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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철학

[스크랩] 천개의 고원에 대하여

by 8866 2006. 10. 12.
{천개의 고원}에 대하여
Antonio negri



하이데거가 딜타이와 요크 폰 발템부르크사이의 왕복서한을 주석하면서 '역사의 근본적 특징을 인간의 현존재 그 자체의 존재 특징의 인식에 의해 얻어진 잠재력이라고 이해'하기 때문에 하이데거는 바로 {존재와 시간]에서 정신과학과 그것의 전통의 종언을 선언하고 있다. 하이데거는 '역사성을 이해하는 관심'은 '실재적인 것과 역사적인 것의 유적 차이를 가공하는 일이라고 보는데, 요크가 잠재력에서 신비주의로 넘어갈 때 그와 결별한다. 역사성에 대한 질문이 역사적 존재의 존재구성을 알아보는 존재론적 질문임이 드러나면 딜타이 쪽으로 향한다.
하이데거는 두가지 조작을 하는데 한편으로는 정신과학을 계몽과학과 일종의 헤겔주의를 계승하는 것으로서 그것이 형이상학의 중심을 점하고 있는 장소에서 추방한다. 딜타이의 역사주의는 역사성의 의미탐구를 발전시키고, 객관성의 이론에서 표현이론으로 비판적 작업을 완성한다. 하이데거는 근대비판의 운명적인 리듬을 양의적으로 깨뜨리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마키아벨리에서 스피노자와 니체까지 역사성을 절대적인 잠재력으로, 존재를 현존재의 능력으로 파악하고 있던 근대성을 둘러싼 또다른 전망으로 되돌아간다. 스피노자의 [신학정치학]에서는 역사의 의미는 어떤 능력, 즉 상상의 현실화처럼 간주되었다.
여기에서 하이데거가 양의적으로 다시 받아들이고 고정시킨 것은 역사의 의미에 대한 절대적으로 내재적인 정의인, 역사성의 개시로서의 존재의 욕동이다. 니체는 어떤 모호함도 없이 역사주의의 모든 무덤을 파고 동시에 그것을 반시대적이고 잠재적이고 창조적인 하나의 존재이론의 핵심으로 만드는 역사성의 개시를 요구하는 근본적인 비판점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여기서는 시간 그 자체의 자기초월이 작동하고 있다. 짜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한다. "죽은 자들을 해방시키는 것, 그리고 모든 그랬었다를 '나는 그것을 원하고 있었다'로 변형시키는 것,....의지, 이것이 해방의 이름이며 기쁨을 가져오는 자의 이름이다.....이미 일어난 일 모두에 무력한 의지는 분노로 가득차서 과거를 응시한다. 의지는 되돌아봄을 의욕할 수 없다. 즉, '그랬었다'. 바로 그것이 의지가 굴릴 수 없는 돌의 이름이다." 다름아닌 '굴리다'가 역사성의 모든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딜타이는 역사적 주체성의 문제에 사로잡혀서 '역사는 그것에 최고도의 과학성을 상정하려고 해도 부수하는 원인에서 출발하여 현상들의 일정한 총체를 설명할 수 있는 완성된 지상의 과학을 구성할 수 없다'고 본다. 자아의 확인과 동일한 자아에 대한 그 이후의 선분화되고 프랙탈적이고 확산적인 관념사이에 끼인 칸트적 연구에서부터 역사적 유형학의 구축에 이르기까지, 역동적이며 생산적인 일관성을 역사주체에 부여하고 체험의 능력을 그 속에서 밝혀내는 [이데]에서의 심리학으로의 회귀부터 최후의 생기론적 입장까지 그러하였다. 딜타이의 행로를 충분히 연구함으로써만 하이데거적인 존재론적 결정, 잠재력으로서의 역사성의 의미는 자신들의 모든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
"우리들의 진리에의 의지를 다시 질문하는 것, 담론에 사건으로서의 특징을 되돌려주는 것, 마지막으로 기표의 지상권을 제거하는 것" 푸코가 취임강연에서 이 프로그램을 발표했을 때, 그는 역사기술과 정신과학들 일반에 대한 비판의 극한에 있으며, 동시에 딜타이와 하이데거 사이에 철학적 의식으로서 구성된 역사의 잠재력의 개시를 표현하고 있는 양의적인 단계를 통과한다. 특히 푸코가 원숙기의 저작에서 마침내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가 배치로서의 역사성이라는 주제에 접근할 때 틀은 그때부터 고정되어 있었다. 문화적이고 생기론적인 이해의 실험은 새로운 관점안에서 변용된다. 그 관점이란 험한 길을 끝까지 걸어가지 않으면 안되는, 끊임없이 창조되는 존재의 세포조직으로서의 세계의 현전이다. 정신과학의 종언, 그것은 존재론의 쇄신이다.
이런 장대한 기획은 동시대의 사상사에서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정신과학은 확실히 니체에서 하이데거로, 딜타이에서 푸코로 향하는 오랜 비판적 과정 이후까지 살아남을 수 없었고, 더더욱 상대주의적이고 회의적인 새로운 철학풍토에서 무효화된다. 변증법을 모든 핑계 속에 버리면, 역사적 주체에 존재론적 배치를 결정할 수 있도록하는 아래로부터의 전망을 다시 획득한다면, 상대주의와 회의주의의 차원 및 지평으로 다시 되돌아간다.
총체성을 거부하는 구성운동은 바로 이같은 이유에서 불안정한 상태에 그리고 특수성에 사로잡힌 특이성에 이를 수 밖에 없다. 이렇게 해서 역사주의의 종언으로부터 점차적으로 역사의 종언의 결정으로 넘어간다. 즉, 역사주의는 다시 승리자가 되었지만 그것은 미디어의 지식의 백과사전 형식에서이다. 포스트모던의 군림은 딜타이에서 하이데거에 이르는 비판적 교육의 타락의 단계들이다. 하이데거가 자신의 가장 좋은 부분을 우리들에게 명백히 하는 것은 역사비판의 기반으로서, 자신의 경험의 풍요함에 대한 개시로서, 역사성의 경험으로서, 존재론적 통찰이라는 무기를 가지고, 정확히 실제적인 것에 대한 비판에 착수함으로써이다. 잊혀진 니체를 의식적으로 다시 되살려 사람들이 함부러 버린 상상에서 스피노자주의를 무의식적으로 재생산한 것은 바로 하이데거인 것이다.



[천의 고원]은 그 존재론적이며 구성적인 차원에서 역사성의 관점을 계속 쇄신하면서, 정신과학을 재발명한다. 새로운 표현이론과 새로운 존재론으로 포스트모더니티를 논박하며 그 구조를 폭로하고 분쇄하는 것이다. 문제는 창조의 관점에서 창조된 것을 획득하는 것의 문제이다. 창조력은 기계이자 정신인, 자연이자 개체인, 특이성이다 복수성인 하나의 물질적인 리좀이다. [천개의 고원]은 믿을 수 없는 선취능력을 가지고 있다. 정보과학과 자동화의 발달, 미디어사회와 커뮤니케이션적 상호작용이라는 새로운 현상, 자연과학과 과학기술에 의해 계속되는 새로운 길, 전자공하, 생물학, 생태학 등에서 새로운 길은 겸토되어진다. 미래의 극작술이 전재되는 틀이 지닌 표면성-지속적이면서 환원불가능한, 분명 존재론적이지 선험적인 것이 아닌, 구성적이지 체계적인 것이 아닌, 창조적이지 자유로운 것이 아닌 표면서-은 사실 존재론적이다. [천의 고원]은 네가지 기본적인 주제로 구성되는데, 첫 번째는 표현과 배치이론, 두 번째는 그물망이론, 세 번째는 유목론, 네 번쩨는 존재론적인 표면이론이다.

가) 표현과 배치이론은 들뢰즈가따리의 최초의 철학이다. [앙티 외디푸스]의 정신분석비판이 이 힘의 구도를 확인하였다. 표현의 힘은 존재론적이고 창조적이며 구조화되어 있다. 개별적 혹은 집합적인 특이성, 행위자와 사건관계의 결정이 작동한다. 개별성의 원리는 원래는 능동적이며 운동의 차원에 따라 욕망 혹은 기계적 요소의 다발을 통해 전개된다. 애초의 힘은 주체적이고 구축적인데, 그것은 배치이다. 역사로서 존재는 주체적 배치의 생산 혹은 소산으로 이해된다. 역사성은 현존으로서 주어진다. 이 접합 속에 운동에 보편적 잠재력으로서 욕망의 해방이, 베르그송의 현상학이 스피노자적 의미가 녹아들어 있다. 근대성의 특징인 인간과 기계 관계는 주체적인 배치의 내용과 형식이 된다. 그에 따라 삶이 조직되고 세계가 변용하는 구체적 형식이며, 그 내부에서 주체성이 산출되는 물질적 접속이다. 관념의 질서 및 접속은 사물의 질서 및 접속과 동일한다. 그렇더라도 인간과 기계 관계는 항상 하나의 특이한 사건, 즉 물질성을 점령하고 주체성을 산출하는 하나의 사건이다. 존재의 구축은 사건에서도 특이성에서도 생기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사건이란 신체의 생산이며, 신체의 총체와 그 관계의 역사적 생산이다. 신체들의 생산이란 역사성의 생산이다. 역사성이란 신체들의 생산이다. 기관없는 신체란 욕망의 절대적인 내재성의 장이며 역사성에 특유한 일관성의 구도임을 명확히 하고 있기 때문에 결국 기관없는 신체에 대한 위대한 서적이란 [에티카]가 아닐까?

나) 그물망 이론은 구성의 리듬을 추적할 수 있다. 욕망의 힘과 그 기계적 과정 속에 생산의 심급을 설정한 뒤에 현동적 확장과 그것의 운동의 분석으로 옮겨간다. 이 공간을 특징짓는 것이 바로 리좀이다. 특이성의 생산의 풍요로움 속에서 삶의 맥락이 상관관계-통일성과 복수성, 접속과 이질성, 단절과 탈주선-의 총화로 나타나고, 끊임없이 갱신되는 지도제작법에 따라 역류하고 자기중심화되는 것이 아니라 팽창하는 새로운 체계들을 형성한다. 리좀적 긴장과 기계적 배치가 언표행위의 주체적 배치로 나타날 때 그 때 구성적 역동학은 리좀적 물리학에서 과학을 특징짓는 기호체제로 대체된다. 리좀학은 거기에서 분열분석을, 분열분석은 지층분석을, 그 다음에는 실천론과 미시정치학을 참조한다. 먼저 지층분석에 관해서는 과학은 리좀의 수목상태에 의해 구축된 체계적 지평 위에 확립되어 갈등성을 밝힌다. 체계가 그 자신의 수목상태를 구성하고 있다면 갈등은 현실적 그물망의 자기구성 규칙으로서 끊임없이 반복된다. 스피노자의 경우에서처럼 삶을 생산하는 것은 바로 전쟁이다. 기계적인 언표적인 수목상태의 각 지점은 다시 갈등적 양태에 따라, 위로도 아래로도 다른 수목상태를 향해 다른 그물망을 향해 계속 다시 열린다. 생성이란 표현의 마그마에 대한 혁신적인 결과이며, 어떤 종류의 전쟁의 해결이며, 진정으로 이적에 의해 갈등적 장면이 다시 시작된다.

다) 화용론과 미시정치학은 유목론에서 구성된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전쟁의 지평은 화용론적인 능력에 의해 경계가 정해진다는 것이다. 갈등적 수목상태로부터 산출된 주체성은 노마드적이다. 즉 자유롭고 역동적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주체성은 기계적 배치를 통해 조직된다. 즉 전쟁기계로서 조직된다. 전쟁기계들은 기획을 해석하며, 욕망과 반욕망의, 자유와 필연성의 구별을 작동시키면서 인간세계를 구성한다. 역사성의 의미를 결정하는 것은 바로 전쟁에서의 선택이다. 내재적인 지평 위에서 의미란 욕망의 표현이며, 사건으로서, 모든 초월성과 마주대하는 구별로서, 생성을 막는 모든 것에 대한 적의로서, 욕망의 언표행위 및 조직화이다. 국가에 직면한 분자적 질서, 그리고 특히 성숙한 자본주의 국가에 직면한 분자적 질서는 자발적으로 하나의 몰적 장치를 편성하고 필연적으로 반권력이 된다. 유목론의 기초를 이루는 관점은 진정한 실천철학이다. 산출되고 고정된 역사의 질서속에서 유목민이 되는 것은 리좀적 수목상태에 직면해 있고 순수하고 단순하게 현실을 구성하고 있는 기계적 배치와 언표행위를 영원히 산출하는 것을 의미한다. 정치는 미시배치의 장소설정, 분자적 그물망의 구축이며, 미시정치학의 화용론이란 욕망의 실천으로서의 화용론이다. 몰적 질서의 목적은 욕망의 힘을 흡수하고, 오직 분자적인 것의 실천적인 흐름을 억제할 뿐인 장치를 개편하는 것이다. 즉, 몰적인 것은 정의상 분자적인 것에 대한 존재론적 장애이다. 혁명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그 무한한 과정에서 하나의 사건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욕망의 창조성에 의해, 주체의 무한한 분자적 운동에 의해, 끊임없이 다시 발명된 화용론에 의해 조직된 하나의 탈주선, 혁명이란 거부의 존재론적 사건이며, 그것의 무한한 잠재력의 실현이다.

라) 세계의 구성적 전망을 산출하고, 모든 주체성과 모든 사건이 그 계보학을 줄거리로 하는 고찰들 전체에서 출발하자. 하나의 같은 표면인 천개의 구도, 홈페인 곳, 단절, 구축, 그리고 재구축으로 가득한 하나의 표면이 있다. 욕망의 능력은 하나의 영토의 표면을 스스로 만들고 그 변형을 무한히 반복한다. 새로운 영토는 항상 생산적이며, 무한히 생산적이다. 다양한 창조행위의 강렬도만이 충족시킬 수 있는 하나의 긴장속에서 기계와 언표행위의, 과학과 존재론의 관계는 포괄적이다. 과학은 언표행위의 기능 전체가 화용론의 대상이 될 때마다 존재론적인 일관성의 구도를 구축하며, 혹은 사건 속에서 하나의 결정속에서 실현된다. 즉, 기계적 배치, 갈등의 확산, 기획의 언표행위, 욕망의 표현, 사건속에서 무한자의 실현이다. 새로운 현상학은 세계를 생산으로, 생산을 주체성으로, 주체성을 욕망의 능력으로, 욕망의 능력을 언표행위의 체계로, 언표행위를 표현으로 귀착시키는 과정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또 그 역도 마찬가지아다. 주체적 표현에서 세계의 표면으로 현동적인 역사성으로 올라감으로써 과정의 의미가 명확해진다. 과정의 의미란 추상화 바로 그것이다. 세계를 산출하는 주체는 자신의 기획이 확장된 지평속에서 그 자신에게 적합한 실행을 더욱더 직접 실현하게 된다. 기계적 배치 혹은 주체성의 끊임없는 과정은 더더욱 고도의 추상으로 올라간다는 것이 아주 중요한 것 같다. 그러나 이 추상화는 다시 욕망이 된다.



[천의 고원]은 19세기 유물론을 재정의한다. [철학이란 무엇인가]는 교육적 해설서로 토대에 있는 개념적 기제들을 대중화시킨다. 여기에서 우리는 자본주의 발전의 새로운 차원들이 지닌 기능 속에서, 가장 추상적인 구도를 인식하는데 이르는 역사유물론의 쇄신의 근본요소들을 확인할 수 있다. [천의 고원]은 그것이 발전시키는 분석의 확장과 복잡성을 넘어서, 맑스가 [요강]의 '기계에 대한 단상'에서 경향적으로 확인하고'일반적 지성'의 사회라고 정의한 것과 같은 구도를 개략적으로 그리고 있다. 인간과 기계, 사회와 자본의 상호작용이 극히 밀접하기 때문에 임금노동의 작취가 통용되지 않고, 부의 생산과 사회의 재생산이 전적으로 입각해 있는 사회적이고 지적이며 고학적인 새로운 힘의 능력에 직면한 빈약한 착취기반이다. 그것은 지적이기도 하고 과학적이기도 한 사회적인 노동의 능력을 명백하게 나타내는 새로운 주체의 구축을 시험하고 있다.
하나의 주체기계는 하나의 신체이기도 한 지적 주체, 생산력이기도 한 욕망하는 주체, 새로운 존재의 구성적 욕동속에 전적으로 통합되는 다원적이고 산포된 주체이다. 여기에서 근본적인 것은 직접적인 물질적 착취의 영역에서 정치적 지배의 영역으로의 이행속에서 생산의 가치화릐 전면적 탈구이다. 들뢰즈는 푸코의 권력분석을 참조하면서 훈육사회에서 현대의 국가형태의 기본적 특징인 통제사회로의 이행을 강조한다. 그 최고도에 달한 적대는 말하자면 텅빈 상태가 되며, 사회적 명령은 무용하게 된다. 새로운 사회적 주체의 생산적 노동은 그대로 혁명적이고 항상 해방적이고 혁신적으로 된다.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는 과학적 활동은 '준거구도'위에서 기능들을 결집하는 부분적 관찰자에서 출발하여 형성된다고 말한다. 준거구도란 현실적 포섭의 세계, 사회의 자본에 대한 전면적 복종의 세계이다. 노동이란 현실을 산출하고 분자적 질서에서 발전과정에 있는 몰적 질서로의 이행이며, 저항할 수 없게 전쟁을 횡단하고 전쟁속에서 해방을 정의하는 리좀이다. 준거구도란 사회적 노동과 그것의 모순의 환경이다. 철학의 장소는 거기에 있다. 과학의 부분적 관찰자는 여기에서 철학적 개념적 인물들이 된다 개념인물이란 프롤레타리아의 새로운 형상, 전복으로서의 일반적 지성이다. 개념인물은 현실을 이중화하고 우리에게 그 갈등적 역동성과 자신의 경향적 움직임의 실현 속에서 현실을 보도록 해준다. 프롤레타리아 개념인물은 자신이 종속하는 모든 물질적 준거들에서의 냉혹하고 영속적인 절단을 수행한다. 철학이 구축하는 내재성의 구조는 분자적 질서와 몰적 질서 사이의 접촉이 지닌 발본적인 반시대성에 의해, 저항의 현동적인 비시대성에 의해, 현실의 절대적 비약을 통해 작동되는 영속적인 반란기획이다. [철학이란 무엇인가]의 교육적인 도식은 디오니소스적인 [천의 고원]에서 현상학적으로 구축된 맥락을 명백히 한다.
또한 [천의 고원]은 하나의 혁명적 경험을 구성한다. 68년 혁명을 재해석하는 책이 바로 [천의 고원]이다. [천의 고원]은 우리 시대의 현동적인 역사유물론이며, 맑스의 [독일과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에 필적하는 것이다. [천의 고원]이란 하나의 집합적 신체, 천개의 특이한 신체의 육동인 것이다. 여기에 표현되어 있는 정치란 스피노자적 다중이 지니는 공산주의적 정치, 최근 세계시장을 부대로 구성된 주체들이 펼치는 유동성의 정치이며, 노동자착취의, 광인징벌의, 일반적 지성의 통제의 거대한 조직자인 국가에 대항하는 하나의 무기로 지도되는 가장 급진적인 민주주의 정치이다. [천의 고원]은 여성, 청년, 노동자, 동성애자, 주변인, 이민자의 확산적이며 자율적인 사회투쟁에 명백히 준거하고 있다. 개념은 사건이며 개념들의 체계란 욕망과 사건의 계보학을 통한 행위의 지질학의 단층이다.
철학적 역사성은 결국 역사성으로 취급되며, 사상과 존재의 현실적인 문제설정 사이의 특이한 대결로 이해된다. 철학사 그 자체는 단지 사건, 반시대성, 현존한는 비시대성으로만 이해될 뿐 재구축될 수는 없다. 철학이란 항상 현실의 전개에 대한 스피노자적인 주석이다. 사실 현재와 창조성의 리좀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과거의 결과이며, 잔여인 기계적 계통과 대립한다. 물질적 결정들, 그것들의 축적, 과저의 불투명한 내용은 산노동만이 활기를 띠게 하고 주체성의 새로운 기계들이 재발명하는 하나의 죽은 전체를 구성한다. 그것이 생기지 않을 때, 과거는 죽어 있으며 우리의 감옥이다. [천의 고원]은 천개의 구체의 창조적 사건으로서 이해된 사회적 노동에 대한 유물론적 이론이다.
정신과학이 되살아나게 하고 유물론의 논리적이고 윤리적인 능력을 쇄신하도록 하는 것은 현존하는 주체성으로 이해되는 역사성을 향해 열린 존재론, 표면개념이다. 하이데거주의자의 작업은 삶의 차단을 구성한다. 그것은 형이상학적 발걸음을 도달점을 향해 극한으로 밀어붙인다. 반대로 [천의고원]에서 스피노자식으로 신을 보는 것은 존재-열린 존재-에 대한 새로운 인식 속에서, 실재적인 것에서 존재론적인 것으로의 전로를 다시 실행하는 것이다. 10년이 지나도 [천의 고원]을 현재에 완전히 작동하는 하나의 현상학으로 읽을 수 있다 근대성의 대안적이고 내재주의적이며 유물론적인 선택 속에 그 뿌리를 늘어뜨리고 있는 정신과학의 재구축이 가능한 기반을 제공하는 하나의 철학을 그리고 정신이란 두뇌이며, 두뇌는 '일반적 지성'이 되었기 때문에 우리 시대에 어울리는 역사유물론의 부흥을 알리고 있다. 우리 시대는 그것을 입증하는 혁명적인 사건을 기대한다.


출처 : 들뢰즈, 철학의 오솔길
글쓴이 : 신승철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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