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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무지개 그림자" 연재 29

by 8866 2008. 5. 16.

 

 장편소설 "무지개 그림자"

 --홍현주 코너

 

 연재 29

 

 그렇게 1차적으로 대충 손질해놓고 보니 제각각 나름대로의 모습들을 드러냈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에 드는 수석은 겨우 형상석 한점뿐이었다. 계곡에 버리고 온 들들이 더 볼거리가 있지 않았나싶은 후회도 없지 않았다.
 형상석은 손질해놓고 보니 남극에 사는 펭귄도 닮아있다. 그런데 모래알들이 구멍 속에 깊숙이 박혀있고 물때가 벗겨지지 않아 대야에 비눗물을 풀고 담가놓았다. 그리고 나서야 손을 씻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왜 수석애호자가 됐느냐고 묻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그녀는 그냥요. 하고 불투명한 대답만 했을 뿐이다. 사실 현주자신도 왜 수석에 심취하게 되었는지 뚜렷한 이유는 말할 수 없었다. 여대생시절에는 모든 것을 낙관적으로 믿었었다. 현실은 그녀에게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과도 같았다. 소매물도에서, 비 오던 날 밤의 등대섬에서도 그랬다. 그녀는 명진의 약속을 굳게 믿었었다. 명진이도 자기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확신은 오빠의 약속불이행에 의해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그제야 현주는 현실이 그녀가 믿었던 것처럼 확실한 것만은 아니라는 걸 깨닫고 거대한 심적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실망과 좌절은 불투명한 현실에 대한 불만과 의문으로 이어졌다.
 우연한 기회에 친구네 집에 놀러갔다가 친구 어머니가 수집한 수석을 대하게 되었다. 현주는 그처럼 불확실하고 모호한 수석이 천태만상의 형태를 연출하는걸 보고 경악했다. 산이나 강기슭 또는 해변 지어는 길바닥에까지 무수한 돌덩이들이, 눈길 한번 준 적 없는, 그 존재조차 몰랐던 돌덩이가 그처럼 신기 절묘한 이미지들을 과시하는데 놀라움을 금치 못했었다. 불확실성속에서 발견하는 확실함 그것은 수석의 묘미였다. 그때까지도 그녀를 실망시킨 현실은 현주에게는 경계와 불신의 대상에 지나지 않았다. 심지어 그녀는 학문만 파고듦으로써 그곳을 불안한 현실에서 도피할 수 있는 은신처로 대용하기까지 했었다.
 수석의 미묘한 흡인력은 그녀를 강력하게 유혹했다. 불확실함을 확실함으로 만들 수 있다는 가능성은 불 꺼진 그녀의 절망을 점화시키는 도화선이 되었다.
 무작정 친구의 어머니를 따라다녔다. 전국의 산과 강, 바닷가를 누비고 다녔다. 그녀의 선택에 의해 강이나 산에 버려져 있던 그냥 무의미한 자연이었을 뿐이었던 돌덩이들이 그녀의 손에 의해 의미와 가치를 가지고 생명으로 태어나는걸 보면서 현주는 체념의 폐허 속에 파묻었던 젊은 날의 사랑이 다시 싹터 오름을 느꼈다.
 내 손으로 나에게서 멀어져간 상실과 불확실성을 확실한 소유물로 창조하리라!
 일종의 오기 같은 것이 무모한 도전 같은 반발심이 힘차게 그녀의 등을 탐석의 길로 떠밀었다.
 간단한 식사를 마치자 현주는 주방에서 나왔다.
 거실로 나오는 그녀의 눈길은 대야의 소금물에 불려 놓은 『펭귄』에게로 날아갔다.
 그런데.
 현주는 문득 발걸음을 멈췄다.
 그녀가 다시 본 것은 펭귄이 아니었다. 물속에 잠긴 형상석은 뜻밖에도 캥거루를 닮아있었다. 닮았다기보다 캥거루 그 자체였다.
 아니, 어떻게 된 일이지? 손질하는 내내 펭귄으로 보였잖아.
 착각인가?
 조심조심 가까이 다가가 보았다. 그러자 수석은 또다시 펭귄으로 변해버린다.
 그럼 그럴 테지. 내 눈의 관찰력은 확신도가 90%이거든.
 돌아서서 거실소파에로 다가갔다. 그래도 미심쩍어 다시 고개를 돌려보았다.
 이럴 수가?
 그 사이 수석은 감쪽같이 캥거루로 변해버린 것이다.
 귀신이 조화라도 부리는 걸까?
 의문을 해소해보려고 현주는 가까이 다가갔다가 멀리 뒤로 물러섰다가 하는 동작을 수차 반복하며 수석을 관찰해보았다. 번마다 똑같은 현상이 재현되었다.
 나중에야 현주는 그러한 현상의 원인이 수석자체의 불확실성과 원근거리에 따라 시각에 포착되는 대상이 변화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등대섬에서의 그날 밤 그녀와 단둘이 있었을 때 명진은 분명 사랑을 고백했었다. 그러나 대전에서 갈라진 뒤 명진은 현주 몰래 영희를 만나며 밀애密愛했고 드디어는 마음이 변해버리지 않았던가. 당시 그녀가 본 명진의 속내는 불투명했으며 그 불투명함은 대전과 서울이라는 거리감 때문에 더욱 극도에로 치달았던 것이다.
 그런 사유 때문인지 현주는 그냥 처음의 펭귄이 맘에 들었다. 가장 가까운 신변에 놓고 펭귄의 모습만을 보리라. 가능하다면 먼 거리에서도 펭귄의 모습으로 보이도록 양석하리라. 다시는 저 수석의 몸에서 캥거루의 모습이 보이지 않도록 그런 이미지들을 죄다 제거하리라.
 현주는 서재로 들어와 컴퓨터에 마주앉았다.
 문장 불러오기를 클릭하자 정지용의 시 『유리창』 전문이 스크린에 뜬다.
 그런데, 시행을 훑어 내려가던 현주는 종시 풀리지 않던 문제를 해독할 수 있는 하나의 영감이 떠올랐다. 그것은 수석이 가르쳐준 힌트였다. 지금까지 그녀는 평단에 유행하는 정지용에 대한 통론, 고정관념에 묶여있었다. 이를테면 『유리창』은 시인이 『아들의 죽음으로 인한 괴롭고 슬픈』심정을 『시적이미지로 승화』시킨 것이라는 종래의 해석 같은 것이다. 그러나 방금 전 수석이 보여준 변화무쌍한 모습은 그녀의 사유와 상상력을 기존이론의 권위적 질곡에서 해탈하도록 자극했다.
 무엇 때문에 꼭 지정된 시점에서 시를 분석해야 하는가.
 한번 시점을 바꿔볼 수도 있지 않은가.
 현주는 파도처럼 밀려오는 상상들을 놓칠세라 재빨리 키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종래의『유리창』에 대한 통론적 분석은 시의 구조를 이승과 저승으로 분리시키고 그 사이에 차단과 소통의 이중적 배리기능을 가진 유리창을 설정하여 자식의 죽음에서 환기된, 시적화자의 죽음과 삶에 대한 철학적 사고였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이 『이승과 저승세계의 분리』를 『시인의 시적세계와 식민지조선의 암담한 현실세계』로 분리하지 못한다는 규정도 없지 않은가. 유리창에 의해 시인이 유폐되어있는 방안은 현실과 격리된 답답하고 협소한 시적세계이며 유리창밖의 「밤」은 암담한 식민지현실세계라고 가정해볼 수도 있다. 시인의 시적세계는 현실세계와 격리되어 있으면서도 시선의 소통이 가능하다. 『유리창』은 시인과 현실을 차단하는 냉혹한 일제식민지통치와 가혹한 출판물검열제도이다. 「차다」라는 형용사표현은 식민지통치와 검열제도의 냉혹함을 의미하기도 한다. 『유리창』이 단순히 자식을 잃은 시인의 개인적 슬픔을 시적이미지로 승화시킨 시작품이 아니라는 이유는 『유리창 2』를 읽으면 금방 알게 된다. 이 시에서 시적화자가 현실세계와 격리된 자신의 협소한 시적공간에서 해탈하려는 몸부림을 읽게 될 것이다. 시적화자는 현실과 시인의 사이를 차단한 유리와 치열한 박투를 벌이고 있다. 물론 시인은 자신을 구속하고 있는 장애물과의 격투에서 승리하지 못한다.
 이런 시점에서 『유리창』을 재조명한다면 전혀 새로운 해석이 가능해질 것이다.
   
           
  유리창 1
 
 본문: 琉璃에 차고 슬픈 것이 어린거린다.
 해석: 일제식민지 통치하의 열악하고(차고) 참담한(슬픈) 현실을 직시하고 있는 시인.
 
 본문: 열없이 붙어서서 입김을 흐리우니
 해석: 유리가 시인의 시야를 가로막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을 정시하려는 의지의 표현.(유리창의 투명도를 높이기 위해 입김으로 닦는다.) 여기서 유리는 시인과 현실을 격리시키는 일제의 식민지통치와 출판물검열제도. (「입김」은 시인의 창작활동.)

 

 본문: 길들인양 언날개를 파다거린다.
 해석: 치열한 작품 활동을 통해 현실의 부두에 접안하려는 시인의 몸부림.(「언날개」는 창작의 자유를 상실한 상황표현. 「파다거린다」는 자유를 상실한 창작의 고통을 표현.)

 

 본문: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
 해석: 현실을 지향하는 시인의 몸부림.(「지우고」는 시인의 창작자유를 가로막는 온갖 압제와 구속을 가리키는 의미.「보고 보아도」는 예술적수단의 가능성내에서 제재를 피해 현실을 사실적으로 그리려는 예술가의 양심.) 
 
 본문: 새까만 밤이 밀려나가고 밀려와 부디치고
 해석: 그러나 현실과의 거리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다. (「새까만 밤」은 일제식민지조선의 암담한 현실을 가리킴. 「밀려가고…부디치고」는 일제의 야만적 식민통치의 전횡과 시인과의 갈등.)
 
 본문: 물먹은 별이 반짝, 寶石처럼 백힌다.
 해석: 안타까운 나머지 시인은 눈물을 흘리며 슬픔과 비애에 젖어든다.

 

 본문: 밤에 홀로 琉璃를 닥는 것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
 해석: 좌절에서 오는 고독과 절망. 시인은 현실과의 만남에 실패한다. 시인과 현실 사이에는 「유리」가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현실과 유리된 시인은 외롭다. 그러나 현실을 정시하려는 시인의 마음은 황홀하다.

 본문: 고흔 肺血管이 찢어진채로
 

 해석: 일제에 유린당한 조국.

 본문: 아아, 늬는 山ㅅ새처럼 날러갔구나!
 

 해석: 빼앗긴 조국의 주권과 자유.

             

 

 유리창 2 

 

 다음 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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