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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무지개 그림자 연재 1 "스토크바이 네일랜드"와 마로니에 미완성 스케치 A

by 8866 2007. 10. 20.

 

장혜영 장편소설

 

연재 1

 

 

 

 


                                              무지개 그림자                                 

 

 

                                                          장혜영
   

 

      1. 『스토크 바이 네일랜드』와 마로니에 미완성 스케치 A

 

 교수연구실.
 9평이 될까 말까한 연구실안은 어제 모습과 조금도 다른 것이 없다.
 기다란 낭하를 지나 진녹색 출입문안으로 들어서면 바닥에서부터 천장까지 쌓인 책 더미 사이로 깊은 계곡마냥 트인 실내통로와 테이블이 나타나고 이어서 회전의자와 컴퓨터, 창문커튼과 에어컨…
 어느 하나도 변한 것은 없었다.
 밝고 산뜻한 낭하의 어딘가 고풍스런 느낌의 디자인이며 여유 있게 완곡한 나선형무늬를 가진 출입문의 나무 결이며 붉은 청동 빛을 발광하는 도어 록의 광택이며 구두 징에 닳은 타일바닥의 뿌연 흔적이며…
 모두가 원상그대로이다.
 명진은 이러한 풍경을 시선 한 가닥 팔지 않고서도 느낄 수 있었다. 아니, 그것들은 시선을 주지 않아도 스스로 시선에 포착되었다. 그리고 구태여 날마다 그런 것들에 닿는 시선에 새삼스럽게 신경의 날을 갈거나 의미를 담을 필요도 없었다. 풍경은 풍경대로 명진은 명진이대로 일정한 거리를 두고 공존했다.
 그런데 오늘은 그것뿐이라고만 생각했던 이 연구실의 무심하고 심드렁한 공간에서 명진은 갑자기 신대륙이라도 발견한 듯한 기분이다. 날마다 보면서도 보지 못했던 수많은 새로운 현상들을 목격하게 된 것이다. 커튼원단에 정교하게 디자인된 백합은 왜소하지만 단아하고 완벽한 기하학적균형미와 바탕색인 우윳빛과 현란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간혹 가다 보이는 책이나 의자, 테이블에 긁힌 벽지의 흔적들과 파리의 분비물 같은 것도 오늘만큼은 그의 시선에서 소외되지 않았다. 책 더미가 되는대로 쌓인 벽 구석에서 가는 거미줄 몇 가닥도 발견했고 테이블 밑의 음침한 곳에서, 어디서 어떻게 기어들었는지 알 수 없는 붉은 개미 한 마리와 날렵하게 소파 밑으로 숨어드는 구릿빛의 통통한 새끼를 무겁게 밴 바퀴벌레도 눈결에서 놓치지 않았다.
 지금까지는 이 좁은 공간의 당당한 주인이 자신뿐이라고 자인했었다. 그런데 오늘 보니 이 공간은 거미와 개미와 바퀴벌레들과 공유한 공동구역이 아닌가. 놀라지 않으려고 해도 않을 수가 없었다. 이건 침략행위이고 월권행위이다.
 그가 본 것은 그뿐이 아니었다.
 누렇게 빛이 바래고 보풀인 고서古書들과 그 위에 두텁게 내려앉은 먼지,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찌그러든 낡은 서가의 어둡고 칙칙한 밤색 빛깔, 손길과 엉덩이에 닳은 가죽소파와 회전의자, 에어컨에 매달린 채 쉴 새 없이 펄럭이느라 먼지를 뒤집어쓰고 까만 댕기로 변해버린 노란 댕기 그리고 느닷없이 후각을 자극하기 시작한, 구리텁텁한 곰팡내며 맵싸한 니코틴냄새며 진한 커피냄새…
 이런 모든 것들을 그는 왜 날마다 보면서도 느끼지 못했을까?
 벽에 걸린 달력의 그림도 명진은 오늘 아침 출근해서야 처음으로 그 존재를 확인했다. 달력의 상단부에는 3차원공간원칙을 거부한 평면구도의 동양풍속화 한 폭이 그려져 있었다. 토양색갈인 노란색과 물색갈인 파란색은 눈이 부실만큼 선명한 색상대비로 시선을 농락했다. 나무와 억새, 부들, 갯버들이 우거진 강가에서 웃통을 벗어던진 동네 애들이 고기잡이가 한창이다. 시냇물소리가 돌돌돌, 사내애들 웃음소리가 깔깔깔 들려올 것만 같은 생동하고 싱싱한 분위기다.
 그림의 하단에는 7월 삼복에 대한 설명이 부연되어있었다.
 
 삼복은 음력 6월에서 7월 사이에 들어있는 계절인데 초복, 중복, 말복으로 나뉘어 이를 통 틀어 이른 말이 삼복이다…
 
 그 풍속도와 통속적설명이 그의 학문연구에 어떤 의미와 관계가 있는지를 떠나서 문제는 그가 상당히 오랫동안 그 그림의 존재를 이 실내에서 망각하고 있었다는 점이 중요했다. 거리로 따지면 테이블에서 달력까지의 사이는 불과 2m밖에 안되었다. 더구나 그와는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었다.
 그와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는 물건들에는 또 전자벽시계도 있었다. 등 뒤의 벽에는 서양화 한 폭과 두 점의 서예작품이 걸려있었지만 그들의 존재도 오늘아침에야 비로소 확실하게 깨달았다.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보름 전, 바로 마로니에공원피살사건이 발생하기 며칠 전에 『스토크 바이 네일랜드」』라는 그림 한점을 책 더미 속에서 뒤져낸 것이 원인이라면 원인이었다. 맨허튼의 마천루마냥 테이블 앞에 아슬아슬하게 쌓아두었던 책 더미가 허물어져 다시 정리하던 중 우연히 눈에 띠는 그림 한 폭을 발견했다.
『스토크 바이 네일랜드」』라는 그림은 이전에도 한두 번 본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번만큼 명진을 유혹한 적은 없었다. 그 화면에 시선이 떨어지는 순간 명진은 그림이 발산하는 강 유력한 유혹에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은은하면서도 부드럽고 여유와 모호가 안개처럼 피어나는 화폭은 자석처럼 그의 시선을 흡인해갔다.
 물론 그가 이 그림을 처음으로 보았을 때는 아직 미술에 대해 잘 모를 때었다. 그렇다면 지금은 그가 미술에 대한 이해가 더 깊어졌기 때문일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것만큼 이유로 들기엔 어딘가 석연치 않은 점도 있는 것 같았다.
 존 컨스터블 (jonhn constable. 1776~1837)은 『스토크 바이 네일랜드』와 『햄프 스테드 히이드』와 같은 명화들을 성공적으로 창작해낸 영국의 유명한 자연주의화가이다. 그는 평생 영국시골의 낯익은 풍경들을 그림의 소재로 묘사했다. 그는 늘 풍경화란 관찰할 수 있는 사실에 입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관찰할 수 있는 사실이라?!”
  명진은 소리 내어 중얼거리며 또다시 확대경을 집어 들고 그림을 감상하기 시작했다. 화면의 실물들을 면밀히 관찰하면서 그는 관찰할 수 없는 사실은 어쩌면 오늘 내가 느닷없이 발견한 이 방안의 소외되었던 현상들을 가리키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골라본다. 어쩌면 『관찰할 수 없는』이라는 표현보다는 『관찰하지 않은』이라는 표현이 이 방안에서 일어난 오늘의 사건에는 더 적절할지도 모른다. 『관찰할 수 없는』은 시각의 한계를 의미하지만 『관찰하지 않은』은 시각의 기능정지와 포기를 의미한다.
 둘 사이에는 도대체 어떤 차이가 있을까? 시각은 자기결여와 기능의 한계 때문에 볼 수 없는 무언가가 있고 또 볼 수 있는데도, 기능권내의 대상인데도 기능조절에 따라 『볼 수 없는』 또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화가 컨스터블이 『스토크 바이 네일랜드』에서 관찰한 소재는 무엇이고 『볼 수 없었던 건』무엇일까?
 명진은 확대경을 천천히 이동시키며 화면에 묘사된 이미지들을 자세히 관찰해 나갔다.
 그림 왼편상단의 공간은 짙은 구림이 드리운 하늘에 할당되었고 그 아래로는 교회당 비슷한 고층건물과 숲 속의 단층가옥들이 있고 녹지와 나무울타리와 그 울타리 안에서 밖을 지켜보고 있는 아이와 울타리 밖의 잔디위에 비스듬히 누워있는 농부가 보인다. 그림 왼쪽 최 하단에서부터 오른쪽중심부에 이르기까지 농기구, 수레, 말들이 길게 종대를 이루고 있고 한길양옆에는 키 높이 자란 교목 숲이 울창하다. 낯선 서양풍의 시골풍경임에는 틀림없다.
 명진은 확대경으로 그림을 관찰하는 한편 컴퓨터 키를 두드려 포착한 정보들을 입력하기 시작했다.
 
 화가가 본 사물
 
  1. 오솔길.
  2. 말과 수레 그리고 쟁기.
  3. 나무와 숲.
  4. 농부.
  5. 울바자 뒤의 어린이.
  6. 녹지, 잔디밭.
  7. 숲 속의 마을과 가옥.
  8. 교회당 혹은 탑식건물.
  9. 구림 낀 하늘.
  10. 기타.
 
 그림의 명지도와 몽롱함.
 
  1. 오솔길은 수레바퀴자국만 선명할 뿐 노면위의 돌덩이나 삭정이, 풀잎 같은 것은 보이 지 않는다.
  2. 수레의 구조, 사용된 목재, 수레바퀴살의 개수와 형태, 적재내용물파악이 불가능하다. 종곡種穀을 실었을 거라는 추측이 틀리지 않을 경우에도 어떤 종곡이며 분량은 얼마이고 어떤 자루에 담았는가. 도시락에 챙겼을 음식물은 무엇일까 라는 파악 역시 불가능하다.   
  3. 말의 종류, 표정, 생김생김과 나이, 암수식별이 불가능하다.
  4. 나무의 수종, 가지와 구체적 잎의 모양, 수령樹齡, 잔디의(풀) 세부묘사도 불투명      하다. 나뭇잎과 잔디는 탁하고 단조로운 색깔의 덩어리에 불과하다.
  5. 농부가 입은 옷의 원단, 디자인, 단추모양과 얼굴표정, 나이, 건강상태 등에 관한 정보제공이 불확실하다. 몽롱한 분위기뿐이다.
  6. 아이의 표정, 나이, 헤어스타일, 의상디자인, 키, 체중이 모호 속에 은폐되어 있다.
  7. 집의 형태, 구조, 건재, 창문의 디자인, 층수, 부지면적, 건축특징, 주인 등 메시지가 불충분하다. 교회당일 거라는, 가옥일거라는 추측만 가능하다.
  8. 숲 속에 있어야 할 새, 개미, 거미, 다람쥐, 각종 벌레 그리고 풀, 꽃, 돌멩이들이 수레, 나무숲에 가려 소외되었다.
  9. 거리가 멀수록 사물은 몽롱해진다.
  10. 마주 오는 수레와 농부는 완전히 희미한 윤곽뿐이다.
  11. 한마디로 감상자가 볼 수 있는 건 모호함과 불완전함과 일종의 분위기뿐이다.
 
 그런데 명진은 이상하게도 이 그림을 보면 볼수록 시각기능의 한계에 의해 소외되고 화가의 주 시선에 의해 배제된 것들에 대한 호기심이 강렬하게 발작함을 느꼈다.
 농부의 나이는 몇 살이나 되고 표정은 어떠하며 이마의 주름살은 몇 개나 될까? 숲 속에는 어떤 동물과 벌레들이 있고 또 마을의 가옥들은 어떤 형태이며 수레에 실은 짐은 무엇일까?…
  한마디로 존 컨스터블은 『볼 수 있는 것』은 다 보았음에도 확실하게 본 것은 하나도 없다. 이 얼마나 황당한 일인가! 표정이며 나이를 전혀 모르는 농부를 본 것이 과연 허상이 아닌 진실일까?
  화가에게 그런 것들은 『관찰할 수 있는 사실』이 아니어서 소외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관찰할 수 없는』원인은 시각의 한계뿐일까? 아니면 화가의 주 시선의 선택에 의해 배제된 것일까? 나는 이 작은 방안의 모든 것들을 날마다 눈으로 보아오면서도 『볼 수 없었다』 아니 『보지 못했다』 그것은 결코 시각의 기능적 한계에 의해 초래된 것만은 아니었다.
 그리고 더구나 의아스러운 것은 내가 왜 갑자기 그림을 핑계로 시각의 선택과 소외에 대해 흥미를 가지게 되었는가 하는 이유였다. 이 방안의 소외되었던 모든 현상들에 시선을 옮기고 의미를 부여하는 데는 다른 어떤 이유가 있는 건 아닐까? 모호와 불확실은 예술작품인 컨스터블의 그림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생각 속에도 존재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미술작품의 이미지를 심미적으로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물리적으로 해부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똑똑똑.

 

다음 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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