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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철학

라캉을 만나다 5

by 8866 2008. 9. 22.

라캉을 만나다 5

[에크리]를 통해 라캉을 마난다

 

라캉에게도 인식론적 단절이 있는가 등등

글쓴이: 한살림 조회수 : 112 07.09.16 13:56 http://cafe.daum.net/9876/3Mhq/6

 

라캉이 1936년에 쓴 <Beyond the “Reality Principle”>을 읽고 있다. 이 글이 성숙한 라캉의 사유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어떤 것일까? 나는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충분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 더러 어떤 사상가의 삶을 전체로 개관할 때 거대한 균열이 나타나기도 한다. 알튀세르는 인식론적 단절의 개념을 사용하여 말년의 마르크스는 초년의 마르크스와는 결정적으로 다르다고 주장한다. 물론 알튀세르가 염두에 둔 것은 마르크스라는 개인의 혁명이지 퇴행이 아니다. 이런 단절을 라캉에게도 발견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일반적으로 사상가들은 성숙(진화)한다. 물론 온갖 사유들을 실험하는 시기들을 어느 정도 지나서 흐릿하나마 자신의 사유를 찾은 시기를 출발점으로 할 때를 의미한다. 칸트가 흄의 저작을 읽으면서 독단의 잠에서 깨어났다고 말할 때 이는 칸트가 진정으로 자신의 사유를 발견했음을 의미한다. 알튀세르가 맞다면 사상가로서 두 개의 사유를 갖는 마르크스와는 달리 칸트는 하나의 사유만을 갖는다. 늦게 자신의 사유를 저술한 칸트에게는 알튀세르적 의미에서 인식론적 단절은 없(을 것이)다.

 

[논어]에 공자의 삶이 짤막하게 요약되어 있다. 그는 십오세에 학문에 뜻을 두었다고 한다. 이런 저런 부침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공자는 이 ‘학문’을 중심으로 살다가 죽었다(고 한다). 하인쯔 코핫은 거의 환갑이 가깝던 나이가 되어서야 에고심리학이라는 독단의 잠에서 깨어나 자신의 사유를 정리할 용기를 가졌다. 그는 죽을 때까지 10년 세월만을 가질 수 있었다.

 

라캉은 언제 독단의 잠을 깨었을까? 그가 <The Function and Field of Speech and Language in Psychoanalysis>라는 논문을 로마에서 발표한 1953년이 아니었을까? 이 시절 라캉을 부도덕한 바람둥이로 만든 실비아 바타이유는 어떤 역할을 했을까? 1955년에 발표한 <The Freudian Thing>을 라캉은 실비아 바타이유에게 바치고 있다.

 

과거 100년 동안의 정신분석학의 역사를 개관하면 ‘파문’이라는 유사종교적 사건들로 얼룩져 있다. 프로이트는 아들러, 융, 페렌찌, 랑크 등과 (격렬하게) 결별하였다. 프로이트 이후로도 정신분석학자들은 걸핏하면 싸우고 서로 적이 되었다. 그래서 정신분석학의 세계에서는 새로운 사유를 제시할 때 파문을 각오해야만 한다.

 

코핫이 오랫동안 커밍아웃하지 못한 이유는 이십년 가까이 스승으로 친구로 사귀어 온 사람들이 한순간에 적이 될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염려는 틀리지 않았고 그는 늙은 나이에 자신의 영토를 마련해야만 했었다. 다행히 미국에서는 에고심리학이라는 정신분석학이 급작스럽게 균열되기 시작하던 때여서 코핫은 새로운 친구들과 제자들을 가질 수 있었다.

 

라캉이 1953년에 문제의 논문을 발표했을 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길에 접어들었음을 알았을 지도 모른다. 친구들이 갑작스럽게 모두 적이 되는 경험은 두렵고도 고통스럽다. 라캉은 이 외로운 시기에 자신의 삶을 고정하는 사랑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이 시절에 라캉은 오십 즈음이었다.

 

일정한 시기에 독단의 잠에서 깨어났다고 주장하는 위대한 사상가들의 과거를 면밀하게 더듬어 보면 반란(혁명 또는 개종)의 씨앗은 오래 전에 뿌려져서 싹이 트고 자라고 있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사소한 통찰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자신이 성장한 기반을 완전히 허물어 버리기도 한다. 다시 코핫의 경우를 예로 들면 그는 1971년에 결정적인 책을 발간하기 오래 전에 발표한 글들에서 (그의) 새로운 사유의 핵심들이 발아하고 있다. 코핫은 오랫동안 에고심리학을 보다 견고하게 세우고 싶어했지만 결국에는 에고심리학이 전체로서 틀렸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라캉의 경우는 어떨까? (나에게 수긍이 가는)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는 앞으로도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에크리]를 읽으면서 라캉의 사유에 결정적인 균열들을 읽을 수 없다면 라캉은 이미 1936년 이전에 자신의 사유를 가지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1966년의 시점에서 라캉은 자신의 사유에 결정적인 균열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라캉은 새로운 표현들과 개념들을 도입하였지만 자신의 ‘진리’는 이미 그 때 확고한 뿌리를 내렸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게 보인다.)

 

라캉의 자기 이해가 옳은 것이라고 받아들일 때, 1936년에 발표된 <Beyond the “Reality Principle”>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이미 성숙한 사유의 관점에서 과거의 글들을 읽는 것은 [성경]의 <구약>을 읽는 것과 비슷하다. 나는 <구약>이라고 할 때 이미 <신약>을 전제하고 있다. 예수를 ‘진리 사건’으로 보지 않는 유태교인들은 그 비슷한 (동일한) 책을 <구약>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들의 경우에 [성경]은 <신약>을 포함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예수가 아니라 마호멧을 결정적인 ‘진리 사건’으로 보는 이슬람교인들은 [코란]과의 연관에서만 [성경]을 해석할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신약>의 관점에서 <구약>을 보는 매우 복잡한 방식들이 존재한다. 이미 바오로(바울)은 ‘예수라는 진리 사건’의 관점에서 절대정신(God)의 자기실현으로서의 유대 역사를 재구성하였다. 상당히 긴 개인사를 갖는 사상가들의 사유를 역사적으로 구성할 때 동일한 문제에 직면한다.

 

라캉의 경우를 예로 들면, 라캉의 성숙한 사유의 관점에서 볼 때 그가 1936년에 발표한 “거울단계”의 개념은 이미 구축된 정신분석학 (에고심리학)에 속하는 것인가 아니면 전연 새로운 사유가 나타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인가? 나는 이 물음에 대해서도 지금 답할 수 없다. 다만 내가 앞으로 라캉을 읽을 (무수한 방향들 가운데) 하나를 보여준다.

 

<Beyond the “Reality Principle”>은 서른 다섯의 라캉이 매우 철학적임을 보여준다. 프로이트를 비롯하여 대부분 의학 박사였던 초기 정신분석학자들은 기질적으로 경험적 관찰자들에 가까웠다. 상담의 현장에서 관찰한 것을 정신분석학자들의 공동체가 공유하려는 노력에서 정신분석학의 이론들이 나타났다. 프로이트는 더러 철학 서적들을 읽었지만 철학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철학 전반에 대해서도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철학은 신경증 환자의 사유이다.) 프로이트는 쇼펜하우에르와 니체를 어느 정도 알았지만 헤겔에 대해서는 거의 몰랐다. 그는 칸트의 ‘물자체’의 개념을 잠깐 실험한 적이 있었지만 칸트에 대한 그의 지식은 상식 수준을 넘지 못했다. 프로이트는 철학보다는 문학과 의학에 경도되었다. 루드비히 빈스방거 (L. Binswanger 1881-1966)의 실존주의적 정신분석학 정도가 프로이트와 하이데거를 종합하려는 거의 유일한 시도였다.

 

라캉은 ‘일반적인’ 정신분석가의 시각에서 볼 때 철학에 함몰되었다. 이 점 때문에 라캉은 가끔 ‘비정한’ 주지주의자라는 비판을 받았다. 영미의 주요 정신분석가들이 라캉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철학/종교에 대한 복잡한 감정들(무지)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라캉, 리쾨르, 데리다, 크리스테바, 지젝 등의 프로이트 해석에 대해 대부분의 영미 정신분석학자들은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 지 파악하지 못한다. 부르스 핑크 등의 라캉주의 정신분석학자들이 있기는 하지만 영미 정신분석학의 흐름을 변화시킬 만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비평과 문화이론에서 라캉은 매우 중요한 인물이 되고 있을 뿐, 막상 일상에서 내담자를 만나고 있는 정신분석가들은 라캉의 철학적 언어를 이해할만한 인문학적 소양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들이 앞으로 이런 소양을 가질 것이라는 보장도 거의 없다. 철학을 비롯한 인문학의 영역은 갈수록 협소해지고 있는 실정이 아닌가!

 

어쨌든 라캉은 이 논문을 심리학에 있어서 연상주의(associationism)를 비판하는 데서 시작하고 있다. 철학적으로 예민한 라캉은 즉각적으로 로크와 흄으로 대변되는 영국 경험론에 대한 비판으로 나아간다. 라캉이 고등학교 시절에 데카르트의 철학이 지배하던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던 점과 연관하여 볼 때 이 점은 의미가 있다. 라캉은 합리론을 비판하면서 경험론에 의존하지 않고 독일의 관념론(idealism)으로 향하고 있다. 칸트와 헤겔. 프로이트는 칸트와 헤겔의 사유를 급진적으로 이어받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지 않을까? 왜 정신분석학은 영국 (경험론)이나 프랑스(합리론)이 아니라 독일(관념론)에서 출현하였을까? 라캉은 이 문제를 자세하게 다루지 않았지만 정신분석학의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는 흥미있는 주제일 수 있을 것이다.

 

라캉의 논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노암 촘스키의 언어학을 함께 읽어도 좋을 것이다. (현실) 정치에 총력을 기울이기 이전 시기의 촘스키. 플라톤과 프로이트를 중심으로 마음의 문제를 끈질기게 고민하고 있는 촘스키를 라캉과 함께 공부하는 일은 (사소한 사고 놀이에 지나지 않을 지 몰라도) 재미있을 것이다. 참고로 [에크리]의 마지막 논문인 <과학과 진리>에서 라캉은 지나가는 투로 로만 야콥슨과 동급으로 촘스키를 언급하고 있다. 이는 중요할 수 있다. 라캉은 일급의 사상가라고 생각하지 않는 한 거의 실명을 거론하지 않는다. 그가 촘스키를 문제 인물로 생각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미국에서 요즘 유행하고 있는 어떤 언어학자’ 정도로 언급했을 것이다. 지금 나에게 있어 라캉과 촘스키가 만나는 자리는 데카르트와 경험론에 대한 비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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