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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김단야-박헌영을 찾아서1] `트로이카`의 등장

by 8866 2006. 7. 14.

프레시안에서 연재중인 글입니다.

 

 

[김단야-박헌영을 찾아서1] '트로이카'의 등장

 

 

김철수, 김단야, 김산 등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 47명이 광복 60돌 만에 유공자로 추서됐다. 반세기가 넘는 분단과 이념 대립 속에서 이들은 철저하게 잊혀진 존재였다.
  
  님 웨일스의 <아리랑>(동녘) 등으로 비교적 잘 알려진 김산이나 해방 후 좌익 활동과 거리를 둔 뒤 1986년 타계할 때까지 생생한 증언을 남긴 김철수와 달리 김단야는 사회주의 운동의 선구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활동의 실체가 베일에 가려져 왔다.
  
  김단야는 또 다른 사회주의 운동의 선구자였던 박헌영과 함께 1919년 3ㆍ1운동 후 사회주의에서 탈출구와 대안을 찾은 청년 지식인의 전형이었을 뿐만 아니라, 온갖 악조건을 무릅쓰고 국내외를 잇는 초기 사회주의 운동을 주도했다.
  
  그런가 하면 '박헌영의 부인' 주세죽과의 죽음을 앞둔 사랑, '사회주의 조국'에 의한 비참한 최후 등은 김단야의 생애를 더욱 극적인 것으로 만든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할 만하다.
  
  <프레시안>은 김단야 등의 독립유공자 추서가 엄혹했던 시절 사회주의 독립운동의 정확한 모습을 이해할 수 있는 좋은 계기라는 판단에 따라 임경석 성균관대학교 교수(사학과)가 <역사비평> 2000년 겨을호(제53호)에 기고했던 '박헌영과 김단야'를 필자와 역사비평사의 허락을 얻어 전문 분재한다.
  
  임 교수는 일제 강점기 사회주의 운동사에 오랫동안 천착해 왔으며 <이정 박헌영 전집>(전9권, 역사비평사) 간행 과정에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사회주의 운동사를 총정리하는 방대한 작업에 착수해 2003년 그 첫 번째 결실인 <한국 사회주의의 기원>(역사비평사)를 내놓았다.
  
  특히 임 교수는 2000년부터 <역사비평>에 '잊을 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연재를 통해 '박헌영과 김단야'를 시작으로 강달영, 고광수, 김철수 등 1920년대 사회주의 운동사를 생생하게 복원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편집자>
  
  글을 시작하며
  
  역사비평사 편집자로부터 연락이 왔다. <박헌영 전집> 출간에 즈음하여, 한국 사회주의 운동의 선구자인 박헌영(朴憲永), 김단야(金丹冶) 두 사람을 조명해 달라고 했다. 두 사람의 생애와 사상을 살펴볼 수 있는 글을 써 달라는 얘기였다.
  
  받기 어려운 원고 청탁이었다. 두 사람에 대한 관심이야 오래 전부터 높았지만, 그들에 대한 조사가 아직 충분히 진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나는 차마 거절하지 못했다. 7, 8년 전부터 추진되어 온 <박헌영 전집> 간행 과정에 말석이나마 참여한 인연 탓이었다. 부족한대로 글을 꾸며 보기로 했다.
  
  이 글의 목적은 박헌영과 김단야 두 사람이 한국 현대사 속에서 수행한 역할을 조명하는 데에 있다. 두 사람은 한국 현대사 연구에 뜻을 둔 역사학도에게는 참으로 흥미로운 연구 대상이다. 여명기 한국 사회주의 운동의 지도자였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들의 개인사는 사회체제가 안정된 시대를 살아가는 요즘 사람들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파란만장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생애 주변에는 수많은 얘깃거리와 에피소드가 넘쳐난다.
  
  그들은 한 평생을 이상 세계의 실현에 목표를 둔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신념과 사상에 대해서 훗날 독자들이 왈가왈부 시비를 가릴 수도 있겠다. 노선과 정책의 옳고 그름을 가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다. 하지만 나는 이 글에서 그 문제를 다루지는 않겠다. 더 나은 인간적인 삶을 실현하기 위해 현실의 거대한 권력과 맞서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그들의 용기와 심리상태를 형상화하는 것, 그것을 이 글의 주안점으로 삼고자 한다.
  
  고난에 맞부딪쳤을 때 사람들의 정서적, 기질적 특성이 잘 드러나는 법이다. 나는 두 사람의 생애 중에서 견디기 어려운 시련이 도래한 시점이 어느 때인지를 주목했다. 그 중에서도 두 사람이 같이 깊숙이 관련된 사건을 추리는 것이 필요했다. 원고 청탁자의 주문을 고려해야 했기 때문이다.
  
  역사학도의 집필 의도를 만족스러울 만큼 실현하는 일은 항상 곤란에 부딪친다. 사료 때문이다. 두 사람의 행동에 내재하는 논리와 심리를 보여주는 사료는 매우 드물다. 게다가 현존하는 두 사람에 관한 기록은 흔히 단편적이거나 과장된 경우가 많다. 일본 관헌 측 문서 중에는 실제와 배치된 기록들조차 실려 있다. 오랫동안 비합법 혁명운동에 종사한 두 사람이니만큼 더욱 그러했다. 이 글에서 내 집필 의도가 제대로 실현되지 않았다고 느끼는 독자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사료상의 곤란을 처리하는 일에 아직 미숙한 탓으로 여겨 주시기 바란다.
  

국제레닌학교 재학시설 각국 혁명가들과 함께 한 김단야(앞줄 왼쪽 두 번째), 박헌영(앞줄 오른쪽 세 번째), 주세죽(가운데줄 오른쪽 세 번째). ⓒ연합뉴스

  트로이카
  
  ① 체포
  
  1922년 3월 25일에 상해 부두를 떠난 태고양행(太古洋行) 소속의 연안 여객선 북해환(北海丸)이 압록강 맞은편의 중국령 안동에 도착한 것은 4월 1일 저녁이었다. 상해를 출발한지 1주일 만이었다. 안동 부두에 접안한 여객선에서 승객들이 줄지어 하선했다. 그들 속에는 22~23세쯤 돼 보이는 세 명의 한인 청년이 섞여 있었다. 박헌영과 김단야 그리고 임원근(林元根)이었다.
  
  부두 앞에 이륭양행(怡隆洋行) 사무원 최준(崔俊)이 나타났다. 안내자였다. 미리 약속된 것이었으리라. 세 청년은 안내자의 인도를 받으며 신속히 부두를 떠났다.
  
  이륭양행은 영국 국적의 아일랜드 사람 조지 쇼우(George L. Show)가 경영하는 무역회사였다. 쇼우는 식민지 한국의 혁명가들을 은연중 후원해 왔다. 영국의 강압 하에 놓인 모국 아일랜드의 처지 때문이었을 것이다. 안동 시내 북감자(北坎子)에 자리잡은 이륭양행 2층 건물의 한 켠에는 1919년 9월 대한민국임시정부 교통국 안동지부가 비밀리에 설치되기도 했다. 그러나 쇼우의 행위는 일본 경찰에게 곧 적발됐다. 1920년 7월에 그는 '이륭양행 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때 작성된 일본의 조사 기록에 따르면, 쇼우는 봉천(奉天) 주재 영국 총영사가 일본 당국의 요청을 받아 수차례 주의를 줬음에도 불구하고 한인 독립운동자들을 원조해 왔다. 이 사건 이후로 이륭양행은 반일운동의 공공연한 거점 노릇을 하지는 못했다. 그래도 이륭양행 사무원이라는 신분은 여전히 유용했다. 그 직위는 안동에서 공공연하게 활동할 수 있는 합법성을 보장해 줬다. 부두와 거리를 오가면서 비밀스레 반일 운동에 종사하면서도 무역 업무를 수행하는 양 가장할 수 있는 직위였다.
  
  세 청년이 안내받아 간 곳은 안동 구(舊)시가 중국인 거리였다. 이곳은 안동 주재 일본영사관 경찰의 감시망이 가장 소홀했다. 국경 도시 안동에 퍼져 있는 한인 밀정들의 눈초리를 피하자면 그 곳에서 중국인 행세를 하는 것이 가장 유리했다. 세 청년은 중국인 여관으로 찾아 들었다. 영빈루(迎賓樓)라는 간판을 달고 있었다. 음식점도 겸하는 곳이었다.
  
  그들은 밤새 압록강 도강 방법을 숙의했다. 위험을 분산시킬 필요가 있었다. 무리를 지어서가 아니라 개별적으로 국경을 넘는 게 유리했다. 설혹 한 사람이 붙잡히더라도 다른 사람은 무사해야만 했다. 한 사람씩 나누어 차례로 월경하기로 했다. 국경을 넘은 이후에 만날 시간과 장소도 정해 두었을 것이다. 세 사람 중에서 김단야가 먼저 출발하기로 했다. 다른 두 사람은 하루나 이틀의 시차를 두고 월경하기로 협의했다.
  
  국내로 잠입하려면 압록강 철교를 넘어야 했다. 중국령 안동과 식민지 한국의 신의주를 연결하는 이 철교는 일본 경찰과 헌병의 삼엄한 감시 아래 관리되고 있었다. 1909년 5월에 착공되고 1911년 11월에 준공된 이 철교는 조선총독부 철도국이 세운 길이 944m의 현대식 교량이었다. 다리의 중앙에는 단선 철로가 부설되어 있고, 그 양쪽에는 인도가 마련되어 있었다. 이 다리는 선박의 항해를 자유롭게 하는 회전식 교량으로도 유명했다. 다리 중간 마디를 90도 회전함으로써, 선박의 통행을 가능하게 했다. 일본 제국주의의 대륙 진출을 위해 부설된 이 철교는 해외로 망명하는 지사들과 국내로 비밀리에 잠입하는 혁명가들이 반드시 거쳐야 할 관문이기도 했다.
  
  김단야는 압록강 철교를 건너는 데 성공했다. 그가 어떤 방법을 사용하여 국경 경비 경찰의 검문을 따돌렸는지는 자세히 알수 없다. 어떻든 그는 국경을 돌파했고, 신의주를 무사히 벗어났다. 서울행 열차 승차권을 구매하는 데에도 성공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김단야는 신의주 남쪽에 위치한 작은 정거장 차련관(車輦館)에서 신의주 경찰서 소속 일본 경찰에 체포되고 말았다. 서울행 열차 속에서였다. 4월 3일 오전 7시 30분이었다.
  
  남은 두 사람도 똑같은 불운을 겪었다. 그들은 압록강을 건너기는커녕 안동의 숙소에서 앉은 채로 체포됐다. 4월 2일 저녁에 숙소인 영빈루를 안동 주재 일본영사관 경찰대가 급습했던 것이다.
  
  무슨 꼬투리 때문에 세 사람이 한꺼번에 체포됐을까? 그들의 비밀스런 행동을 일본 경찰이 눈치 챈 것을 보면 뭔가 근본적인 차질이 있었던 것 같다. 출발지인 상해나 아니면 안동에 그들을 잘 관찰할 수 있는 가까운 거리에 일본 경찰의 협력자가 있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정확한 원인은 아직 알 수 없다.
  
  ② 취조
  
  세 명의 '불령선인'(不逞鮮人)에 대한 경찰의 가혹한 취조가 시작됐고, 심문은 한 달 이상 계속됐다. 1922년 6월 10일에 작성된 경찰문서 '고려공산당원 박헌영 외 2명의 공술 보고의 건'을 살펴보면, 체포된 세 사람이 주로 어떠한 추궁을 받았는지를 알 수 있다.
  
  그에 따르면 취조 범위는 극히 넓었다. 경찰의 추궁은 구체적인 한두 가지 '범죄 사실'에 한정되지 않았다. 경찰의 관심사는 세 청년의 일생 전반에 걸칠 정도로 폭넓었다. 세 사람은 출생 이후 체포되기까지 경력을 세세히 진술해야만 했다. 특히 상해로 '도항'한 이후의 행적에 대해 집중적인 추궁을 받았다. 또한 국내에 비밀리에 잠입하려다 체포된 것인 만큼 취조의 초점도 당연히 '입국 목적'에 놓여 있었다.
  
  경찰의 집요한 취조는 마침내 성과를 거뒀다. 피의자들이 '범죄 사실'을 토해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피의자 김단야는 입국하기 넉 달 전에 상해에서 고려공산당에 입당했다고 자백했다. 박헌영도 1921년 7월부터 재상해 '사회주의연구소'에 가입하여 사회주의 사상을 연구했다고 진술했다. 임원근의 대답도 대동소이했다.
  
  취조 기간이 길어진 까닭을 짐작할 만하다. 유죄 판결을 받을 게 명백한 '범죄 사실'을 인정하기까지 피의자들은 장기간 입을 다물고 있었다. 굳게 다문 입을 열게 하기 위해 취조 경찰들은 각별한 수단을 취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어떤 방법을 사용했는지를 직접 알려주는 자료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피의자들이 자백한 바에 따르면, 입국 목적은 "조선 각지에서 사회주의 선전을 하는 것"이었다. 경찰 기록에는 구체적인 실행 방법에 관한 진술도 남아 있다. 노동자ㆍ지식계급ㆍ청년층에게 사회주의 사상을 선전하고, 그 중에서 가입을 승낙한 자를 공산당에 입당시키려 했다는 구절이 그것이다.
  
  경찰은 피의자들의 자백에 매우 흡족해했던 것 같다. 피의자들의 경력과 범죄 사실을 상세히 기재한 최종 수사 보고서를 작성했고, 그들을 검사국으로 넘겼다. 그 후 세 사람은 1922년 5월 30일에 신의주 지방법원에서 각각 1년 6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았으며, 평양 형무소에서 복역하기에 이르렀다.
  
  일본 경찰이 승리한 듯 보였다. '대일본제국'의 새 영토인 조선의 치안을 위태롭게 할 '불령선인'을 체포하여 '선량한 신민'들에게서 적당한 기간 동안 효과적으로 격리시키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그러나 참된 승리자는 경찰이 아니라 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경찰의 가혹한 심문 속에서도 자신의 정체와 사명, 입국 목적을 은폐해냈다. 그들은 자기 방어에 성공했던 것이다. '심문 투쟁'의 승리자는 피의자 박헌영ㆍ김단야ㆍ임원근, 세 사람이었다.
  
  세 사람은 평범한 일개 당원이 아니었다. 경찰 앞에서는 단지 사회주의 사상에 동조하여 국내에 그를 선전하려 했다고 진술했지만, 실제로는 그들은 3ㆍ1운동 이후 무서운 기세로 확장하고 있던 한국 사회주의 운동의 최고급 간부였다. 세 사람의 직위는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위원이었다. 고려공산청년회는 코민테른과 더불어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참모부 역할을 하던 국제공산청년동맹의 한국 지부로서 1921년 8월에 중국 북경에서 비밀리에 결성된 바 있다.
  
  박헌영은 창립 당초부터 그 중앙위원에 선임됐으며, 나아가 최고위 직책인 책임비서를 맡고 있었다. 그의 나이 22세 때였다. 김단야와 임원근도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위원이었다. 이 두 사람은 박헌영보다 7개월 가량 늦은 1922년 3월 20일경에 상해에서 재편된 고려공청 중앙총국에 합류했다. 중앙위원의 숫자는 극소수였다. 재편 당시에 모두 다섯 명이었는데, 이 세 사람 외에 조훈(趙勳)과 안병진(安秉珍)이 그 구성원이었다.
  
  세 사람은 입국 목적을 효과적으로 은폐했다. 그들의 국내 잠입 목적은 고려공청 중앙총국을 서울로 이전하는 데 있었다. 국내에서 본격적인 공산주의 청년운동을 전개할 심산이었던 것이다. 중앙위원 가운데 조훈은 국제공청과의 연락을 위해 상해에 잔류하고, 다른 4명은 입국하기로 결정했다. 그 중에서 안병진은 이미 일착으로 국내에 잠입하는 데 성공했다. 박헌영ㆍ김단야ㆍ임원근 세 사람의 입국은 그에 뒤이어 시도된 것이었다.
  
  경찰의 험악한 강박 아래서 그들이 힘써 감췄던 '범죄 사실'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세 사람은 상해로 건너간 이후의 생활에 대해서도 연막을 피웠다. 이들은 상해로 건너간 것을 망명이 아니라 '도항'(渡航)이라고 표현하는 데 성공했다. 학업을 닦기 위한 유학 목적의 도항이었다고 일관되게 진술했음이 분명하다.
  
  보기를 들어 김단야의 '상해 도항 후 행적'이 경찰 기록에 어떻게 쓰여 있는지 보자. 1919년 12월에 상해에 도착한 뒤 김단야는 여러 학교를 전전했다고 한다. 1920년 2~5월 항주(杭州) 배정학교(培正學校), 그해 11월에서 1921년 7월까지 소주(蘇州) 안성(晏成)중학교, 1921년 10월에서 이듬해 2월까지 상해 상과대학교에 재학 중이었다는 것이다. 학자금이 쪼들려 한 학교에 오래 재학할 수 없었지만, 온갖 노력을 기울여 학자금을 벌어가며 좀더 유리한 상급학교에 입학하고자 끊임없이 노력했다고 김단야는 일본 경찰에게 역설했음이 틀림없다.
  
  박헌영도 마찬가지였다. 경찰 기록에 따르면, 그도 1920년 11월 상해에 도착한 뒤 여러 학교를 전전했다. 1921년 1월부터 6개월 동안 상해 기독청년회 영어 야학부, 1921년 9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상해 상과대학교에 재학중이었다. 임원근의 진술도 비슷했다. 그는 영어를 배울 목적으로 상해로 건너갔으며, 1920년 10월 이후 줄곧 혜령(惠靈)영어전문학교 야간부에 통학했다고 밝혔다.
  
  이러한 대응 방법은 두 가지 효용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부득이 시인할 수밖에 없었을 사회주의 연루 혐의는 학업에 전념하던 중에 우연히 부차적인 수준의 관심을 보인 결과일 뿐이라고 주장할 수 있었다. 혐의 사실을 불가불 인정하되, 그것의 비중을 낮춰 진술하는 데 유용했을 것이다.
  
  또 하나의 효용은 상해에서 그들이 실제 행하였던 혁혁한 혁명운동 경력을 은폐하는 데 도움이 됐다는 점이다. 박헌영은 망명 직후부터 반일 혁명운동에 투신했다. 상해에 도착한 지 6개월 뒤인 1921년 5월에 재상해 한인공산당에 입당했고, 6월에는 고려공산청년단 상해회 비서로 일하고 있었다. 또한 비합법 잡지 <올타>의 편집자이기도 했다. 이 잡지의 한자 표기는 '정보(正報)'였는데, 여태껏 연구자들에 의해 활용된 적이 없는 점으로도 알 수 있듯이, 실물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1922년 초엽에 8호까지 발간된 이 매체의 발간 과정에서 박헌영은 편집자로서 줄곧 개입했음이 확인된다. 또한 1921년 8월에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총국 결성에 참가하고 책임비서에 취임했음은 앞서 말한 바와 같다. 박헌영은 책임비서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 북경과 상해를 부지런히 오가며, 국제공청과 연락을 맺고 하급 단체를 지도하는 숨가쁜 생활을 보냈다.
  
  김단야와 임원근의 재 상해 행적도 그에 뒤지지 않았다. 두 사람도 1921년에 재상해 한인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단 상해회에 가입했었다. 그해 말에는 극동민족대회와 극동청년대회 참가차 러시아를 방문하기도 했다. 임원근은 재상해 독립신문사와 고려공산청년단 상해회 대표 자격으로, 김단야는 고려공산청년단 상해회 대표 자격으로 두 대회에 모두 참석했다. 두 사람은 5개월에 걸친 긴 여행을 했다. 대표단에 선정된 다른 사람들과 일행을 이뤄 1921년 10월 중순에 상해를 출발한 두 사람은 10월 31일 만주리(滿洲里)를 통해 러시아에 입국했다. 이후 이르꾸츠끄ㆍ모스크바ㆍ뻬쩨르부르그에서 혁명 러시아의 다양한 면모를 체험한 두 사람이 상해로 귀환한 시점은, 경찰 기록에 따르면 1922년 3월 16일이었다.
  
  ③ 3ㆍ1운동의 후예들
  
 
1928년에 찍은 박헌영과 주세죽. ⓒ프레시안  

  이제 막 20세에 달한 약관의 청년들이 해외 망명을 결행하는 것은 역사상 흔한 일이 아니다. 그들이 상해 망명을 꾀한 데에는 평범치 않은 동기가 있었다. 그것은 3ㆍ1운동의 세례 때문이었다. 경찰 기록에는 쓰여 있지 않지만 이들은 3ㆍ1운동의 열렬한 참가자들이었다.
  
  3ㆍ1운동 당시 경성고등보통학교 졸업반에 재학 중이던 박헌영은 반일 시위 운동과 유인물 살포에 열성적으로 참여했다. 그는 뒷날 회고하기를, 3ㆍ1운동으로 인해 사회주의 이념을 처음 접했으며 '직업 혁명가'라는 쉽지 않은 생애를 시작했다고 말한 바 있다.
  
  3ㆍ1운동 당시 박헌영의 활동상이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것과 달리, 김단야의 참여 양상은 세부적인 수준까지 잘 알려져 있다. 그는 1919년 당시 서울의 배재고등보통학교 재학 중이었다. 그해 1월부터 비밀리에 반일 학생 써클에 가담했으며, 이것이 모체가 되어 3ㆍ1운동 때는 <반도의 목탁>이라는 제목의 비합법 유인물을 정기적으로 발간하는 데 참여했다. 만세 시위 운동이 지방으로 확산됨에 따라 고향인 경북 김천으로 내려간 그는 3월 24일 개령면 동부동 시위 운동에 주도적으로 참가했다. 이로 인해 경찰에게 체포된 그는 대구지방법원 김천지청에서 태형 90도를 선고받았다. 야만적인 곤장 90대를 맞은 뒤에도 젊은 김단야의 반일 운동은 그칠 줄 몰랐다. 곧바로 비밀결사 적성단(赤星團)에 가입하여 재만주 독립군사관학교 입교생을 모집하고, 운동자금을 모금하는 일에 종사했다. 그는 마침내 1919년 12월에 상해로 망명했다.
  
  이 청년들은 3ㆍ1운동의 후예들이었다. 3ㆍ1운동의 용광로 속에서 형성된 사회적 자의식이 젊은 나이에 해외로 망명하기로 결심케 한 가장 큰 원동력이었던 것이다. 망명지 상해에서 만난 세 사람은 정치ㆍ사상적으로 동일한 행로를 걸었다. 1921년에 재 상해 한인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단 상해 지방회에 똑같이 가담했고, 1922년 봄부터는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위원에 나란히 올랐다.
  
  이들은 사상적인 동지였을 뿐 아니라 개인적 인간관계에서도 뜨거운 우정을 나눴다. 세 사람은 모두 1900년에 출생했다. 경자(庚子)년 쥐띠 동갑이었다. 김단야는 1월 16일생이었고, 임원근은 4월 10일생, 박헌영은 5월 1일생이었다. 그들이 함께 몸담고 있던 고려공산청년단 상해 지방회 회원 수는 1921년 10월 현재 36명이었고, 그 중에는 학생 18명, 노동자 11명, 직업적 혁명가 7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 중 한 사람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소설 <상록수>의 작가 심훈(沈熏)은 이들 청년 사회주의자들의 관계를 "음습한 비바람이 스며드는 상해의 깊은 밤 어느 지하실에서 함께 주먹을 부르쥐던" 사이였다고 표현한 바 있다. 그가 쓴 첫 장편소설 ꡔ동방의 애인ꡕ(1930)은 상해에서 한국 혁명을 위해 활동하던 청춘 남녀들의 인간관계를 모델로 삼았다고 평가받는다.
  
  세 청년이 체포된 지 1년 10개월이 흘렀다. 1924년 1월 19일, 평양 형무소의 굳게 닫힌 문이 열렸다. 머리를 박박 깎인 세 청년이 감옥 문을 나섰다. 만기 출옥이었다. 세 사람은 출감 이튿날 곧바로 서울로 올라 왔다. 그리하여 그들은 마침내 목적을 달성했다. 서울 입성에 성공했던 것이다. 그것도 합법적 신분을 획득한 채였다. 비록 '요시찰 인물'이라는 꼬리표를 단, 일본 경찰의 끊임없는 감시 대상이 되긴 했지만.
  
  이들은 상경과 동시에 별다른 휴식도 없이 맹렬한 활동을 개시했다. 1924년 봄에 혜성처럼 서울의 운동 전선에 나타난 세 명의 사회주의자를 가리켜 사람들은 '트로이카'라고 불렀다. 트로이카란 세 마리 말이 끄는 러시아식 마차를 지칭한다. 한국의 신흥 사회주의 운동을 맹렬히 이끌어 가는 삼두마차, 바로 이것이 세 사람을 부르는 별칭이 됐다. (계속)
출처 : 등대지기
글쓴이 : 정현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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