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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무지개 그림자" 연재 23

by 8866 2008. 4. 4.

 

 장편소설 "무지개 그림자"

 --이영희 코너

 

 연재 23

 

 영희는 당황한 나머지 적당한 말을 고르지 못한 채 어리둥절해졌다.
 방안에 들어서는 영희를 보자 명진이도 자리에서 일어나며 쑥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의 손에는 여인의 입에 미음을 떠먹여주던 숟가락이 들려있었다.
 두 사람 다 아무 말도 못한 채 그렇게 엉거주춤 서있었다.
 “얘야. 어서 인사드려라. 이 선생님 덕분에 어미가 살아났으니까.”
 엄마가 무거운 침묵을 깨뜨리며 가까스로 상체를 일으키려 했으나 신음소리를 내며 다시 베개위에 머리를 떨어뜨렸다.
 “엄마!”
 영희와 명진은 동시에 그녀를 부르며 기우는 상체를 부축했다. 그러나 순간 지척에서 마주친 서로의 얼굴을 느끼고는 한걸음씩 뒷걸음질쳤다.
 “엄마, 왜 이래. 어디 다쳤어?”
 “화장실 가려고 밖으로 나가다가 그만 바닥에 넘어지면서…”
 “그래서 요강 들여 났잖아. 운신을 못하니 밖에 나가지 말라고 신신당부 했는데도.”
 “너한테 똥오줌 수발까지 시키기가 미안해서… 마침 이 분이 오셔서 병원으로 데려갔기에 망정이지. 허리에 약을 바르고 먹는 약도 사주셨단다. 차에 태워서 데리고 다니느라 고생이 많으셨어. 정말 고마운 분이시야. 잣죽을 끓여준다. 방안을 거둬준다 종일 바삐 보내셨어, 저기 저렇게 한우갈비까지 사오시구…”
 “고마워요!”
 영희는 고개를 숙여 진심으로 사의를 표했다.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사전예고도 없이 이렇게 무작정 뛰어들어 죄송합니다. 난 영희 씨가 댁에 계신 줄로 알고. 아르바이트 일이 힘드시죠? 그런 줄도 모르고.”
 벌써 엄마가 모녀의 자초지종을 죄다 고해바친 모양이다.
 “보시다시피 저의 집은 이렇게 누추해요. 모실 곳도 없고…”
 “괜찮습니다. 내 걱정은 하지 말고 어머니나 돌보세요.”
 “인정도 많고 생기기도 잘 생기고 마음씨도 곱고, 게다가 아직도 총각이라잖니. 뉘 집 사위가 될지 그 집에는 호박이 덩굴채로 굴러들겠다. 우리 영희도 이런 남자를 만났으면 죽어도 원이 없겠다. 저건 어떤 귀신이 집어갈지…”
 “엄마, 난 시집 안 간다고 그랬잖아.”
 “그래 잘한다. 어미가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하게 노처녀로 늙어 죽어라.”
 여인이 버럭 화를 내는 바람에 방안의 분위기는 갑자기 험악해졌다.
 “어느 다방에라도… 불편하지 않으시면…”
 손님 앞에서 핀잔을 듣자 난감해진 영희는 명진을 밖으로 유도했다.
 두 사람은 밖으로 나와 근처의 지하다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현주는요? 그 애도 집에 있을 텐데.”
 영희는 화제의 서두에서부터 현주를 끌어들여 자신과 명진의 사이에 심판원처럼 세워놓았다. 명진의 기억 속에서 현주를 상기시켜주고 싶었다. 그리고 그 자리를 잘못 차지한 자신의 존재를 철회하려고 시도했다.
 “어제 하루 종일 함께 있었습니다. 일주일에 한번씩 서울에 올라옵니다. 영화구경도 데리고 가고 갤러리도 관람시키고 합니다. 어린앱니다. 구경을 그렇게 좋아합니다.”
 뜻밖에도 명진은 그녀 앞에서 현주에 대해 아무런 부담 없이 담담하게 말했다.
 웬일이지? 나한테 호감이 있다면 현주와의 밀애는 속이려고 할 텐데. 애초부터 나한테 연정 같은 건 없었기에 두 사람의 관계를 은폐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걸까. 그가 나에게 보여준 관심은 연정이 아니라 그냥 동정심 같은 것이었단 말인가.
 “솔직하고 단순한 애에요. 샘처럼 맑고 하늘처럼 투명하죠.”
 “그렇습니다. 꼭 여동생 같은 느낌이 듭니다. 볼수록 귀엽고 사랑스럽습니다.”
「사랑스럽다」라는 표현이 너무 쉽게 흘러나와 이성 간에만 가능한 사랑의 깊이와 의미가 결여된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사랑」을 표현하는 말임은 분명하다.
 오늘 다시 보는 명진의 모습은 신사처럼 어엿한 풍도나 당당한 기백은 없었지만 반듯하고 균형 잡힌 이목구비가 지적이면서도 부드러웠다. 침착하고 자상해 보이는, 부드러운 얼굴선은 여유와 넉넉함이 다분했다. 강하지도 멋지지도 눈부시지도 않았지만 자연스럽고 친근감 있고 사려 깊고 부담스럽지 않아 편한 인상이었다.
 그리고 명진의 눈길에서 영희는 분명히 애정을 읽을 수 있었다.
 아니야, 명진 씨는 현주를 사랑하고 있어. 날 동정하고 있는 거야. 지금 저 눈길은 사랑이 아니라 연민이야.
 영희는 갑자기 시선을 어디에다 둘지 몰랐다.
 설령 그 눈길에 연정이 담겼다고 하더라도 영희는 현주와의 우정을 배신할 수 없었다.
 “실례지만 전 엄마 때문에 이만… 오늘은 정말 고마웠어요. 나중에 기회가 생기면 인사를 드리겠어요.”
 “별말씀을요. 우리는 이젠 구면이잖습니까. 어려운 일이 있으면 친구로 여기고 부담 없이 부탁하십시오. 힘이 닿는 데까지 도와드리겠습니다.”
 아무것도 확인한 것이 없었고 투명해진 것이 없었다. 그 번의 만남은 모든 것을 더욱더 불확실한 모호 속에 깊숙이 매장해버렸다. 명진과 현주와의 관계도, 영희와 명진과의 관계도 심지어는 그녀와 현주의 사이마저도 안개 속에 휩싸여버리고 말았다. 전화통화도 갈수록 뜸해졌고 현주는 명진이와 함께 하는 시간이 잦아질수록, 영희는 엄마와 아르바이트에 빼앗기는 시간이 늘어갈수록 만남의 횟수도 점차 줄어들었다.
 그렇지만 명진과의 만남을 전화로라도 현주에게 알려줄 수는 있었다. 그러나 영희는 말하지 않았다. 무엇 때문에 그 사실을 숨겼는지 그녀스스로도 이유를 모른다. 그것은 현주와 자매관계를 맺은 뒤 처음으로 비밀에 부친 사건이었다. 부질없는 공개로 인해 현주에게 부담이 되고 둘 사이에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화근으로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데 영희는 정말이지 그 한번의 기만이 배신으로 되고 그 배신이 현주와의 우정에 영원하고 치명적인 타격이 될 줄은 몰랐었다.
 그 일이 있은 뒤에도 명진은 자주 수원으로 내려왔다. 그녀가 아르바이트를 다녀오면 명진은 집에 와 있었다.
 “내가 오라고 했다. 거동도 불편하고 혼자 심심해서…”
 딸이 난감한 표정을 지으면 엄마가 나서서 궁지에 빠진 명진을 대신하여 구실을 달아주었다.
 명진은 엄마를 휠체어에 태워 팔달공원으로 올라가 산책도 시켜드렸고 맛있는 음식도 사드렸고 안마를 해드리거나 말동무도 해드렸다. 그러나 영희는 명진의 시선이 가깝게 느껴지고 정으로 굵어지고 물기가 오를수록 당혹스러웠다. 그 호의가 반갑기도 했지만 그보다 먼저 부담스러웠다.
 “현주가 기다리잖아요. 오늘도 집에 있다던데요.”
 자꾸만 현주한테로 밀어버렸다.
 “현주하고는 그냥 만나는걸요. 며칠 전에는 걔한테 끌려 정동진 해돋이구경까지 갔다 왔어요. 현주 고집을 누가 꺾습니까.”
 빙그레 웃기만 할뿐 대전으로 내려갈 기미조차 없다.
 “그럼 현줄 수원으로 올라오라고 부를까요.”
 명진이와 함께 있는 시간이면 저도 모르게 현주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마음이 불안하고 죄책감 같은 것마저 느껴져 괴로웠다. 현주에게만 속한 어떤 소유권을 가만히 훔쳐낸 기분이 되군 했다.
 “내일 또 서울에 올라올 거니까 수원까지 부를 필요는 없습니다. 가끔이라도 현주의 들볶음 속에서 해탈되어 조용한 시간을 보내고 싶습니다.”
 “현주를 사랑하지 않으세요?”
 몇 번이고 혀끝까지 나왔던 말이었지만 끝내는 입밖에 뱉지 못하고 삼켜버리곤 했었다. 남의 사생활에 깊숙이 간여하고 싶지 않았고 또 긍정적 대답이나 부정적 대답 중 어느 쪽도 부담스러울 것 같아서였다. 그와의 접촉이 잦아지고 시간이 흐르면서 저도 모르게 때 오른 정 때문인지는 몰라도 현주를 사랑한다는 대답을 듣기가 언제부턴가 조금씩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현주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대답 역시 부담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현주와 그녀의 우정, 현주와 명진의 애정, 그녀와 명진의 애정이라는 삼각관계 중 그 어느 쪽을 선택하는 것도 어려웠기 때문이다. 하나의 선택은 두 개의 상실을 의미하기도 했다. 우정과 현주와 명진의 사랑을. 처음부터 명진이가 현주를 사랑하지 않았고 현주의 짝사랑에 불과했다고 해도 명진의 연정에 대한 그녀의 수락은 현주에게는 치명적인 타격이 될 것이 분명하다. 영희는 그렇게 잔인할 만큼 이기적인 인간은 아니었다. 이기적이라기보다는 항상 타인을 배려하는 그녀였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영희는 명진의 마음을 알 수가 없다. 현주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무엇 때문에 그녀와의 만남을 지속하고 있는가? 자신을 사랑한다면 왜 프러포즈는 몰라도 완고하거나 은유적으로라도 진심을 표현하지 못하는가.
 엄마의 병세는 하루하루 악화되어갔다. 죽음을 눈앞에 둔 그녀는 딸만 보면 잠꼬대처럼 혼사문제를 쳐들고 나왔다.
 “어미가 죽기 전에 네가 시집가는 걸 봐야 할 게 아니냐. 안 그러면 눈감고 죽지 못할 거다.”
 “그게 어디 맘대로 되는 거냐고. 상대가 있어야지.”
 “명진이가 어떠냐? 내 보기엔 좋은 사람 같더라.”
 “엄마.”
 “왜 싫으냐?”
 “그분은 벌써 여자친구가 있어요.”
 “있긴 뭐가 있어. 그 현주인지 하는 아가씨 말이지. 네가 그러기에 내가 벌써 물어봤다. 여자친구가 아니라 동생처럼 가깝게 지내는 사이라더라.”
 엄마는 당신 나름대로 장래 사윗감을 점찍어놓고는 어느새 명진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죄다 입수해놓고 있었다.
 솔직히 싫지는 않았다. 짧은 시간이긴 하지만 동계휴가 중 몸 가까이에 지내 본 명진은 자상하고 정이 있는 남자였다. 다만 그와 현주의 관계가 아직 불투명하고 그녀에 대한 그의 마음이 사랑인지 연민인지 불확실한 지금의 상황에서 섣부른 태도표시를 한다는 건 영희의 성미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어서 대답해봐. 싫으냐고?”
 “… …”
 “에그, 이 못된 것아! 아비를 닮아서 소갈머리가 밴댕이 속처럼 좁아터져 가지고 원. 죽을 때까지 어미 속 태워라.”
 엄마는 딸의 이마에 주먹호빵을 먹인다. 그러다가는 육신의 통증 때문에 아이고! 하며 면상을 일그러트린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의 병세는 갑자기 악화되어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몇 번이나 혼수상태에 빠졌고 그 때마다 응급치료를 받고 사경에서 구원되었다. 의사의 진단결과는 간암말기였는데 암세포가 이미 위장에까지 확산되었다는, 사실상 사형선고를 내렸다.
 엄마는 병상머리에 딸 영희와 명진을 나란히 불러 앉혔다. 정신이 맑을 때를 이용하여 유언을 남길 기미어서 영희는 눈물부터 흘렸다.
 “울지 말고 어미 말 들어라. 어미의 마지막 소원인데 거절하진 않겠지.”
 “죽긴 왜 죽어요. 수술하면 되잖아요.”
 영희는 엄마의 소원이 뭔지 잘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들어줄 수 없었기에 의도적으로 화제의 방향을 비틀었다. 임종을 앞둔 부모의 소원을 효녀인 그녀가 들어주지 않을 수도 없었기에 심리적 갈등을 느끼고 있었다. 제발 혼담만은 꺼내지 말기를 속으로 빌 뿐이었다.
 “다 소용없다. 너무 늦었어. 엄마는 오늘 해를 넘기지 못 한다는 걸 잘 알아. 네가 내 딸이 맞으면 어미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 주렴아. 죽는 사람의 소원도 들어주지 않으려니. 못된 년 같으니! 아비를 닮아서…”
 “어머님, 말씀하십시오. 영희 씨가 듣고 있으니까요.”
 명진은 알고 그러는지 모르고 그러는지 영희 대신 대답했다.

 다음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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