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무지개 그림자
--"스토크바이 네일랜드"와 마로니에 미완성 스케치 B
연재 14
믿어지지 않았다. 아니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의 눈으로 목격한 것인데도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다. 그의 눈은 주인인 그를 한두 번만 속인 것이 아니었다. 2~3번씩 TV화면을 쳐다보고서도 표범의 무늬가 어떤 형태인가라는 물음에 대답을 못했었다. 모든 것을 보면서도 모든 것을 볼 수 없는 시각, 욕망한 것 외에는 보고도 볼 수 없는 시각은 이미 그를 실망시켰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도 그 시선은 종종 거리에서 지나가는 아가씨들을 그날의 미모의 아가씨로 착각했던 것처럼, 저 아가씨도 미모의 아가씨였으면 하는 욕망이 초래한 착시현상은 아닐까?
그는 손등으로 눈을 비볐다. 그리고 재빨리 스케치와 대조해보았다. 인상속의 미모의 아가씨는 이미 희미하게 퇴색해있었지만 스케치만은 그날의 모습을 생생하게 간직하고 있었다.
그녀가 틀림없었다. 스케치에 그려진 아가씨의 모습은 그것을 확인시켜주었다.
명진은 저도 모르게 벤치에서 일어났다.
아가씨는 그날처럼 커피 컵을 들고 한 남자에게로 다가가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오늘 그녀가 거느린 분위기는 전혀 다른, 어둡고 윤택 없는 건조함뿐이었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여전했지만 우아함은 사라졌고 그 자리를 안개처럼 짙은 애수가 차지하고 있었다. 성숙함과 지적세련은 사라지고 색 바랜 요염함과 허탈한 천박함이 그것을 대신하고 있었다. 그녀를 옹위하고 있는 침울한 분위기는 이상하게도 그녀의 아름다움을 더욱 신비하게 터치했다.
커피를 남자에게 건네며 벤치에 앉아 뭐라고 말을 건네는 것까지도 그날의 완전한 복제판이었다.
상습범?
기회를 놓칠세라 다시 벤치에 앉아 스케치북을 펼치고 연필을 잡으려던 명진은 갑자기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에 행동을 멈췄다. 그녀는 그 무슨 미모의 아가씨가 아니라, 스케치의 소재가 아니라 범죄와 연루된 혐의범이다. 경찰에 신고해야 한다.
서둘러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버튼을 누르는데 어느새 아가씨는 벤치에서 일어나 공원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남자도 일어나 엉금엉금 그녀의 뒤를 따른다.
명진이도 전화를 걸며 그들의 뒤를 멀찌감치 밀행했다.
드디어 통화가 연결이 되었다.
“여보세요. 경찰이죠?”
“네. 말씀하시오”
“범죄자신곤데요. 여기 마로니에공원에 며칠 전에 죽은 남자에게 커피를 건네주었던 아씨가 나타났습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시간, 날자, 사건지점, 피살자와 혐의범의 이름을 정확하게 말씀해주십시오.”
아가씨는 골목 몇 개를 굽이돌더니 어느 허름한 모텔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사내 역시 잠시 모텔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부랴부랴 대문 안으로 자취를 감춰버린다. 탕아들은 꼬드겨 몸을 파는 윤락녀 같았다. 그녀의 겉모습만 보고 아름다움에 매료되었던 자신이 미워졌다. 어쩌다가 내 스케치북에 저런 더러운 여자가……
경찰은 세 번, 네 번 설명해주어도 제보가 불확실하다며 좀 더 정확하게 상황설명을 해달라는 말만 반복했다. 장난신고가 많아 진위여부를 판단하기가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확실한 걸 알고 싶으면 지금 이곳으로 와주십시오. 혐의 범은 방금 □□모텔에 들어갔으니까요.”
명진은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날 사건을 처리한 경관이 아닌 만큼 사건의 자초지종을 알 리가 없다.
그래도 잠시 모텔 앞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패트롤카 두 대가 골목길에 나타났다. 두 사람뿐이라고 말해주었는데도 무장경찰이 여덟 명이나 우르르 패트롤카에서 쏟아져 나왔다.
“제보자분이신가요?”
“네.”
경찰제복만 보아도 박 형사가 생각나며 기분이 불쾌해졌다. 그러나 협조를 자진한 이상 도중에 포기할 수도 없었다. 모른척하면 전번 날 같은 시끄러움은 면할 수 있을 것이지만 그 미모의 아가씨의 정체가 너무 궁금해졌다. 아가씨가 사내를 유혹해 모텔로 들어가는 걸 제 눈으로 확인하고서도 속으로는 깨끗한 여자이기를 바라고 있었다.
느닷없이 경찰이 들이닥치자 모텔주인은 아연실색하며 얼굴색이 백지장이 되어 전신을 후들후들 떨었다.
“303호실이에요.”
묻는 대로 고분고분 대답했다. 경찰이 유도하는 대로 공손히 키를 들고 3층으로 올라가 객실문을 따주었다.
사람이 방안에 들어온 줄도 모르고 사내는 침대위에 누운 여자 몸뚱이를 가로타고 헐떡거리며 엉덩이를 힘차게 흔들어대고 있었다. 사내의 엉덩이가 위로 불룩하게 솟구쳐 올랐다가 여자의 하체에로 내리 꽂힐 때마다 근육덩이가 탄력 있게 움씰거렸다. 이불은 침대 아래로 반쯤 흘러내려갔고 방바닥에는 여자의 꽃무늬 브래지어와 삼각팬티가 나뒹굴고 있었다.
문소리를 듣고 먼저 심상치 않은 기미를 눈치 챈 것은 여자 쪽이었다. 그녀는 다급히 배위에서 버둥거리는 사내를 떠밀어내고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황급히 이불을 끄집어 당겨 알몸을 가리려고 했지만 사내의 몸뚱이에 깔려 쉽게 당겨갈 수가 없었다. 그녀의 탄력 있고 풍만하고 눈부신 젖가슴과 그리고 하체의 은밀한 부위가 노출되었다. 그 순간 명진의 눈길에 포착된 것은 오로지 기름진 젖가슴과 은밀한 부위뿐이었다. 젖꼭지는 아직도 사내의 침방울에 물기가 발려있었고 음모도 축축한 액체로 젖어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순간적이었을 뿐이었다. 여자는 어느새 이불귀를 당겨 알몸을 가려버렸다.
그가 본 것은 무엇이었던가. 그녀의 가슴과 은밀한 부위를 보았다고 그녀의 전부를 보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녀의 몸매가 백옥 같고 조각 같고 그림같이 아름답다고 느낀 건 전체적인 분위기에서 얻은 결론이었을 뿐이었다.
“이 여자가 혐의범이 확실합니까?”
아가씨가 이불속에서, 경찰이 던져준 속옷을 입는 동안, 사내가 아직도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듯 요동치는 자신의 물건을 자제하지 못한 채 가까스로 팬티를 껴입는 동안 명진은 다시 한번 아가씨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남자의 땀방울에 젖은 머리카락이 얼굴을 가렸지만 그는 그녀가 사건발생 당시의 그녀가 분명함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분명한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봐서는.”
“그게 무슨 말입니까. 지금까지라니요. 그럼 나중엔 아닐지도 모른다는 말입니까? 좀 확신 있게 증언해주십시오.”
명진은 잠시 태도표시를 망설였다. 확실하다는 것의 근거는 도대체 어떤 것일까. 그것이 불투명했다. 나는 내가 내 눈으로 직접 본 것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은 한계적일 수밖에 없다. 게다가 그 사이에는 또 시간과 공간의 깊은 계곡까지 가로놓여있다. 한계와 확실함은 어떤 경우에도 언제나 불가능한 것일까. 모네나 컨스터블은 자신들이 관찰한 것을 확실한 것으로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그들이 본 것은 불확실하다고 비난하고 있다. 아내는 윤곽밖에 없는 스케치에서 분위기만으로도 현주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지만 그 그림을 그린 명진은 아리송하기만 하다.
도대체 우리가 본 것은 어디까지 확실한 것인가. 내가 본 두 아가씨의 모습이 동일하다는 걸 무엇으로써 증명할 수 있는가. 이 경우 동일함은 유사성이어서는 안 된다. 키, 몸무게, 이목구비의 구조와 배열, 눈의 크기, 코의 높이, 이마의 넓이, 혈액형, DNA, 등등 구체적인 비교수자가 확인되지 않은 상태에서도 사건당일의 아가씨가 저기 침대위에 벌거벗고 있는 아가씨와 동일한 여자라는 걸 확증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경찰의 질문에는 시공을 초월하는 그런 심도 있는 의미는 없어 보인다.
“네. 확실합니다.”
모든 확실함은 바로 지금 자신이 가지고 있는 그만큼의 시각정보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을 하며 확신에 찬 대답을 했다.
그의 대답 한마디에 아가씨는 경찰에 의해 여관방에서 끌려나왔고 손에 수갑을 차고 패트롤카에 등을 떠밀려 경찰서로 강제 연행되었다.
그런데도 여자는 반항 한마디는 고사하고 의문 한마디, 하소연 한마디 없이 순순히 경찰의 요구에 응했다. 어쩌면 그것은 확실함에 대한 무언의 승복에서 오는 체념인지도 모른다. 진실은 그만큼 위력이 대단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각은 진실을 만들어내는 공장이기도 하다.
명진은 그녀가 여관방에서 나섰을 때에야 옷차림이 사건당시의 아가씨의 옷차림과 다르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날 미모의 아가씨는 하얀 메리야스 T셔츠에 스판덱스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런데 연행된 아가씨는 가슴 선이 확연히 드러날 만큼 노출이 심한 꽃무늬셔츠에 허벅지마저 가리지 못한 은회색 미니스커트를 입고 있다. 강렬하고 맑은 색채의 눈부신 디자인은 요염함과 섹시함이 철철 흐른다.
그런데는 어떻단 말인가.
옷은 얼마든지 바꿔 입을 수 있다.
그러나 그저 그렇게 단순하게 여기고 지나칠 일이 아닌지도 모른다. 옷차림은 사소한 것 같지만 한 사람의 취미, 성격, 품행, 도덕관 같은 것의 예측을 가능케 하는 메시지임에는 틀림없지 않는가. 단정하고 교양 있고 세련된, 미모의 아가씨의 옷차림과 극명하게 대조되는 개방적이고 노출이 심한, 방탕한 의상선택이 동일한 사람에게서 시간의 경과를 이유로 가능한 것일까. 가치관, 도덕관, 인생관이 바뀌기 전에는 말이다.
경찰서에 도착하여 조서를 꾸밀 때에도 여자는 그날 마로니에공원에서 남자를 독살시킨 범인이 당신이 아니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짤막하게 수긍했다. 아니, 그녀는 경찰이 유도하는 대로, 경찰이 바라는 모든 질문에 이의 한마디 없이 만족스러운 대답을 주었다. 그녀의 대답은 네. 그래요. 맞아요. 하는 극히 간단한 이 몇 마디의 반복일 뿐이었다.
조사과정을 쭉 지켜보며 명진은 그녀의 이름이 서혜란이라는 것과 무직자이고 23세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매춘으로 살아가는 불결한 아가씨라는 추측도 확인이 되었다.
“왜 그 남자를 죽였지?”
경찰의 질문은 언제나 얼음조각처럼 냉담하고 적대적이다.
“절 데리고 자고서도 돈을 주지 않기에 홧김에요.”
그것이 서혜란이 조서작성 중에 가장 길게 대답한 진술이었다.
모든 것이 명백해졌다. 미스터리에 은폐되었던 피살사건이 이처럼 쉽게 풀리리라고는 경찰 측에서도 생각 밖이었던지라 모두들 기쁨에 들떠있었다.
그런데 명진에게는 그 순탄함이 어쩐지 도리어 께름칙하게 느껴졌다. 범죄승인이 자신의 장래에 어떤 불행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모를 리가 없을 턴데 그렇듯 쉽게 모든 걸 탄백한 서혜란의 소행이 상식적으로 믿기에는 어딘가 석연치 않은 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러한 범죄자인은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다. 스스로를 불리한 상황에 처하도록 자해하는 사람은 아마 드물 것이다. 정신에 이상이 있거나 삶의 의욕을 포기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말이다.
그러나 상식적 관점으로 현상을 보는 것 또한 비상식적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처럼 완벽하고 확실한 증거 앞에서, 그녀에게는 불행일지 모르지만 경찰에게는 수사에 유리한 그림까지 증거로 제공된 상황에서 서혜란은 더 이상의 은폐는 의미가 없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명진은 자신의 시각을 믿는다는 사실이었다.
마로니에공원피살사건을 제일 먼저 접수했던 박 형사가 나타난 것은 조서작성이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다. 땀만 뻘뻘 흘리던 박 형사는 명진을 보고서도 별로 반기는 기색은 아니었다.
“또 만났네요.”
한마디 던져오는 말투도 죄수 취급하는 억양이어서 불쾌감을 주었다.
그 자리에서 모든 조서기록들과 혐의범까지 일괄 박 형사가 근무하는 □□경찰서로 이첩되었다.
밖으로 나오면서 박 형사는 연신 손수건으로 얼굴의 땀을 훔치며 한마디 건넸다.
“서혜란이 교수님의 그림에 그려진 그 여자가 맞습니까?”
“네.”
이제 그 말은 확신이기에 앞서 하나의 기성판단이 되어버렸다.
“혹시 잘못 보신 건 아닙니까?”
“네?”
“종종 증인들이 사람을 잘못 보는 경우도 있거든요.”
“반장님께서도 그림을 보시지 않았습니까.”
“교수님의 그림이 대상을 정확하게 재현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설사 정확하게 재현했다고 하더라도 비슷하게 생긴 사람도 있을 수 있지 않습니까.”
뚱보 형사반장은 무례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아예 아는 것 같지 않다. 이제는 그의 그림수준까지 의심하고 나선다. 물론 비슷하게 생긴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유사성이지 동일성은 아니다. 지금까지 그의 시각에 포착된 서혜란과 「미모의 아가씨」는 옷차림과 분위기만 다른 동일한 여자였다고 확인할 자신이 있었다. 유사성이란 것이 진실이 아닌 착시현상의 결과일 수도 있다. 『주주클럽』이라는 TV프로그램에서 인공 부화시킨 필리핀수리의 새끼가 먹이를 먹지 않아 사육자가 팔에 어미수리의 탈을 씌우고 먹이를 주자 새끼가 먹이를 받아먹는 장면을 시청한 적이 있다. 새끼는 탈을 어미로 착시한 것이다. 이 경우 유사성은 착시현상일 뿐 진실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동물의 시각이고 나는 사람이 아닌가.
그와의 대화를 더 이상 연장하고 싶지 않았다. 협조에 대한 사의謝意표명 같은 건 아예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 간단히 악수를 하고 갈라졌다.
“서혜란의 홀어머니가 중림동 달동네에 살고 있다면서요.”
느닷없이 던져오는 형사반장의 말에 명진은 걸음을 멈췄다.
“네?”
다음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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