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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철학

라캉을 만나다 2

by 8866 2008. 9. 8.

 

라캉을 만나다 2

[에크리]를 통해 라캉을 만난다

 

 

[에크리 읽기 2] 라캉과 자기분석 
글쓴이: 한살림

07.09.13 07:31 http://cafe.daum.net/9876/3Mhq/3

라캉이 정신분석가라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이 [에크리] 읽기에 도움이 될 것인가? 한국에서 [에크리]를 읽거나 또는 라캉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정신분석가가 아니다. 철학이나 문학 등 인문학의 영역에서 라캉의 통찰 또는 체계를 적용하기 위해 라캉에 관심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정신분석가의 분석과 비평가의 적용은 다르다.

분석은 정신분석가와 내담자 (분석주체 또는 광인 또는 환자 등등)의 ‘사이에서’ 벌어진다. 정신분석가는 내담자의 정신구조에 자신이 연루된 상황 (전이 transference)을 분석한다. 다시 말하면 분석에서 정신분석가는 ‘반드시’ 내담자의 대상(object)이 된다. 프로이트의 이론을 빌면 발기부전을 경험하고 있는 남성 내담자에게 정신분석가는 ‘거세하는 아버지’로 인식될 것이다. 이 내담자의 어린 시절의 아버지와는 달리 정신분석가는 내담자의 (어머니에 대한) 성욕과 (아버지에 대한) 분노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도록 용인할 것이다. 수년에 걸쳐 분석이 진행됨에 따라 정신분석가가 내담자의 정신구조에서 하는 역할이 바뀔 때 분석의 성공과 실패를 가늠한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분석은 환자의 몸 속에 (어떤) 항체를 주입한 후에 몸의 반응을 관찰하는 일과 유사하다. 항체는 독일 수도 약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제 라캉의 사유를 소설 또는 영화에 적용하려는 사람을 생각해 보자. 이는 라캉이 말하는 분석 상황이 아니다. ‘소설(의 세계)’가 내담자와 유사성을 갖는 경우에도 소설을 읽는 사람은 소설가 또는 소설의 특정 인물의 삶에 개입하지 못한다. (만약 소설이 아니라 소설을 읽는 사람에 초점을 맞춘다면 분석과 매우 유사한 상황이 나타난다! 소설을 읽는 사람에 있어서 소설가 또는 소설 또는 소설의 등장 인물이 미치는 심리적 영향은 무엇인가?) 라캉의 사유를 소설 읽기에 적용하는 독자는 정신분석가가 아니라 객관적인 관찰자의 입장을 취한다. 라캉 또는 정신분석가의 작업은 결코 객관적일 수 없다. 내담자의 삶에 어떤 방식으로든지 개입하는 순간에만 분석 상황이 나타난다. 물론 사례 연구를 쓰고 있는 경우라면 정신분석가는 비평가와 비슷한 자리를 점한다. 프로이트가 [햄릿]을 분석하고 라캉이 [도둑맞은 편지]를 분석하는 경우 그들은 정신분석가라기 보다는 정신분석학적 비평가라고 할 수 있다.

나는 프로이트나 라캉과는 달리 정신분석가가 아니라 비평가일 것이다. 이는 프로이트 또는 라캉의 이론을 최종적으로 평가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의 사유를 좋아하거나 싫어할 수 있지만 그것이 옳거나 틀렸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에게는 이 점이 오랫동안 난처한 문제였다. 정신분석학에는 매우 다양한 입장이 존재한다. 가령 에고심리학과 라캉주의를 생각해 보자. 서로 틀렸다고 말한다. 멜라니 클라인이나 하인쯔 코핫 등이 가세하면 문제는 더욱 복잡해진다. 정신분석가가 아닌 나는 누구의 손을 들어줄 것인가? 과연 상충하는 입장을 평가하는 ‘객관적인’ 기준은 없는 것인가? 토마스 쿤이 주장하듯이 모든 이론들은 그 나름대로 옳다. 그런데 정신분석가였던 라캉은 분석의 성공과 실패를 통해 자신의 주장이 옳다고 말할 수 있었다. 적어도 다른 정신분석학의 체계들에 비해 우월하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나는? 정신분석학을 공부한 수년을 되돌아 보면 나도 나름대로 다양한 체계들의 상대적 옳음과 그름을 가늠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소설이나 영화를 정신분석학적으로 해석하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많은 현상들의 해석에 관심이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현상들을 해석하여도 멋진 해석이나 볼품없는 해석일 수는 있어도 옳거나 그른 해석이라는 느낌(믿음)을 갖지는 못했다. 그리하여 나는 이 사상가에서 저 사상가로 옮아가면서 헤매었다. 글로 한 그릇 밥도 마련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이런 방황은 순간적인 지적 희열을 주지만 결국 무의미로 나를 이끌 것이다.

그런데 늙어서 지혜가 자라는지 서서히 하나의 방법을 찾기 시작하였다. 정신분석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알고 있는 것이다. 프로이트에게 돌아감은 결국 프로이트에게서 배우는 것이다. 무엇을 배우는가? 프로이트가 정신분석을 받지 않고서 정신분석가가 된 비결을 배운다. 이를 자기 분석이라고 한다. 프로이트는 자기를 분석함으로써 최초의 정신분석가가 되었다. 그렇다면 나도 ‘스스로’ 정신분석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이 경우 가장 큰 장애는 나 자신의 무의식을 들여다 보는 정직과 용기이다. 프로이트가 소설가들과 예술가들에 주목한 이유는 그들 가운데 예외적 소수가 정신분석을 받지 않고서도 자신들의 심연을 들여다 보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프로이트의 천재는 가지고 있지 못하지만 자기 분석에 있어서 매우 유용한 상황과 도구들을 가지고 있다. 오늘에 있어서 자기 분석이란 프로이트의 경우와는 달리 다양한 정신분석학의 이론들을 자신에게 적용해 보는 것이다. 나의 삶의 사건들을 이해하는 것보다 더 의미있는 일이 있을까? 이 자기 분석의 과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나는 다양한 이론들의 상대적 옳음과 그름을 평가할 수 있기를 바란다.

나는 오랫동안 정신분석학의 책을 읽으면서 정신분석학을 아는 왕도는 자기분석임을 깨달았다. 라캉을 이해하는 일은 라캉을 앞에다 두고 자신을 내담자의 자리에 두고 아주 오래 싸워야 한다. 밀레르와 지젝이 라캉(주의)의 분석을 받았다는 사실은 그들이 라캉을 이해하는 일에 있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밀레르의 분석이라도 받을 수 없는 우리들은 스스로를 분석할 수 밖에 없다. 분석이 어느 정도 성공하면 우리도 지젝처럼 사회의 모든 분야를 가로지르는 해석들을 생산할 수 있지 않을까? 설사 아무 것도 생산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누구의 정신분석학이 옳은 지를 판단하는 일은 자기분석없이는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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