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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무지개 그림자" 연재 24

by 8866 2008. 4. 11.

 

 장편소설 "무지개 그림자"

 --이영희 코너

 

 연재 24

 “너희들 둘 다 서로에게 마음이 있으면서도 한쪽은 숫기가 없어 먼저 입을 열지 못하고 한쪽은 수줍음이 많아 말을 꺼내지 못하니 아무래도 이 어미가 주책없다는 말을 듣더라도 매파노릇을 해야겠다. 안 그러면 어미가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할 거야.”
 “엄마.” 
 “넌 잠자코 있어.”
 “선생님께선 이미 여자친구가……”
 “글쎄 가만있으라니까 그런다. 자네 어디 대답해보게. 내 딸이 맘에 드나?”
 명진은 고개를 쳐들었으나 선 듯 대답은 못하고 영희 쪽에 눈길을 던졌다.
 영희는 고개를 떨어뜨린 채 눈물만 펑펑 흘렸다.
 “걔 눈치 보지 말고 자네 생각대로 말해 보게.”
 “저야 뭐… 영희 씨가 어떻게 생각할지……”
 “이렇게 줄나고서야 어디 장가나 가겠나. 좋다 나쁘다 단마디로 말하게.”
 “영희 씨만……”
 “그만 알았네. 그럼 넌.”
 “엄마.”
 “너 어미 황천길마저 편하게 가지 못하게 할 거냐. 이 못된 년아!”
 “정말 왜 이래.”
 “좋아하지?”
 “엄마.”
 “어서 대답해.”
 “……”
 “말이 없으면 대답한 걸로 치겠다. 서로 동의했으니 인젠 내가 보는 앞에서 절을 해라.”
 “엄마, 현주한테는 아직 알리지도 않았는데……”
 “자네 뭘 하고 멍하니 버티고 앉아있나. 어서 얠 데리고 절을 하지 않고.”
 명진이 의자에서 일어나더니 그녀의 손을 가만히 잡았다.
 “영희 씨. 어머님의 마지막 소원인데……”
  영희도 마지못해 일어났다. 자식으로 생겨서 어머니의 마지막 소원을 거절한다는 건 불효의 불효라는 생각에 떠밀려 명진이 이끄는 대로 방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러나 머릿속에는 홍현주의 모습이 언뜻거렸다.
 “인젠 죽어도 눈을 감겠다. 여한이 없어. 내 딸을 자네한테 맡기네. 어미 없는 애라고 박대하지 말고 아비, 어미 몫까지 잘 돌봐주게나.”
 “네, 어머니, 걱정하지 마세요. 말씀을 명심하겠습니다.”
 그날 환자는 자신이 예견한대로 해를 넘기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일절 장례비용은 명진이가 댔다. 화가인 아버지와 서울바닥에 대형 갈빗집을 운영하는 어머니의 수입이 톡톡해 명진네는 재력가집안이었다.
 장례가 끝난 그 다음날에야 영희와 명진은 조용한 자리에 단둘이 남게 되었다. 영희는 장례도 끝났으니 만큼 이제는 어머니의 황천길을 편히 보내드리기 위해 서약했던 명진이와의 언약을 해약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어머니를 구실로 명진의 어깨에 부당한 책임과 부담을 지워서는 안 된다.
 “어제는 정말 죄송했어요. 엄마 때문에……”
 커피가 몹시 따가웠다. 목이 타는 것 같았다. 커피가 갑자기 뜨거워진 것인지 아니면 그녀의 반응이 민감해진 것인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어머님이 저를 대신해 말씀해주셔서 고마웠습니다.”
 명진이도 커피가 뜨거운지 마시지는 않고 자꾸만 입김만 훌훌 불었다.
 “네? 무슨 말씀이신지!”
 “제가 영희 씨께 드릴 말씀을 어머니께서 대신 해주셨습니다.”
 “네?!”
 전혀 기대 밖의 말은 아니었지만 그러나 기대했던 말도 아니었다.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그럼 현주랑과는…”
 “현주요.”
 마치도 생소한 이름을 듣는 듯 명진의 시선엔 의문에 묻어있다.
 “현주는 선생님을 사랑한다고……”
 “네에- 전 또 무슨 말씀이시라고. 그냥 동생처럼 생각한 것뿐입니다.”
 “네?!”
 영희는 다시 한번 놀랐다. 자신의 귀까지 의심했다.
 “현주는 선생님께서 결혼까지 약속하셨다고 그러던데요.”
 이 마당에서 더 주저할 것은 없었다. 사실 그녀는 저승에 간 어머니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는 딸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친구와의 우정을 저버리는 배신자가 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데 명진의 말에서 그 갈등이 풀릴지도 모른다는 기대 때문에 그녀답지 않게 긴장되었다.
 “제가 언제 그런 약속을 했다고?”
 “소매물도의 등대섬에서요. 비 오는 날 밤에.”
 “아, 그날 말이군요. 그냥 현주가 아프니까 달래느라고 생각 없이 한 말인데…… 진심으로 들었나 보군요. 그러니까 현주는 아직도 어린앱니다.”
 이럴 수가?!
 결국 착각한 쪽은 현주라는 말이다. 현주가 본 명진의 모습은 명진의 진실 된 면모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그녀가 지금 마주하고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는 명진 씨의 모습은 진실한 모습일까. 장난이거나 망자의 소원을 풀어주기 위해서거나 불행한 그녀의 슬픔을 위로하기 위해서거나…… 그런 것은 아닐까. 사랑이 아닌 동정, 연민……
 “그럼 절 정말……”
 손에 들린 유리컵 안에서 스푼이 짜르랑- 짜르랑- 소리를 냈다. 급히 차탁위에 내려놓았다.
 “절 사랑하신다는……”
 “네. 소매물도에서 영희 씨를 처음 본 순간부터였습니다.”
 맙소사!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결국 그런 불안 속에서도 그들의 관계는 결혼까지 이어졌다. 마음 한 구석은 늘 현주의 모습이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결혼 후 몇 달이 지나서야 영희는 풍문을 통해 현주가 자살을 시도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남편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나중에 다른 통로를 통해 이 소식을 입수한 남편이 따지고 들었지만 그녀는 자기는 모르는 일이라고 시치미를 떴다.
 그녀는 거리에서도 우연히 현주를 만날까봐 늘 두려웠다. 멀리 현주와 비슷한 모습이 언뜻거려도 부랴부랴 골목으로 숨어들곤 했다.
 내가 무슨 죄를 졌다고 이러지? 남편은 처음부터 현주를 사랑하지 않았다고 하지 않는가.
 그러면서도 정작 그녀를 만나면 가슴이 떨리고 몸 둘 바를 몰랐다. 하루하루가 숨어 지내는 도둑놈심정이었다. 그저 어서 빨리 현주가 결혼했다는 소문이 들려오기만을 고대했다.
 다행히도 현주는 원망한마디 없었다. 결혼식장에 나타나지도 않았고 그들의 집에 찾아와 행패나 난동을 부리지도 않았다. 친구라는 미끼로 전화한통 걸어주지 않았다. 덕분에 영희는 초조한 속에서도 편안한 결혼생활을 할 수가 있었다.
 제발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말아줘!
 그것이 현주에게 거는 마지막 기대었다.

 다음 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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