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무지개 그림자
--마로니에 공원코너
연재 4
7월말 삼복더위는 해가 질 무렵인데도 물러서지 않고 도시의 구석구석에 숨어 열기를 뿜어내고 있다.
노점상할머니는 테니스라켓을 콘크리트바닥에 줄느런히 펼쳐놓은 채 공이 든 자루를 풀어놓고는 기념비울타리 옆에 편 마분지조각위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있었다. 그 앞 광장에서는 몇몇 여대생들이 비둘기 떼를 불러 손바닥이나 어깨위에 앉히고 기념촬영을 하느라 깔깔대고 있었다.
명진의 뒤 조경정원에는 향나무와 메타세쿼이아 같아 보이는, 품위 있는 조경수들이 식재되어있었고 남쪽 가까운 곳에는 「김상옥열사의 상」이 우뚝 서있었으며 아름드리 은행나무 잎들은 햇빛을 받아 금빛으로 반짝였다.
스케치북을 꺼내어 무릎위에 비스듬히 받쳐 세웠다.
노점상할머니는 젊은 남녀에게 라켓과 공을 넘겨주고 있었고 밀집색깔의 소담한 머릿결을 가진 대학생이 지갑에서 지폐를 꺼내고 있었다.
B4연필을 비스듬히 잡고 화선지위에 구도를 잡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였다.
맞은편, 문예진흥원소극장 앞의 자판기 쪽에서 한줄기의 강한 광채가 발광하며 그의 시선을 자극했다. 노점상할머니에게 풀어 보냈던 시선을 말아 들여 발광체로 이동시키는 순간 명진은 사람들 속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미모의 아가씨를 발견했다. 잠시 필을 멈춘 채 넋을 잃고 말았다. 모델처럼 늘씬하고 균형 잡힌 키꼴에 건강한 볼륨을 만끽하는 아가씨의 몸매는 문자 그대로 8등신이었다. 아지랑이처럼 불길이 이글거리는, 삼단처럼 어깨위에서 넘실거리는 장발, 최상의 신축성과 탄력으로 가슴과 어깨의 각선미를 클로즈업시켜주는 눈보다 하얀 메리야스T셔츠, 역시 탄력과 신축성이 강한 우윳빛스판덱스바지는 삼각팬티의 은밀한 윤곽을 또렷하게 여과시키며 쏟아져 내리는 두 줄기의 폭포 같았다. 시원하면서도 적당하게 노출이 된 목, 가슴, 팔, 허리, 발목은 백설처럼 하얀 의상보다 더 눈부시다.
정말이지 젊은이들의 장소인 이 마로니에공원에 일년 365일 동안 나앉아 있어도 한두 명 볼까 말까한 미모의 소유자였다. 이제 명진의 눈에는 공원 내의 모든 사람들은 하나의 점이나 원형 혹은 선의 단순한 윤곽으로 생략되고 그녀의 모습만이 구체적 형상으로 포착되고 있었다.
이 순간을 놓치면 안 된다는 생각에 그는 부랴부랴 자세를 고치고 스케치를 시작했다. 연필을 잡은 손이 약간 떨렸고 화선지가 예리한 흑연 촉에 긁혀 얼마간 찢기기까지 했다. 무의미만 가득 찼던 하얀 공백의 화선지위에 순식간에 생기와 아름다움이 살아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다만 우려되는 것이 있다면 자신의 능력이 현실적미를 화폭에 얼마나 진실하게 재현할 수 있을까 하는 것뿐이었다.
아가씨의 섬섬옥수에는 두 개의 컵이 들려있었고 구두에 박힌 구리 장식 브랜드가 광채를 요란하게 거느린 채 벤치 세 개와 조각상과 또 하나의 벤치와 쓰레기통을 지나 (그 벤치들은 명진의 눈에 그저 하나의 노란 점으로만 감지되었다)그 다음 벤치를 향해 급속한 스피드로 이동했다. 그제야 명진은 그녀가 다가간 벤치에 한 남자가 앉아있고 그 남자의 얼굴과 상체는 손에 쳐든 커다란 조간신문에 가려있음을 포착했다. 그리고 그 남자의 옆에는 또 어떤 여자가 앉아있었다.
그의 손에 쥐인 연필은 그의 시선이 파악하는 대로 거의 본능적으로 화선지위에 기록하고 있었다.
아가씨는 손에 들었던 커피 컵을 남자에게 건넨다.
남자는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고 컵을 받아 커피를 마신다. 그러나 그는 눈길을 집요하게 신문에 심은 채 떼지 않고 있었다.
남자는 몇 번 고개를 뒤로 젖혔다. 커피가 뜨거워 입 안에서 식혀 마시는 것 같았다. 그리고는 다 마신 빈 컵을 아가씨에게 돌려준다. 그제야 고개를 쳐들고 여자를 쳐다보는 듯 했지만 그 역시 신문에 가려 확실한 모습은 볼 수 없었다.
아가씨는 빈 컵을 받아들며 남자의 옆자리에 앉는다.
무슨 관계인지?
연인일까?
그런데 어찌 남자가 저렇게 무심할 수 있을까?
시선은 시선대로 손은 손대로 생각은 생각대로 저마다 바삐 움직였다.
아가씨가 남자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며 뭐라고 말을 건넨다. 그러나 입 모양만 움직일 뿐 말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붉은 립스틱의 그 입술은 매화꽃이 미풍에 흩날리는 듯 매혹적이었다.
그때 남자의 얼굴을 가렸던 신문이 아래로 내려지며 용모가 드러났다.
순간 명진은 흠칫 놀랐다. 의외에도 사내의 외모는 명진의 모습과 닮아 있었던 것이다. 안경만 썼다면 쌍둥이형제로 착각될 만큼 윤곽이나 이목구비의 분위기가 너무나 흡사했다.
두 사람 사이에 뭐라고 몇 마디 오가는 것 같았고 이어 아가씨는 벤치에서 일어났다. 두세 번 허리를 굽혀 인사하더니 몸을 돌이켜 그 자리를 떠나버린다.
아가씨의 모습은 순식간에 사람들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고 남자는 다시 석간신문에 머리를 틀어박았다. 순식간에 세상의 모든 빛이 꺼지고 태양도 사라진 그런 절망적인 기분이 되어 명진은 연필을 멈춘 채 멍하니 굳어져버렸다. 꿈같기도 하고 환각 같기도 했다. 주위를 두리번거려 보았으나 아가씨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제 그녀의 모습은 화선지위에 그려진 그 거칠고 조촐한 미완성스케치 한 폭으로 남았을 뿐이었다. 그녀를 볼 수 있고 찾을 수 있는 곳은 화선지뿐이었다.
그림은 그런대로 윤곽이 나타나고 있었다. 그 짧았던 순간에도 아가씨의 모습은 완벽하지는 못하나 분위기와 특징만은 제법 생동하게 재현되어있었다. 그러나 남자의 모습과 주변 사람들의 모습은 한두 개의 직선과 원에 의한 몽롱한 윤곽으로만 옮겨져 있었다. 원만하지는 못하지만 스케치의 몰골은 형성된 셈이다. 자신의 능력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계기이기도 했다. 지금 화선지에 그려진 이 모습이 바로 그가 순간 속에서 보았던「진실」아닌 「진실」이었다. 존 컨스터블의 명화 『스토크 바이 네일랜드」』의 화면 모호와 불확실함도 이런 원인에서 초래된 것은 아닐까. 인상파의 시조라 할 수 있는 모네가 르아브르선착장의 붐비는 항구를 소재로 삼은『인상. 해돋이』라는 작품에 대해 “르아브르의 실제풍경을 그림으로 재현할 수는 없었다.”고 말한 것은 바로 화선지위에 옮겨진 이러한「진실」아닌「진실」 즉 변화하는 대상의 순간성에 의해 초래된 모호함과 불확실함을 지적한 것인지도 모른다.
실증주의자 이폴리트텐도 “인상이란 이를 경험한 개인의 의식에 따른 것이므로 세상사에 대한 정확한 묘사는 될 수 없다.”라고 이점을 강조하고 있다. 화면의 이런 모호성과 불확실성 때문에 모네, 피사로 같은 인상파화가들의 작품들은 세부적처리가 불완전하고 예술적 완성도로까지 다듬어지지 않은, 조급하고 공을 들이지 않은 반제품이라는 비난과 냉대를 받아야만 했다. 그런데 이러한 모호성과 불확실성은 비단 인상파화가들에게만 국한된 단점만은 아니다. 시점을 바꾸면 그것은 곧 시각기능의 결여이고 한계이기도 하다. 『스토크 바이 네일랜드』나 오늘 이 마로니에공원에서의 스케치도……
“아, 나 죽어요! 사람 살려요!”
갑자기 어디선가에서 다급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귀청을 찢는 그 날카로운 비명에 명진은 깜짝 놀라 스케치에서 눈길을 뽑아 소리 나는 쪽에 던졌다.
이게 웬 일인가?!
그는 눈앞에서 벌어진 뜻밖의 상황에 경악을 금치 못하고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신문을 보던 남자였다.
그를 너무나 닮았던 남자, 신문에 정신이 팔려 미모의 아가씨가 건네준 커피를 갈증이 들린 사람처럼 잠간 새에 마셔 버리던 남자, 그 남자였다.
그 남자가 왜 배를 움켜쥐고 콘크리트바닥에서 뒹굴고 있을까?
아까는 아가씨와 주고받았던 말소리가 들리지 않았는데 지금은 그 사내가 터뜨리는 신음소리에 귀청이 찢길 듯 요란하다.
사내의 하얀 셔츠와 회백색 스판덱스바지는 벌써 콘크리트에 뒹굴어 뿌옇게 먼지투성이가 되어있었고 양복저고리는 벤치 위에 너부러져있었다.
갑작스런 상황에 놀란 사람들은 이 불길한 사건에 연루될까 두려운 모양 급급히 그 자리를 피하고 있었다.
커피!
명진의 머릿속엔 미모의 아가씨가 건네주던 커피가 떠올랐다. 사내는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고 몇 모금에 컵을 비웠었다.
그리고 그녀가 사라진 뒤로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몰라도 사내는 복부를 움켜쥐고 콘크리트바닥에 뒹굴며 복통을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커피! 복통!
이 양자간에는 어떤 필연적 인과관계가 있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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