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캉을 만나다 8
[에크리]를 통해 라캉을 만난다
글쓴이: 한살림 조회수 : 85 07.09.28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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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와 복수의 현실들
<Beyond the “Reality Principle”>은 후기 라캉의 글에 비해서 접근하기 수월하다. 서른 여섯의 젊은 라캉은 아직 자신의 스타일을 발견하지 못했거나 자제했다. 문학이나 예술하는 사람이 아니라 ‘학자’로서 서른 여섯에 자신의 스타일을 시험하는 사람은 망할 각오를 해야 한다. 아직은 스승-제자의 관계를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스승이 이해할 수 있는 스타일로 글을 써야 한다. 이 맥락에서 아주 드라마틱한 인물은 데리다였다. 일찍 자신의 스타일을 고집함으로써 고향에서 오래 왕따를 당하고 미국을 경유하여 프랑스에서 ‘공식적인’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라캉이 이 글을 쓰던 시절에 에고심리학자의 분석을 받고 있었기는 하지만 에고심리학에 마음을 주었는지는 모르겠다. 예술과 철학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던 라캉은 이미 처음부터 미심쩍은 인물이었을 것이다. <현실원칙(reality principle)을 넘어서>는 아직 에고심리학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한 시절의 글이지만 그의 미래를 정확하게 예고하고 있다.
에고심리학은 ‘현실원칙’에 목숨을 건 정신분석학이다. 현실은 정상과 광기를 구별하는 기준이 된다. 이는 곧 경험론의 기본 원칙이기도 하다. 진리는 외부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사실(fact)을 모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외부 사실과 내부 이미지(image) 사이에 일대일의 대응관계가 존재한다. 이 대응관계를 발견하기 위한 지적 노력이 과학으로 불린다. 이 대응관계가 엄연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 오류 또는 광기에 사로잡혔다고 말한다. 외부에 A가 있다고 하자. 과학은 A를 ‘있는 그대로’ 파악하는 과정이다. 현실원칙은 외부에 있는 A를 A로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A를 B로 파악하는 경우에는 현실원칙에 심대한 결함이 있으며 이를 교정하는 것이 에고심리학의 목표가 된다. 이 심대한 결함은 안나 프로이트 등에 의해서 자아의 방어기제 (defense mechanism of the ego)로 개념화되었다. 이렇게 하여 경험론과 정신분석학적 에고심리학은 구조적인 유사성을 갖게 되었다. 이십세기에 들어서 (과학)철학이 (논리)실증주의에 대해 근원적 문제를 제기하고 있던 시점에서 미국에서 에고심리학은 실증주의에 투항하였다.
라캉의 박사논문은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의 관심을 끌었다고 한다. 라캉과 초현실주의 예술을 묶는 공통점이 있다면 ‘현실’에 대한 급진적 도전일 것이다. 우리는 무엇에 근거하여 외부에 절대적으로 객관적인 A가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가? 우리는 A가 구성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는가? 이제 결정적인 문제로 떠오르는 것은 외부(현실) 대신에 내부(주체)가 된다. 현실 A는 주체 S에 의해 구성된다. 주체 S는 A B C 등 복수의 현실을 동시에 가질 수 있다 (또는 가질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실증주의는 오직 하나의 현실 A를 가질 것을 강요하면서 현실 B와 현실 C를 오류 또는 광기로 축출하고자 한다. 그런데 이 축출은 언제나 완벽할 수 없기에 현실 B와 현실 C는 현실 A를 침범한다. 따라서 정신분석학에서 ‘건강한’ 주체는 S는 오직 하나의 현실 A가 아니라 복수의 현실들을 한꺼번에 살아간다.
피카소의 그림은 정신병자 P의 그림을 닮았다. 그림을 통해 정신분석을 하는 사람은 P의 그림을 통해서 그의 정신병을 읽을 것이다. 그러면 피카소의 비슷한 그림에서는 무엇을 읽는가? 당연히 피카소의 정신병을 읽지 않겠는가? 그렇지만 피카소는 정신병자로 취급되지 않는다. 피카소와 정신병자 P를 가르는 선은 어디에 있는가?
영화 [싸이코]와 [뷰티풀마인드]는 이 점에서 생각할 거리를 던진다. [싸이코]는 어떤 의미에서 에고심리학적 영화이다. [싸이코]의 주인공은 의심없이 정신병자로 분류된다. 그러나 [뷰티풀마인드]의 주인공은 그런 단순한 분류에 저항한다는 점에서 정신분석학의 ‘치료적’ 전제들에 도전한다. 복수의 현실들을 통합하지 못한 사람이 ‘의미있는’ 삶을 살 가능성은 언제나 사회의 논리에 의해 결정된다. 푸코가 보여주었듯이 무녀와 광녀의 구별은 오직 사회의 개입으로만 가능하다.
푸코와 들뢰즈가 라캉주의를 포함하여 모든 정신분석학에 딴지를 거는 이유는 주체 S의 복수 현실들과 관련이 있다. 특히 들뢰즈에게 있어서 주체 S는 결국은 통합될 수 없는 복수의 현실들을 살아간다. 주체 S가 갖는 현실들의 다발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자축할 수는 없는 것인가? 라캉이 에고심리학 등 인간공학으로 변모하는 정신분석학을 비판하기는 하지만 결국은 ‘치료’라는 영역에 자리를 잡고 있는 한에 있어서 복수의 현실들을 하나의 현실로 만드는 시도에 연루될 수 밖에 없다. 피카소와 정신병자 P를 가르는 경계는 애매하지만 정신분석학에서 그들의 차이는 결정적이다. 정신병자 P를 의미있는 사회 생활이 가능하도록 만드는 것이 목적인 한에서 라캉의 정신분석학도 인간공학이 될 수밖에 없다.
정신분석학에 대한 들뢰즈의 비판이라는 맥락에서 나의 입장은 무엇인가? 나는 언제나 주체 S의 복수의 현실들의 종합이라는 가능성을 생각한다. 산산히 부서진 주체로 산다는 것은 불가능하지는 않아도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종합되어야 한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복수의 현실들이 다양하게 종합될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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