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무지개 그림자"
-- 교향곡과 말티즈 그리고 철민이 B
6. 교향곡과 말티즈 그리고 철민이 B
문을 열고 방안에 들어서자 어김없이 음악이 들려온다.
오늘은 베를리오즈가 아닌 슈베르트의 교향곡 제8번 『미완성』이다. 가난하고 박명하고 불우했던 작곡가 슈베르트, 그래서인지 그의 음악에는 어두움과 음울함과 불안함이 요소마다에 진하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격정은 미친 듯 하고 아름다움과 사랑은 애조를 띠고 가락은 안정감보다는 불길한 분위기가 흐른다.
애수가 짙은 바이올린 연주는 콘트라베이스와 첼로의 피치카토연주로 인해 토막토막 동강나는 듯 했다. 목관과 호른이 대화하듯이 호응연주를 했지만 명진의 귀에는 언제나 바이올린과 트롬본의 음색만 뚜렷하게 들릴 뿐이다. 연하고 부드럽고 섬세하고 감미로우면서도 우수에 잠긴 듯한 오보에의 목가적 선율은 트롬본의 우렁차하고도 날카로운 소리에 묻혀 버리곤 한다. 슬라이드에 의한 레가토 연주가 어려운 트롬본인데도 연주자는 능숙한 텅킹연주로 그 난제를 절묘하게 소화해내고 있다.
그런데 아내는 반대로 호른과 첼로, 클라리넷의 연주를 즐긴다. 현악기중에서도 첼로연주를 가장 좋아했다. 그중에서도 저음의 어둡고 신비로운 연주에는 거의 넋을 잃을 지경이다.
계속 반복되는 주제의 애수어린 곡상은 피치카토연주에 의한 첼로의 메마르고 불확실한 음 때문에 불안감과 불길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제1악장의 알레그로모레타토선율이 제2악장의 안단테로 넘어가면서 음울하고 애절한 분위기로 바뀐다.
“오늘은 왜 슈베르트지, 베를리오즈가 아니고?”
명진은 가방과 저고리를 받아드는 아내에게 한마디 건넸다.
아내는 여전히 게으른 실내복차림이었다. 그녀의 손에는 DDT병이 들려있었다. 개의 질병원인이 되는 벼룩과 이를 예방하기 위해 살초제를 살포하던 중인 모양이다. 구들위에는 트리밍 하느라 벌려놓은 도구들인 트리밍 칼, 빗, 발톱 자르는 줄, 브러시, 식물유 등이 지저분하게 널려있었다. 셔츠소매는 위로 말아 올렸고 손에는 고무장갑을 끼고 있다. 그녀의 코밑에는 말티즈의 은백색 털 한 오리가 매달려 데룽거린다.
“오늘은 클라인지 뭔지 하는 악기소리를 듣고 싶었어요. 돼지나팔 소리하고 클라인지 뭔지하는 악기소리가 얼마나 잘 어울려요. 황홀하잖아요.”
「클라인지 뭔지」는 클라리넷「돼지나팔」은 호른을 말한다. 아내만이 아는 악기식별용어다.
그러고 보니 오늘 명진은 호른의 음을 또 망각하고 있었던 것을 깨달았다. 그에게 새로운 의미를 갖고 부활되던, 그의 시선에서 소외되었던 많은 것들 즉 연구실 안의 개미와 거미 그리고 커튼의 무늬, 캠퍼스정원의 정원수들, 아파트주변의 경관들이 또다시 그의 시선에서 소외되었음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그는 다시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을 보는「눈뜬 소경」으로 돌아가 버린 것이다.
아내의 말을 듣고 다시 귀를 기울였을 때에야 비로소 안정적인 것과 불안하고 초조한 것, 포근하고 감미로운 것과 풍부하고 열정적인 것이 어울린 호른의 특이한 음색이 바이올린과 트롬본의 음을 밀어내고 청각으로 흘러들었다. 그의 귀도 예나 다름없이 듣고 싶은 소리만을 들었던 것이다.
그를 보자 말티즈는 또 낑낑거리며 구석 쪽으로 비실비실 숨어버린다. 하루에도 몇 번씩 명진의 발길에 채우는 말티즈는 주인이 자기를 미워하는 걸 잘 알고 있는 듯싶었다.
“오늘은 대학로엘 안가셨나 보죠.”
아내는 지나가는 말처럼 했지만 듣는 명진에게는 말속에 말이 있는 것으로 느껴졌다. 오늘은 현주를 만나지 않으셨어요. 하는 뜻이다.
아내는 전번 날 남편이 현주와 만나 술을 마신 사실을 어떻게 알아냈는지 소상하게 알고 있었다. 그녀가 현주에 대한 경계와 적의의 수위를 높일수록 명진은 저도 모르게 교향곡과 말티즈에 대한 거부감의 촉각을 곤두세웠다.
“인젠 정말 미치겠어. 제발 저 음악 좀 꺼. 온종일 듣고도 만족되지 않았어.”
“듣고 또 들어도 싫증이 나지 않아요.”
“도대체 저기서 뭘 듣는 거야?”
“그냥 기분이 좋아요.”
아내는 음악을 끌 생각은 않고 구들위에 널린 트리밍도구들을 주섬주섬 거두기 시작했다.
“아가야, 구들거두고 저녁 먹자.”
트롬본이 피를 토하듯이 애절하게 뭔가를 호소하는 듯 했다. 우유부단하기만 하던 명진의 가슴도 부글부글 괴어오르기 시작했다. 명진은 발길을 날려 애꿎은 말티즈의 복부를 강타했다. 말티즈는 깽 하고 비명을 지르며 장판 위를 쭈르륵-미끄러져가더니 소파에 가 머리를 박는다.
“아니, 아가가 뭘 어쨌다고 발길질이세요. 제가 그렇게 미우세요?”
불만은 토로했어도 반발은 한 적이 없는 아내였다. 갈수록 태산이라고 뭔가 형세가 심각하게 돌아가고 있는 불안한 느낌이다.
“그러게 제가 뭐랬어요. 처음부터 안 된다고 했잖아요.”
드디어 그녀는 기억의 폐허에 묻혀버린 과거까지 발굴해낸다. 애잔하게 흐르는 현악의 물결을 타고 클라리넷이 애절한 제2주제를 연주하고 있었다. 그러한 선율이 답답할 만큼 몇 번이나 반복되었고 명진은 또 다시 호른의 음을 망각하고 말았다.
“갑자기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아닌 밤중에 홍두깨 내밀 듯이.”
명진은 서재로 들어가려다 말고 소파에 걸터앉았다.
아내는 말티즈를 품에 안고 남편의 발길에 채운『아가』의 배를 쓰다듬어준다.
“우리 아가 아파? 아빠가 때렸어? 아파하지 마. 엄마가 아빠를 때려줄게.”
“빨리 저녁상 차려 줘. 배가 고파.”
컴퓨터게임에 빠졌던 듯싶은 철민이 방문을 빠끔히 열고 거실을 내다보다가 아빠를 보자 꼽실 목례를 한다.
“아빠 오셨어요?”
그리고는 아빠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방안으로 홀딱 사라져버린다.
그땐 당신밖에 보이지 않았어. 당신이 예뻐 보였어.
그땐 현주 씨가 내 눈엔 여자가 아니라 어린애로 보였어.
현주 씨가 여자가 되어 내 눈앞에 다시 나타날 줄이야 누가 알았겠어.
그리고 나와 현주 씨 사이엔 당신의 비난을 받을만한 불륜은 없었어.
……
수많은 대답들이 아니, 변명들이 머릿속에 떠올랐으나 적당하게 고를만한 것은 없었기에 그냥 흘려보내고 말았다. 어느 대답에도 그와 아내 그리고 현주의 미묘한 3각 관계를 원만하게 해결해줄만한 것은 없었다. 그 모든 대답들이 불확실했다. 아내의 의문에 가지와 잎을 달아주는 빌미이상의 의미는 없었다.
안 된다고 했었다. 그냥 현주에게 밀어내려고 했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 당시 현주는 그와 늘 함께 있었지만 그의 눈에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의 눈에 여자로 보인 사람은 영희였다.
그런데 그것이 뭐가 잘못되었단 말인가.
나한테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물론 영희한테도 죄가 없다.
“현주랑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지금까지도 밀회하면서 말이에요. 저만 비참하게 됐잖아요.”
아내는 어느새 시골아낙처럼 울먹거리기까지 한다. 종아리에 칭칭 감기며 출렁거리는 추리닝은 무슨 어릿광대의상 같아 보인다. 이제 아내는 더 이상 남편 앞에서 부끄러움이라고는 모른다.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부부간이라고 해도 보여줄 것이 있고 감출 것이 있어야 하는 건 아닌지.
그러나 명진은 아내에게 뭔가를 감춘 것 때문에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다.
부부간에는 감추지 말아야 한다.
부부간에도 보여주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이 두 말은 서로 모순 되는가?
“내가 언제 현주를 만났다고 자꾸만 이러는 거야.”
한 짓이 있는지라 가슴한구석은 불안했다. 아내가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을까? 집에서 음악이나 듣고 말티즈나 관리하는 그녀가 아니던가. 남편 몰래 뒤를 추적하기라도 했단 말인가. 아니면 사인탐정을 고용하기라도……
그렇게까지 음흉하고 교활하지는 못한 아내라는 걸 명진이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부드러우면서도 풍만한 음량을 가진 첼로소리는 미묘한 방안의 분위기와 어울려 더욱더 신비롭게 들린다. 명진은 첼로연주의 그 음흉하고 내숭한 음질에 늘 거부감을 느끼곤 했다. 트롬본의 음가도 저 음역에서는 음향이 어둡고 둔중하지만 중, 고음역에서는 발랄하고 호방해서 좋았다. 그런데도 정작 그의 성격은 우유부단하고 침체되어있다.
“다 알고 있는데도 그냥 속일 거예요. 마로니에공원에서 만나 카페에 들어가서 양주를 마신 것까지 다 알고 있는데. 술을 얼마나 마셨으면 운전도 못하고 지하철을 타고 오셨겠어요.”
마로니에공원, 카페, 양주, 지하철.
너무나도 정확한 정보와 상세한 서술에 명진은 그저 악연해질 따름이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누가 그런 말을 한거야.”
비루하게 뒷조사를 하기 시작했다. 갈 데까지 가보자는 시정잡배의 무식한 고집과 다를 바 없었다. 비밀을 누설할 수 없는 아내의 약점을 물고 늘어지는 그 야비함은 명진을 비참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 길밖에 다른 길은 없었다.
“누군 누구에요. 제 눈으로 직접 목격한거라니까요.”
아내도 남편이 떠미는 함정을 노련하게 회피했다. 그들은 어느새 사기극의 고단수가 되어버린 것이다.
“당신이 언제, 무슨 일로 대학로에 간 적이 있다고 그런 거짓말을 해.”
내친김이라 아내의 약점을 악용하는 비루한 수단을 제지할 수는 없었다.
“저라고 뭐 대학로엘 못 가나요.”
“못 간다는 게 아니고…… 그 날 친구를 만나 양주 한 잔 마신일밖에 없으니까 그러지.”
“여자친구는 친구가 아닌가요. 현주랑 같이 그 르씨엘인가 한 카페에서……”
“어디라고. 르씨엘카페?”
드디어 정확한 판단에 도움이 될만한 확실한 단서 하나를 잡은 셈이다. 지금까지는 아내가 정말 알고 그러는지 예측으로 그러는지 확실한 판단이 서지 않아 솔직한 승인과 견결한 부정 두 가지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할 수 없었다. 그래서 불확실한 화제의 흐름에 맞춰 조심스럽게 응부해왔던 것이다. 그런데 아내가 그들이 들어갔던 카페를 『르씨엘』이라고 말하자 그는 그녀가 장악한 정보가 추측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금방 알아낼 수 있었다. 그날 현주랑 들어갔던 카페는 『르씨엘』이 아니라 『오감도』였다는 걸 명진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아니, 르씨엘이든지 어디든지 카페이름은 똑똑히 모르겠으나 두 사람이 들어가는 건 분명히 보았어요.”
아내도 금방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듯 급급히 펑크 난 화제의 구멍을 메우려고 했지만 이미 엎지른 물이란 걸 느꼈던지 낭패 상을 지었다. 남편과의 신경전에서 그녀는 언제나 한 수 아래였다.
그런데.
명진은 이 뜻밖의 사실에서 느닷없이 하나의 놀라운 현상을 발견했다.
워낙 명진은 시각을(청각도 포함하여) 외시각과 내시각으로 나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외시각은 눈을 떴을 때 주체 밖의 객관적 대상을 포착하며 내시각은 외시각에 의해 두뇌에 저장된 시각정보 즉 기억들을 주체의 욕망, 정서, 취향 등에 따라 호명된 표상, 꿈들을 포착하는 기능정도로 파악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내의 말은, 아내의 추측, 예측, 육감은 종래의 시각기능의 범위를 훨씬 초월하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해주고 있었다.
외시각기능의 특징은 객관적인 현존대상들만 포착할 수 있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즉 「현재」라는 시간 속에서만 가능하다는 제한성을 동반하고 있다. 또한 동일한 시공 속에서 주어진 범위 안의 것만 포착할 수 있다는 공간적 한계도 동시에 가지고 있다.
그러나 내시각은 반대로 「현재」는 볼 수 없고 과거만을 볼 수 있다. 즉 기억된 정보들은 외시각에 의해 집적된 「현재」의 과거화가 된 대상적 이미지들이다. 과거화가 된 그런 기억들은 표상이나 꿈과 같은 대상적 이미지로 나타나며 내시각에 포착되는 것이다.
그런데 내시각은 사실상 시공의 제약이나 한계가 없다. 아내가 보여준 예감이나 추측은 내 시각이 포착하는 건 비록 「과거화 된 기억」들이지만 그들의 재조합에 의해 시공을 초월하여 과거는 물론이고 현재 나아가서는「미래」까지 볼 수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암시해 주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현실에는 전혀 있을 수 없는 환상의 공간까지도 내시각의 포착범위에 들어오게 된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아내가 작곡가나 교향곡의 의미, 악기의 성능과 연주기법, 음가의 특징을 모르면서도 음악의 환상적 세계에 빠져들 수 있는 건 내시각(또는 내청각)이 외시각(또는 외청각)이 입수한 정보를 초월하여 (물론 의존하지만) 이미지를 포착대상으로 삼는 것과 무관하지 않은 듯싶다. 아름다운음악의 선율은 꽃밭을 연상시키고 듣는 이로 하여금 푸른 하늘을 훨훨 날게도 할 것이다. 물론 내시각이 재조합해내는 이미지들은 외시각이 입수한 정보에 의존하지만 더 이상 외시각처럼 시공의 제약에 묶이지 않는다. 내시각은 시공을 초월하여 현실적 질서의 압박에서 벗어나 자유자재로 과거와 현재, 미래 그리고 상상과 환상의 세계를 넘나들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내시각의 기능에 의존하여 미래를 내다본 아내의 추측과 예측은 그토록 정확했다. 마로니에공원, 현주, 카페, 양주, 지하철…… 게다가 날짜, 시간까지, 단 하나 실수한 것이 있다면 카페의 이름뿐이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실인가!
다음 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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