鎭)이라 하다가 고려 초에 기주현(基州縣)으로 고치고, 1018년(현종 9) 길주(吉州:安東)에 딸리게 하였으며, 1390년(공양왕 2) 은풍현(殷豊縣)을 병합하였다. 1413년(태종 13) 기천현(基川縣)으로 고쳤다가 곧이어 풍기군으로 개칭, 승격하였으나 1913년 영주군에 통합되었으며, 80년 영주읍이 시로 승격됨에 따라 영풍군에 속하였다가, 95년 개편에 따라 영주시에 속하게 되었다.
- 하성리장(下城里場)[?] : 미(米), 두(豆), 맥(麥), 면포(綿布), 면화(綿花), 마포(麻布), 명주(明紬), 지물(紙物), 어염(魚鹽), 우독(牛犢), 석자(席子)
- 동쪽은 순흥면(順興面), 서쪽은 소백산맥을 경계로 충청북도 단양군 대강면(大崗面), 남쪽은 안정면(安定面)•봉현면(鳳峴面), 북쪽은 소백산맥을 경계로 충북 단양군과 접한다. 북쪽은 비로봉(毘盧峰:1,440m)•국망봉(國望峰:1,420m), 북서쪽은 연화봉(蓮花峰:1,394m)•도솔봉(兜率峰:1,314m) 등 소백산맥의 고산 준령으로 둘러싸이고 기호지방(畿湖地方)과의 교통은 죽령(竹嶺)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죽령의 영하취락(嶺下聚落)으로 발전하여 1973년에 읍으로 승격되었으며, 동쪽과 남쪽에 300∼400m 내외의 저산성 산지가 발달했고 읍 전체가 분지내(盆地內)에 있다.
기후는 연교차가 심한 대륙성기후이며, 겨울에는 북서풍이 탁월하고 바람이 많이 분다. 소백산맥의 바람그늘에 해당되기 때문에 연평균강수량은 900mm 내외의 과우지대를 이룬다. 산지와 구릉지가 많아 평야의 발달은 미약하나 계단상태의 경지와 범람원(氾濫原)상에는 과수의 재배가 성하다. 평지에서는 예로부터 인삼 재배가 유명한데, 특히 논 인삼은 타지역에 비해 특이하다. 사과의 생산이 많고 인견사(人絹絲)의 직조 공업도 발달하여 지역 경제상 중요한 지위를 차지한다. 
 

 

강원도


강릉 
 
영동지방의 중앙에 위치해 있다. 동쪽은 동해, 서쪽은 홍천•평창, 남쪽은 삼척•정선, 북쪽은 양양과 접하고 있다. 남북으로 달리는 태백산맥의 동쪽에 지맥이 급한 경사를 이루면서, 낮은 구릉과 좁은 평야를 이루고 있다. 동대산에서 발원한 연곡천(連谷川)이 동류하면서 동해로 흘러들고, 철갑령 부근에서 발원하는 신리천도 동류하면서 하류 부근에 기름진 평야를 형성하고 있다. 사천면 사기막리의 무릉담과 그 북서쪽에서 발원한 사천천이 주변에 기름진 충적평야를 이루면서 동해로 흘러 들어간다. 남대천과 섬석천의 하류에는 비교적 넓은 충적평야가 형성되어 있다. 기후는 1월 평균기온 -4.0℃, 8월 평균기온 24.6℃, 연평균기온 12.5℃이고, 연강수량은 1,375.9㎜이다. 비슷한 위도상의 서해안의 다른 지역과 비교하면 연평균기온이 일반적으로 높으며, 연강수량도 많은 편이다. 이 지방은 해풍의 영향을 일부 받기도 하지만, 태백산맥을 넘어 불어오는 하강풍인 서풍계 바람의 영향을 주로 받고 있는데, 특히 겨울과 봄에 부는 서풍계의 강풍(이른바 襄․江之風)은 교통뿐만 아니라 기타 주민생활에 큰 불편을 주고 있다.
강릉은 영동지방의 정치•경제•문화•교육의 중심지였다. 남대천을 비롯하여 연곡천•주수천•사천천 등과 그 지류들에 의해 이루어진 기름진 평야지대가 비교적 넓게 분포하고 기온이 온난하며 강수량이 많아 농업이 활발하다. 주요 농산물은 쌀•옥수수•메밀•수수•콩•팥 등이다. 이 곳의 곶감은 감도가 높고 비교적 보관이 쉬운 품종이어서 진상품으로 손꼽혔다. 주요 임산물은 밤•대추•버섯•산나물 등이다. 근해에 한류와 난류가 교차하여 어족이 풍부하다. 주요 수산물은 명태•오징어•꽁치•전복•우렁쉥이•돌김•미역 등이다.
상업활동은 예로부터 이루어져 1770년대 시내에는 강릉부내장이 2•7일에, 연곡장이 3•8일에, 우계장이 4•9일에 개설되어 거래가 이루어졌고, 이는 1830년대까지 이어졌다.

<전거:신증동국여지승람, 택리지,임영지(1975),임영문화대관(1982)>
 
강릉(강릉장) 
 
본래 예국(濊國)의 도읍지로 알려졌으며 313년 고구려 때는 하서랑(河西良) 또는 아슬라(阿瑟羅)라고 하였다. 진흥왕 때 신라의 영토가 된 이후 북빈경(北濱京), 하서주(河西州), 명주(溟州) 등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고려 태조는 동원경(東原京)으로 칭하고 다시 940년 명주, 983년 하서부(河西府), 986년 명주도독부, 992년 명주목, 1260년 경흥도호부(慶興都護府), 1389년 강릉대도호부(江陵大都護府) 등으로 명칭과 품계가 바뀌었다.
강릉대도호부라는 명칭을 조선 초에 그대로 사용하였는데 그 후 1666년 강릉현, 1775년 대도호부로 승격, 1789년에는 강릉부가 되었다. 1895년(고종 32) 13도제 실시로 1896년 강릉군이 되어 21개 면을 관할하였다.
1906년 임계면(臨溪面)•도암면(道岩面)을 정선군에, 진부면(珍富面)•봉평면(逢坪面)•대화면(大和面)을 평창군에, 내면(內面)을 인제군에 이관하여 관할면이 축소되었다. 1931년 강릉면이 읍으로, 1940년 주문진면이 읍으로 승격된 후 1955년 강릉읍과 성덕면(城德面)•경포면(鏡浦面)을 통합하여 강릉시로, 나머지 면을 명주군으로 개칭하였다.
1995년 1월 강릉시와 명주군이 합쳐 도농복합형(都農複合型)의 통합시가 되었다. 1998년 중앙동과 임당동을 합해 중앙동으로, 두산•유천•운정•저동이 통합되어 경포동으로, 노암•장현•월호평동이 통합되어 강남동으로, 입암•두산동이 통합되어 성덕동이 설치되었다.
2001년 현재 주문진읍과 성산(城山)•왕산(旺山)•구정(邱井)•강동(江東)•옥계(玉溪)•사천(沙川)•연곡(連谷)면, 홍제•중앙•옥천•교1~2•포남1~2•초당•송정•내곡•강남•성덕•경포동의 1읍 7면 13동으로 구성되었다.
- 부내장(府內場)[2일, 7일] : 미(米), 면포(綿布), 면화(綿花), 마포(麻布), 명주(明紬), 어염(魚鹽), 우독(牛犢)
- 강릉시는 남대천과 그 지류들에 의하여 이루어진 평야지대가 비교적 넓게 분포하며 기온이 온화하고 강수량이 많아 농업이 활발하다. 특히 논의 이모작이 가능하여 농업의 생산성이 높은 편이다.
 
고성(고성장) 
 
삼국시대에는 고구려의 영토로서 일부 지역은 달홀(達忽)로, 지금의 고성군에 해당하는 대부분의 지역은 수성군으로 불리었다.
이 중 달홀은 568년(신라 진흥왕 29) 주(州)로 승격되어 군주(軍主)를 두었다가 경덕왕 때 고성군으로 개칭되었으며, 고려시대에 현(縣)으로 강등되었다가 조선 세종 때 다시 군으로 승격되었다. 한편 수성군은 고려시대에 간성현이 되어 고성현까지 관할하다가 1389년 (공양왕 1)에 다시 분리되었으며, 조선 세종 때 역시 군으로 승격되었다.
이후 고성군과 간성군은 1629년(인조 7)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638년(인조 16) 다시 군으로 승격되었으며, 1895년(고종 32) 강릉부의 관할이 되었다가 다음해 고성군과 간성군으로 복귀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에 따라 고성군은 간성군에 통합되었다. 1919년 간성군을 폐지하면서 토성(土城)과 죽왕(竹旺)의 2개 면을 양양군에 넘겨주고 고성군으로 개칭되었다.
8•15광복 당시 고성읍•장전읍•거진면•수동면•외금강면•서면•현내면•간성면 등 2읍 6면이었으나, 북한에 속해 있다가 1954년 일부만 수복되어 간성•거진•현내•수동면 일부만으로 고성군을 구성하였다.
1963년 1월 1일 양양군에 편입되었던 토성•죽왕면을 다시 복귀시키고, 1973년 거진면, 1979년 간성면이 각각 읍으로 승격되었다.
2001년 현재 거진읍•간성읍과 현내면(縣內面)•죽왕면•토성면•수동면 등 2읍 4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 군내장(郡內場)[3일, 8일] : 면포(綿布), 마포(麻布), 어염(魚鹽)
- 앞바다에서는 명태•오징어•꽁치•미역 등이 많이 난다.

<전거: 신증동국여지승람, 대동지지, 강원도지(1959), 고성군지(1986)>
 
금화(금화장) 
 
고구려 때는 부여군이라 하였고, 통일신라시대에는 부평군이라 하였다. 1018년(고려 현종 9) 김화군이 되어 동주(東州)에 속하였다. 1413년(조선 태종 13) 김화현(金化縣)이 되었다가 조선 후기에 군이 되었고, 1914년 금성군을 합쳐 지금의 영역으로 확정되었다.
금성군은 고구려 때 단성군(丹城郡) 또는 야차홀(也次忽)이라 하였고, 통일신라시대에 익성군(益城郡)이라 개칭하였다가 다시 금성으로 고쳤다. 고려 현종 때 현(縣)으로 강등되어 교주(交州)에 소속시켰으며, 예종(睿宗) 때 비로소 감무(監務)를 두었다. 그후 고종 때 도령(道寧)이라 개칭하였다. 조선시대에 다시 금성으로 복구되었다가 1914년 김화군에 통합되었다.
8•15광복 전의 관할구역은 김화읍과 서(西)•근동(近東)•근북•근남•금성•원남(遠南)•원동•원북•통구(通口)•창도(昌道)•임남(任南)의 11개면이었다. 1952년 12월 북한의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김화군을 없애고 창도군에 흡수•통합시켰다. 1954년 다시 창도군에서 창도읍과 19개리를 분리시켜 김화군을 신설하였는데, 이때 창도읍은 창도리가 되었고, 금성리는 김화읍이 되었다. 현재 행정구역은 김화읍과 학방노동자구 및 창도•신창•원북•당현•법수•신풍•탑거•성산•건천•초서•구봉•수태•근동•원남•원동•용현(룡현)•상판•어호의 18개리로 되어 있다.
- 현내장(縣內場)[1일, 6일] : 면포(綿布), 마포(麻布), 어염(魚鹽), 우독(牛犢)
- 농경지의 대부분은 밭이고, 주요 농산물로 감자•옥수수•쌀•밀•보리 등이 생산된다. 공예작물로는 들깨와 담배를 많이 재배하는데, 특히 잎담배는 예로부터 금성엽(金城葉)이라 하여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져 왔다. 이밖에 축산업•양잠업•과수업 등도 활발하다.
 
양양(양양장) 
 
양양군은 고구려의 익현현(翼峴縣) 또는 이문현(伊文縣)이었던 것을 신라에서는 익령현(翼嶺縣)이라 하였다. 고려는 현종(顯宗) 때 현령(縣令)을, 1211년(고종 8)에 양주방어사(襄州防禦使)를, 1257년(고종 44)에는 강등시켜 덕령감무(德寧監務)를, 1260년(원종 원년)에 다시 승격 양주지사(襄州知事)를 두었다.
조선시대에는 1397년(태조 6)에 태조의 외향(外鄕)이라는 이유로 부(府)로 승격시켰고, 1413년(태종 13)에 도호부(都護府)가 되었으며, 1416년(태종 16) 양양(襄陽)으로 개명하였다가 1895년(고종 32) 군(郡)으로 고쳤다. 그때 강릉부(江陵府)에 속하였다가 이듬해(건양 원년) 13도제(道制) 실시로 강원도 양양군이 되고, 1919년 간성군(杆城郡)이 폐지됨에 따라 토성면(土城面)과 죽왕면(竹旺面)이 편입되었다.
1939년 속초면(束草面)이 읍으로 승격되고, 1945년 8•15광복과 더불어 국토가 분단되자 현남면(縣南面)•현북면(縣北面) 및 서면(西面)의 일부가 강릉군에 편입되었다. 1954년 11월 수복지구 임시 조치법 시행에 따라 현남면을 명주군(溟州郡)에 남기고, 현북면•서면을 본군에 복귀시켰다. 1963년 1월 속초읍이 시(市)로 승격되어 독립하자, 토성면•죽왕면은 고성군(高城郡)에 이관되고, 현남면이 명주군으로부터 본군에 환원되었다.
1972년 1월 권금성 비룡폭포 피골이 속초시에,1973년에 서면의 명개리(明開里)가 홍천군(洪川郡) 내면(內面)에, 손양면(巽陽面) 상왕도리(上旺道里) 일부가 양양면 월리(月里)에 편입되었다. 1979년 5월 양양면이 읍으로 승격되었으며, 1983년 2월 강현면 상복리 일부가 속초시에 소속되었다. 1989년 1월에는 손양면 가평리와 송현리 일부가 양양읍 송암리로 편입되었다.
2001년 현재 양양읍과 서면•손양면•현북면•현남면•강현면의 1읍 5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 부내장(府內場)[3일, 8일] : 미(米), 면포(綿布), 마포(麻布), 어염(魚鹽), 우독(牛犢), 지물(紙物), 과물(果物)
- 식량작물은 쌀을 가장 많이 생산하며, 그 밖에 감자와 고구마•콩•옥수수 등이 생산된다. 채소류는 전체 면적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낮다. 참깨•들깨 등의 특용작물이나 사과•배•복숭아•감 등을 조금씩 재배한다.
 
영월 
 
동쪽은 태백, 서쪽은 횡성•원주, 남쪽은 충청도 제천•단양 및 경상도 영주•봉화, 북쪽은 평창•정선 등과 접하고 있다. 군의 북동쪽에는 태백산맥이 남북으로, 남동쪽에는 소백산맥이 분기하여 동서로, 북서쪽에는 차령산맥이 남서 방향으로 각각 뻗어 있어 그 산맥의 여파가 군내 각지에 미쳐 산악이 중첩한 산간 지역을 이룬다. 산지 사이를 남한강의 지류인 주천강 평창강이 심한 곡류를 하면서 서면의 신천리 부근에서 합류하여 동류하다가, 영월읍 하송리에서 한강 본류와 합류한다. 한편, 구룡산에서 발원한 옥동천(玉洞川)이 서류하여 하동면 각동리에서 한강 본류인 남한강에 흘러든다. 평지는 주천면 주천리와 영월분지 외에는 별로 없다. 내륙 산간지대에 위치하기 때문에 기온의 일교차가 큰 내륙성 기후를 나타낸다. 연평균기온 10.8。C, 1월 평균기온 -5.7。C, 8월 평균기온 25.5。C이며, 연강수량은 999.7mm이다.
내륙 산간지대이기 때문에 밭이 훨씬 많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옥수수•감자 등이고, 특히 옥수수는 상동읍•중동면•영월읍 및 주천면에서 많이 생산된다. 주요 임산물은 갱목을 비롯하여 밤•대추•잣•도토리•송이•표고버섯 등이다.
상업활동은 예로부터 정기시장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1770년대 군내에는 읍내장과 서면 신천장이 1일, 상동의 녹번장(현 중동면 녹전)이 3일, 연평장(현 북면 연덕리)이 4일에 개설되는 등 4개의 장이 있었다. 1830년대에는 부내장(현 영월읍)이 5•10일, 토교리장(현 남면 토교리)이 1•6일에 각각 개설되었다.

<전거:신증동국여지승람, 향토지(1969), 강원총람(1975)>
 
울진(울진장) 
 
고대에는 파조로 불리다가, 삼한 때 변한에 속하였다. 삼국시대에는 고구려 고우이군(古于伊郡), 신라 우진(于珍) 소속이었고, 통일신라시대에 울진이라 칭하고 군으로 삼았다. 고려시대에는 울진군에 속한 평해를 평해군으로 분리 승격시켰는데, 평해군은 고구려의 근을어(近乙於)로서 그렇게 고쳐 부른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고려 복벽운동으로 인해 울진군이 현으로 되었다가 갑오개혁 때 다시 울진군이 되었다. 읍성을 두고 울진포령이 통치하였으며 수군만호를 두었다. 1896년 강원도 울진군이 되었고, 1914년 평해군이 울진군에 통합되었다.
1953년 평해면에 후포출장소 설치, 1953년 울진면에 죽변출장소를 설치하였다. 1963년 강원도에서 경상북도로 편입되고, 은정면 본신리는 영양군 수비면에 편입되었다. 1967년 북면에 하당출장소가 설치되었다. 1979년 울진면이, 1980년 평해면이 각각 읍으로 승격되었다.
1983년 서면 전곡리 일부가 봉화군 석포면으로 편입되었고, 1986년 울진읍 죽변출장소가 죽변면으로, 평해읍 후포출장소가 후포면으로 각각 승격되었다. 1994년 서면 왕피리 일부가 영양군 수비면 신암리로 편입되었다.
2001년 현재의 행정구역은 울진읍•평해읍과 북면•서면•근남면•원남면•기성면•온정면•죽변면•후포면의 2읍 8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 읍내장(邑內場)[2일, 7일], 흥부장(興富場)[3일, 3회 개시], 매야(梅野)[1일, 3회 개시] – 증보 문헌 비고.
- 주요 작물은 쌀•보리•감자 등이다. 수산업은 청어•정어리 등이 후포•죽변 등에서 성시를 이루었다. 특히 울진대게는 특산물로 유명하다.

<전거: 신증동국여지승람, 울진군읍지, 평해군읍지, 울진군지(1984)>
 
원주 
 
동쪽은 횡성•영월, 서쪽은 경기도 양평•여주, 남쪽은 충청도 충주•제천, 북쪽은 횡성과 접하고 있다. 남동부는 태백산맥에서 갈라진 차령산맥이 남서방향으로 뻗으면서 높고 험준한 산지를 이룬다. 북서부는 비교적 완경사를 이루고 있다. 남쪽에는 차령산맥의 줄기가 충청북도와 도계를 이루면서 서쪽으로 뻗었다. 내륙에 위치한 관계로 기온의 연교차가 크다. 그리고 여름에는 푄의 영향으로 가뭄이 심하다. 1월 평균기온 -5.5℃, 8월 평균기온 24.4℃, 연평균기온 10.5℃ 이다. 그리고 연강수량은 1,287㎜이다.
섬강과 원주천 유역의 넓은 평야를 중심으로 농업이 발달하였다. 다른 지역에 비해 논이 많아 문막평야와 지정평야는 벼농사 중심지를 이룬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옥수수 등이다. 주요 임산물로는 대추•밤•도토리•잣•은행 등 종실류와 표고•송이•느타리 등 버섯류가 있다. 그리고 특산물로는 칠(漆)이 유명하다.
상업활동은 예로부터 이루어져 1770년대에 읍내장이 2•7일, 안창장(安昌場)과 굴파장(窟破場)이 5•10일, 흥원창장(興原倉場)과 주천장(酒泉場)이 3•8일에 개설되었다. 1825년에는 전과 같은 날에 국파장이 귀래장(貴來場)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1830년대에는 읍내장이 2•7일, 흥원창장이 3•8일, 단정장(端亭場)과 주천장이 1•6일에 개설되는 등 4개 장으로 감소되었다. 또한 1912년대에는 읍내장과 문막장이 2•7일, 부론의 흥원장이 3•8일에 개설되는 등 3개 장으로 감소되었다. 1895년 강원감영이 폐지되고 새로 강원도관찰부가 춘천으로 이관되기 전까지는 강릉과 함께 강원도를 대표하는 도시로 상업이 발달하였다. 그러나 춘천이 강원도의 행정중심지가 되면서 침체되었다

<전거:신증동국여지승람, 증보문헌비고, 원주원성향토지,(1976)>
 
정선 
 
동쪽은 삼척시, 서쪽은 평창, 남쪽은 영월, 북쪽은 강릉•평창과 각각 접하고 있다. 태백산맥이 종관하는 영서 산악지대로서 군 전역에 걸쳐 산악이 중첩하고, 남한강(南漢江) 유역 계곡에만 좁고 긴 평지가 있을 뿐이다. 내륙 산간에 위치하므로 대륙성 기후의 특성이 나타난다. 연평균기온 10.3。C, 1월평균기온 -5.7。C, 8월평균기온 24.6。C이며, 연강수량은 1,029.1㎜이다. 해발고도가 높은 산간 지역이 많으므로 고랭지의 분포가 넓다. 따라서 첫 서리가 빠르고 또한 늦게까지 서리가 내리므로 겨울이 길고 식물의 생육 기간이 짧다. 이른 봄에는 태백산맥과 동해의 영향으로 샛바람이 많이 불며 그 피해가 적지 않다.
내륙산간지대이기 때문에 농경지의 규모가 적어 소규모 하곡평야와 하성단구 및 고위평탄면 등에 분포하고 있을 뿐이다. 주요 농산물은 옥수수•콩•메밀•대마•잎담배 등이며 천궁•황기 등의 약초도 재배된다. 임산물은 종실류가 중심인데, 대추가 북면•남면•신동읍•동면, 잣이 남면•동면•정선읍, 도토리가 남면•고한읍•사북읍•북면•북평면, 밤이 정선읍•임계면•동면•북평면•신동읍•북면 등에서 주로 생산된다. 송이•표고 등의 버섯류는 임계면과 동면을 중심으로 생산되고, 산나물은 남면이 중심지이다.
상업활동은 예로부터 정기시장(5일장)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1770년대 군내에는 읍내장이 4•9일, 화암리에 동면장이 1•6일, 별어곡(別於谷)의 남면장이 2•7일에 개설되는 등 3개 시장이 있었으나 1883년대에는 군내장(읍내장) 1개만이 4•9일에 개설되었다.

<전거: 정선군지(1978)>
 
철원(철원장) 
 
고구려의 철원(鐵圓) 또는 모을동비군(毛乙冬非郡)이었는데, 통일신라 경덕왕(景德王) 때 철성군(鐵城郡)으로 고쳤다. 궁예가 태봉국(泰封國)을 세웠을 때 수도였으며, 고려 태조가 송악(松岳:개성)으로 옮기면서 동주(東州)로 고쳤다.
고려시대인 995년(성종 14) 단련사(團練使)를 두었다가 1005년(목종 8) 이를 없앴고, 1018년(현종 9) 동주지사(東州知事)를 두었다. 고종 때 강등되어 현령(縣令)을 두고, 그뒤 승격하여 목(牧)이 되었으며, 1310년(충선왕 2) 철원부(鐵原府)가 되었다.
조선시대인 1413년(태종 13) 도호부(都護府)가 되어 경기도에서 강원도로 이속되었으며, 1895년(고종 32) 철원군으로 고쳤다. 이때 동변(東邊)•갈말(葛末)•서변(西邊)•신서(新西)•송내(松內)•관인(寬仁)•북(北)•어은동(漁隱洞)•묘장(畝長)의 9개 면을 관할하다가 1914년 군면(郡面) 폐합에 따라 경기도 삭녕군의 내문(乃門)•인목(寅目)•마장(馬場)의 3개 면을 병합하고, 동변과 송내를 합하여 동송읍이 되었으며, 1931년에 서변면이 철원읍으로 승격하였다.
1945년 이후 북한에 속해 있다가 1953년 수복되어 1954년 6월부터 민간인이 들어가 살았다. 1962년 11월 21일 김화군의 김화읍과 근북(近北)•서면(西面)•근동(近東)•원동(遠東)•근남(近南)•원남(遠南)•임남(任南) 면의 1읍 7면을 편입 관할하였다. 1979년에 갈말면, 1980년에 동송면이 각각 읍으로 승격하였다.
2000년 현재 철원•김화•갈말•동송 읍과 서면•근남면•근북면의 4개읍 3개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 부내장(府內場)[2일, 7일] : 미(米), 면포(綿布)
- 옛날부터 철원평야 일대는 강원도 제1의 쌀 생산지였으며, 지금도 도 전체 생산량의 5분의 1 정도를 생산한다. 쌀은 동송읍, 콩은 갈말읍•동송읍, 잡곡은 김화읍•갈말읍•근남면이 재배 중심지이다. 채소류는 김화읍•갈말읍에서, 사과는 갈말읍에서 많이 재배한다.
 
춘천 
 
동쪽은 인제•양구, 서쪽은 경기도 양평, 남쪽은 홍천, 북쪽은 화천•양구와 접하고 있다. 태백산맥의 지맥들이 북북동에서 남남서의 방향으로 시의 남동부와 북서부를 지난다. 춘천분지 분지 안쪽으로는 해발고도 약 300m까지 급사면을 이루나, 그 이하에서는 구릉성 산지와 산록완사면이 넓게 발달되어 있다. 하천은 분지를 중심으로 북동쪽에서 소양강, 북서쪽에서 북한강이 흘러 분지 안에서 합류하여 남서류하다가 홍천군과의 경계를 따라 서류하는 홍천강과 합류한다. 북한강과 소양강 사이에 형성된 우두(牛頭)평야와 샘밭[泉田〕 등은 지름진 충적지이다. 기후는 내륙지방에 위치하여 기온의 교차가 심한 대륙성기후를 나타낸다. 지형적인 영향 때문에 강수량은 많은 편이고, 호수로 둘러싸인 지역이어서 안개 끼는 날이 많은 것이 특색이다. 1월 평균기온 -5.2℃, 8월 평균기온 24.4℃, 연평균기온 10.6℃이며, 연강수량은 1,296.4㎜이다.
춘천은 총면적의 90% 이상을 산지가 차지하여 농경지가 적다. 주요 농산물로는 쌀은 신동면•남면•신북읍, 무와 배추는 신북읍•서면•신동면, 고추는 남면•신동면, 복숭아는 신동면에서 많이 난다. 주요 임산물은 목재 외에 버섯류•약초•산채 등이 많이 나며, 종실류로는 밤•대추•잣 등이 있다.
상업활동을 보면, 1940년대까지만 해도 북한강 물길을 이용하여 뗏목으로 땔나무•자기•약초•산나물•농산물 등이 서울로 운송되었고, 서울의 물품이 춘천지역으로 수입되었다. 또한 상품매매의 거간(居間)과 어음거간도 상당수 있었고, 각지에서 보부상이 몰려들어 성시를 이루었다. 정기시장은 1770년대에 읍내장이 2•7일에, 율대리장(栗垈里場 : 현재 율문리)이 1•6일에 개설되었고, 이것이 1830년대까지 계속되었다. 
 
춘천(춘천장) 
 
고대에는 맥국(貊國)의 땅이었다가 신라 때인 637년(선덕여왕 6)에 우수주(牛首州) 또는 우두주(牛頭州)라 하여 군주(軍州)를 두었다. 673년(문무왕 13) 수약주(首若州:일명 烏斤乃 또는 首次若)로 개칭하였으며, 경덕왕 때 삭주(朔州)로 고쳤다가 뒤에 광해주(光海州)로 고쳤다.
고려시대인 940년(태조 23) 춘주(春州)로 하고, 995년(성종 14) 단련사(團練使)를 두어 안변부(安邊府)에 예속시켰으며, 1203년(신종 6)에는 안양도호부(安陽都護府)로 승격하였다가 후에 지춘주사(知春州事)로 강등하였다.
조선시대인 1413년(태종 13) 춘천군(春川郡)으로 고쳤다가 1415년 도호부로 승격하였고, 1627년(인조 5) 방어사(防禦使) 및 포토사(捕討使)를 두었다가 1747(영조 23) 부사 겸 좌영을 두었다. 1755년 현으로 강등시켰다가 1765년 다시 도호부로 승격시켰다. 1888년(고종 25) 유도부(留都府)로 승격해 경기도에 속했다가 1895년 강원도에 환원시켜 도부사(都府使)를 두었다.
1896년 13도제(道制)로 구획할 때 강원도 관찰사를 두게 되었으며, 1910년 관찰부를 도청(道廳)으로 개칭하면서 강원도청 소재지가 되었다. 1946년 춘천읍이 부(府)로 승격하고, 1949년 춘천시로 승격함과 동시에 면 지역은 춘성군(春城郡)이 되었다. 1992년 춘성군이 춘천군으로 개칭되었고, 1995년 1월 춘천시와 춘천군이 합쳐 도농복합형의 통합시가 되었다.
2001년 현재 신북읍, 동•동산•신동•동내•남•남산•서•사북•북산면과 소양•교•조운•약사명•근화•후평1•후평2•후평3•효자1•효자2•효자3•석사•퇴계•강남•신사우동의 1읍 9면 15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 부내장(府內場)[2일, 7일] : 미(米), 면포(綿布), 명주(明紬), 어염(魚鹽), 연초(煙草), 지물(紙物)
- 주요농산물로 쌀은 신동면•남면•신북읍, 무와 배추는 신북읍•서면•신동면, 고추는 남면•신동면, 마늘과 딸기는 서면, 사과는 신북읍•신동면, 배와 복숭아는 신동면에서 많이 난다.
 
통천(통천장) 
 
통천군은 원래 고구려의 휴양군(休壤郡) 또는 금뇌군(金惱郡)이었다. 신라 경덕왕(景德王) 때 금양군(金壤郡)이 되었고, 고려시대 초에 현령(縣令)을 두었으며, 1285년(충렬왕 11) 통주방어사(通州防禦使)로 승격하였다. 1413년(조선 태종 13) 통천(通川)이라고 개칭되었다가 1762년(영조 38) 현(縣)으로 강등, 71년(영조 47) 다시 군이 되었다.
흡곡은 본래 고구려의 습비곡(習比谷) 또는 습비탄(習比呑)인데 신라 경덕왕 때 습계(習溪)로 개칭되어 금양군(金壤郡)의 속현이 되었다. 고려시대에 흡곡으로 개칭되었으며, 1248년(고려 고종 35) 현령을 두고, 1596년(조선 선조 29) 통천(通川)에 병합되었다가 98년(선조 31) 복구되어 현이 되었다.
1895년(고종 32) 군이 되었으나 1910년 통천군에 병합되었다. 관할구역은 고저읍 •흡곡면 •학일면 •송전면 •통천면 •벽양면 •임남면 등 1읍 6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 현내장(縣內場)[3일, 8일] : 면포(綿布), 면화(綿花)
- 통천군은 강원도의 군 중에서는 평야가 넓은 곳으로 도내 유수의 농업지역으로 꼽히는 곳이다. 흡곡 •통천 평야에서는 벼농사가 활발하고, 그 밖에 보리 •밀 •조 •수수 •옥수수 •콩 •감자 등의 생산이 많다.
산지에서는 목재의 벌채량이 많고, 밤 •잣 •버섯 •벌꿀 등의 임산 부산물 생산과 사과재배도 이루어진다.
근해는 북한해류와 동한해류가 합류하는 어장으로서 오징어 •대구 •명태 •전갱이 •연어 •청어 •게 •미역 등의 수산물이 많이 산출되며, 고저는 그 어로기지로 성황을 이룬다. 또한 멸치 어로도 성하고, 고저 앞바다에는 장전(長箭)에서 계속되는 포경업의 중심수역이 있다. 
 
황주(황주장) 
 
황주군은 고구려 때 동홀(冬忽) 또는 동어홀(冬於忽) 지역으로, 신라 헌덕왕(憲德王) 때 취성군(取城郡)으로 개칭되었다. 고려시대 초에 황주(黃州)라 하였으며, 983년(성종 2) 목(牧)을 두었고, 곧 절도사(節度使)를 두었으며, 천덕군(天德軍)이라 하여 관내도(關內道)에 속하였다. 1012년(현종 3) 안무사(安撫使)를 두었으며, 다시 목(牧)으로 고쳐 서해도(西海道)에 속하게 되었다.
1217년(고종 4) 거란병(契丹兵)의 침입을 막지 못했으므로 지고령군(知高寧郡)으로 강등되었고, 후에 다시 황주목(黃州牧)으로 환원되었다. 1269년(원종 10) 원(元)나라의 동녕부(東寧府)에 속하였고 1290년(충렬왕 6)에 서북면에 이관되었다.
공민왕(恭愍王) 때 다시 서해도(西海道)에 이관되었고, 조선 세조(世祖) 때 진(鎭)을 두어 2도호부(平山 •瑞興), 6군(鳳山 •安岳 •載寧 •遂安 •谷山 •信川), 5현(新溪 •兎山 •牛峯 •文化 •長連) 등을 관할하여 오다가 1895년에 황주군이 되었다. 관할구역은 황주 •겸이포 등 2개읍과, 청수 •흑교 •구성 •천주 •삼전 •영풍 •청룡 •주남 •인교 •도치 •구락 등 12개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 서문외소장(西門外小場)[?] : 미(米), 두(豆), 모맥(牟麥), 면포(綿布), 면화(綿花), 저포(苧布), 명주(明紬), 연초(煙草), 어염(魚鹽), 우독(牛犢), 계돈(鷄豚), 철물(鐵物), 유기(鍮器), 목물(木物), 과물(果物), 토기(土器), 자기(磁器)
- 황주군의 토양이 석회암의 잔류토인 테라로사로, 보수력(保水力)이 강하여 강수량이 850 mm에 불과한 과우지역임에도 농경에 큰 지장을 받지 않는다. 매상강과 황주강 연안에서는 벼농사가 성하고, 보리 •밀 •조 •수수 •옥수수 •콩 •감자 등의 산출이 많다.
 

 

황해도


곡산 
 
황해도의 동북단에 있는 군. 동쪽은 함경남도 문천과 강원도 이천, 서쪽은 황해도 수안, 남쪽은 신계, 북쪽은 평안남도 양덕•성천과 각각 접하고 있다. 동경 126°28′~127°01′, 북위 38°37′~39°10′에 위치하며, 남북으로 약간 긴 타원형을 이룬다.
지세는 높이 1,000m 이상의 높은 산과 계곡이 얽혀 있어 깊은 골짜기와 높은 산이라는 뜻의 '곡산'이라는 지명에 걸맞은 고을이다. 동•서•북의 3면이 산맥으로 둘러싸인 고원지대이나, 중남부지역인 남강과 곡산천 유역은 곡산분지를 중심으로 저평야지대를 이룬다. 동쪽에는 마식령산맥이 남북방향으로 뻗어 입암산(立巖山, 1,110m)․덕업산(德業山, 1,019m) 등의 산지가 형성되어 있다. 남부에는 멸악산맥이 융기해 생겨난 높은 산도 있으며, 이 산들이 둘러싸고 있는 일대의 고원지대에서 대동강의 지류인 남강과 예성강이 발원한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따르면, 15세기 중엽의 호구는 816호에 2,828명이었는데, 1828년(순조 28) 3,357호에 2만9911명으로 증가하였다. 조선 후기에 여러 장시가 형성되었으나, 황해도 지역보다는 교통이 편리한 평안남도 성천•양덕이나 함경남도 문천•원산과의 교역이 더 활발하였다. 1811년 주민들이 탐학을 일삼던 도호부사 박종신(朴宗臣)을 몰아내기 위해 큰 폭동을 일으켰다. 지리적으로 산간벽지에 자리잡고 있어 예로부터 산업•교통은 물론 교육기관도 다른 지방에 비해 뒤떨어진 곳이다.
임야면적이 85%로 대부분의 지역이 산지로 되어 있고, 산록이 방목에 적합해 축우사육이 활발하며, 한지(韓紙) •꿀 등의 산물이 많다. 경지가 좁으나 인구가 적어 호당 경지면적은 2.4㏊나 되며, 경지의 95% 이상이 밭농사지역이다. 조•메밀•옥수수•콩 등이 주로 생산된다. 곡산한지는 수안한지와 함께 품질이 좋고 우아해 예로부터 전국에서 손꼽히는 것이었다. 곡산면•운중면•멱미면 등에는 주물공장이 있어서 솥•농기구 등을 제조하며, 가내공업으로 무명•삼베•명주 등이 생산된다.
시장은 2개 면에 1개꼴로 6개가 있어 물품구매와 생필품을 거래하는 데 주로 이용된다.

<전거 :대동지지, 곡산읍지(1899) 대동지지>
 
봉산(봉산장) 
 
고구려 때에는 휴암군이었다가 통일신라시대에 서암군으로 개칭하였고, 고려 초에는 봉주(鳳州)로 개칭하여 방어사를 두었으나, 현종 때 이를 폐하고 황주(黃州)에 속하게 하였다. 충렬왕 때 봉양군(鳳陽郡)으로 고쳐 지사를 두었다가 후에 다시 봉주로 개칭하였으며, 조선시대 1413년(태종 13)에 봉산군이 되었다. 8•15광복 전에는 기천면•덕재면•쌍산면•초와면•문정면•서종면•동선면•토성면•산수면•구연면•사인면•사리원면•만천면•영천면 등 14개면이었다.
1947년 6월 사리원면이 봉산군에서 분리되어 사리원시로 승격하였다. 1952년 12월 북한의 행정구역 개편 때 서종면•초와면•덕재면•쌍산면•기천면과 영천면의 2개리, 문정면의 1개리가 은파군으로 분리하고 토성면•만천면•사인면•구연면•동선면•산수면과 영천면의 6개리, 문정면의 8개리, 서흥군 목감면의 4개리, 황주군 도치면 성동리 일부, 상산리 일부가 합쳐져 봉산군(1개읍 24개리)이 이루어졌다. 1954년 10월 황해도가 황해남•북도로 분리되면서 황해북도에 속하게 되었다.
1956년 9월 용림리(룡림리)와 계동리가 합쳐져 정방리가 되었고 황주군 구포리 일부를 봉의리에 편입하였다. 1958년 6월 봉산읍 일부을 마산리로 분리되었다. 1973년 8월 미곡리•만금리•어수노동자구가 사리원시로 이관되었고 1981년 6월에는 해서리가 사리원시로 이관되었다.
1982년 10월 은파군 청룡리가 편입되었고 1986년 10월 선정리•봉의리•대룡리•문현리•정방리가 사리원시로 이관되었다. 1989년 2월 서흥군 은정리•수곡리•삼천리와 은파군 묘송리가 편입되었다. 1992년 12월 청계리 일부지역이 분리되어 송정노동자구가 되었다.
관할 행정구역은 봉산읍과 송정노동자구, 가촌리•토성리•지탑리•송산리•독정리•천덕리•오봉리•유정리(류정리)•관정리•구연리•청계리•마산리•구읍리•청룡리•은정리•수곡리•삼천리•묘송리 등 18개리로 이루어져 있다. 동선면에 있었던 군소재지는 1910년 사리원으로, 1947년 마동으로, 1957년 지금의 봉산읍으로 옮겨졌다.
- 군내하장(郡內下場)[2일, 7일] : 미(米), 두(豆), 모맥(牟麥), 면포(綿布), 면화(綿花), 마포(麻布), 연초(煙草), 어염(魚鹽), 우독(牛犢), 부정(釜鼎), 과물(果物), 토기(土器), 자기(磁器), 지마(脂麻)
- '흥수 술'은 이 지역 특산물로 유명하며 오랜 역사를 가진 도자기와 질그릇은 모양이 곱고 질이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요 농산물은 쌀•옥수수•수수•콩•녹두 등이다. 쌀은 주로 봉산읍•가촌리•토성리•지탑리•송산리•묘송리•청계리 등 서흥강 유역의 평야지대에서 많이 생산한다. 천덕리와 청계리에 있는 수수밭은 군 수수밭 면적의 40%를 차지한다. 녹두는 토성리와 송산리에서, 콩은 대부분 지역에서 생산된다. 그밖에 잎담배도 많이 재배한다.

<전거:신국동지여지승람, , 봉산군, 황해도지(1981)>
 
사리원 
 
역원제(驛院制)에 의하여 의주로상에 위치하였던 원이다. 행정구획상 황해도 봉산군에 속한다. 도로 대부분이 행정중심지를 경유하였던 의주로에는 역이 행정중심지 부근에 위치하며 원에 비하여 그 역할이 강하였다. 따라서 의주로상의 원취락이 교통의 요지로까지 발달한 경우는 드물었으나 도로에 인접하여 위치하였던 사리원은 신작로의 건설과 함께 교통의 요지로 발전하였다. 사리원은 주변지역으로 통하는 도로가 발달하여 있어 황해도 북부지방의 교통 중심지이다. 또한, 주변지역 농산물의 집산지로서 경제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전거 :신증동국여지승람, 한국지명연혁교(1961)>
 
서흥 
 
황해도 중동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쪽은 수안․신계, 서쪽은 황주․봉산, 남쪽은 평산, 북쪽은 평안남도 중화와 접하고 있다. 남쪽의 멸악산맥과 북쪽의 언진산맥 사이에 위치해 전체적으로 산으로 둘러싸인 고원형 분지를 이룬다. 그리고 이들 산맥의 영향으로 군의 중부에 동서방향으로 500~600m의 산들이 잇달아 솟아 있어 군의 지세를 남북으로 양분한다.
군의 남부에는 재령강의 상류인 서흥강(瑞興江)이, 북부에는 황주천(黃州川)이 각각 서쪽으로 흐르며, 웅파산(熊波山) 기슭에는 가마소가 있다. 하천유역에는 연안평야가 발달하였다. 황해도 내륙에 위치하므로 내륙성 기후이며 기온의 연교차가 크다. 연평균기온 9~10℃, 1월 평균기온 -8.5℃, 8월 평균기온 24.4℃이며, 연강수량은 951.6㎜이다.
입암리에는 17세기의 백자도요지가 남아 있으며, 18세기 말엽에는 5개의 장시(場市)가 형성되었는데, 그 가운데서도 능리장은 수안․황주 및 평안남도 지역과의 교통이 편리해 도내에서는 금천의 시변리장터 다음으로 성시를 이루었다. 1759년(영조 35)의 호구는 6,033호에 2만1577명이었다.
군은 수안․신계의 산악지방과 봉산․황주․평산 등의 평야지방과의 점이지대로 대부분이 산지로 되어 있다. 따라서 황주천과 서흥강 연안이 주요한 벼농사지역으로 꼽히지만 군내는 논농사보다는 밭농사를 주로 한다. 주요 농산물은 보리 •밀 •조 •콩 •녹두•수수•감자 등이다. 서흥군에서 산출되는 조는 '황정미(黃精米)'라고 해 유명하며, 밥을 지으면 윤기가 나고 쫄깃쫄깃하며 차져서 흩어지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따라서 황정미는 전국에서도 특미로 꼽혔다.
특용작물로 마•담배•대마 등이 생산되며, 특히 인삼의 재배가 활발하다. 서흥지방에서 생산되는 밤은 •평양밤•이라고 해 특산물로 알려졌다. 상업활동은 5일장으로 서흥(瑞興) •신막(新幕) •흥수(興水) •능리(陵里) •송월(松月) 등에 정기적으로 장이 열렸다. 그 중 서흥장이 예로부터 이 일대 상업의 중심지였으나, 신막이 교통의 요지로 성장함에 따라 신막장이 농산물•과일•명주•소 등의 집산지로 되어 거래가 활발하게 되었다. 
 
수안 
 
황해도 동북부에 위치하고 있다. 동쪽은 곡산, 서쪽은 서흥과 평안남도 중화, 남쪽은 신계, 북쪽은 평안남도 강동과 성천에 접하고 있다. 군의 중앙에 언진산맥이 동서방향으로 뻗어 있으며, 천곡면에는 총령(升嶺)이란 고개가 있는데, 수안에서 신계로 가는 요로(要路)이다.
남부는 곡산•신계에 연속되는 용암대지이며, 북부는 심한 파랑상(波浪狀) 구릉이 전개되는 준평원을 이룬다. 남부에는 예성강의 상류인 위라천(位羅川) •오동천(梧洞川) •언진천(彦眞川) 등이 400~500m의 산지 사이를 동남류하면서 유역에 평야를 전개해, 감박산과 피란산을 잇는 구릉의 서부는 황주천 상류유역인 능리분지(陵里盆地)로 되어 있다.
황해도와 평안남도와의 경계를 협곡모양의 남강(南江)이 서쪽으로 흐르고 언진산맥의 북쪽 산지를 도소천(道所川)․율리천(栗里川) 등이 북류해 남강에 유입하며, 그 연변에 율리분지(栗里盆地)를 형성한다.
내륙은 산간지방이므로 내륙성 기후가 뚜렷한 편이며 기온의 연교차가 크다. 연평균기온 9.7℃, 1월 평균기온 -8.1℃, 8월 평균기온 25.2℃, 연강수량 1,122.9㎜이다.
1794년(정조 18) 금점(金店)을 설치해 본격적으로 금을 채굴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수안광산으로 알려진 남정금광이다. 미산리의 조박골․삼합리 등지에는 서민용 백자를 굽던 15~19세기의 도요지가 남아 있다. 1759년(영조 35) 당시 13방 38리로 편성되어 있었고, 호구는 3,519호에 1만8878명이었다.
수안분지를 비롯해 율리분지•능리분지 등은 수리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어 벼농사가 잘되지만, 군의 대부분이 용암대지로 덮인 고원지대로서 밭농사를 주로 한다. 따라서 주요 농산물은 밀•보리•조•메밀•옥수수•콩 등이며, 수안평야와 대성평야가 있어 많은 양의 잡곡이 생산된다. 특용작물로는 대마 등이 재배되며, 축우와 누에치기도 활발하다. 임산물의 부산물로 닥나무•밤•약초•버섯•잣 등이 산출되는데, 특히 '평양밤'으로 널리 알려진 밤은 토질이 알맞아 맛이 뛰어나 인기가 높다.
상업활동은 5일장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며 시장으로 수안장•도하장(陶河場) •사창장(社倉場) •율리장•평원장(坪院場)․홀동장 등이 있다. 도로는 신계-수안-평양을 잇는 도로가 군의 중앙을 남북으로 지나며, 수안-능리-황주간의 도로 및 수안에서 서흥-신계-곡산을 잇는 도로가 있다. 남강은 50t급의 선박이 운항할 수 있다. 
 
신계 
 
황해도 중동부에 위치하고 있다. 동쪽은 강원도 이천, 서쪽은 서흥, 남쪽은 평산과 금천, 북쪽은 수안•곡산에 각각 접하고 있다. 군의 동부에는 마식령산맥이 강원도와 경계를 이루면서 북동에서 남서방향으로 뻗어 있다. 예성강의 지류인 지석천(支石川)이 군의 중앙을 남류하다가 남부에서 예성강에 합류하면서 주변에 신계분지를 형성한다. 따라서 이 군은 3면이 산으로 에워싸여 있는 산악지대로서 예로부터 신계•곡산•수안을 '산중삼읍(山中三邑)'이라 했으며, 그 중 신계는 다분히 남부 평야와의 점이지대로서의 성격을 띠고 있다. 대륙성기후가 뚜렷하며 기온의 연교차가 크다.
1759년(영조 35) 당시 13방 55리로 편성되었고, 인구는 총 2,998호, 7,955명으로 면적에 비해 적은 편이었다. 
 
신천 
 
황해도 서북부에 위치하고 있다. 동쪽은 재령, 서쪽은 송화, 남쪽은 벽성, 북쪽은 은율•안악과 접하고 있다. 지세는 북서쪽으로 황해도의 명산인 구월산(九月山, 954m)이 북동에서 남서 방향으로 뻗어 있고, 서남으로 멸악산맥(滅惡山脈)이 뻗어 있다.
구월산맥과 멸악산맥의 사이에 광대한 평야가 전개되는데, 일명 '어우리벌'이라고도 한다. 천봉산과 운계산 주변을 근원으로 하여 부정천(婦貞川)과 척서천(滌暑川)이 동쪽으로 흐르고 있으며, 이들 하천은 대부분이 용문면'남부면'온천면 일대의 관개에 이용된다. 재령강의 지류인 서강(西江)이 평야 지대를 통과하며, 곳곳에 큰 규모의 저수지가 있다. 구월산맥과 평야 사이에 용진저수지(用珍貯水池), 멸악산맥과 평야 사이에 용문저수지(龍門貯水池), 재령군과의 경계에 재신저수지(載信貯水池)가 있다.
기후는 겨울의 추위가 심한 편으로 1월 평균 기온 -6.5℃, 8월 평균 기온 25.4℃, 연평균 기온 10.8℃이며, 연 강수량은 954.3㎜이다.
조선 후기의 인구는 1759년(영조 35)에 총 1만 1965호 3만 6898인으로 증가하였으며, 이 가운데 문화현의 인구가 약 60%이어서 신천군보다도 인구 증가율이 높았다.
산지가 적고 비옥한 농토가 광대하며, 벼농사가 대규모로 발달하였다. 넓은 벌판인 어우리벌과 장재이벌이 있다. 어우리벌의 쌀 생산은 도내에서 2위를 차지하며, 품질에 있어서도 재령의 나무리벌과 함께 전국적으로 이름이 높다. 그 밖에도 콩•팥•녹두 등의 잡곡과 목화가 많이 생산된다. 또한 잎담배는 전국에서 수위권을 차지하며, 특용작물인 박하는 도내 생산의 반을 차지한다.
시장으로는 1•9일의 신천장을 비롯하여 3•8일의 돌무지장과 유천장(柳川場), 5•10일의 문화장(文化場), 4•9일의 달천장(達泉場) 등이 있다. 주로 쌀•보리•콩•팥•조•면포•소 및 일용 잡화가 거래된다. 신천장과 문화장은 신천군의 2대 시장으로 널리 이용된다.
도로는 해안선이 없는 관계로 육로교통이 발달하여 신천읍을 중심으로 해주•재령•안악•은율•송화 방면으로 연결되어 있어 교통이 편리하다. 북부면 우산리에 세미(稅米)를 운반하던 우산포가 있었는데, 지금은 포구의 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다.
읍내를 흐르는 부정천과 누교천의 물은 물론, 용진면•궁흥면•초리면 일대의 냇물이 모두 이곳으로 모여든다. 일단 이곳에서 합쳐진 물은 다시 노월면의 굴산포(窟山浦)를 지나 안악군의 맞임재〔延津〕로 들어간다. 연안에는 동북으로 12㎞ 정도 어우리벌이 펼쳐진다. 지금은 배가 오가지 못하지만 옛날에는 세미를 배편으로 운반하는 포구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포구 가까이에는 산천면 마명산(馬鳴山)에서 흐르는 마명천과, 문화면 건지산에서 흐르는 건지천이 합류하여 생긴 유명한 석연(石淵)이 있다. 
 
은율(은율장) 
 
은율은 고구려시대에 율구(栗口) 또는 율천(栗川)이었으나 고려 초에 은율(殷栗)로 고쳤으며 1018년(현종 9) 풍주방어영(豊州防禦營:豊川)에 속하였다. 조선시대에는 1396년(태조 5) 감무(監務)를 두고, 태종(太宗) 때 풍천에 합하였다가 후에 다시 복구하여 현감(縣監)을 두었다.
한때 풍천 •장련 •문화(文化)에 합한 때도 있었으나 곧 복구되었으며, 1895년(고종 32) 은율군으로 되었고, 1909년 장련군을 흡수하였다. 관할구역은 은율면 •일도면(一道面) •이도면 •남부면(南部面) •서부면 •북부면 •장련면 등 1읍 6개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 읍내장(邑內場)[2일, 7일] : 미(米), 두(豆), 모맥(牟麥), 면포(綿布), 면화(綿花), 마포(麻布), 연초(煙草), 어염(魚鹽), 우독(牛犢), 유기(鍮器), 토기(土器), 석자(席子), 지마(脂麻), 수소(水蘇)
- 은율군에는 넓은 평야가 있으면서도 강수량이 적어 벼농사는 부진하였다. 그러나 관개시설 정비로 쌀 생산이 많아졌으며 밀 •조 •수수 •옥수수 •콩 •감자와, 특용작물로 잎담배 •목화도 산출한다. 사과를 비롯한 과수재배와 잣 •송이버섯 •도라지 •벌꿀 등의 토산물도 산출한다.
수산물로는 조기 •새우 •조개류 등의 어획이 많다.

<전거:신증동국여시승람, 여지도서, 은율군지(1975)>
 
장연(장연장) 
 
장연군은 이미 고구려시대부터 지금의 이름으로 불려왔다. 신라 통일기에는 한때 해주부(海州府)에, 고려시대에는 옹진군에 속한 일도 있으며,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개국과 함께 본군의 국방상 위치를 고려하여 1392년(태조 원년) 만호(萬戶)로 하여금 현관(縣官)인 감무(監務)를 겸하게 하다가, 1402년(태종 2)에는 다시 진영을 설치하고 병마사(兵馬使)로서 판현사(判縣使)를 겸하게 하였다.
그 후 정세가 점차 안정됨에 따라 1414년(태종14)에, 지금의 목감면(牧甘面) 서쪽에 있던 영강현(永康縣)과 합하여 군명을 연강(淵康)으로 개칭하였으며, 16년에는 전에 왜구(倭寇)로 인하여 청송현(靑松縣:지금의 信川郡龍門面)으로 편입시켰던 해안현(海安縣)을 다시 합치고 이름도 장연으로 환원하였다.
1623년(광해군 15)에는 도호부(都護府)로 승격하고 1728년(영조 4)에 현(縣)으로 강등하였다가 37년에 다시 부(府)로 승격하고, 순조(純祖) 때 현(縣)으로 강등하였다가 1895년(고종 32) 지방관제 개혁에 따라 군으로 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장연읍을 비롯하여 낙도면(樂道面) •대구면(大救面) •목감면(牧甘面) •속달면(速達面) •신화면(薪化面) •용연면(龍淵面) •순택면(蓴澤面) •해안면(海安面) •후남면(候南面)의 1읍 9개면이다.
- 부남장(府南場)[?[] : 미(米), 두(豆), 모맥(牟麥), 면포(綿布), 면화(綿花), 마포(麻布), 연초(煙草), 어염(魚鹽), 우독(牛犢), 유기(鍮器), 목물(木物), 과물(果物), 토기(土器), 자기(磁器), 석자(席子), 지마(脂麻), 수소(水蘇)
- 경지는 남대천 유역의 곡저평야에 약간의 논이 있어 쌀이 생산되나 대체로 밭이 많아 밀 •콩 •조 등과, 특용작물로는 잎담배 •목화 •깨, 과일로는 사과 •감 등을 산출한다. 어업으로는 몽금포와 대청도가 어업의 근거지이며, 조기 •새우 •갈치 •조개류가 어획된다. 광공업은 낙산광산(樂山鑛山)의 금 생산이 유명하고, 몽금포 •구미포(九味浦)에서는 양질의 규사(硅砂)가 생산되는 외에 장산곶 부근에서는 벼룻돌이 산출되기도 한다.

<전거:신증동국여지승람, 황해도지(1981), 장영군읍지(1899)>
 
평산(평산장) 
 
본래는 고구려의 대곡군(大谷郡) 또는 다지실(多知悉)이었으며 통일신라 이후 748년(경덕왕 7)에 영풍군(永豊郡)으로서 성(城)을, 783년(선덕여왕 4)에는 진(鎭)을 두고 한주(漢州)에 예속시켰다.
고려시대 태조 때 평주(平州)로 개칭하고, 성종 때 방어사(防禦使), 현종 때는 지주사(知州事)를 두었다. 원종 때는 부흥군(復興郡)에 합쳤다가 충렬왕 때 다시 복구하였다. 1413년(태종 13)에 평산으로 바꾸고 도호부(都護府)로 승격하였다. 그 후 1914년 부 •군(府郡)통폐합 때 남서부의 일부를 연백군에 이속시켰다.
8 •15광복 당시 평산군은 남천읍 •평산면 •금암면(金岩面) •서봉면(西峰面) •고지면(古之面) •세곡면(細谷面) •적암면(積岩面) •마산면(馬山面) •용산면(龍山面) •신암면(新岩面) •인산면(麟山面) •상월면(上月面) •문무면(文武面) •안성면(安城面) 등 1읍 16면으로 되어 있었다.
- 부내장(府內場)[1일, 6일] : 미(米), 두(豆), 모맥(牟麥), 면포(綿布), 면화(綿花), 마포(麻布), 연초(煙草), 어염(魚鹽), 우독(牛犢), 과물(果物)
- 평산군 예성강 유역의 동부 저지는 벼농사가 이루어지나 경지의 80 %가 밭이므로 조 •콩 •밀 등이 주요 작물로 산출된다. 한편, 특용작물의 생산도 많은데, 황색잎담배와 밤은 대표적인 것이다.
 
해주(해주장) 
 
해주시는 고조선 이후 대방군(帶方郡)에 속하였으며 고죽(孤竹)이라 불렀다. 고구려 때는 내미홀(內米忽), 일명 지성(池城)•장지(長池)라 하였고,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폭지(瀑池)라 개칭하였는데, 당시는 현재의 위치보다 동쪽 8km 지점인 학현(鶴峴)의 북쪽 폭포 부근에 있었다고 한다.
고려 태조가 본군의 남쪽이 대해(大海)에 임하고 있다고 하여 해주라고 명명하였으며 성종 초에 목(牧)을 설치하고, 후에 절도사(節度使)를 두어 해주 우신책군(右神策軍)이라 칭하고, 양주와 더불어 수도 개성의 좌우보(左右輔)를 삼았다. 현종 때 절도사를 폐하고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로서 5도호의 하나가 되었다. 예종 때 다시 대도호부로 승격되고, 고종 때 목으로 고쳤으며, 공민왕 때 왜구가 침입하여 목사(牧使) 엄익겸(嚴益謙)이 살해되자 군(郡)으로 강등되었다가 후에 환원되었다.
조선 세조 때 진(鎭)을 두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선조가 의주파천에서 돌아오는 길에 머무르다 여기서 손자 인조가 탄생하였다. 1895년(고종 32) 23부(府)의 하나가 되고, 이듬해 전국을 13도(道)로 구획할 때 도청소재지가 되었으며, 1938년 부(府)로 승격, 1940년에는 해주항이 개항장으로 지정되고, 8 •15광복 후 시(市)로 개편, 현재에 이른다.
- 소동문외장(小東門外場)[?] : 미(米), 두(豆), 모맥(牟麥), 면포(綿布), 면화(綿花), 마포(麻布), 연초(煙草), 어염(魚鹽), 우독(牛犢), 석자(席子)
- 남쪽의 남부평야에서는 선산수리조합의 관개로 쌀을 많이 생산하며 시 부근에는 농사시험장이 있다. 또 시의 북부를 제외한 교외에서는 근교농업이 활발하여 채소와 배 •복숭아 등 과일의 산출이 많다.
시의 전면에는 한국 3대 어장의 하나인 연평도(延坪島)가 있어 조기잡이 때가 되면 전국에서 모여드는 어선으로 대성황을 이루며, 새우 •민어 •도미 •조개류 •백합 등의 어획도 많다. 결성포(結城浦) •석천포(石川浦) •해주항은 어획물의 육양장(陸揚場)이다.
 
 
함경도


경성 
 
함경북도의 중앙부에 위치한 군이다. 동쪽은 동해와 면하여 있고, 서쪽은 무산, 남쪽은 길주과 명천, 북쪽은 부령과 접한다. 동경 128°59′~149°49′, 북위 41°15′~41°58′에 위치하고 있다.
지세는 함경산맥(咸鏡山脈)이 서쪽에 위치하여 동북에서 남서 방향으로 뻗어 있어서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다. 하천 하류에는 비옥한 해안평야가 남북으로 길게 형성되어 있다. 특히, 어랑천은 수량이 풍부하며, 중•하류에는 현무암 지대가 위치하여 특수한 하곡경관을 나타낸다.
기후는 삼한사온이 뚜렷한 대륙성 기후를 나타내며, 연평균 기온 7.1℃, 연 강수량 700㎜ 내외이다. 내륙과 해안의 기온차가 현저하며, 동해안은 봄에 온대성 저기압의 영향을 받아 파도가 높고 짙은 안개가 끼는 날이 많다.
이 군은 거의 산지이므로 논농사보다는 밭농사가 성하다. 벼농사는 주로 해안 평야 지대에서 이루어진다. 어랑쌀•배추•배 등은 품질이 좋다. 어랑천은 중․상류로부터 사행하면서 많은 운반물을 하류에 퇴적하여 범람원을 이루는데, 이곳의 토양은 미세한 사양토이며 부식의 함량이 많아 비옥하다. 옛날부터 관개시설이 잘되어 전천후 농업이 가능하고 단위 면적당 수확량이 매우 많다. 이 지역에서 생산되는 쌀은 함경북도 일대에서는 가장 우수한 쌀로서 높이 평가될 정도로 미질이 우수하다.
동해 연안에 독진•온대진•어대진 등의 어항이 있어서 명태•대구•고등어•꽁치•정어리•문어•임연수어•게•가자미•낙지 등 여러 종류가 잡힌다. 어대진에는 통조림 및 어유공장이 있다.
변방 지대인 경성은 일찍부터 국제 교역에서 중요한 구실을 담당, 1406년(태종 6) 여진과의 교역을 위한 무역소를 설치하여 번창하였다. 경성에는 경성•주을•회문•수남 등 4개의 정기시장이 있다. 경성시장은 6일장으로서 읍장(邑場)이라고도 하며, 경성면에 위치한다. 가축 시장과 일반 시장이 구분되며, 가축 시장에서는 소•말•돼지가 거래되고, 일반 시장에서는 농수산물과 일반 잡화가 거래된다. 주을시장은 5일장으로, 주을읍에 위치한다. 산간벽지에서 채집된 송이•산나물•약초 등과 수산물이 집하되고, 부근에 온천 지대와 탄광 지대가 있어 매매 물량이 경성군 제일이다. 회문시장은 주북과 주남을 시장권으로 하는 5일장이며, 산간지대의 특산물과 수산물이 주로 거래된다. 수남시장은 어랑면에 위치하는 가축 시장으로, 주로 소가 거래된다. 
 
덕원(원산장) 
 
함경남도 남부에 있었던 군. 1942년 4월에 이웃의 문천군에 병합되었다.
- 원산장(元山場)[5일, 3회 개시] : 미(米), 두(豆), 맥(麥), 면포(綿布), 마포(麻布), 어염(魚鹽), 철물(鐵物), 목물(木物), 옹기(瓮器), 연초(煙草), 우독(牛犢)

<전거:신증동국여지승람, 덕원읍지, 원산시사(1968)>
 
신포 
 
함경남도 중부 동해안에 위치하고 있다. 동쪽과 북쪽은 북청, 서쪽은 홍원과 접하여 있으며, 남쪽은 동해에 면하여 있다. 북부지역은 산지로 되어 있고, 남부로 갈수록 낮아져 해안에는 좁고 긴 평야가 펼쳐져 있다. 동부와 서부를 남대천(북청)과 동대천이 동해로 흘러들어가고, 해안가에는 용연호•현금호•대인호 등의 간석호가 널려 있다. 해안선은 길이 52.7㎞로서 송도갑과 양화만이 이어져 비교적 굴곡이 심한 편이다. 신포 앞바다에는 천연 방파제 구실을 하는 마양도가 있고, 그 밖에 신도•대구도•계암도 등의 섬들이 분산되어 있다. 기반암은 화강암이며, 토양은 갈색산림토•충적토•사토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남동부와 남서부에는 풍성 또는 해성사토로 되어 있고, 모래언덕과 모래부리가 발달되어 있다. 기후는 연평균기온 9.4℃, 1월 평균기온 -4.1℃, 8월 평균기온 22.6℃이며, 연평균강우량은 688㎜이다. 산림은 시 전체면적의 60%이며, 대부분이 소나무 단순림이고, 부분적으로 참나무 등 활엽수가 섞여 있다.
주요 농산물은 옥수수이며, 쌀•콩•감자•담배 등이 경작되고 있다. 주요 수산물은 명태•청어•가자미•멸치•까나리•송어•미역•다시마•해삼•조개류 등 종류가 다양하며, 명태가 어획량의 50~60%를 차지한다. 특히, 명란젓과 창란젓은 이 지방의 특산물로 유명하다. 
 
안변 
 
함경도 남부에 위치하고 있다. 동쪽은 강원도 통천, 서쪽은 강원도 이천, 남쪽은 강원도 평강•회양, 북쪽은 문천•원산•동해와 접하고 있다. 남서부는 마식령산맥과 태백산맥이 추가령(752m)에서 서로 합쳐져 있어 지세가 높고 험하다. 풍류산 동쪽에는 철령(鐵嶺, 685m)이 있어 예로부터 천연의 요새로 유명하며, 남북교통의 요지가 되었다. 이곳에서 발원한 남대천(南大川)이 북류하면서 상류에는 삼방(三防) 같은 기승지를 만들고, 중•하류에는 비교적 넓은 안변평야를 전개시키며 영흥만(永興灣)으로 들어간다. 또한 노인치(老人峙)에서 발원해 북동류하는 학천(鶴川)은 배화면에서 작은 지류들을 합치며 유역에 비옥한 충적평야를 전개시키고 영흥만으로 들어간다. 기후는 지형과 해류의 영향으로 고위도에 위치하는데도 기온이 비교적 높다. 특히 북쪽 해안지방이 남쪽 내륙지방보다도 따뜻하다. 연평균기온 10.5℃, 1월 평균기온 -3.5℃, 8월 평균기온 24.2℃이며, 연강수량은 1,320㎜이다.
≪여지도서 輿地圖書≫에 따르면 1759년(영조 35) 당시 방리(坊里)는 세청사(世淸社) 등 13사로 이루어져 있었고 호구는 6,216호, 3만5503명이었다. 1872년(고종 9)에 편찬된 ≪안변읍지≫에는 역시 13사에 호구 5,216호, 3만2038명으로 인구가 감소하였다.
북부 남대천과 학천 유역의 안변평야는 토지가 비옥하여 쌀을 비롯한 농산물이 많이 생산된다. 쌀 생산량은 도내에서 1위이며, 이 밖에 조•콩•밀•감자•피•대마 등이 생산된다. 설봉산에서는 송이버섯이 많이 나며, 산악지대에서는 꿀, 서곡면에서는 목탄•목재가 산출된다.
이 군은 교통의 중심지이며, 경기•강원•함경도가 용이하게 만날 수 있는 곳이어서 각종 농산물과 각도의 풍물이 집산된다. 군내에는 안변장•해천장(蟹川場) •오산장(梧山場) •남산장(南山場) •고산장(高山場) •신고산장의 6개 정기시장이 있었다. 안변면 문내리의 안변읍장은 3․8일에 개장했으며 곡류•의류•잡화 등이 거래되었고,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안변나무장도 개장하였다. 문산면 도호리의 남산장과 신모면 공수전리의 공수전장은 2•7일에 개장했고 공수전가축장도 함께 개장하였다. 신고산면 신대리의 신고산장과 신고산가축장은 4•9일에 개장했으며, 안변가축장이 안변면 탑리에서 개장하였다. 이처럼 안변의 시장은 우시장 중심의 가축시장이 많았으며, 쌀•조•콩•밀•감자•무•마포(麻布) •송이버섯 등이 많이 거래되었다. 
 
원산 
 
함경도 남부의 영흥만에 위치해 있다. 북동쪽에는 호도반도(虎島半島)가 길게 뻗어 송전만(松田灣)을 둘러싸고 있고, 남동쪽은 갈마반도(葛麻半島)가 돌출해 덕원만(德源灣)을 형성하며, 북서쪽은 문천군, 남서쪽은 안변군과 접하고 있다. 마식령산맥의 지맥들이 영흥만 쪽으로 점차 낮아지면서 구릉성 산지를 이루고 있으며, 남쪽은 산기천(山岐川)을 건너 안변평야(安邊平野)로 이어진다.
기후는 배후의 낭림산맥과 마식령산맥이 북서풍의 차가운 기류를 막아 주며, 한편 바다의 난류로 말미암아 같은 위도상에 있는 평양에 비해 온화하다. 연평균기온 11℃, 1월 평균기온 -13.5℃, 8월 평균기온 22℃이며, 연강수량은 1,400㎜로 다우지역이다. 첫서리는 10월 23일경에 내린다.
1636년(인조 14) 12월 병자호란 때는 청군의 일부인 몽고군이 함경도를 거쳐 철수함으로써 덕원부도 많은 피해를 입었다. ≪여지도서 輿地圖書≫에 따르면, 1759년(영조 35) 방리는 현사(縣社) •적전사(赤田社) •부내사(府內社) •북면사(北面社) •용성사(龍城社)의 5사로 이루어지고 호구는 2,080호, 8,236명이었다.
원산 앞바다는 한류와 난류의 교차가 심하고 플랑크톤이 풍부해 한때 전국에서 가장 높은 어획량을 자랑하기도 하였다. 특히 명태가 손꼽히며, 그 밖에 고등어•삼치•방어•게 등이 유명하다. 정기시장으로는 명석동의 신탄(나무)장이 매일 열리고, 양촌동의 양촌장과 가축시장은 5•10일에 개시되며, 해안통에서 5•10일에 열리는 해안통장에서는 주로 수산물이 거래된다. 
 
원주(원주장) 
 
1395년(조선 태조4년) 삭방도와 중원도의 일부를 합해서 강원도로 개칭하면서 이에 편입되었고, 강원도 감찰부가 설치되면서 강원감영의 소재지가 되었다. 세조 때 진을 두어 1부 3군 3현을 관할하였고, 1683년(숙종 9) 현으로 강등하였다가 1692년(숙종 18) 복구하였다.
1728년(영조 4) 역적이 태어난 곳이라 하여 다시 강등되었다가 1737년(영조 13)에 복구되었는데, 당시 원주 감영의 감사가 강원 26군을 통괄하여 원주는 관동 제1의 정치•경제•문화•교통의 중심지가 되었다.
1895년 전국행정구역을 23부 336군으로 정비할 때 강원감영을 폐하고 2부(춘천부, 강릉부:26개 군)로 개편되면서 원주부는 군이 되었다. 1896년 강원도로 부활하면서 춘천에 관찰사를 두고, 원주 외 3개 군은 강원도에 귀속되었다.
1910년 지방관제 개정으로 원주면(5개리:상동리, 하동리, 화천, 태장, 사천리)이 되었다. 1913년, 강천면을 경기도 여주군으로, 고모곡면과 지향국면을 횡성군으로, 주천의 좌변면•우변면•수주면 등을 영월군으로 이속하고, 10개 면(본부면, 소초면, 호저면, 지정면, 문막면, 부론면, 귀래면, 흥업면, 신림면, 판부면)으로 통합함으로써 원주군의 행정구역이 9개 면이 되었다.
1938년, 원주면이 원주읍으로 승격함으로써 1읍 9개 면을 관할하였다. 1955년, 판부면 단구리•행구리와 호저면 우산리를 편입하고 행구동•단구동•우산동 3개 동을 증설하면서 18개 동을 관할, 원주읍이 시로 승격하고 원주군은 원성군이 되었다.
1961년, 중앙동•평원동을 중평동으로, 원동•인동을 원인동으로, 학성1•2구를 학성동으로, 태장1•2구를 태장동으로, 봉산1∼3구를 봉산동으로 각각 통합하였다. 1970년, 학성동•태장동•봉산동을 각각 2개 동으로 분동하고 3개동을 증설하여 15개 연합동제를 실시하였다.
1973년, 원성군 흥업면 무실리, 호저면 가현리, 판부면 관설리, 반곡리를 원주시에 편입시켜 3개 동을 증설하고, 가현리는 우산동과 태장2동에 분할 편입해 법정동 18개(행정동)가 되었다.
1983년, 원성군 소초면 장양리 557번지 외 1,313필지가 원주시에, 원주시 관설동 287-1번지가 원성군에 각각 편입하였고, 1990년 4월 1일에는 법정동 경계 등 행정구역의 일부를 조정하였다.
1995년 1월 원주군과 원주시가 합쳐 도농 복합형 통합시가 되었다. 1999년 시 조례에 의거 학성2동과 평원동이 중앙동, 봉산1•2동이 봉산동, 관설동과 반곡동이 반곡관설동, 학성1동이 학성동, 단계동 일부가 무실동으로 명칭 변경 및 구역 조정하였다.
2001년 현재 문막읍과 소초면•호저면•지정면•부론면•귀래면•흥업면•판부면•신림면, 중앙•원인•개운•명륜1•명륜2•단구•일산•학성•단계•우산•태장1•태장2•봉산•행구•무실•반곡관설동 등 1읍 8면 16개 동을 관할한다.
- 주내장(州內場)[2일, 7일] : 미(米), 면포(綿布), 면화(綿花), 마포(麻布), 어염(魚鹽), 연초(煙草), 철물(鐵物), 우독(牛犢), 지물(紙物), 과물(果物), 토기(土器)
- 주요농산물은 쌀•감자•옥수수 등이다. 과일•채소를 중심으로 한 원예농업도 성하다. 잡곡은 신림•소초•판부면, 과일은 소초•지정•호저면, 문막읍, 채소는 문막읍, 부론면•지정면 등이 중심을 이룬다.
 
청진 
 
함경도 중동부의 동해안에 위치하고 있다. 동쪽과 남쪽은 동해, 서쪽은 경성, 북쪽은 부령과 접하고 있다. 청진항은 만형(灣形)을 이루고 있는 고말반도의 허리 부분의 낮은 데를 깎아 그 서부에 발전하였다. 서쪽으로는 나남에 이르는 광대한 수성평야(輸城平野)가 펼쳐져 있으며, 평야의 동쪽으로 수성천이 흐르고 있다. 바다의 영향으로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큰 추위가 없는 편이다. 연평균 기온 6~8℃, 1월 평균 기온 -5.3℃, 8월 평균 기온 14.9℃, 연 강수량 567.1㎜이다.
1438년(세종 20) 부거현에 속하였으며, 그 뒤 육진 개척에 의하여 부령부(富寧府)가 생겼을 때는 그 산하 청하면에 소속된 60여 호에 불과한 어촌이었다.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이곳은 병력과 군수물자의 출입항으로 차츰 발전하여 1908년 만국통상항으로 개항되었다.
수성평야(輸城平野)가 있어 경지면적이 넓은 편이며, 그 대부분이 밭이다. 따라서 주요 농산물은 보리•콩 기타 잡곡 등이다. 연안에서는 한․난류의 교차로 어종이 풍부하여 명태•정어리•대구•고등어 등의 어획이 많았다. 주변의 산지는 임산자원이 풍부하였다. 
 
함흥 
 
≪여지도서≫에 의하면, 1759년(영조 35) 방리는 주남(州南) •주동(州東) •동명(東溟) •퇴조(退潮) •보청(甫靑) •덕천(德川) •덕산(德山) •천원(川原) •주서(州西) •천서(川西) •조양(朝陽) •하조양(下朝陽) •기천(岐川) •운전(雲田) •삼평(三坪) •연포(連浦) •주지(朱地) •선덕(宣德) •주북(州北) •기곡(岐谷) •가평(加平) •원평(元平) •동원평(東元平) •고천(高遷) •동고천(東高遷) •영천(永川) •원천(元川) 등 27개 사(社)로 이루어졌으며, 호구 수는 1만 1708호 5만 9159인(남자 3만 3956인, 여자 2만 5203인), 전결은 한전(旱田) 5,913결 50부 8속, 수전(水田) 1,295결 95부 2속이었다(1666년).
성천강 유역을 중심으로 비옥한 함흥평야가 발달하여 논농사 위주의 농업이 이루어진다. 경지면적이 넓지 못하여 생산량은 적지만 단위 면적당 쌀의 생산량은 비교적 많은 편이다. 주요 농산물로는 쌀•콩류•잡곡•채소 등이 있다.
한편, 이 시는 예로부터 물자의 집산지로 번영하여 우리 나라 3대 정기시로 유명하였다. 상설 시장으로는 영동의 함흥동방어채시장, 본동의 함흥서방어채시장, 황금동시장, 유락동시장 등이 열리며, 정기 시장으로는 성천동의 가축 시장, 복부동의 신탄 시장, 일출동의 신탄 시장 등이 모두 2•7일에 개시된다. 특히, 신탄 시장은 함주군 상기천면 오로리와 덕산면 일대에서 집산되는 땔감으로 성시를 이루고 있다.

<전거 : 신증동구여지승라, 경지도지(1957), 한국지명총람(1981),『한국의 발견 -강원도-』(1983)>
 

 

평안도


강계 
 
평안북도 북동부에 위치하고 있다. 동쪽은 낭림산맥을 경계로 함경남도의 장진군, 서쪽은 위원군과 초산군, 남쪽은 희천군, 북쪽은 자성군과 후창군, 그리고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중국의 만주 지방과 접하고 있다. 동경 126°04′~127°00′, 북위 40°15′~41°22′에 위치하며, 면적은 5,403.63㎢로 전국의 군 중에서 가장 큰 군이다.
지세는 동쪽에 낭림산맥이 남북으로 뻗어 있고, 북쪽에는 강남산맥이 동북에서 서남으로 이어져 있으며, 남쪽에는 적유령산맥이 강남산맥과 나란히 달리고 있어, 군 전역이 거의 산지로 이루어져 있다. 강남산맥과 적유령산맥 사이를 독로강(禿魯江)이 흘러 압록강으로 들어가며, 이 독로강과 압록강 유역에 좁은 평야와 강계분지가 형성되어 있어, 군민의 거주지․생산 지대가 된다.
기후는 사방이 산악으로 둘러싸인 내륙 깊숙한 고원 지대이므로, 대륙성 기후의 특징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추위와 더위의 차이가 매우 커, 1월 평균 기온 -18℃, 8월 평균 기온 23.1℃로 연교차가 41.1℃이며, 연평균 기온은 5.5℃이다. 연 강수량은 935㎜이고, 대개 첫서리는 9월 27일경, 마지막 서리는 5월 13일경에 내린다.
≪여지도서≫에 의하면, 1759년(영조 35) 당시 11방에 2만1160호, 인구는 8만1610인(남 4만1091인, 여 4만519인)이었다. 한편, ≪강계읍지≫에 따르면, 1871년(고종 8) 당시 20면에 호수는 1만214호, 인구는 3만8699인(남 2만4194인, 여 1만4505인)으로 나타나고 있어 두 문헌이 현격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군의 대부분이 산지이므로, 구릉의 경사지를 개간하여 농경지로 삼았다. 평야가 적어 논농사보다 밭농사가 활발해, 쌀은 자급하기에 부족하지만 조․콩․대마의 산출이 많으며, 옥수수, 감자, 메밀의 생산량도 적지 않다. 또, 농가의 부업으로 양계, 양돈, 축우가 비교적 성하다. 특히, 강계의 소는 예로부터 품종이 우수하기로 유명하다.
상업 활동의 경우 상설 시장은 없고, 모두 5일 정기장이다. ≪임원경제지≫에 의하면, 1830년대에 강계 서부의 평리면에 하청장(河淸場)이, 시상면에 전평장(錢平場)이 5일장으로 열려, 과일,채소,곡물류와 그릇,동물 가죽,가축 등이 거래되었다고 한다. 또, ≪증보문헌비고≫에 의하면, 1902년에는 입석시장(立石市場)이 2일과 7일에 열렸다고 한다.

 
강계(강계장) 
 
1401년(태종 1) 입석(立石) •이언(伊彦)의 2곳을 합쳐 석주(石州)라 부르고, 2년 후에는 부(府)로 승격시키고, 다시 10년 후에는 도호부(都護府)가 되었다. 그 후 세종(世宗) 때에는 한때 도절제사영(都節制使營)을 두었다가 폐한 것을, 문종(文宗)이 다시 두었는데, 단종(端宗) 때 또 폐지하였다. 세조 때에는 우예(虞芮) •자성(慈城)의 2군을 폐하여 그곳에 살던 백성을 이곳으로 옮기고 1458년(세조 4) 부사(府使)를 두었으며 (여지도서 강계조 참조), 인조(仁祖) 때에는 판관(判官)을 폐하고, 1692년(숙종 18) 우방어사(右防禦使)를 두어, 위원(渭原) •초산(楚山)도 관할하게 하였다.
1895년(고종 32) 강계부(江界府)는 자성 •후창 •강계 등 3군을 관할하였고, 1914년 군면폐합 때 강계군이 되었다. 별칭은 석주(石州) •청원(淸源)이다. 1945년 당시 관할구역은 1읍(江界) 16면(曲河 •時中 •漁雷 •高山 •文玉 •外貴 •吏西 •從西 •從南 •公北 •干北 •城干 •前川 •化京 •龍林 •立館) 73개동이고, 강계읍 동부동에 군청이 있다. 현재 강계읍과 문옥면 만포진(滿浦鎭)은 각각 강계시 •만포시로 승격하였다.
- 전평(錢平) [?] : 미(米), 두(豆), 모맥(牟麥), 면포(綿布), 면화(綿化), 어염(魚鹽), 연초(煙草), 우독(牛犢), 계돈(鷄豚), 과물(果物), 목물(木物), 유기(鍮器), 철물(鐵物), 옹기(瓮器), 사기(沙器), 노점(蘆점), 봉밀(蜂蜜), 지마(脂麻), 수소(水蘇)
- 산지가 많은 만큼 경작지로서는 구릉 또는 산의 경사지와 독로강 및 그 지류 유역의 평지가 이용된다. 농산물로는 쌀은 거의 없고, 콩 •조 •옥수수 •감자 •대마 등의 밭작물이 주가 되는데, 그 중 조 •콩 •대마 생산은 도내 제1위를 차지한 때도 있었다. 조 •옥수수 •감자는 주민의 주식원이 된다. 축우 •양계 등의 부업도 비교적 성하다.

<전거:신증동국여지승람, 강계읍지, 강계군지(1974)>
 
선천 
 
평안북도 서남해안에 위치하고 있다. 동쪽은 정주•구성, 서쪽은 철산, 남쪽은 황해, 북쪽은 구성•의주와 접하고 있다. 북부와 동부는 강남산맥의 여맥이 뻗어 내려 대목산(大睦山, 349m) •문수산(文秀山, 741m) 등이 솟았지만 대부분의 지역은 평야지대이다.
하천은 대개 북부 산지에서 발원해 황해로 들어가는데, 남동쪽의 동래강(東萊江)은 정주군(定州郡)과의 경계를 흐르면서 유역에 정주평야를 형성하고, 북서부의 동림천(東林川)은 용천평야(龍川平野)를 형성하는데 모두 넓고 기름진 충적평야이다. 해안은 침강에 의한 리아스식해안이 발달하였고, 앞바다에는 신미도(身彌島) •지도(芝島) •삼월도(三月島) •홍건도(洪建島) 등이 흩어져 있다. 그러나 해안일대는 조석간만의 차가 심하고 대륙붕이 발달했으며 수심이 얕아 큰 배가 닿기에는 부적합하다.
기후는 해양에 접해 있어 그 영향을 받지만 대륙에서 서북계절풍이 강하게 불어와 한서의 차가 심한 대륙성 기후를 나타낸다. 연평균기온 7.2℃, 1월 평균기온 -9.5℃, 8월 평균기온 24.8℃이며, 연강수량은 1,167㎜이다. 해안선 일대의 일조율(日照率)은 60% 이상이다.
≪여지도서≫에 따르면, 1759년(영조 35) 당시 선천군은 9면 63리로 되어 있었으며, 호수는 9,314호, 인구는 3만1213명이었다. 1811년(순조 11) 가산(嘉山)을 거점으로 홍경래(洪景來)의 난이 일어나 선천군도 함락되었으며, 난이 평정된 뒤 이곳 수령이 반란군에게 항복했다고 해 현으로 강등되기도 하였다.
남부에 비교적 넓고 기름진 충적평야를 끼고 있어 주산업은 농업이다. 밭작물로는 조•콩•밀•옥수수•대마 등이 생산된다. 부업으로 누에치기•축우사육•양돈•직조 등이 이루어졌다. 연안일대에서는 조기•새우•뱅어•조개 등이 잡힌다. 특히 신미도 부근은 조기의 산란장으로 위도(蝟島) •연평도(延坪島)와 함께 우리 나라의 3대 조기어장을 이루기도 하였다. 명산물로 어란•은어•갈매기알 등이 있다.
시장으로는 선천읍의 선천장, 심천면의 고군영장(古軍營場, 일명 淸江場), 동면의 노하장(路下場) 등이 있었다. 이 가운데 가장 크고 유명한 시장은 3•8일의 선천장인데, 이곳에서는 거래하는 물건에 따라 싸전거리•생물전거리•포목전거리•마우전거리〔牛市場〕 등으로 구분해 장이 섰다. 농민들은 대개 곡식류, 손으로 짠 천, 가축, 달걀, 가마니 등을 가지고 장에 와서 고무신•광목•등유 등 일용잡화를 사 갔다. 
 
선천(선천장) 
 
선천군은 한사군(漢四郡)을 거쳐 고구려 시대에는 안화군(安化郡)이라 하였고, 발해(渤海) 때에는 서경압록부(西京鴨綠府)에 속하였다가 발해가 멸망한 후 오랫동안 여진족(女眞族)이 발호하였던 곳이다. 고려 초에 통주(通州)라 개칭하였고, 1030년(현종 21)에 선주(宣州)라 하여 방어사(防禦使)가 있었다. 1413년(태종 13)에 선천이라 개칭하였고, 1563년(명종 32)에 부(府)로 승격되었으며, 병자호란(丙子胡亂) 후 임반부(林畔府)와 합쳐서 청북수군방어사(淸北水軍防禦使)를 겸하게 하였다.
1895년(고종 13) 13도제 실시에 따라 선천군이 되었고 관할 구역은 선천읍 외에 대산(臺山)•군산(郡山)•남(南)•동(東)•수청(水淸)•신부(新府)•용연(龍淵)•심천(深川)면의 1읍 8개면으로 구성되었다.
- 읍내장[3일, 3일] : 미(米), 두(豆), 모맥(牟麥), 면포(綿布), 면화(綿化), 어염(魚鹽), 연초(煙草), 우독(牛犢), 계돈(鷄豚), 과물(果物), 목물(木物), 유기(鍮器), 철물(鐵物), 옹기(瓮器), 사기(沙器), 봉밀(蜂蜜), 지마(脂麻), 수소(水蘇)
- 선천군은 용천평야의 동부를 차지하고, 용연저수지(龍淵貯水池)를 비롯한 관개시설이 갖추어져서 벼농사가 잘 된다. 특히 선천미(宣川米)는 정주미(定州米)와 함께 고품질의 쌀로 유명하였다. 밭농사로는 밀 •보리 •조 •옥수수 •콩 등의 산출량이 많으며, 메밀 •팥 •감자 등의 생산량도 많고 양잠 •축우 •양돈 등도 활발하다.
 
안변(안변장) 
 
고구려의 비열홀주(比列忽州) •천성(淺城)으로, 신라에서는 비열주(比列州) 또는 삭정군(朔庭郡)이라 하였다. 고려에서는 등주(登州)라 하였으며, 1018년(현종 9)에는 등주안변 도호부(登州安邊都護府)를 두었다.
조선시대에는 1394년(태조 3) 현(縣)으로서 감무(監務)를 두었다가 이듬해 도호부로 승격시켰으며, 세조(世祖) 때에는 진(鎭)을 두기도 하였다. 1895년(고종 32)에 군(郡)이 되었고, 1914년 학포(鶴浦) •영풍(永豊)의 2개 군을 합병하였다. 관할구역은 안변 •안도 •배화 •서곡 •석왕사 •신모 •신고산 등 7개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 읍내장(邑內場)[3일, 8일] : 미(米), 두(豆), 맥(麥), 면포(綿布), 마포(麻布), 어염(魚鹽), 철물(鐵物), 부정(釜鼎), 연초(煙草), 치계(雉鷄)
- 군의 북반부를 이루는 남대천 •학천 유역인 안변평야는 토지가 기름지고 관개시설도 정비되어 있어서 각종 농산물이 넉넉하다. 그 중에서도 쌀은 도내에서도 제일이며 그 밖에 조 •콩 •밀 •감자 등의 산출도 많다. 또 안변면을 중심으로 과수재배가 성하여 사과 •배를 산출한다. 석왕사(釋王寺) 주위의 삼림에는 송이버섯, 산악지대에는 꿀, 서곡면 •신고산면은 목재 •목탄의 산출로 이름이 높다.
 
안주 
 
평안남도 서북단에 위치하고 있다. 동쪽은 개천과 순천, 남쪽은 평원, 북쪽은 박천과 영변에 접하고, 서쪽은 황해에 면하여 있다. 동쪽은 묘향산맥의 지맥인 자모산맥(慈母山脈)이 뻗어 내려 구릉성 산지를 이루고, 북쪽은 묘향산에서 발원한 청천강이 평안북도와의 경계를 이루면서 서쪽으로 흘러 서해로 들어가고, 강을 따라 좁은 유역평야가 발달되었다. 동부 구릉 지대를 제외한 지역은 넓고 낮은 안주평야가 펼쳐진다. 기후는 해양과 접하고 있어서 비교적 따뜻하지만 대륙성 기후의 영향으로 기온의 일교차가 심하다. 연평균 기온 8.6℃, 1월 평균 기온 -10.3℃, 8월 평균 기온 24.5℃, 연 강수량 1,085㎜이다.
조선 시대의 이곳은 군사적 요지, 정치적 고읍으로서 중시되었다. 평안도라는 이름이 곧 평양과 안주를 중심한 지역이라는 데에서 나온 것만 보아도 이곳이 얼마나 중시되었는지 알 수 있다. 열두삼천벌이라 불리는 넓고 기름진 평야가 펼쳐져 있으며, 농업이 주산업을 이룬다. 주요 농산물은 쌀•조•메밀•콩•옥수수•수수 등이고, 특용작물로는 면화•들깨•참깨•무•오이 등이 생산된다. 안주쌀은 생산량이 도내의 수위를 차지하였으며, 품질도 좋았다.
일찍부터 누에치기가 발달하여 안주에서 생산되는 명주․항라․안주수는 전국적으로 유명하다. 안주수는 예로부터 명주․항라 등의 명산지로 유명한 이곳에 서울의 궁중 귀인이 와서 살면서 수를 놓는 기술을 전수한 데에서, 또는 이곳으로 유배 온 사람들이 소일거리로 수를 놓기 시작한 데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정교하고 아름다운 것이 특징으로 사군자․기와 무늬에 수를 놓은 베갯모 등은 전국에 널리 알려져 혼숫감에는 반드시 안주수의 베갯모가 곁들여져야 하였을 정도로 유명하다.
수산업은 청천강 어귀 근해에서 활발하고, 입석면의 원조포 일대는 조개잡이 중심지이며, 노강진은 조개젓으로 유명하다. 주요 수산물로는 조기•갈치•준치•홍어•조개 등이 어획 및 채취된다. 청천강에서는 백어•숭어 등 담수어의 어획이 많은데, 특히 산란기에 상류로 올라와 산란하고 내려가는 숭어는 소착숭어라 하여 그 맛이 일품이다.
상업 활동은 정기 시장 5개소, 가축 시장 4개소가 있다. 안주읍 염전장은 4•9일, 운곡면 용복장과 대니면 만성장은 5•10일, 입석면 입석장은 2•7일, 신안주면 신안주장은 3•8일에 열린다.
안주읍 안주가축시장은 3•8일에 열리는데, 육질이 좋은 평양우(平壤牛)의 집산지로서 이곳 최대 규모의 우시장이다. 그 밖에 대니면 만성우시장, 입석면 입석우시장이 있다. 
 
영흥(영흥장) 
 
영흥군은 본래 고구려의 장령진(長嶺鎭)인데, 당문(唐文) 또는 박평군(博平郡)이라고도 하였다. 고구려 초기에는 화주(和州)라 하였고, 955년(광종 6)에 처음으로 성보(城堡)를 두었다. 995년(성종 14)에 안변도호부(安邊都護府)로 합병 •개칭하였다가 1028년(현종 19) 화주방어사(和州防禦使) 본궁(本宮)이 되었다.
고종(高宗)때 원(元)의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가 설치되고 등주(登州)와 통주(通州)를 합쳤다. 이는 다시 충렬왕(忠烈王) 때 복구되었다. 1356년(공민왕 5)에 화주목(和州牧)이 되고, 69년(공민왕 18)에 화령부(和寧府)로 고쳤다.
조선에 들어와 태조(太祖)는 1393년에 영흥부(永興府)를 개칭, 진(鎭) 이름을 평주(平州)라고 하였다. 1403년(태종 3)에 군(郡)이 되었다가, 그 이듬해 부(府)로 승격, 16년(태종 16)에 화주목(和州牧)으로 개칭 토관(土官)을 두었고, 세종조(世宗朝)에 와서 진을 두었다.
그 후 1470년(성종 원년)에 관찰사영(觀察使營)을 본부(本府)에 옮기고 토관을 두었다. 1509년(중종 4)에 다시 관찰사영을 함흥으로 옮기고 영흥대도호부(永興大都護府)에 승격되고, 1895년(고종 32) 영흥군이 된 이래 오늘에 이르렀다.
관할구역은 연흥읍 •순녕면(順寧面) •억기면(憶岐面) •진평면(鎭坪面) •호도면(虎島面) •고령면(古寧面) •인흥면(仁興面) •덕흥면(德興面) •장흥면(長興面) •선흥면(宣興面) •요덕면(燿德面) •횡천면(橫川面)등 1읍 11면이다.
- 부내장(府內場)[5일, 10일] : 맥(麥), 면포(綿布), 마포(麻布), 어염(魚鹽), 유기(鍮器), 철물(鐵物), 노점(蘆점), 연초(煙草), 우독(牛犢)
- 영흥군의 지세상 동부 평야지대에서는 벼농사가 발달되어, 많은 쌀을 산출하며, 서부의 고원지대는 밭농사가 탁월하여 조 •피 •콩 •옥수수 •밀의 산출이 많다. 양잠과 축우는 농가의 일반적 부업이 되어 있다. 영흥읍은 명주(明紬)의 산지이고, 대규모의 소시장으로서 전국에 알려졌다.
주요 수산물은 명태 •정어리 •고등어 •연어 •대구 •굴 등인데, 호도면의 소응진(巢鷹津), 고령면의 가진(加津), 백안(白安)의 3대 어장이 유명하다.

<전거:신증동국여지승람, 여지도서, 영흥군읍지>
 
의주 
 
평안도 북서단에 위치하고 있다. 동쪽으로는 삭주•구성, 남쪽으로는 용천•철산•선천, 북서쪽으로는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중국(만주지방)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산세는 대체로 동남쪽이 높은 산악지대이며, 서남쪽으로 갈수록 점차 낮아진다.천마산에서 발원한 삼교천(三橋川, 일명 古津江, 129㎞)이 서남쪽으로 흘러 하류에 와서는 용천군과의 경계를 이루며, 압록강으로 유입한다. 백운산(白雲山, 672m)에서 발원한 당목천(棠木川, 일명 玉江, 40.8㎞)은 북쪽으로 흘러 압록강으로 유입한다. 북부의 국경지대를 흐르는 압록강은 삼교천과 당목천을 합해 서남쪽으로 흐르며, 하류에는 충적에 의한 위화도(威化島)•신도(薪島)•임도(林島)•검동도(黔洞島) 등의 하중도가 형성되어 있다.
남부와 동부가 산지대로 되어 있으나 북부와 서부로 가면서 점차 낮아져 압록강 연안은 평야로 되어 있다. 기후는 우리 나라 북단에 위치하고, 또 대륙에 연접된 만큼 한서의 차가 심한 대륙성기후를 나타낸다. 연평균기온 8.5℃, 1월 평균기온 -10.3℃, 8월 평균기온 24℃이며, 연강수량은 900㎜이다. 첫 얼음은 10월 14일경 얼기 시작해 다음 해 4월 13일경 녹는다.
세조 때 진(鎭)을 두어 북방수비의 가장 중요한 요충지로 삼았으며, 중국에 대한 제일의 문호가 되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의하면 의주목의 호구는 531호, 1,498인이었으며, ≪여지도서≫에 의하면 1759년(영조 35) 당시 의주부는 21방(坊) 174리로 호구는 1만7322호, 7만5119인이었다고 한다. 1811년(순조 11) 홍경래(洪景來)의 난 때에는 청천강 이북의 서북8읍이 모두 점령되었으나 이 곳은 구성•영변과 함께 점령을 면하였다. 홍경래군이 무너지기 시작한 것도 이 곳 부영(府營)의 허항(許沆)이 이끄는 관군과 김견신(金見臣)이 이끄는 민병(民兵)이 용천을 수복하면서부터였다.
평야는 압록강 연안 및 삼교천•당목천 유역에 발달되었으며, 주민의 거주지와 농경지로 이용된다. 주 산업은 농업으로 밭농사가 주로 이루어지나, 논이 많아 쌀생산도 적지 않다. 밭작물로는 콩•옥수수•조•감자 등의 산출량이 다른 군보다 많다. 명산물로는 뱅어[白魚]가 있다.
시장으로는, ≪임원경제지≫에 의하면, 1830년대 남문 밖에 오목장과 부의 서쪽 양하면에 인산장, 부의 남쪽 피현면에 체마장이 서로 날을 달리하면서 5일장으로 열렸으며, 쌀•콩•조•옥수수•포목•주단•조기•소금•배•밤•대추•감•유기그릇•철물•나무그릇•옹기•사기그릇•담배•삿자리•돼지•소•닭 등이 거래되었다 한다. ≪증보문헌비고≫에 의하면, 1902년경에 오목장•인산장•양하장•산성장•청성장•석교장 등 6개소에서 5일장이 열렸다. 그러던 것이 1926년에는 의주면 동부동에 오목장, 광성면 연산동에 인산장, 고령삭면에 영산장, 피현면에 체마장, 위원면에 피현장이 있었다. 이 중 1•6일에 열리는 오목장이 가장 번성했으며, 쌀•콩•팥•피•옥수수•돼지•소 등이 주로 거래되었다. 그러나 신의주부가 생기면서 상공업의 중심이 옮겨가 기능이 점차 쇠퇴하였다. 2•7일에 열리는 체마장에서는 주로 만주에서 생산되는 조•소금•쌀•포목•․가축류가 거래되었는데, 특히 우시장은 널리 알려져 있다. 
 
의주(의주장) 
 
조선에 들어와 1402년(태종 2)에 판관(判官)을 처음 두고, 정주(靜州)와 위화진(威化鎭)을 합하였으며, 세조(世祖) 때에는 진(鎭)을 두고, 북변 수비의 요지로 삼는 한편 중국에 대한 문호역할을 하였다. 1895년(고종 32) 전국 행정구획 변경 때 3부(府)의 하나가 되고, 그 이듬해 평북 도청소재지를 겸한 군이 되었다.
그 후 평북 청이 신의주로 이전, 1944년 5월에 청수동(靑水洞)이 삭주군으로 이관된 뒤 오늘에 이른다. 군은 의주읍을 비롯하여, 위원(威遠) •고관(古館) •위화(威化) •고성(古城) •송장(松長) •수진(水鎭) •가산(加山) •광평(廣坪) •옥상(玉尙) •고령삭(古寧朔) •월화(月華) •비현(枇峴) 면의 1읍 12개면으로 나누어져 있다.
- 오목(梧木)[?] : 미(米), 두(豆), 모맥(牟麥), 면포(綿布), 어염(魚鹽), 연초(煙草), 우독(牛犢), 계돈(鷄豚), 과물(果物), 목물(木物), 유기(鍮器), 철물(鐵物), 옹기(瓮器), 사기(沙器), 노점(蘆점)
- 압록강과 삼교천 연안의 충적평야에서 쌀이 산출되나 전작이 주로서 보리 •밀 •조 •수수 •옥수수 •콩 •팥 •감자 •삼 등의 산출이 많고, 작잠( 蠶)과 소 •돼지 등의 사육도 활발하다.

<전거:신증동국지승람, 여지도서, 의주군지(1975)>
 
정주(정주장) 
 
정주군은 원래 고려시대의 구주군(龜州郡)에 속하였다. 1019년(고려 현종 10)에 강감찬(姜邯贊) 장군이 거란군을 전멸시킨 곳이며, 그 후 정주방어사(定州防禦使)를 두었다. 1231년(고려 고종 18) 몽골 침입 때 병마사 박서(朴犀)가 끝까지 싸운 공으로 정원대도호부(定遠大都護府)로 승격되고, 후에 정주도호부, 정주목(定州牧)이 되었다. 다시 주치(州治)를 마산(馬山) 남쪽으로 옮기고, 1456년(조선 세조 1)에 고구주(古龜州) 땅을 나누어 구주군(龜州郡)을 두었으며, 67년(세조 12)에 주치를 수천(隋川)으로 옮기는 등 변동을 거듭하다가 1895년(고종 32)에 정주군(定州郡)으로 개편되었고, 1914년에 곽산군(郭山郡)을 흡수하였다.
- 읍내장[1일, 6일] : 미(米), 두(豆), 모맥(牟麥), 면포(綿布), 면화(綿化), 어염(魚鹽), 연초(煙草), 우독(牛犢), 계돈(鷄豚), 과물(果物), 목물(木物), 유기(鍮器), 철물(鐵物), 옹기(瓮器), 사기(沙器), 지마(脂麻), 수소(水蘇)
- 정주평야는 관개시설이 갖추어져서 정주미(定州米)라는 우수미를 산출하며, 전작으로 보리 •밀 •조 •옥수수 •수수 •콩 •감자 등을 산출한다. 부근의 사과도 질이 우수하며, 소 •돼지 등의 사육수가 많다. 황해에서는 조기 •멸치 •민어 •가자미 등의 어획물과 조개 •굴의 양식업도 발달하였다. 북부의 옥천면 상단동(上端洞)은 금의 산지이다.

<전거:신증동국여지승람, 정주읍지, 정주군지(1975)>
 
중화(중화장) 
 
중화군은 이웃 상원군을 합쳐 오늘에 이르렀다. 고구려 때에는 가화압(加火押)이던 것을 신라 헌덕왕(憲德王) 때는 당악현(唐嶽縣)이라 하였고, 고려 초에는 당악촌이라 하여 서경(西京)에 소속시켰다. 1136년(인종 14) 묘청(妙淸)의 난을 평정시킨 뒤 경기 4도(道)를 나누어 6현(縣)을 만들 때 황곡(荒谷) •당악(唐嶽) •송관[松串] 등 9촌(村)을 합하여 중화현을 만들고 영(令)을 두어 서경의 속현이 되었다. 1322년(충숙왕 9)에 군(郡)으로 승격되고 여전히 영을 두었으며, 1371년(공민왕 20)에 다시 승격하여 지군사(知郡事)를 두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군 •민의 공을 인정하여 부(府)로 승격시켰고, 1895년(고종 23) 군이 되었다가 1914년 상원군을 합쳤다. 상원군은 본래 고구려의 식달현(息達縣)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 때에는 토산현(土山縣)으로 바뀌었다. 1018년(고려 현종 9)에는 황주(黃州)에 속하였으며, 1322년(충숙왕 9)에 상원으로 개칭하고, 군(郡)으로 승격시켰다. 후에 평안도에 속했으며, 조선시대를 거쳐 1914년에 중화군에 합병되었다.
- 옥가(獄街)장[?] : 미(米), 두(豆), 모맥(牟麥), 면포(綿布), 면화(綿化), 명주(明紬), 어염(魚鹽), 연초(煙草), 우독(牛犢), 계돈(鷄豚), 과물(果物), 목물(木物), 유기(鍮器), 철물(鐵物), 옹기(瓮器), 사기(沙器)
- 중화군의 주산업은 농업으로, 동부지역은 서부지역의 논에 비하여 밭이 많으나 석회암 지역으로, 경지가 적고 토양이 척박하여 주로 밀 •조 •콩 •메밀 •목화 •고구마 등의 재배가 활발하다. 서부의 준평원 지역은 비옥한 토양에 곤양강을 이용한 관개시설로 쌀의 재배가 성하다. 또 사과 산지로도 유명하며, 그 밖에 양잠과 목축업이 행해진다.
 
진남포 
 
평안도 용강군에 둘러싸여 있으며, 남쪽은 대동강을 경계로 황해도와 접하고 있다. 대부분의 지역이 구릉 지대와 평야 지대로 이루어져 있다. 서남부•동남부•북부에는 낮은 구릉성 산지가 형성되어 있으며, 남쪽과 동쪽은 넓은 후포천(後浦川)의 충적평야가 발달해 있다. 대동강 연안에 위치하고 있어, 하구가 나팔상으로 벌어지는 삼각강을 이루어 항만으로서의 지형적 조건은 유리하지만 조차가 커서 선박 출입이 불편하다.
기후는 대륙성 기후이나 내륙 지방에 비하여 온화하다. 연평균 기온 10.3℃, 1월 평균 기온 -6.8℃, 8월 평균 기온 25.1℃이며, 연 강수량은 701.6㎜로 소우지이다.
1413년(태종 13) 평안도에 속하게 되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의하면, 15세기 중엽 삼화현의 호구는 410호, 3,105명이었다. 1896년 평안남도 삼화군으로 개편되었다. 진남포 지역은 원당면에 속하였던 작은 어촌이었으나 1894년 청일전쟁 당시 일본 해군이 드나들게 되면서 각광을 받게 되었다. 1897년 개항과 더불어 평양을 중심으로 한 관서 지방의 항구도시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교통의 요지이며, 원료와 제품의 수출입이 이루어지는 무역항이다.
이곳에 발달한 평야 지대는 평양평야․재령평야와 접하고 있어,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쌀 생산지를 이룬다. 주요 농산물은 쌀이다. 정기 시장으로는 신흥리장이 6일장으로 2•8일에 개시되고, 비석리장이 3일장으로 1•4•7일에 개시된다. 주요 거래 품목은 농산물•수산물•직물•특산품 등과 생활필수품이다. 
 
철산(철산장) 
 
본래는 고구려의 옛땅이었으나 발해(渤海) 때는 압록부(鴨綠府)에 속하였다. 고려 시대 993년(성종 12) 거란(契丹)이 침입했을 때 중군사(中軍使) 서희(徐熙)의 외교 담판으로 귀속된 강동육주(江東六州) 중의 하나이며, 장녕현(長寧縣) 또는 동산현(銅山縣)이라고 불렀다.
1018년(현종 9)에는 철주방어사(鐵州防禦使)를 두었고,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1392년(태조 1)에 주지사(州知事) 겸 영삭만호(寧朔萬戶)로 치세케 하였으며, 1413년(태종 13) 철산으로 개명하고 15년에 군(郡)이 된 뒤 오늘에 이르렀다. 1945년 철산군은 철산면 •백량면(栢梁面) •부서면(扶西面) •여한면(餘閑面) •참면(站面) •서림면(西林面) 등 6면 104개 동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 관전장(館前場)[?] : 미(米), 두(豆), 모맥(牟麥), 면포(綿布), 면화(綿化), 어염(魚鹽), 연초(煙草), 우독(牛犢), 계돈(鷄豚), 과물(果物), 목물(木物), 유기(鍮器), 철물(鐵物), 옹기(瓮器), 사기(沙器), 노점(蘆점)
- 찰산군은 평지가 좁고 강수량이 적어 쌀의 산출은 적으며, 조 •밀 •옥수수 •콩 등의 밭작물이 많다. 축우 •양계 •양돈 •양봉 등도 활발하다. 어업은 연안과 도서에서 조기 •새우 •갈치 •병어 •조개 등이 잡힌다. 광업은 금 •인상흑연(鱗狀黑鉛) 등이 난다. 특산물로 ‘철산 모필(毛筆)’이 유명하였다. 
 
평양 
 
4,000여 년의 역사를 지닌 고도(古都)로서 단군왕검이 도읍한 이래 기자조선•위만조선•낙랑•고구려 등의 도읍지였으며, 옛 이름으로는 왕검성(王儉城) •기성(箕城) •낙랑(樂浪) •서경(西京) •호경(鎬京) •유경(柳京) 등이다. 대부분의 지역이 아주 낮은 구릉성 산지와 평야지대로 이루어져 있으며, 대동강 하류의 대동군과 중화군 일대에 걸쳐 발달하고 있는 낙랑준평원의 일부를 차지한다. 낭림산맥에서 발원한 대동강(大同江)이 평양의 중앙부를 관류하면서 서류하다가 황해로 유입되며, 평원군에서 발원한 보통강(普通江)이 남류하다가 대동강과 합류한다. 특히, 평양은 대동강의 양안에 형성되어 북서안은 공격사면으로 급경사를 이루지만 남동안은 퇴적사면으로 하천에 의하여 퇴적된 넓은 충적평야가 발달되어 있으며, 그 밖에 대부분의 평야지대는 석회암이 오랫동안 풍화, 침식되어 낮은 구릉을 이룬 카르스트준평원이다.
기후는 대륙성기후의 특징을 나타내 한서의 차가 심하다. 연평균기온 9.4℃, 1월평균기온 -8.1℃, 8월평균기온 24.4℃, 연강수량 924㎜이다.
1413년(태종 13) 지방행정 개편시 서북면을 평안도(平安道)로 개편하고 이곳을 평양부라 하여 관찰사를 두어 행정과 군사를 돌보게 하였다. 당시 평안도의 주민은 극히 소수였던 관계로 세종•세조대에 사민정책을 실시하여 남부지방 주민들에게 여러 가지 혜택을 주면서 평안도 각지로 이주하게 하였는데, 이로써 이 지방의 인구는 점차 증가하게 되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계속된 외침으로 피폐해진 이곳을 재건하기 위하여 영조는 1733년(영조 9)에 평양성과 도시의 일부를 수축하도록 하는 영을 내렸다. 이 지역은 풍부한 물산과 경승지로 서북지방의 모든 중심지 역할을 하게 되었으며, 청나라와의 무역에 종사하는 상인들도 계속 늘어나 번성하였다.
평양은 관서지방 제1의 경제도시로 대동강 유역의 풍부한 임산․지하․농산 자원을 원료로 각종 산업이 발달하였다. 대동강 유역에 형성된 평양평야는 대부분 석회암지대로 테라로사 토양을 이룬다. 흙의 보수력이 강하므로 강수량이 적은 이 지역에 적합하여 벼농사의 중심지를 이루며 밭농사에도 유리하다.
주요 농산물로는 쌀•콩•조 등이 있으며, 특용작물은 양잠 등이다. 특히, 평양고치는 생육조건이 적합하여 질이 우수하며, 평안도 지역이 주요 산지로 손꼽힌다. 평양소는 골격이 크고 내구력이 강하여 노역에 적합하고 온순한 우량우로서 전국적으로 잘 알려져 있다.
평양시는 예로부터 대구•강경과 더불어 조선의 3대시장이라 불리던 상업도시였으며, 1898년 개시장(開市場)으로 지정되어 중국과의 무역도 활발히 이루어졌다. 1920년 공설시장제의 실시 이전에는 종로 일대 상영시장(上營市場)을 중심으로 정기시장이 열려 농수산물•생활필수품•신탄 등의 거래가 있었으나, 대규모의 상설시장으로 정기시장의 기능을 잃게 되었다. 사창리 시장은 평양객주의 근거지였으며, 곡물류•식료품•주단•포목•피혁•어물류•생활필수품 등의 도산매활동이 활발하여, 관서지방 경제유통의 중심기능을 담당하였다. 또한, 신양리의 평양가축시장은 1•6일에 개시되어 평양소의 거래가 활발하였다. 
 
평양(읍내장) 
 
1269년(원종 10), 서북면병마사 영기관(西北面兵馬使榮記官) 최탄(崔坦), 삼화현 교위(三和縣校尉) 이연령(李延齡) 등이 난을 일으켜 유수를 죽이고 서경과 여러 성을 몽골[蒙古]에 바쳤으므로 몽골은 이듬해 서경에 동녕부(東寧府)를 두고 파령(破嶺:慈悲嶺)으로 경계를 삼다가 90년(충렬왕 16) 원(元)나라가 고려에 돌려줌으로써 다시 서경유수를 두었다. 1369년(공민왕 18)에 만호부(萬戶府)를 두고, 후에 평양부로 개칭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관찰사로 하여금 부윤(府尹)을 겸임하도록 하였다. 1592년(선조 25)의 임진왜란과 1627년(인조 5)의 병자호란을 겪는 등 많은 변혁을 거쳐 1895년 23부(府)의 하나가 되었고, 이듬해 전국을 13도(道)로 분할함에 따라 평남 도청소재지가 되었다.
1914년 부제(府制)가 실시되었고 1927년 부역(府域)을 확장하여 대동군의 고평면(古坪面) •임원면(林原面)의 일부와 평천리(平川里) •서성리(西城里) •기림리(箕林里)를 편입하고, 또 1937~1944년에 걸쳐 다시 대동군의 일부를 편입, 부역을 넓혔다.
- 읍내장[1일, 6일] : 미(米), 두(豆), 모맥(牟麥), 면포(綿布), 어염(魚鹽), 우독(牛犢), 계돈(鷄豚), 과물(果物), 유기(鍮器), 철물(鐵物), 옹기(瓮器), 사기(沙器), 노점(蘆점), 봉밀(蜂蜜), 지마(脂麻), 수소(水蘇), 저포(苧布), 지지(紙地)
- 평양 동쪽의 넓은 대동강 수계 구역과 남쪽의 낙랑준평원 등 비옥한 들판을 끼고 있어서 채소 •과일 •원예 등 근교농업이 발달하였고, 양돈 •양계도 활발하며, 쌀 •콩 •조 등의 농산물 산출도 많다.
 
함흥(함흥장) 
 
당초 옥저(沃沮)의 중요한 부락이었으며, 600년 동안 고구려의 성읍이었다가 668년 신라와 당(唐)나라의 연합군에 의하여 멸망한 뒤에는 당나라의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에 예속되고, 발해가 건국된 뒤에는 발해에 영유되었으며, 고려 초까지 여진족(女眞族)이 발호하는 지역이었다.
1107년(예종 2)에 윤관(尹瓘)이 여진을 정벌하고, 이듬해에 함주대도독부(咸州大都督府)를 설치, 진동군(鎭東軍)을 두었다. 1258년(고종 45) 원(元)나라가 침입하여 합란부(哈蘭府)라 하여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에 예속시켰다. 1356년(공민왕 5) 유인우(柳仁雨)는 이자춘(李子春)의 내응을 얻어 쌍성을 수복하고 함주지사(咸州知事)를 두었다가 만호부(萬戶府)의 영(營)을 두고 목(牧)이라 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1416년(태종 16) 함흥이라 하고 관찰사를 두었다. 1466년(세조 12)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일어나 70년(성종 1) 관찰사를 영흥으로 옮기고 군으로 강등하였으나 3년 뒤 관찰사 본영을 환원하였다.
1895년(고종 32) 23부제 실시 때 함흥부가 되었고, 1996년 13도제로 개편함에 따라 함남 관찰사청(觀察使廳)을 두었으며, 1910년에 지방행정개혁에 따라 함흥군 함흥읍으로서 도청 소재지가 되었다. 1930년에 부제(府制) 실시로 함흥부가 되고, 함흥군의 여타 지역은 함주군이 되었다.
- 부내장(府內場)[2일, 7일] : 미(米), 두(豆), 맥(麥), 직속(稷粟), 면포(綿布), 마포(麻布), 어염(魚鹽), 과물(果物), 유기(鍮器), 철물(鐵物), 목물(木物), 옹기(瓮器), 노점(蘆점), 연초(煙草), 치계(雉鷄), 우독(牛犢)
- 함흥평야는 쌀 •보리 •밀 •콩 •감자 등의 명산지이고, 사과의 생산량이 많아서 함흥은 그 집산지로 번영하여 예로부터 한국 3대 정기시(定期市)로 유명하였다. 특히 약령시(藥令市) •우시(牛市) •어물시(魚物市) •신탄시(薪炭市) 등은 유명하다.
개마고원의 원목을 함남선(咸南線) 및 신흥선(新興線) •장진선(長津線) 등을 거쳐 운반하여 목재시장을 이루고 있다. 
 


조선시대 상업사건

 

개성상인 김찬흥이 자진(自進)하여 동래상인이 되다 
 
김찬흥의 아버지가 자신의 걱정이 기우에 지나지 않았음을 깨달은 것은 그로부터 몇 년 후 김찬흥이 스스로 가업을 이어 장사를 해보겠다고 나서면서부터였다. 김찬흥이 워낙 자신의 세계가 강하고, 평소 가업에 대해 가타부타 말이 없던 아이인지라 속만 끓이고 있던 아버지로선 쌍수를 들고 반겨도 시원찮았다. 김찬흥의 아버지는 두말 않고, 가업을 김찬흥의 손에 넘겼다. 공연히 장사를 가르친다 뭐다 하며 미뤘다간, 언제 김찬흥의 마음이 바뀔지 모르는 일이었다.

김찬흥의 집안은 대대로 삼포를 경영해 온 삼상이었다. 그러나 나라 법에 따라, 직접적인 판매는 하지 못하고 의주 상인을 거쳐 중국에다 인삼을 판매하고 있었다. 때문에 직접 판매하는 것처럼 큰 이익을 보기는 어려웠다. 물론 밀매를 아주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위험 부담이 너무 컸다.
비록 말은 안 했지만, 당연히 가업을 물려받을 생각이었던 김찬흥은 이미 오래전부터 이 부분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대청무역은 이미 의주상인들의 안마당이나 다름이 없다. 제 아무리 개성의 상인들이 밀매를 한다고 해도, 의주상인들을 따라가긴 어렵다. 더 이상은 개성상인들끼리 치고 받는 꼴밖에 안돼.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인삼을 의주상인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팔아야 한다. 더 이상 개성상인들과 경쟁해서도 안돼. 때문에 기존의 거래처가 아닌, 새로운 시장이 필요하다. 그럼 어디가 좋을까? 본래 모든 사물의 이치는 대칭을 이룬다. 위가 있으면 아래가 있고, 북쪽에 청이 있으면 남쪽엔 일본이 있다!'

마침내 결론에 이르자, 비로소 가업을 물려받겠다는 말을 꺼낸 김찬흥이었다. 김찬흥은 일본과의 무역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아버지에게 밝혔다.

"우린 나라에서도 귀한 인삼이기에 청나라에서도 귀하고, 청나라에서도 귀한 인삼이기에 일본에서도 귀할 것입니다. 또한 청나라와 거래하는 것보단 거래하는 양이 적기에 자연히 경쟁도 적고, 따라서 밀매도 적으니 나라의 감시 또한 엄하지 않을 것입니다."

김찬흥은 차인을 내려보내지 않고 자신이 직접 남쪽으로 내려갔다. 경상도 동래까지 내려와 왜관 주변을 살펴 본 김찬흥은 자신의 생각대로임에 매우 흡족해 했다. 동래상인들이 왜관과 거래를 하고 있기는 했으나 확실히 그 규모가 작았다. 그리고 상인들의 수도 개성이나 의주에 비하면 현저히 적어 경쟁이 없었다. 다시 말해 넓은 시장은 갖추어졌으나, 수요에 비해 공급이 모자란단 뜻이었다.

김찬흥은 그대로 동래에 눌러앉았다. 그리고 동래 토박이로 차인을 구해, 개성의 본가로 소식을 전했다. 아들의 서신을 받아 본 김찬흥의 아버지는 크게 기뻐하며, 서둘러 대량의 인삼을 동래로 내려보냈다. 이때부터 김찬흥은 동래상인으로 정착하여 왜관에 인삼을 피집 하였다. 김찬흥이 거래하는 인삼의 양은 동래 상인 중 그 누구도 따라오지 못할 만큼이었고, 이에 따라 김찬흥이 벌어들이는 돈도 막대했다.

몇 년 지나지 않아, 김찬흥은 동래에서 으뜸가는 부상이 되었다. 이 소문이 개성에까지 알려지자, 다른 개성상인들도 앞 다투어 동래로 내려왔다. 본 주인이 오는 경우도 있었고, 차인을 내려보내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무슨 일이든 처음보단 못한 법. 많은 개성상인들이 김찬흥처럼 왜관과 무역을 트긴 했으나, 그 누구도 김찬흥을 따라가진 못했다. 또 김찬흥이 동래에 와서 이룬 부(富)에 비슷하게라도 미치는 자가 없었다. 김찬흥이 차지한 동래 제일 상인의 자리는 부동의 것이었다.

그래도 대청무역보단 차라리 나았다. 때문에 시간이 흐를수록 동래로 내려오는 개성상인의 수는 늘어만 갔고, 나중에는 심지어 "동래상인은 모두 개성상인"이라는 말까지 나돌게 되었다. 이는 김찬흥의 선견지명이 더욱 빛을 발하게 만드는 결과인지도 몰랐다.
 
개성상인 정석린이 이선(異船)과 몰래 교역하다 발각되다 
 
고종이 즉위한지 삼년째 되는 해 정월(고종 3년(1866)), 몇몇 상인들이 이선(異船)과 몰래 통하여 잠삼을 팔다가 붙들리는 사건이 일어났다. 잠상이 관에 발각되어 잡혔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흔하디 흔한 이었기 때문에 별다른 관심거리는 아니었다. 잠상은 말만 밀무역일 뿐 사실 관으로서도 어쩔 수 없을 만큼 성행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번 사건은 다른 이유로 관심을 끌만한 일이 있었으니 바로 이들이 당선이 아닌 ‘서양의 배’와 교역을 했다는 것이다.

정석린과 홍화서는 개성의 상인이다. 이들은 다른 개성 상인들과 마찬가지로 인삼과 홍삼을 거래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하지만 이들은 그리 큰 상인들은 아니었다. 이들이 큰 상인이었다면 이처럼 위험부담이 큰 일에 덜컥 나서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생선 몸통 같은 일거리는 큰 상인들이 도맡아서 하고 이들은 또 관과 연계되어 있었기 때문에 홍화서와 같은 작은 상인들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안동 김씨의 세상이 가고 흥선대원군의 시대가 왔지만 관리들의 행태가 크게 변한 것은 아니었다. 자신들의 냄새를 찾아 먹을 것을 찾는 들짐승처럼 자신과 같은 장사꾼들을 괴롭혔고 그렇다고 그것을 거부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과 같은 상인이 살아 남으려면 돈을 많이 버는 수밖에 없었다. 그 길은 다른 나라와의 교역을 통해서만이 가능했다.

어느 날 정석린은 친구인 홍화서의 방문을 받았다. 홍화서는 정석린에게 잠상을 할 것을 제안했다. 잠상은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길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위험부담이 매우 컸다. 정석린은 최근 일이 잘 풀리지 않아서 앞으로의 일을 걱정하던 차였다. 그는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잘되면 좋겠지만 조금이라도 잘못되는 날에는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었다.

홍화서는 정석린이 망설인다는 것을 눈치 채고는 그를 열심히 설득했다. 홍화서는 본래 겁이 없는 성격이라 매우 대담했지만, 성격이 꼼꼼하지 못해서 실수가 많았다. 하지만 정석린은 아주 치밀한 성격이었고, 머리도 좋았다. 그가 함께 해준다면 이보다 더 좋은 동업자는 없을 것 같았다.

홍화서의 열띤 설득에 결국 정석린은 뜻을 함께 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리고 이들은 곧 앞으로의 일을 의논을 했다. 홍화서의 생각처럼 역시 정석린은 치밀했다. 그가 함께 하자 홍화서 혼자서는 할 수 없었던 일들이 해결되었다. 우선 무엇을 해야 할지 순서가 정해지고 준비할 것들이 정해졌다. 모든 일을 정석린의 계획대로 진행되었고, 홍화서는 일을 추진했다.

하지만 모든 일이 순조롭지는 못했다. 우선 자본이 크게 모자랐다. 배를 구하고 위험부담을 줄이기 위해 관리에게 적당히 쥐어줄 뇌물을 구하려면 돈을 구해야 했던 것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갖고 있는 재산을 적당히 처분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돈을 꾸어서 자금을 마련했다. 그러던 가운데 박면철과 이인순이 합류하게 되었다. 이들 역시 정석린, 홍화서 등과 같은 처지의 개성 상인이었는데 이들의 합류로 준비과정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자본을 구한 홍화서는 먼저 배를 구했다. 박면철과 이인순은 자신들이 팔 인삼과 홍삼을 구했고 정석린은 조금이라도 위험부담을 줄이기 위해 여기저기에 귀를 기울이고 다녔다. 이익을 위해 하는 것이지만 만약 관에 붙들리면 모든 것이 끝이었다. 소탐대실이 되지 않기 위해 이들은 조금이라도 철저히 준비를 했다.

이렇게 준비한 교역이 드디어 성공을 향해 출발했다. 정석린과 홍화서는 다른 상인들처럼 당선과의 교역을 생각했다. 많은 교역이 당선과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들이 갖고 있는 정보도 당선과의 교역이 대부분이었다. 처음 몇 번에는 이들 역시 당선과 교역을 했고 꽤 이문을 남겼다. 하지만 거래하던 청인(淸人)들의 소개로 이들은 다른 배와 교역을 하기 시작했다. 바다 건너에서 왔다는 서양인의 배를 만나게 된 것이다.

서양인들이 가득 탄 배를 만났을 때 이들은 뒤로 까무라칠 정도로 놀랐다. 가끔 청나라 사람이나 왜인들을 보기는 했지만 그들의 얼굴은 조선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었다. 물론 서양인들의 생김새에 대해 들어본 적은 있지만 이렇게 직접 보기는 처음이었다. 너무 당황한 사람들은 얼른 도망이라도 치려고 했지만 어찌 어찌하여 이들과 우연치 않게 장사 아닌 장사를 하게 되었다. 이들은 중국에서 머물고 있는 상인들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정석린 일행이 갖고 있는 물건들에 흥미를 보였고 자신들이 갖고 있는 물건들이나 갖고 있던 은으로 서로 교환을 했다. 이렇게 해서 이들과의 교역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양선’과의 교역을 시작하게 된 것은 우연이었지만, 그 다음부터 정석린과 홍화서 일행의 밀무역은 대부분 이들과의 교역으로 이루어졌다. 서양인들은 청나라 사람들처럼 까다롭게 물건을 살펴보지도 않았고 물건 값을 후하게 치러주는 편이었다. 단지 자기들에게 이것저것 꼬치꼬치 물어보는 것이 귀찮았지만 별다른 내용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저 지나가듯이 대답을 해주곤 했다. 이렇게 이들과의 장사가 계속되자 정석린 일행은 조금씩 이익이 늘기 시작했다. 이대로 가면 정말 큰 부자가 될 것만 같아서 신이 났다.

하지만 이들의 위험한 줄타기는 오래 못 가서 끝이 나게 되었다. 새로운 임금님이 등극한지 세번째 되는 해…그 해 정월은 마음 시리게 아픈 한이 온 조선을 뒤엎은 달이었다. 그 해 정월 대원군은 천주교에 대해 일대 박해를 감행하게 되었다. 한동안 숨을 돌리고 있던 천주교 신자들이 일제히 탄압을 받기 시작했다. 이번 박해는 그 이전의 박해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정석린과 홍화서 일행이 ‘이선(異船)’과 교역하다가 붙들렸다.

이들은 자신들에게 어떤 죄목이 붙여 졌는지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들이 그저 잠상을 하다가 붙들린 것이라고만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관리들은 이들이 서양 배와 서로 통하고 나라를 팔아먹었다고 생각했다.

억울하고 허무했지만 서양인과의 밀무역은 이렇게 끝이 났다.

<전거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고종 3년 정월 25일>
 
객주로서의 신용을 토대로 부를 쌓은, 이어흥 
 
의주(義州)에 살고 있던 이어흥(李於興)은 34세가 되던 1893년 9월 18일, 인천항으로 이주하였다. 인천항이 신흥상업도시로서 면모를 갖추게 되자, 상업을 벌여 볼 목적으로 이주한 것이었다. 그러나 상업 활동에 나선 이후 4~5년이 지나도 순조롭게 풀리지 않자, 물상객주(物商客主)로 나서게 되었다.

영업의 활성화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던 그는 1915년 무렵에 이르러, <물상객주점(物商客主店)> 이라는 상호(商號)의 영업장을 개점하였다. 영업장에서는‘각종물품(各種物品)’을 취급하였지만, 여전히 장사가 잘 되지는 않았다.

'나는 적지 않은 나이에 가족들을 이끌고 이곳으로 이주를 하였다. 타지에 와서 자리를 잡으려고 지금까지 이것 저것 많은 일들을 시도해 보았지만, 일이 뜻대로 풀리지는 않았다. 적지 않은 자금을 투자하여 영업장을 열었지만, 그저 망하지 않을 정도일 뿐이다.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많은 종류의 물품들을 구비해 놓았는데도 불구하고 이윤이 나지 않으니 참으로 딱한 일이다. 무언가 빨리 돌파구를 찾지 않으면 안 된다.'

이어흥은 영업장에 홀로 앉아, 구겨진 종이 조각에 마음 속을 글로 적으며 상심에 젖어 있었다. 의기소침한 그의 얼굴을 본 아내는 안타까운 마음에 위로의 말을 하였다.

"여보,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어떻게 금새 부자가 될 수 있겠어요. 여유 있는 살림은 아니지만, 그래도 밥을 굶지는않으니 염려 마세요.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말도 있지 않아요? 당신이 열심이시니 언젠가 웃을 날이 올 거예요."

이어흥은 넉넉하지 못한 살림에도, 웃으며 위로하는 아내의 모습에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그는 의주를 떠나 인천항으로 옮기려 했을 때 반대하던 아내에게, 큰 소리로 다짐을 하고 이주하였던 것이다. 그런데도 원망하지 않고 묵묵히 기다려 주는 아내가 고마울 뿐이었다.

영업의 활로를 모색하던 이어흥은 영업장의 상호를 <이어흥(李於興)> 으로 바꾸고, 해육산물(海陸産物)의위탁 매매를 주된 영업으로 하였다. 또한 상인들 간의 신용을 중요한 덕목으로 삼기로 하고, 위탁판매할 물건을 맡을 때 주는 임치장(任置狀)의 관리를 철저히 하였다.

물품이나 돈을 맡긴 사람에게 주는 일종의 보관증인 임치장은 돈을 빌리는 데 담보로도 사용될 만큼 중요한 것이었다. 이어흥의 노력이 결실을 보는 듯, 점차 영업장에 상인들이 붐비기 시작하였다. 특히 지방 상인들의 그에 대한 믿음이 두터워, 이를 토대로 외국 상인과도 거래를 이루게 되었다. 처음에는 주로 일본의 상인들과 거래를 하였지만, 나중에는 청나라와 미국 또는 영국이나 독일의 상인과도 거래를 하게 되었다.

이어흥의 사업은 그 뒤에도 나날이 번성해져, 와가(瓦家) 40간 규모의 <광통사(廣通社)>라는 객주점을 경영하게 되었다. 당시 그의 가옥은 초가 12간 이었는데 외동의 평균 가옥 규모인 9간 보다는 컸지만, 대단한 규모라고는 보기 어려운 정도였다.
언젠가 더 좋고 넓은 집을 소유할 꿈을 갖고 이어흥은 더욱 사업에 매진하였다.
 
김성숙, 사들였던 여객주인권을 750냥에 되팔다. 
 
김성숙(金星淑)은 그가 살고 있는 장안의 수운(水運)이 그리 활발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남양의 본주(本主) 백석린(白石麟)에게 700냥을 주고 여객주인권을 매입하였다. 그가 살고 있는 장안의 해안과 하천지역에서는 논농사가 행해지며, 내륙의 구릉지대에서는 주로 밭농사가 행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북부와 남부의 해안지대에서는 소규모의 염전이 산재하므로 그 소금을 이용하여 영업을 활성화시킬 생각으로 여객주인권을 사들인 것이었다.

김성숙은 여객주인권을 매입한 후 일일이 해안을 돌며그곳에 살고 있는어민들에게 염전을 잘 돌보도록 독려하였다. 바닷물을 끌어들여 태양열로 증발시켜서 소금을 만들기 위해서는 넓은 땅이 필수적이었다. 그는 대규모의 염전을 일구기 위해 일꾼들을 고용하여 바닷가에 흩어져 박혀 있는 돌멩이나 작은 바위들을 파내고 땅을 평평하게 골랐다. 또한 소금을 취급하는 상인들을 포섭하여 서로 거래를 하기로 약조하였다.

백석린에게 여객주인권을 매입한 후 두달여가 채 지나지않았을 무렵, 백석린이 찾아와 여객주인권을 다시 사들이기를 간청하였다. 처음에 그는 단호히거절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동안 영업을 활성화 시키기 위해 많은 공을 들였던 것이다. 하지만 백석린은 끈질기게 찾아 와서 그에게 매달렸다. 이유를 들어 보니 백석린이 여객주인권을 갖고 있었던 남양지역의 주민들이 생계를 잃을 지경에 이르자모두 합심하여 압력을 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남양의 주민들은 주인영업에 부수되는 하역운수업이나 거간업 등으로 생계를 삼았던 것이다. 그 중에는 백석린의 집 앞에서진을 치고 조석을거르며 농성하는 이도 있다고 하였다.

김성숙은 삼일 밤을고심한 끝에 백석린의 청을 들어주기로 결정을 하였다. 자신이 들인 노력을생각하면 애석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으나, 그 때문에 생계를 잃은 주민들이 많다고 하니 마음이 편하지않았다. 주인영업으로 돈을 번다 한들, 어디 발 뻗고 잠을 이룰 수나 있겠는가. 그는 여객주인권을 사들인 후 영업의 활성화를 위해 자신이 들인 비용을 계산하여 50냥을 더 받고 팔기로 마음을 먹었다.

"좋습니다, 백주인. 그런데 50냥은 더 얹어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지난 두 달여 동안 주인영업을 위해 들인 비용이 만만치가 않아요. 일꾼들을 고용하여 염전을 일구고 상인들을 포섭하는데 적지 않은 돈을 썼지요. 백주인이야 50냥이 생돈이라 생각될 수도 있겠습니다만, 제 입장에서는 이만저만 손해가 아닙니다. 그 정도는 지불을 해주셔야 할것 같은데요. 어떻습니까?"

김성숙의 말이 끝나자 마자, 백석린은 얼른 고개를 흔들며 말하였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백주인의 말씀이 백번 옳습니다. 그 정도는 저도 예상을 하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영업을 위해 많은 비용과 노력을들이셨겠지요. 다만, 제 청을 들어 주시니 대단히 고맙습니다. 저는 김주인의 호의에 감사할 뿐입니다. "

백석린은 두말하지 않고 조건을 받아 들이기로 하였다. 사실, 무언가 큰 계획을 갖고 거금을들여 사들인 여객주인권을 다시 판다는 것은 누가 생각하여도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그는 기쁜 얼굴로 김성숙에게 고개를 숙여 절을 하였다. 김성숙이 보기에 백석린은 어딘가 모르게 장사치 같은 약삭빠른 인상은 없었고 무언가 초월한 듯한분위기가 있었다. 사실 그가 사리사욕에 밝은 인물 같았으면 청을 거절할 마음이었다. 하지만 백석린은 진실된 사람 같아서 그의 청을 들어줄 마음이 생겼던 것이다.

"너무 그리 말씀하시면 저도 부끄럽습니다. 백주인이 그리 간절히 청하시니 어쩔 수가없었습니다. 게다가 생계를 잃은 주민들이 많다 하시지 않았습니까? 저도 타인의 원망을사서 재물을 모을생각은 없는 사람입니다. 이만 자리를 옮겨 식사나 하십시다."

그날, 근처의 주막에 들은 김성숙와 백석린은 오랫동안 세상살이 이야기를 하며 친분을 맺었다. 그 후에도 그들은 서로를 왕래하며 오랫동안 우의를 나누었다.

당시의 여객주인업은 영업의 관할범위가 엄격히 정해져 있었다. 18세기 이후, 여객주인의 영업구역이 한정되었으므로, 주인영업은 개별 상고(商賈)와 주인간의 상행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주인영업이 행해지는 지역[洞] 전체의 경제권을 좌우하는 문제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김성숙은 남양지역 주민들의 생계를 위해 사들였던 여객주인권을 다시 처분하였던 것이다.
 
개성부의 잠조(潛造)와 해상(海上) 밀무역의 실상 및 잠상(潛商)의 실체 
 
봄의 기운이 한참 피어나다가 어느덧 화창한 여름을 향해 달려가던 6월의 어느 날이었다. 밤이 늦은 웅진 창영도 앞 바다에는 달 빛도 보이지 않아 시커먼 파도가 일렁이고 있었고, 파도와 함께 배가 한 척 조용히 흔들리고 있었다. 캄캄하여 잘 보이지 않았지만 언뜻 보기에도 여느 고기잡이 배와 다를 것이 없었다. 하지만, 한참 전부터 움직임이 없었던 이 배의 사람들은 그물질 보다 망보기에 더 여념이 없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을까. 망보던 사람들이 저 멀리 배 한 척이 보이자 긴장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그 배가 그들이 기다리던 당선(唐船)이라는 것을 확인하자 안도의 한숨을 쉬며 분주하게 움직였다. 이들은 고기잡이 배가 아니라 밀무역을 하는 잠상의 배였던 것이다.

임시형과 임봉익 형제는 이번 밀무역의 성공으로 흥분에 쌓여 있었다. 그 동안 여러 차례 밀무역을 시도하려 했지만, 필요한 비용과 위험부담 때문에 번번이 좌절이 되었었다. 게다가 지난 해 9월 그믐에는 만반의 준비를 했으나 당선을 만나지 못해 실패를 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들은 무려 1년 가까이 기다리며 준비 한 끝에 오늘의 성공을 얻을 수 있었다.

개성 상인인 임시형과 임봉익은 세상을 사는데 두려움이 없는 젊은이들이었다. 이들은 장사의 규모가 점점 커지자 더 이상 나라에서 허락한 무역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았다. 사실 나라에서 허락한 인삼 무역량은 터무니없이 적었다. 게다가 밀무역이 공공연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그들만 나라 법을 지키고 있을 만큼 여유로운 것도 아니었다.

임시형은 그의 동생인 임봉익과 상의해서 중국과 홍삼을 밀무역 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일을 성사시킬만한 충분한 돈이 없었다 그래서 전부터 거래를 했던 인천의 박보경과 오봉길을 찾아갔다. 이들과는 그리 친분이 돈독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전부터 장사에 있어서는 마음이 잘 맞았다. 더구나 최근 들어 박보경과 오봉길은 이들 형제에게 밀무역을 적극 권장했던 사람들이었다.

임시형 형제가 방문하자 박보경과 오봉길은 무척 반겼다. 이들 역시 밀무역에 관여하고 싶었지만, 그러자면 개성상인들의 주도적인 역할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즉시 거상인 조관섭을 소개해 주었다. 그는 경강상인으로 많은 돈을 벌었고 지금은 여러 상인들에게 자금을 융통해 주는 일을 많이 하고 있었다. 또한, 여러 척의 배를 소유하고 있는 영향력 있는 거부였다. 임시형은 박보경과 오봉길의 소개를 받아 조관섭을 찾아갔다. 조관섭은 당시 많은 송상들이 홍삼 밀무역으로 큰 돈을 벌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역시 밀무역에 내심 관심을 갖고 있던 터였다. 퉁퉁한 외모지만 날카로운 눈매를 지니고 있던 조관섭은 이들 형제를 오랫동안 쳐다본 후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이들은 긴 대화 끝에 함께 일을 도모하기로 결정했다. 자본이 필요했던 임시형과 임봉익은 조관섭으로부터 2천 5백냥을 얻을 수 있었고 그 밖에도 여러 가지 면에서 도움을 얻기로 했다. 그리고 조관섭은 원금과 이자 그리고 이들 형제가 성공하면 얼마간의 수익을 나누어 갖기로 결정 했다. 이들 형제에게는 큰 조력자가 생긴 것이다.

말 한마디로 큰 돈과 조력을 얻을 수 있었던 이들 형제는 다음 일에 착수했다. 임시형과 임봉익은 개성으로 돌아갔다. 개성으로 돌아간 임봉익은 먼저 조관섭에게 받은 돈으로 송도 북부 당상교(堂上橋)에 사는 홍병구에게 찾아갔다. 당시 홍병구는 종삼(種蔘)을 업으로 삼던 사람이었다. 홍병구는 임시형 형제와 예전부터 거래를 했던 사이로 이들이 밀무역을 처음 계획할 때부터 함께 했던 사이였다. 이들 형제가 돈을 구해 오기만 기다리던 홍병구는 곧이어 잠삼을 제조했다. 모두 삼 118이라는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한편, 임시형은 친구인 김정연을 만났다. 김정연은 의주사람으로 임시형이 우연히 그가 어려울 때 도와주어 그 인연으로 친구가 된 사이였다. 김정연의 집안은 본디 역관 집안이었다. 하지만 그의 할아버지때부터 역관이 배출되지 않자 가세가 많이 기울어져 있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그 역시 몇 번씩이나 역관 시험에 도전했지만 번번히 낙방하고 있던 처지였다. 그리하여 김정연은 역관시험을 포기하고 의주상인의 일원으로 청나라와의 포삼 무역에 종사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사업에 실패해서, 얼마 전부터는 개성에 흘러 들어와서 삼포의 사환노릇을 해서 먹고 사는 일을 해결하고 있었다. 그리고 가끔은 밀무역을 하는 상인들의 중국말 통역을 하고는 했다.

오랜만에 만난 김정연과 임시형은 긴 대화를 나누었다. 임시형은 김정연이 그를 도와주기를 원했던 것이다. 김정연은 한어를 잘했고 이미 여러 번 밀무역을 해본 경험이 있었다. 하지만 김정연은 임시형 형제의 시도가 내심 불안했다. 잘못되면 목숨이 위태로운 것인데 이들의 시도는 좀 무모해보였다. 아직 준비가 다 된 것도 아닌데 자신감만 넘쳐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김정연은 거절을 하지 못하고 동참했다. 이들을 믿어보기로 한 것이다.

김정연을 가담시키는 데 성공한 임시형은 동생 임봉익을 만나 인삼을 가지고 인천으로 떠났다. 그리고 이들은 다시 조관섭을 만나 그에게 배를 빌리고 선인을 구해 웅진의 창영도로 향했다. 드디어 기회를 잡은 것이다. 이들은 섬 옆에 고기잡이 배로 위장하고 당선을 기다렸다. 때는 9월의 어느 날 달빛 하나 들지 않는 밤이었다.

그러나 밤이 깊어 가고 새벽이 밝아올 때까지 당선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들이 들은 소식이 잘못되었던 것인지 아니면 그 쪽에서 잘못 들은 것인지 첫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큰 기대를 하고 있던 이들 형제는 무척 실망했다. 다음 기회는 언제 올지 알 수 없었다. 이번 시도로 큰 돈이 들었는데 이렇게 실패를 하다니…손해가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이들의 실패 소식을 들은 조관섭도 실망이 무척 컸다. 그는 더 이상 이들 형제에게 돈을 대주지 않으려고까지 했으나 곧이어 그를 찾아온 박보경과 오봉길 등의 설득으로 다시 한번 생각을 고쳐먹고 이들을 좀더 지켜보기로 마음먹었다. 임시형과 임봉익 역시 좀 더 철저하게 준비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이듬해 6월 이들은 밀무역에 성공할 수 있었다.

임시형과 임봉익은 큰 돈을 벌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밀무역을 준비했던 사람들 모두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이들은 이 후 몇 번 더 밀무역을 강행했고 그때마다 성공해서 점점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었다.

하지만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 이들의 활약은 어이 없게도 같은 배를 타는 선원들에 의해 막을 내리게 되었다. 임시형과 임봉익 형제들은 이후에도 여러 번 성공을 했는데 그때마다 같은 선원들과 일했다. 일을 해본 사람이 잘 한다는 것도 한가지 이유였지만 무엇보다도 이들에게는 비밀 유지가 중요했다. 늘 같은 사람과 일을 한다면 여러 사람에게 퍼지지 않으리라는 계산을 했던 것이다.

임시형과 임봉익은 그들이 배를 빌린 조관섭에게 입이 무거운 선인을 구해달라고 은밀해 부탁했었다. 그리고 조관섭은 이들에게 곧 두 명의 선인을 소개해 주었다. 이들이 김순원과 이성삼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이 한 일에 대해서 말을 떠벌리는 사람들이 아니었지만, 그들이 밤마다 나가서 큰 돈을 벌어 오는 것을 수상하게 여긴 이웃 사람에 의해 이들이 밀무역에 관여한다는 소문이 조금씩 나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서 잠상배(潛商輩)가 황해도 웅진의 여러 섬에 배를 타고 왕래하면서 물화를 교역한다는 이야기가 낭자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소문이 파다하게 나고 있는데도 임시형과 임봉익 형제는 잠상을 그만둘 생각을 하지 않았다. 큰 돈을 한번 만지자 점차 위험에 대한 감각을 점차 잃어갔던 것이다. 이들은 ‘한번만 더’ 하는 마음으로 계속해서 밀무역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임시형은 자신의 집에 들이닥친 포교들에 의해 잡혀갔다. 임봉익 역시 마찬가지였다. 얼마 전부터 잠상에 대한 소문을 유심히 듣고 있던 관청에서 연변(沿邊) 각처를 정탐하던 중 인천 포구에서 장물(臟物)을 교역하던 선인(船人)인 김순원, 이성삼을 잡아냄으로써 밀무역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이후 임시형 형제의 밀교역의 전모가 모두 드러났고 관련자들 모두 잡혔다.

이 사건은 삼주(蔘主)•거간인(居間人)•주사인(主事人) 등 밀무역과 연관된 사람들의 역할과 그들의 출신까지 잘 나타나 있어, 이 시기 잠상의 활동 면모를 살피는 좋은 예가 된다.

<전거 :『우포도청등록』(右捕盜廳謄錄) 1861년 11월 4일, 『우포도청등록』(右捕盜廳謄錄) 1861년 11월 15일, 『좌포도청등록』15,『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고종 원년 8월 1일>
 
사상도고 김운경의 활약 
 
김운경은 포천 송우점에 기반을 두는 상인이었다. 그가 본격적인 장삿길에 들어선 것은 약 20여년 전이었다. 내성적이었지만 빈틈없고 야심만만했던 청년 김운경이 어느덧 중년이 되어 버렸다. 조용했던 성격은 예전에 비해 많이 변해서 사람들과 있으면 술을 마시며 호방하게 웃을 줄도 알았다. 하지만 꼿꼿한 그의 성격은 여전했다. 사람의 됨됨이를 파악할 줄 아는 날카로운 눈도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

김운경은 송우점에서 꽤 힘있는 사상도고였다. 송우점은 포천군 내의 주막거리에 있었다. 이곳은 누원점, 송파, 삼전도 등과 같이 금난전권의 적용범위를 벗어난 곳으로 사상도고들이 많이 모여 거래를 했다. 이곳은 어물 농우, 포 등의 북부지방 산물들이 누원으로 오기 전에 거쳐야 하는 북쪽 관문이었다. 누원점의 사상도고가 주로 서울 시내의 사상도고와 연결되어 있었던 반면에 송우점의 사상도고는 주로 생산지의 사상도고와 연결되어 있었다. 이들이 서로 연결되어 생산지에서 서울 시내까지 유통망을 형성했던 것이다.

사상도고는 시전 상인들과는 달리 정부에서 주는 특권은 없었지만, 큰 자본력과 전국적인 상업 조직망, 경영능력 등을 바탕으로 시전상인 등의 특권에 대항하였다. 이들이 이문을 남기는 방식은 자본력을 바탕으로 다소 값이 비싸더라도 상품을 매집하여 창고에 보관하였다가 가격이 오르게 되면 내놓아 파는 것이었다. 김운경은 관동 동북지방에서 들어오는 물품을 다량으로 매집했다. 또한 통천의 상인들과도 서로 주객 관계를 맺어 매일 60-70바리에 달하는 다량의 물품을 거래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이를 누원점의 사상도고에게 넘겨주는 역할을 수행했다.

김운경은 주변에 믿을 만한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여기저기서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특히, 원산의 사상인 김후약은 이 방면에 매우 뛰어난 사람으로 김운경과는 막역한 사이였다. 김운경은 주변의 정보를 통해 언제 물건을 사고, 언제 물건을 내놓아야 할지를 계산하였다. 더구나 그는 주로 어물을 다루었기 때문에 원산의 김후약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김운경과 같은 사상도고(私商都賈)들은 큰 돈을 벌기는 했지만, 하는 일은 그리 쉽지 않았다. 과거에 특권을 쥐고 번성했던 시전 상인들이 사상(私商)들이 크면서 이문이 크게 줄자, 이들의 성장을 막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던 것이다. 그가 주로 거래하는 어물의 경우에도 마찬가지 였다. 과거에는 북상(北商)들이 대개 서울로 직접 가져와 어물전에 판매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몇 년 전부터는 김운경과 같은 사상(私商)들이 개입하여 중간에 이익을 챙기는 경우가 많았다. 김운경은 큰 돈을 챙겼지만 시전 상인들은 늘 울상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김운경의 집에 포교들이 들이 닥쳤다. 그를 포청으로 압송하려는 것이었다. 김운경은 포청에 끌려갔다가 며칠 만에 겨우 뇌물을 써서 빠져나왔다. 처음에는 바로 풀려 나올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오래 있었던 데다가 쉽게 일이 해결되지도 않았다. 처음에는 의아했으나 김운경은 곧 그 이유를 알게되었다. 김운경 역시 다른 사상들처럼 관청에 줄을 대고 있었다. 하지만 줄을 댔던 관리들이 줄줄이 조정에서 밀려나 낙향하면서 아직도 힘이 있는 관리에게 줄을 댔던 시전상인들의 표적이 되었던 것이다.

김운경은 겨우 풀려 났지만, 일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집으로 돌아와서 숨을 돌릴 틈도 없이 여기저기서 사건이 터지기 시작했다. 시전 상인들이 금난전권을 사용해도 방도가 없었고, 관리들은 전에는 쉽게 넘어갔던 일도 국법을 들며 방해했다. 여기저기서는 막대한 뇌물을 요구했지만 한번 일이 나쁘게 돌아가기 시작하니 불과 며칠 만에 상황이 매우 안 좋아 져서 이를 모두 부담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본래 김운경과 같은 사상도고들은 시전 상인들, 특히 어물전 상인들과 사이가 매우 안 좋았다. 그들이 매번 유통될 어물을 독점적으로 사들여 시전 상인들에게 돌아갈 몫이 없게끔 했으니 이들과 원수가 될 만도 했다. 길을 갈 때 뒤를 밟혀 몽둥이 세례를 맞을 뻔 한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 물론 이들 역시 그런 일에 이골이 난 터였고, 마냥 당하고만 있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좀 다른 듯 했다. 시전 상인들이 조정의 관료들에게 각종 뇌물을 퍼붓는 관계로 이들의 호소가 조정에 자주 들어가게 되었고 이 때문에 사상들이 노골적으로 많은 압력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를 비호해 주던 관리마저 낙향한 마당이었다. 그 압력을 피하기가 쉽지 않은 노릇이었다.

시전상인들은 본래가 어용상인들이었다. 이들은 나라에서 독점권을 인정해주고 있었다. 그들을 피해 사상들은 누원이나 송파 등지에서 활약하는 것인데, 이들이 커갈 수록 자신들의 위치가 위태롭자 시전 상인들이 뒤에서 계속 관료들에게 압력을 넣었던 것이다. 이런 일은 전에도 자주 있는 일이었다.

문제는 이 뿐이 아니었다. 도고들의 매점 행위는 점차 큰 문제를 야기했다. 서울은 소비도시로서 농업•수공업생산물 뿐만 아니라 각종 물화가 모여들어야 하는데 이런 사정은 도고가 성행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서, 땔감과 같은 필수품이 며칠째 도성 안에 들어오지 못하는 경우도 생겼다. 이런 상황이 맞아떨어져서 사상도고들이 정부의 규제를 받게 되었는데 그게 하필 김운경에게 집중된 듯했다. 그는 한숨만 나올 뿐이었다.

그러던 가운데 원산의 상인인 김후약이 김운경을 찾아왔다. 전처럼 그가 가져온 물품을 김운경에게 넘기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김후약은 송우점에 오면 꼭 김운경의 집에서 묵곤 했다.

김후약이 대문에 들어서자 김운경은 크게 반겼다.

“어서오게! 이게 몇 달만인가. 하하하‚”

“ 그러게나 말일세. 정말 반갑네. 이번에도 우리 크게 한판 벌여야지”김후약역시 크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아무렴!”

김운경은 그의 친구가 오자 너무 반가웠다. 다른 때보다 더욱 반가워했다. 하지만 얼굴에는 요 며칠간의 근심으로 수척했다. 김후약은 처음에는 눈치채지 못하다가 방안에 들어가서 한숨을 돌리자 친구가 약간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약간 야위고 근심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던 것이다. 김후약은 아침에 아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리고 왠지 모를 불안감이 감돌았다.

김후약이 물었다. “이보게, 무슨 일이 있었나?”

김운경이 대답했다. “휴...이보게 요즘 우리 일이 쉽지가 않으이...”

김후약이 말했다. “아니, 언제는 쉬운 일이었나. 무슨 연유로 그러는가?”

김운경은 그간의 일을 소상히 털어놓았다.

사정을 모두 들은 김후약은 잠시 생각을 했다. 김운경은 갑자기 당한 일이라 매우 곤란해 하는 듯 했다. 하지만 김후약은 달랐다. 모두 예상했던 일이었다. 게다가 이들 역시 조정의 관료들과 연결되지 않고서는 장사를 할 수 없었기에 역시 관료들과 손을 잡고 있는 상황이었다. 김운경도 손을 잡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관료들이 낙향했거나 그렇지 않으면 더 큰 욕심에 눈이 멀어 별로 관여하고 싶어 하지 않아 했기 때문에 큰 도움이 되지 못하였던 것이다.

‘더 강하게 밀어붙여야 한다. 이대로 팔짱끼고 있다가는 머리위로 바윗덩어리가 떨어져도 그냥 앉아서 맞는 꼴이 될게야.’

김후약과 김운경은 해결책을 모색했다. 그들은 그 길로 서울로 달려갔다. 그리고는 중간에 줄을 대어, 더 많은 재물로 관료들을 매수했다. 김후약은 김운경에게 많은 재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이것은 김운경만을 위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일부 진보적인 관료들은 사상(私商)을 옹호하기도 했다. 사실, 많은 관료들이 상인들과 결탁이 되어 있거나 자신들의 노복을 내세워 장사에 뛰어든 상황이었다. 나라에서 상인들을 통제할 수 있는 시기는 지난 지 오래였다. 그리고 사상도고도 대개는 경제력을 바탕으로 관속들과 연결되어 있어 이들의 폐단을 바로 잡기는 어려웠다.

결국, 김후약과 김운경은 어렵지 않게 곤란에서 빠져나왔다. 게다가 3년 후(1791)에는 신해통공으로 금난전권이 폐지되면서 사상도고인 이들의 어깨에 날개까지 달리게 되었다.

<전거:『각전기사』천 무신 4월>
 
사상도고 김후약의 활약 
 
정조 12년 (1788) 김후약이 장사일에 뛰어든 지 어언 10년이 넘었다. 그 사이 많은 어려움도 있었지만, 지금은 원산의 손꼽히는 부자가 되었다. 원산은 원래 바다를 연하고 있어서 어업을 직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었고, 여러 지방의 어선들이 드나들던 곳이었다. 그러던 이 지방이 교통상의 이점을 이용하여 급속하게 발전하였다.

그가 큰 부자가 된 이후에도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은 것이 있었다. 그것은 거래를 할 때 남을 통하지 않고 직접 한다는 것이다. 올해에도 김후약은 장사를 위해 길을 떠날 예정이었다.

사상도고(私商都賈)는 큰 돈을 벌기는 했지만, 하는 일은 그리 쉽지 않았다. 과거에 특권을 쥐고 번성했던 시전 상인들이 사상(私商)들이 크면서 이문이 크게 줄자, 이들의 성장을 막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던 것이다. 김후약이 주로 거래하는 어물의 경우에도 마찬가지 였다. 과거에는 북상(北商)들이 대개 서울로 직접 가져와 어물전에 판매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몇 년 전부터는 한양 부근의 사상(私商)들이 개입하여 중간에 이익을 챙기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면, 김후약은 겨울철 생선을 사기 위해 매년 가을이나 겨울에는 직접 생산지로 찾아갔다. 그리고 북상들과 결탁해서 신선한 명란•북어•대구 등을 모두 매집하여 원산에 모아두었다. 그리고는 서울 시전에서 값이 비싸고 헐한 것을 살피며 때를 타서 값을 조정하고, 연말에 장패(藏牌)되는 때를 기다렸다가 허다한 어물들을 자기 집에 쌓아놓고 마음대로 판매하니 시전의 내•외 어물전은 그저 빈방만 지키고는 했다. 이처럼 어물전 상인들을 실업상태로까지 내몰 정도이니 이들의 원망이 컸음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원산의 큰 장사꾼인 김후약은 특히 어물전 상인들의 원망의 대상이었다. 뿐만 아니라 김후약과 같은 도고들의 행위는 물가앙등에 영향을 끼치는 터라 일반 백성들의 원망도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그는 이런 것에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중요한 것은 ‘이문을 남기는 것’이었다.

이번 장삿길 역시 구한 어물을 송우점의 사상도고에게 넘기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먼저 특산물인 북어와 어물들을 구했다. 흥정은 쉽지 않았다. 김후약은 비싸도 구입을 해야 하는 입장이었고, 그 쪽도 그 사실을 모르지는 않았다.

“ 아까 말한 가격이상으로는 안 되오.” 김후약이 못을 박았다.

“ 저도 그리는 못합니다.” 상대방도 못을 박았다.

결국, 한참 시간이 흐른 후에 타고난 장사꾼인 김후약의 언변에 흥정은 끝나고 그는 적당한 가격에 그 지역의 북어를 모두 구입했다. 다른 어물들도 마찬가지였다. 김후약은 이렇게 사 모은 어물을 잠시 원산에 보관하여 값의 추이를 지켜보다가 송우점의 사상도고에게 넘겼다.

김후약 일행이 어물을 유통하는 경로는 다음과 같았다. 먼저 앞의 내용처럼 원산의 도고인 김후약이 직접 생산지에서 어물을 매집하였다. 그리고 송우점을 근거지로 하는 상인을 통해 누원점의 사상도고에게 넘겨져 서울에서 유통되었다. 동해안 지방에서 생산되는 어물도 이곳을 거쳐 들어왔다.
김후약은 통천의 석경수(石景洙)와 주객관계를 맺고 있었고, 송우점의 사상도고인 김운경과는 아주 막역한 사이였다. 이들과의 연계망이 없이는 도저히 시전상인과 대항해서 장사를 할 수가 없었다. 특히, 송우점의 김운경은 김후약에게 있어 누구보다 큰 도움이 되는 사람이었다. 사상도고로서 서로의 어려움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곤란을 겪었을 때에는 서로 도와주었다. 김후약이 송우점에 들르면 꼭 묵는 곳도 김운경의 집이었다. 이번에도 그의 집으로 갈 생각이었다.

김운경의 활동무대인 송우점은 포천군 내의 주막거리에 있었다. 이곳은 누원점, 송파, 삼전도 등과 같이 금난전권의 적용범위를 벗어난 곳으로 사상도고들이 많이 모여 거래를 했다. 이곳은 어물 농우, 포 등의 북부지방 산물들이 누원으로 오기 전에 거쳐야 하는 북쪽 관문이었다. 누원점의 사상도고가 주로 서울 시내의 사상도고와 연결되어 있었던 반면에 송우점의 사상도고는 주로 생산지의 사상도고와 연결되어 있었다. 이들이 서로 연결되어 생산지에서 서울 시내까지 유통망을 형성했던 것이다.

김후약이 대문에 들어서자 김운경은 크게 반겼다.

어서오게! 이게 몇 달만인가. 하하하‚

그러게나 말일세. 정말 반갑네. 이번에도 우리 크게 한판 벌여야지 김후약 역시 크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아무렴!” 김운경은 그의 친구가 오자 무척 반가운 눈치였다. 하지만 김후약은 인사를 나누고 방안에 들어가서 한숨을 돌리자 친구가 약간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약간 야위고 근심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던 것이다. 김후약은 아침에 아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리고 왠지 모를 불안감이 감돌았다.

김후약이 물었다. “이보게, 무슨 일이 있었나?”

김운경이 대답했다. “휴...이보게 요즘 우리 일이 쉽지가 않으이...”

김후약이 말했다. “아니, 언제는 쉬운 일이었나. 무슨 연유로 그러는가?”

김운경은 그간의 일을 소상히 털어놓았다. 늘 그렇듯이 이들은 시전 상인들, 특히 어물전 상인들의 표적이었다. 그들이 매번 유통될 어물을 독점적으로 사들여 시전 상인들에게 돌아갈 몫이 없게끔 했으니 이들의 표적이 될 만도 했다. 길을 갈 때 뒤를 밟혀 몽둥이 세례를 맞을 뻔 한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 물론 이들 역시 그런 일에 이골이 난 터였고, 마냥 당하고만 있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좀 다른 듯 했다. 시전 상인들이 조정의 관료들에게 각종 뇌물을 퍼붓는 관계로 이들의 호소가 조정에 자주 들어가게 되었고 이 때문에 사상들이 노골적으로 많은 압력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마저 피하기는 쉽지 않은 노릇이었다. 시전상인들은 본래가 어용상인들이었다. 이들은 나라에서 독점권을 인정해주고 있었다. 그들을 피해 사상들은 누원이나 송파 등지에서 활약하는 것인데, 이들이 커갈 수록 자신들의 위치가 위태롭자 시전 상인들이 뒤에서 계속 관료들에게 압력을 넣었던 것이다. 이런 일은 전에도 자주 있는 일이었다.
문제는 이 뿐이 아니었다. 도고들의 매점 행위는 점차 큰 문제를 야기했다. 서울은 소비도시로서 농업•수공업생산물 뿐만 아니라 각종 물화가 모여들어야 하는데 이런 사정은 도고가 성행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서, 땔감과 같은 필수품이 며칠째 도성 안에 들어오지 못하는 경우도 생겼다. 이런 상황이 맞아떨어져서 사상도고들이 정부의 규제를 받게 되었는데 그게 하필 김운경에게 집중된 듯했다.

사정을 모두 들은 김후약은 잠시 생각을 했다. 김운경은 갑자기 당한 일이라 매우 곤란해 하는 듯 했다. 하지만 김후약은 달랐다. 모두 예상했던 일이었다. 게다가 이들 역시 조정의 관료들과 연결되지 않고서는 장사를 할 수 없었기에 역시 관료들과 손을 잡고 있는 상황이었다. 김운경도 손을 잡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관료들이 더 큰 욕심에 눈이 멀어 별로 관여하고 싶어 하지 않아 해서 큰 도움이 되지 못하였던 것이다.

“더 강하게 밀어붙여야 한다. 이대로 팔짱끼고 있다가는 머리위로 바윗덩어리가 떨어져도 그냥 앉아서 맞는 꼴이 될게야.”

김후약과 김운경은 해결책을 모색했다. 그들은 그 길로 서울로 달려갔다. 그리고 중간에 줄을 대어, 더 많은 재물로 관리들을 매수했다. 일부 진보적인 관료들은 사상(私商)을 옹호하기도 했다. 사실, 많은 관료들이 상인들과 결탁이 되어 있거나 자신들의 노복을 내세워 장사에 뛰어든 상황이었다. 나라에서 상인들을 통제할 수 있는 시기는 지난 지 오래였다. 그리고 사상도고도 대개는 경제력을 바탕으로 관속들과 연결되어 있어 이들의 폐단을 바로 잡기는 어려웠다.

결국, 김후약과 김운경은 어렵지 않게 곤란에서 빠져나왔다. 게다가 3년 후(1791)에는 신해통공으로 금난전권이 폐지되면서 사상도고인 이들의 어깨에 날개까지 달리게 되었다

<전거 : 『각전기사』천 무신 4월>
 
이홍(李泓)이 안주(安州) 기생을 속인 사연 
 
이홍이 세도 있는 부잣집을 드나들 때의 일이다. 그는 부잣집에 드나들며 타고난 그의 언변으로 신임을 얻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수리(水利)의 일을 맡아 거금을 벌어들였다. 그는 돈을 벌면 버는 데로 걸판지게 쓰는 성격인지라 청천강(淸川江) 역사를 벌일 적에 매일 소를 잡고 술을 걸러 크게 연회를 베풀었고, 이름난 기생은 멀건 가깝건 간에 있는 대로 다 불렀다. 그래서 이홍이 부르면 오지 않는 기생이 없다고 소문이 날 정도였다. 그러나 그가 불러서 오지 않는 기생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안주(安州)의 기생 월향이었다.
월향이는 재색이 으뜸일 뿐만 아니라 가야금 타는 실력이 뛰어나서 조선 최고의 기녀라는 칭송까지 듣고 있었다. 게다가 그녀는 감사의 총애를 입고 있어서, 이홍과 같은 장사치의 부름에는 코방귀도 뀌지 않았다. 비록 이름난 기생이라고 하나, 한갓 기생에게 무시당한 일이 유쾌할 리는 없었다. 이에 이홍은 월향이를 혼내줄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안주로 떠나면서 친구들과 내기를 했다.

“내 안주 기생 월향의 고집을 꼭 꺾어 놓고 말것이네. 열흘 안에 정분을 얻고 말 테니 두고 보라구.”

“허허…이 친구 또 허풍을 떠는 구만. 아무리 천하의 이홍이라고 하지만, 월향이의 고집을 쉬 꺾기는 힘들 것이네. 월향이가 괜히 이름이 났겠는가? 괜한 호기 부리다가 안주까지 가서 망신당하지 말고 그냥 잊어버리게.”

“이보게, 고깟 기생년에게 무시를 당하고서야 어디 사내라고 하겠는가? 두고 보게, 내가 혼쭐을 내고 올 터이니. 하하하”

그러더니 이홍은 말에 짐을 싣고 비단 쾌자(快子→등 솔을 길게 째고 소매 없이 만든 옷)를 걸치고 하인도 없이 다만 갓 쓴 사람 하나만 데리고 채찍을 울리며 안주(安州) 성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수소문하여 월향이가 있는 기생집을 알아 본 후 그곳에 숙소를 정했다. 당당하게 기생집에 들어간 이홍은 주인인 기생아범에게 매우 거만한 말투로 말하였다.

“내가 가진 물건은 매우 값진 것이라네. 이것이 없어지면 그 손실이 매우 커서 돌이킬 수 없으니, 이 집에 다른 손님은 받지 말아주게. 그리고 내가 이번 걸음에 사람을 기다려야 하는데 그 사람이 늦게 올지 금세 올지 모를 일일세. 값은 떠나는 날 청산함세. 원래 내가 입이 몹시 짧으니 조석을 각별히 정하게 차려주게. 연채(烟債→식대)는 주인 마음대로 정하소.”

고을의 군교로 있는 늙은 기생의 아범은 쾌재를 불렀다.

“이크 큰 손님이구나. 행색은 개성 거상(巨商)이고 묵직하게 싣고 온 물건은 전부 은자(銀
子)이겠다. 횡재 했구나! 흐흐흐”

이렇게 여긴 아범은 그를 상등 객실인 사처(下處)를 정하게 치워 맞이했다. 호들갑스러운 안내를 받으며 이홍은 준비된 방으로 들어섰다. 그가 방을 들어서자 그윽한 향기가 방안 가득했고, 밝은 햇살은 창호지를 통해 은은하게 비춰지고 있었다. 창 너머로는 아름다운 오색 꽃들이 방긋 웃고 있었으며, 선선한 바람이 얼굴을 간지럽게 했다. 그리고 널찍한 방안에는 비단 보료에 수놓은 아름다운 병풍이 펼쳐져 있었으며 옻칠한 가구들이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하지만, 방 안에 들어선 이홍(李泓)은 방안을 둘러보더니 잔뜩 상을 찌푸렸다.

“에이, 여기는 어찌 이리 손님 대접이 소홀한고! 여봐라, 얼른 장지(壯紙)를 사 오너라. 이런 데서 사람이 단 하루라도 거처 하겠느냐!”

이홍은 이렇게 말하면서 방안 도배를 다시 하게 하더니, 갖고 온 짐을 머리맡에 옮겨다 놓고 양털 요와 비단 이불을 깔았다. 그리고 행장 속에서 두툼한 장부 한 권과 조그마한 주판을 꺼내고는 문을 닫아 건 채 종자(從者)와 회계를 하는데 종일토록 끝나지 않았다.
이홍이 돈많은 상인일 것이라고 은근히 기대는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일말의 의심을 버릴 수 없었던 기생 아범은 이홍의 행동을 유심히 살펴보다가 그가 방에서 나오지 않자 숨을 죽이고 문 가까이 가서 그들의 대화를 엿듣기 시작했다. 그러나 곧 기생아범은 의심을 풀고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였다. 손님들은 방안에서 향로 약제 등 속 값나는 물품을 수없이 셈하고 있었던 것이다.

“저 손님은 필시 거상일세 거상이야! 우리가 횡재를 했네 그려! 그도 우리 월향이를 보면 영락없이 반하겠지. 그리만 되면 생기는 재물이 어디 감사또에 견주랴.”

그러더니 기생 아범은 급히 사람을 보내 딸을 평양 감영에서 살짝 불러내 오도록 하였다. 그리고 나서 이 부자 손님을 제대로 모시라고 단단히 일러둔 후, 월향을 이홍에게 보내었다. 월향은 이홍(李泓)의 방문 앞에 가서 날듯이 큰 절을 하며 뵈었다.

“귀하신 어른이 누처에 오래 유하시기로 젊은 주인이 감히 헌신하나이다.”

과연 월향은 소문이 무색하지 않은 절색이었다. 이홍은 월향이의 자태에 잠깐 넋을 잃었다가 다시 정신을 차리고 무심히 대답하였다.

“이러지 말게나, 하필 여주인이 이럴 게 있나.”

이홍(李泓)은 계산에만 정신이 팔린 듯 주판만 굴리며, 녹의홍상 미녀는 안중에 없는 듯했다.

“제 아이가 보시기 누추하신지 손님께서 아주 냉담하시니, 얘가 지금 매우 무색한 모양 입
니다.”

기생 아범은 애가 타서 이홍이 월향이를 돌아다 보길 계속 권하였다. 그러자 그는 마지못한 척 응해주니, 기생은 술상을 정갈하게 차리고 노래와 춤으로 갖은 아양을 다 떨었다. 그리고 그저 내키지 않은 듯 뜨악해 하는 것을 기생이 자진해서 와 동침까지 했다. 한번 길을 튼 ‘물고’라 3~4일을 자별하게 운우지정(雲雨之情)을 쏟던 이홍(李泓)은 아침에 일어나자 눈살을 찌푸렸다.

“서도(西道)에 근일 명화적(明火賊)이 나타났단 말 못 들었는가?”

“그런 말 못 들었는뎁쇼.”

“의주서 예까지 얼마나 걸리면 대어오나?”

“며칠이면 족하옵지요.”

“그럼 일자가 벌써 지났는걸. 말이 병이 났나.”

주막 주인은 의아스러워 하며 물었다.

“무슨 상심 되시는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북경서 오는 물건이 며칠날 압록강을 건너 며칠날 여기 당도하기로 약조가 되어 있는데,
상기 나타나지 않으니 걱정이로구나.”

심부름꾼을 불러서 일렀다.

“너 냉큼 서문 밖으로 나가서 기다려보아라.”

저녁 때 돌아와 전혀 소식이 없다고 회보하자, 기생은 술상을 차려 위로하는 연회까지 베풀며 법석을 떨었다. 이튿날 기생을 곁에 앉히고 주인을 불러 단단히 일렀다.

“내가 시방 중한 재물을 갖고 있기 때문에 방을 비우고 나가 볼 수가 없었다네. 이제 주인은 나와 한집안이나 진배가 없기에 미더워서 하는 말일세. 내 갑갑해서 병이 날 것 같아 도저히 앉아서 기다릴 수가 없구먼. 내 물건을 주인에게 맡기겠으니, 잘 좀 간수해 주게. 나가서 알아보고 옴세.”

이렇게 휘갑을 친 이홍(李泓)은 ‘사처방(下處房)’에 쇠를 채운 다음 총총이 나가는 게 아닌가.기생의 집에선 예나 제나 손님을 기다려도 영 돌아오지를 않자 더럭 의심증이 생겼다. 그래도 설마 하며 기다렸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도 오지 않는 손님에 이들은 점점 지치더니 마침내 자물쇠를 비틀고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행장을 들치고 궤짝을 떠들어보니, 은덩이는 커녕 거위알만큼한 조약돌이 잔뜩 들어있을 뿐이었다. 물론 기생집을 나선 이홍(李泓)은 곧바로 사잇길로 빠져 청천강가로 돌아와 버렸다. 그 동안 걸린 시일이 떠날 때 약속한 열흘이 되는 바로 그 날이었다. 사실 도도한 양 굴면서 재물에만 눈독을 들여온 기생은 억울하게 속은 것이 분해서 이를 갈았지만 창피해서 남들에게 내색도 못했다.
 
원산의 어물들을 모조리 사들이다 
 
뚝섬에 사는 홍여심은 머언 친척이었다. 홍여심이 팔던 것은 양반의 사치품을 취급하였다. 정보가 빨라 돈을 많이 벌게 되자 경명심을 찾아와 어류로 품목을 바꿔 보고 싶은데 정보가 없다며 도움을 달라고 요청하였다. 마침 경명심은 자신과 동업할 이를 찾고 있었던 참에 잘된 일이라 생각하여 손을 잡았다. 홍여심이 장사로 돈을 꽤 많이 벌었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다.

경명심은 와서에서 소문난 장사꾼이었기에 횽여심과 손을 잡았지만 손해 보는 장사를 할 이는 아니었다, 장사의 이윤 부분에서 홍여심보다 배를 더 가져가는 이였던 것이다. 당시 동북지방에서 생산되는 북어의 수요가 크게 증대되었는데 함경도 원산에서 수합된 북어는 철령을 넘어 한양 쪽으로 오다가 누원에 이르게 되었다. 이 때문에 사상인들이 누원으로 몰려들어 북어 등을 매점해 한양으로 반입하여 차익을 챙기고 있었다. 경명심 또한 그러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시전상인들의 간섭을 피하기 위하여 뚝섬, 송파 상인과 연결하기도 하고 한강을 경유하여 용산으로 가기도 했다.

홍여심이 뚝섬으로 자리를 옮겨 많은 매물을 사야 할 때 자금이 부족하여 돈을 융통할 때가 생기면 경명심을 찾아가 부탁을 하곤 하였다. 홍여심이 급히 보자 하여 경명심은 금전을 부탁할 모양인 줄 알고 그를 맞았다.

“형님, 장사는 잘되시는 지요. 제가 괜찮은 건수가 있어서 이렇게 왔습니다.”
“그래? 나는 자네가 금전이 필요해서 급히 온 줄 알았네만 그게 아니란 말인가?”
“매번 그러는 것도 죄송한데 또 그럴 순 없지요. 저랑 같이 일을 하는 사람들 중에 정대빈이란 이가 하나 있습니다. 그자의 제안이 형님과 저에게 많은 이익을 줄 수 있을 것 같아서 이렇게 뵙자 하였습니다.”
“ 그렇단 말인가? 돈이 된다 하니 뭔지 들어나 보겠네.”
“ 형님도 아시다시피 요즘은 어물을 구매하고 싶어도 물량이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있지 않습니까. 물론 형님이나 되니까 많은 어물을 갖고 계시지만서도 그자가 제시를 한 것은 원산에서 물량을 집중적으로 사들이자고 제안하였습니다. 그럴려면 막대한 자본이 필요하기에 이렇게 사람을 모아서 하자고 제안을 하였답니다.”

경명심은 정대빈과 여러 상인들을 모아 막대한 자본을 가지고 어물을 살 것을 결심했다. 경명심과 정대빈을 비롯한 뚝섬에 사는 홍여심(洪汝心), 와서(瓦署)에 사는ㆍ손덕원(孫德源), 왕십리에 사는 김성진(金聖珍) 등이 부상(富商=경쾌손((景快孫))과 결탁하여 막대한 자금으로 원산에 가서 상품을 모조리 사두고 가격을 조종하였다.
그러자 서울 시내에는 명태가 품귀현상을 일으켰는데 이를 기이하게 여긴, 어물전민(魚物廛民)들이 그들의 환전(換錢) 거래장부를 조사해 본 결과 한 달의 어물 판매고가 4,000 ~ 5,000냥이었으며, 1년간의 판매고는 수만 냥이 된다고 하였다.

<전거:『각전기사』인 가경 11년 9월>

출처:
http://economy.culturecontent.com/StoryOpt/TRD_01_02.ASP?M_ID=5&O_NO=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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