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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철학

라캉을 만나다 6

by 8866 2008. 10. 6.

라캉을 만나다 6

[에크리]를 통해 라캉을 만난다

 

라캉이라는 상품에 대하여

글쓴이: 한살림 07.09.18 06:58

http://cafe.daum.net/9876/3Mhq/7

 

날이 갈수록 협소해지는 인문학의 시장에서 오직 생존 수단으로 라캉의 사유를 공부할 수도 있다. 인문학의 분야에서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지식은 난해해지는 경향이 있다. 인문학의 지식은 다른 상품과 달리 독점 또는 과점이 거의 불가능하다. 사유가 책으로 묶여 나오는 경우 다른 상품과 유사한 가치를 창출하기는 하지만 사유 자체는 (이론적으로는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열려있다. 라캉의 책은 지적소유권에 의해 보호받지만 라캉의 사유를 자본주의적으로 보호할 방법은 없다. 많은 자연과학의 지식들은 특허에 의해 독점적으로 보호된다. 이 점에서 인문(과)학의 지식들은 특허로 보호되지 않는다. 라캉의 사유 자체가 지적 상품으로 등록되어 라캉의 용어 또는 사유를 사용할 때마다 10원씩 사용료를 내는 상황은 거의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이 점에서 인문학의 전문가들은 ‘난해하지만 심오한 통찰’을 통해서 비교우위를 점하는 경향이 있다. 인문학이라는 시장에서는 ‘난해함’이 진입장벽의 역할을 한다. 왜 인문학자들이 갑자기 글을 어렵게 쓰는가 하는 문제는 시장의 급속한 변화와 관련이 있다. 물론 이것은 정확한 질문이 아니다. 원래 인문학자들은 글을 어렵게 썼다. 아리스토텔레스나 아우구스티누스나 아퀴나스나 칸트를 생각해 보라. 심지어는 노동자들이 읽을만큼 쉽게 글을 쓰겠다고 결심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글도 어렵다. 사태의 엄밀함과 정확함을 추구하는 모든 사유들은 불가피하게 복잡해진다.

 

그래서 보다 정확한 문제는 [지적사기]와 같은 책을 통해 나타난다. 이 책을 저술한 수학 교수는 라캉이나 데리다에게 자신의 텍스트를 보낸 것이 아니라 포스트모더니즘에 영향을 받은 어떤 잡지사에 글을 보냈다. 그런데 황우석 이후에 우리는 세계적 수준의 자연과학의 잡지도 편견에 사로잡힌 교수가 한 짓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안다. 나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라캉과 무수한 라캉의 엉터리 제자들을 구별할 수 있는 기준이 있는가 하는 점이다. 라캉을 (나름대로) 원용하는 사유들이 틀렸다고 라캉이 틀렸다는 보장은 없다.

 

왜 라캉의 사유를 알지 못하면서도 그것을 원용하는가? 라캉의 사유는 인문학의 시장에서 잠재적인 경쟁자들을 막는 데 매우 유용하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 중요한 전제조건의 하나는 라캉의 사유가 가치있다는 함의가 이미 형성되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는 사람의 난해함은 분석의 대상은 되지만 숭배의 대상은 되지 않는다. 라캉의 사유처럼 어려운 사유는 다수의 인정에 의해 정당성을 확보하지 않는다 (못한다). 그런데 라캉의 사유를 통해 삶과 세상을 보다 적확하게 이해하는 사상가들 (예를 들면 알튀세르 데리다 크리스테바 지젝 등등)이 출현한다. 처음에는 하나의 종교적 광신자들의 집단처럼 보이던 라캉주의자들이 ‘철학자의 돌’을 소유하고 있다는 증언과 의심과 소문이 무럭무럭 피어난다. 라캉의 사유를 전혀 모르는 일반인들에게 라캉은 영향력을 미치기 시작한다. (프랑스에서 라캉의 많은 기행들이 공중파 방송을 탔다고 한다.)

 

상황이 무르익으면 라캉의 사유를 이해할 능력도 의도도 없는 많은 인문학자들도 라캉에 관심이 갖기 시작한다. 이 때 라캉의 사유는 인문학의 시장에서 일시적인 독과점을 낳는다. 이 경우 라캉의 사유가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좋다. 많은 인문학자들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라캉에 대한 이해를 더욱 어렵게 만들면서 독과점의 상태를 연장하기도 한다. 라캉의 사유가 (유행처럼) 갑작스럽게 인문학 소비자들의 관심을 잃으면 라캉의 전문가들은 별로 큰 고민없이 라캉의 적들에게로 옮아가곤 한다. 그래서 짧은 시기에 많은 인문학자들은 하바마스에서 출발하여 푸코를 거쳐 라캉을 거쳐 들뢰즈를 거쳐 다시 아도르노나 벤야민으로 경쾌하게 이동한다. Everything goes!

 

라캉의 사유가 유행되고 있는 한 그를 진지하게 이해하려는 노력은 이차적이다. 어쩌면 진지함은 많은 인문학자들에게는 생존력을 약화시킨다. 라캉에 진지하게 사로잡히면 라캉이라는 문화상품이 인기를 잃었을 때 다른 상품으로 매끄럽게 움직일 수 없을 것이다.

 

(갑자기 소나기가 내린다. 나에게도 라캉의 사유는 상품이 아닌가를 생각한다. 나는 라캉의 사유를 상품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을 비판하지 않는다. 그러면 어떤가? 라캉의 사유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더러 스승을 위해 순교도 할 것이다. 그러면 어떤가? 아직 나에게 라캉의 사유는 명확한 위치를 잡지 못하고 떠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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