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무지개 그림자"
--"스토크 바이 네일랜드"와 마로니에 미완성 스케치 C
연재 21
시각기능에는 분명히 한계가 있다. 자그마한 나뭇잎 한 조각이 앞을 가려도 우리의 시각은 기능을 상실하고 만다. 시각이 포착할 수 있는 한계 때문에, 그것을 소재로 삼을 수밖에 없는 미술작품은 이미지의 분리와 불완전함의 결여가 불가피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다행스러운 것은 시각의 한계 때문에(또 기타 감각기관의 한계 때문에) 분리되고 불완전하게 된 이미지가 이전에 보았거나 체험한 기억과 표상의 도움으로 (비록 불충분하고 불확실하고 모호하긴 하지만) 상실된 부분의 복원과 재생이 담보됨으로써 완벽해질 수 있다는 점이다. 꿈에서 그가 본 사건들은 컨스터블의 그림에서는 숲이나 건물에 가려 은폐 또는 소외되었거나 전체적 이미지에서 분리되었던 것들이다. 소외 또는 분리된 이미지들은 명진의 과거의 시각체험의 기억들에 의해 포착이 가능해질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 체험은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화가가 제공한 부분적 내지는 선택적 메시지의 불완전성에 복원시킬 이미지들도 감상자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농부의 아내를 능욕하는 『옆집 할아버지』의 겁탈사건은 명진이 어느 서양영화나 소설에서 보았던 간접체험의 영향이었던 지도 모른다. 개미의 전쟁은 그가 어린 시절에 본 기억에 의존한 것이다.
그러니까 명진은 『스토크 바이 네일랜드』에서 보았던 것보다 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보지 못한 것이 더 많았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과거의 시각체험을 통해서만 볼 수 있는 소외된 이미지들에 대한 파악은 감상자들의 각이한 체험과 욕망, 취미에 따라 부동할 수밖에 없다는 이치도 알게 되었다. 긍정적사유의 소유자는 컨스터블의 그림의 풍경이 에덴동산처럼 아름답게 보일 수도 있지만 부정적사유의 소유자에게는 똑 같은 풍경인데도 범죄의 현장이나 소외된 공간으로 보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부동한 감상은 바로 소외된 이미지들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이 꿈에서 명진은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발견했다.
시각은 시선이 물리적으로 차단당한 상태에서도 포착이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시각을 개방했을 때, 다시 말해 눈을 뜨고 있을 때 시선에 포착되는 영역을 외시각권이라고 한다면 시각이 차단되었을 때, 즉 눈을 감았을 때 시선에 포착되는 영역을 내시각권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청각도 동일하다.) 내시선이 볼 수 있는 대상은 바로 표상이나 꿈과 같은 것들이다. 그런데 내시선에서도 주시선과 차시선 그리고 주시선의 미달선과 초월선이 작용한다. 명진이 꿈에서 상세히 본 것은 개미들의 전쟁과 닭싸움, 개들의 교미와 농부아내의 불륜장면이었다. 그 밖의 수많은 현상들에 대해서는 포착했거나 아예 시선에서 소외시키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시각에 확실하게 포착된 것만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각자의 욕망과 취향과 정서에 따른 선택일 뿐 의미의 유무와는 관계가 없다. 의미가 있다면 시청자의 각도에서 취사된 의미에 불과할 뿐이다. 그래서 그 의미가 다른 사람의 공감을 얻느냐 얻지 못하느냐는 작품의 가치를 규정하는 척도로 되는 것이다. 불확실하게 또는 모호하게 시각에 파악된 이미지들은 기억 속에 입력되어 항상 또는 분리된 부분의 이미지를 지향하게 된다. 완벽함과 확실함을 추구하는 이러한 본능이 바로 욕망이다.
그리고 주시선도 미달선과 초월선의 한계를 갖고 있으며 동시에 순간성을 내포하고 있다. 파악된 이미지는 주시선의 선택을 받을 때에만 확실할 뿐이지 일단 시선이 이동하면 그와 동시에 불확실한 이미지로 변하게 된다.
뜻하지 않던 꿈 한토막이 이렇듯 많은 의미를 갖고 있을 줄은 몰랐다. 흥분이라는 단어조차 모르는 명진은 그 말의 의미를 오늘 비로소 발견했고 몸으로 직접 체험했다.
그렇다면……
명진은 꿈의 힌트를 받고 머릿속에 하나의 의문을 떠올렸다.
마로니에공원의 피살사건.
범인이 잡혔다고는 하나, 그의 증언의 확실성이 입증되었다고는 하나 웬일인지 모르게 마음 한구석은 늘 찝찝했다. 서혜란의 불투명한 태도와 박 형사의 불신에 찬 표정 그리고 병든 여인의 애원과 아내의 의문 때문만은 아니었다. 자신의 관찰력을 확신하면서도 어딘가 개운하지는 못했었다.
무언가에 살짝 가려도, 지어는 빗줄기나 안개에 가려도 대상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시각이라 할 때 그가 그날 목격했던 것이 정말 확실한 것이었을까? 사내는 신문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고 미모의 아가씨와 그의 사이에서는 수많은 관광객들과 비둘기 떼가 지나치며 수시로 시선을 차단했었다. 순간적인 차단이 형성된 그 뒤에서 과연 그가 보지 못한(보지 않은) 어떤 사건들이 벌어졌을까.
명진은 미모의 아가씨가 일회용종이컵을 받아서 어디에 던졌는지도 보지 못했다. 또한 사내의 얼굴이 신문에 가려진 상태여서 피살자가 그녀가 건네준 커피를 마시는 것을 똑똑히 보지도 못했었다. 그냥 상체와 목을 뒤로 젖히는 동작으로 미루어 추측했을 뿐이다. 추측! 다시 말해 볼 수 없는 것을 본 셈이다.
그렇다면 서혜란이 사내의 죽음과 상관이 없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발생한다. 사실 그녀가 자판기에서 뽑은 커피에 독극물을 타는 걸 직접 눈으로 확인한 바도 없지 않는가. 그러고 보면 서혜란이 범인이라고 인정할 만큼 확실한 증거가 될만한 것을 본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 솔직히 그가 본 것은 눈부신 아가씨의 미모였다. 그 밖의 것들은 사건이 발생하자 기억 속에서 부랴부랴 뒤져낸, 벌써 빛바랜 낡은 표상들뿐이었다. 손에 커피를 든 여자, 남자에게 커피를 건네는 여자, 일회용종이컵을 받아들고 벤치에서 일어나 사람들 속으로 사라진 여자…… 그것이 명진이가 본 사건의 전부였다. 그런데도 그가 그린 스케치 한 장 때문에 서혜란은 범인이 된 것이다.
무언가 잘못 된 것 같다.
그리고 보니 주위사람들의 권고에도 일리가 있어 보인다. 아내를 포괄하여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의 눈을 의심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추어이긴 하지만 그래도 화가인데, 사물의 특징을 누구보다 정확하게 파악할줄 아는 관찰력을 소유하지 않았는가.
명진은 이불속에서 기어 나와 스케치북을 찾아들고 펼쳐보았다.
다시 보니 그림속의 그녀는 커피를 손에 들고 남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남자의 얼굴은 신문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아내가 현주라고 주장하는 아가씨는 타원형 하나에 점 두 개와 반원형곡선 두 개 뿐이었다. 그런데도 아내의 말처럼 점과 선들은 무슨 마술이라도 부리듯 살아 숨쉬는 일종의 인간적 분위기마저 거느리고 있다. 차가운 듯한, 오만한 듯한, 그러면서도 반듯한 모습이다. 어쩌면 시각이 볼 수 있는 진정한 이미지는 원래 이렇듯 몽롱한 분위기뿐인지도 모른다.
손에 컵을 든 아가씨, 그것이 범죄의 증거가 된 것이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만일 그가 목격한 것이 진실이 아니라면, 그 때문에 억울한 사람이 죄를 뒤집어썼다면 진정한 죄인은 서혜란이 아니라 자신일 것이다.
아무 생각 없이, 사려 깊지 못한 판단을 내린 자신의 경거망동이 후회되기까지 했다. 왜 현주의 추상석을 대하듯이 좀 더 신중하지 못했던가. 돌덩이 하나에도 선 듯 이름을 지어주지 못하면서 한 사람의 인생을 파멸에로 내몰 수 있는, 그처럼 중대한 문제를, 그처럼 단순하고 조급하게 판단을 내리다니.
하지만 모든 것은 이미 엎지른 물이었다. 만회할 수 없는 실수를 저질렀다는 생각이 명진을 슬프게 했다.
어떻게 사건진상을 재조사할 방법은 없을까?
명진은 두통약을 복용하고서야 새벽녘에 겨우 쪽잠을 청했다.
그러나 요란한 음악소리와 말티즈가 짖는 소리에 깨어났다.
일어나 보니 머리맡에는 깨끗하게 세탁해 다리미질까지 해놓은 셔츠와 넥타이가 차곡차곡 개켜져있다. 남편에 대한 아내의 이런 자상함은 결혼해서 오늘까지 시종 변함이 없다. 식사, 잠자리, 의복에 이르기까지 아내의 관심과 배려는 한 치도 빈틈이 없었다. 그것만큼은 세상에서 아내를 대신할 여자가 없을 것이라고 명진은 확신했다. 다만 무드가 건조하고 매너가 기괴하여 불쾌감을 줄뿐이다. 집에서도 밖에서처럼 고도의 우아함과 세련미를 지속했으면 싶었다. 그런데 세월이 갈수록 아내의 반듯하던 균형미와 교양미는 녹 쓸고 삐거덕거린다. 그것은 현주의 변신한 모습이 배경으로 나타나면서 더욱더 급속하게 퇴색하는 듯싶었다. 아내는 어쩔 수 없는 아기의 엄마로, 주부로, 아줌마로 변해가고 있었다.
욕실에 들어가 샤워를 하고 나오니 주방에는 벌써 그가 좋아하는 아침식사가 풍성하게 준비되어 있다. 아내는 한번도 아내로서의, 자식을 거느린 어머니로서의 자신의 책임을 게을리 한 적이 없었다. 책임을 다하려고 최선을 다했으며 완벽함을 추구했다.
아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청각은 거실에서 울려나오는 교향곡에 이어놓고 시각은 품에 안은 말티즈에게 심어놓은 채 주위의 존재들에는 무심한 표정을 던졌다. 아내가 보고 싶은 것은 말티즈뿐이고 듣고 싶은 것은 교향곡뿐인가. 남편과 자식은 한낱 책임과 부담일 뿐일까.
저 지긋지긋한 교향곡 때문에, 아내의 시선을 독점한 말티즈 때문에, 또 느닷없는 질문으로 그를 당황하게 만들 아들 철민이 때문에 명진은 이 집안에 머무르는 시간들이 지루하게 느껴졌다. 그저 도망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대충 몇 술 뜨는 척 하고는 수저를 내려놓았다.
“더 들지 않고……”
눈길은 말티즈에게 심은 채 고개도 쳐들지 않는다.
“많이 먹었어.”
아내는 말티즈를 안은 채 문밖에까지 남편을 배웅한다.
“잘 다녀오세요.”
빈틈이 없는 아내가 숨 막힌다는 느낌뿐이다. 옛날에 저런 모습이 자상함과 타인에 대한 배려로 느껴졌다는 사실이 이상하기까지 했다. 지금 그녀의 자상함은 부담과 구속일 뿐이었다.
잘 다녀오세요. 라는 말속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현주랑 만나지 말고 퇴근하면 곧바로 집으로 돌아오세요. 라는 뜻이 담겨있음을 읽을 수 있다. 그것이 구속이 아니고 배려란 말인가. 아내의 직업은 남편의 사생활을 감시하는 사인탐정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 눈길은 옆에 있을 때나 멀리 있을 때나 항상 그의 뒤를 숨어서 따라다닌다.
차를 주차장에서 끌어내면서 명진은 다시 한번 말티즈를 안고 발코니에서 정원을 내려다보고 있는 아내의 모습을 발견하고 전율했다. 그녀의 뒤에는 교향곡이 있을 것이고 그리고 그녀의 눈길은 무선전파처럼 그의 뒤를 끈질기게 추적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달려가고 있는 대학에는 현주가 있고 연구실안에서는 추상석과 『스토크 바이 네일랜드』가 기다리고 있다. 오늘은 또 마로니에공원에로 가야 할 것이다.
오늘은 추상석의 이름을 지어야겠는데……
일종의 책임감 같은 것을 느꼈다. 그러나 어젯밤의 꿈 때문에, 꿈이 던져준 암시 때문에 추상석의 이름 짓기가 더욱 어려워지게 되었다. 추상석은 작품이고 서혜란은 혐의범인데도 자꾸만 비교가 되면서 복잡하게 얽혀들었다.
“뭔가가 잘못 되었어.”
명진은 입속으로 중얼거리며 차를 운전했다.
현주가 점점 가까워오고 있었다.
다음 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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