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무지개 그림자
-스토크바이 네일랜드와 마로니에 미완성 스케치 A
연재 2
느닷없이 노크소리가 들렸다. 그림에 너무 집착했던 탓인지 명진은 뜻밖의 상황변화에 흠칫 놀라며 화면에 깊숙이 박혔던 시선을 뽑아내느라 안간힘을 써야만 했다. 사실 그 노크소리는 사람을 놀라 게 할만한 요란함과 급촉함의 진폭을 갖고 있지 않았는데도 자신이 그 소리에 놀랐다는 사실에 다시 한번 경악했다.
그 소리는 너무나 익숙한 소리였다. 하루에 한두 번은 꼭꼭 듣는 귀에 익은 소리였다. 문득 문득 서류를 들고 나타났고 커피를 들고 나타났고 또 여사여사한 일로 나타났고…
“김 교수님, 현주에요. 들어가도 괜찮겠죠?”
담담하지만 가라앉은, 그러면서도 또렷한 음색을 지닌 그 목소리가 아니라도 조용하나 분명한 절주를 가진 노크소리만 듣고서도 그가 누구인지를 명진은 알 수 있었다.
홍현주 박사. 촉망받고 있는 미모의 국문과 여강사이다.
명진은 갑자기 당황해지기 시작했다. 그녀만 나타나면 발작하는 병적증상 같은 현상이었다. 그의 천성이기도 한 여유와 느긋함과 침착함은 미지의 초조와 불안에 의한 천방지축으로 추방되었다.
“지금 나가 봐야 되는데…”
한동안 의미가 증발된 무의식적 동작만을 반복하다가 겨우 한마디 골라낸 대답이란 것이 고작 이런 얼토당토않은 것이었다. 물음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대답이었다. 그녀가 연구실 안에 들어온다고 해서 나가지 못할 이유도 없다. 내방자의 호의에 대한 최소한도의 예의마저 결여된 무례한 짓거리에 불과했다.
왜 그녀의 등장이 번마다 명진의 마음속에 채무자와 같은 죄의식을 유발하는지 모르겠다. 진주처럼 맑고 구슬처럼 초롱초롱하던 그녀의 눈빛이, 그래서 천진난만하고 순수하고 투명하던 그녀의 눈빛이 저렇게 얼음조각처럼 담담하고 냉랭하고 차갑게 변한 것이 과연 그 때문이었단 말인가. 껍질이 터지도록 지나치게 익어버린 완벽한 성숙미, 지적완숙도를 속속들이 체질화시키고 있었다.
문이 열렸다.
오늘은 문 열리는 소리마저 웬일인지 푸르릉거리는, 저 에어컨소리와 더불어 질감 있게 들린다. 쇠가 갈리는 둔탁한 음향이 숨이 넘어가는 것처럼 빠드득- 빠드득- 마찰음을 발산했다.
명진의 시선에 맨 처음으로 포착된 것은 그녀의 까만색 구두였다. 하이힐이었는데 뾰족한 구두코는 뱃머리처럼 약간 위로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 그녀의 다리 사이로 스며들어온 햇빛이 구두위에서 방울방울 뒹굴며 금가루처럼 반짝이는데 볼록하게 부푼 발등에는 부드러운 탄력이 실려 있었다.
명진은 천천히 고개를 쳐들었다. 시선도 그녀의 하신으로부터 상신으로 서서히 이동했다. 살색 스타킹에 감싸인 다리는 검은 스커트에 가려진 무릎까지 미끈하게 이어져있었다. 옥으로 쪼아 만든 듯 흠집 하나 없이 완벽했다. 허벅지의 볼륨과 가슴의 볼륨은…
명진은 불에라도 데인 듯 급급히 시선을 끄고 외면했다. 어른임을, 여성임을, 성숙을 과시하는 그 모든 신체부위들에 눈길이 끌리기 시작한 것이 언제부터였던가. 왜 이전에는 그런 모습을 보지 못했을까? 정말이지 명진은 그녀도 성숙된 어른이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었다. 현주는 그에게 수많은 소녀들 중의 한 계집애에 불과했을 뿐 여자도 이성도 아니었다. 그 존재조차도 희미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그녀가 박사가 되고 강사가 되어 저렇게 무서울 만큼 완숙한 규수가 되어 그의 앞에 나타났을 때, 더구나 그녀와 어깨 나란히 한 교단에 서게 되었을 때 명진은 그 사실을 현실로 받아들이기가 힘들었고 그래서 놀라웠다.
지금은 서른 살의 노처녀 홍현주.
그게 왜 내 탓인가.
그녀는 뭐라고 말을 했다.
그러나 명진은 그 말을 듣지 못했다. 다만 그녀의 얼굴이 완벽한 균형과 조화로 옥으로 다듬은 듯 하고 맑은 면부에 새벽이슬처럼 찬 그늘이 이상하게도 평온의 분위기를 거느리고 안개마냥 피어있는 모습에 시선을 빼앗기고 있었을 뿐이었다.
“교수님, 이 수석에 이름을 좀 지어주세요.”
그제야 명진은 그녀가 내미는 회백색돌덩이 하나를 발견했다. 퍽이나 무거운 듯 그녀의 팔은 떨리고 있었고 윤기가 자르르한 은백색 세모細毛가 보송보송한, 뽀얀 손등에 냇물처럼 파란 혈관이 갈래갈래 줄기를 이루고 있었다. 이 모든 사소한 것들은, 아니 이 모든 의미 있는 것들을 난 왜 이전에는 거의 날마다 접하면서도 보지 못했을까?
그녀의 손등에는 창백하리만큼 맑고 투명한 냉기가 포진해있었고 손가락은 비온 뒤 금방 돋아난 죽순처럼 매끈했다. 매니큐어를 바르지 않았지만 손톱에서는 기름진 윤기와 광택이 일렁거렸다. 그때 소매물도섬에서 보았던 그녀의 손은…
“홍 박사, 이건…”
무심코 받아들긴 했지만, 이 돌이 막돌이 아니고 수석이라는 사실과 그 수석의 이름을 지어달라는 그녀의 부탁을 분명 들었음에도 어리둥절하긴 마찬가지였다. 우선 느낀 것은 그 돌이 생각 밖으로 부피에 비해 중량감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추측한 무게만큼, 그 돌의 부피에 적당한 중량만큼 준비시킨 팔 힘의 역부족으로 하마터면 바닥에 떨어뜨릴 번했다. 급강하하는 팔에 다급히 힘을 보강하여 사고를 면하긴 했지만 긴장 때문에 이마에 땀발이 번지기까지 했다. 그제야 명진은 실내온도가 에어컨작동에도 불구하고 몹시 무더움을 느꼈다. 수석을 떨어뜨려 깨뜨리면 그 가치는 순식간에 상실된다.
“평창강에서 채석한 수석인데 제가 가장 아끼는 애석愛石이에요. 쇳소리가 나는 경질의 수석인데 어떻게 보면 산수석山水石 같고 또 어떻게 보면 형상석形象石 같고 그 형태와 무늬가 다양하며 이름을 짓기가 힘들어요. 어떤 사람은 괴석형怪石形이라 하고 누구는 추상석이라고도 해요.”
현주의 백옥 같은 손길이 명진의 눈에는 거칠게만 보이는 수석의 이곳저곳을 애무했다.
“그래서 김 교수님께 이름 좀 지어 주십사 부탁드리러 온 거예요…”
얼핏 보아서 그런지는 몰라도, 그녀의 출연으로 긴장해진 탓인지는 몰라도 명진의 눈에는 그처럼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수석이 가치 없는 하나의 평범한 막돌덩이에 불과했다. 어쩌면 너무나 거창한 의미와 커다란 가치를 발산하는 현주의 존재 때문에 그 돌덩이의 가치가 대조적으로 폭락하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명진의 눈길은 수석에 떨어져있었지만 모양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난 수석엔 문외한인데… 사람을 잘못 찾아온 것 같습니다.”
그 말에는 진실과 함께 이 수석이 인연이 되어 그녀와의 거리가 한결 가까워질 것에 대한 우려감과 그것에서 해탈하려는 의도적 회피 같은 의미도 담겨있었다. 그녀가 날이 갈수록 성숙한 이미지로 그의 마음속에 윤곽을 그리며 다가서는 현실에 명진은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남녀사이에는 더 이상 다가서면 안 되는 한계선이 있다. 그 한계선에는 언제나 아내가 매복 진을 펴고 상황을 감시하고 있어서 더구나 불안했다.
그런데 현주 씨는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복도에서 마주쳐도 인사를 건네고 이 구실 저 구실을 만들어 가지고 날마다 들락날락 연구실출입을 밥 먹듯이 한다. 복도에서는 피하거나 시선을 외면할 수 있었지만 연구실출입을 회피할 방도는 없었다. 서류를 전달하고 책을 빌리고 커피를 끓여오고… 이번에는 수석까지 들고 나타났다. 그 모든 행동을 그녀는 조금도 서두르지 않았고 미소 한점, 교태 한 가닥 보이지 않고 일상처럼 조용히 진행해왔다. 담담하게 사무적으로 이어왔다.
차라리… 차라리…
“교수님께서는 문학뿐 아니라 미술에도 박식하시니 미학적 안목도 남다르실 거라고 믿고 부탁드리는 거예요. 교수님께서 지어주신 좋은 이름덕분에 집에 두고 양석하면 행여 수석秀石이나 명석名石이 될지도 모르잖아요. 여길 보세요. 돌 거죽을 보시면 석질이 단단한 표면과 물에 씻긴 속살계선이 분명하잖아요. 형상도 풍부하고요. 다만 맞춤한 이름을 고를 수가 없군요.”
수석이라? 형태도 알아 볼 수 없는 수석에 이름을 지어 달라고!
들을수록 그녀의 부탁 뒤에 은폐된 진의가 무엇인지 아리송해진다. 그녀가 수석애호가이고 주말이나 휴일이면 자주 강가나 산으로 탐석행을 떠난다는 소문을 들은 지는 오래었다. 그처럼 눈부신 미모의 아가씨가 거칠고 험난한 계곡과 강가와 산 속을 헤매며 물속에서 돌멩이를 줍고 흙 속에서 돌덩이를 파내다니!
전혀 어울리지가 않았다. 어쩌다가 현주가 수석장이가 되었을까? 어쩌다가 그녀가 계곡이나 산 흙 속에 파묻힌 돌멩이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을까? 그녀에겐 이 세상이, 이 세상 사람들이 돌보다도 더 하찮아 보였던가.
그녀의 담담한 표정과는 달리 체취는 싱그럽고 싱싱했으며 숨결에서는 부드럽고 훈훈한 열기가 풍겼다. 고개를 숙여 몇 가닥 흘러내린 머리카락은 창문으로 흘러드는 햇빛에 금실처럼 반짝거렸다. 그녀의 육신이 거느린 체취와 빛깔, 숨소리와 머리카락 그리고 그녀가 열거한 수많은 낯선 단어들이 구축하는 세계가 명진에게는 생소했고 그래서 흥미로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두려웠다.
“이걸 내가…”
명진은 그녀가 그토록 애지중지한다는 수석을 『이것』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었다. 이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수석은 그의 손에 들린 채 잠시 낙착 지를 찾지 못하고 허공에 멈춰있었다. 이 좁은 방안에서는 그 수석을 안치할 빈자리는 없었다. 이미 물건을 놓을만한 공간들은 명진의 소지품들이 빈틈없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냥 손에 들고 있을 수도 없었다. 무거워서도 어딘가에 내려놓아야 했다.
“교수님께서도 수석에 흥취가 있으시면 어느 날 제가 저희 집에 모시고 싶어요.”
현주가 허리를 펴면서 넌지시 던져오는 말을 들으며 명진은 이 수석에 의탁한 그녀의 의도를 읽을 수가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은 단순한 수석이 아니라 명진에게 보내는 어떤 메시지이며 암시이기도 했다. 이제 그는 수석이라는 표면적이미지로 포장한 은폐된 이미지의 의미를 해석해야만 하는 과제를 알게 되었다.
무거워서 우선 테이블위에 내려놓았다.
텅하는 웅글진 소리와 함께 수석은 책 더미가 차지하여 얼마 남지 않은 테이블의 공간을 거의 독점해버렸다. 어쩐지 그 메시지의 의미도 그 만큼 부피가 클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받아놓고도 받는 것이 옳은지에 대한 해답은 석연치가 않았다. 일견 수석의 수납이 그녀의 어떤 요구의 접수로도 될 수 있기 때문에 그랬다.
그녀가 나에게 무엇을 요구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들 사이에 아직도 단순한 선후배관계가 아닌, 청산하지 못한 과거의 잉여물이 남아있기라도 하단 말인가.
“받아놓긴 했습니다만 실망시키지나 않을지…”
그녀와의 대화가 늘 기다란 생략부호가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이상해진다. 불확실한 태도표시의 몫은 언제나 명진의 것이었다.
“바쁘지 않으니까 시간촉박 같은 건 받지 않으셔도 돼요. 그럼 수고 부탁드려요.”
고개를 약간 숙여 예의를 차리고는 조용히 돌아서 밖으로 나갔다. 일순 어깨 뒤에 드리웠던 장발이 가슴위로 쏟아져 내리며 폭포수 같은 그윽한 정취를 만들어낸다. 그리고는 문이 터지도록 가득 거느리고 들어왔던 광채를 한 가닥도 남기지 않고 낭하로 데리고 사라졌다.
그녀는 방에서 나갔지만 실내에는 여전히 그녀의 체취와 목소리가 남아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모습은 벌써 안개처럼 흐릿한 기억의 늪 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내가 본 것은 무엇이고 들은 것은 무엇인가?
그제야 명진은 현주의 존재로 하여 『스토크 바이 네일랜드』그림과 이 방안에서 발견한 모든 이미지들을 까맣게 망각하고 있었음을 깨닫고 놀랐다.
다음 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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