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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무지개 그림자" 연재 28

by 8866 2008. 5. 9.

 

 장편소설 "무지개 그림자"

 --홍현주 코너

                

 

 

 홍현주 코너

 

 


 탐석 행에 나서기에는 조금 이른 계절이다. 천석川石탐석은 단풍이 익은 다음의 건조기가 이상적이다. 지금은 여름의 열기도 채 물러서지 않았고 그렇다고 가을의 서늘함도 깃들지 못한 시기이다. 그러나 금년의 특대홍수로 많은 갯돌들의 기존분포지역이 재구성되었을 것이기에 운수가 좋으면 명석名石을 얻을 가망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었다. 워낙 탐석이란 인내력과 육감도 있지만 많이는 운에 따른다. 그녀가 평창강상류계곡에서 추상석을 발견한 것도 전혀 뜻밖의 경우였다. 평창강계곡은 현주가 가장 즐겨 찾는 탐석지였다. 거리가 가까워 주말 하루 동안의 왕복행이 가능해 편리했고 가끔 질 좋은 수석을 획득할 수 있어서 좋았다.
 물론 아가씨가, 대학 강사이며 박사라는 신분까지 있는 그녀가 등에 로프, 플래시, 물안경, 쇠솔, 망치, 쇠지레, 고무장화, 철봉, 신문지, 비옷, 도시락, 음료수, 약 따위 잡동사니들을 넣은 무거운 배낭을 지고 계곡을 누빈다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현주는 날이 갈수록 수석의 묘미에 빠져들었다. 냇바닥의 수많은 막돌 속에서 가치 있는 수석을 채석해내고 불필요한 물질을 제거하고 다듬고 어루만져 양석을 만드는 과정은 마치도 시인이 자연어 속에서 시어를 골라내고 다듬는 과정이나 연인들이 사랑의 대상을 선택하고 그 마음을 정화시키는 과정이나 조금도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용항리유원지에 차를 주차하고 강을 따라 상류 쪽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단풍이 들기 시작한 숲과 병풍처럼 둘러선 기암절벽 그리고 밑바닥까지 들여다보이는 맑은 강물은 서로 절묘하게 어울려 황홀한 풍경을 과시하고 있었다. 뇌운계곡에 이를 때까지는 두세 점의 수석을 발견했을 뿐 별 소득이 없었다. 강기슭에 수목이 울창하고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치솟은 계곡은 수려하면서도 운치가 돋보였다.
 운이 좋아서인지 냇바닥에서 천석 십여 점을 단숨에 채석했다. 주위를 맴돌며 쇠지레로 갯돌들을 번지자 30분도 안되는 짧은 시간에 연이어 수석들이 굴러 나왔다. 빈손으로 돌아가지나 않을까 염려했는데 다행이었다. 그중에는 산수경석도 있었고 형상석과 무늬석도 있었다.
  김명진도 이렇게 우연히 만나게 된 이상형이었다. 많은 총각들이 현주에게 구애를 했지만 그녀의 눈에 드는 남자는 없었다. 현주의 눈에는 그들이 평창강냇바닥에 널린 막돌에 지나지 않았었다. 하지만 명진은  첫눈에 그녀의 이상형임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녀가 늘 마음속에 그려오던 백마왕자였다. 잘 생기고 지적이고 부드럽고 자상하고……
 현주는 정지용 시인이 자연어 속에서 마음에 드는 시어를 발견했을 때도 이런 희열을 느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바다는 뿔뿔이
 달아냘랴고 했다

 

 시인은 「뿔뿔이」,「달아날랴고」라는 시어를 발견하고 현주처럼 흥분했으리라. 제각기, 제각각, 저마다, 따로따로, 갈래갈래, 갈피갈피, 흩어지다, 산산이, 산지사방과 같은 수많은 막돌 중에서 시의 주제표현에 가장 적합한 「뿔뿔이」라는 명석을 탐석해낸 것이다. 시인의 눈에는 도망치려고, 도피하려고, 도주하려고, 자취를 감추려고, 숨으려고, 은폐하려고, 꼬리를 감추려고, 쥐도 새도 모르게, 없어지려고 와같이 수많은 표현 중에서 「달아날랴고」가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마치도 현주의 눈에 수백수천개의 돌중에서 지금 이 몇 개의 수석이 마음에 들고 수많은 남자들 중에서 유독 김명진이 마음에 들었던 것처럼 말이다.
 현주는 수석을 물에 헹구어 모래와 흙을 씻어냈고 쇠 솔로 물때와 이끼를 문질러 낸 후 석면石面을 자세히 관찰했다.
 망치로 돌 표면을 두드려 강도를 타진해보기도 했다. 수석은 뭐니 뭐니 해도 석질이 가장 중요하다. 그 다음으로 형태, 색채, 무늬를 보는 것이다. 쉽게 부서지는 사암질沙岩質이나 니암질泥岩質은 그 자리에서 버려야 한다. 감상 포인트가 없는 돌도 골라내야 했다. 그녀는 이런 선별작업을 오랜 시간이 걸려서야 끝낼 수 있었다. 버린 것을 다시 주어오는 경우도 많았다.
 그렇게 버리고서도 쓸만한 가치가 있는 수석이 일여덟 점이나 되었다. 휴대한 신문지와 헝겊으로 돌들을 잘 싸서 배낭에 간수했다. 날이 어둡기 전에 차를 주차시킨 용항리유원지로 돌아가려면 서둘러야 했다.
 혼자서 벼랑 밑으로 난 오솔길을 걸으려니 느닷없이 외로워진다. 옆에 김 교수가 동행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그날 취중임을 빙자해 명진의 어깨에 머리를 얹었을 때의 그 행복함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분의 온몸이 불덩이처럼 달아올라 화끈거리고 있었다. 심장의 박동이 북소리처럼 쿵쿵 들렸고 그 진동과 율동에 따라 육신도 덩달아 수축과 팽창을 반복했다. 약간 거친 숨결이 귀뿌리를 간지럽게 했었다. 그대로 열차도 멈춰서고 시간도 정지되었으면 싶었다.
 하느님, 제발 저와 교수님을 갈라놓지 말아주세요!
 속으로 애원하고 기도했었다.
 죄책감 같은 건 전혀 없었다. 불륜이라는 양심적 가책 같은 것도 없었다. 누군가 양심의 가책을 느껴야 한다면 그것은 현주자기가 아니라 당연히 『언니』 영희 쪽이라고 믿고 있었다. 영희는 우정을 저버린 배신자였을 뿐만 아니라 사랑을 훔쳐간 도둑이기도 하다.
 억울하게 당한 내가 왜 죽어야 하는가.
 현주는 죽음의 문턱에서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뒤로 다시는 그따위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았다. 이를 악물고 학문연구에 몰두하는 것으로 우선 마음속의 치명상을 치유했다. 이제 그 상처는 거의 완치상태에 이르렀다. 이제 남은 것은 빼앗긴 사랑을 환수하는 일 뿐이다. 이러한 행위는 불륜이 아니라 정의적이며 정당방위라고 여겼다. 그리고 그녀는 명진에게 소외당한 자신의 의미와 가치를 확인시켜주고 싶었다. 그이가 쓸모없는 막돌이라고 버린 자신이 진정한 명석이며 의미 있다고 선택한 영희가 막돌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녀는 일단 쇠갈고리로 한번 번져본 돌은 무심히 지나치지 않는다. 섣부른 시선이 진정한 명석을 지나칠 수 있기 때문이다.
 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옷도 갈아입지 않고 채석한 수석을 다듬기 시작했다. 우선 수세미나 칫솔질을 하여 석면의 불순물이나 물때를 벗겨냈다. 그런 다음 피부가 거칠고 구멍에 많은 흙과 모래가 끼어있는 수석은 송곳으로 세심하게 파냈다. 석질이 단단한 수석을 따로 마분을 사용하거나 견고하게 부착된 불순물은 약물처리를 따로 했다. 모두가 수공작업이라 얼굴에 땀까지 날 정도로 힘든 노동이었지만 다듬을수록 분명하고 생동한 면모가 드러나는 걸 보노라면 피로가 확 가셔버렸다. 수석을 다듬어가노라면 자연히 정지용의 시가 머릿속에 떠오르곤 한다.

 

 희동그런히 받쳐들었다.
 지구는 연잎인양 오므라들고…펴고…

 

 시인도 현주가 수석을 다듬듯이 시어를 반복적으로 다듬고 연마한 흔적이 연력하다. 동그랗다, 동그라니, 동그스름하다, 등의 자연어를 「희동그런히」라는 표현으로 성공적으로 다듬어낸 것이다.

 

 돌에
 그늘이 차고
 
 따로 몰리는
 소소리 바람

 앞섰거니 하여
 꼬리 치살리여 세우고

 

 이 시에서도 시인은 현주가 석면에 부착된 불순물과 이끼, 물때, 흙, 모래를 제거해버리고 가치 있는 것들만 보존시키듯이 그런 세부적인 제거작업을 거쳤음을 알 수 있다. 시인이 무의미한 불순물들을 (이미지) 제거하기 전의  모습은 아마 이러했을지도 모른다.

 

 탐스러운 푸른 이끼가 주단처럼 덮인 청석바위  길게 드리운 짙은 나무그늘이 차고 음침했다.

 굵은 빗줄기를 앞세우고 산비탈로 불어와서는 따로 몰리는 소소리 바람은  앞섰거니 뒤섰거니 하며 꼬리를 치살리며 세우고 늘 기승을 부린다            
                  

 사랑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현주는 수많은 총각들, 같은 대학 선배였던 인철이며 국진이 그리고 같은 반 남학생이었던 송민이며 승환이며 길수는 그녀의 선택에서 배제되고 명진이만이 선택되었던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아직도 사랑을 순결 화시키는 제거작업은 현재진행형이다. 영희가 남아있다.
 현주는 가늘고 깊고 라선형의 구멍 속에 끈질기게 박혀있는 모래알을 송곳으로 뽑아내느라 안간힘을 썼다. 어느새 콧등에 땀방울까지 송골송골 돋아났다. 그러나 끝내는 지친 나머지 작업을 포기하고 말았다. 내일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우선 저녁을 지어 허기진 배를 채워야 할 것 같았다.
 가끔 이 집이 혼자 살기에는 너무 크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 2층 빌라 전체를 그녀 혼자 차지하고 있었다. 중국으로 기업운영 차 출국하시면서 아버지는 딸의 요구대로 서울에 전세를 맡아주었던 것이다. 아버지, 어머니는 명절연휴나 사업출장차 이따금 들릴 뿐 일년 내내 그녀 혼자 독숙하고 있었다.

 

 다음 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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