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의미의 공간
  • 자연과 인간
추천도서

장편소설 무지개 그림자 연재 5

by 8866 2007. 11. 16.

 

 

장편소설 무지개 그림자

--마로니에공원 코너

 

연재 5

 

 

 사건참여가 초래할 책임추궁이나 혐의연루보다는 사내의 불행이 그 미모의 아가씨와 연관이 있을 것 같은 예감이 강한 호기심을 유발시켰다. 그는 이 공원에서 유일하게 그 남자의 모습을 지켜본 사람일 수도 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즐거움에 도취되어 주위사람들을 잊고 있었을 법도 하다. 그리고 사내에게로 서슴없이 달려가게 된 이유 중에는 그 남자가 자신을 닮았다는 무의식이 작용했는지도 모르겠다.
 벤치에서 벌떡 일어섰다.
많은 관광객들이 괴성을 지르며 뿔뿔이 도망치고 있었지만 그만은 그들의 흐름을 거슬러 사내에게로 달려갔다.
 명진은 무릎을 꿇고 앉아 콘크리트바닥에서 뒹구는 사내의 상체를 안아 일으켰다. 잘 익은 밀집처럼 붉은 물결이 일렁거렸을 남자의 머리카락은 먼지와 검불이 달라붙어 뿌옇게 그을어있었다. 사내의 상체는 홀가분한 체구와는 달리 축 늘어져 엄청 무거웠다.
 “왜 그러십니까? 어디가 불편한데요?”
 “나 죽습니다. 좀 살려주세요. 제발 좀. 선생님!”
 20대의 젊은이는 피부가 말쑥했다. 차분하고 여유로운 용모는 고통으로 흉하게 일그러지고 구겨진 모습 속에서도 골라낼 만큼 확연하게 심어져있었다. 그리고 찌푸린, 우묵하게 꺼져 들어간 눈매는 그가 극심한 근시안경쟁이라는 걸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지만 웬일인지 그의 눈에는 안경이 걸려있지 않았다. 신문에 얼굴을 가까이 박고 있던 아까의 모습이 기억의 창가로 바람처럼 스쳐지나갔다.
 “그 아가씨는 누구였습니까? 아는 사인가요?”
 고통에 몸부림치는 사람을 앞에 놓고서도 구급차를 불러야 한다는 생각이 떠오르기에 앞서 궁금한 것은 역시 아가씨였다.
 “몰라요. 제발 좀 구급차를 불러주세요.”
 사내의 입가에 흰 포말이 부걱거리기 시작했다. 위험수위가 시간이 흐를수록 높아지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모든 호기심을 버리고 휴대폰을 꺼내어 119에 전화를 했다. 그러나 사내는 벌써 맥을 버리며 몸부림마저 멈추고 고통조차 호소하지 못했다. 119도착을 기다리기엔 너무나 급박한 상황임을 파악한 그는 사내를 등에 업고 뒷골목에 주차해둔 승용차 쪽으로 달려갔다.
 “3천원입니다.”
 어느새 나타난 주차직원이 늙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날렵한 동작으로 시창의 와이퍼에 끼워놓았던 주차증을 뽑아들며 손목시계를 들여다본다. 역시 얼굴에는 웃음이 담겨있다.
 명진은 욱 치미는 짜증을 가까스로 억제하며 환자를 차 뒷좌석에 밀어 넣었다. 직원이 거들어주었다.
 5천 원짜리 한 장을 뽑아주었다. 거스름돈을 받을 겨를도 없이 그냥 시동을 걸고 차를 주차선에서 빼냈다. 백미러 속으로 거스름돈을 손에 들고 이쪽을 바라보는 주차직원의 모습이 배위에 탄 어부처럼 흔들거렸다.
 골목을 빠져나와 대학로에 진입했지만 퇴근길이라선지 교통체증 때문에 스피드운행이 어려웠다. 자주 적신호등에 막혀 3~4분씩 지체해야만 했다. 룸미러에 비친 환자는 죽은 것처럼 꼼짝 않고 육신을 꼬부린 채 좌석에 구겨 박혀있었다. 출발할 때는 워낙 그가 알고 있는, 강남의 삼성병원으로 가려고 했지만 길이 막혀 시간이 너무 지체될 것 같았고 그런 시간지체가 환자의 생명위험과 직결된다고 생각하자 마음이 조급해졌다. 사내의 죽음도 죽음이지만 그 죽음이 불러올 시끄러움과 원인추궁에 따른 뒷수습이 어려울 것 같아서였다.
 명진은 강남 행을 포기하고 거리좌우의 간판들을 총망히 훑어보기 시작했다. 평소 많이 다닌 익숙한 거리었지만 병원 같은 의료시설의 위치 같은 데는 신경 쓰지 않았었다. 대학로 하면 어느 으슥한 골목, 어느 은밀한 카페, 어느 해묵은 가로수까지도 낱낱이 알고 있다고 자부하던 곳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정작 그는 이 거리의 구체적 모습을 하나도 모르고 있었다는 걸 비로소 느끼고 악연함을 금치 못했다.
 마침 그의 눈에 자그마한 외과병원간판이 발견되었다.
 무작정 차를 도로변에 대었다. 주차금지구역인지 허가구역인지를 확인할 겨를조차 없었다. 그런 것들은 사람의 생명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않는가. 물론 오늘에야 발견했던 연구실내의 자질구레한 것들과 『스토크 바이 네일랜드』 그림과 현주가 맡겨온 추상석과 그 밖의 많은 것들도 포함해서 그랬다.
 환자를 등에 업고 병원 안으로 들어갔다. 구두 한 짝이 벗겨진 발이 보도에 질질 끌리는 사내의 육신은 천근같이 무거웠다.
 로비에 들어서기 바쁘게 간호사가 달려 나와 그를 도와 환자를 대기석에 내려놓았다.
 “원장님 어디 계시죠? 생명이 위험하니까 서둘러야…”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2층 계단위에서 횐 가운을 입은, 배가 뚱뚱한 의사가 서두르지 않고 여유 있는 걸음으로 의젓하게 내려왔다. 위급환자를 맞이한다기보다 정원으로 산책이나 소풍을 나온 한가한 사람 같았다.
 “교통사곱니까, 아니면 뇌졸증입니까? 그도 아니면 과음이나…”
 계단에서 로비벤치에 이르는 사이를 느릿한 어조로 연극대사 외듯이 중얼거리며 건들건들 다가왔다. 그 당당한 기품이 허술하고 자그마한 병원이지만 명칭만은 어마어마한 원장임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벤치에 앉았다가 갑자기 복통을 호소하며 몸부림치기에…”
 “어디서요?”
 “마로니에공원에서요.”
 “거기 가까운 곳에 서울대병원도 있는데 여기까지 오시다니…”
 아참. 그렇지. 그제야 대학로에 서울대병원이 있다는 기억을 건져냈다.
 왜 깜빡 잊고 있었지.
 “이런, 얼굴색이 벌써 시커멓게 죽었네요. 무슨 일인데 이 지경이 되도록 방치한거죠.”
 의사는 허리를 굽히고 환자의 눈을 뒤집어보고 입안을 들여다보더니 상황의 긴박함을 감지한 듯 갑자기 서두르기 시작했다.
 “간호사, 환자를 빨리 응급실로 옮겨. 그리고 노 과장을 불러와.”
 잠간 새에 환자는 간호사들에 의해 「응급실」이라는 간판이 붙은 자그마한 방안으로 옮겨졌다.
 로비에 홀로 남은 명진은 이대로 귀가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언제까지고 대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불안하기만 했다. 제발 아무 일도 없어야 할 텐데 하고 속으로 빌어도 보았다가 내가 저 사내와 무슨 관계가 있기에 사서 고생하지 하는 싱거운 의문도 골랐다가 하다가 밖으로 나와 담배를 붙여 물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사내의 죽음에 대한 우려가 깊어졌고 그 우려는 다시 마음을 불안하게 했다. 공연한 참견을 한 게 아닌가 하는 후회도 없지 않았다.
 진땀이 흘러내려 순식간에 셔츠가 흠씬 젖어버렸다.
 날은 어느덧 어슬어슬해지고 거리의 차량들도 한결 뜸해졌지만 더위는 좀처럼 물러서지 않는다.
 족히 한 시간은 걸려서야 의사가 응급실에서 나왔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개복한거죠?”
 “죽었습니다.”
 의사는 짤막하게 그러나 대수롭지 않게, 담담한 대화를 주고받듯이 한 마디 내뱉었다.
 “네. 죽다니요?!”
 그러나 명진은 어리둥절해졌다. 죽었다는 말의 의미가 실감 있게 다가오지 않았다.
 “독극물복용이 사망원인 같습니다. 더 정확한 건 부검을 해봐야 알겠지만. 피살인지 자살인지… 복통을 호소하며 구원을 청했다면서요?”
 “네.”
 “그럼 자살은 아닌 것 같고. 아무튼 경찰에 신고부터 해야겠습니다. 선생님과 무슨 관곕니까?”
 “모르는 사림입니다. 몇 번에 전화를 걸어야죠?”
 명진은 호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범죄 신고는 112가 아닌가요.”
 그러고 보니 명진을 향한 원장의 말투나 시선이 곱지가 않다.
 내가 뭘 어쨌다고?
 그러면서도 전화를 거는 손이 눈에 뜨이게 경련함을 자제할 수 없었다.
 자꾸만 사내에게 커피를 건네던 아가씨의 모습이 기억의 희미한 창가에 어른거렸다. 독극물과 커피가 나란히 표상의 화면에 광고물처럼 떠오른다.
 그렇게 아름다운 여자가 어찌!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남자는 분명히 자기 입으로 그녀를 모른다고 했다.
 그런데 그럴 리가 없다면 멀쩡하던 사내가 아가씨가 건넨 커피를 마시고 얼마 안 되어 갑자기 복통을 호소하며 콘크리트바닥에서 뒹군 사실은 또 어떻게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 그리고 내가 목격한 그 모든 과정이 확실하다고 믿을 만 한가. 나는 그림을 그리고 있었고 그들은 나의 시선이 선택한 그림의 소재에 불과했다. 그런 관찰이 죽음을 설명하는 충분한 근거가 될 수 있을까?

다음 주에 계속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