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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무지개 그림자 연재 11

by 8866 2007. 12. 28.

 

 

 장편소설 무지개 그림자

  --소매물도 코너

 

 연재 11

 

 영희가 나가자 명진은 갑자기 방안이 텅 빈 느낌이 들었다. 램프불빛도 더 어둡게만 느껴졌다. 현주는 여전히 뭐라고 재잘거렸지만 그 말의 내용이 더 이상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의 시선은 천막에 막혔지만 청각은 두꺼운 텐트를 뚫고 밖의 동정에 이어져있었다. 밥맛도 없었다. 그저 현주의 식사가 끝나기만을 기다리며 먹는 시늉만 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현주는 민박집에서 얼마나 굶었던지 끝없이 먹어댄다. 그녀의 볼과 이마에는 아직도 아기솜털이 보송보송했고 말랑말랑한 입술에서는 모유향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냥 아무런 경계조차 없이 명진의 얼굴을 쳐다보며 마냥 생글거리기만 한다.
 명진이도 아무런 부담 없이 현주의「재롱」을 받아주었다. 그녀의 맑고 투명한 동안童顔은 볼수록 예쁘고 사랑스러웠다. 그러나 뇌수는 영희의 부재와 함께 더 이상 시각이 제공하는 정보를 중시하지 않았다. 오로지 텐트 밖의 동정에 쏠린 청각의 정보에만 신경을 집중하고 분석 작업에 몰입했다.
 그 사이 현주는 자신이 G대학국어국문학과에 다니며 23살이고 공부가 싫어서 여행을 떠났다는 사실을 말해주었지만 명진은 그 소리는 하나도 듣지 못하고 그녀와 이영희가 의자매 사이며 이영희는 G대학환경관리학과 □□학번이고 24살이라는 정보만을 똑똑히 들었을 뿐이다.
 지금 영희 씬 밖에서 뭘 하고 있을까? 들려오는 건 바람소리와 파도소리, 숲이 설레는 소리뿐이었다. 영희 씨는 느낄 수 있는 소리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 잘 먹었다. 오빠 덕분에 오늘 생일을 쇤 것 같아요. 고마워요.”
 드디어 현주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명진은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천막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현주는 잠시라도 떨어질세라 그림자처럼 뒤를 졸졸 따른다.
 영희는 능선의 바위위에 서있었다. 어둠 속에 바다를 향해 조각상처럼 꼼짝 않고 서있는 그녀의 모습은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이나 시 같았다.
 “언니, 거기서 뭘 해?”
 현주가 불러서야 흠칫 놀란 영희는 명진을 향해 우아하게 고개를 숙여 가벼운 목례를 보냈다.
 “비가 올 것 같아. 그만 민박으로 내려가자.”
 “언닌 그저 민박 밖에 몰라. 벌써 가서 뭐 하려고. 잠도 안 오는데.”
 “비가 오면 길이 질척거리잖아.”
 “멀지도 않은데 뭐. 조금만 더 놀다가 응. 언니 현주 말 잘 듣잖아.”
 “얘는.”
 언제나 선택권과 결정권을 기꺼이 현주에게 양보하는 영희의 넉넉한 도량이 아름답게 보였다.
 “그래요. 좀 더 이야기를 하다가 가셔도 될 것 같습니다.”
 세 사람은 바위위에 나란히 앉았다.
 현주의 어깨가 가끔 명진의 어깨를 스치곤 했다. 그랬으나 명진은 왼쪽에 두 뼘쯤 사이를 두고 앉은 영희의 육신에서 풍기는 체취와 향기에 신경이 쏠렸다.
 “특별히 이 섬을 택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물음은 영희에게 던졌으나 이번에도 대답은 당돌한 현주가 채간다.
 “육지에서 소외된 섬의 모습이 궁금했어요. 지도를 펼치다가 눈에 뜨인 섬이 바로 이 소매물도였거든요. 참 오빤 무슨 일을 하시죠?”
 “나 말입니까. 그냥 회사에 다닙니다.”
 강사라는 말이 웬일인지 입밖에 나가지 않았다. 강사가 될지 말지 아직은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그에게 확실한 것이 있다면 지금 소매물도에서 미모의 아가씨 이영희와 나란히 앉아 있다는 사실뿐이었다. 그녀를 처음 보는 순간 그는 이 섬을 선택한 것이 잘된 일이라는 생각을 건졌다.
 “어느 회사죠?”
 “그게……”
 “현주야.”
 영희는 아직은 낯선 사람인데 무례한 질문으로 남을 난감하게 만드는 현주를 제지했다.
 “내 일은 뭘 하실 거예요?”
 “바다낚시 좀 하려고 왔습니다만 날씨가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내일 글씽이굴을 구경할까 하는데 보트주인이 어떻게나 무뚝뚝한지 괜히 무서워져요. 게다가 파도까지 세차서. 저희들과 함께 동행해주시면 안돼요……”
 “아니에요. 선생님께선 그냥 낚시질하러 가세요. 저희들끼리 가도 되니까요.”
 영희가 오래간만에 주도권을 행사해본다. 그녀의 예의바른 사양과 타인에 대한 배려가 명진의 마음속에 자그마한 파문을 일으켰다.
 “아닙니다. 원하신다면 하루 동행해드리죠. 어차피 시간을 의미 있게 소모하는 것이 목적이지 고기 낚는 것이 목적은 아니니까요.”
 하늘에는 거대한 기갑부대가 돌격해오 듯 시커먼 복부를 무시무시하게 드러낸 먹장구름이 꽉 뒤덮였고 바다에는 수만 마리의 고래 떼가 꿈틀거리듯 검푸른 파도가 치솟고 있었다. 바다와 하늘에서 밀려오는 해풍에 숲과 풀 가지들이 일제히 쓰러지며 다시 일어나려고 몸부림친다. 갈매기는 오간데 없고 그 대신 뒤늦게 들어온 민박촌의 전등불빛이 반딧불처럼 명멸하고 등대섬의 등대만 어둠 속에서 더욱 밝게 빛났다.
 쏴아- 철썩!
 파도는 끊임없이 섬을 향해 힘차게 돌격해오다간 벼랑에 곤두박질하며 쓰러지고 또 쓰러지면서도 지칠 줄을 모른다. 그렇게 바람은 파도를 일으키고 숲과 풀을 쓰러뜨리지만 사람 앞에서만은 무능함을 드러내며 쩔쩔매고 있다. 사람은 파도처럼 뒹굴지도 않고 풀대처럼 쓰러지지도 않는다.
 “아이 좋아라! 오빠. 꼭 약속을 지켜야 해요. 자 우리 손도장 찍어요.”
 현주가 명진의 눈앞에 내민 손은 정교하고 깜찍했다. 바람이 그렇게 세찬데도 그녀의 손은 햇볕처럼 따스했다.
 “얘는.”
 영희는 결국 자신의 주장을 꺾고 만다. 어쩌면 그녀는 남을 기쁘게 해주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 같았다.
 “우리 내일 또 봐요.”
 현주는 내일의 기약을 받아내고서야 시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영희의 손목을 잡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명진은 그녀들의 모습이 어둠 속에 묻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이윽히 뒷모습을 먼눈으로 배웅했다. 그녀들은 바람을 따라 어디론가 영영 떠나가 버리는 것만 같아 불안감이 갈마들었다. 어둠은 그의 시야에서 그녀들의 모습을 약탈해갔고 포착기능을 상실한 시각은 불확실성에 의한 불안으로 이어졌다. 어둠 속에서 그가 볼 수 있는 건 몽롱함뿐이었다. 바다도 산도 나무도 초원도 등대도…… 그리고 조금 뒤 그녀들은 아예 몽롱한 윤곽조차 보이지 않았다.
 하룻밤의 시간이 그처럼 지루한 적은 없었다. 텐트 안에서 이불을 뒤척이며 그는 옹근 하룻밤을 뜬눈으로 밝혔다. 첫 눈에 정이 든다는 말이 오늘에야 실감 있게 느껴졌다. 영희의 모습이 기억 속에서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아침에 명진은 밤새 밀린 졸음에 빠져 늦잠이 들었다가 11시가 되어서야 깨어났다.
 하늘은 여전히 찌뿌드드하게 흐려있었다. 그러나 바람만 불뿐 빗방울은 뿌리지 않았다.
 영희와 현주가 고대할 거라는 생각에 부랴부랴 세수만 대충하고는 아침식사도 거른 채 유람선선착장으로 달려갔다.
 그녀들은 선착장에서 그가 오기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왜 인제야 오세요. 주인아저씨가 돌아가겠다고 막 화까지 내셨어요.…”
 “비가 오지 않을까요?”
 “비가 오면 회항하면 되잖아요. 어서 배에 오르세요.”
 현주는 무작정 명진의 등을 보트위로 떠민다.
 “저희들 때문에…”
 영희의 얼굴엔 송구스런 기색이 확연하다. 그녀의 마음을 풀어주고 싶었다.
 “차라리 잘 됐습니다. 이런 날에는 고기도 물지 않습니다.”
 사실 고기를 낚는 데는 파도가 세차거나 비가 내린다고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도리어 감성돔낚시는 비가 오고 파도가 일 때가 적시였다.
 해적처럼 무서운 인상을 한 배 주인아저씨는 아무 말 없이 엔진을 가동시키더니 보트를 몰고 글씽이굴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파도가 넘실거려 배가 심하게 기우뚱거렸다.
 영희는 뱃멀미를 하는 듯 벌써 입을 틀어막고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보트가 글씽이굴에 이르기도 전에 하늘에서 갑자기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비를 피해 선실 안으로 들어가자고 했지만 현주는 기어코 갑판에 서서 비를 맞는다.
 “요만큼 내리는 비가 뭐가 무서운데요. 비를 맞으면서 구경해야 의미도 크지 않겠어요.”
 영희만 선실 안으로 들어갔다. 명진이도 그녀를 따라 선실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지만 갑판 위에 현주 혼자 둘 수도 없어 그녀 옆에 남았다. 빗줄기가 제법 굵어 그들의 옷은 대뜸 물자루가 되었다. 게다가 늦가을 해풍까지 심해 추위가 온몸을 엄습했다. 그런데도 현주는 아랑곳하지 않고 신비하고 절묘한 글씽이굴 경관에 도취되어 찬탄만을 연발했다. 추위 때문에 이를 덜덜 쪼면서도 저건 무슨 바위냐, 저건 무슨 글씨냐 끝없이 질문을 던져왔다. 아치형의 커다란 동굴, 진시황의 사자가 서울에 불로초를 구하러 왔다가「서불과차」라는 필적을 남겼다는 동굴천장의 글씨, 몸 바위, 처 바위, 촛대바위 그리고 기암괴석들……
 빗발이 갈수록 굵어졌다. 추위도 더 심해지고 파도까지 더 높아졌다. 현주는 더 구경하자고 고집을 부렸으나 주인아저씨는 사고위험이 있다며 그녀의 간청을 무시하고 배를 유람선선착장에로 돌려세웠다. 아직은 한낮인데도 날씨가 우중충하여 벌써 한밤중이 된 것처럼 주위가 어둑어둑해졌다.
 배에서 내려 몽돌밭에 이르니 마침 조수가 밀려나간 때여서 통과가 가능했다.
 “우리 잠깐 여기서 쉬다가 가요.”
 “옷도 젖었는데 그냥 민박집으로 내려가. 옷을 갈아입어야 하잖아.”
 “조금만 쉬다가. 언니.”
 어린애처럼 응석까지 부리는 현주 앞에서 영희는 또다시 마음이 약해지고 있었다.
 “그럼 조금만이야. 선생님을 모시고 텐트 안으로 들어가 몸을 녹여. 난 밖에서……”
 “아니, 전 괜찮습니다. 두 분이 안으로 들어가세요.”
  그제야 현주는 상황파악이 된 듯 자리에서 일어선다.
  “오빠가 불편하니까 오늘은 이만 내려갈게요.”
  명진은 그녀들을 민박촌까지 배웅했다.
  돌밭에서 발이 미끄러워 현주는 명진의 팔에 동동 매달려 걸었다. 가끔 돌덩이에 미끄러져 비틀거리다간 명진의 품에 상체를 던지기도 한다. 명진은 영희의 시선이 의식되었지만 그렇다고 믿고 의지하는 현주를 뿌리칠 수도 없었다.
 그런 틈을 타 현주는 명진의 귀가에 가만히 소곤거린다.
 “오후엔 뭘 하실 거예요? 심심하면 추운 천막에 혼자 계시지 말고 우리 민박에 놀러오세요. 방이 너르니까.”
 “아니, 오후엔 낚시질을 나가 볼까합니다. 명색이 낚시꾼인데 낚시찌나 바닷물에 적셔보고 가야 될게 아닙니까.”
 “비가 올 때는 고기가 물지 않는다면서요?”
 “현주야.”
 영희는 저쯤 앞에서 걷다가 조용히 돌아서며 그녀를 불렀다. 그 말을 정말로 믿었니. 하는 표정이다. 명진은 현주의 천진함이 귀여워 껄껄 웃고 말았다.
 “현주 씬 아직 소금을 한 섬은 더 먹어야겠습니다.”
 “오빠, 절 어린애로 보는 거예요.”
 동그랗게 원을 그리는 현주의 눈매는 까맣고 반짝이는 토끼 눈 같았다.
 “농담입니다.”
 텐트로 돌아온 명진은 조수가 밀려가고 등대섬으로 이어진 유일한 통로인 몽돌밭길이 열릴 때까지 한잠 푹 잤다……
 하루 두 번 열리는 300m정도 되는 몽돌밭길을 건너기 시작했을 때는 잠시 그쳤던 빗방울이 또다시 후드득-후드득- 떨어지기 시작했다. 하늘에 먹장구름이 뒤덮이고 해풍이 거세어 날은 벌써 어두웠다. 우거진 상록수 숲 속에서 새들이 우짖는 소매물도섬과는 달리 등대섬은 썰렁한 초원뿐이다. 이미 꽃이 진 들국화나 방풍초, 물매화는 비바람에 볼품없이 시들어버렸다.
 이런 날일수록 감성돔이나 도미낚시가 이상적이다. 감성돔은 풍랑이 심할 때, 해풍에 파도가 3~4m일 때 오히려 더 잘 입질한다.
 그는 작년에 와본 적이 있는 동쪽갯바위로 내려갔다. 위치를 잡고는 배낭을 내려놓았다. 방수, 방풍기능의 낚시복과 구명조끼는 이미 텐트를 떠날 때 입었고 갯바위신도 신었다. 가방에서 그 밖의 휴대품들을 꺼냈다. 낚싯대, 받침대, 헤드램프, 뜰채, 망치, 로프, 미끼와 밑밥그릇 등을 암반위에 꺼내어 사용하기 편리하게 배열했다.
 감성돔은 갯바위 연안에 서식하는데 야행성이므로 주로 밤이 되면 3~5m수심까지 부유하며 먹이를 섭취한다. 비가 오거나 파도가 일거나 밤이 되면 날이 어둡고 바다물이 혼탁한 틈을 타 평소의 경계를 풀고 평소의 경계를 풀고 대담하게 연안의 수면위에 출몰하는 것이다. 혼탁한 해수가 자신들의 과잉활동을 엄호해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물론 파도에 밀려 수면위로 떠오른 먹이들을 먹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감성돔은 성미가 까다롭고 변덕스러운 바다고기다. 이놈은 강력한 파워가 있을 뿐 아니라 발달한 시력을 가지고 있으며 교활하면서도 불안하고 그 맛 또한 일품이어서 낚시꾼들에게 가장 인기 높은 대상어종이다. 이놈을 낚으려면 그 강력한 파워와 한판대결을 벌려야 하며 그 대결과정에 미끄러운 암반위에서 실족하여 생명을 잃을 위험과 불안을 감수해야 한다. 그래서 감성돔낚시는 불안을 동반한다.

 다음주에 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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