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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무지개 그림자 연재 13

by 8866 2008. 1. 11.

 

장편소설 무지개 그림자

--"스토크바이 네일랜드"와 마로니에 미완성 스케치 B

 

연재 13

 

 

3. 『스토크 바이 네일랜드』와 마로니에 미완성 스케치 B

 

 


 주차직원은 땅속에서 솟아난 듯 어디선가 불쑥 나타났다. 벌쭉 웃었고 손목시계를 보고 주차 증에 시간을 기입한 후 윈도와이퍼에 끼워놓는다.
 노인의 앞이 한대는 빠졌고 한대는 허리가 부러져있었다. 거미줄 같은 주름살이 면부를 빈틈없이 덮었고 노르무레한 수염은 꺼칠했다. 셔츠 단추 하나가 떨어져나가 깃이 열린 주글주글한 앞가슴에 땀발이 번들거렸고 왼손 새끼손가락 한마디가 잘려있었다. 게다가 관절이 심한 듯 다리까지 절룩거린다.
 벌써 거의 보름째 그를 보아왔지만 이러한 것들은 오늘에야 발견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그동안 주차직원과 명진의 사이는 요금을 주고받는 지극히 단순한 관계였을 뿐이다. 요금 계산을 떠난 그 어떤 것도, 이를테면 인격이나 성격, 경륜 같은 건 관심사 밖의 것들이었다. 그런 연유로 거의 날마다 노인을 보면서도 이런 세절들을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러한 세절들이 아무런 의미도 없어서 무시한 것은 결코 아니다. 명진은 이런 사소한 현상들에서 노인의 신상에 관한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노인은 부러지고 빠진 이를 해 넣을만한 경제적보장도 없는 가난한 사람이라는 사실과 셔츠단추를 달아줄 마누라마저 없는 홀아비라는 사실, 수염을 깎을 정신적여유도 없고 주름살을 미루어 고된 중노동에 기력이 쇠진한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잘려나간 그의 새끼손가락에서 노인의 직업이 프레스공이나 금속절삭공이였을 거라는 추측까지도 가능하다.
 사실 이러한 추리는 영국작가 코난도일의 『홈스탐험기』에서도 보여 지고 있다.
 보면서도 보지 못하는 것, 그것은 존 컨스터블의 그림 『스토크 바이 네일랜드』에서도 확인된 것이다. 숲 속에 가려진 것, 집 뒤에 가려진 것과 같은 대상은 물론이고 볼 수 있는 것들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대상이 그의 그림에서 소외되거나 모호하게 나타나고 있다.
 명진은 골목을 에돌아 마로니에공원 안으로 들어섰다. 무더위 때문인지 그늘을 찾아든 시민들이 오늘따라 유난히 많았다. 사고가 발생했던 얼마 전의 일을 떠올리며 정체모를 미모의 여인이 앉았던 벤치에 엉덩이를 부렸다. 벌써 그녀의 모습은 인상 속에서 희미하게 퇴색되어있었다.
 스케치북을 펼쳤다. 그날 완성하지 못한 스케치가 번져 진다. 여전히 모호한 화면뿐이다.
 인상주의화가 모네는 터너와 컨스터블의 작품에 각별한 관심을 돌렸다고 한다. 어쩌면 그도 컨스터블의 『스토크 바이 네일랜드』라는 그림에, 그 그림의 모호함과 불확실함에 관심을 가졌던 건 아닐까?
 모네의 그림은 컨스터블의 그림보다 더구나 모호하고 불확실하다. 그 때문에 모네는 당시의 비평가들로부터 맹렬한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그의 그림 『인상, 해돋이』를 보고 사람들은 도대체 뭘 그렸냐? 벽지도안도 이보다는 완성도가 높을 거라며 냉소와 비난을 퍼부었다. 윤곽의 어렴풋함, 미완성의 기괴함은 되는대로, 붓 가는 대로, 생각나는 대로 그린 엉터리 스케치차원의 그림이라고 냉대 받았다. 실제로 모네의 작품에서 이러한 어렴풋함과 미완성의 현상들은 『흐린 날씨의 워털루다리』, 『국회의사당의 석양』, 『루앙대성당의 정문, 아침햇살, 청색의 조화』들에서 생동하게 나타나고 있다. 소재에 대한 그의 관심은 사물의 모양보다는 빛의 변화에 국한된 것이다. 그가 본 것은 빛과 빛의 변화에 의한 색채의 모양이었다.
 다시 말해 모네는 시각의 기능적 한계를 솔직히 받아들였고 시각기능이 포착한 것만큼만 자신의 작품에 재현했던 것이다. 그의 이러한 표현법을 가리켜 스테판 게강은 “자연을 우연히 재발견한 새로운 시선”이라고 지적하고 있다.「재발견」이라는 말은 욕망의 제약을 받는 주시선主視線에서 소외되었던 대상들에 대한「발견」을 의미한다. 그는 동시에 지배적 위치를 차지한 주시선의 거부와 이동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모네가 평생 추구한 것은 『순간성』이였다.
 모네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실제로 소재를 처음 보았을 때가 가장 진실하며 가장 편견이 배제된 때입니다.”
 인간의 시각이 포착하는 건 엄격한 의미에서「순간」일뿐이다. 시각의 대상은 고정되어있지 않고 항상 변화하기 때문에 순간 속에서만 존재한다. 그러한 이유는 햇빛, 계절, 날씨변화, 원근거리, 사물자체의 운동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순간만이 그런 대로 대상을 비교적 정확하게 관찰할 수 있다. 순간은 변화하는 대상을 최저한도의 정지 속에서 포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순간을 떠난, 대상을 정지 속에서 포착하지 않고서는 사물의 모습을 정확하게 관찰할 수 없다. 달리는 열차, 날아가는 화살을 인간의 시각으로는 정확한 포착이 불가능하다. 조금이라도 확실하게 포착하려면 달리는 기차의 어느 한 부분에 아주 짧은 시간일망정 시선을 고정시키는 것으로서 대상의 운동을 상대적으로 정지시킬 때에만 구체적 파악이 가능해진다. 그러나 그 역시「순간」일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모네는 “르아브르의 실제 풍경을 재현할 수 없었다”고 말한 것이다. 순간포착 즉「인상」은 또한 상황과 사건, 현상의 세계에 대해 완벽하게 형성된 파악이 아니며 형태가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이다. (이폴리트 텐) 그런 대로 시각이 볼 수 있는 건 순간뿐이며 「순간」만이 대상을 정확하게 인지할 수 있다.
 자세한 관찰이라 함은 기실 서로 부동한 순간의 반복과 그렇게 반복된 차이적인 순간들의 누적에 불과하다. 시각은 변화 때문에 (모네에게서는 빛의 변화 때문에) 부동한 시간 속에서 동일한 모습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세한 관찰은「순간」에 비해 도리어 대상의 진실한 모습이 아닐 수도 있다.
 모네는「순간성」을 추구함으로써 무심중에 주시선의 기능을 거부하고 소재적인 실체의 이미지를 완전함과 확실함과 구체적통일성에서 분리해내고 있다.「순간성」을 주장할 때 이러한 현상은 불가피한 것이다. 낭만주의나 현실주의화가들처럼 내시각內視覺의 결합에 의한 보완작업을 거쳐 세부화가 되면「순간성」은 곧바로 의미를 상실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 때문에 모네는 현장스케치를 고집하며 내시각의 보완을 극력 거부하고 있다.
 모네의「순간성」은 이로써 이미지의 1차적 분리 즉 확실함과 완전함 그리고 세부화를 거부하고 그들을 자신의 이미지에서 소외시킨다. 그 부분은 감상자의 몫으로 남겨진다.
 사물은 형태, 양감, 질감, 색채 등 질료적 요소들로 합성된 통일체이다. 그러나 모네는 주시선의 기능을 색채포착에만 국한시키고 기타 요소들은 차시선次視線 또는 주시선의 미달선未達線, 초월선超越線의 불확실한 영역 속에 추방하고 있다. 물론 화가에 의해 배제된 이런 이미지들은 감상자의 개인적 경험의 보완으로 복원이 가능해진다. 그런데 정작 화가가 감상자에게 제공하는 진정한 메시지는 그보다는 구체적인 색채가 환기시키는 몽롱한, 그러나 강열한 이미지와 분위기에 은폐시키고 있다. 색채는 화가가 은밀하게 설정한 은폐된 이미지이며 감상자가 감상을 통해 그림의 의미를 재창조할 수 있도록 마련해준 참여공간이기도 하다. 감상자는 모네의 그림을 감상할 때 숨겨진 의미를 발굴하려면 그림에 제공된 실체를 따라 갈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화가가 고심하여 설정한 색채이미지의 다리를 건너가야만 보물섬에 도달할 수 있다. 그것은 화가가 “실체와 대상의 질료적 형태를 낱낱이 분해하여 색채들의 대비로 환원시켰기 때문”이다.
 여기서 모네의 제2차 이미지분리 즉 사물의 형태와(실체) 색채의 분리가 완성된다. 사물은 그 자체의 표현을 위해서가 아니라 색채의 표현을 위한만큼 필요할 뿐이다.
 모네는 시각이 모든 것을 죄다 확실하게 볼 수 있다는 리얼리즘이나 낭만주의의 관점을 의심하고 있다.
 순간성은 필연적으로 모호성과 불확실성과 이어진다. 시선이 순간에 볼 수 있는 건 주시선(욕망에 의해 선택되고 지배받는 시선, 초점이 맞춰진 시선)에 포착된 확실한 부분과 차시선(주시선에서 소외되었지만 시각권내에 포괄된 시선)에 포착된 불확실한 대상이다. 그런데 주시선도 초점 이내와 이외의 미달선, 초월선에 포착된 대상은 역시 모호하고 불확실하다. 이를테면 마로니에공원스케치에서 미모의 아가씨와 남자는 주시선에 포착된 비교적 확실한 대상이고 그 밖의 현상들은 차시선 또는 주시선의 미달선과 초월선에 포착된 대상들인 것처럼 말이다.
 주시선에서 소외된 대상이야말로 보면서도 보지 못하는 현상들이다.
 예술작품의 미적 가치와 의미는 다름 아닌 이 모호성과 불확실성에 있다. 누군가 마로니에  공원을 실물과 조금도 다름없이 화폭에 옮겨놓았다면(그럴 수도 없지만) 그것은 이미 예술이 아니라 실물 그 자체일 뿐이다. 유사하면서도 다른, 그 모호함과 불확실성은 독자에게 제공되는 참여공간이 될 뿐만 아니라 미적추구의 가능성까지도 제공한다. 그러한 참여공간이 명진으로 하여금 컨스터블의 그림 속에서 확실성을 추구하도록 가능성을 제공했고 아내더러 남편의 희미한 스케치 속에서 현주의 확실한 존재를 확신할 수 있게 했던 건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명진이 현주가 부탁한 수석에서, 불확실하고 모호한 형태 속에서 확실함을 찾아내는 작업인, 이름 짓기에 도전하지 못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짧은 순간에 많은 생각들이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그 생각들도 실은 명진이 부를 수 있는 생각들 중의 극히 적은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많은 생각들은 그가 지금 건져낸 생각들에 의해 소외되고 있을 뿐 결코 부재하거나 소멸된 것은 아니었다. 그 생각들은 기억의 출입구에 줄을 선 채 그가 부르기만을 고대하며 대기하고 있다. 마치도 진시황의 성은을 입기를 기다리는 아방궁의 3천 궁녀들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오늘은 또 이 마로니에공원에서 그의 시각의 『성은을 입을』 행운의 『궁녀』는 누구일 것이며 그 『궁녀』 때문에 절망에 울며 소박당할 『궁녀』들은 또 누구일까?
 그래서인지 소재를 얼른 선택하지 못하고 눈앞에서 언뜻언뜻 오가는 사람들을 한동안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눈에 뜨이는 모습들에 끌려 다니는 시선을 일부러 붙잡아 들여 엉뚱한 대상에로 옮기느라 애를 썼다.
 그런데 사람들 속을 종횡무진으로 헤집고 다니던 그의 눈길이 갑자기 어딘가에서 어떤 강력한 흡인력에 의해 정지되고 말았다. 주위 사람들을 무색케 하는 미모의 아가씨였다. 그러나 명진의 시선을 유혹한 것은 결코 그녀의 미모가 아니었다. 미모 때문에, 아름다운 여자나 아름다운 꽃이나 아름다운 풍경 때문에 그는 얼마나 많은 유용하고 의미 있는 것들을 보지 못했는지 모른다. 요즘만큼은 미모 같은 것에만 시선을 약탈당하고 싶지 않았다. 그의 눈길은 여태껏 미의 포로였고 미의 횡포와 폭력적 광기에 유린당해 왔었다. 그 예속에서 해방되어 시각의 자유를 탈환하고 싶었다.
 명진의 눈길을 유혹한 것은 아가씨의 낯익은 얼굴이었다.
 미모의 아가씨!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들고 현란한 광채를 거느린 채 사뿐사뿐 벤치를 걸어오던 그 아가씨였다. 남자에게 커피를 건네고 앉아서 뭐라고 몇 마디 주고받던 아가씨였다. 그 아가씨가 떠나서 얼마 안 되어 사내는 배를 움켜쥐고 콘크리트바닥에서 뒹굴며 복통을 호소했고 병원에 옮겨지자마자 영문 없이 죽어버렸었다.
 그 아가씨가 여기에 다시 나타나다니?

 

다음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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