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무지개 그림자"
--잃어버린 세계 A
연재 26
명진은 현주의 시평방법이 거의 자신의 관점과 일치하다는 점에 놀랐다. 그러한 관점은 그 자신도 확신이 결여되어 저작들이나 강의에서 조심스럽게 전개시켜온 이론들이었다. 그렇다면 현주는 명진의 이성異性적 측면에만 관심을 가진 것이 아니라 그의 생각과 관점에까지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녀의 이런 논리적이고 지적인 모습은 아내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든 것이었다. 아내는 일상의 화두 외에 소통되는 화제라고는 없었다.
“시어들의 전체적 이미지는 시인의 선택과 필요에 의해 일부분만 분리되고 있음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어요. 성분, 특성, 형태, 용도 등의 「유리」라는 이미지복합체는 시인에 의해 투명성과 견고성의 이미지만 분리되었으며 또 그 「유리」는 구체적인 사물이 아닌 보편적 사물화되고 있어요. 「입김」,「날개」,「밤」,「별」,「보석」등의 시어들도 구체적인 대상이 아니라 모양, 형태, 성질, 크기 등의 구체성을 배제시킨 보편적대상일뿐이에요. 예를 들어 「산새」라는 시어는 새의 종류, 성별, 모양 등의 이미지요소들은 배제되고 있지요.”
그녀가 걸어가는 사유의 오솔길은 험난했지만 진부함이 청결된 싱싱함이 있었다.
“그렇습니다. 정지용의 『유리창』은 구체적 『유리창』이 아닙니다. 유리의 성분, 특성, 형태, 용도, 무늬, 색깔, 유리창의 디자인구조, 건축물과의 조화 등 많은 구체적 이미지들은 시인의 주시선에 포착된 이미지 즉 투명성과 견고성의 측면을 제외한 기타 이미지들은 소외 또는 걸러지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이런 이미지들은 필요가 없었던 겁니다. 그러나 미술에서는 도리어 시인이 시어의 이미지에서 필요 없다고 여겨 소외시킨 구체적 이미지들이 필요한 겁니다. 즉 『유리창』의 모양, 무늬, 색깔 『유리창』의 형태 등의 질료적 요소들이 말입니다. 회화에서 표현되는 『유리창』은 시에서와는 반대로 보편성이 누락된, 물리적인 건물에 부착된 구체적 형태와 모양을 가진, 질료로서의 『유리창』입니다.”
조금은 어색했던 분위기가 화제의 공감대가 무르익으면서 점차 풀리기 시작했다. 아내와는 느껴 보지 못한 지성의 맛을 느낄 수가 있었다. 선배와의 대화에서 조금도 주눅 들거나 수세에 몰리지 않는 현주가 대견스러워 보인다.
“시를 감상한다는 건 시어에서 굴절되었거나 또는 텍스트의 광기에 의해 유폐된 이미지들이 남긴 모호하고 불확실한 흔적의 진실한 모습을 추적하는 과정이 아닐까요. 비평이란 것도 시어에 존재하는 이미지의 모호성을 밝히는 작업이고요. 주어진 정보의 불완전한 이미지를 완벽하게 복구해내는 기술적 작업 말이에요. 그런 추방된 이미지 또는 은폐된 은유들은 비평가와 독자의 텍스트재창조참여를 가능하게 하는 거고요. 시에 동원된 이미지가 완벽하다면 제3자의 참여는 불가능할 테니까요.”
“불가능이라는 표현보다는 무의미하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겠지요. 텍스트가 제시하는 세계는 작가의 주시선에 포착된 이미지들에 한정됩니다. 그러나 그 주시선의 폭력적 독식 또는 권력 때문에 박탈되고 배제된, 차시선과 주시선의 미달선, 초월선에 포착된 이미지들의 모호와 불확실함은 평자와 독자의 참여공간을 제공하게 되는 겁니다. 정지용은 이승과 저승 사이를 차단시키면서도 시선의 소통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유리의 투명성과 견고성만을 차용한겁니다. 그러나 화가라면 유리의 그런 은유적 이미지들보다는 유리의 구체적이고 세부적 형태인 모양, 색깔, 무늬, 크기 등에 초점을 맞췄을 겁니다.”
어느 사이엔 가 두 사람은 두 번째 잔도 바닥을 비웠다.
맥주로 주종을 바꿨다. 마른안주도 주문했다.
알코올의 막강한 지원으로 화제는 본격적으로 무르익어갔다.
“시어에서는 사물의 보편적 이미지가 중시되는 반면 그림에서는 구체적 이미지가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겁니다.”
명진은 존 컨스터블의 그림 『스토크 바이 네일랜드』와 마로니에미완성스케치를 연상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그의 머릿속에는 현주의 존재로 가득 찼고 아내 영희의 존재는 그녀의 개입으로 멀리 축출되었다는 사실을 깜박 잊고 있었다. 명진은 완전히, 철저히 시선의 포로가 되어버렸다. 사실 정지용은 그가 박사논문까지 썼던 시인이었다.
“정지용의 다른 작품들인 「고향」이나 「바다」에 나오는 시어들에서도 그런 형상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다」,「질화로」,「연잎」같은 시어들을 자세히 읽어보세요. 화가라면 반드시 주시했을 「질화로」의 이미지들 즉 색깔, 재질 (쇠, 구리, 납 등), 크기, 무늬, 모양 등등 질료적 이미지들은 시어에서는 삭제되고 겨울을 따뜻하게 지낼 수 있는, 불을 담는 용도적 의미만 분리되어있습니다. 「연잎」과「바다」도 마찬가지 경우입니다. 한마디로 회화는 외시각과 직접 연결되지만 문학텍스트는 언어기호의 중재로 인한 기억유도와 호출된 표상 즉 내 시각과 간접연결이 되는 거지요. 소설언어의 구체성 역시 언어의 도움으로 가능한 동시에 제약을 받게 됩니다.”
우리는 지금 불안한 현실 앞에서, 현실이 일방적으로 유도하는 불확실한 내일의 「현실」앞에서 공포를 느낀 나머지 비겁하게 도피하고 탈출구를 찾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러나 사실은 그들이 지금 행하고 있는 현실도피도 역시 불안하고 불확실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현주와 함께 정지용의 시를 1년이고 10년이고 논한다 하더라도 그들 사이에 그 이상의 접근은 허용되지 않을 것이고 그렇다고 아내와의 사이가 완전히 절단되지도 않을 것이다. 현실이 무자비하게 강요하는 한계 앞에서는 누구도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한계의 포로이며 노예이기도 하다. 정지용이 자신의 시어에서 시각적 이미지에 병적일 만큼 집요하게 의존했던 것도 현실의 그런 한계를 시각의 기능을 빌어 초탈하고 싶어서였던 지도 모른다. 가장 확실한 이미지인 직유의 다리를 하나하나 놓으면서 한계의 강을 탄력있게 넘나드는 지용의 그 아슬아슬한 서커스기교에 감탄을 금치 못할 때가 많다. 시인이 믿을 수 있는 건 시각뿐이었다.
그러나 정지용은 시각에도 치명적인 결여와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 듯싶다. 아니면 그런 한계를 교묘하게 이용해 이미지들의 분해와 해체를 시도했던 것은 아닌지. 자신의 시각의 정확성을 거의 맹신할 정도로 확신했던 지용의 시는 이제 현주와 같은 날카로운 비평가 앞에서 그 한계의 진면모를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시인이 보려했던 것은 「유리창」이 아니라 「밤」이었잖아요. 비평가들의 설명대로 표현하면 「저승세계」였지요. 그런데 「저승과 이승세계」는 차단의 필요성이 생긴 거예요. 「유리창」은 그런 수요에 의해 한정된 이미지만을 분리해낸 거죠. 유리의 견고성은 「닦다」와「입김」등 표현을 통해서 제시되고 투명성은 「어린거린다」,「파다거린다」,「부딪치고」,「날러갔구나」등의 표현을 통해서 암시되고 있어요. 시어에 정보로 제공된 이미지들도 그와 연관된 기타 은유들의 판독을 통해서만 파악이 가능해져요. 다시 말해 시어의 의미화는 이미지의 은폐에 의해서 가능해지고 이미지의 은폐는 다시 불확실성과 모호함을 초래하는 원인으로 된다고 생각해요.”
“은폐현상 즉 은유현상은 원론적으로 볼 때 대상의 특징이 아니라 시각의 한계에서 발생했다고 볼 수 있겠죠. 이런 현상은 차시선이나 미달선, 초월선에서 나타날 뿐만 아니라 주시선에서도 확인 가능합니다. 시각주체의 기분이나 정서, 취향, 욕망에 따라서 부동하며 빛의 변화에 따른 객관적 요인도 있고요. 최초의 시작품들에서 이런 시어의 이미지굴절현상은 시각이 관찰한 원초적 모습을 그대로 재현했을 것이지만 나중에는 그것이 의도적 설정으로 발전했겠죠.”
너무 많은 말을 했다. 시간도 꽤나 흘렀다.
명진은 석유스토브에 마주 않은 것처럼 얼굴에 열기가 화끈거림을 느꼈다. 맥주를 얼마나 마셨는지 모르겠다. 고개를 쳐들기도 힘들었다.
현주가 맞은편에 앉아 그의 말을 듣고 있는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고개를 들고 보니 그녀는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으나 테이블위에 머리를 떨어뜨리고 있었다.
“어디 불편합니까?”
“과음했나 봐요.”
현주는 가까스로 고개를 쳐들었다. 얼굴은 빨갛게 고추물이 들어있었고 백옥 같은 이마에 윤기 흐르는 머리카락 몇 가닥이 길게 드리워있었다. 청초하다.
“시간이 많이 지난 것 같아요. 그만 집으로 돌아갑시다.”
“좀 더 이야길 하다가……”
말은 그렇게 했지만 현주는 더 이상 체모를 지키기가 힘든 듯 의자에서 일어났다. 의자를 덜컥거리며 몸은 약간 비틀거렸지만 금방 자세를 바로 잡는다.
다음 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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