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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철학

라캉을 만나다 15

by 8866 2008. 12. 25.

 

라캉을 만나다 15

[에크리]를 통해 라캉을 만난다

글쓴이: 한살림

http://cafe.daum.net/9876/3Mhq/30

 

 

라캉의 '심적 인과관계에 대한 발표' 논문에서 동일시

 

라캉이 1946년 9월에 발표한 <Presentation on Psychical Causality>를 읽었다. 이 논문의 핵심 주제는 광기(madness)이지만 이에 대해 아직 특별한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 이 노트에서 이 논문에 등장하는 핵심 개념의 하나인 specular identification를 생각해 본다. 이 개념이 학계에서 어떻게 번역되는지 모르겠다. 이는 ‘반영에 연루된 동일시’이다. 라캉은 이를 “identificatory capture by the imago” (English p.151; French p.185) 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이 논문에서 ‘The Psychical Effects of the Imaginary Mode’이라는 제목으로 다루어지는 마지막 부분의 핵심을 이룬다.

 

1940년대에 라캉이 주목하고 있는 것은 “the concept of imagos” (E. p.145; F. p. 177) 이다. Imago는 정신분석학에서 일반적으로 대상(object)라는 개념을 의미한다. 정신분석학의 대상은 외부에 존재하는 물건(thing)를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흔히 관념(idea)을 의미하는 개념과 흡사하다. 정신분석학의 대상은 마음에 존재하는 – 또는 존재하게 된 – 모든 관념들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특권적 심적 관념 (privileged mental ideas)라고 할 수 있다. 아버지, 어머니, 유방, 남근 등등.

 

정신분석학 이전의 철학에서 칸트가 이를 잘 포착하였다. 물자체에 대비되는 현상은 사람이 선험적으로 갖는 형식을 통과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흔히 안경을 이용한 설명이 쉽다. 현상을 초월하여 물자체로 나아갈 役뎬?없다. 따라서 지식은 모두 ‘인간의’ 지식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라캉은 게쉬탈트 (Gestalt) 심리학 또는 동물학의 성과들을 자신의 논문에 통합하면서 나름대로 정신분석학적 설명을 제시한다. 이 논의는 라캉의 유명한 ‘거울단계’에 대한 개념으로 정리되었다. 이 ‘거울단계’의 설명에서 핵심적인 개념이 ‘이마고’이다. Imago, image, object 등등. 이는 매우 원시적인 형태로 곤충이나 동물에게도 나타나지만 사람의 정신 발달에 있어서는 핵심적 단계를 이룬다.

 

라캉이 이 논문의 세번째 부분을 시작하는 첫 단락은 초기 라캉이 고민하고 있던 문제를 요약한다. “A subject’s history develops in a more or less typical series of ideal identifications that represent the purest of psychical phenomena in that they essentially reveal the function of imagos. I do not recognize the ego otherwise than as a central system of these formations, a system that one must understand, like these formations, in its imaginary structure and libidinal value.” (E. p.145; F. p. 178)

 

이 문단을 이해할 수 있다면 대략 라캉의 초기 사유를 파악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라캉은 이 문단에 포함된 것들을 발전시키고 어떤 것들을 폐기할 것이다. 이에 대한 판단은 후기 라캉의 사유를 읽은 후에나 가능할 것이다.

 

이 문단에서 (개별적인) 역사를 시작하는 주인공은 ‘subject(주체)’이다. 이 주체는 선험적인 에고(ego)를 갖지 않는다. 프로이트가 <나르시시즘에 대하여>에서 주장했듯이 에고는 경험에 의해 출현해야만 한다. 라캉의 사유에서 에고의 출현에 있어서 결정적 단계 (또는 시발점)이 ‘거울단계’이다. 생후 6개월 정도… 이 시기에 아이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매우 깊은 관심을 표현한다. 이는 아이가 외부에 존재하고 있는 사물 – 부모-에 대한 ‘객관적’ 인식과 겹친다.

 

라캉에 따르면 생후 6개월이 된 아이는 동물과는 다른 방식으로 세계에 반응한다. 동물에게 있어서 외부 세계의 형태는 거의 언제나 필요 충족이라는 실용적 이유에 의해 파악된다. 애완동물의 천국이라 (불리는) 미국에서 매우 다양한 형태의 동물 음식이 생산되고 있다. 이런 다양한 형태로 만들어진 음식들은 보통의 동물용 음식 (또는 사료)에 비해 훨씬 비싸다. 이를 생산하는 회사들이 개를 염두에 두지 않는 것은 분명하다. 그들은 개 또는 고양이 등이 갖는 ‘미적 감각’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사람은 ‘대부분’ 미적 감각을 갖는다. 이 미적 감각은 대개 응시(gaze)와 관련된다. 이것이 명확한 모습을 드러내는 시기가 생후 6개월 정도라고 한다.

 

specular identification을 이해하기 위해 흔히 직면하는 ‘어른’의 현상을 생각해 보자. 서점에는 여성들을 주고객으로 하는 많은 잡지들이 즐비하게 진열되어 있다. 이들은 대부분 아름다운 여성을 표지 모델로 삼는다. 잡지의 모델은 이미지로 존재한다. 이 이미지는 보는 사람에게 여러 가지 감정들을 불러 일으킨다. 이 복잡한 감정들을 다 분석할 수는 없고 몇 가지만 생각해 본다. 많은 여성들이 이 모델을 보면서 그 잡지를 사려는 욕망을 느낀다. 이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잡지의 구매자를 A라고 하고 모델을 B라고 하자. ‘평범한 여성’인 A는 ‘아름다운 여성’인 B에 대해 (경쟁자의) 적의를 느끼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달리 말하면 A에게 B는 누구인가?

 

잠시 남성들을 대상으로 하는 잡지들에 표지 모델로 사용되는 (반)나체의 여성의 이미지를 생각해 보자. 이 잡지를 구매하는 (또는 단순히 보는) 남성에게 이 이미지가 일으키는 감정은 specular indetification과는 다른 매커니즘이 관계한다. 남성은 이 이미지를 나르시시즘이 아니라 대상 리비도와 관련하여 파악한다. 다시 말하면 이들은 욕망의 (환상적) 대상이다.

 

그러나 여성 A가 모델 B를 보는 경우에 B는 A의 욕망을 달성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semblable (짝패) 또는 Ideal Ego (이상아) 로 파악된다. (여성) 주체에 있어서 이 ‘아름다운 여성’은 분신이다. B의 아름다운 사진은 거울에 비친 자신(A)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잡지들이 대개 잘 팔리는 것을 보면 – 또는 대다수의 여성들에게 매우 심각한 심리적 갈등을 동반하지 않는 것을 보면 – 이런 형태의 specular identification을 우리는 (적어도 자본주의사회에서는) ‘정상’이다.

 

우리는 다양한 시각에서 라캉의 사유를 비판할 수 있다. 아마도 들뢰즈-가타리라면 specular identification의 이면에 놓여 있는 오이디푸스(콤플렉스와 해소)가 자본주의의 공학이라고 비판할 것이다. 그런데 라캉이 이 가능성을 부인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이 논문에서 확인할 수 있다.

 

라캉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대한 입장을 살펴보자. “[The Oedipus complex] can obviously appear only in the patriarchal form of family as an institution, but it nevertheless has an indispuably liminary” (E. p.150; F. p. 184).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분명 육체적 기초를 가지기는 하지만 문화에 따라 발현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이 문장에서 라캉이 제도(institution)이라고 말한 것에 주목한다. 이는 중요하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다양한 비(非)가부장제적 가족들이존재할 수 있지만 이 가족들에 속하는 아이들의 경우에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나타난다. (이와 관련하여 알튀세르의 호명이론을 참조할 수 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발현할 수 있는 강한 경향성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거의 나타나지 않은 사회를 생각할 수 있다.

 

다시 라캉의 주장을 들어보자. “It should be clear to you that the visual perception of a man [and a woman] raised in a cultural context completely different from our own is a perception that is completely different from our own” (E. p.157; F. p.193). 라캉이 이 통찰을 후에 포기했는지 어쨌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 문장으로만 판단한다면 라캉의 사유는 놀랍다. 위에서 예로 든 사례를 다시 생각하면, 현재 자본주의에서 나타나고 있는 남녀의 다른 (또는 전형적인) specular identification을 생물학적으로 정초할 수 없다. specular idendtification은 주체에 있어서 ‘언제나’ 나타나는 매카니즘이지만 이것이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문화의 영향을 받는다. (이와 관련하여 노암 촘스키의 언어학에 있어universal grammar/ deep structure/ surface를 참조할 수 있다.) 미래에 (또는 현재도 간헐적으로) 여성들이 주로 소비하는 잡지에도 매력적 남성들이 (반)나체로 등장하는 상황을 생각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 경우에 문제되는 것은 specular identification이 아니라 ‘대상 리비도의 투자 (investoment of object libido)’일 것이다.

 

specular identification은 narcissism이다. 이것은 A가 B를 동일시하는 현상에서 나타난다. 대개 남성은 남성에게, 여성은 여성에게 이상적 이미지를 투사하는 경향이 있는 데 이를 프로이트는 동성애(homosexuality)라고 부른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동일시는 양성애에 기반한 동성애와 연관된다. 이 문제를 상세하게 다룬 책이 [Group Psychology and the Analysis of the Ego]이다. 라캉은 이를 동성애라고 부르지 않는 데 이는 라캉이 정확한 것으로 보인다. 성욕은 초기의 형태를 제외하고는 거의 항상 (대상) 리비도의 문제이다. 이에 비해서 프로이트가 오인한 동일시는 대상 리비도가 아니라 나르시시즘이다. 즉 에고의 현상이다. 여성 A는 잡지에 모델로 나온 아름다운 여성 B를 성욕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 이런 경우도 있다 – B를 자신의 이상적 에고로 파악한다. 따라서 A가 B의 사진에서 발견하는 것은 그 자신의 모습이다. (이를 장사에 활용하는 것은 자본가의 수완이다.)

 

이 지점에서 여성이 주로 상품화되는 것은 남성이 권력을 잡는 사회, 즉 가부장제적 사회에서는 안제나 나타난다. 여성주의의 입장에서 자본주의는 가부장제적 사회의 한 양태이다. 역사는 남성이 여성을 착취한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른 사회를 상상할 수 있는가? 이 지점에서 여성주의자들의 지적 상상력이 요구된다. 나는 아직 모른다. 그렇지만 현대에 들어서 가부장제는 급속도로 해체되는 경향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이것이 진정한 여성해방을 낳을지는 확실하지 않다. (아닐 확률이 높다.)

 

라캉은 분명 가부장제적 자본주의에서 나타나는 specular idnetification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도 분명하게 그렇게 말하고 있다. 따라서 어떤 사람들이 라캉을 가부장제적 자본주의의 옹호자로 파악하는 것은 옳지 않다. 라캉의 이론이 가부장제적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고 해서 라캉의 사유가 잘못인 것은 아니다. 그렇지 않은 사유가 있는가?

 

라캉을 비판하는 어떤 논리를 생각해 본다. 가령 여성 A가 모델 B의 이미지를 보면서 specular identification 이 일어났다고 라캉이 파악했다고 하자. 그런데 라캉은 ‘자본주의적 가부장제’에서 라는 단서를 단다. 라캉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이 부분을 무시하고, 라캉이 가부장제적으로 나타나는 specular identification을 ‘보편적인 것’으로 주장했다고 암시한다. 이 경우에 자본주의적 양상이 보편으로 되면서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이데올로기가 되는 셈이다. 이렇게 한번 왜곡한 후에 라캉은 보편주의적으로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정신분석학자가 된다. 따라서 비판받아도 싼 마초가 된다. 며칠에 걸쳐 읽은 논문을 자세히 읽으면 이런 비판은 라캉에 해당되지 않는다.

 

라캉의 사유는 프로이트의 입장을 매우 정교하게 발전시킨 면이 있다. 가령 프로이트는 이상아(Ideal Ego/ Ego Ideal)를 나중에 수퍼에고로 종합하는 데 이는 복잡한 사태를 단순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현재까지 내가 읽은) 라캉의 사유를 따라가면 라캉은 Ideal Ego와 Superego를 구별한다. (이에 대한 숙고는 이후의 독서를 기다려야 할 것 같다.) 라캉이 상상계 (the Imaginary)와 상징계(the Symbolic)을 다룰 때 이 구별은 필수적으로 보인다. 상상계에서 주체와 Ideal Ego의 관계가 문제된다. 상징계에서 주체와 Superego의 관계가 문제된다. 1940년대에 글을 쓰고 있는 라캉은 아직 이 구별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가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상상계이다. 즉 주체와 (Ideal) Ego의 관계를 다룬다. 이 관계에서specular identification이 핵심이다. 거울단계는 이 현상이 나타나는 시발점이다.

 

노트를 맺기 전에 좀 더 복잡한 문제를 접근해 보자. Specular identification이 인간 전체의 해명에 던지는 빛은 무엇인가? 라캉은 이 문제를 이 논문에서 다룬다. 이를 통해서 라캉은 광기(madness)가 어떻게 인간 존재(being)의 핵심에 놓이는 지를 설명하고 있지만 나에게 이 설명들은 아직 명확하지 않다.

 

이 부분에 해당하는 구절을 인용한다. “At the beginning of [psychical] development we see the primordial ego, as essentially alienated, linked to the first sacrifice as essentially suicidal. [문단바뀜] In other words, we see here the fundamental structure of madness.” (E. p.152; F. p. 187)

 

이 두개의 문단에서 나에게 특별히 어려운 구절은 ‘essentially suicidal’이다. 이 구절에 대한 노트는 앞으로 내가 숙고할 지점을 가리틴다. 두어 가지 억측을 늘어 놓는다.

 

우선 ‘누가’ 자살의 경향을 갖는가? 이와 관련하여 라캉은 프로이트의 ‘renunciations’의 개념을 고찰한다. 즉각적으로 성경에서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마태 16:24)는 예수의 말이 떠오른다. 프로이트/라캉의 시각에서 이 버림은 욕망의 희생이며 이를 ‘자살(의 경향)’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도 같다. 이를 명확하게 알기 위해서 라캉이 주장하는 소외(alineation)로서의 에고를 검토해야 한다. 주체는 거울단계에서 거울에 비친 자기의 모습 – 또는 단순하게 외부에 존재하는 사람 (semblables) –을 보고는 그 모습이 자신이라고 믿어버린다. 이를 통해 주체는 자신의 마음에서 솟구치는 생명(libdo)를 부인한다. 생명의 부인 = 죽음이라는 등식이 가능하다면 이는 명백하게 자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주체의 삶이란 이 이미지에 빼앗겨버린 자신의 욕망을 회복하는 과정을 겪어야 할 것만 같다. (예수의 언명은 보다 복잡한 사태를 드러내지만 지금 다루지 않는다.) 나는 이 억측이 라캉의 사유와 부합하는지 모른다. 그래도 이것은 사유들을 좀더 자세하게 검토할 계기를 마련해 준다.

 

라캉은 난해한 두 개의 문단으로 논문을 마감하고 있다. 이에 대해 특별히 할 말이 없다. 그러나 나의 노트에서 라캉을 발견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위해 옮겨 놓는다. “You have heard me lovingly refer to Descartes and Hegel in order to situate the place of the imago in our research. It is rather fasionable these days to ‘go beyond’ the classical philosophers. I could just as easily started with the admirable dialogue in the Parmenides. For neither Socrates nor Descartes, nor Marx, nor Freud, can be ‘gone beyond,’ insofar as they carried out their research with the passion to unveil that has an object: truth. [문단바뀜] As one such prince of words wrote – I mean Max Jacob, a poet, saint, and novelist, through whose fingers the threads of the ego’s mask seem to slip of their own accord – in Cornet à dés (‘The Dice Cup’), if I am not mistaken: the truth is always new.” (E. p.157; F. p. 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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