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무지개 그림자"
--잃어버린 세계 A
연재 27
“오늘 정말 의미가 있었어요.”
명진은 카운터에서 결산을 마치고 2층 계단을 내려왔다. 그녀를 부축하려고 했으나 현주는 웃으면서 사양했다. 정말 오래간만에 보는 웃음이었다. 그녀의 웃음에는 아직도 소매물도에서의 천진난만함과 순진함이 짙게 배어있었다. 그 눈빛은 별빛도 무색할 만큼 밝고 눈부셨다. 평소의 담담하면서도 냉담한 표정도 심오하고 논리적이며 지적이고 이성적이던 분위기도 말끔히 사라지고 낭만에 들뜬 소녀로 돌아가 있었다. 아직도 그녀의 깊은 곳에는 낭만과 순진함이 남아있음을 발견하고 명진은 놀랐다. 그녀가 보여준 진지하고 냉담한 표정은 그녀가 만들어낸 한 장의 완벽한 가면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 웃음도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지고 말았다. 현주는 다시 지적이고 완숙한 숙녀로 회귀해있었다. 그녀가 보여준 서로 다른 모습 중 어느 쪽이 그녀의 진실한 모습일까 궁금해졌다. 현주도 정지용처럼 자신의 이미지를 명시된 것과 은폐된 것으로 분리시키고 있는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은폐된 이미지를 추적하도록 유도하고 있는가.
이 순간의 현주의 모습은 그녀가 부탁한 추상석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보기에 따라서는 각이한 이미지들을 발산하고 있는 것이다.
“음주운전은 불가하니 어쩔 겁니까? 댁으로 가자면 지하철 타는 게 빠른가요, 버스 타는 쪽이 편한가요?”
“음주운전이라고 다 단속당하겠어요. 운수 나름이죠.”
현주는 그냥 주차장으로 가려고 한다.
“안 됩니다. 단속이 문제가 아니라 사고날까봐 그러죠.”
“사고요. 사고나봤자 죽는 거 밖에 더 있겠어요. 교수님은 죽는 게 두려우세요?”
저도 모르게 가슴이 꿈틀했다. 자살까지 시도했던 현주다. 죽음의 문턱까지 체험관광을 한 그녀에게 죽음은 더 이상 공포의 대상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녀의 억양이나 용어가 거칠어지는걸 보니 주독이 전신에 확산되고 있음을 간파할 수 있었다.
“내가 집까지 데려다주죠.”
“정말요!”
“그럼요.”
“혹시 사모님께서 아시기라도 하면 어쩌시려고요. 부담되지 않으세요?”
다시 한번 가슴이 꿈틀했다.
사모님!
그녀의 입에서 튕겨 나온 사모님이라는 말은 어쩐지 당연한 호칭인데도 야유와 저주처럼 들린다. 차라리 언니라든지 부인이라든지 하는 호칭이었다면 놀라움도 덜했을 것이다.
“어느 방향이죠?”
“신림동쪽으로요. 빌라에 전세 들어 살고 있어요. 아빠가 돈을 대준 거예요.”
“그럼 지하철을 탑시다.”
지하계단을 내려가는 현주의 하이힐소리가 전에 없이 딸깍거렸다. 한 계단씩 내려설 때마다 그녀의 어깨위에 걸친 핸드백이 시계추처럼 절주 있게 앞뒤로 흔들거렸다.
“제가 취했나 봐요. 사람들이 다 절 보지 않아요.”
그녀가 다시 한번 미소를 짓는다. 별이 반짝 빛나는 것 같다. 그 눈부신 아름다움에서 명진은 황급히 눈길을 걷어 들였다.
“한 가지 물어볼 것이 있는데……물어봐도 될까요?”
“뭔데요?”
“전 번달 말쯤에 마로니에공원에 온 적이 있습니까?”
“마로니에공원에요?”
“저녁때쯤에요. 아마 주말오후였을 겁니다.”
“주말 오후라고요? 글쎄요. 잘 생각나지 않는데요.”
열차를 기다리며 플랫폼대기석에 나란히 앉았다.
“뭣 땜에요?”
“아니 그냥.”
“영문 없이 묻지는 않으셨을 거잖아요.”
“그때 공원에서 현주 씨를 본 것 같아서.”
“절 닮은 사람이었나 봐요. 다른 사람을 저로 착각하신 건 아니세요.”
“글쎄요. 닮은 사람이었을 수도 있겠죠.”
아내가 그림 속의 아가씨를 현주라고 주장한다는 말은 차마 이실직고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에둘러댈수록 현주의 호기심을 더 자극하는 모양이다. 호기심은 내막을 모를 때 생기는 심리현상이니까.
“누가 마로니에공원에서 저와 교수님이 만났다고 의심하던가요?”
“그게 아니라니까.”
“그것도 아니라면 점점 이상해지네요.”
마침 열차가 홈에 진입했다. 두 사람은 대기석에서 일어나 열차 안으로 들어갔다. 늦은 시간이라 차내는 손님 몇 사람이 있을 뿐 휑뎅그렁했다. 군데군데 앉은 승객들은 대개 눈을 감고 끄덕끄덕 졸고 있었다.
나란히 앉을 수밖에 없었다.
현주는 피곤한 듯 눈을 감고 차창에 머리를 기댄다.
“한 달 전이라고요?”
느닷없이 또 중단된 화제를 재생시킨다.
“간 것 같기도 하고 가지 않은 것 같기도 하고. 제 기억력이 이래요. 하루 전의 일도 분명하게 기억 못하잖아요.”
명진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도 조용히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그러나 눈을 감았는데도 내內시선은 기억 속에서 희미한 표상을 뒤집어내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처음부터 끝까지 옆에 앉아있는 현주의 모습뿐이다. 이제 시선은 촉각에게까지 협조를 청구한다. 촉각은 기꺼이 협조요청에 응하며 옆에 앉은 현주의 육신을 포착하기 시작했다. 촉각뿐만이 아니었다. 후각까지도 덩달아 가동이 걸리며 그녀의 체취정보를 입수하기에 분망하다. 오감은 일심동체가 되어 현주의 존재를 입체적으로 포착하기 위해 협동작전을 벌려나간다.
느닷없이 현주의 머리가, 따스하나 머릿결이 부드러운 머리가 그의 어깨에 가볍게 얹혀졌다. 명진은 저도 모르게 상체를 흠칫하며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스무 살의 총각시절로 되돌아간 듯 가슴이 설렌다. 그녀의 가는 숨결이 지척에서 쌔근거렸고 왼쪽가슴을 따스하게 달궜다. 머리카락은 목을 타고 살 속으로 스며들어 피부를 간지럽게 한다. 그윽한 향기가 후각을 싱그럽게 했다.
그는 눈을 떴다.
까맣고 윤기 도는 머리숱과 오뚝한 콧날과 봉긋한 젖가슴이 일시에 시야를 꽉 채웠다. 그 가슴이, 셔츠 깃이 빠끔히 열려 속살까지 들여다보이는 그 가슴이 그렇듯 해말쑥하고 탄력 있고 토실토실할 줄은 몰랐다. 소매물도의 등대섬에서는 전혀 느끼지 못했던 여성이 그녀의 몸에서 익을 대로 익어있었다. 등대섬에서는 단둘이 있으면서도, 그녀를 등에 업고서도, 젖은 옷을 벗기면서도 현주가 이렇게 폭폭 익고 영글었을 줄은 몰랐다.
그녀가 내 어깨에 머리를 얹은 건 무슨 뜻일까. 정말 잠이 들어 무의식중에 한 행동일까. 아니면 잠든척하고 무언가를 암시하려는 의식적인 행동일까.
도대체가 불투명하다.
그녀의 의도를 알 수 없었기에 대처하기도 어려웠다. 잠든 사람을 밀어낼 수도 없고……
그러나 여태껏 어딘가로 도피하여 자취를 감추고 있던 아내의 시선이 느닷없이 기억의 수면위에 부유하면서 그들의 일거일동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명진은 흠칫 했지만 그래도 현주를 밀어낼 용기는 없었다. 숨을 쉴 때마다 비옥하게 부푼 가슴이 탄력 있게 오르내리는 황홀한 모습을 훔쳐보고 있자니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아 그만 두 눈을 꺽 감아버렸다.
“교수님, 인제야 보셨죠. 제 가슴이 사모님 가슴보다 더 풍부하고 탄력 있고 눈부시다는 걸.”
그 가슴은 그렇게 자신을 과시하고 있는 것 같았다.
“교수님은 그날 등대섬에서 착각하신 거예요. 절 동생으로만 소녀로만 보신거말이에요. 저도 당당한 여자에요.”
그렇게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 같기도 했다.
“어서 홍주를 떼어버리지 못하고 뭐하고 계세요. 당신?”
어디선가 아내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리는 듯싶었다. 청각이 기억된 테이프의 소리까지도 분명하게 듣고 있다는 사실에 명진은 놀랐다. 내시선은 기억된 표상을 보고 내청각은 기록된 테이프를 듣고…
열차가 신림역에 도착하자 현주는 깨우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눈을 떴다.
“깜빡 잠이 들었어요. 미안해요.”
“미안하긴요.”
명진은 덩달아 좌석에서 일어났다.
“인젠 저 혼자 가도 돼요. 교수님께선 그냥 들어가세요. 오늘 고마웠어요.”
“혼자 갈만 하겠습니까?”
“네.”
그녀는 언제 취했던가 싶게 반듯한 걸음걸이로 플랫폼을 빠져나갔다.
“취하지 않았었나? 그런데 내가 왜 여기까지 데려다 준거지.”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와 갈라지자 긴장이 풀리면서 이번엔 그가 취기가 올랐다. 아예 좌석구석에 자리를 잡고 팔짱을 낀 채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그러나 밖의 대상들과 차단된 시선은 자신의 욕망을 포기하지 않고 내시선으로 시스템작동이 바뀌며 기억 속에서 표상들을 호출해내기 시작했다.
벤치에서 우아한 걸음걸이로 다가오던 현주.
일사천리의 사변을 과시하던 현주.
탄력 있는 가슴을 가진 현주.
현주.
현주.
현주뿐이었다.
명진은 다시 눈을 떴다.
차내에는 그와 늙은 할머니 한분뿐이었다. 할머니는 끄덕끄덕 졸고 있었다. 그러나 그 모습은 꿈속에서처럼 희미할 뿐이었다. 표상은 시스템작동이 중단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집요하게 할머니의 모습을 가리며 그 앞에 현주의 모습을 그린 현수막을 걸고 있었다.
천장에로 시선을 이동시켰다.
표상은 또 시선을 따라 이동한다.
TV수상관의 움직이는 화면에 초점을 맞췄다. 그런데 이번에 표상은 기발하게도 화면에 나오는 여자를 마술이라도 부리듯 현주의 얼굴로 변신시킨다.
급급히 바닥에 시선을 떨어뜨렸다.
구둣발에 하얗게 닳은 철판에도 현주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 모습은 그의 미완성스케치에 그려진 윤곽보다도 더 희미했지만, 거의 아무런 형태도 없었지만 표상은 명진이더러 그 모습이 분명 현주라는 걸 확신하게끔 유도하고 있었다.
싱크대에도 좌석에도 창문의 어둠 속에도 훌쩍훌쩍 지나치는 역의 간판에도 내리고 오르는 승객들의 얼굴에도……
현주는 어디에나 다 있었다.
짓궂은 표상의 희롱 앞에서 시선은 그 기능을 상실한 채 갈팡질팡하며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세상에 이런 일이?!
다음 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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