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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무지개 그림자" 연재 20

by 8866 2008. 3. 8.

 

장편소설 "무지개 그림자"

--"스토크 바이 네일랜드"와 마로니에 미완성 스케치 c

 

연재 20

 

 집에 들어서자 제일 먼저 명진을 맞아준 것은 진저리나는 음악이었고 그 다음 시야에 포착된 것은 추리닝을 입은 아내였다. 아내는 말티즈의 목욕을 끝마친 듯 브러시로 털을 다듬어주고 있었다. 여름이면 탈모기여서 목욕을 더 자주 시켜주어야 한다. 털이 헝클어져 알맹이가 지고 피부가 물러져 피부병발생확률이 높은 때이기도 하다. 그 때문에 아내는 시간만 있으면 브러시나 빗질을 해주고 벼룩방지대책으로 개집을 일광욕소독을 시킨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삐 보낸다.
 말티즈는 주인이 나타났는데도 낯선 사람을 대하 듯 아내의 엉덩이 뒤에 숨으며 콩콩 짓는다.
 “비가 오는데도 그림 그리러 갔었나요?”
 세월이 흐르며 아내의 온순함은 음흉함으로 변한 듯싶다. 부드러운 말속에는 언제나 섬뜩한 바늘이 있다.
 “아니.”
 그런 아내의 은폐된 야유에 인제는 무감각상태가 돼버린 명진이다. 아니, 무감각해졌다기보다는 우유부단한 명진에게는 맞장구칠 의욕마저 없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늦었죠?”
 그제야 벽시계를 쳐다보니 어느새 8시 35분이다.
 내가 현주 씨하고 있은 시간이 그렇게 오래 되었나?
 “현주랑 같이 계셨다면서요?”
 자신의 사생활을 침해당한다는 불쾌감이 꿈틀했다.
 “입만 뻥긋하면 현주야. 어떻게 된 사람이.”
 “다 알고 있어요. 연구실에 두 사람만 있었다면서요.”
 “누가 그래?”
 “본 사람이 그러죠 뭐.”
 “누가 봤냐고? 시력에 장애가 있는 사람이라면 몰라도.”
 “누구라면 승인하실 거예요. 스케치북에 버젓이 그려 넣고도 현주가 아니라고 시치미를 떼는 사람이. 당신보다 시력이 백배는 좋은 분이세요. 당신처럼 안경신세를 지는 사람도 아니고요.”
 “당신 좋을 대로 생각해.”
 피곤했다. 이런 무의미한 신경소모전이 신물난지가 오래다. 소매물도에서 보았던 영희는 부담 없이 편안한 인상을 주었었다. 그런데 지금 아내와 현주의 성격은 뒤바뀌고 말았다. 아내의 섬세함과 부드러움은 집요함과 소심함으로 바뀌었고 현주의 단순함과 천진난만함은 세련과 성숙으로 바뀌었다. 타인에 대한 아내의 배려와 이해의 미덕은 심신박약증을 낳았고 이기적이고 도발적이던 현주는 사리가 분명하고 예의바르면서도 사려 깊은 성격의 소유자가 되었다. 그 사이에서 변하지 않은 것은 명진이뿐이었다. 변함없이 우유부단하고 침울하고 결단력박약자이다.
 화제에서 퇴장하는 것이 아내와의 겨룸에서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활로였다.
 서재로 들어와 소파에 맥없이 육신을 털썩 부렸다. 눈을 감고 하루 동안의 일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눈을 감자마자 표상의 현수막에 현주의 모습이 거리의 대형광고전광판처럼 뜬다.
 그러고 보면 현주에 대한 아내의 의심도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런데도 아내의 의심의 눈초리와 암암리의 추적이 싫어진다.
 내가 뭘 어쨌다고 말이지. 현주 씨의 손 한번 잡아본 적이 없고 카페에서 차 한 잔 나눈 적이 없다. 아내의 의심을 받기에는 현주와 나의 관계는 너무너무 깨끗하다. 그녀의 생각이 자주 나는 건 나로서도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 인간 대 인간의 순결한 만남이 죄가 될 수는 없지 않는가.
 다행히 아내는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고약한 성미는 아니었다. 일단 그가 퇴장하면 더 이상 징징거리지 않았으며 말없이 주방으로 나가 식사준비를 한다.
 “식사하세요.”
 “싫어. 먹고 싶은 생각이 없어.”
 아내는 따돌렸지만 음악소리는 여전히 소란스러웠다.
 명진은 침실로 들어가 침대위에 눕자 이불을 뒤집어썼다……
 
 태양은 머리위에서 불덩이처럼 이글거렸고 오솔길은 숲 속으로 오불꼬불 이어졌다. 농부의 수레는 종곡을 가득 싣고 쟁기를 끌며 마을을 떠났고 숲 속의 새들은 무슨 경사라도 난 듯 나뭇가지위에 모여 앉아 고운 목청으로 열심히 노래 부르고 있다.
 무성한 숲을 뚫고 간신히 스며든 몇 가닥의 햇빛은 비옥한 대지위에 금싸라기처럼 널려있었다. 닭들은 한가로이 모이를 쪼다가 저들끼리 싸움이 붙었고 개들은 길가에서 교미하느라 낑낑거린다. 목털을 빳빳하게 추켜세우고 서로를 노려보다가 푸드덕 공중으로 날아오르며 접전을 벌이는 수탉들의 싸움판에는 먼지와 뾰족한 주둥이에 뽑혀 나온 털들이 난무했다. 암캐의 등에 앞다리를 걸친 수캐는 연신 신음소리를 내며 대책 없이 이리저리 끌려 다닌다.
 명진은 지금 나무숲 속에 쭈크리고 앉아있었다. 쭈크리고 앉은 채 흥미진진하게 개미들의 전쟁을 지켜보고 있었다. 두 개의 적대진영의 개미군사들은 죽은 메뚜기들을 가운데에 놓고 서로 쟁탈하려고 전쟁을 발동한 것이다. 치열한 육박전에서 어떤 개미들은 허리가 동강나거나 머리가 잘려나갔고 어떤 개미들은 다리가 부러지는 치명상을 입었지만 어느 쪽도 순순히 물러서려고 하지 않는다. 싸움이 격렬해질수록 쌍방진영에서는 지원병이 대량 투입되며 수천 마리의 피비린 혼전이 벌어졌다. 일대일의 접전이 벌어지는가 하면 수백 마리씩의 대결도 벌어졌고 한 마리 대 수십 마리의 고투도 벌어졌다. 무기도 없고 함성도 없는 전쟁이었지만 양측 다 수백 마리의 전사자가 속출했다. 처참한 시체가 싸움터를 덮었고 쓰러진 개미전사들의 시체위로 새로 투입된 지원부대가 파도처럼 연이어 돌격을 감행해온다.
 이때 들일 나가는 아버지를 배웅하러 나왔던 농부의 아들이 갑자기 명진을 불렀다.
 “아저씨, 큰일 났어요. 도와주세요. 도둑 잡아요!”
 구원을 청하는 다급한 소리에 명진은 개미의 전쟁에서 눈길을 떼고 숲 속에서 부랴부랴 뛰쳐나왔다. 농부의 아들은 초원을 가로질러 숲 속에 있는 마을을 향해 허둥지둥 달려가며 그를 향해 손짓을 하고 있었다.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햇빛은 사라지고 하늘은 시커멓게 흐려있다. 굵은 빗줄기가 줄기차게 쏟아지고 있었으며 시퍼런 번개가 어둠을 갈랐고 우렛소리가 천지를 진감했다.
 골목길과 자작나무울타리 그리고 초원과 숲 속의 마을, 마을 뒤에 희미하게 보이는 교회당(교회당인지 확실하지 않다.)의 종루……
 그것은 어디에선가 본 적이 있는 낯익은 풍경이다.
 그렇다. 『스토크 바이 네일랜드』풍경이다. 존 컨스터블의 그림에서 보았던 바로 그 풍경이었다.
 명진은 농부의 아들을 따라 마을 쪽으로 달려갔다. 빗물에 젖은 잔디에 구두 안은 삽시에 물이 차올라 철벅거렸다. 자그마한 개구리들이 놀란 듯 이리저리 퐁퐁 뛰며 달아나기에 바빠한다. 이름 모를 버섯들이 살이 통통 진 하얀 머리를 드러냈고 메뚜기들이 분주하게 풀숲 속에서 갈팡질팡 뜀박질한다.
 농부의 아들이 달려 들어간 집은 덩치는 크나 볼품없는 목조양옥이었다. 계단은 낡아서 삐거덕거렸고 출입문의 페인트칠도 퇴색하여 보기 흉하게 얼룩덜룩했다.
 문안에 들어섰으나 아이는 오간데 없고 어둠침침한 현관만이 미지의 세계로 이어진 채 그가 통과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으응 윽- 으응 윽- 나 죽어요. 으응- 윽!”
 침실 쪽에서 이상한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침대위에서 아내 영희가 종종 터트리곤 하던 신음소리와 너무나 흡사해서 지금 방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를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농부는 들로 나갔을 텐데 무슨 남자가?!
 큰일 났다고 외치던 아이의 말뜻이 이해될 듯도 싶었다. 사람도둑이 든 것이 분명하다.
 조심조심 그러나 재빨리 현관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때 어딘가로 감쪽같이 사라졌던 농부의 아들이 불쑥 나타났다.
 “아저씨. 도와주세요. 옆집 할아버지가 울 엄마를…”
 옆집 할아버지가?!
 침실문은 활짝 열려있었다. 방안에 가득 찼던 외광이 컴컴한 현관으로 조수처럼 쏟아져 나와 잠시 눈이 부셨다. 어느새 비는 그쳤고 방의 창문으로 햇빛이 홍수처럼 흘러들고 있었다. 영국풍의 소박한 가구들이 무질서하게 들어찬 방 한가운데는 이인용침대 하나가 놓여있고 그 위에서 벌거벗은 두 남녀가 서로 뒤엉킨 채 숨을 헐떡거리고 있었다. 사내의 몸뚱이는 탄력 없는 살갗이 축 처져있었지만 엄청난 거구여서 엉덩이가 한번 공중으로 들렸다가 아래로 떨어져 내릴 때마다 당금이라도 박살날 듯 침대가 삐거덕- 삐거덕- 자지러진 소리를 냈다. 사내의 배에는 물론이고 잔등에도 누런 털이 텁수룩하다.
 명진은 뭐라고 해야 할지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한 채 잠시 멍청한 눈길로 그들을 바라볼 뿐 입을 열지 못했다.
 “엄마, 일어나요.”
 그래도 농부의 아들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백주에 유부녀를 겁탈하다니요!”
 그제야 명진이도 용기를 내어 목청을 높여 소리 질었다.
 사내가 놀라며 벌떡 일어섰다. 얼굴은 주름살투성이고 뱃가죽은 아래로 축 늘어진 늙은이였지만 물건만은 놀랄 만큼 거대했다. 시커먼 야구방망이 같은 물건은 허연 액체가 발려 더구나 흉물스럽게 보였다. 할 짓은 다하고 재미도 다 본 것이다.
 명진은 입을 다물었다……

 “여보 옷 벗고 주무시세요.”
 아내가 깨우는 바람에 명진은 꿈속에서 헤어 나왔다.
 옷을 벗고 누웠으나 금방 꾼 꿈 때문에 다시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이상한 꿈이었다. 그리고 너무나 현실처럼 생동했다.
 존 컨스터블의 그림 속에서 본 풍경이 분명한데도 『스토크 바이 네일랜드』에서는 보지 못했던 전혀 엉뚱한 장면들이었다. 나무숲이 가려진 저 속에는 무엇이 있을까? 저 집안에는 누가 살고 있을까라는 평소의 의문이 꿈에 나타난 건지도 모른다.
 이 꿈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단순히 시각의 한계만을 암시하는 걸까.

 다음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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