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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무지개 그림자 연재 15

by 8866 2008. 1. 25.

 

 장편소설 무지개 그림자

 --"스토크 바이 네일랜드"와 마로니에 미완성 스케치 B

 

 

 연재 15

 

 그러나 박 형사는 어느새 패트롤카에 그 비대한 몸뚱이를 구겨 넣느라 낑낑거리고 있었다.
 그걸 왜 나한테 알려주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아무리 무뚝뚝하고 땀만 뻘뻘 흘려도 강력계형사는 강력계형사다 싶었다. 그는 심문과정 내내 옆에 앉아있었지만 그 여자의 집이 중림동 달동네에 있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없다. 그 사이 그가 했던 생각들은 형사와 혐의범 사이에 오고갔던 대화내용을 간단없이 배제시켰던 것이다. 아내와 교향곡 그리고 말티즈, 존 컨스터블과 그의 그림 『스토크 바이 네일랜드』 그리고 모네와 현주 씨와 그녀가 남기고 간 추상석…
 혐의범의 홀어머니가 중림동 달동네에 살고 있으니 나더러 어쩌라는 건가. 형사를 대신하여 증인이기를 초월하여 중림동 달동네에 탐문수사나 잠복수사라도 나가라는 뜻인가.
 냉담할 뿐만 아니라 싱겁기까지 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번지라는군요.”
 패트롤카가 그의 옆을 스칠 때 형사반장이 시창밖에 고개를 비주룩이 내밀고 한마디 던지 지나간다. 그 얼굴은 땀발이 질벅할 뿐 예나 다름없이 무표정했다. 무슨 뜻인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거듭 번지수까지 알려주는 걸 보면 혹시 담당형사의 뜻이 아닌 서혜란의 부탁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제가 죽였어요.”하고 선선히 승인하던 서혜란의 모습이 하나의 의문부호로 떠올랐다.
 “당신 분명 잘못 본거야. 가서 확인해보라고.”
 박 형사의 표정이 그렇게 말하는 듯도 싶었다.
 아니야. 난 확신할 수 있어. 틀림없이 그 여자야.
 그러나 그는 저도 모르게 차를 운전하여 중림동방향으로 운행시키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아무래도 무언가가 석연치 않다. 중림동 달동네에 가면 그 불투명함이 석연해질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감이 지금 그의 의지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것은 완벽함과 확실성을 지향하는 불확실함과 모호함의 끈질긴 추구와 욕구였다. 불확실함이 없었다면 확실함을 지향하는 중림동 행을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또한 그 자체로 호기심이기도 했다. 존 컨스터블과 모네의 작품 속에 병존하는 불확실함과 모호함이 그의 호기심을 유발했던 것처럼, 현주의 추상석이 그의 흥미를 유발했던 것처럼. 인간은 그야말로 영원히 불완전함 속에 존재하면서도 끊임없이 완벽함을 추구하는, 방황하는 존재이다.
 명진은 자신이 본 것이 『플라톤의 동굴』속의 『쇠사슬에 묶인』사람이 본 허상인지도 모른다는 엉뚱한 생각을 건졌다. 그렇다면 담당형사는 『에로스』의 충동으로 동굴 밖의 진실의 세계를 관망한 철학자라도 된단 말인가. 『감각의 복합』일뿐인 마하의 객관존재가 의미하는 영역은 과연 『플라톤의 동굴』속의 인위적 가상에까지 미치지 못하는 것일까?
 그가 도착한 곳은 달동네라기보다는 판자동네요, 빈민굴이었다. 허물어지고 찌그러들고 금이 간, 볼품없이 허름한 한옥들은 원래의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초라하고 꾀죄죄했다. 가파르고 꼬불꼬불한 골목 양옆으로 게딱지처럼 다닥다닥 붙어있는 천태만상의 구조물들은 그 속에 사람이 살고 있을 거라는 예측조차 불가능하게 했다. 그러나 열려있는 쪽문들과 요란스레 흘러나오는 TV수상기음향 그리고 골목길에 내걸린 세탁물들은 이곳이 폐허가 아니라 주민주거지역이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었다.
 겨우 번지를 찾아 이른 곳은 집이라기보다는 무너지기 직전의 콘크리트더미요 그 사이로 비좁게 뚫린 동굴이었다.
 “계십니까?”
 주인을 불러보았으나 대답이 없다. 문은 열려있는데 어딜 나가셨나?
 문가에 다가가 집안을 기웃이 들여다보았다. 저기 어두컴컴한 온돌구석에 목침을 베고 누워있던 여인이 부스럭부스럭 상체를 일으키더니 문가에 나타난 불청객을 비주룩이 내다본다.
 “누구예요?”
 “여기가 서혜란 씨 댁이 맞지요?”
 “맞아요. 무슨 일로?”
 “들어가도 괜찮겠습니까?”
 “들어오세요. 누추하지만.”
 찌그러든 출입문은 허리를 굽히지 않으면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방안에 들어서자 아직은 해가 지기 전인데도 동굴 안처럼 어둑하다. 손바닥만한 환기창으로 흘러드는 외광을 빌어 방안의 모습을 간신히 분간해볼 수 있었다. 고약한 냄새가 코를 찔렀고 불가마속처럼 후끈한 열기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여인의 얼굴은 장기투병환자들에게서만 볼 수 있는 누렇게 뜬 모습이다. 서혜란의 모친이라니 40대 여인일 텐데 병마에 타고 구겨지고 녹 쓴 얼굴만 봐서는 70고령의 할머니 같아 보인다.
 “몸이 불편해서 운신이 힘들어요. 거기 아무데나 앉으세요.”
 앉은자리에서 팔만 허우적거린다. 말할 맥조차 없어보였다.
 “우리 혜란이와 아는 사인가요?”
 “모르는 사입니다만 여쭐 말씀이 있어서.”
 “그런데 혜란인 왜 안 오구.”
 “그게 저……”
 “왜요. 우리 혜란이한테 무슨 모진 일이라도 생겼나요?”
 “네. 범죄사건에 연루되어 경찰서에……”
 째지게 가난한 집 살림과 꼬질꼬질 시들어가는 여인을 보니 혜란이 없이는 하루도 연명하기 어려운 이 가정에 불행을 안겨준 것만 같아 송구스럽기까지 했다. 한 남자가 죽었으면 됐지 이제 또 혜란이를 죽이고 이 여인까지 죽이게 되지 않았는가.
 “뭐라고요? 우리 혜란이가 경찰서엘요! 얘가 또 단속에 걸렸나…… 그나저나 사람은 제대로 본거에요? 우리 혜란의 눈빛은 보석 같은데.”
 보석 같은 눈빛이라는 여인의 느닷없는 유식한 비유표현에 명진은 언뜻 그 모습이 떠오르지 않아 어리둥절해졌다. 여인이 자신의 구질구질한 모습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우아한 수사를 구사하고 있다는 사실에도 놀랐지만 그보다도 그녀가 던진 비유의 모호성이 그를 파악불능의 상황에 끌어들여 당황하게 만들었다.
 엉뚱하게도 소매물도에서 보았던 현주의 눈매가 떠오른다. 그때 명진이 본 현주의 눈빛은 보석 같았다.
 그런데 전혀 다른 두 사물이 비유될 수 있는 가능성은 다름 아닌 유사성 때문이다. 즉 방금 여인이 표현한 「눈」과 「보석」이라는 두 사물의 유사현상과 같이 말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비유를 한 사물의 모호함이나 불확실함을 다른 사물의 생동함이나 확실함을 빌어 더 완벽하게 표현하는 수사로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여인의 말을 듣는 순간 명진은 그와 정반대의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첫째: 「보석」의 대체에 의해 「눈」의 이미지는 소외되었다. 즉 모호화되었다.
 둘째: 「보석」에 비유된 「눈」의 의미가 다시 제시되는 순간 이번에는 또「눈」의 대체에 의해 「보석」의 이미지는 소외된다. 즉 모호화된다.
 셋째: 차시선, 주시선의 미달선 또는 초월선에 포착된 「눈」의 기타 특징들은 모호화되었거나  불확실화되었다.
 넷째: 차시선, 주시선의 미달선, 초월선에 포착된 「보석」의 기타 특징들은 모호화 또는 불확실화되었다.
 다섯째: 형태의 차이 즉 「눈」과 「보석」의 크기와 모양, 색깔 등의 형태는「눈」과 「보석」을 특징짓는 이미지이지만 무시되고 있으며 빛에만 초점을 맞춘 주시선에서 소외되어 모호화 내지는 불확실화되고 있다.
 여섯째: 성질의 차이 즉 「눈」은 유기체이고 「보석」은 광물인데 이런 차이가 무시되고 있다.
 일곱째: 빛의 강도의 차이 즉 「눈」빛과 「보석」빛은 차이가 있지만 무시되고 있다.
 여덟째: 특징의 차이 즉 「눈」은 불투명체이지만 「보석」은 투명체이다.
 아홉째: 정서의 차이 즉 「눈」빛은 정서에 따라 빛을 잃거나 더욱 밝게 빛난다. 그러나 「보석」은 그런 경우가 없다.
 결국 비유를 통해 도달한 지점은 확실성의 영역이 아니라 모호와 불확실의 연장이고 대체이고 확대일 뿐이다. 비유의 영역이 과장될수록 모호함과 불확실함도 그와 정비례로 확대된다.
 “호수같이 그윽한 눈빛”이라고 비유의 이미지를 확대 과장시켜 보자. 이 경우 주시선에 포착된 유사성으로서의 빛의 강도는 보석에서 호수에로 확대된다. 그러나「눈」과 「보석」은 고체라는 동일성을 가지는 반면 호수는 액체이므로 그 모호성이 짙어진다. 「별빛 같은 눈빛」이라는 비유에서는 「별」은 「보석」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의 크기를 가지고 있는 천체임에도 불구하고 빛을 발산한다는 유사성 때문에 비교가 가능하지만 별의 크기, 성분, 모양 등등의 특징 때문에 모호성과 불확실함은 더욱 커질 뿐이다.
 「보석」의 찬란한 빛을 떠올리면 「눈」빛이 사라지고 「눈」빛을 떠오르면 「보석」의 광채가 사라지고……
 이런 현상은 은유나 환유, 상징에서도 다를 바 없다는 사실에 명진은 경악했다. 결국 모든 수사학은 감각적 이미지를 통한 모호와 불확실의 연장이고 대체이며 확대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여인의 표현이 던져준 충격과 의미는 그렇듯 거창했다.
 뜻하지 않게도 딸의 불행한 사연을 전해들은 여인은 명진의 말을 끝까지 들을 생각도 하지 않고 억장이 무너지는 듯 방성통곡부터 했다.
 “걔가 사람을 죽이다니. 그 말을 누가 믿어요. 우리 혜란인 그런 모진 애가 아니에요. 선생님께서 잘못 보신 거라고요. 세상에 비슷하게 생긴 사람이 왜 없겠어요.”
 장황한 넋두리를 늘어놓으며 딸의 불행을 노골적으로 명진의 탓으로 돌리며 원망하는 통에 그는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명진은 여인의 집에서 나와서야 셔츠가 땀에 흥건히 젖어있음을 발견했다.
 정말이지 내가 사람을 잘못 본 건 아닐까. 박 형사가 나에게 이곳을 알려준 것도 여인의 이 말을 들으라고 일부러 보낸 것은 아닌지.
 가파른 골목을 내려와 차를 댄 곳까지 걸어가면서 그는 자신에 대한 확신과 불신의 끊임없는 공방전의 갈등에 시달렸다.
 그러나 차를 빼어 거리에 나섰을 때는 다시 평온한 마음으로 복귀했다.
 틀림없어. 난 내 눈을 믿어.
 아내는 예나 다름없이 교향곡음악을 틀어놓고 말티즈훈련에 여념이 없다. 명진이 오늘 일어난 사건을 들려주었을 때 아내의 대답 역시 중림동 여인과 같은 것이었다.
 “당신이 잘못 보았을 수도 있잖아요.”
 “무슨 소리야. 안경을 벗으면 몰라도 안경을 낀 상태에서 내 시력은 정상이야. 그리고 난 아마추어이긴 하지만 화가란 말이야. 사람의 특징을 관찰하는 데는 누구보다 낫거든.”
 “그런 분이 스케치에 현주를 그려놓고서도 누군지 모른다고 어리둥절한 말씀만 하세요. 날마다 얼굴을 맞대고 있는 사람도 제대로 보지 못하시는 분이 우연히 한번 본 사람의 얼굴을 어쩌면 그렇게 똑바로 기억하실 수 있어요.”
 명진은 정곡을 찌르는 아내의 반론에 입을 딱 벌리고 있었다.
 왜 모두들 날 믿지 않는 거지.
 “그림에 그려진 거잖아. 표상에 따른 거라면 몰라도.”
 “사진이라도 모르겠는데 더구나 그림을 어떻게 확신해요.”
 “그러는 당신은 왜 그림 속의 여자가 현주라고 단언하는 거지?”
 “그건 오래전부터 잘 아는 사람이니까 그렇죠. 그럼 그 여자가 현주가 분명하다는 말씀이신가요?”
  화제가 현주에게로 집중되자 쏟아질 추궁이 두려워진 명진은 거실소파에서 일어나 서재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다음주에 계속 "홍현주 코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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