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무지개 그림자"
--이영회 코너
연재 22
이영희 코너
소매물도행은 영희에게 행운의 기회이기도 했고 불행의 시작이기도 했다. 어쩌면 그때 현주의 동행청탁을 거부했어야 옳았던 건지도 모르겠다. 현주의 간청에 못 이겨 소매물도로 떠났던 게 잘된 일인지 잘못된 일인지 영희에게는 아직도 불투명하기만 하다. 그 번에 그녀가 얻은 것이 사랑인지 동정인지는 지금도 판단이 석연치 않다.
조금은 어눌하고 소침해 보이는, 그러면서도 안정감 있게 차분한 무드와 완숙의 경지에 오른 지적이미지는 명진의 첫인상이었다. 결코 여자들의 가슴을 설레게 할만한 완벽한 조건은 아니었다. 젊은이라면 누구나 과시할법한 기백과 낭만도 없었고 유머와 파워도 없었다. 분위기를 리드할만한 숫기조차도 부족했었다.
그처럼 불충분한 매력이었지만 명진은 첫눈에 현주의 마음을 흔들어놓았고 영희의 호감까지 유발시켰다. 순진한 낭만에 부푼 현주의 가슴에 바람을 불어넣고 파도를 일으키는 건 쉽다 치더라도 경계심 많고 붙일성이 적은 영희의 고요한 마음을 흔들어 놓는 남자는 많지 않았다. 그녀는 어떤 남자에게도 속심을 쉽게 털어놓지 않았고 받아들이지도 않는 보수적이고 내면적인 성격이었다.
그러나 자신에게로 무심코 날아오는 그의 눈길에 호감을 넘어선 풀기 있는 정이 실려 있음을 간파하지 못할 만큼 신경이 무디지는 않았다. 물론 그것이 연정인지, 현주의 호기에 대책 없이 쥐여 흔들리는 그녀의 가련한 처지에 대한 동정인지에 대해서는 분명한 판단이 서지 않았었다. 그렇지만 영희는 그때 자신의 시선 한 가닥으로도 명진을 현주에게서 자기 쪽으로 당겨올 수 있음을 확신했다.
그러나 그럴 기분이 없었다. 현주가 명진을 좋아했기에 우정 때문에 가능성을 포기한 것도 아니었다. 수원의 집에 홀로 계신, 앓는 어머니가 걱정될 뿐이었다. 반신불수로 거동이 불편하신데 끼니나 제대로 드시는지, 어서 현주한테서 해방되어 육지로 들어가고 싶었다. 매주 토요일이면 꼭꼭 집으로 돌아가 어머니를 보살폈지만 이번만은 현주에게 끌려 소매물도로 오다나니 수원으로 상행하지 못한 것이다.
“언니, 어니 보기엔 명진 오빠 어때?”
“글쎄. 첫인상은 나쁘지 않다만. 사람은 지나봐야 알잖아. 첫인상을 보고 어떻게 아니?”
“첫눈에 정이 든다는 말도 있잖아. 나도 이전엔 그 말을 믿지 않았어. 그러나 오늘에야 그 말의 뜻을 알게 되었거든. 오빨 보자마자 아, 이 사람은 내 남자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거 있지. 언닌 느껴보지 않아 그 기분을 모를 거야. 언니도 알잖아. 내 눈이 얼마나 높다는 걸. 늘 오만하다고 비난받았잖아.”
아무리 이해하려고 애써보아도 「첫눈에 정이 든다.」라는 말의 의미는 영희로서는 납득이 가지 않는다. 겉모습만 보고, 대화 몇 마디 나누고 사랑할 수 있다니. 철부지어린애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좋다고 속도위반을 해서는 안 된다는 건 알지.”
“난 오빠가 좋다면 내일이라도 결혼하고 싶어.”
사랑하면 눈에 뭐가 씌운다고 하더니 현주는 정말 명진이를 사모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녀와 명진의 관계를 질투하지는 않았다. 바람 불고 비가 오던 날 현주가 등대섬에서 명진이와 단 둘이 하룻밤을 보냈을 때에도 영희의 마음은 평온했었다. 그들이 설사 속도위반을 했다 하더라도 밤의 어둠과 몽돌밭길차단으로 주변세계와 격리된 단 둘만의 공간에서 남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속도위반행위뿐이란 걸 어렵잖게 예측케 했지만 질투나 불안감을 느끼지는 않았다. 아주 편안한 마음으로 그 밤을 보냈고 아침이 되어서야 현주를 찾아 민박을 나섰다. 그 발길도 사고나 생기지 않았을까 하는 염려 때문이었지 현주가 명진을 독점했다는 불안감에서 행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들의 관계를 지켜보며 불안한 느낌이 있었다면 속도위반으로 손해 보는 쪽은 여자인 현주일 거라는 추측뿐이었다. 제발 현주가 현명한 판단을 내려 스스로를 불리한 위치에 떠밀어 넣지 말기를 바랄뿐이었다. 어떻게 겨우 하루 이틀 지내본 사람과, 눈에 보이는 것 외엔 아무것도 내막을 알 수 없는 남자에게 20여 년이나 고스란히 지켜온 순결을 바칠 수 있는가. 사람은 지내봐야 알고 물은 건너봐야 안다는 이치쯤은 무식한 시골아낙도 알고 있는 상식인데.
“언닌 그게 탈이야. 무엇에나 소심한 게. 미지의 세계를 탐구하는 게 삶의 의미가 아니겠어. 다 알고 나면 무슨 의미가 있냐고. 모험과 불안이 동반된 자극이야말로 도전적 인생이 맛볼 수 있는 별미이지.”
현주는 도리어 불확실한 현실 앞에서 반신반의하고 있는 영희의 소극적인 인생태도를 꾸짖는다. 보이는 것은 다 믿는 현주와는 달리 영희는 보이는 것조차도 믿기 어렵다. 보아도 알 수 없는 것은 보지 않은 것과 뭐가 다르랴. 보아서 알 수 있는 것만이 진정으로 본 것이다. 그런데 현주는 도리어 보고도 알 수 없는, 바로 그 은폐된 무언가를 추구하고 탐구하는 걸 의미이고 모험이라며 즐기고 있는 것이다. 유별난 취미가 아닐 수 없다.
“네가 그 남자에 대해 도대체 아는 게 뭐니?”
“이름을 알고 나이를 알고 직업을 알고 얼굴을 알면 되잖아. 그밖에 또 뭐가 필요한데.”
“그런 것들만으로 사랑이 충분한거니?”
“사랑은 사랑하는 마음만 있으면 충분한 거잖아. 조건보다는.”
현주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영희는 화제에 동원되었던 사유를 일방적으로 철수시켰다. 정말이지 인생을 살아가는 데는 현주처럼 단순한 것이 훨씬 쉬울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모든 것에 의문을 품는 자신은 현주에 비해 백년은 더 늙어 보였다. 젊음은 신심과 그 신심을 향한 의지적 매진 때문에 싱싱하다. 그런데 나는 현주와 같은 젊은 세대이면서도 늙은 노파처럼 앉은자리에서 꿈지럭거리기만 한다. 그런 현주가 불안해보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했다.
“언니. 나 오빠한테 프러포즈했어.”
“뭐라고. 벌써?!”
“나랑 결혼해줄 거라고 대답했다니까. 축하해줘.”
“정말?”
“정말 아니면. 내가 언제 언니와 거짓말 한 적이 있어.”
“혹시 잘못 들은 건 아니니. 아니면 그분이 장난치신 거든지.”
아무리 생각해도 명진이가 사랑 문제를, 더구나 인생지대사인 결혼문제를 단 이틀간의 만남을 담보로 결론지을 만큼 경솔하고 어리석은 사람 같지는 않았다. 그도 영희 자기처럼 소심하고 내성적이고 우유부단해 보이는 성미였다.
“내 귀로 똑똑히 들었어. 등대섬에서 말이야. 내가 지금 얼마나 행복한지 알아.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야.”
속도위반이 아니라 과속충돌 사고였다. 영희로선 믿을 수가 없었다. 점잖고 사려 깊을 것이라고 보아온 명진이도 천진난만한 현주와 다름없는 경망한 인격자였다니. 그야말로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는 한 사람을 정확하게 평가할 수 없음을 다시 한번 절감했다.
현주 때문에도 그랬고 집에 홀로 계시는 어머니 때문에도 그랬고 영희는 명진이 보내오는 의미 있는 시선을 외면했다.
대전에서 그와 헤어질 때 명진은 영희에게 전화번호를 물었으나 연락처가 없다는 구실을 대고 그냥 열차에서 내리고 말았다.
악수할 때 명진은 영희의 손을 오래도록 잡고 놓을 줄을 몰랐다. 어찌나 으스러지게 잡았던지 영희는 하마터면 비명을 터뜨릴 번했다. 무언가를 암시하는 것이라는 느낌은 들었지만 그냥 기억 속에서 추방해버리고 말았다.
“언젠가 꼭 찾아뵙겠습니다.”
그 인사말에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의미가 담겨있었지만 가벼운 목례로 대답을 대신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것으로 명진이와의 인연은 막을 내린 줄로만 알았는데 헤어진 지 얼마 안 되어 느닷없이 그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영희 씨, 안녕하세요. 김명진입니다.”
“아니, 제 전화번호는 어떻게 아시고?”
“현주가 알려주었습니다. 수원에 사신다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현주가요?”
“시간이 괜찮으시면 이번 주말에…”
“미안해요. 다른 선약이 있어서…”
거짓말이 아니었다. 일요일마다 그는 수원으로 올라가 어머니를 보살펴드려야 했다. 어머니를 목욕도 시켜드리고 밀린 세탁도 하고 집안청소도 하고 일주일간 소비할 식품도 구입해 냉장고에 장만해두어야만 한다.
그 뒤에도 한두 번 전화가 더 왔지만 영희는 구실을 대고 데이트청구를 모두 거절했다.
또 현주가 주말마다 서울로 상경할 때면 그녀의 동행을 청했지만 그 역시 완곡하게 거절했다. 현주도 명진이와 사귄 뒤로 영희와 만나는 시간이 줄어들었고 이전처럼 각별한 관심도 돌리지 않았다. 영희에겐 적당한 거리를 둔 그런 관계가 더 편안했다. 사실 현주의 열정과 낭만이 부담스러울 때가 적지 않았었다. 격렬한 것을 즐기는 현주와는 달리 조용한 분위기를 즐기는 영희였다.
그런데 명진이와의 인연은 거기서 끝난 것도 아니었다. 집요하지는 않았지만 느긋하게, 적극적이지는 않았지만 조심스럽게 명진의 접근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지속되어 왔다. 현주와 열연중일 텐데도 시선을 분산시키는 그의 비양심적 행동이 남들의 눈에 비난의 대상이 되리라는 것쯤은 알만한 사람인데도 죄책감 같은 것도 전혀 없이 연정의 끈을 던져오는 그가 이상하게만 보여 졌다.
그렇게 이리저리 회피하다가 그를 만나게 된 것은 그해 동계휴가 때의 어느 날이었다. 영희는 방학기간을 이용해 수원시내의 어느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어머니를 돌보고 있었다.
“지금은 겨울방학이니 혹시 시간적 여유가 있을 듯싶어서…”
남자답게 당당한 데이트신청을 넣지 못하는 명진의 완곡한 전화에 미안한 생각도 없지 않았다. 내가 무슨 대단한 사람이라고 번마다 거절하는 거지. 사회적 신분도 있고 체면도 있는 사람이 아닌가.
그런데 명진이 한사코 나를 만나려는 진의는 무엇일까?
그것부터가 미지수였다. 그녀에게 호감을 넘어선 연정을 품고 있다면 소매물도에서 현주와 결혼하겠다던 약속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현주가 잘못들은 걸까, 내가 잘못들은 걸까. 아니면 명진이 무심코 던진 농담이었을까. 그도 아니면 명진의 마음이 그 사이 변한 걸까.
도저히 분명한 판단이 서지 않는다. 지금도 명진은 현주를 만나고 있다. 현주는 사랑의 달콤함에 빠져 그처럼 의좋던 자매의 우정까지 망각하고 있다.
이처럼 모든 것이 불투명하다. 만일 명진이와 현주가 사랑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와 동시에 영희에게 데이트신청을 넣는 의도는 무엇인가. 구애인가, 동정인가, 연민인가… 명진의 진실한 모습은 도대체 무엇인가.
솔직히 영희도 명진에게 호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소매물도에서부터 그에 대한 인상은 푸근하고 편안했었다. 그러나 그런 느낌이 결코 연정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현주를 봐서라도, 설사 그녀를 향한 명진의 호기심에 털끝만한 연정이 묻어있다 할지라도 그의 데이트신청을 수락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 시점에서 그녀가 택할 수 있는 건 오로지 하나 거절뿐이었다.
“저 지금 바빠요. 죄송해요.”
무례함을 감수하면서까지 통화를 일방적으로 중단했었다.
그런데 아르바이트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영희는 눈앞에 벌어진 뜻밖의 상황에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꿈에도 생각 못한 명진 씨가 방안에 앉아있었던 것이다.
다음 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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