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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철학

라캉을 만나다 16

by 8866 2009. 1. 7.

 

라캉을 만나다 16

[에크리]를 통해 라캉을 만난다

글쓴이: 한살림 http://cafe.daum.net/9876/3Mhq/31

라캉의 'Logical Time ...' 논문에서 논리와 주체 

아주 오랫만에 라캉의 [에크리]를 읽을 수 있었다. 일주일 정도 집을 떠나 여행길에 있었다. 그동안 읽으려고 가져갔던 책들이 있었지만 몇 페이지 읽지 못했다. 집으로 돌아와서 책도 읽고 글도 쓰니 참 좋다.

[에크리]에 수록된 <Logical Time and the Assertion of Anticipated Certainty: A New Sophism>을 읽었다. 이 논문은 전쟁이 끝난 후인 1945년 어떤 잡지에 발표되었다. 라캉은 암호풀이에 상당한 흥미를 느꼈던 것 같다. 이 논문과 더불어 <도둑맞은 편지에 대한 세미나>는 항간에 회자되는 수수께끼들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고찰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수수께끼나 퍼즐 등을 푸는 일에는 젬병이다. 분명 보통 정도의 지성을 가지고 있을 것 같은 나는 위기만 닥치면 거의 순발력과 판단력이 제로 수준이 된다. 현대처럼 복잡한 사회를 잘 살려면 위기대처능력이 뛰어나야 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암호나 수수께끼를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일찍 해결하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 이 위기의 해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신을 바짝 차리는 것이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그런데 나는 호랑이의 포효가 멀리서 들리기만 해도 쫄아버리는 토끼나 사슴이 아닐까? 나는 언제나 나의 지성이든 힘이든 또는 무엇이든 ‘평가되는’ 자리에 놓이는 것을 극도로 무서워하였다. 무대공포증. 거의 모든 사람들이 무대공포증을 갖는다. 이는 빛날 수 있는 자리인 동시에 창피를 당할 수 있는 자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무대공포증을 극복하고 무대에서 자신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무수한 시련들을 겪어야 한다. 나는 일찍 실패했다.

무대공포증은 독서에 있어서도 그대로 적용되는 면이 있다. 나는 독서를 한 후에 소견이나마 갖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을 필요로 한다. 대략 하루 정도가 지나야 한다. 충격적인 책이라도 읽고난 직후에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소위 ‘즉흥’이라는 말은 내가 가장 싫어하면서 무서워하는 말이다. 누군가 ‘권위있는 사람’이 나에게 논문 하나를 던져 주고는 그 자리에서 읽고 소감을 발표하기를 강요한다면 나의 머리는 텅 비어 버릴 것이다. 그 빈 자리에 공포와 불안이 대신 자리 잡을 것이다.

다시 라캉의 논문으로 돌아가자. 이 논문에 대해 특별히 할 말이 아직 없다. 그렇지만 라캉이 [에크리]에 이 논문을 수록할 때 그는 분명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나에게 이 논문은 라캉이 다루고 있는 퍼즐처럼 하나의 퍼즐과도 같은 것이지만 순간적인 순발력을 발휘할 필요가 없어 좋다.

1945년. 이 시기에 라캉을 사로잡고 있던 많은 문제들이 이 논문에 나타나고 있다. 소위 거울단계와 심리적 ‘나’의 출현. 라캉의 논문은 논리학 비판(critique)이라는 면을 갖고 있다. 정신분석학자로서 라캉이 주목하고 있는 면은 논리에 있어서 주관성의 역할이다. 형식논리에서 결론에 도달하는 데는 주체의 주관성이 연루되지 않는다. 이것이 근대 과학 또는 근대 역사학 (랑케) 또는 실증철학의 목표가 아니었던가? 주관성의 철저한 배제.

잠시 포퍼의 반증주의를 생각해 본다. 반증주의는 그 이전의 검증주의에 대한 비판에서 나타난다. 포퍼에 따르면 (과학적) 명제는 검증될 수 없으며 오직 반증가능할 따름이다. 물론 이 경우에 참과 거짓은 명제가 현실을 설명하는가에 달려 있을 것이다. ‘내일 비가 온다’는 명제는 다음 날 비가 오는 경우에 참일 것이고 비가 오지 않는다면 거짓일 것이다. 이 참과 거짓이 될 수 있는 가능성에는 주관성이 개입하지 않는다. 그런가? 일단 그렇다고 하자. 이는 분명 매우 중요한 인간 활동의 영역에서 유효할 것이다. 그러나 삶에는 과학으로만 풀 수 없는 영역들이 있다. 포퍼를 반드시 폄하할 필요는 없다. 과학과 비(非)과학은 함께 갈 수 있다. 삶은 과학으로 풀 수 있다는 어떤 독단론을 포퍼가 주장하지 않는 한에 있어서… (이런 겸허한 과학을 현재에는 보기 어렵다.)

라캉의 논문에서 주체는 자신의 정체성을 오직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통해서만 확보한다. 나의 논리적 판단이 옳은가는 오직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읽음으로써 이루어진다. 라캉의 퍼즐을 요약할 필요가 있는 듯 하다. 대략 다음과 같다.

어떤 감옥에 세 사람의 죄수가 있었다. 간수는 그들 가운데 한 명을 석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석방할 사람을 고르기 위하여 하나의 수수께끼를 내었다. 세 개의 하얀 딱지와 두 개의 검은 딱지가 있다. 각각 하나의 딱지를 뒤통수에 붙였다. 본인은 자신이 어떤 색깔의 딱지를 달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다른 두 사람의 딱지는 볼 수 있다. 간수는 자신이 어떤 색깔의 딱지를 가졌는지를 알아 맞추는 사람을 석방하겠다고 말한다. 단순히 통계적 추측이 아니라 명확한 논리적 근거를 제시해야만 한다. 서로 소통하는 일은 금지되어 있다. 간수는 그들 모두에게 하얀 딱지를 붙였다.

이윽고 생각할 시간이 지나고… 이 퍼즐에 대한 ‘공식적인’ 해답은 이렇다. 죄수를 A B C라고 하자. A는 이렇게 추론한다: 만약 내가 검은 딱지를 가지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면 B는 내가 검은 딱지를 가진 것을 보고서 이렇게 가정할 것이다. ‘만약 나도 검은 딱지를 가지고 있다면, C는 즉시 자신이 하얀 딱지를 가진 줄 알고 문으로 향할 것이다. 그런데 C는 머뭇거리고 있다. 따라서 나는 하얀 딱지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나서 두 사람은 동시에 문을 향해 걸어갈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머뭇거리고 있다. 따라서 나는 검은 딱지를 가지고 있지 않다. 모두 A와 동일한 추론을 하여 세 사람은 자신이 하얀 딱지를 가졌다고 결론을 내리면서 동시에 문을 향해 간다.

이렇게 글로 쓴 다음에도 이 퍼즐은 나에게 여전히 수수께끼처럼 들린다. 그런데 라캉의 긴 분석에서 보듯이 나와 비슷한 당혹감을 다른 사람들도 느낄 것이다. 라캉만한 사상가도 이를 이해하기 위하여 논문을 쓸 시간이 필요했다. 적잖은 위로를 받는다. 이 대목에서 라캉은 매우 중요한 언급을 한다. 이런 일이 현실로 일어나지 않아서 좋다고…

이 퍼즐을 이해하기 위하여 라캉을 따라가 보자. 라캉은 일단 두 사람이 검은 딱지를 가진 경우를 제외한다. 이 경우에 A는 거침없이 문으로 향할 것이다. A가 거침없이 문으로 향하는 것을 ‘보고서’ B와 C도 즉각적으로 자신들이 검은 딱지를 가진 것을 알 것이다. 이 경우를 제외하면 가능성은 ●○○와 ○○○일 것이다. 처음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만약 A가 검은 딱지를 가진 경우에 B와 C는 자신도 검은 딱지를 가진 것이 아닌 지를 생각할 것이다. 그러면 B와 C 가운데 한 명은 즉시 문으로 향해야 한다. 잠시 멈추었다가… 그들은 자신이 검은 색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동시에 문으로 향할 것이다. 그러면 나(A)는 무슨 색깔인가? 그들이 멈추지 않는다면 나는 검은 색깔일 것이다…. 따라서 나는 그들의 뒤를 따를 것이다. 만약 내가 하얀 색이라는 그들은 결정하지 못한 채 멈출 것이다. 그런데 간수는 세 사람에게 모두 하얀 딱지를 주었다. 그래서 처음의 추론과 결론이 적용된다.

라캉이 주목하는 것은 결정을 하지 못하여 ‘머무는 시간’이 있으며 이를 주체(A)가 해석을 한다는 것이다. 라캉에 따르면 이 멈춤은 두 번 일어난다. 문 앞에서 다시 한번 일어난다. 즉 주체 A가 자신이 정말로 하얀딱지를 가졌는지에 대한 의심이 생긴다. 멈춘다. 그와 더불어 다른 B와 C도 동시에 멈춘다. 이 멈춤으로 하여 A는 자신이 하얀 딱지를 가진 것을 알고 이제는 의심없이 문으로 향한다. 동시에… 세 사람의 죄수들의 성공과 실패는 오직 집합적일 따름이다. 현실에서 간수는 한 사람만 석방하기 위해 다른 수수께끼를 제시할 것이다. 또는 자의적으로 선택할 수도 있다.

이 퍼즐에서 주체가 결론에 도달하는 데 있어 ‘멈춤’은 필수적이다. 라캉의 영역본에서 이는 ‘the suspended motions’라고 불린다. 주체는 오직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해석함으로써만 자신을 알 수 있다. 이 지점에서 왜 이 퍼즐이 라캉의 관심을 끌었는지를 알게 된다. 욕망은 타자의 욕망… 동일성의 확보는 오직 타자와 연관됨으로써만 가능하다는 탈현대의 명제.

내가 이런 상황에 있다면 이 결론에 도달할 수 있을지는 의문스럽다. 순발력 제로… 완벽한 논리성을 구사할 수 있는 사람들을 상정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A와 B와 C 가운데 한 명이라고 이 퍼즐을 해결하는 데 있어 논리적 결함 또는 한계를 갖는다면… 이 해결이 다른 사람들의 추론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한에 있어서 A와 B와 C는 공동의 운명을 갖는다.

이 시기 라캉이 쓴 글에 반복하여 나타나고 있는 주제를 인용한다. “Just as, let us recall, the psychological ‘I’ emerges from an indeterminate specular transitivism, assisted by an awakened jealous tendency, the ‘I’ in question here defines itself through a subjectification of competition with the other, in the function of logical time. As such, it seems to me to provide the essential logical form (rather than the so-called existential form) of the psychological ‘I.’ “ (E. p. 170; F. p. 208)

이 두 개의 문장에서 내가 선명하게 파악할 수 없는 부분은 많다. 나 자신의 관심에 따라서 한 두 가지만 언급하고 이 논문에 대한 노트를 마감한다. 여기에 제시된 라캉의 사유가 나에게 던지는 중요한 문제의 하나는 ‘사람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즉각 이 문제는 내가 개인적으로 많은 빚을 지고 있는 유대교 신학자인 마르틴 부버를 상기시킨다. 특별히 두 권의 책을 추천한다. [나와 너] [사람과 사람사이].

부버의 사상에서 핵심은 관계이다. 마찬가지로 라캉에 있어서도 사람은 관계이다. 라캉의 사유는 부버와 상당한 부분 겹친다. 부버의 사유의 핵심은 [나와 너]의 처음 몇 문장에 선명하게 드러난다. 이 책은 상당히 읽기 힘들지만 [사람과 사람사이]로 읽으면 읽을만 하다. 요약하면, 키에르케고르의 ‘단독자’는 없다. 타자와 해소할 수 없는 관계에서 단독자로 서려는 욕망이 있을 뿐. 라캉이 이 퍼즐에서 제시하고 있는 것도 이것이다. 이 논문의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는 새로운 퍼즐 하나. 마지막 부분. “… (3) I declare myself to be a man for fear of being convinced by men that I am not a man” (E. p.174; F. p.213). 우리가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우리들은 누구나 관계에 서 있다. 당연히 이는 나를 화이트헤드로 이끈다. 얼핏 보기에는 들뢰즈와 레비나스 등으로 이끌기도 할 것처럼 보인다.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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