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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무지개 그림자" 연재 19

by 8866 2008. 3. 1.

 

장편소설 "무지개 그림자

--"스토크 바이 네일랜드"와 마로니에 미완성 스케치 c   

 

연재19

 

 

4. 『스토크 바이 네일랜드』와 마로니에 미완성 스케치 C

 

 

 
 복도는 오늘따라 어두웠다.
 그런데 그 이유가 날씨가 흐리고 비가 오기 때문이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복도에는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많은 사람들이 오고갔지만 사람그림자하나 없는 듯이 적막해 보였다.
 명진은 저도 모르게 복도의 좌우를 가끔씩 두리번거렸다. 그 복도에 반드시 있어야 할 무언가가 비어있다는 느낌은 마음을 허전하게 식혔다.
 강의가 끝나고 퇴근시간이 될 때까지도 그런 허탈과 불안은 사라지지 않았다. 기다란 복도의 어딘 가에서 눈부신 광채가 반짝이며 당금이라도 현주가 나타날 것만 같은 환각에 시달려야만 했다. 똑똑 노크소리가 울리고 문이 열리고 그녀가 연구실안에 조용히 들어설 것 같기도 했다. 명진은 스스로 자신의 감정을 알 수가 없었다. 아무리 마음속을 들여다보아도 안개처럼 몽롱할 뿐이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그녀의 조심스런 접근이 두려웠다. 아니, 그녀에게 흡입되어가는 자신이 두려웠다. 명진과 현주사이에는 건너서는 안 되는 강이 있었다. 그 강물에 배를 띄우고 노를 저어오는 현주를 바라보며 아니, 더 정확히 표현하면 그녀를 향해 금지구역으로 은밀한 강행도하를 하는 자신의 행위에 두려움과 공포에 떨었다.
 그런데도 그녀를 만날 때마다 느끼곤 하는 긴장과 설렘은 너무나 유혹적이었으며, 그런 스릴은 아내와의 사이에서는 퇴색 된지가 벌써 오래 전의 일이다.
 오늘 출근하지 않았나?
 집에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걸까?
 몸이 불편하기라도 한 건지?
 온갖 추측이 머릿속에서 난무했다. 나타나도 불안하고 보이지 않아도 불안하다.
 밖에서는 그냥 비가 내리고 있었다. 오늘은 마로니에공원으로 가기가 틀렸다.
 퇴근시간도 꽤나 지나 날이 어두웠다. 집으로 가야했지만 귀가가 싫어진다. 아내의 무너진 모습이 보기 싫었고 아내의 사랑을 독차지한 음악과 말티즈가 싫었다. 그리고 스케치에 대한 아내의 집요한 의문과 철민의 느닷없는 질문도 부담스러웠다. 이들에게서 소외된 자신의 무의미함을 확인해야만 하는 시간들이 싫었다.
 그렇게 멍하니 앉아 추상석에 초점 잃은 눈길을 던진 채 굳어있었다. 이제 더 이상 이 방안의 거미며 바퀴벌레며 개미며 벽지의 무늬에 신경 쓸 여력조차 없었다. 이 추상석을 맡긴 현주의 의도는 알 것 같기도 하고 아리송하기도 했다. 그녀는 무언가를 명진에게 묻고 있었지만 그에겐 준비된 정답이 없었다.
 추상석도 볼수록 그 형태가 몽롱해진다. 보이는데도 아무것도 볼 수 없다는 고민은 명진의 두통을 발작시켰을 뿐이다.
 두통약을 복용한 뒤 추상석을 테이블위에서 내려 구석에 방치하려고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전등에서 흘러내린 불빛은 방안의 여기저기에 흥건하게 묻어있었지만 엷은 종이조각 하나에도 차단되어 기진한 듯 확장을 포기하고 어둠에게 투항을 선포한다.
 추상석은 오늘따라 무게가 더 불어난 듯싶다. 이것을 내리우고 존 컨스터블의 그림 『스토크 바이 네일랜드』를 보고 싶었다. 그 그림은 추상석보다는 이미지들이 명확했다. 그러나 좀더 면밀한 관찰로 볼 수 있는데도 보지 못한, 소외된 이미지들을 발견하고 싶었다. 이제 그 욕망은 물리칠 수 없는 강력한 의지력을 촉발시켰다.
 바로 그때 기적 같이, 굳게 닫혔던, 영원히 고정된 듯싶던 출입문에서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귀에 익은 노크소리에 명진은 흠칫 놀라며 추성 석을 도로 테이블위에 내려놓고 안절부절못했다.
 “들어가도 되겠죠?”
 “네.”
 그것은 거의 공식화된 대화내용이 되었다.
 문이 열렸고 방안은 삽시에 눈부시게 밝아졌다. 그녀가 비옥하게 거느린 광채는 흐린 날에도, 어두운 밤에도 빛을 잃을 줄 모른다.
 “오늘은 마로니에공원에 안가셨어요?”
 “비가 와서요.”
 소파위에 널린 책들을 치우고 자리를 비워주었다.
 그러나 현주는 소파에 앉지 않았다. 커피 컵만 명진에게 건네준다. 컵에서는 얼음조각에서 내쏘는 냉기가 싸늘했다. 비가 와서 방안의 온도가 하강되었지만 명진은 갑자기 더워났다.
 “좋은 이름을 생각하셨어요?”
 “아직은……”
 “교수님께서는 이렇게 눕혀놓은 모습이 더 보기 좋으신가보네요.”
 “수직구조이던 걸 이렇게 수평구조로 잡으니 수석의 전체흐름이 안정감과 평온함을 주고 여유 있고 친절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네요. 어찌 보면 소매물도섬 같기도 하고요.”
 느닷없는 비유에 명진은 가슴이 꿈틀했다. 소매물도의 희미한 기억은 무언가 충격적인 사연을 말해주는 듯싶었지만 그 또한 윤곽뿐이었다.
 “이렇게 세우시면 어떠세요. 부담스럽고 천박해 보이나요?”
 “글쎄요.”
 현주가 수석을 일으켜 세우는 모습은 마치도 소매물도를 뒤집어엎는 듯한 착시현상을 일으켰다. 그녀는 7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소매물도의 모습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의욕과 의지적 상향감과 확실함이 있잖아요.”
 “어쩐지 불안해 보이는군요. 너무 의욕적이고 진취적이어서.”
 “안 그러면 거꾸로 뒤집어볼 수도 있잖아요. 쏟아져 내리는 폭포수 같잖아요. 율동과 박력과 파워가 느껴지고요.”
 “이 수석에 앞뒤와 위아래가 있나요? 아직 이름도 없잖습니까.”
 “그러게요. 전 교수님께서 안정감을 선호하시는 취향 때문에 그런 시선이 볼 수 있는 측면만 보시고 다른 측면은 보시지 못하실까봐서요. 공연한 걱정이지만.”
 커피를 마시는 그녀의 동작은 우아했다. 그처럼 부담 없이 동생처럼 대할 수 있던 옛날의 모습은 그림자조차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당돌함만은 여전하다.
 “누구도 모든 것을 죄다 볼 수는 없겠지요. 사람마다 똑같은 것을 볼 수도 없고요. 많건 적건 시선은 욕망, 취지, 정서 같은 것의 제약을 받기 마련이고요.”
 이 말을 하면서 명진은 저도 모르게 소매물도에서의 그 비 오던 날 밤을 기억에 떠올렸다.
 “그러니까 감상이란 건 불확실한 이미지속에서 확실한 이미지를 탐구하는 과정이라는 걸 정지용 시의 연구를 통해 깨달았어요.”
 현주는 국문학박사답게 전문지식을 슬쩍 화제 속에 끌어들이면서도 표정은 담담하다. 자기가 상대하고 있는 사람이 국문학과교수라는 사실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 표정이다.
 “그러나 감상은 작품 속에 제공된 확실한 이미지정보에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잖습니까.”
 현주의 견해가 자신의 생각과 유사하다는 사실에 놀라면서도, 그녀의 주장에 동감하면서도 교수의 체면과 자존심을 망각할 수는 없었다. 그녀의 사유코스를 따라 대책 없는 맹종을 할 수는 없었다.
 “작품에 제공된 이미지정보가 정말 확실한걸까요? 그와는 반대로 작품 속에 제공된 이미지정보가 불완전하기 때문에 작품은 비로소 독자참여공간과 감상공간이 제공되고 가치가 부여되는 건지도 모르잖아요.”
 명진은 존 컨스터블과 모네의 미술작품을 연상했고 자신의 미완성스케치를 머릿속에 떠올렸다. 작품 속에 명시된 이미지들이 화가의 의도적 이미지분리에 의해 불완전한 모습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명진이도 알고 있었다.
 누구도 과거에 대해서 말한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대화 속에는 과거와 현재는 물론이고 미래까지 포괄한 모든 내용이 내포되어있었다.
 “언제 시간이 있으시면 저희 집에 모시고 싶어요. 응해 주실 거죠?”
 “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만 하는 일없이 바빠서.”
 두 사람만의 시간이 너무 오래 지났고 그 때문에 주위의 눈길에 의혹이 실렸을지도 모른다는 예감에 명진의 마음은 초조해졌다.
 “한가하실 때 모실게요.”
 현주는 어느새 그의 속마음을 읽은 듯 조용히 몸을 돌이켜 연구실에서 나갔다. 방안에 가득 찼던 광채도 그녀를 따라 안개처럼 복도로 빠져나갔다.
 빛을 거느리고 다니는 여자!
 아내에게도 언젠가 저런 빛이 있었던가. 인젠 아리송하기만하다.
 빗물은 아스팔트 위를 굴러 하수구로 흘러들었다. 윈도와이퍼가 쉼 없이 작동했지만, 헤드라이트를 비춘 상태였지만 하늘이 흐린데다 어스름과 굵은 빗줄기까지 시야를 가려 빗물에 잠긴 도로표지와 신호등을 보는데 퍽이나 신경을 써야 했다.
 아파트의 주위경관도 어둠과 빗줄기속에 묻혀 흐리터분했다. 가로등이 거느린 불빛은 너무 빈약해 자기주변이나 겨우 비칠 따름이다. 정원수들은 비속에 웅크린 채 추위에 떨고 있었고 화단의 개미들과 나비, 무당벌레들도 보이지 않았다.

 

다음 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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