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좀, 책, 이문구
― 들뢰즈/가타리의 눈으로 이문구를 읽다
1. 리좀, 리좀-책
새로운 책을 쓴다는 것은 세계를 종과 횡으로 횡단하는 선들, 경도(經度)와 위도(緯度), 그 양태들을 꿰뚫고 나아가며 유동하는 선들을 찾는 일이다. 항상 좌표, 역학, 정향들의 체계들은 창조적인 탈영토화가 아니라 초월의 지리들을 우선적으로 머금고 있다. 사유는 그 의미화의 지층에서 오는 진동과 압력을 받는다. 모든 방향으로 열린 접속을 찾는다면 우리 사유를 ~되기를 향해 열린 절대적 극한으로 몰아가야 한다. 부딪치고 꿈틀거리며 뚫고 흘러가야 한다. 사유가 힘과 의지의 방향성을 갖는 것은 그 다음이다. 사유가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발명하고 발견하지 않는다면 그 사유는 즉각 폐기해야 한다. 왜 ? 그것은 죽은 사유니까. 죽은 사유는 내부에서 작용하는 속도들과 변용태들을 끌어내 새로운 순환의 선으로 나아가는 동력이 되지 못한다.
새로운 순환의 선을 타기 위해서 작동하는 힘들의 순환을 정지시키고 해체해야만 한다. 옛순환이 정지되지 않고서는 새 순환은 작동하지 않는다. 이미 고갈된 힘들의 옛순환에 종속된다는 것은 그 내부의 생성과 다양체를 축소, 환원시키는 반복 운동일 뿐이다. 지각을 폐쇄회로에 가두는 낡은 개념들과 낡은 패러다임의 잔재들을 폭파해야만 배치를 바꿀 수 있다. 배치는 욕망이 생산력과 생산관계에 침투하여 끊임없는 접속을 만들고 그 접속에 따라 다르게-되기를 말한다. 욕망은 기계고, 욕망하는 기계는 흐름들을 절단하고 채취하며 현실을 작동시킨다. 그런 점에서 “욕망은 현실을 생산한다.”(G.Deleuze/F.Guattari, Anti-OEdipe, 1972)고 말할 수 있다. 욕망은 곧 욕망하는 생산이며, 욕망의 배치다. 그것이 생산한 현실이 사회장이며, 사회장은 곧 배치의 장이다. 동일성이 아닌 차이로, 존재가 아닌 생성으로 나아가기. 이것이 ‘있다’에서 ‘되다’에로, 동일성의 정치학에서 차이의 정치학으로, 하나에서 여럿으로, 긴 기억에서 반기억으로, 계보학의 질서에서 반계보학의 혼돈으로, ‘존재의 철학’에서 ‘생성의 철학’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책에서 구할 것은 지식이 아니라 생성을 위한 영감과 힘이다. 저자-텍스트가 아니라 그것의 배아, 그것을 배양하는 젖, 질료들, 즉 사유를 가로지르는 날짜와 속도들, 자연과 무의식, 고원들을 힘껏 빨아 들여라 ! 지식은 기껏해야 지식생산자의 머리를 모방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모방은 의미의 축소화이며, 그것에의 종속이다. 그러므로 해석하지 말고, 제발, 제발, 당신의 도주선을 찾으란 말이다. 언제까지 어른이나 흉내내는 덜된 어린애로 남으려고 하는가 ? 언제까지 누군가의 도움과 보살핌이 없다면 생존할 수 없는 응석받이 노릇을 하려는가 ? “그만 둬 ! 너 때문에 피곤해 죽겠다 ! 의미를 내보내거나 해석하지 말고 실험을 해 ! 너의, 너의 영토성, 너의 탈영토화, 너의 체제, 너의 도주선을 찾으란 말이야 ! 이미 만들어지 너의 유년기와 서구의 기호론에서 찾지 말고 너 자신을 기호화하라고 !” 왜 하나의 점, 하나의 질서에 고착해 있으려 하는가 ? 왜 항상 계보학 속에 너의 가능성, 너의 힘, 너의 꿈과 상상력, 너의 잠재적 생성들을 매장시키려고 하는가 ? 그것은 유일한 장군, 하나의 독재자, 여럿처럼 보이지만 하나일 뿐인 히드라며 메두사에 지나지 않는다. 수목적 사유에서 벗어나라. 그래야 하나에서 여럿으로 나아갈 수 있다. 위계적 질서, 중심화된 점에서 탈주하여 반계보, 다양체의 몸으로 나아가라. 진정 다양체를 꿈꾼다면 유일을 빼고서 n-1로 살아라.
들뢰즈/가타리는 탈중심화해서 수목의 위계적 질서를 벗어나라고 말한다. 정주민적 사유가 아니라 유목적 사유를 찾아라. 공(空)과 화엄의 세계, 노자의 무위자연(無爲自然)을 찾아라. 이제 리좀이다 ! 리좀은 비-체계요, 비중심화한 접속들의 향연이다. 리좀의 세계에서 접속은 어디에서나 일어난다. 리좀은 “계층도 중심도 없고, 초월적인 통일도 또 이항 대립이나 대칭성의 규칙도 없으며, 단지 끝없이 연결되고 도약하여 일탈하는 요소의 연쇄”다. 리좀에는 중심, 서열, 계보가 없다. 그것은 언제나 위계적이며 위상학적인 나무가 아니라 구근이나 덩이줄기다. 그것은 일정한 법칙 아래 뿌리를 뻗어가는 나무와 달리 어떤 지점에서든 다른 지점과 연결접속한다. 리좀은 “아주 상이한 기호 체제들 심지어는 비-기호들의 상태들을 작동시킨다.” 아직도 초월성인가 ? 가로지르고, 넘어서고, 시작도 끝도 없는 운동이다. 초월성이 아니라 내재성이다. 그것은 일인 체계를 무너뜨리고 그 사이에서 자라는 잡초다. 독재자를 권좌에서 끌어내리고 양쪽의 둑을 무너뜨리며 중간에서 속도를 취하는 시냇물이다. 정주민이 아니라 유목민으로 살아라. 역사를 쓰지 말라. 시작하지 말고 끝내지도 말며 그냥 흘러가라.
리좀은 시작하지도 않고 끝나지도 않는다. 리좀은 언제나 중간에 있으며 사물들 사이에 있고 사이-존재이고 간주곡이다. 나무는 혈통 관계이지만 리좀은 결연 관계이며 오직 결연 관계일 뿐이다. 나무는 “~이다”라는 동사를 부과하지만, 리좀은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라는 접속사를 조직으로 갖는다. 이 접속사 안에는 〈이다〉라는 동사를 뒤흔들고 뿌리뽑기에 충분한 힘이 있다.
2. 책, 그 다양체
책을 읽되 책에 끌려가지 말고 저자-텍스트를 덮쳐라 ! 이것은 종족의 번식을 위한 생식행위가 아니다. 사생아, 즉 당신을 탈영토화하는 변형적 성분을 갖기 위함이다. ~되기를 위한 영감, 생성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면 당신은 역사의 재귀, 노예의 도덕에 충실한 하수인, 식민지 역할에 그치고 말 것이다. 책은 이미 저자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스스로 저자라는 지층에서 벗어난다. 무슨 힘으로 ? “다른 모든 것들처럼 책에도 분절선, 분할선, 지층, 영토성 등이 있다. 하지만 책에는 도주선, 탈영토화 운동, 지각 변동(〓탈지층화) 운동들도 있다.”(MP : 1980) 책-기계의 기원과 독창성은 한 저자의 전유물일 수가 없다. 한 저자의 이름 뒤에 이미 수많은 가려진 저자들이 숨어 있다. 이름이 지워진 저자들은 기명의 저자를 대신하여 말한다. 따라서 한 권의 책-기계 안에서 수많은 익명의 목소리들이 울려나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왜 책-기계가 다양체이겠는가 ? “책은 하나의 다양체이다. 그러나, 다양하다는 것이 어떤 것에 귀속되기를 그친다는 것, 즉 독립적인 실사의 지위로 격상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우리는 아직 알지 못한다.”(MP : 1980) 세계를 다양한 형태로 바꾸려는 숨은 저자들이 없었다면, 그 선행하는 목소리들이 없었다면 책-기계 내부에서 움직이는 질료들, 명제와 척도들은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저자란 외부성, 즉 수많은 익명의 저자들의 기표적 기호다. 그러므로 책-기계를 하나의 주체에로 귀속시키는 일은 책-기계의 본질적인 측면인 외부성을 외면하는 일이다. 내부와 외부는 몸을 섞고 서로를 복제하며, 새로운 배치 속으로 들어간다. 배치의 효과는 역사가 아니라 생성, 도약과 증대, 활성화, 그리고 흐름으로서의 통접이다.
책이 얘기하는 바와 책이 만들어지는 방식 사이에는 차이가 없다. 하물며 책에는 대상도 없다. 하나의 배치물로서 책은 다른 배치물들과 연결접속되고 다른 기관 없는 몸체들과 관계 맺고 있을 뿐이다. 기의든 기표든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묻지 말아야 하며, 책 속에서 이해해야 할 그 어떤 것도 찾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이런 것들을 물어봐야 한다. 책이 무엇과 더불어 기능하는지, 책이 어떤 다양체들 속에 자신의 다양체를 집어넣어 변형시키는지, 책이 자신의 기관 없는 몸체를 어떤 기관 없는 몸체들에 수렴시키는지. 하나의 책은 바깥을 통해서만, 바깥에서 존재한다. 이처럼 책이 그 자체로 작은 기계라면, 이 문학 기계는 전쟁 기계, 사랑 기계, 혁명 기계 등과, 그리고 이 모든 기계들을 낳는 추상적인 기계와 어떤 측정 가능한 관계를 맺고 있는가 ?
책-기계들은 저마다 세계에 대한 해석을 담고 있다. 해석 본능은 책-기계의 인습에 속하는 영역이다. 그러나 인습이란 평면화에의 운동을 벗어나지 못한다. 해석의 내용, 해석의 방식은 중요하지 않거나 덜 중요한 영역이다. 중요한 것은 책-기계가 내재화하고 있는 그 수많은 외부들과 통하는 것, 그것의 도주선, 탈영토화 운동, 지각 변동들과 교감, 반응을 보이는 것, 그리고 촉발과 생성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것의 외부를 바깥으로 끌어내고 다른 배치를 만드는 것, 그것의 질료와 속도를 당신의 탈영토화의 힘으로 바꾸는 것이다. 당신이 먼저 바뀌지 않는다면 세계도 바뀌지 않는다. 그러므로 당신을 바꾸는 피를 수혈하지 못하는 책-기계는 세계도 바꾸지 못한다. 바꾸지 못하는 것은 네거리에서 차량들의 흐름을 조정하고 지휘하는 교통경찰을 흉내내는 정신병자의 헛된 몸짓들, 공을 비켜나간 축구선수의 헛발질이다. 변혁의 힘과 선을 생산하지 못하는 책-기계는 멈춰서 있는 기계다. 죽은 기계다. 어느 시대나 가장 중요한 책-기계들은 세계에 대한 해석이 아니라 예언과 변혁, 도래할 실재들, 아직 오지 않은, 그러나, 오고야 말 현실에 대해 말한다. 좋은 책-기계들은 탈영토화한다. 탈영토화는 새로운 현실의 발명과 창조다. 네 속에 있는 질료적 흐름들을 “행운선, 허리선, 도주선”으로 바꾸어라.
n에서, n - 1에서 써라, 슬로건을 통해 서라, 뿌리 말고 리좀을 만들어라 ! 절대로 심지 말아라 ! 씨 뿌리지 말고, 꺾어 꽂아라 ! 하나도 여럿도 되지 말아라, 다양체가 되어라 ! 선을 만들되, 절대로 점을 만들지 말아라 ! 속도가 점을 선으로 변형시킬 것이다 ! 빨리빨리, 비록 제자리에서라도 ! 행운선, 허리선, 도주선. 당신들 안에 있는 〈장군〉을 깨우지 마라 !
3. 농촌, 혹은 지층화
1960년대의 경제개발계획에서 소외된 농촌은 빠르게 쇠락의 길로 접어든다. 가난과 굶주림에 지친 많은 농촌 사람들이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가망이 보이지 않는 농업과 정든 고향을 등지고 도시로 나와 도시빈민 계층에 편입되는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이제 농촌은 공장 폐수와 농약 등의 공해로 오염이 되고, 상업자본과 천박한 소비문화에 물들어 자발적 상호부조의 전통 위에 세워진 농촌공동체는 급격하게 무너져 내린다. 도작농토(稻作農土) 위에 세워진 명실상부한 농촌은 죽어버렸다. 그것은 농경사회적 정서를 내면화하고 있는 많은 농촌출신의 도시인에게 곧 심정적 고향의 상실을 뜻한다. 소설가 이문구(李文求, 1941 ~ 2003)는 『관촌수필』(문학과지성사, 1977), 『우리 동네』(민음사, 1981), 『산너머 남촌』(창작과비평사, 1990) 등으로 이어지는 작품집을 통해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해체의 위기에 빠진 농촌 현실을 자신의 체험을 너절하고 질펀하고 소박하고 호흡이 유장한 요설체의 토속어 문체로 버무려 그려낸다.
이문구는 끈적거리는 토속어 문체로 산업화․도시화․근대화로 인해 와해되는 농촌의 부락공동체, 그것을 떠받치고 있는 자기헌신과 상호유대 정신의 멸실, 그 와중에 겪는 농민들의 소박한 희망과 기대의 부서짐을 길어 올린다. 염상섭·채만식․김유정에서 비롯한 “평민문학적 골계미의 전통”을 바탕으로 하는 풍자와 해학의 문체를 이어받은 작가는 농촌소설이 빠져들 수 있는 인물의 소영웅화, 인정삽화, 지방주의 등을 극복하고 1970년대를 대표하는 ‘농촌작가’로 우뚝 선다. 이문구의 대표작으로 꼽는 「관촌수필」 연작은 작가의 과거 유․소년기의 고향 체험에서 길어낸 소설로, 양반토호의 가문과 유림 같은 봉건적 신분질서의 문화적 잔재가 그대로 남아 있고, 부락공동체의 풍습과 인정이 살아 있는 근대문명에 잠식되기 이전의 고향을 복원해낸다. 「관촌수필」에 일관되게 관류하는 정서는 상실감이다. 농촌공동체는 전쟁과 이념의 대립과 충돌로 엄청난 충격과 균열을 겪고, 뒤이은 근대화 과정에서 도시 자본주의 문명에 의해 잠식되며 고향은 다른 사회로 해체, 변모되어간다. 전근대적 농촌사회가 지녔던 공동체적 속성과 농토라는 물적 터전을 근본으로 그 위에 자신의 삶을 세웠던 농민들의 순박함과 인정, 전통적 질서와 윤리는 서서히 멸실되어 가고, 작가는 그 점을 아쉬워하며 애틋한 마음으로 그것을 감싸려고 했던 것이다. 고향은 더는 전통적이고 재래적인 풍습과 인정이 넘치는 그런 곳이 아니다. 「관촌수필」을 두고 현실의식을 결여한 채 농촌을 주자학적(朱子學的) 교양의 바탕 위에서 봉건의 잔영을 그리는데 치우쳤다는 비판과 지적을 할 수도 있다. 그게 부담스러웠던지 작가는 농촌 현장의 구체적 실감을 몸으로 겪은 뒤 농촌에 대해 품었던 낙관론적 기대를 허물고 농촌 문제들을 정치사회적 맥락에서 바라보고 비판적으로 파헤쳐나간다.
대저 농자천하지대본이란 말을 입에 오려 버릇한 지도 벌서 일천팔백 년이 넘었다. 농업이 기간산업의 하나임에도 아직도 변함이 없다. 하지만 천하지대본의 주체는 마땅히 농자에서 농민으로 옮겨져야 한다. 농경사회에서는 농삿일 자체가 중요하였으나 이런 산업사회의 와중에서, 그것도 농사의 기계화가 진행중인 단계에서는 농삿일보다 농사를 담당한 사람의 위치가 중시되어야 옳을 것이다.
「위자료」, 『산너머 남촌』, 창작과비평사, 1990, 45쪽
오늘의 농촌은 “미곡수매와 농약과 농기구, 생활용품 구입에 미치는 행정 편의주의, 통일벼와 노풍을 강권하고 무작정 퇴비증산을 외치는 관청과의 관민 대립문제, 돼지파동, 유흥업의 농촌침투, 영농기계화의 허실, 농지의 자유로운 매매를 제약하는 제반 법률의 문제, 교육문제, TV공해” 등 수많은 문제들을 안고 있는 사회장이다. 이 농촌이란 사회장은 국가-기계에 의해 포획된 내부적 성분, 혹은 내부성의 환경이다. 당연히 국가-기계에서 발화되는 규칙, 권위, 작용의 범주 아래에 속한다. 이 사회장은 국가-기계의 통치 실행에 의해 끝없이 영토화하며, 동시에 재영토화한다.
이문구는 농업과 사람을 분리해서 문제의 해법에 접근하는 것은 분명 진전된 의식의 산물이다. 이같은 해법의 제시 이전에 아마도 한국 농촌이 ‘분열증적’인 잠재력의 소실에 의해 점점 가망없는 삶의 장, 즉 사회체가 되어가고 있다는 의식이 선행되었을 것이다. 농민들이 농업 자본을 축적하는데 실패하고 농업의 영세성에 포박되어 안에서부터 서서히 무너지는 이 내적 붕괴의 현상은 국가-기계의 포획 속에서 자발성을 반납하고 지층화되는 데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고속도로를 점거하고 물자의 흐름을 끊거나 봉기나 혁명과 같은 방식으로 흐름 자체를 역류하지 않는다면 지층화는 피할 수 없다. 삶과 사유가 수목형 모델에서 리좀형 모델로 전환이 되지 않는 농촌공동체의 와해는 피할 수 없다. 모든 탈주선은 멈춘다. 불가역적 현상들. 일렁임은 그치고 견고한 지층으로 돌아간다. 유동성은 고갈에 이른 채 자본주의적 공리계의 하부로 지층화한다.
국가-기계란 코기토들의 집합체, 관료주의에 의해 지탱되는 추상적 기계, 몸 없는 텅 빈 기호다. 개인이 노동, 언어, 신체라는 기표적 기호에 의해 발견되며 포획된다면, 국가-기계는 오로지 몸 없는 몸으로만 존재한다. 국가-기계는 인공적인 몸을 갖는데, 국가를 표상하는 각종 앰블럼과 상징들, 주체없는 언표들이 바로 그것이다. 인공적인 몸, 혹은 경찰․군대 조직, 그리고 사법체계. 국가-기계는 그것의 지층에서가 아니라 경계에서 작동한다. 지층들이 아니라 경계들이라고 ? 우리가 국가-기계를 발견할 수 있는 곳은 경계들이다. 지층들은 국가-기계의 잠정적 아이덴티티가 실현되는 장소다. 지층들. “지층들은 층(層)이자 대(帶)이다. 지층의 본질은 질료에 형식을 부여하고, 공명과 잉여의 시스템 속에 강렬함들을 가둬두거나 독자성을 붙들어 매고, 지구라는 몸체 위에서 크고 작은 분자들을 구성하고, 이 분자들을 그램분자적인 집합체 속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지층들은 포획이며, 자신의 영역을 지나가는 모든 것을 부여잡으려고 애쓰는 “검은 구멍(〓 블랙홀) 또는 폐색 작용과도 같다. 지층들은 지구 위에서 코드화와 영토화를 통해 작동한다. 동시에 지층들은 코드와 영토성에 따라 작동한다.” 그 지층들의 끝, 경계들. 경계들에는 이중의 장벽들이 선다.
뉴욕이나 모스크바, 혹은 파리나 런던, 도쿄나 베이징, 인천국제공항들은 어떤가 ? 입국과 출국, 탑승에 따른 복잡한 절차들은 한 사람씩 통과하게 되어 있는 다양한 문들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러나 그 문들이란 사실은 그냥 통과할 수 있는 열려진 문이 아니라 닫혀진 관료적 장벽의 변이체들이다. 실제의 장벽과 관료적 장벽들. 그런 점에서 들뢰즈/가타리가 말하듯이 “국가의 정치권력은 폴리스, 경찰, 즉 공공도로의 관리”며, “도시의 대문들, 세금 징수와 의무는 대중의 유동성, 이주민 무리(사람들․동물들․물건들)의 침투력에 대한 장벽이고 필터”다. 대표적인 예로 국제공항을 통해 입국할 때 필수적으로 거쳐야 하는 까다로운 검색과 입국 절차들이 이를 입증한다. 입국심사대의 관료들은 당신이 내민 여권과 입국서류를 꼼꼼하게 검토하고 입국 사증을 발급한다. 국제공항들은 국가의 내부와 외부의 접점에 있는 입-구멍들이다. 입-구멍들은 일종의 필터, 거름망이다. 그것은 들어와야 할 것과 들어와서는 안될 것들을 선별하고 판정하는 장치다. 선별과 판정은 입국심사대에서 이루어진다. 그 하나의 중심, 일자의 권력이 만들어내는 선별의 기준은 하나의 질서로 자명한 것이지만, 선별당하는 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매우 모호하고 자의적이다. 입국심사대에서 걸러지는 것들은 불순한 것들, 잠재적 범죄자들, 불법체류자, 치명적인 감염군들이다. 신원이 불확실한 외국인, 범법자, 불법입국자, 테러리스트들이 걸러진다. 아마 예언자들도 국가의 입국심사대를 통과하기 힘들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항상 국가가 포획할 수 없는 곳, 국가의 외부에 있기 때문이다. 예수, 석가, 노자, 장자, 니체, 카프카, 사드, 심지어 마르크스조차 국가-기계의 내부에서 그것의 외부를 사유한다. 카프카는 “자기 안으로의 이민(移民)”을 통해 국가-기계의 포획에서 벗어나려는 시도의 한 전범이다. 어느 시대에나 작가의 소설들은 무수한 탈주의 선들을 보여준다. 예언자들이란 곧 탈주의 선을 타고 밖으로 나아가는 자들이다. 그들의 사유가 전복적이기 때문에 불온한 것이 아니라 탈주의 선을 타고 밖으로 나아가는 행위 자체가 국가-기계를 추문화하기 때문에 불온한 것이다. 그 불온성을 통해 끊임없이 포획하고 국가-기계 내부로 통합․귀속하려는 국가-기계에서 탈영토화한다. 국가-기계는 그것에서 탈영토화하려는 일체의 기획과 실천을 불법으로 간주하고 제동을 건다. 국가 권력은 즉각 통제의 힘으로 전환하며 탈영토화하려는 몸들을 포획한다. 포획된 몸들은 국가 권력에 의해 자행되는 감금, 고문, 학살, 의문사가 일어나는 접점이다. 모든 국가-기계들은 거주민들에게 국가-기계의 인정을 획득하려는 나르시시즘 욕망을 주입하는 기관들과 프로그램을 갖는다. 지층화하려는 몸과 의식의 훈육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각종 학교들이다. 학교는 국가-기계의 유력한 포획 장치다. 그렇기 때문에 교육은 모든 국가-기계들의 백년지대계다.
4. 세계화의 폭력 속에서
이문구는 1977년에 주거지를 경기도 화성군 향남면 행정리, 흔히는 발안이라고 불리는 지역의 쇠면부락으로 옮기는데, 이 무렵의 생활로 당시 상업주의와 소비문화에 잠식당하는 농촌현실을 생생하게 보고 겪는다. 농경사회는 본질에서 그 뿌리들, 유대들에 고착한다. 유목사회가 내면화하는 반전통적이고 반순응주의와는 반대쪽으로 난 길을 걸어간다. 그리하여 국가-기계와 모든 표준화하는 권력들에 저항없이 투항한다. 농촌에 스며든 미시정치학은 부권주의, 피상성, 소비문화와 결합하며 식민지화를 가속한다. 어쨌든 이문구에게 나고 자란 탯자리는 아니나 발안에 정착해 가축을 기르고 보리바심을 거들기도 하며 농민들과 어울려 산 체험이 농촌의 삶에 대한 실감을 풍부하게 하고 이곳을 내면적 심상공간으로 만들었음은 분명하다. 작가에게 향토의 구체적인 세목들을 되살려 나중에 「우리 동네」 연작의 중요한 밑거름이 되는 보람을 안겨준다. 「우리 동네」 연작은 작가가 경기도 중부의 농촌마을에 거처를 마련하여 살며 농투산이들의 삶을 근접거리에서 관찰하고 그 농촌 실상을 토속적 입말을 풍부하게 살려 그려낸 우리 문학의 중요한 자산이 된 작품이다.
“농사꾼은 호적 파갖구 물 근너온 의붓국민인감. 다른 물건은 죄다 맹그는 늠이 기분대루 값을 매기는디 워째서 농사꾼만 남이 긋어준 금에 밑돌아야 혀 ? 마눌 한 접이 금가면 버리는 푸라스띡 바가지만두 못허니 이래두 갱기찮은 겨 ? 드런 늠덜. 암만 초식 장사 제 손끝에 먹구 산다지만 해도 너무헌다구. 꼭 이래야 발전헌다는 겨 ?”
이문구, 「우리 동네 姜氏」, 『우리 동네』, 민음사, 1981
농촌은 더 이상 서정성이나 토속성 짙은 막연한 그리움의 대상이 될 수가 없다. 그것은 근대화의 희생양, 도시 자본주의의 수탈대상이다. 농촌은 절대 빈곤에서는 벗어났으되 여전히 잠재적 빈곤의식에 허덕이고, 관청의 부당한 횡포에 속수무책이며, 텔레비전 등 상업주의 매스컴의 영향과 독점자본의 소비문화에 휩쓸려간다. 각박해진 농민들의 심성, 멸실되어 가는 풍속과 유대감, 날로 피폐해지는 농촌 해체의 실상을 작가 특유의 풍자적 문체로 실어 나른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이 타락하고 부정적인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하나의 기대와 희망적 가능성으로 농민의 건강한 생명력과 윤리의식을 제시한다.
「우리 동네」 연작은 농촌의 아이들에게까지 번진 망년회, 부녀자들의 무분별한 관광여행과 고고춤, 농협의 변칙 운영, 조미료 중독, 도시인들의 사냥공해로 인해 피해와 공장의 노사문제와 얽힌 농민의 생활, 모내기에 동원된 고등학생들이 새참을 요구하며 데모를 벌이며 주민을 골탕 먹이는 일, 통대선거 사기사건과 수매 비리, 농촌지도소의 영농교육에 대한 반감, 농민의 이익을 외면한 채 중개상으로 전락한 농협에 대한 농민들의 적대감, 농한기의 도박 등 나날이 변해가는 농촌현실의 풍속을 있는 그대로 그려낸다. 이 시대의 변화하는 농촌이란 그것이 경기도이건 충청도이건 간에 생활에 불가결한 생산과 수요가 조화와 균형을 이룬 자족적인 생활체계가 무너지고, 그로 인해 경제적․도덕적 파탄의 위기에 빠진 농촌을 말한다. 농촌 내부는 소비주의의 유혹에 의해 달구어진 욕망들로 들끓는다. TV, 냉장고, 전기밥솥과 같은 가전제품만이 아니라 “이쁜이계”와 같은 성의 쾌락을 드높이기 위한 음부 축소수술에 이르기까지 소비주의가 작동시킨 잉여적 욕망의 분열증적 흐름들은 포화상태에 이르지 않고 끊임없이 반복 순환한다. 사실 욕망에는 만족이 없다. 욕망은 늘 텅 비어 있는 것이어서 욕망은 끊임없이 그르렁거리며 욕망을 욕망하는 상태에 있다. 욕망은 텅빔에서 꽉참으로 나아가는 운동이며, 있음을 구축하는 현상이다. 욕망은 욕망 그 자체가 발화의 원초적 계기이다. 그러므로 욕망이 욕망하는 가운데 그 속에서 삶의 무수한 잠재태가 생성된다. 욕망은 욕망과 합성한다. 욕망의 실재는 주체의 자기형성적 힘에서 섬광처럼 드러난다. 변기는 좌절된 욕망[설사], 이미 다른 것으로 전이된 욕망[소화된 것]을 삼킨다. 욕망의 마지막 출구의 이미지가 변기인 것이다. 변기는 대지 위의 함정, 끝을 알 수 없는 대지의 내장과 연결된 하강으로 나아가는 자리이다. 지하의 미로, 땅속의 관(管)의 입구이다. 그것은 빨아들이고 소멸해버리는 장소이다. 아픈 곳이 자꾸 아픈 생을 가진 자아는 차라리 변기 속으로 도망가고 싶어 한다. 존재한다는 것은 곧 욕망함이다. 죽은 것은 욕망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살아 있다는 것은 욕망함의 현존이다. 사람이나 동물들이 죽는 순간 대장에 남아 있는 내용물이 항문을 통해 저절로 흘러나온다. 분변은 항문의 괄약근이 이것들을 움켜쥐고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이 마지막 분변은 욕망의 마지막 찌꺼기의 배출이다. 욕망을 다 태우지 못할 때 일어나는, 그 불연소의 찌꺼기는 피로라고 불리는 현상이다. “피로는 과다한 외면적인 사회활동과는 상반되는 그러한 수동성이 아니라, 반대로 현재의 사회관계에서 보이는 일반적인 수동성의 강제에 대해 일정한 조건하에서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활동형태이다.” 피로가 근육활동의 과다함의 결과물이 아니라 수동성의 강제에 놓인 조건 속에서 대항의 유일한 활동형태라는 통찰은 놀랍고 참신하다.
농업과 농민들을 덮치는 위기의 본질은 시장 자본주의, 독점 자본주의, 다국적 자본주의에 의해 조장되고 포박된 정신분열증의 위기와 잇대어 있다. 오늘의 자본주의는 “장엄한 정신분열증의 축적”을 생산한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욕망 이론에 의하면 자본주의는 풍부한 잉여생산 속에서 동시에 결핍과 욕구를 생산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의 무의식, 신체, 욕망은 영토화하면서 탈영토화의 운동을 한다. 이문구의 소설에서 오늘의 농촌과 거기 사는 사람들이 욕망의 편집증적 충동에 휩쓸려가면서도 그것을 낳는 현실의 지배구조를 전복하거나 해체하지 않고 오히려 전통적인 역할, 개념, 계급 제도를 따르는 것은 그들의 의식이 철저하게 국가의 위계질서적인 제도에 함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때 개별자의 의식들은 집단-주체로 나아가지 못하고 상품교환의 속박, 심리학적인 속박에 머무를 뿐이다. 자본주의의 정신분열증적인 경향은 탈영토화의 전복적인 힘으로 작동할 수도 있는데, 그 질료적 생산과 힘이 국가 장치들의 폐쇄 회로에서만 순환함으로써 차이, 다양성, 생성을 낳는 힘으로 전환하지 못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고착된 국가 장치와 그 속박에서 벗어나는 유목적 사유를 제창하며, 우리에게 “리좀을 형성하라, 탈영토화를 통해 너의 영토를 넓혀라”라고 권유한다.
식물들의 지혜. 식물들은 뿌리를 갖고 있을지라도 언제나 어떤 바깥을 가지며, 거기서 식물들은 항상 다른 어떤 것, 예컨대 바람, 동물, 사람과 더불어 리좀 관계를 이룬다(또 어던 점에서는 동물들 자신도 리좀을 이루고 인간들도 리좀을 이루고........). “식물이 우리 안으로 의기양양 하게 침입할 때의 도취.” 항상 단절을 통해 리좀을 따라가라, 도주선을 늘이고 연장시키고 연계하라, 그것을 변주變奏시켜라, n차원에서 방향이 꺾인, 아마도 가장 추상적이면서 가장 꼬여 있는 선을 생산할 때까지. 탈영토화된 흐름들을 결합시켜라. 식물들을 따라라. 우선 잇단 독자성들 주변에 생기는 수렴원들을 따라 최초의 선의 한계를 정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다음으로 최초의 선의 한계 바깥, 다른 방향에 위치한 새로운 점들과 함께 이 선의 내부에서 새로운 수렴원들이 만들어지는지를 보라. 글을 써라, 리좀을 형성하라, 탈영토화를 통해 너의 영토를 넓혀라, 도주선이 하나의 추상적인 기계가 되어 고른판 전체를 덮을 때까지 늘려라. “우선 너의 오랜 친구인 식물에게 가서, 빗물이 파놓은 물길을 주의 깊게 관찰하라. 비가 씨앗들을 멀리까지 운반에 갔음에 틀림없다. 그 물길들을 따라가 보면 너는 흐름이 펼쳐지는 방향을 알게 될 것이다. 그 다음에 그 방향을 따라 너의 식물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서 발견되는 식물을 찾아라. 거기 두 식물 사이에서 자라는 모든 악마의 잡초들이 네 것이다. 나중에 이 마지막 식물들이 자기 씨를 퍼트릴 것이기에 너는 이 식물들 각각에서 시작해서 물길을 따라가며 너의 영토를 넓힐 수 있을 것이다.” 음악은 “변형되는 다양체들”만큼이나 많은 도주선들을 끊임없이 흘려보내왔다. 결국 자신을 구조화하거나 나무 형태로 만드는 음악 고유의 코드들을 뒤엎어버리게 되더라도 말이다. 따라서 음악 형식은 단절되고 증식한다는 점에서도 잡초나 리좀에 비견될 수 있다.
이문구는 「우리 동네」 연작에서 농촌을 외면적 사실과 구체에 충실하게 그려낸다. 농촌은 언제까지나 시대의 변화가 미치지 않는 무풍지대가 아니다. 그것은 사회적 생산의 잉여들을 떠안는다. 도시살림에서는 일반화된 가전제품과 외래 음식은 말할 것도 없고, 고고춤, 망년회, 관광계, 이쁜이계와 같은 생뚱맞은 소비문화와 외래문화의 풍속 유입과 과포화 상태가 바로 그것이다. 이는 현실을 횡단하는 징후들이다. 상징적 강제성의 힘 아래에서 저질러지는 후진성의 맹목들. 혹은 세계화의 폭력들. 세계화는 지역적인 것을 자본으로 묶어놓고 집어삼키는 포식자다. 농촌은 국가-기계의 관료주의적 규제의 조정과 통제를 받으며 병든 신체, 고갈된 신체가 되어가고 있다. 신자유주의 혹은 지구화라는 이름으로 진행되는 자본의 규제없는 흐름과 침투는 더욱 더 농촌을 식민주의적 수탈의 현장으로 고착시킨다. 외부와 접속할 수 있는 탈주선들은 끊어진다. 이문구는 소비문화의 무분별한 확산과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풍속의 범람으로 나날이 비속해지고 남루해지는 농민의 삶을 구체적이고 전면적으로 드러냄으로써 오늘의 농촌과 농민의 삶에 들어찬 불만과 좌절의 근본 요인에 대한 성찰로 이끈다.
“어제는 농수산부 무엇이라나 하는 것이 피서 허러 지나간다구 새벽버텀 어찌나 볶아대는지, 시 부락 사람들이 죄 분무기를 지구 나와설랑 해전 내 논배미에 들어가 후덩거렸더랴. 공동방제 허는 시늉을 내라니 벨 수 있남. 분무기에 맹물만 한 짐씩 지구 나와설랑 신작로 가생이 냄으 논에 들어가 애매헌 베포기만 짓밟었다는 얘기여. 위서 허라는 것은 세상 읎어두 못 배기니께.”
이문구, 「우리 동네 黃氏」, 『우리 동네』, 민음사, 1981
이를테면 「우리 동네 黃氏」에서 한 작중인물의 입을 빌려 토로하고 있듯 자주적 선택과 의지와 무관하게 이루어지는 관 주도의 타율적 삶은 농촌의 삶을 비루하게 만드는 크나큰 요인 중의 하나다. 작가는 실익이 없는 행정동원이라든가, 영농법의 강압적 시행에 대해 농민들의 불만과 반발 심리를 놓치지 않는다. 그 불만과 반발은 실효성 없는 정부 시책에 대한 빈정거림이나 관 주도의 영농 교육에 대한 반감과 무관심으로 드러난다. 아울러 공공연하게 “나는 내 양심 내 정신으로, 내 줏대 내 나름을 살자는 사람이다. 지끔까장 이리 가두 흥, 전주 가두 흥, 허메 살어왔지만 두고 봐라, 아무리 농토백이루 살어두 헐말은 허메 살테니.”(「우리 동네 李氏」)라고 주체성과 자주성을 표나게 내세우는 것으로 이어진다. 그것이 관이 되었건 소비문화가 되었건 외래의 침투로 말미암아 농경사회의 공동체적 윤리규범과 인간관계가 무너지는 위기감이 불러일으킨 각성을 보여준다.
「우리 동네」는 1970년대 이후의 노동인력이 썰물처럼 빠져나가 차츰 활기를 잃고 주저앉는 농촌 모습을, 고만고만한 농민을 상징하는 여러 성씨들을 중심인물로 내세워 그려낸 연작소설이다. 행정 관청-농협-농촌지도소들은 농민들 위에 군림하며 수탈의 말단 조직으로 작동한다. 국가-기계들의 권위주의에 대한 노골적인 불만과 반감, 비아냥거림과 적대감을 드러내는 것은 생존의 최소화에 매달린 농민들이 농업 노동으로부터 자신들을 쓸어내려는 힘에 대항하여 “지악스럽게 버둥거”리는 것이다. 농촌에 넓게 퍼져 있는 환물 심리나 병든 풍속은 다양체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의 고갈에 대한 징후들이다. 생래적인 건강성을 잃어버린 농촌-농민은 객체, 타자화한다. 억압의 질서 속에서는 “서루 다다 쇡여 먹잖으면 못 살게 마련된 세상”(「우리 동네 黃氏」)이 된다. “피차 상대방을 물주로 여기고, 서로 꾀를 다하여 등쳐먹으려고만”(「우리 동네 李氏」) 드는, 서로가 서로에 대해 적이며 늑대인 관계로 타락한 세태를 훑어내는 작가의 시선은 어두우면서도 냉철하다. 공산품의 조악성에 대항하여 농촌-농민들은 농약으로 범벅된 농산물을 아무런 죄의식 없이 내놓는다. 침투와 파괴는 상호적이다. 죄와 악은 서로에게 삼투한다. 서로가 서로를 물어뜯는 이 수성(獸性)의 세계에서 해결의 실마리는 백합, 양배추, 양귀비에 있지 않다. “풀은 유일한 출구이다. (.......) 잡초는 일구지 않아도 황폐한 공간에 있으며 그곳을 채울 뿐이다. 그것은 사이에서, 다른 것들 가운데서 자란다.”(MP : 1980)
「우리 동네」 연작 소설이 오늘의 농촌에 대한 사실적 보고로 끝나지는 않는다. 반근대와 탈현대의 변화라는 소용돌이 속에 놓인 농촌-농민들이 어떻게 세계화라는 폭력의 희생물이 되는지를, 극적인 전환이나 결말이 없이 그 역설과 모순의 생태학을 그려낸다. 이문구의 중문 구조의 문체는 농촌-농민에 대한 외연과 내포를 포착하는데 상당한 효력을 발휘한다. 큰 굴곡없는 삶을 짧은 삽화로 연결시켜 나가는 데도, 이 연작 소설이 돋보이는 것은 풍부한 토속어와 비속어, 판소리체의 입말들, 속담과 격언 등을 적절하게 써서 생생한 민중언어의 활력을 되살려낸 까닭이다. 그 짧은 삽화들은 서로 깊은 연관을 갖고 있지 않고 담담하게 농촌 풍속들을 드러내지만, 그것이 겹쳐지고 그 영역을 넓혀가면서 안으로는 차츰 하나의 구심점을 향해 집중된다. 따라서 독자들은 마치 가만히 앉아 농촌의 구석구석을 엿보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뿌리를 찾지 마세요, 수로를 따라가요.......
― 들뢰즈/가타리의 눈으로 이문구를 읽다
1. 리좀, 리좀-책
새로운 책을 쓴다는 것은 세계를 종과 횡으로 횡단하는 선들, 경도(經度)와 위도(緯度), 그 양태들을 꿰뚫고 나아가며 유동하는 선들을 찾는 일이다. 항상 좌표, 역학, 정향들의 체계들은 창조적인 탈영토화가 아니라 초월의 지리들을 우선적으로 머금고 있다. 사유는 그 의미화의 지층에서 오는 진동과 압력을 받는다. 모든 방향으로 열린 접속을 찾는다면 우리 사유를 ~되기를 향해 열린 절대적 극한으로 몰아가야 한다. 부딪치고 꿈틀거리며 뚫고 흘러가야 한다. 사유가 힘과 의지의 방향성을 갖는 것은 그 다음이다. 사유가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발명하고 발견하지 않는다면 그 사유는 즉각 폐기해야 한다. 왜 ? 그것은 죽은 사유니까. 죽은 사유는 내부에서 작용하는 속도들과 변용태들을 끌어내 새로운 순환의 선으로 나아가는 동력이 되지 못한다.
새로운 순환의 선을 타기 위해서 작동하는 힘들의 순환을 정지시키고 해체해야만 한다. 옛순환이 정지되지 않고서는 새 순환은 작동하지 않는다. 이미 고갈된 힘들의 옛순환에 종속된다는 것은 그 내부의 생성과 다양체를 축소, 환원시키는 반복 운동일 뿐이다. 지각을 폐쇄회로에 가두는 낡은 개념들과 낡은 패러다임의 잔재들을 폭파해야만 배치를 바꿀 수 있다. 배치는 욕망이 생산력과 생산관계에 침투하여 끊임없는 접속을 만들고 그 접속에 따라 다르게-되기를 말한다. 욕망은 기계고, 욕망하는 기계는 흐름들을 절단하고 채취하며 현실을 작동시킨다. 그런 점에서 “욕망은 현실을 생산한다.”(G.Deleuze/F.Guattari, Anti-OEdipe, 1972)고 말할 수 있다. 욕망은 곧 욕망하는 생산이며, 욕망의 배치다. 그것이 생산한 현실이 사회장이며, 사회장은 곧 배치의 장이다. 동일성이 아닌 차이로, 존재가 아닌 생성으로 나아가기. 이것이 ‘있다’에서 ‘되다’에로, 동일성의 정치학에서 차이의 정치학으로, 하나에서 여럿으로, 긴 기억에서 반기억으로, 계보학의 질서에서 반계보학의 혼돈으로, ‘존재의 철학’에서 ‘생성의 철학’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책에서 구할 것은 지식이 아니라 생성을 위한 영감과 힘이다. 저자-텍스트가 아니라 그것의 배아, 그것을 배양하는 젖, 질료들, 즉 사유를 가로지르는 날짜와 속도들, 자연과 무의식, 고원들을 힘껏 빨아 들여라 ! 지식은 기껏해야 지식생산자의 머리를 모방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모방은 의미의 축소화이며, 그것에의 종속이다. 그러므로 해석하지 말고, 제발, 제발, 당신의 도주선을 찾으란 말이다. 언제까지 어른이나 흉내내는 덜된 어린애로 남으려고 하는가 ? 언제까지 누군가의 도움과 보살핌이 없다면 생존할 수 없는 응석받이 노릇을 하려는가 ? “그만 둬 ! 너 때문에 피곤해 죽겠다 ! 의미를 내보내거나 해석하지 말고 실험을 해 ! 너의, 너의 영토성, 너의 탈영토화, 너의 체제, 너의 도주선을 찾으란 말이야 ! 이미 만들어지 너의 유년기와 서구의 기호론에서 찾지 말고 너 자신을 기호화하라고 !” 왜 하나의 점, 하나의 질서에 고착해 있으려 하는가 ? 왜 항상 계보학 속에 너의 가능성, 너의 힘, 너의 꿈과 상상력, 너의 잠재적 생성들을 매장시키려고 하는가 ? 그것은 유일한 장군, 하나의 독재자, 여럿처럼 보이지만 하나일 뿐인 히드라며 메두사에 지나지 않는다. 수목적 사유에서 벗어나라. 그래야 하나에서 여럿으로 나아갈 수 있다. 위계적 질서, 중심화된 점에서 탈주하여 반계보, 다양체의 몸으로 나아가라. 진정 다양체를 꿈꾼다면 유일을 빼고서 n-1로 살아라.
들뢰즈/가타리는 탈중심화해서 수목의 위계적 질서를 벗어나라고 말한다. 정주민적 사유가 아니라 유목적 사유를 찾아라. 공(空)과 화엄의 세계, 노자의 무위자연(無爲自然)을 찾아라. 이제 리좀이다 ! 리좀은 비-체계요, 비중심화한 접속들의 향연이다. 리좀의 세계에서 접속은 어디에서나 일어난다. 리좀은 “계층도 중심도 없고, 초월적인 통일도 또 이항 대립이나 대칭성의 규칙도 없으며, 단지 끝없이 연결되고 도약하여 일탈하는 요소의 연쇄”다. 리좀에는 중심, 서열, 계보가 없다. 그것은 언제나 위계적이며 위상학적인 나무가 아니라 구근이나 덩이줄기다. 그것은 일정한 법칙 아래 뿌리를 뻗어가는 나무와 달리 어떤 지점에서든 다른 지점과 연결접속한다. 리좀은 “아주 상이한 기호 체제들 심지어는 비-기호들의 상태들을 작동시킨다.” 아직도 초월성인가 ? 가로지르고, 넘어서고, 시작도 끝도 없는 운동이다. 초월성이 아니라 내재성이다. 그것은 일인 체계를 무너뜨리고 그 사이에서 자라는 잡초다. 독재자를 권좌에서 끌어내리고 양쪽의 둑을 무너뜨리며 중간에서 속도를 취하는 시냇물이다. 정주민이 아니라 유목민으로 살아라. 역사를 쓰지 말라. 시작하지 말고 끝내지도 말며 그냥 흘러가라.
리좀은 시작하지도 않고 끝나지도 않는다. 리좀은 언제나 중간에 있으며 사물들 사이에 있고 사이-존재이고 간주곡이다. 나무는 혈통 관계이지만 리좀은 결연 관계이며 오직 결연 관계일 뿐이다. 나무는 “~이다”라는 동사를 부과하지만, 리좀은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라는 접속사를 조직으로 갖는다. 이 접속사 안에는 〈이다〉라는 동사를 뒤흔들고 뿌리뽑기에 충분한 힘이 있다.
2. 책, 그 다양체
책을 읽되 책에 끌려가지 말고 저자-텍스트를 덮쳐라 ! 이것은 종족의 번식을 위한 생식행위가 아니다. 사생아, 즉 당신을 탈영토화하는 변형적 성분을 갖기 위함이다. ~되기를 위한 영감, 생성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면 당신은 역사의 재귀, 노예의 도덕에 충실한 하수인, 식민지 역할에 그치고 말 것이다. 책은 이미 저자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스스로 저자라는 지층에서 벗어난다. 무슨 힘으로 ? “다른 모든 것들처럼 책에도 분절선, 분할선, 지층, 영토성 등이 있다. 하지만 책에는 도주선, 탈영토화 운동, 지각 변동(〓탈지층화) 운동들도 있다.”(MP : 1980) 책-기계의 기원과 독창성은 한 저자의 전유물일 수가 없다. 한 저자의 이름 뒤에 이미 수많은 가려진 저자들이 숨어 있다. 이름이 지워진 저자들은 기명의 저자를 대신하여 말한다. 따라서 한 권의 책-기계 안에서 수많은 익명의 목소리들이 울려나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왜 책-기계가 다양체이겠는가 ? “책은 하나의 다양체이다. 그러나, 다양하다는 것이 어떤 것에 귀속되기를 그친다는 것, 즉 독립적인 실사의 지위로 격상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우리는 아직 알지 못한다.”(MP : 1980) 세계를 다양한 형태로 바꾸려는 숨은 저자들이 없었다면, 그 선행하는 목소리들이 없었다면 책-기계 내부에서 움직이는 질료들, 명제와 척도들은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저자란 외부성, 즉 수많은 익명의 저자들의 기표적 기호다. 그러므로 책-기계를 하나의 주체에로 귀속시키는 일은 책-기계의 본질적인 측면인 외부성을 외면하는 일이다. 내부와 외부는 몸을 섞고 서로를 복제하며, 새로운 배치 속으로 들어간다. 배치의 효과는 역사가 아니라 생성, 도약과 증대, 활성화, 그리고 흐름으로서의 통접이다.
책이 얘기하는 바와 책이 만들어지는 방식 사이에는 차이가 없다. 하물며 책에는 대상도 없다. 하나의 배치물로서 책은 다른 배치물들과 연결접속되고 다른 기관 없는 몸체들과 관계 맺고 있을 뿐이다. 기의든 기표든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묻지 말아야 하며, 책 속에서 이해해야 할 그 어떤 것도 찾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이런 것들을 물어봐야 한다. 책이 무엇과 더불어 기능하는지, 책이 어떤 다양체들 속에 자신의 다양체를 집어넣어 변형시키는지, 책이 자신의 기관 없는 몸체를 어떤 기관 없는 몸체들에 수렴시키는지. 하나의 책은 바깥을 통해서만, 바깥에서 존재한다. 이처럼 책이 그 자체로 작은 기계라면, 이 문학 기계는 전쟁 기계, 사랑 기계, 혁명 기계 등과, 그리고 이 모든 기계들을 낳는 추상적인 기계와 어떤 측정 가능한 관계를 맺고 있는가 ?
책-기계들은 저마다 세계에 대한 해석을 담고 있다. 해석 본능은 책-기계의 인습에 속하는 영역이다. 그러나 인습이란 평면화에의 운동을 벗어나지 못한다. 해석의 내용, 해석의 방식은 중요하지 않거나 덜 중요한 영역이다. 중요한 것은 책-기계가 내재화하고 있는 그 수많은 외부들과 통하는 것, 그것의 도주선, 탈영토화 운동, 지각 변동들과 교감, 반응을 보이는 것, 그리고 촉발과 생성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것의 외부를 바깥으로 끌어내고 다른 배치를 만드는 것, 그것의 질료와 속도를 당신의 탈영토화의 힘으로 바꾸는 것이다. 당신이 먼저 바뀌지 않는다면 세계도 바뀌지 않는다. 그러므로 당신을 바꾸는 피를 수혈하지 못하는 책-기계는 세계도 바꾸지 못한다. 바꾸지 못하는 것은 네거리에서 차량들의 흐름을 조정하고 지휘하는 교통경찰을 흉내내는 정신병자의 헛된 몸짓들, 공을 비켜나간 축구선수의 헛발질이다. 변혁의 힘과 선을 생산하지 못하는 책-기계는 멈춰서 있는 기계다. 죽은 기계다. 어느 시대나 가장 중요한 책-기계들은 세계에 대한 해석이 아니라 예언과 변혁, 도래할 실재들, 아직 오지 않은, 그러나, 오고야 말 현실에 대해 말한다. 좋은 책-기계들은 탈영토화한다. 탈영토화는 새로운 현실의 발명과 창조다. 네 속에 있는 질료적 흐름들을 “행운선, 허리선, 도주선”으로 바꾸어라.
n에서, n - 1에서 써라, 슬로건을 통해 서라, 뿌리 말고 리좀을 만들어라 ! 절대로 심지 말아라 ! 씨 뿌리지 말고, 꺾어 꽂아라 ! 하나도 여럿도 되지 말아라, 다양체가 되어라 ! 선을 만들되, 절대로 점을 만들지 말아라 ! 속도가 점을 선으로 변형시킬 것이다 ! 빨리빨리, 비록 제자리에서라도 ! 행운선, 허리선, 도주선. 당신들 안에 있는 〈장군〉을 깨우지 마라 !
3. 농촌, 혹은 지층화
1960년대의 경제개발계획에서 소외된 농촌은 빠르게 쇠락의 길로 접어든다. 가난과 굶주림에 지친 많은 농촌 사람들이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가망이 보이지 않는 농업과 정든 고향을 등지고 도시로 나와 도시빈민 계층에 편입되는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이제 농촌은 공장 폐수와 농약 등의 공해로 오염이 되고, 상업자본과 천박한 소비문화에 물들어 자발적 상호부조의 전통 위에 세워진 농촌공동체는 급격하게 무너져 내린다. 도작농토(稻作農土) 위에 세워진 명실상부한 농촌은 죽어버렸다. 그것은 농경사회적 정서를 내면화하고 있는 많은 농촌출신의 도시인에게 곧 심정적 고향의 상실을 뜻한다. 소설가 이문구(李文求, 1941 ~ 2003)는 『관촌수필』(문학과지성사, 1977), 『우리 동네』(민음사, 1981), 『산너머 남촌』(창작과비평사, 1990) 등으로 이어지는 작품집을 통해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해체의 위기에 빠진 농촌 현실을 자신의 체험을 너절하고 질펀하고 소박하고 호흡이 유장한 요설체의 토속어 문체로 버무려 그려낸다.
이문구는 끈적거리는 토속어 문체로 산업화․도시화․근대화로 인해 와해되는 농촌의 부락공동체, 그것을 떠받치고 있는 자기헌신과 상호유대 정신의 멸실, 그 와중에 겪는 농민들의 소박한 희망과 기대의 부서짐을 길어 올린다. 염상섭·채만식․김유정에서 비롯한 “평민문학적 골계미의 전통”을 바탕으로 하는 풍자와 해학의 문체를 이어받은 작가는 농촌소설이 빠져들 수 있는 인물의 소영웅화, 인정삽화, 지방주의 등을 극복하고 1970년대를 대표하는 ‘농촌작가’로 우뚝 선다. 이문구의 대표작으로 꼽는 「관촌수필」 연작은 작가의 과거 유․소년기의 고향 체험에서 길어낸 소설로, 양반토호의 가문과 유림 같은 봉건적 신분질서의 문화적 잔재가 그대로 남아 있고, 부락공동체의 풍습과 인정이 살아 있는 근대문명에 잠식되기 이전의 고향을 복원해낸다. 「관촌수필」에 일관되게 관류하는 정서는 상실감이다. 농촌공동체는 전쟁과 이념의 대립과 충돌로 엄청난 충격과 균열을 겪고, 뒤이은 근대화 과정에서 도시 자본주의 문명에 의해 잠식되며 고향은 다른 사회로 해체, 변모되어간다. 전근대적 농촌사회가 지녔던 공동체적 속성과 농토라는 물적 터전을 근본으로 그 위에 자신의 삶을 세웠던 농민들의 순박함과 인정, 전통적 질서와 윤리는 서서히 멸실되어 가고, 작가는 그 점을 아쉬워하며 애틋한 마음으로 그것을 감싸려고 했던 것이다. 고향은 더는 전통적이고 재래적인 풍습과 인정이 넘치는 그런 곳이 아니다. 「관촌수필」을 두고 현실의식을 결여한 채 농촌을 주자학적(朱子學的) 교양의 바탕 위에서 봉건의 잔영을 그리는데 치우쳤다는 비판과 지적을 할 수도 있다. 그게 부담스러웠던지 작가는 농촌 현장의 구체적 실감을 몸으로 겪은 뒤 농촌에 대해 품었던 낙관론적 기대를 허물고 농촌 문제들을 정치사회적 맥락에서 바라보고 비판적으로 파헤쳐나간다.
대저 농자천하지대본이란 말을 입에 오려 버릇한 지도 벌서 일천팔백 년이 넘었다. 농업이 기간산업의 하나임에도 아직도 변함이 없다. 하지만 천하지대본의 주체는 마땅히 농자에서 농민으로 옮겨져야 한다. 농경사회에서는 농삿일 자체가 중요하였으나 이런 산업사회의 와중에서, 그것도 농사의 기계화가 진행중인 단계에서는 농삿일보다 농사를 담당한 사람의 위치가 중시되어야 옳을 것이다.
「위자료」, 『산너머 남촌』, 창작과비평사, 1990, 45쪽
오늘의 농촌은 “미곡수매와 농약과 농기구, 생활용품 구입에 미치는 행정 편의주의, 통일벼와 노풍을 강권하고 무작정 퇴비증산을 외치는 관청과의 관민 대립문제, 돼지파동, 유흥업의 농촌침투, 영농기계화의 허실, 농지의 자유로운 매매를 제약하는 제반 법률의 문제, 교육문제, TV공해” 등 수많은 문제들을 안고 있는 사회장이다. 이 농촌이란 사회장은 국가-기계에 의해 포획된 내부적 성분, 혹은 내부성의 환경이다. 당연히 국가-기계에서 발화되는 규칙, 권위, 작용의 범주 아래에 속한다. 이 사회장은 국가-기계의 통치 실행에 의해 끝없이 영토화하며, 동시에 재영토화한다.
이문구는 농업과 사람을 분리해서 문제의 해법에 접근하는 것은 분명 진전된 의식의 산물이다. 이같은 해법의 제시 이전에 아마도 한국 농촌이 ‘분열증적’인 잠재력의 소실에 의해 점점 가망없는 삶의 장, 즉 사회체가 되어가고 있다는 의식이 선행되었을 것이다. 농민들이 농업 자본을 축적하는데 실패하고 농업의 영세성에 포박되어 안에서부터 서서히 무너지는 이 내적 붕괴의 현상은 국가-기계의 포획 속에서 자발성을 반납하고 지층화되는 데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고속도로를 점거하고 물자의 흐름을 끊거나 봉기나 혁명과 같은 방식으로 흐름 자체를 역류하지 않는다면 지층화는 피할 수 없다. 삶과 사유가 수목형 모델에서 리좀형 모델로 전환이 되지 않는 농촌공동체의 와해는 피할 수 없다. 모든 탈주선은 멈춘다. 불가역적 현상들. 일렁임은 그치고 견고한 지층으로 돌아간다. 유동성은 고갈에 이른 채 자본주의적 공리계의 하부로 지층화한다.
국가-기계란 코기토들의 집합체, 관료주의에 의해 지탱되는 추상적 기계, 몸 없는 텅 빈 기호다. 개인이 노동, 언어, 신체라는 기표적 기호에 의해 발견되며 포획된다면, 국가-기계는 오로지 몸 없는 몸으로만 존재한다. 국가-기계는 인공적인 몸을 갖는데, 국가를 표상하는 각종 앰블럼과 상징들, 주체없는 언표들이 바로 그것이다. 인공적인 몸, 혹은 경찰․군대 조직, 그리고 사법체계. 국가-기계는 그것의 지층에서가 아니라 경계에서 작동한다. 지층들이 아니라 경계들이라고 ? 우리가 국가-기계를 발견할 수 있는 곳은 경계들이다. 지층들은 국가-기계의 잠정적 아이덴티티가 실현되는 장소다. 지층들. “지층들은 층(層)이자 대(帶)이다. 지층의 본질은 질료에 형식을 부여하고, 공명과 잉여의 시스템 속에 강렬함들을 가둬두거나 독자성을 붙들어 매고, 지구라는 몸체 위에서 크고 작은 분자들을 구성하고, 이 분자들을 그램분자적인 집합체 속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지층들은 포획이며, 자신의 영역을 지나가는 모든 것을 부여잡으려고 애쓰는 “검은 구멍(〓 블랙홀) 또는 폐색 작용과도 같다. 지층들은 지구 위에서 코드화와 영토화를 통해 작동한다. 동시에 지층들은 코드와 영토성에 따라 작동한다.” 그 지층들의 끝, 경계들. 경계들에는 이중의 장벽들이 선다.
뉴욕이나 모스크바, 혹은 파리나 런던, 도쿄나 베이징, 인천국제공항들은 어떤가 ? 입국과 출국, 탑승에 따른 복잡한 절차들은 한 사람씩 통과하게 되어 있는 다양한 문들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러나 그 문들이란 사실은 그냥 통과할 수 있는 열려진 문이 아니라 닫혀진 관료적 장벽의 변이체들이다. 실제의 장벽과 관료적 장벽들. 그런 점에서 들뢰즈/가타리가 말하듯이 “국가의 정치권력은 폴리스, 경찰, 즉 공공도로의 관리”며, “도시의 대문들, 세금 징수와 의무는 대중의 유동성, 이주민 무리(사람들․동물들․물건들)의 침투력에 대한 장벽이고 필터”다. 대표적인 예로 국제공항을 통해 입국할 때 필수적으로 거쳐야 하는 까다로운 검색과 입국 절차들이 이를 입증한다. 입국심사대의 관료들은 당신이 내민 여권과 입국서류를 꼼꼼하게 검토하고 입국 사증을 발급한다. 국제공항들은 국가의 내부와 외부의 접점에 있는 입-구멍들이다. 입-구멍들은 일종의 필터, 거름망이다. 그것은 들어와야 할 것과 들어와서는 안될 것들을 선별하고 판정하는 장치다. 선별과 판정은 입국심사대에서 이루어진다. 그 하나의 중심, 일자의 권력이 만들어내는 선별의 기준은 하나의 질서로 자명한 것이지만, 선별당하는 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매우 모호하고 자의적이다. 입국심사대에서 걸러지는 것들은 불순한 것들, 잠재적 범죄자들, 불법체류자, 치명적인 감염군들이다. 신원이 불확실한 외국인, 범법자, 불법입국자, 테러리스트들이 걸러진다. 아마 예언자들도 국가의 입국심사대를 통과하기 힘들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항상 국가가 포획할 수 없는 곳, 국가의 외부에 있기 때문이다. 예수, 석가, 노자, 장자, 니체, 카프카, 사드, 심지어 마르크스조차 국가-기계의 내부에서 그것의 외부를 사유한다. 카프카는 “자기 안으로의 이민(移民)”을 통해 국가-기계의 포획에서 벗어나려는 시도의 한 전범이다. 어느 시대에나 작가의 소설들은 무수한 탈주의 선들을 보여준다. 예언자들이란 곧 탈주의 선을 타고 밖으로 나아가는 자들이다. 그들의 사유가 전복적이기 때문에 불온한 것이 아니라 탈주의 선을 타고 밖으로 나아가는 행위 자체가 국가-기계를 추문화하기 때문에 불온한 것이다. 그 불온성을 통해 끊임없이 포획하고 국가-기계 내부로 통합․귀속하려는 국가-기계에서 탈영토화한다. 국가-기계는 그것에서 탈영토화하려는 일체의 기획과 실천을 불법으로 간주하고 제동을 건다. 국가 권력은 즉각 통제의 힘으로 전환하며 탈영토화하려는 몸들을 포획한다. 포획된 몸들은 국가 권력에 의해 자행되는 감금, 고문, 학살, 의문사가 일어나는 접점이다. 모든 국가-기계들은 거주민들에게 국가-기계의 인정을 획득하려는 나르시시즘 욕망을 주입하는 기관들과 프로그램을 갖는다. 지층화하려는 몸과 의식의 훈육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각종 학교들이다. 학교는 국가-기계의 유력한 포획 장치다. 그렇기 때문에 교육은 모든 국가-기계들의 백년지대계다.
4. 세계화의 폭력 속에서
이문구는 1977년에 주거지를 경기도 화성군 향남면 행정리, 흔히는 발안이라고 불리는 지역의 쇠면부락으로 옮기는데, 이 무렵의 생활로 당시 상업주의와 소비문화에 잠식당하는 농촌현실을 생생하게 보고 겪는다. 농경사회는 본질에서 그 뿌리들, 유대들에 고착한다. 유목사회가 내면화하는 반전통적이고 반순응주의와는 반대쪽으로 난 길을 걸어간다. 그리하여 국가-기계와 모든 표준화하는 권력들에 저항없이 투항한다. 농촌에 스며든 미시정치학은 부권주의, 피상성, 소비문화와 결합하며 식민지화를 가속한다. 어쨌든 이문구에게 나고 자란 탯자리는 아니나 발안에 정착해 가축을 기르고 보리바심을 거들기도 하며 농민들과 어울려 산 체험이 농촌의 삶에 대한 실감을 풍부하게 하고 이곳을 내면적 심상공간으로 만들었음은 분명하다. 작가에게 향토의 구체적인 세목들을 되살려 나중에 「우리 동네」 연작의 중요한 밑거름이 되는 보람을 안겨준다. 「우리 동네」 연작은 작가가 경기도 중부의 농촌마을에 거처를 마련하여 살며 농투산이들의 삶을 근접거리에서 관찰하고 그 농촌 실상을 토속적 입말을 풍부하게 살려 그려낸 우리 문학의 중요한 자산이 된 작품이다.
“농사꾼은 호적 파갖구 물 근너온 의붓국민인감. 다른 물건은 죄다 맹그는 늠이 기분대루 값을 매기는디 워째서 농사꾼만 남이 긋어준 금에 밑돌아야 혀 ? 마눌 한 접이 금가면 버리는 푸라스띡 바가지만두 못허니 이래두 갱기찮은 겨 ? 드런 늠덜. 암만 초식 장사 제 손끝에 먹구 산다지만 해도 너무헌다구. 꼭 이래야 발전헌다는 겨 ?”
이문구, 「우리 동네 姜氏」, 『우리 동네』, 민음사, 1981
농촌은 더 이상 서정성이나 토속성 짙은 막연한 그리움의 대상이 될 수가 없다. 그것은 근대화의 희생양, 도시 자본주의의 수탈대상이다. 농촌은 절대 빈곤에서는 벗어났으되 여전히 잠재적 빈곤의식에 허덕이고, 관청의 부당한 횡포에 속수무책이며, 텔레비전 등 상업주의 매스컴의 영향과 독점자본의 소비문화에 휩쓸려간다. 각박해진 농민들의 심성, 멸실되어 가는 풍속과 유대감, 날로 피폐해지는 농촌 해체의 실상을 작가 특유의 풍자적 문체로 실어 나른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이 타락하고 부정적인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하나의 기대와 희망적 가능성으로 농민의 건강한 생명력과 윤리의식을 제시한다.
「우리 동네」 연작은 농촌의 아이들에게까지 번진 망년회, 부녀자들의 무분별한 관광여행과 고고춤, 농협의 변칙 운영, 조미료 중독, 도시인들의 사냥공해로 인해 피해와 공장의 노사문제와 얽힌 농민의 생활, 모내기에 동원된 고등학생들이 새참을 요구하며 데모를 벌이며 주민을 골탕 먹이는 일, 통대선거 사기사건과 수매 비리, 농촌지도소의 영농교육에 대한 반감, 농민의 이익을 외면한 채 중개상으로 전락한 농협에 대한 농민들의 적대감, 농한기의 도박 등 나날이 변해가는 농촌현실의 풍속을 있는 그대로 그려낸다. 이 시대의 변화하는 농촌이란 그것이 경기도이건 충청도이건 간에 생활에 불가결한 생산과 수요가 조화와 균형을 이룬 자족적인 생활체계가 무너지고, 그로 인해 경제적․도덕적 파탄의 위기에 빠진 농촌을 말한다. 농촌 내부는 소비주의의 유혹에 의해 달구어진 욕망들로 들끓는다. TV, 냉장고, 전기밥솥과 같은 가전제품만이 아니라 “이쁜이계”와 같은 성의 쾌락을 드높이기 위한 음부 축소수술에 이르기까지 소비주의가 작동시킨 잉여적 욕망의 분열증적 흐름들은 포화상태에 이르지 않고 끊임없이 반복 순환한다. 사실 욕망에는 만족이 없다. 욕망은 늘 텅 비어 있는 것이어서 욕망은 끊임없이 그르렁거리며 욕망을 욕망하는 상태에 있다. 욕망은 텅빔에서 꽉참으로 나아가는 운동이며, 있음을 구축하는 현상이다. 욕망은 욕망 그 자체가 발화의 원초적 계기이다. 그러므로 욕망이 욕망하는 가운데 그 속에서 삶의 무수한 잠재태가 생성된다. 욕망은 욕망과 합성한다. 욕망의 실재는 주체의 자기형성적 힘에서 섬광처럼 드러난다. 변기는 좌절된 욕망[설사], 이미 다른 것으로 전이된 욕망[소화된 것]을 삼킨다. 욕망의 마지막 출구의 이미지가 변기인 것이다. 변기는 대지 위의 함정, 끝을 알 수 없는 대지의 내장과 연결된 하강으로 나아가는 자리이다. 지하의 미로, 땅속의 관(管)의 입구이다. 그것은 빨아들이고 소멸해버리는 장소이다. 아픈 곳이 자꾸 아픈 생을 가진 자아는 차라리 변기 속으로 도망가고 싶어 한다. 존재한다는 것은 곧 욕망함이다. 죽은 것은 욕망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살아 있다는 것은 욕망함의 현존이다. 사람이나 동물들이 죽는 순간 대장에 남아 있는 내용물이 항문을 통해 저절로 흘러나온다. 분변은 항문의 괄약근이 이것들을 움켜쥐고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이 마지막 분변은 욕망의 마지막 찌꺼기의 배출이다. 욕망을 다 태우지 못할 때 일어나는, 그 불연소의 찌꺼기는 피로라고 불리는 현상이다. “피로는 과다한 외면적인 사회활동과는 상반되는 그러한 수동성이 아니라, 반대로 현재의 사회관계에서 보이는 일반적인 수동성의 강제에 대해 일정한 조건하에서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활동형태이다.” 피로가 근육활동의 과다함의 결과물이 아니라 수동성의 강제에 놓인 조건 속에서 대항의 유일한 활동형태라는 통찰은 놀랍고 참신하다.
농업과 농민들을 덮치는 위기의 본질은 시장 자본주의, 독점 자본주의, 다국적 자본주의에 의해 조장되고 포박된 정신분열증의 위기와 잇대어 있다. 오늘의 자본주의는 “장엄한 정신분열증의 축적”을 생산한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욕망 이론에 의하면 자본주의는 풍부한 잉여생산 속에서 동시에 결핍과 욕구를 생산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의 무의식, 신체, 욕망은 영토화하면서 탈영토화의 운동을 한다. 이문구의 소설에서 오늘의 농촌과 거기 사는 사람들이 욕망의 편집증적 충동에 휩쓸려가면서도 그것을 낳는 현실의 지배구조를 전복하거나 해체하지 않고 오히려 전통적인 역할, 개념, 계급 제도를 따르는 것은 그들의 의식이 철저하게 국가의 위계질서적인 제도에 함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때 개별자의 의식들은 집단-주체로 나아가지 못하고 상품교환의 속박, 심리학적인 속박에 머무를 뿐이다. 자본주의의 정신분열증적인 경향은 탈영토화의 전복적인 힘으로 작동할 수도 있는데, 그 질료적 생산과 힘이 국가 장치들의 폐쇄 회로에서만 순환함으로써 차이, 다양성, 생성을 낳는 힘으로 전환하지 못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고착된 국가 장치와 그 속박에서 벗어나는 유목적 사유를 제창하며, 우리에게 “리좀을 형성하라, 탈영토화를 통해 너의 영토를 넓혀라”라고 권유한다.
식물들의 지혜. 식물들은 뿌리를 갖고 있을지라도 언제나 어떤 바깥을 가지며, 거기서 식물들은 항상 다른 어떤 것, 예컨대 바람, 동물, 사람과 더불어 리좀 관계를 이룬다(또 어던 점에서는 동물들 자신도 리좀을 이루고 인간들도 리좀을 이루고........). “식물이 우리 안으로 의기양양 하게 침입할 때의 도취.” 항상 단절을 통해 리좀을 따라가라, 도주선을 늘이고 연장시키고 연계하라, 그것을 변주變奏시켜라, n차원에서 방향이 꺾인, 아마도 가장 추상적이면서 가장 꼬여 있는 선을 생산할 때까지. 탈영토화된 흐름들을 결합시켜라. 식물들을 따라라. 우선 잇단 독자성들 주변에 생기는 수렴원들을 따라 최초의 선의 한계를 정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다음으로 최초의 선의 한계 바깥, 다른 방향에 위치한 새로운 점들과 함께 이 선의 내부에서 새로운 수렴원들이 만들어지는지를 보라. 글을 써라, 리좀을 형성하라, 탈영토화를 통해 너의 영토를 넓혀라, 도주선이 하나의 추상적인 기계가 되어 고른판 전체를 덮을 때까지 늘려라. “우선 너의 오랜 친구인 식물에게 가서, 빗물이 파놓은 물길을 주의 깊게 관찰하라. 비가 씨앗들을 멀리까지 운반에 갔음에 틀림없다. 그 물길들을 따라가 보면 너는 흐름이 펼쳐지는 방향을 알게 될 것이다. 그 다음에 그 방향을 따라 너의 식물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서 발견되는 식물을 찾아라. 거기 두 식물 사이에서 자라는 모든 악마의 잡초들이 네 것이다. 나중에 이 마지막 식물들이 자기 씨를 퍼트릴 것이기에 너는 이 식물들 각각에서 시작해서 물길을 따라가며 너의 영토를 넓힐 수 있을 것이다.” 음악은 “변형되는 다양체들”만큼이나 많은 도주선들을 끊임없이 흘려보내왔다. 결국 자신을 구조화하거나 나무 형태로 만드는 음악 고유의 코드들을 뒤엎어버리게 되더라도 말이다. 따라서 음악 형식은 단절되고 증식한다는 점에서도 잡초나 리좀에 비견될 수 있다.
이문구는 「우리 동네」 연작에서 농촌을 외면적 사실과 구체에 충실하게 그려낸다. 농촌은 언제까지나 시대의 변화가 미치지 않는 무풍지대가 아니다. 그것은 사회적 생산의 잉여들을 떠안는다. 도시살림에서는 일반화된 가전제품과 외래 음식은 말할 것도 없고, 고고춤, 망년회, 관광계, 이쁜이계와 같은 생뚱맞은 소비문화와 외래문화의 풍속 유입과 과포화 상태가 바로 그것이다. 이는 현실을 횡단하는 징후들이다. 상징적 강제성의 힘 아래에서 저질러지는 후진성의 맹목들. 혹은 세계화의 폭력들. 세계화는 지역적인 것을 자본으로 묶어놓고 집어삼키는 포식자다. 농촌은 국가-기계의 관료주의적 규제의 조정과 통제를 받으며 병든 신체, 고갈된 신체가 되어가고 있다. 신자유주의 혹은 지구화라는 이름으로 진행되는 자본의 규제없는 흐름과 침투는 더욱 더 농촌을 식민주의적 수탈의 현장으로 고착시킨다. 외부와 접속할 수 있는 탈주선들은 끊어진다. 이문구는 소비문화의 무분별한 확산과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풍속의 범람으로 나날이 비속해지고 남루해지는 농민의 삶을 구체적이고 전면적으로 드러냄으로써 오늘의 농촌과 농민의 삶에 들어찬 불만과 좌절의 근본 요인에 대한 성찰로 이끈다.
“어제는 농수산부 무엇이라나 하는 것이 피서 허러 지나간다구 새벽버텀 어찌나 볶아대는지, 시 부락 사람들이 죄 분무기를 지구 나와설랑 해전 내 논배미에 들어가 후덩거렸더랴. 공동방제 허는 시늉을 내라니 벨 수 있남. 분무기에 맹물만 한 짐씩 지구 나와설랑 신작로 가생이 냄으 논에 들어가 애매헌 베포기만 짓밟었다는 얘기여. 위서 허라는 것은 세상 읎어두 못 배기니께.”
이문구, 「우리 동네 黃氏」, 『우리 동네』, 민음사, 1981
이를테면 「우리 동네 黃氏」에서 한 작중인물의 입을 빌려 토로하고 있듯 자주적 선택과 의지와 무관하게 이루어지는 관 주도의 타율적 삶은 농촌의 삶을 비루하게 만드는 크나큰 요인 중의 하나다. 작가는 실익이 없는 행정동원이라든가, 영농법의 강압적 시행에 대해 농민들의 불만과 반발 심리를 놓치지 않는다. 그 불만과 반발은 실효성 없는 정부 시책에 대한 빈정거림이나 관 주도의 영농 교육에 대한 반감과 무관심으로 드러난다. 아울러 공공연하게 “나는 내 양심 내 정신으로, 내 줏대 내 나름을 살자는 사람이다. 지끔까장 이리 가두 흥, 전주 가두 흥, 허메 살어왔지만 두고 봐라, 아무리 농토백이루 살어두 헐말은 허메 살테니.”(「우리 동네 李氏」)라고 주체성과 자주성을 표나게 내세우는 것으로 이어진다. 그것이 관이 되었건 소비문화가 되었건 외래의 침투로 말미암아 농경사회의 공동체적 윤리규범과 인간관계가 무너지는 위기감이 불러일으킨 각성을 보여준다.
「우리 동네」는 1970년대 이후의 노동인력이 썰물처럼 빠져나가 차츰 활기를 잃고 주저앉는 농촌 모습을, 고만고만한 농민을 상징하는 여러 성씨들을 중심인물로 내세워 그려낸 연작소설이다. 행정 관청-농협-농촌지도소들은 농민들 위에 군림하며 수탈의 말단 조직으로 작동한다. 국가-기계들의 권위주의에 대한 노골적인 불만과 반감, 비아냥거림과 적대감을 드러내는 것은 생존의 최소화에 매달린 농민들이 농업 노동으로부터 자신들을 쓸어내려는 힘에 대항하여 “지악스럽게 버둥거”리는 것이다. 농촌에 넓게 퍼져 있는 환물 심리나 병든 풍속은 다양체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의 고갈에 대한 징후들이다. 생래적인 건강성을 잃어버린 농촌-농민은 객체, 타자화한다. 억압의 질서 속에서는 “서루 다다 쇡여 먹잖으면 못 살게 마련된 세상”(「우리 동네 黃氏」)이 된다. “피차 상대방을 물주로 여기고, 서로 꾀를 다하여 등쳐먹으려고만”(「우리 동네 李氏」) 드는, 서로가 서로에 대해 적이며 늑대인 관계로 타락한 세태를 훑어내는 작가의 시선은 어두우면서도 냉철하다. 공산품의 조악성에 대항하여 농촌-농민들은 농약으로 범벅된 농산물을 아무런 죄의식 없이 내놓는다. 침투와 파괴는 상호적이다. 죄와 악은 서로에게 삼투한다. 서로가 서로를 물어뜯는 이 수성(獸性)의 세계에서 해결의 실마리는 백합, 양배추, 양귀비에 있지 않다. “풀은 유일한 출구이다. (.......) 잡초는 일구지 않아도 황폐한 공간에 있으며 그곳을 채울 뿐이다. 그것은 사이에서, 다른 것들 가운데서 자란다.”(MP : 1980)
「우리 동네」 연작 소설이 오늘의 농촌에 대한 사실적 보고로 끝나지는 않는다. 반근대와 탈현대의 변화라는 소용돌이 속에 놓인 농촌-농민들이 어떻게 세계화라는 폭력의 희생물이 되는지를, 극적인 전환이나 결말이 없이 그 역설과 모순의 생태학을 그려낸다. 이문구의 중문 구조의 문체는 농촌-농민에 대한 외연과 내포를 포착하는데 상당한 효력을 발휘한다. 큰 굴곡없는 삶을 짧은 삽화로 연결시켜 나가는 데도, 이 연작 소설이 돋보이는 것은 풍부한 토속어와 비속어, 판소리체의 입말들, 속담과 격언 등을 적절하게 써서 생생한 민중언어의 활력을 되살려낸 까닭이다. 그 짧은 삽화들은 서로 깊은 연관을 갖고 있지 않고 담담하게 농촌 풍속들을 드러내지만, 그것이 겹쳐지고 그 영역을 넓혀가면서 안으로는 차츰 하나의 구심점을 향해 집중된다. 따라서 독자들은 마치 가만히 앉아 농촌의 구석구석을 엿보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뿌리를 찾지 마세요, 수로를 따라가요.......
출처 : 장석주
글쓴이 : 수졸재 주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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