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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무지개 그림자 연재 12

by 8866 2008. 1. 4.

 

장편소설 무지개 그림자

--소매물도 코너

 

연재 12

 

 또한 교활한 이놈과의 한판 지혜의 싸움도 벌려야 한다. 그놈 앞에서는 담배도 못 피우고 추워도 암반 위를 거닐지도 못하고 기침소리도 크게 내서는 안 된다. 어둠 속에서 뭘 찾으려고 해도 손전등불빛을 보여서는 안 된다. 게다가 먹보인 이놈을 달래기 위해 끌어올릴 때에도 밑밥 한줌을 뿌려주어야 한다. 그런데도 이놈은 낚시에 서툰 초보자는 보기 좋게 따돌리고 사경에서 도망치는 것이다. 이런 교활성은 감성돔의 발달한 시각기능 때문에 가능해진다.
 명진은 낚시에 갯지렁이를 미끼로 꿰어 파도가 무시무시하게 굼실거리는 바다에 던졌다. 그러면서 저도 모르게 기억의 화면에 영희와 현주를 떠올렸다. 오늘만큼은 감성돔보다는 도미가 잡혔으면 싶다는 생각을 건졌다. 사람을 불안하게 하는 감성돔의 그 파워와 공격적인 변덕스러움과 교활함이 싫었다. 감성돔보다는 보다 유연하고 평온한 환경을 좋아하며 심홍색의 화려한 바탕색에 청자색 보석을 뿌려놓은 듯한 아름다운 모습의 도미가 잡혔으면 싶었다. 도미의 그런 우아하고 부드러운 이미지가 영희씨의 차분한 심성처럼 느껴졌다.
 감성돔과의 힘겨루기와 지혜겨루기는 스릴의 흥분은 있지만 위험을 동반하는 공포와 불안이 따랐고 게다가 피로라는 후유증까지 있었다.
 파도가 튕기는 물방울인지 하늘에서 흩뿌리는 빗방울인지는 몰라도 그의 옷과 얼굴은 삽시에 물자루가 되었다. 입안으로 흘러드는 물줄기에는 비린내와 찝찔함이 배어있었다.
 갑자기 담배생각이 났다. 호주머니에서 권연갑을 꺼내어 라이터 불을 붙이려다가 그만 단념했다. 한낮 미물의 눈길을 의식하여 담뱃불을 감춰서 피워야 한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했다. 아무런 대책 없이 미물인 감성돔에게 자신의 존재를 노출시키지 않기 위해 행동을 제약당하고 어둠과 혼탁한 해수와 파도와 포말의 도움으로 그런 은폐가 가능해졌다는 사실도 불쾌했다. 감성돔은 그의 일거일동을 보고 있는데 그는 낚싯대만 멀거니 보고 있지 않는가.
 “감성돔, 오늘은 네가 싫어. 도미나 잡을 거야.”
 속으로 중얼거리는데 고기가 입질하는 듯 낚시찌가 움직인다.
 한 번, 두 번.
 명진은 본능적으로 숨을 죽인 채 세 번째 입질을 기다렸다. 이제 낚시초리가 활등처럼 휘어들며…그 순간 미끼를 문 고기가 감성돔임을 알았다. 낚싯대가 요동치며 부러질 듯 힘차게 떨리며 휘어드는 모습을 보고 그는 감성돔의 크기까지 짐작할만했다. 
 재빨리 밑밥 한줌을 집어 파도치는 해면에 뿌리고는 낚싯대를 잡아챘다. 묵직하다. 푸득푸득 요동치며 부챗살처럼 지느러미를 활짝 편 감성돔이 낚싯줄에 매달려 허공중에 번쩍 쳐들렸다. 명진은 감성돔의 요동에 몸의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지만 다행히도 실족은 하지 않았다.
 뜰채로 받아 갯바위위에 내려놓았다. 길이가 40cm나 되는 커다란 놈이다.
 감성돔은 갯바위위에 내려놓자마자 방금 전까지 거창한 파워로 몸부림치던 사나운 성미답지 않게 금방 죽은 것처럼 너부러져 잠잠하다. 그러고 보니 감성돔에게도 유약한 면이 있었던 것이다.
 시간만 속절없이 흘러갈 뿐 바라던 도미는 한 마리도 낚지 못했다. 대신 감성돔은 대여섯 마리나 연신 낚아 올렸다. 모두 칼로 지느러미를 찔러 피를 뺀 후 망태 안에 집어넣었다.
 비는 더 억수로 쏟아졌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갑자기 등 뒤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명진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귀신이라도?!……
 “오빠 저예요. 현주예요.”
 분명 오빠라고 불렀을 텐데도 그는 귀신의 괴성으로 착각한 것이다. 어둠 속에서는 시력만 기능이 떨어지는 게 아니라 청각도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현주 씨, 여길 어떻게? 지금 이 시간엔 몽돌밭길도 조수에 막혔을 텐데.”
 “오빠가 건어 온 다음 얼마 되지 않아 건너왔어요.”
 “그럼 여태까지 여기서?…”
 “오빠가 가라고 쫓을까봐 길이 막히기를 기다린 거죠 뭐.”
 무슨 장한 일을 한 어린애처럼 자랑을 늘어놓는다.
 “이렇게 춥고 비까지 오는데 여길 오면 어떡해요. 영희 씨는요?”
 먼저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영희였다. 요란한 파도소리 때문에 목청을 높여 말을 해야만 다. 그 말소리 때문에 고기들이 달아날 거라는 우려 같은 건 문제도 아니었다. 현주는 온몸이 비에 젖어 물자루가 된 채 전신을 화들화들 떨며 이발까지 덜덜 쫀다.
 “감기까지 걸렸다면서 이 추운데…”
 옷을 벗어 그녀의 어깨에 걸쳐주었으나 세차게 발작하는 오한을 덜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명진은 부랴부랴 낚싯대를 거두고 배낭을 챙겼다.
 “그냥 낚시하세요. 전 옆에서 구경할게요.”
 “지금 낚시가 중요합니까. 사람이 병들어 죽게 됐는데…… 어디 비를 그을 데라도 있나 찾아봐야지요.”
 마침 언덕위에 등대지기가 거주하는 살림집이 있었지만 주인은 육지로 출타중인 듯 방안은 텅 비어있었다. 체면이고 예의고 돌볼 계제가 못되었다. 무작정 안으로 들어갔다. 마침 문도 잠겨있지 않았다.
 집안은 불을 지피지 않아 썰렁했지만 바깥보다는 온화했다.
 우선 그녀의 몸에서 젖은 겉옷을 벗기고 이불을 내리워 덮어주었다. 옷을 벗길 때 현주는 떨리는 상체를 명진의 품에 가만히 기댄다.
 “추워요. 안아줘요.”
 명진은 이불로 그녀의 상체를 감싸고 두 팔로 보듬어주었다.
 “오빠 품은 정말 따스해요.”
 “말 말고 잠자코 있어요. 내가 주방에 나가서 더운물이라도 끓여 올 테니까.”
 “싫어요. 그냥 이렇게 있어줘요. 오빠 저랑 결혼해줄래요?”
 “결혼요. 허허허. 말만 잘 들으면 뭔들 못해주겠습니까.”
 “정말요. 오빠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결혼해주는 거죠?”
 “그래요. 기꺼이 결혼해주지요. 농담도 잘하시네요.”
 명진이 그녀를 겨우 달래놓고 주방에 내려가 더운물을 끓여 올려왔을 때 현주는 어느새 잠이 들어있었다. 이마를 짚어보니 불덩이 같다. 그러나 약도 없는지라 속수무책이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찬물에 수건을 적시여 이마에 얹어주는 것뿐이었다.
 “오빠 나랑 결혼할거죠? 정말이죠?”
 입술이 바싹바싹 말라들며 현주는 잠꼬대까지 했다. 그러는 그녀가 사랑스러운 여동생 같기만 했다.
 날이 밝아 몽돌길이 열리자마자 이영희가 등대섬으로 건너왔다.
 “여기 있는 걸 난 또 어디 갔나 하고 밤새 걱정했잖아. 애는.”
 “언니 내가 여기 있을 줄은 몰랐지?”
 그제야 잠에서 깨어난 현주는 얼굴에 환한 웃음을 짓는다. 반가워서 상체를 일으키려 했으나 어지럼증이 발작하는 듯 입을 틀어막고 구역질을 한다.
 “남의 빈집에 그냥 눌러 있을 수도 없고. 몽돌길이 막히기 전에 민박으로 돌아가야겠어요. 현주야 언니 등에 업혀.”
 “제가 업을게요.”
 명진은 영희를 제치고 현주에게 등을 들이밀었다.
 현주는 사양 한마디 없이 공손히 명진의 등에 업힌다. 그리고는 아기처럼 두 팔로 그의 목을 꼭 껴안았다. 아직도 열기가 식지 않은 따가운 숨결에 목덜미가 간지러워진다. 그녀는 깃털처럼 가벼웠다.
 “현주야, 선생님께 폐 끼치지 말고 어서 내려. 언니가 업을게.”
 영희가 낚시용구를 들고 뒤를 따라오며 연신 달랬지만 현주는 못들은 척 눈까지 감아버렸다.
 “어린애도 아니고. 다 큰 계집애가 민망하게……”
 명진은 그저 담담하게 웃기만 할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비는 그치고 날씨도 개어있었다.

 

다음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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