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무지개 그림자
--홍현주 코너
연재 17
그러나 현주는 이미 죽었고 나는 현주가 아니다. 그러니 그들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그 번 사건으로 현주는 갑자기 어른이 된 기분이었다. 말수도 적어졌고 얼굴에서 웃음도 사라졌으며 자세에 무게도 실렸다. 김 교수가 그녀를 거부한 이유가 다름 아닌 그녀의 순진함과 천진난만함이 아니었던가. 그리고 이유는 또 있다. 세상은 그녀를 속였고 그녀는 세상에게 순진함과 천진난만함 때문에 속은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속지는 않을 것이다. 세상의 미소와 달콤한 말은 더 이상 유혹의 대상이 아닌 의혹의 대상으로 변했다.
그래서 선택한 길이 학문연구였다. 모든 정력을 학문에 쏟아 부었다. 그 대가로 석사, 박사학위도 무난히 딸 수 있었고 명문대학 강사자리까지 획득하게 되었던 것이다.
아주 우연하게 쇼핑가에서나 거리에서 영희와 김 교수를 문득 마주친 적이 몇 번 있었다. 그러나 대체로 그녀가 일방적으로 그들을 발견할 경우엔 눈에 띠지 않게 피신하군 했다. 영희와 김 교수가 나란히 걸어가는 모습을 보는 그녀의 가슴은 아렸다. 영문 없이 눈앞이 뽀얗게 흐려지기도 했었다.
몇 번인가 영희와 정면으로 마주친 적도 있었다. 피할 겨를도 없었다.
두 사람은 서로 마주볼 뿐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이전 같으면 현주가 먼저 기뻐서 소리 지르며 언니의 목에 동동 매달렸을 것이다. 그러나 현주는 미동하던 영희를 당황하게 했다.
“현주야. 오래간만이다.”
“나 지금 바빠. 나중에 봐.”
그렇게 두 마디가 대화의 전부였다. 솔직히 그녀는 “현주야. 정말 미안해”하는 사과의 말을 기대했었다. 그러나 영희는 그런 섣부른 사과로 자신의 선택을 부정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나 생남했어. 언제 놀러와.”
두 번째로 만났을 때 영희가 한 말이었다.
그러나 현주는 응대한마디 못하고 그녀의 곁을 떠났다. 어쩌면 그녀가 낳아줄 번했던 김 교수의 아이었다. 그날은 영문 없이 영희가 측은해보였다. 아기는 사랑의 결실이라고 하지만 그 때문에 여자는 사랑을 남편에게서 분할하여 자식에게 나누어주어야 하는 가련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현주와 영희의 관계는 그렇게 의자매사이면서도 아니고 지교이면서도 연적인, 불확실한 관계를 정리 없이 두루뭉술하게 지속해왔다.
김 교수는 이전과 조금도 다름없이 그녀를 반갑게 대했다.
“현주야. 왜 요즘은 전혀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 거니? 놀라도 오지 않고 전화도 주지 않고. 결혼식에도 참석하지 않았잖아. 날 오빠라면서…”
“공부가 바빠서요.”
적당하게 에둘러대긴 했지만 당황해하거나 경망한 행동 같은 건 자제했다. 하루아침에 돌변한 그녀의 무게 있고 담담한 언행에 명진은 의아한 눈길을 보내군 했다.
“현주. 너 갑자기 어른이 된 것 같다. 내가 혹 사람을 잘못 본 건 아니겠지?”
“이만 실례하겠어요. 일이 바빠서…”
깍듯이 예의를 지키고는 자리를 뜨곤 했다.
나중에 그녀가 박사공부를 할 때는 정말 거리를 산책할 시간적 여유도 없었다. 종일 대학도서관에 박혀 학문연구에만 전념했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속에서도 멀어진다고 만남이 뜸해지자 그들의 현주에 대한 관심도 차츰 멀어져갔다. 그러나 그럴수록, 현주가 기를 쓰고 학문에 매달릴수록 이상하게도 명진의 모습은 그녀의 기억 속에 깊숙이 뿌리를 내리며 사라지지 않았다. 시도 때도 없이 기억 속에 출몰하여 그녀를 괴롭히는 그 모습을 지워보려고, 그럴 때마다 파도처럼 밀려드는 슬픔과 고독을 해소해보려고 현주는 스스로 고달픈 탐석을 선택했다. 주말이 되면, 방학만 되면 배낭을 둘러메고 전국의 산과 계곡을 발바닥에 물집이 생길 때까지 샅샅이 훑고 다녔다. 강원도의 옥계천, 평창강에서부터 제주도의 해안선에 이르기까지 지리산, 수석산에서 거제도, 완도 섬에 이르기까지 그녀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라곤 없다. 그녀의 집에는 어느새 전국각지에서 채석한 수석들로 넘쳐났고 한두 번 전람회에 전시까지 하여 호평도 받았었다.
그러나 그런 고달픈 탐석과 양석과정도, 정지용 시에 대한 힘든 저작집필도 머릿속에서 김 교수의 존재를 축출하지는 못했다. 그 모습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더 깊숙이 가슴속에 뿌리를 내렸고 생동한 그림을 그려나갔다.
그녀스스로도 자신이 왜 하필이면 수많은 대학 중에 김 교수가 근무하는 S대에 강사로 취직했는지 모른다.
대학에 출근하던 첫날, 그녀의 가슴은 저도 모르게 소녀처럼 설레었다. 소매물도에서 처음으로 김 교수를 만났던 일이 상기되며 목소리까지 떨렸다.
그러나 그녀는 자제해야만 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자제하려고 애썼다. 더 이상 그에게 천진난만하고 단순한 소녀의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언젠가 아니, 영희가 그녀를 제치고 김 교수의 결혼상대자로 선택된 건 바로 그녀가 이성으로 보여 졌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영희에 비해 현주는 명진에게 이성보다는 동생으로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보세요. 저도 여자예요!”
그동안 닦고 연마한 자신의 성숙과 세련과 교양과 무게를 그의 앞에서 과시하고 싶었다. 설사 그것이 때늦은, 어리석은 짓에 불과하고 오기일지라도.
그런 시도는 금방 효력을 나타냈다. 김 교수의 눈빛은 경악으로 반짝였고 여대생시절에 부르던 습관적 반말이 갑자기 경어로 바뀌었던 것이다.
“홍 박사. 오랜만이네요. 여기서 이렇게 만나리라고는……”
말까지 더듬거렸다.
그녀도 더 이상 오빠가 아닌 대등한 이성의 자격으로 「교수님」이라고 불렀다.
눈에서 보이지 않으면 멀어지는 것처럼 눈에 보이면 가까워지는 것일까?
현주는 거의 날마다 김 교수를 보게 되었다. 그와의 만남이 잦아질수록 그에 대한 애틋한 감정은 분명한 윤곽을 잡아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실련의, 절망의 폐허에서 피어나는 한 떨기의 꽃송이임에 틀림없었다. 그녀의 가슴속에서 명진의 존재를 지우려고 애써도 지울 수 없었던 것은 그를 볼 수 없었던 이유 때문에 점점 희미해져 가던, 불완전한 모습과 불확실한 기억에 대한 불안에서 해탈하려는 완벽함의 추구와 집념이었다는 것을 인제야 비로소 깨달았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퇴색하는 기억을 붙잡고 늘어지며 그 완벽함을 보존하려고, 그것을 잊으려고 했던 것이다. 그것은 이른바 심리적 아이러니에 불과했을 따름이었다.
이제는 하루라도 못 보면 무엇을 잊어버리기라도 한 듯 마음이 허전해진다. 그래서 그녀는 온갖 구실을 만들어 가지고 먼빛으로라도, 잠깐이라도 김 교수의 얼굴을 보고서야 마음이 편해지는 것이 일상처럼 습관이 되어버렸다.
다음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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