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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스크랩] 중국(中國)의

by 8866 2006. 7. 13.

중국(中國)의 "조선족항일열사전(朝鮮族抗日烈士傳))" 연구(硏究)
-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에서의 한인(韓人)들을 중심(中心)으로 -

신 일 철(申一澈)*

1

연변(延邊)은 일제하(日帝下) 한국독립운동(韓國獨立運動)의 기지(基地)의 하나였고 중국(中國)의 동삼성(東三省)은 삼의부(參議府)촵정의부(正義府)촵신민부(新民府)와 삼부통합(三府統合)의 산물인 국민부(國民府) 등 우리 독립군정부(獨立軍政府)와 한말의병운동(韓末義兵運動)에서 국민부(國民府)의 독립군(獨立軍)인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까지의 활동무대(活動舞臺)였다.

홍위병난동(紅衛兵亂動)에서 시작된 중국(中國)의 대란기(大亂期)인 문혁기(文革期)가 끝나면서 "4인(人)무리"가 물러간 후 중공(中共)의 소수민족자치(少數民族自治)의 정신이 되살아나면서 한인항일열사(韓人抗日烈士)들의 투쟁기록이 많이 간행되었다. 그런데 연변조선족자치주(延邊朝鮮族自治州)나 그밖에 동삼성(東三省)에서 간행되는, 중국적(中國的) 표현(表現)인《동북항일열사전(東北抗日烈士傳)》이나 "연변항일열사(延邊抗日烈士)" 혹은 "조선족혁명열사"들의 항일투쟁기록(抗日鬪爭記錄)이 과연 한국독립운동사의 범주에 들어 올 수 있는가에는 의문이 없을 수 없다.

흑룡강성사회과학원(黑龍江省社會科學院) 지방당사연구소(地方黨史硏究所)와 동북열사기념관(東北烈士紀念館) 공편(共編)인《동북항일열사전(東北抗日烈士傳)》제일집(第一輯)에는 주로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 제1로군(第1路軍)의 열사(烈士)들이 수록되어 있는데, 수록된 19명 중에서 조선족이 이홍광(李紅光), 양임(楊林), 김백양(金伯陽)(김영서(金永緖)), 김순희(金順姬), 이동광(李東光)(이상준(李相俊)), 허성숙(許成淑), 차룡덕(車龍德), 이민환(李敏煥), 한호(韓浩)(김한호(金翰浩)), 유만희(柳萬熙), 이명해(李明海) 등 11명이다. 제이집(第二輯)은 제2로군(第2路軍), 제3집(第3輯)은 제3로군(第2路軍)으로 분류되어 있는데 이 두 권에도 조선족열사가 압도적으로 많다. 제2집(第2輯)에도 허형식(許亨植) 등 유명한 조선족열사가 많이 수록되어 있다.

김일성(金日成)(실명(實名) 김성주(金聖柱)) 등 북한(北韓)에 들어온 인물과 관련해서 항일투쟁(抗日鬪爭)의 날조에 대한 반증이 되는 동장영(童長榮), 왕덕태(王德泰), 위극민(魏民)편이 주목된다. 동북(東北)의 항일열사전(抗日烈士傳)에는 김일성(金日成)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고 서술 중에 김책(金策), 최석천(崔石泉)(최용건(崔庸健)) 등은 언급되고 있으며, 중공당(中共黨)의 연안(延安)과 관련된 무정(武亭) 등 조선의용군(朝鮮義勇軍)에 대해서는 제한없이 긍정적 평가를 하고 있다.

현재 중국동북(中國東北)에서 간행되는 항일열사(抗日烈士)들의 기록이 비록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 중심(中心)의 것이라 하더라도 한중(韓中) 양민족의 항일투쟁사(抗日鬪爭史)에 속한다는 데는 의심할 바 없다. 그러나 그 운동의 목적(目的)이나 지도적 중심에 있어서 중국(中國)의 반침략(反侵略)운동과 중공당(中共黨)의 공산주의운동의 전개과정에 속하기 때문에 우리 독립운동사(獨立運動史)에 대해서는 보완적(補完的) 의미(意味)밖에 가질 수 없게 된다.

특히 1928년(年)의 제3차(第3次) 국제공산당 즉 콤민테른의 1국(國)1당(黨) 원칙(原則)에 따라 만주(滿洲)에서의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 조직(組織)이나 활동(活動)이 모두 중공당(中共黨)에 흡수되고, 항일투쟁(抗日鬪爭)의 대표적인 게리라조직인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이나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의 총사령(總司令)은 중국인이었으며 그 투쟁목적(鬪爭目的)이 중공당적(中共黨的)인 것으로 그 투쟁강령에 한국(韓國)의 독립(獨立)이나 한민족의 해방(解放)은 명시(明示)되지 않았고 콤민테른과 중공당(中共黨)의 지도하에 있었기 때문에, 비록 콤민테른에서 동북(東北)에 파견된 지도원이 한인(韓人) 오성륜(吳成崙)이었고 그 지도적 간부 대부분이 한인(韓人)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독립운동(韓國獨立運動)의 범주에 넣기에는 많은 문제가 있다.

일본관동군(日本關東軍) 40만(萬)을 투입하여 전개한 대토벌작전에 밀려 1930년대말(年代末)까지 남아있던 항일(抗日)게리라는 양세봉(梁世奉)의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과 양정우(楊靖宇)의 항일연군(抗日聯軍)도 1940년(年)까지는 모두 붕괴된다. 동북항일열사전(東北抗日烈士傳)의 열사(烈士)들의 사몰년(死沒年)이 주로 1938∼40년(年)에 집중되고 1940년 후까지 남은 열사(烈士)는 거의 없다. 1940년을 전후해서 항일연군(抗日聯軍)의 패잔세력은 소련 영내(領內) 하바로우스크 근방의 소련 극동방면군(極東方面軍)소속의 정찰대(偵察隊)의 성격을 가진 "국제홍색팔팔려단(國際紅色八八旅團)"의 야영에 들어갔다가 5년후 1945년(年) 9월(月) 소련군(軍)의 만주(滿洲), 한국진주(韓國進駐)와 더불어 귀국한 것이다. 따라서 한국독립운동(韓國獨立運動) 속에서의 공산주의운동(共産主義運動)에 대해 주로 일본측(日本側) 자료(資料)에 의존해 온 서술을 보완(補完)하는 데 중국동북(中國東北)의 자료(資料)/도서가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첫째로, 연변(延邊)을 비롯한 동삼성(東三省)의 항일열사전(抗日烈士傳)들은 주로 중공당사(中共黨史)의 입장(立場)에서 서술되고 특히 1930년대(年代)의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이나 항일연군(抗日聯軍)의 투쟁목표(鬪爭目標)에는 한국(韓國)의 독립(獨立)이나 민족해방(民族解放)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으며, 그 지도급간부는 절대다수가 한인(韓人)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항일연군(抗日聯軍)도 우리가 상상하는 조중연합(朝中聯合)의 성격을 가진 항일무력단체(抗日武力團體)가 아니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둘째로, 이들 출판물들은 일차자료(一次資料)도 아니고 자료(資料)의 전거(典據)도 밝혀 있지 아니한 계몽적(啓蒙的) 독본류(讀本類)의 개인전기형(個人傳記型)의 "열사전(烈士博)"으로 기술되고 있다. 다만 독립운동자(獨立運動者) 개인연구(個人硏究)에 도움이 되고 때로는 우리에게 별로 알려지지 않은 공산주의운동 속의 인물, 예를 들면 중공당(中共黨)의 북경시당위(北京市黨委) 조직부장을 역임한 김산(金山)(일명(一名) 장명(張明))이라든가 한위건(韓偉健), 항일연군(抗日聯軍)의 제3군(第3軍) 군장(軍長) 허형식(許亨植)(의병장(義兵將) 허왕산(許旺山)의 생(甥)) 등에 대한 전기에서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으며, 동북(東北)의 항일(抗日)게리라의 창시자 이홍광(李紅光) 등에 대한 사적은 유의할 만한 것이다.

셋째로, 이런 출판물들이 중공당사(中共黨史)의 관점(觀點)에서 선택된 인물(人物)에 대한 전기물(傳記物)이지만《조선족백년사화》제1집에는 반공적(反共的)인 항일투사(抗日鬪士) 양세봉(梁世奉)장군도 다뤄지고 있어 흥미롭다. 무정(武亭)을 비롯한 조선의용군(朝鮮義勇軍)에 관한 사실들은 풍부하게 서술되어 있고 제3차내전(第3次內戰)에서의 임표와의 관계도 명백한 서술을 얻을 수 있다.

넷째로, 이들 출판물이 해방전 김일성의 사적에 대해 전혀 언급을 회피하고 있는 점이다.《동북항일열사전(東北抗日烈士傳)》제(第)1,2,3집(輯)에도 김일성에 대한 언급이 없으며, 다만 허형식(許亨植)편에서 김책(金策)과의 관계가 언급되고 있을 뿐이다. 북한판(北韓版) 김일성(金日成)의 전기에서 동북항일열사(東北抗日烈士)들의 투쟁기가 도용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방증을 중국(中國)의 열사전(烈士傳)에서 얼마든지 얻을 수 있게 되었다. 만주(滿洲) 항일(抗日)게리라 투쟁에서 최고위층 지도자는 오성륜(吳成崙)이었으나, 역시 체포된 후 변절된 것으로 낙인찍어 열사(烈士)에서 제외시킨 것으로 추정된다.

이 논고(論稿)에서 주로 논의의 대상으로 한 도서자료는 다음과 같다.

《연변조선족자치주개황》(연변인민출판사. 1984)
《연변조선족자치주개황(延邊朝鮮族自治州槪況)》(중국문판(中國文版))
《중국의 조선족(中國の朝鮮族)》(대촌익부역(大村益夫譯), 일역판(日譯版))
《조선족략사》(연변인민출판사, 1987)
《조선족간사(朝鮮族簡史)》(연변인민출판사(延邊人民出版社), 1986)
《남만주인민항일투쟁(南滿洲人民抗日鬪爭)》(연변인민출판사(延邊人民出版社), 1986)
《장백의 투사들》(1) (연변항일렬사전, 1982)
《장백의 투사들》(3)(연변항일렬사전, 1987)
《조선족혁명열사전》(제1집, 제2집, 료녕민족출판사, 1986)
《조선족백년사화》(1∼3)(료녕민족출판사, 1984)
《근대동북인민혁명투쟁사(近代東北人民革命鬪爭史)》(길림출판사(吉林出版社), 1984)
《동북항일열사전(東北抗日烈士傳)》(1∼3집(輯))(흑룡강인민출판사(黑龍江人民出版社), 1980)

이밖에도 많은 관계 도서가 있으며 특히 주보중전(周保中傳)이나 그의 일기(日記)는 항일연군(抗日聯軍)과 소련 도피후의 국제홍색(國際紅色) 88여단(旅團)에서의 한인(韓人)들의 정황(情況)에 대해 보다 소상한 정보를 줄 수 있을 것이다.

2

우선 중국(中國)의 연변조선족자치주(延邊朝鮮族自治州)를 개관한 문헌(文獻)인《연변조선족자치주개황》(이하(以下)는《개황(槪況)》이라 약칭(略稱)함)은 중국의 "국가민족사무위원회 민족문제에 관한 5개 총서 중의 하나". "중국소수민족자치지방개황총서"라는 점에서 기본적 문헌에 속한다.《조선족략사》와 이《개황》은 연변자치주(延邊自治州)의 개황을 서술하면서 항일(抗日) 투쟁시기(鬪爭時期)의 사적서술(史的述)을 포함하고 있다. 이《개황》은 한민족(韓民族)의 간도개척사(間島開拓史)와 일제하(日帝下)의 항일투쟁(抗日鬪爭)을 서술하고 있으므로 만주(滿洲) 무장항일운동(武裝抗日運動)에 관한 중공당(中共黨)의 항일투쟁기사관(抗日鬪爭期史觀)을 이해하는 데 길잡이가 된다.

이 개황서의 머리말에서 "조선족인민들은 여러 민족 인민들과 함께 중국공산당의 영도 아래 14년 동안 아주 간고한 항일무장투쟁을 견지하였다"라고 해서 1931년 일제(日帝)의 만주침략(滿洲侵略)인 "9.18사변(事變)"을 기점으로 1945년까지 14년간을 중국(中國)의 입장(立場)에서 "항일무장투쟁기(抗日武裝鬪爭期)"로 규정하고 있는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1931년 "9.18사변(事變)" 이후의 만주에서의 항일투쟁(抗日鬪爭)은 중공당(中共黨)의 항일구국투쟁(抗日救國鬪爭)이 되고 한인공산주의자(韓人共産主義者)들의 항일투쟁(抗日鬪爭)도 중공당사(中共黨史)의 테두리 속에서 서술되고 있다. 우리의 한국현대사적(韓國現代史的) 정통(正統)에서는 이 한인공산주의자(韓人共産主義者)들의 투쟁(鬪爭)이 어떻게 평가(評價)되어야 하며, 더욱이 이런 중공당사적(中共黨史的) 서술(述)은 이 서기의 투쟁사(鬪爭史)에서 북한정권(北韓政權)과의 연결도 전혀 인정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 주목하게 한다.

우리 독립운동사(獨立運動史)의 관점에서 이《개황》중에서 특히 관심을 끄는 부분은 제2장 "역사연혁과 해방전의 혁명투쟁"인데 이 장은 다음과 같이 4절로써 서술되어 있다.

제1절 역대의 행정구역 설치
제2절 연변지역의 개척과 근대 반제반봉건투쟁
제3절 중국공산당의 령도하의 반제반봉건투쟁
제4절 해방후의 행정구역1)

이《개황》제2장의 제1절 "력대의 행정구역설치"는 간도(間島)의 역사적(歷史的) 유래(由來)를 개관하고 있는데, 주로 청대(淸代) 이래 1905년 일제(日帝)의 조선(朝鮮) "통감부(統監府)"의 간도출장소(間島出張所)가 설치될 때까지 특히 간도(間島)를 개척해 온 한민족(韓民族)의 권익(權益)을 무시하고 중(中)촵일(日) 양국간(兩國間)의 "간도협약(間島協約)"으로 한(韓).청(淸)간의 오랜 간도령유권분쟁(間島領有權紛爭)을 한국(韓國)을 배제하고 매듭지은 경과(經過)를 중국측(中國側)의 관점에서 서술하고 있다.2)

19세기말부터 1905년을 전후해서 감행된 한말의병운동(韓末義兵運動)의 만주이동(滿洲移動)과 만주에서의 의병계(義兵系) 독립투쟁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다만 "청조말(淸朝末) 민국초(民國初)의 반봉건투쟁(反封建鬪爭)"항에서 주로 조선족에 대한 청조(淸朝)의 압박과 수탈을 서술하고 그 시기의 반봉건투쟁(反封建鬪爭)의 사례로서

① 1899년 천보산(天寶山) 은광노동자들의 투쟁
② 1910년 5월 혼춘(琿春) 상인들의 과중한 세금징수를 반대하여 철시를 단행한 사건
③ 1941년 1월 국자가(局子街) 서부 교외의 상발원(祥發源) 일대의 봉기 를 들고 있다.3)

또한 1860년 제정(帝政)러시아 정부가 중국(中國)에 불평등조약(不平等條約)인 "북경조약(北京條約)"을 강요하고 우스리강(江) 이동(以東)의 광대한 중국영토(中國領土)를 점령(占領)했다고 하여 중(中).소 국경분쟁(國境紛爭)의 내원(來源)을 설명하고 1904년 러.일전쟁때까지의 러시아의 중국침략(中國侵略)을 요약하고 있다.

1910년대(年代)의 항일투쟁(抗日鬪爭)에 대해서 "개황(槪況)"은 아주 간단하게 다음과 같은 사건만을 열거하는데 그치고 있어, 1932년 이전 우리 한국(韓國)의 만주(滿洲)에서의 독립운동(獨立運動)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돌리고 있지 않다.

① 1909년 9월 "간도협약(間島協約)"에 의해 한인(韓人)들에 대한 일제(日帝)의 "영사재판권(領事裁判權)"이 인정되자 "연변의 조선족의 진보적 인사들"이 변무공서(邊務公署)에 연명으로 소장(訴狀)을 보내고 일본침략자와 청조정부(淸朝政府)의 매국행위를 규탄했다.

② 매국적(賣國的) 조약(條約)인 "대화(對華) 21개조약(個條約)'에 반대하는 투쟁에서 국자가(局子街)의 대중은 1915년 6월 북산학당(北山學堂)에 모여 일본상품배척운동(日本商品排斥運動) 등 반일투쟁을 전개하고 "조선족의 반일지식인(反日知識人)은 각 지방에 사립중학교(私立中學校)와 소학교(小學校)를 만들어 반일애국교육(反日愛國敎育)을 실시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③ 3.1독립운동(獨立運動)에 대해서는 러시아의 10월혁명의 영향도 인정하면서 다만 연변(延邊)조선족의 항일투쟁으로만 묘사하고 있다. 그리하여 연변(延邊)의 3.1독립운동을 "3.13봉기"라고 표현한다.

1919년 3월 로씨야 10월혁명과 조선 <3.1> 반일민족독립운동의 영향하에 연변 조선민족인민들은 반일투쟁의 더욱 셰찬 물결을 일으켰다. 3월 13일에 룡정, 연길, 대립자, 두도구 등 지방의 청년학생들과 각 계층 군중 3만여명은 룡정에 모여 반일군중대회와 성세호대한 반일시위행진을 단행하였다. 일본 경찰, 특무와 주둔군부대는 시위에 참가한 군중들을 무력으로 탄압하여 40여명의 살상자를 냄으로써 큰 류혈사건을 빚어냈다. 그러나 세차게 타오르는 이 반일의 불길은 재빨리 전 연변에 퍼지여 선후로 10만여명의 군중들이 반일대시위행진에 참가하였다.4)

④ 이《개황》은 한국독립운동의 민족주의 계열의 투쟁에 대해 봉오동(鳳梧洞)전투와 청산리대첩(靑山里大捷)을 간단히 소개하고 있으나 그 독립투쟁(獨立鬪爭)의 지도자나 주체세력, 독립군의 존재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조선족백년사화》제1집이나 그밖의 자료에는 우리 지휘관의 설명을 들지 안았으나《조선족략사》에서는 "홍범도, 안무, 최명록"5) 등이 거느린 3개의 무장단체가 연합작전을 협의.달성했다고 쓰고 있다.

이《개황》은 1919년으로부터 1920년의 연변한민족(延邊韓民族)의 항일투쟁(抗日鬪爭)을 민족운동(民族運動)이나 독립투쟁(獨立鬪爭)으로 규정하지 않고 "반제반봉건투쟁(反帝反封建鬪爭)"인 동시에 "연변지구의 혁명을 구민주주의혁명으로부터 신민주주의혁명에로 전환시키는 전환점"6)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 시기의 역사적(歷史的) 성격(性格)에 대해 중국측(中國側)은 중공당(中共黨)의 이데올로기에 따라 5.4운동(運動)까지를 포함시켜 "신민주주의혁명(新民主主義革命)"으로 규정하고 있는데 이는 자본주의(資本主義)로부터 사회주의(社會主義)로의 과도기에 관한 레닌의 테제에 있어서 프로레타리아의 헤게모니 아래서의 브르죠아민주주의혁명(民主主義革命)의 중국형(中國型)에 해당하는 것이다.

1919년으로부터 1920년까지 진행된 연변인민들의 반일투쟁은 전국 각지의 반제반봉건투쟁과 마찬가지로 연변지구의 혁명을 구민주주의혁명으로부터 신민주주의혁명에로 전변시키는 전환점으로 되였다.7)

이와 반면에 우리나라에서는 3.1독립투쟁(獨立鬪爭)을 단순한 항일투쟁(抗日鬪爭)이 아니라 근대적(近代的) 민족국가(民族國家)의 건설을 표방한 시민혁명적(市民革命的)인 민족주의운동(民族主義運動)으로 규정하고 있으며 오히려 3.1운동이 중국의 5.4운동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이해한다.

《개황(槪況)》은 1920년초(年初)부터 연변(延邊)과 만주(滿洲)에 마르크스레닌주의(主義)가 전파되고 소련의 극동지역(極東地域) 또는 북경(北京).상해(上海)와 일본의 동경(東京), 한국의 서울 등지에서 전파되어 왔다고 본다. 특히 연변지역(延邊地域)에 마르크스주의사상이 전파된 시발점은 1922년으로 보고 있으며《개황》에 제시된 초기의 좌경적 도서자료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열거되어 있다. 즉(卽)《신청년》,《매주평론》, 1922년경의 신문으로는《신세계》,《로동세계》등 12종과 잡지로는《공산》,《광명》,《새벽종》,《선봉》등 6종이고 서적으로는《공산당선언》,《로동조합독본》등 수십종이었다는 것이다.8)

그리고 운동조직면에서는 1923년부터 용정(龍井)에 "사회과학연구회(社會科學硏究會)", "독서회(讀書會)" 등 마르크스레닌주의 연구조직과 "침목회" 등 군중조직이 생겼다고 쓰고 있다.

그러나 1927년에 와서 비로소 용정(龍井)과 두도구(頭道溝) 등의 대중과 학생들이 5월 1일에 메이데이 데모행진을 했다고 한 점에서 1927년을 기점(起點)으로 만주(滿洲)에도 중공당조직(中共黨組織)이 침투해 온 것을 알 수 있다. 1927년 10월 중국공산당(中國共産黨) 만주성(滿洲省)임시위원회가 성립되고 1928년 2월 성당위원회(省黨委員會)에서 연변(延邊)에 사람을 파견하여 용정(龍井)에《민생보(民生報)》를 거점으로 해서 당사업(黨事業)을 전개했다는 것이다. 1928년 10월에 중공동만구위원회(中共東滿區委員會)가 성립되고 1929년 7월에 동만구위원회(東滿區委員會)가 파괴되었다. 1929년 겨울에 성당위원회(省黨委員會)가 순찰원을 파견하여 중공동만지부(中共東滿支部)를 만들고 각지역에 농민협회(農民協會), 반제동맹(反帝同盟), 호제회(互濟會) 등 대중조직을 만들어 중공당조직(中共黨組織)의 형성초기(形成初期)의 곤난했던 초창기를 설명해 준다.

이립삼(李立三)노선에 의해 극좌과격주의(極左過激主義)의 과오를 저지른 것으로 평가(評價)되는 간도(間島) 5.30폭동(暴動)에 관해《개황》은 1930년 4월 만주성위원회(滿洲省委員會)가 "전만농민투쟁강령(全滿農民鬪爭綱領)"과 "좌만한인로농대중(左滿韓人勞農大衆)에 관한 결의(決議)"를 발표했는데 이 폭동에로 이끈 좌익적(左翼的) 운동(運動)에서 한인(韓人)이 주도적(主導的)이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그리고 동만특별지부(東滿特別支部)는 5.1투쟁행동위원회(鬪爭行動委員會)를 설립하고 "붉은 5월투쟁(5月鬪爭)"을 전개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5.30폭동(暴動)"에 대한《개황》의 서술은 다음과 같다.

《붉은 5월 투쟁》은 5월 1일에 벌어진 룡정의 로동자파업과 중소학교동맹휴학 및 각 현의 농민투쟁으로부터 시작되였는데 5월 30일의《5.30》폭동에 이르러 고조를 이루었다. 룡정, 연길, 두도구, 대립자, 개산툰, 하마탕 일대의 도시와 농촌의 로농대중들은 한사람같이 일떠나 당시의 일본침략자와 그 주구들의 사무실을 짓부시고 군벌정부와 지주의 주택을 습격하였으며 전화선을 끊어버리고 룡정발전소를 폭파하였으며 천도선의 철교를 파괴하였다.

그리고 일본경찰과 그 주구들을 처단하고 지주와 고리대금업자들의 계약문서들을 불살라버렸다. 어떤 지구의 농민들은 또 지주와 그 앞잡이들의 량식과 재산을 몰수하여 가난한 농민들에게 나누어주었다. 5월 27일, 화룡현 약수동 농민들은 친일주구를 처단하고 동북지구에서 제일 처음으로 쏘베트정권을 세웠으며 농민적위대를 조직하여 일본침략자와 군벌세력을 타격하였다. 그러나《붉은 5월 투쟁》가운데서 당의 조직이 폭로되고 많은 령도골간과 당원, 단원들이 체포되여 혁명력량이 큰 손실을 받았다.9)

이 "5.30간도폭동(間島暴動)"은 일본자료(日本資料)나 우리측 자료에서 제4차(第4次) 간도공산당사건(間島共産黨事件)이라고 하는데, 서울파(派)(한상륙(韓相陸))가 중심이 되고 콤민테른의 일국일당원칙(一國一黨原則)에 따라 한인(韓人)공산주의자들이 개인별로 중공당(中共黨)에 입당(入黨)하게 되고 입당(入黨)의 조건과 전투적 실적으로 요구되어 폭동(暴動)이 유발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10)

그리고 이 폭동은 살상자 합계 190명, 피검거인원 3,168명에 달하는 "자살적(自殺的) 폭동(暴動)"이었다는 일본측(日本側) 자료(資料)의 견해도 있는데 그것은 "민생단사건(民生團事件)"이 일어나 한인당원의 다수가 중공당(中共黨)에 의해 숙청(肅淸)되었기 때문이다.11) 흔히 모험적(冒險的) 맹동주의(盲動主義)로 알려진 이립삼(李立三)노선에 따라 5.30폭동(暴動)으로 이 운동은 정치적 손실이 많았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이 당시 이립삼(李立三)노선에 따라 행동면(行動面)에서는 한인공산주의자들의 극좌적(極左的) 맹동주의(盲動主義)가 저지른 과오에 대한 비판이 대두되어 모택동로선(毛澤東路線)이 갈아든 계기가 된 것이다.《개황》도 역시 이 5.30폭동(暴動)으로 당의 조직이 폭로되고 "혁명세력이 큰 손실을 입었다"라고 완곡하게 그 극좌적 과오를 시인하고 있다. 뒤이어 일어난 돈화(敦化)와 길동선(吉東線) 연변(沿邊)의 조선족 등이 중심이 된 "8.1길동폭동(吉東暴動)"에 대한 언급도 있다.

중공동만특별위원회(中共東滿特別委員會)가 1930년 9월에 성립된 이래 1936년 2월에 파괴될 때까지 4개의 현위(縣委)와 23구위(區委), 170지부(支部)를 가지고 2,000여명의 당원을 획득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시기의 한국민족운동(韓國民族運動)의 좌경적(左傾的) 노선으로 1926년 5월의 조선공산당만주총국(朝鮮共産黨滿洲總局)이나 1930년(年) 조선공산당재건만주부(朝鮮共産黨再建滿洲部)의 적군위원회(赤軍委員會) 등의 조직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만주에서의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의 존재(存在)가 사라지고 중공당(中共黨)산하의 운동이 된 것은 1928년 코민테른의 일국일당원칙(一國一黨原則)에 의해 만주의 한인공산주의자들이 개인별로 중공당(中共黨)에 입당(入黨)하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3

만주사변 즉 "9.18사변"으로 일제가 본격적인 만주침략을 시작하자 국민당정부(國民黨政府)는 무력하게 이 동북지방(東北地方)을 내주었으나 중공당중앙(中共黨中央)과 중공만주성위원회(中共滿洲省委員會)는 항일투쟁(抗日鬪爭)에 궐기할 것을 선언(宣言)했다.

그러나 처음 항일무장투쟁(抗日武裝鬪爭)을 전개한 것은 구동북군(舊東北軍)의 왕덕림(王德林)이 이끈 구국군(救國軍)이었다. 구국군(救國軍)은 길림륙군(吉林陸軍) 제(第)13혼성여단(混成旅團) 7제연대(第聯隊) 제3영(第3營)의 중국군(中國軍)이 궐기한 것이다.

《개황(槪況)》에서 서술된 바에 의하면, 중공당(中共黨)의 항일투쟁사관(抗日鬪爭史觀)에서 제시하는 게리라투쟁(鬪爭)의 선구(先驅)는 1930년의 5.30폭동(暴動)과 8.1폭동(暴動)이후 용정(龍井), 두도구(頭道溝), 돈화(敦化) 등지에서 무장대를 조직하고 이 무장대가 후에 노농유격대(勞農遊擊隊), 적위대(赤衛隊) 등으로 발전했다고 하는데 그 주력은 한인(韓人)들이었음에 틀림없다. 1931년(年) 12월(月)에 중공동만특별위(中共東滿特別委)가 10개의 유격대 또는 별동대(別動隊), 돌격대를 조직했다는 것이다. 이때에 일본군(日本軍)은 한국에 주둔하고 있던 병력(兵力)을 연변(延邊)에 투입하여 저 악명높은 "해란강대학살사건(海蘭江大虐殺事件)" 등을 저지른 것이다.

1932년에 가서 연길(延吉).화룡(和龍).왕청(汪淸).혼춘(琿春)의 4개 현(縣)에서 현(縣)유격대가 생기고 다음해 1933년초에 이 유격대들은 "중국로농홍군(中國勞農紅軍) 제(第)32군(軍) 동만(東滿)유격대"로 편성되었는데 그 대원은 600여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 유격대가 양정우(楊靖宇)(만인(滿人))와 이홍광(李紅光)(한인(韓人))이 조직한 유격대이다.《조선족략사》에 의하면

1932년 11월초에 양정우는 중공만주성위를 대표하여 남만 당조직과 유격대 사업을 순시하였으며 대오를 중국로농홍군 제32군 남만유격대로 재편성하고 그 산하에 3개 대대와 한개 교도대를 두었다. 리홍광이 교도대 정치위원으로 임명되고 박한종과 한호가 각각 1,2대대 대장으로 되였다. 유격대는 230여명으로 발전되였는데 그 중 조선족이 80여명이 있었다.12)

이 시기에 가서 항일투쟁(抗日鬪爭)은 각 유격대사이의 불화(不和)와 극좌적(極左的) 모험주의(冒險主義)로 인해 혼란에 빠진 것같다. 각 유격대 근거지의 소비에트정부(政府)수립도 문제가 되었고 이를 중공당중앙(中共黨中央)의 "1.26지시(指示)"에 따라 인민혁명정부(人民革命政府)로 개편하게 되고 다른 항일부대와의 관계도 개선해 나갔다. 이런 조치에 대해《개황》은 이 좌익유격대들이 "좌적오류"를 시정했다고 쓰고 있다.

1933년 6월부터 9월까지의 사이에 특위와 각 현위에서는 중앙의《1.26》지시정신을 관철하고《좌》적 오유를 시정하였으며 1932년말과 1933년초에 수립한 각 근거지의 구쏘베트정부를 인민혁명정부로 고치며 유력한 당원과 단원들을 적점령구에 파견하여 군중사업을 전개하는 한편 기타 항일부대와의 관계를 개선하고 강화하도록 할 것을 결정하였다.13)

1930년의 간도(間島) 5.30폭동(暴動)이나 그후의 좌경적 유격대의 극좌적 과격주의는 이립삼(李立三)노선의 영향으로 오히려 항일련합전록(抗日聯合戰綠)의 형성(形成)에 적지않은 지장을 주고 한.중양민족간의 갈등을 조장하고 민중속에 반공감정을 야기시킨 사태로 인해 중공당중앙(中共黨中央)의 "1.26지시(指示)"가 하달되었다고 보아진다. 항일(抗日)유격대에는 이 홍군(紅軍)유격대 이외에 더 많은 반일무력단체(反日武力團體)가 있었기 때문이다.

만주지역에서 중공당(中共黨)산하의 본격적(本格的)인 항일무력(抗日武力) 특히 콤민테른의 지시에 따른 만주특유의 항일무장력(抗日武裝力)은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과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이며 이 유격 군에서 중심적 역할은 한인공산주의자들이 한 것이고 콤민테른에서 파견된 인물도 한인 오성륜(吳成崙)이었다.

일본측(日本側) 기록(記錄)에서 만주의 항일세력(抗日勢力)을 모두 "비적(匪賊)"이라 칭하고 토비(土匪), 병비(兵匪), 사상비(思想匪), 종교비(宗敎匪), 정치비(政治匪)로 나누었는데, 토비중(土匪中)에서 한인(韓人)강도단은 선비(鮮匪)라 하고 구동북군(舊東北軍)의 반일군벌(反日軍閥) 즉(卽) 구국군(救國軍)은 병비(兵匪)라 했다. 그러나 사상비(思想匪)는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항일무력단체(抗日武力團體)로서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의 만주총국(滿洲總局)에 속한 적위대(赤衛隊), 돌격대(突擊隊), 유격대를 지칭했고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이나 항일연군(抗日聯軍)은 공비(共匪)라고도 했다. 이밖에도 우리 국민부(國民府)의 무력(武力)인 양세봉(梁世奉)장군의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이나 지청천(池靑天) 등의 북만(北滿)의 한국독립군(韓國獨立軍) 사상비(思想匪)에 포함시켰다.14)

기실 공산당적(共産黨的) 게리라투쟁(鬪爭)의 시작은 중공당(中共黨) 반석현위(盤石縣委)였고 거기에 군사부(軍事部)가 생겨 진옥진(陳玉震)을 대장으로 한인(韓人) 20여명으로 1932년에 발족된 것이다. 이것이 만주(滿洲)에서의 중공당계(中共黨系)의 최초의 유격대이다. 이 간도(間島)의 반석현당위(盤石縣黨委)는 한인공산주의자들이 중공당(中共黨)에 흡수되면서 조선공산당내의 ML파(派)가 대개 이 당위(黨委)에 가입하고, 그 합류(合流)를 조직촵지도한 것은 콤민테른과 중공당중앙(中共黨中央)에서 파견된 한인공산당원(韓人共産黨員) 오성륜(吳成崙)이었다. 따라서 반석현위(盤石縣委)의 주력(主力)은 한인(韓人)이었고 당간부(黨幹部)는 전광(全光)(오성륜(吳成崙)), 박봉(朴鳳)(박윤세(朴允世)), 한진(韓震)이었다. 세칭 "반석공산당(盤石共産黨)"이 만주항일(滿洲抗日)게리라의 기원이며 그 주동세력은 한인공산주의자(韓人共産主義者)들이었다.

1933년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 제1군(第1軍)은 한인중심으로 구성된 반석현당위(盤石縣黨委)와 이홍광(李紅光)(한인(韓人))이 조직한 것이고 그 군장(軍長)은 양정우(楊靖宇)(중국인(中國人))였으나 사장(師長) 이홍광(李紅光)이 16개 부대 730명과 그밖의 1,000여명의 항일단체와 연계하여 게리라투쟁을 전개한 것이다. 1934년 11월에는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 제(第)2독립사(獨立師) (사장(師長) 원덕승(袁德勝))이 창설되었다.

그런데《개황》에는 1934년 3월 동만특위(東滿特委)가 당성위(黨省委)의 지시에 근거해서 동만(東滿)유격대를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 제2군(第2軍) 독립사(獨立師)로 재편성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의 편제(編制)는 제1군(第1軍)밑에 제1사(第1師), 제2사(第2師)가 있고 그 사(師) 밑에 단(團)이 있으며 단(團)은 다시 연(連)으로 구성되었다. 군(軍)의 병력(兵力)은 수백에서 천여명이고 사(師)는 100명 내외의 규모였다. 이런 비정규적(非正規的)인 게리라군(軍) 편제인 군(軍), 사(師), 단(團). 연(連)의 병원(兵員)규모는 결코 정규군(正規軍) 같이 큰 것이 아니었다.

다시「개황」은 1934년 6월 이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의 제(第)3단(團)과 제(第)4단(團)의 주력은 주보중(周保中)과 시세영(柴世營)이 이끄는 수령반일동맹군(綏寧反日同盟軍)의 일부 부대와 협력하여 나자구(羅子溝)로 들어오는 일본군(日本軍) 300여명을 섬멸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그 제2군(第2軍)은 1935년에 일본군(日本軍), "만주국(滿洲國)"군(軍)과 도합 655회의 대소전투를 감행했다는 것이다.

이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의 시기에 "민생단사건(民生團事件)"이 일어나 무고한 한인열사(韓人烈士)들이 많이 희생되었다.《개황》은 그 존재조차 알 길이 없는 "민생단(民生團)"의 유령을 만들어 "반민생단투쟁(反民生團鬪爭)"의 숙청을 감행한 중공당(中共黨)의 과오로 인해 한인간부들이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또 왕명《좌》경로선의 영향을 받아 다년간 혁명대오 내부에서《반민생단투쟁》을 벌려 수많은 우수한 조선족 당, 정부, 군대 및 군중조직의 령도간부와 군중들을 잘못 죽였기 때문에 혁명력량이 막대한 손실을 받게 되였다.15)

이 민생단사건(民生團事件)은 왕명(王明)의 "좌(左)"경로선(傾路線)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중공당(中共黨)의 왕명(王明)코오스의 과오로 보고 있다. 만주(滿洲)의 한인공산주의자(韓人共産主義者)중 최고급의 지도자였던 오성륜(吳成崙)도 일본군(日本軍)에 체포되었다고 해서 아무 근거없이 변절로 단정하는 그의 변절설(變節說)에도 많은 의문이 남는다.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에서 탁월한 전술가(戰術家)요 지휘관이었던 한족출신(韓族出身) 이홍광(李紅光)은 이《개황》에는 언급이 없으나 다른 열사전(烈士傳)에서는 꼭 수록되는 대표적 열사(烈士)이다.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에 관해서는 중공당(中共黨)의 "8.1선언(宣言)"과 남호두회의(南湖頭會議)의 정신에 따라 안도현(安圖縣) 미혼진(迷魂陣)에서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 제2군(第2軍)을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으로 재편성하고 사충항(史忠恒)과 그밖의 반일부대를 받아들여 3개사(師)로 확대.개편하고 병력(兵力)은 2000여명이었다고 쓰고 있다.16)

여기서 "8.1선언(宣言)"이란 1935년 8월 1일 중공당(中共黨)이 연안(延安)으로 서천(西遷)하면서 중국국민(中國國民)에게 통일적(統一的) 국방정부(國防政府)와 항일연합군(抗日聯合軍)의 결성을 호소한 것인데 이 연합군(聯合軍)이란 한국독립군 등 국제적인 각국 연합의 뜻이 아니라 중국내 각 항일단체의 연합 또는 통일전선(統一戰線)의 뜻이다.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의 강령이나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의 조직조례(組織條例)에도 한국(韓國)의 독립(獨立)은 언급되어 있지 않고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의 조직조례에는 "제1조(第1條)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은 ,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 의용군(義勇軍), 자위대(自衛隊), 구국군(救國軍), 항일산림대(抗日山林隊) 등의 공동조직(共同組織)으로서 각군의 명칭을 취소하고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 제○군(第○軍) 제○사(第○師) 제○단(第○團)이라 한다. 제2조(第2條),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에 참가한 부대는 다음 3개조를 준수해야한다. (1) 항일반만(抗日反滿), 동북(東北)의 실지회수(失地回收), 중화조국(中華祖國)의 옹호, (2) 일적주구(日賊走狗)의 재산몰수, (3) 민중(民衆)과 연합하여 항일구중국(抗日救中國). 제3조(第3條),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은 동북항일구국인민혁명정부(東北抗日救國人民革命政府)(내용(內容)은 중앙당만주성위(中央黨滿洲省委))의 지도를 받고 혁명정부(革命政府)에 의해 항일연군위원(抗日聯軍委員), 총사령(總司令), 군장(軍長), 각군(各軍) 정치위원(政治委員)을 임명한다"17)라고 되어 있어, 한국의 독립도 한국의 실지회복(失地回復)도 이 조례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이 연군결성(聯軍結成)은 1935년(年) 11월(月)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콤민테른 제(第)7차(次) 대회(大會)에서 채택된 인민전선전략(人民戰線戰略)에 따라 중공당중앙(中共黨中央)이 발표한 "항일구국(抗日救國)을 위해 전국동포에 고(告)함"이란 선언으로 국민정부(國民政府)와의 제2차(第2次) 국공합작(國共合作)을 호소한 것이었다. 중공당만주성위(中共黨滿洲省委)는 기왕의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만으로는 역부족(力不足)을 자각하고 홍군(紅軍)도 국부군(國府軍)과 합작(合作)해서 연군(聯軍)에 가담해서 항일구국(抗日救國)에 합력(合力)한다는 것이었다.18)

그러나 1935년 2월 27일 흑룡강성(黑龍江省) 영안현(寧安縣)의 남호두(南湖頭)에서 열린 회의에서는 동북지방(東北地方)에서의 항일민족통일전선(抗日民族統一戰線)노선과 조선민족해방(朝鮮民族解放)의 과제에 대한 중요한 결정을 했기 때문에 이 회의의 정신을 감안한다면 항일연군(抗日聯軍)의 목적에 비로소 한국독립(韓國獨立)이 포함되고 한중연합군(韓中聯合軍)의 성격이 가미될 수 있었다. 19) 이 회의의 목적은 당시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과 견주어 오히려 강대한 양세봉(梁世奉)의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과의 연합(聯合)을 고려에 넣었으나 반공적(反共的) 성격(性格)을 가진 조혁군측(朝革軍側)은 그 연합(聯合)에 응하지 않았다.

《개황》에 의하면 왕덕태(王德泰)와 위증민(魏拯民)이 각기 군장(軍長)(제2군(第2軍))과 정치위원(政治委員)(후에 제1노군부사례(第路軍副司例)이 되고 항일연군(抗日聯軍)의 제2군(第2軍) 1사(師)와 3사(師)와 군부교도련대(軍部敎導連隊)는 위증민(魏拯民)과 왕덕태(王德泰)의 지도하에 남만(南滿)으로 진군하고 항일연군(抗日聯軍) 제1군(第1軍)과 합류했다는 것이다.

1940년에 소련영내(領內)에 도피했을 때 소련극동군(極東軍)의 국제홍색(國際紅色) 88여단(旅團)의 부대장이 된 주보중(周保中)은 당초에는 구국군(救國軍) 소속이었으나 거기서 떨어져나와 길림항일동맹군(吉林抗日同盟軍)을 건립하고 군사위주석(軍事委主席)이 되었다가20) 뒤에 항일연군(抗日聯軍) 제2노군(第路軍) 총사령(總司令)이 된것이다(최석천(崔石泉)=최용건(崔庸健)은 제2노군(第2路軍) 제7군(第7軍) 정치위원(政治委員)이었다). 이처럼 항일연군(抗日聯軍)은 항일구국(抗日救國)을 위한 각파연합(各派聯合)의 무력(武力)이었다.

1939년 6월 김천현(金川縣) 하리(河里)에서 남만(南滿)과 동만(東滿)의 당책임자(黨責任者)와 연군(聯軍)의 제1군(第1軍).제2군(第2軍)의 중요간부회의를 열어 남만성위(南滿省委)를 만들고 위증민(魏拯民)이 당서기(黨書記)가 되고 제1군(第1軍).제2군(第2軍)을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 제1노군(第1路軍)으로 편성하여 양정우(楊靖宇)가 총사령(總司令), 왕덕태(王德泰)가 부사령(副司令)이 되었다.21) 이때 제(第)1노군총사령(路軍總司令)의 비서장(秘書長)에는 한인(韓人) 오성륜(吳成崙)22)이 임명되었으나 "개황"이나 그밖의 항일열사전(抗日烈士傳)에도 오성륜(吳成崙)(일명(一名) 전광(全光))에 대한 언급이 없다. 또한《만주공산비의 연구(滿州共産匪の硏究)》와 같은 일본측(日本側) 자료(資料)도 항일연군(抗日聯軍)의 기간(基幹)을 이룬 간부(幹部)는 모두 한인(韓人)들이었고 다만 총사령(總司令), 부사령(副司令)은 중국인(中國人)이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제1군총사령(第1軍總司令) 양정우(楊靖宇)(만인(滿人))는 북경대학출신(北京大學出身). 재능(才能), 기량(器量)을 겸비(兼備)하고 실로 지도자다운 인물이라고 말해진다. 그는 인민혁명군(人民革命軍)의 성립 이래 제1군(第1軍)의 총사령(總司令)이었으나, 최초 부하의 실제 활동분자는 거의가 선인(鮮人)이 점하고 있었다. 당시 숫적으로는 <조선인(朝鮮人)은 대원(隊員)의 4분의 1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보여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지도적 세력은 조선인이었던 것은 만인(滿人)의 인재(人材)가 결핍(缺乏)되어 있었기 때문이다.23)

이처럼 항일연군(抗日聯軍)의 지도층간부는 대부분 한인(韓人)이었음을 말해준다. 일본측 자료에는 오성륜(吳成崙)(전광(全光), 안봉학(安鳳學), 최현(崔賢), 임수산(林水山), 남일(南一), 김명팔(金明八), 김성주(金聖柱)(일성(日成)), 최석천(崔石泉)(용건(庸健)), 김책(金策) 등24)이 나와 있으나 반드시 정확한 리스트는 아니다. 중국(中國)의 항일열사전(抗日烈士傳)을 통해 재정리하면 허형식(許亨植), 이홍광(李紅光) 등 중요 인물이 빠져 있음을 알 수 있다.

1937년 "7촵7사변(事變)" 즉 중일전쟁(中日戰爭)이 일어나자, 중공당중앙(中共黨中央)은 중국 전국에 항일선언(抗日宣言)을 발표하고 8월 20일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 제1노군(第1路軍)은 "길림인민(吉林人民)에게 고(告)하는 항일구국문(抗日救國文)"을 발표했다. 그때 항일연군(抗日聯軍) 제2군(第2軍)도 병력(兵力)이 5,500으로 증원되었다는 것이다.

이미 1938년부터는 일본관동군(日本關東軍)의 토벌이 심해지고 그해 일본관동군은 50만이었던 것이 1941년까지는 70만(萬) 대군(大軍)으로 증강되고 그중 10만이 동변도(東邊道)에 대한 "토벌"에 나서고 뒤이어 "3성연합대토벌(省聯合大討伐)"을 감행하게 되었다. 이상에 거론한 중국(中國)의 항일열사전(抗日烈士傳)의 인물들의 전사연대(戰死年代)가 대개 1937년∼1940년으로 연령은 거의 20대(代) 후반이다. "개황"은 이 시기가 항일연군(抗日聯軍)에게 가장 험난한 시기였음을 다음과 같이 시인하고 있다.

1938년부터 1939년까지 항일연군부대들은 극히 곤난한 시기에 있었다. 1938년 7월에 남만성위와 제1로군은 실력을 보존하고 몇십만 적들의 대규모적인《토벌》을 분쇄하기 위하여 제1로군을 3개 방면군과 1개 총부경위려로 정돈편성할 것을 결정하였다. 제2, 제3방면군은 1938년부터 1940년까지 주로 연변지구와 녕안일대에서 싸웠으며 돈화현 한총구, 연길현 천보산광산, 안도현 대사하, 화룡현 홍기하 등지에서 수십차의 전투를 하였다.25)

그러나 1940년을 전후해서 일본관동군(日本關東軍)의 대공세에 밀려 항일연군(抗日聯軍)은 더 이상 만주에 잔류할 수 없게 된다. 이때 소련극동군측(極東軍側)에서는 하바로우스크에 "국제홍색(國際紅色) 88특별여단(特別旅團)"을 만들어 패퇴해 오는 항일연군(抗日聯軍)의 중(中)촵한인간부(韓人幹部)들을 남북(南北) 두 야영(野營)에 수용하게 된다. 이 시기의 소련령(領) 도피경과에 대해서는《개황》은 다음과 같이 간략히 서술하고 1940년에서 5년간(年間)의 소련군하(軍下)의 교도여생활(敎導旅生活)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대오를 휴식정돈하여 새로운 전투를 맞이하기 위하여 1940년부터 제1로군은 흑룡강의 중하류의 중소변경에 이동하여 집중적으로 정돈, 훈련하였다.26)

이와 같은《개황》의 기술은 1940년부터 항일연군(抗日聯軍)이 붕괴되면서 "흑룡강 중하류의 중소변경에 이동하여 집중적으로 정돈촵훈련했다"고 쓰고 있으나, 사실은 패잔 도망은 개인별로 행해지고 장소는 중소변경이 아니라 소련영내(領內) 하바로우스크 근방의 비야츠크에 세워진 소련 극동군구사영부(極東軍區司令部) 정찰국(偵察局)(국장(局長) 조루낀 소장(小將)) 소속의 야영이었다.27)

이 야영은 만주지리에 밝은 한(韓)촵중인(中人)들을 소련극동군(極東軍)의 만주진주를 위한 정찰대로 이용하려는 목적으로 설립한 특별 여단이었고, 여기서는 주보중(周保中)을 단장(團長)으로 해서 "소련공산당사략정", 스탈린 "레닌주의의 제문제" 등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정치학습(政治學習)도 실시했다는 것이다. 임은(林隱)의 저작에 의하면 이 야영의 한인(韓人)중에는 소련군(軍) 대위(大尉)-김책(金策)촵안길(安吉)촵강건(姜健)촵최용건(崔庸健)촵김일성(金日成), 상위(上尉)-김일(金一)촵최현(崔賢)촵최용진(崔用珍)촵김광협(金光俠)촵이영호(李英鎬), 중위(中尉)-유경수(柳京守)촵서철(徐哲)촵박영순(朴英淳)촵최광(崔洸) 촵허봉학(許鳳學)촵김경석(金京錫)촵최충국(崔忠國) 등이 있었고28) 전체대원은 중국인(中國人)이 100명, 한인(韓人)이 60명이었는데 한인(韓人) 중에는 소련계(系)로서 이동화(李東華), 문일(文日)(문(文)에리), 유성석(兪成晳), 박길남(朴吉男), 김봉율(金鳳律), 김학준(金學俊), 이청송(李靑松), 김파(金波), 이종신(李宗信) 등 10여명도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이다.29)

이 소련극동군(極東軍)의 한(韓)촵중인(中人)의 야영에 대해서는 중국(中國)이나 북한에서 항일투쟁사(抗日鬪爭史)에서 명시(明示)하지 않으며 될수록 은폐하려고 한다. 그러나 중국(中國)의 자료 가운데는 1940년 후 항일연군(抗日聯軍) 붕괴후의 향방(向方)에 대해 간간히 그곳이 소련영(領)임을 시사하는 부분이 산견된다. 이 부분에 대한 입증자료(立證資料)는 88여단(旅團)의 단장이었던 주보중(周保中)의 전기촵일기 등이 공간(公刊)됨으로써 밝혀질 것이고 그밖의 항일연군(抗日聯軍)의 기록에서 실마리가 잡히고 있다.

4

현재 중국(中國)의 동북지방(東北地方)에서 공간(公刊)되는 항일운동관계(抗日運動關係)도서들은 어디까지나 중국(中國)의 입장(立場) 특히 중공당사(中共黨史)의 관점에서 중국(中國)의 소수민족(少數民族)의 구역자치(區域自治)의 정신에 따라 서술된 항일열사전(抗日烈士傳)들이고 그중의 "조선족(朝鮮族)"열사(烈士)도 중공당사내(中共黨史內)에서 다뤄진다. 그리고 그 대부분의 서적이 계몽적 독본의 형태를 띠고 있으며 한글로 쓰여져 있으나《장백의 투사들-연변항일항일렬사전-》제1∼3집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중국인 지도부 우위의 항일연군중심(抗日聯軍中心)으로 인물이 선택촵배열되어 있다.

즉 양임(楊林)(한인(韓人)), 위증민(魏拯民)(중국인(中國人)), 왕덕태(王德泰)(중국인(中國人)), 동장영(童長榮)(중국인(中國人)), 진한장(陳翰章)(중국인(中國人)), 김상화(金相和)(한인(韓人)), 김순희(한인), 구성태(具成泰)(한인(韓人)), 김순덕(金順德)(한인(韓人)), 차룡덕(車龍德)(한인(韓人)), 남창익(南昌益)(한인(韓人)), 양성룡(梁成龍)(한인(韓人)), 전기옥(全基玉)(한인(韓人)), 이학충(李學忠)(한인(韓人)), 이추악(李秋岳)(김금주(金錦珠), 장일지(張一志))촵사충항(史忠恒)(중국인(中國人)), 주수동(周樹東)(중국인(中國人)), 안순화(한인(韓人)), 정응수(鄭應洙)(한인(韓人)), 허성숙(許成淑)(한인(韓人)), 후국충(候國忠)(중국인(中國人)), 조병범(曹竝范)(조청산), 최희숙(崔姬淑)(한인(韓人)) 등이 그 제1집의 인물이다.30)

이런 서적도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의 환란 속에서는 간행될 수 없었고 한족중심주의(漢族中心主義)를 관철하려던 "4인무리"가 조선어교육의 금지 등 민족교육(民族敎育)을 부정하던 시기에는 간행될 수 없었다. 아직도 재중국조선족(在中國朝鮮族)에게 우리 민족사교육(民族史敎育)이나 한국주체(韓國主體)의 독립운동사교육(獨立運動史敎育)에는 많은 난관이 있을 것이다. 열사전(烈士傳) 등 조선족(朝鮮族)의 항일투쟁사(抗日鬪爭史)의 도서가 1980년 이후의 것들이라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조선족략사》《조선족간사(朝鮮族簡史)》만 하더라도 한(韓)촵중(中) 양국어본(兩國語本)이 1986년에 간행되었는데 이 초고는 이미 1959년말에 끝냈으나 1963년에 이《략사》를 편집한 민족연구소가 인쇄에 교부했으나 임표등 "4인(人)무리" 교란과 파괴로 이와같은 민족연구사업(民族硏究事業)이 10년간이나 정지당했다고 이 책의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31)

이런 중국(中國)의 도서 중에서 중공당사(中共黨史)와 무관계한 한국독립운동사(韓國獨立運動史)의 민족주의계열(民族主義系列)을 개관한 책이《조선족백년사화》(전3권) 중의 제1집이다.32) 이 제1집에는 "창강(滄江) 김택영(金澤榮)", "남사의 조선족시인 신정(申桎))", "걸출한 조선족 학자 신채호" 등 인물중심의 사화이면서도 "연변(延邊)의 3.1독립운동"인 "3.13봉기", "청산리대섬멸전"과 같은 대한민국(大韓民國)임시정부계의 독립투쟁도 들어있고 특히 "노의사(老義士) 강우규(姜宇奎)", "홍구공원의 폭탄소리" 즉(卽) 윤봉길의사(尹奉吉義士), "일본천황 히로히도를 저격" 즉 이봉창의사(李奉昌義士) 등의 의사들도 다루고 있다. 그리고 권말에 조선혁명군총사령(朝鮮革命軍總司令) 양세봉(梁世奉)장군의 항일투쟁을 그의 반공구국(反共救國)의 이념에도 불구하고 높이 평가하고 있다.

양세봉(梁世奉)의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에 대한 평가(評價)는 중국항일투쟁사(中國抗日鬪爭史)에서 상상한 것보다 높다. 1929년 조선혁명단(朝鮮革命黨)이 창당되고 이는 삼부통합(三府統合)의 산물인 국민부(國民府)가 이당치국(以黨治國)의 원칙으로 만든 좌우합작(左右合作)의 정당이었다. 이 국민부(國民府)의 독립군(獨立軍)이요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의 당군(黨軍)이 바로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이었다.《조선족백년사화》제1집의 "양세봉사령"은 조혁군(朝革軍)이 1940년까지 혁혁한 전과를 거두며 민족주의계(民族主義系)의 독립투 쟁을 전개한 역사를 양세봉(梁世奉)과 그 뒤를 이은 사령(司令) 고이허(高而虛), 한검추(韓劍秋), 김활석(金活石)으로 이어진 투쟁사로 엮고 있다.

1933년 양정우(楊靖宇)가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 제1군(第1軍)을 편성할 때 양세봉사령(梁世奉司令)에게 조혁군(朝革軍)과의 합작(合作)을 제의했으나 반공적(反共的)인 입장(立場)에서 이를 거절한 것이다. 양세봉사령(梁世奉司令)은 "공산주의(共産主義)와의 합작(合作)은 자기멸각(自己滅却)에 이른다"라고 해서 응하지 않았다는 설(說)33)이 있다. 이 문제에 대해《사화》제1집의 "양세봉"에서는 양사령(梁司令)은 연합하려는 의사가 있었으나 참모장 김활석(金活石)이 찬동하지 않아 실현되지 못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김창순(金昌順)의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과 양세봉(梁世奉)의 항일군투쟁(抗日軍鬪爭)>34)에서는 "양세봉장군(梁世奉將軍)의 항일무장투쟁(抗日武裝鬪爭)"의 반공적(反共的) 성격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개황》의 다음과 같은 서술은, 양세봉(梁世奉)장군이 1934년 전사하였고 1936년에야 항일연군(抗日聯軍)이 편성되기 시작했기 때문에, 의문점이 남는 부분이다.

이 소식을 들은 양세봉은 양정우장군이 거느리는 동북항일연군과 련합하여 반일무장투쟁을 계속 전개하려고 활동하였다. 그런데 조선혁명군 총참모장이였던 김활석이 찬동하지 않아 그의 의향은 실현되지 못하고 말았다.35)

여기서 합작을 제의한 것은 항일연군(抗日聯軍)이 아니라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 시기의 양정우였다고 보아진다.

또한《사화》제1집의 "양세봉사령"은 양세봉사령(梁世奉司令)의 최후에 대해 소상한 내용을 전해준다. 즉(卽) 1934년 8월 중순에 항일산림대(抗日山林隊)의 아동양(亞東洋)이라는 "부대요인"이 양사령(梁司令)을 찾아와 그를 안내하다가 산중에서 권총으로 저격했다는 것이다.36) 그후 조선군사령(朝鮮軍司令) 한검추(韓劍秋)는 1935년 9월 20일 왕봉각(王鳳閣)(요녕성(遼寧省) 자위군(自衛軍) 19노군사령(路軍司令))의 반만항일군(反滿抗日軍)과 연계하여 한(韓)촵중동맹군(中同盟軍)을 건립하고 집안현에서 무 장투쟁을 전개했다고 하여 한중항일동맹군(韓中抗日同盟軍)의 존재(存在)를 증거하고 있다.37)

《조선족략사》에서도 왕봉각(王鳳閣)이 군사위원장(軍事委員長)이고 조혁군사령(朝革軍司令) 한검추(韓劍秋)가 총사령(總司令)이 되어38) 투쟁한 항일동맹군(抗日同盟軍)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반일부대인 항일구세군 왕봉각부대의 1,000여명이 주동적으로 항일연군 제1로군과 통일전선을 결성함으로써 항일민족통일전선이 확대되었다.39)

위의 왕봉각부대에는 조혁군(朝革軍)이 가담하였고 다시 항일연군(抗日聯軍)과 통일전선(統一戰線)을 형성했을 가능성이 배제될 수 없다고 보아진다.

이 제1집 이외에도《조선족백년사화》제2집은 중공당(中共黨)의 제(第)1촵 제2차내전(第2次內戰)까지의 공산주의운동 속의 중요인물을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는데, 특히 한인(韓人)으로서는 "항일(抗日)의 명장(名將) 이홍광(李紅光)", "동북항일연군 제3로군 참모장 허형식(許亨植)"의 전기를 통해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에서의 한인들의 활약상을 엿볼수 있다. 이 "허형식"편은40) 항일연군내(抗日聯軍內)의 한인집단 특히 김책(金策)과의 관계가 나와있어 흥미롭다.

임은(林隱)에 의하면41) 항일연군(抗日聯軍) 제3군(第3軍)의 전신인 합동반일(合東反日)유격대는 이계동(李啓東)(일명(一名) 이기동(李起東)), 김책(金策)(일명(一名) 김재민(金在民)), 허형식(許亨植)(일명(一名) 이희산(李熙山)) 등에 의해 조직되고, 특히 허형식(許亨植)은 유명한 의병장(義兵將) 허왕산(許旺山)의 생질 (생(甥))로서 일찌기 만주에 망명한 가정에서 성장했다.

제1군(第1軍)에 양정우(楊靖宇), 제2군(第2軍) 위증민(魏拯民), 제3군(第3軍) 이조림(李兆林)(일명(一名) 장수전(張壽錢)), 풍중운(馮仲雲), 제4군(第4軍)에 이연록(李延綠), 제5군(第5軍) 주보중(周保中) 등‥‥‥이처럼 30년대(年代) 중기(中期)의 항일연군(抗日聯軍) 제3군(第3軍)은 이조림(李兆林) 군장(軍長), 풍중운(馮仲雲) 부군장(副軍長), 김책(金策) 정치위원(政治委員), 허형식삼모장(許亨植參謀長)으로 지도부를 구성했다. 그중에서 허형식(許亨植)은 1936년 1월 이화당(李華堂)(중국(中國))과 더불어 제9군(第9軍)에도 참가하게 되었다. 당시 군장급(軍長級)지휘관에는 조선인 중에서도 이학만(李學萬), 최용건(崔庸健), 허형식(許亨植) 3인(人)이 있을 뿐이었다.42)

또한 이 책에서는 1940년을 전후해서 동북항일(東北抗日)빨치산이 우세해진 적군(敵軍)의 강압하(强壓下)에 소련에 피신하지 않을 수 없었던 때에도 "그(허형식(許亨植))는 최후까지 자기의 전구(戰區)를 떠나지 않고 용감히 싸웠다"43)라고 쓰고 있다. 위의 "허형식(許亨植)" 전기들은 임은(林隱)의 서술과 일치(一致)한다.

소련극동군(極東軍)의 하바로우스크 국제홍색(國際紅色) 88여단(旅團)의 야영에서 주보중(周保中)(중국인(中國人), 항일연군(抗日聯軍) 제5군(第5軍) 군장(軍長))이 부대장이 되고, 최용건(崔庸健)(최석천(崔石泉), 항일연군(抗日聯軍) 제7군(第7軍) 군장(軍長))은 이 여단 정치부(政治部) 지도원으로 임명되고, 김성주(金聖柱)와 강신태(姜信泰)(강건(姜健))은 제1대대(第1大隊)촵 제4대대장(第4大隊長)으로 각각 임명되고, 김책(金策)은 제3대대(第3大隊) 정치부대대장(政治副大隊長)이 되고, 허형식(許亨植)(항일연군(抗日聯軍) 제9군(第9軍) 군장(軍長))은 제3대대장(第3大隊長)으로 임명되었으나 그가 만주에서 소련으로 도피하기 전에 전사했으므로 취임할 수 없었다는 것이 임은(林隱)의 저서의 서술이다.44) 이와 관련된 사항으로《조선족혁명열사전》제2집 "허형식"편에서는 이런 정황하에서 제3군부대의 대부분은 리조림(이조림(李兆林))촵풍중운동지의 지휘하에 소련경내에 들어가 야영훈련을 하며 새로운 승리를 위하여 준비하였다.45)

라는 편린이 있다. 여기서 이조림은 이조림(李兆林)=조상지(趙尙志)=장수전(張壽錢) 모두 동일한 인물로서 제(第)3노군부(路軍副) 사령(司令)이며 풍중운은 풍중운(馮仲雲)(부군장(副軍長))이다. 이들이 앞서 1938년에 소련의 야영으로 도피했으나 허형식(許亨植)만은 만주에 남아 있다가 1942년 8월 일군토벌대에 발각되어 전사했다는 것이다.

이 어러운 시기 허형식동지는 북만성위서기 최석천동지와 함께 계속 동북땅에 남아 항일연군 제9,12지대의 부분적 동지들을 지휘하여 항일투쟁을 견지하였다. 적들의 토벌을 피하기 위하여 부대는 여러개의 소분대로 나뉘여 각지에서 독립적으로 활동하였다.46)

여기서 "북만성위서기(北滿省委書記) 최석천(崔石泉)"은 뒤늦게 소련야영에 들어간 최용건(崔庸健)이다. 또한 이《조선족혁명렬사전》제2집의 "허형식"편에서 김책(金策)과의 관계에 대한 서술도 항일연군(抗日聯軍)의 소련망명사실(亡命事實)을 인정하고 있다.

이 때 제3군 부대는 군장 조상지동지가 1938년 1월 쏘련으로 간후 적들과 련속되는 전투에서 큰 손실을 입게 되였다. 그해 6월에 열린 북만성위회의에서는 김책 동지를 제3군 정치부주임으로 임명하고 부대를 다시 정돈한 후 분산하여 각기 포위를 돌파하고 철려, 해륜 일대로 원정하도록 결정하였다.47)

이 문장에서 제3군(第3軍)의 군장(軍長) 조상지는 역시 조상지(趙尙志)촵장수전(張壽錢) 그리고 일명(一名) 이조림(李兆林)이며 그는 이미 1938년에 소련의 88여단에 도피해 가서 정치부(政治部)지도원이 되어 있었다. 늦게 들어간 간부들이 주저한 이유는 소련도피로 인해 항일운동(抗日運動)의 주체성(主體性)이 상실되어 중공당주체(中共黨主體)가 상실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라 한다.

《조선족략사》도 역시 보다 명확하게 항일연군(抗日聯軍)의 패잔간부들이 소련으로 도피하여 소련극동군(極東軍)의 88여단(旅團)에 소속해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다.

1940년초와 1941년초에 하바로브스크에서 길동, 북만, 남만당과 각로군 대표회의를 두차례 소집하였다. 회의에서는 적이 강하고 우리가 약하여 력량상 차이가 현저하며 동북항일 유격전쟁이 잠시 엄중한 좌절을 당한 정황에 근거하여 혁명력량을 보존하고 항일투쟁을 견지하기 위하여 항일연군의 대부대의 활동을 중지하고 쏘련경내에 퇴각하여 정비하고 훈련을 진행하며 동시에 소부대를 동북에 파견하여 군중들과 밀접히 연계를 맺고 유격활동을 벌이기로 결정지었다.

1940년 겨울부터 시작하여 항일연군 제3로군의 일부 소부대가 혹눈평원에서 유격활동을 벌린 외 각로군의 소부대는 육속 쏘련경내에로 이동하였다. 1941년 1월에 동북항일연군은 소련에서 야영려(후에 교도려로 고치였다)를 내오고 그 산하에 4개 보병영, 3개 직속련(후에 돌격총영, 무선전영, 박격포영으로 확대편성되였다)을 두었다. 조선족전사들은 한 개 보병영에 집중되었으며 동시에 기타 각 영과각 련에 분산되었다.48)

이상의 서술로 보아 1940년에는 항일연군(抗日聯軍)이 괴멸되어 소련영내(領內)의 소련극동군(極東軍)소속의 88특별려단(特別旅團)의 남북(南北)두 야영에 머물었는데 이 중공측(中共側)의 기술에서는 "교도려(敎導旅)"라고 지칭하고 있다. 이 야영에 도피했던 항일연군(抗日聯軍)의 한인들은 "한개의 보병영(步兵營)에 집중"되었다고 표현하고 있다. 이 소련군(軍) 88여단(旅團)의 한인집단(韓人集團)이 해방후 소련 점령군과 같이 입국하여 북한정권(北韓政權)의 중심세력(中心勢力)이 된 것이다.

중국(中國)의 항일투쟁열사전(抗日鬪爭烈士傳)은 김산(金山에) 관해서도 몇가지 새로운 사실을 시사하고 있어 흥미롭다.

김산(金山)에 관해서는 님 웨일즈의《아리랑의 노래》(Song of Arirang-A Life Story of a Korean Rebel)49)로 우리에게 알려졌으나 1937년 웨일즈여사(女史)가 만난 후의 그의 행적이나 생사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었다. 웨일즈여사(女史)는 김산(金山)을 최후로 만난 것이 1937년 연안(延安)에서였고 일명(一名) 장명(張明)이라고 했고 연안(延安)에서 결핵으로 죽었다는 설이 있으나 생사를 모른다고 했다.50)

이로 미루어 김산(金山)은 장명(張明)촵장지락(張智樂)촵한산(寒山) 등 여러가지 이름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중국(中國)의 붉은 별》의 저자 에드가촵스노우 기자의 전부인(前婦人)인 웨일즈여사 역시 연안(延安)까지 수행했던 미국기자로서 김산(金山)과는 각별히 가까운 관계로 그의 일대기(一代記)를 정감어린 필치로 써서 남겼다.《조선족혁명렬사전》제1집의 "김산"편은 웨일즈여사도 알지 못해 궁금해 하던 1937년 이후의 그의 행적을 보완(補完)해 주고 있다.

김산(金山)은 젊은 시절 상해(上海)에서 안창호(安昌浩)를 만나 그를 존경한 민족주의자(民族主義者)였으나 점차 마르크스주의자로 기울어져서 중공당원(中共黨員)이 되고 북경시당(北京市黨)의 조직부장까지 역임한, 중공당(中共黨)의 고위층(高位層)에 오른 한인(韓人) 중의 한 사람이다. 따라서 김산(金山)은 다만《아리랑의 노래》로 유명해진 가상적 인물이 아니라 중공당(中共黨)의 고위층(高位層)에 속한 항일열사(抗日烈士)의 한 사람이며 중공당내(中共黨內)의 극좌적(極左的) 맹동주의(盲動主義)에 희생된 많은 한인(韓)人)중의 한 원혼이기도 하다.

김산(金山)은 중공당(中共黨)의 광주(廣州)봉기때의 지도자였고 해(海)촵 육풍(陸豊)소비에트 법정의 지도성원이었으며 1929년∼1930년간 중공당북경시당(中共黨北京市黨)의 조직부장, 1936년 이후에는 섬강령소비에트지구(地區)주재 조선혁명가 대표로 있으면서 연안군정대학(延安軍政大學)에서 교편을 잡았다.

1938년에는 갖가지 억울한 누명을 쓰고 문혁기(文革期)의 "4인무리"의 한 사람인 강생(康生)에 의해 처형당한 것이다.

1938년도에 섬강녕변구 보안처에서는 김산동지의 력사를 심사하였다.《반역자가 아닐가?》,《일본특무가 아닐가?》《뜨로쯔끼파가 아닐가?》,하는 많은 의문을 가지고 심사하였지만 결론을 내릴 근거가 없었다. 이에 강생은《비밀리에 처단》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김산동지는 억울한 죽음을 당하였다. 그때 그는 33세였다.51)

이와같은 억울한 죽음은 중공당사상(中共黨史上)에 적지 아니하며 특히 "민생단원(民生團員)"의 누명을 쓰고 희생된 한인공산주의자(韓人共産主義者)의 수는 더욱 많다. 지금까지 간행된 항일열사전(抗日烈士傳)속의 한인(韓人)들 중에는 "민생단(民生團)'의 유령으로 희생된 경우가 적지 않다.

《장백의 투사들》(연변항일렬사전)에 오른 "용장무쌍한 항일투사" 양성룡열사(梁成龍烈士)의 경우 1933년말 반민생단투쟁(反民生團鬪爭)에 억울하게 몰렸던 경과를 그려 읽는 이를 놀라게 해 준다.52) 이 양성룡열사편에서 반민생단투쟁(反民生團鬪爭)에 대해 당시의 동만특위(東滿特委)(왕명(王明)노선)의 좌경적(左傾的) 오류라고 호되게 비판하고 있다.

이《반민생단투쟁》가운데서 조선족의 수많은 우수한 당원, 간부와 견강한 혁명동지들이 억울한 루명을 쓰고 직무를 철소당하였고 혁명대오에서 쫓겨났으며 또한 감옥에 갇히고 지어 목숨까지 빼앗겼던 것이다.53)

중공당내에서 한인공산주의자들에게 감행한 "반민생단투쟁"의 인민재판식 처형이 얼마나 어리석고 비참한 만행이었는가를 양성룡(梁成龍)의 경우에 대한 묘사에서 여실히 엿볼수 있다. 1933년말 소왕청 항일유격근거지에서도 "반민생단투쟁"이 진행되고 날마다 검거되어 나오는 소위 "민생단혐의분자"로 감옥이 차고 넘치는 큰 소동을 일으켰다.

리수구 유격대 회의실에서는 군중대회가 한창이였다. 사회자는 복잡한《계급투쟁》의 형세를 한바탕 늘어놓은 후 사형선고를 내린《민생단분자》18명을 끌어내라고 명령하였다.

그런데 정작 앞에 끌려나온 사람들을 바라보자 군중들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부리부리한 두 눈에 웅장한 체구를 가진 량대장이 제일 앞에 서 있었기 때문이였다. 전투마다 앞장에 서 목숨을 내걸고 싸워온 우리의 량대장이 어찌《민생단》이란 말인가? 그래 량대장이 겁쟁이들을 엄하게 비평한것도《죄》란 말인가? 군중들은 수심과 의혹에 찬 눈길로 서로 쳐다볼 뿐 누구도 감히 입을 열지 못하였다.

말없이 전우들과 군중들을 바라보는 량성룡동지의 인자한 두눈은 류달리 빛났다.
한동안 장내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사회자는 군중들을 향하여 의견이 있으면 빨리 말하고 없으면 사형을 집행하겠다고 선포하였다.54)

항일(抗日)유격대의 투사 양성룡(梁成龍)은 이 어처구니없는 인민재판에서 어느 할머니의 항의로 겨우 목숨을 건졌으나 당의 모든 직무를 박탈당했다.

중국(中國)의 동북항일투쟁(東北抗日鬪爭)의 기록들은 이와같은 민족적 설움도 그리고 처절한 극좌적(極左的) 맹동주의(盲動主義) 노선이 저지른 이른바 "좌적과오(左的過誤)"가 얼마나 비인간적 폭거였던가를 말해준다. 이러한 자료만으로도 1980년 후 중국동삼성(中國東三省)의 조선족열사들의 투쟁기는 독립운동연구(獨立運動硏究)에 귀중한 도움이 되고 만주무장독립운동(滿洲武裝獨立運動)에서 공산주의운동(共産主義運動)의 성격과 실상을 파악하는데 여기 한국(韓國)에서는 접할 수 없는 실기적(實記的) 기록(記錄)을 읽을 수 있게 해준다.

결언(結言)

중국연변(中國延邊)의 조선족자치주(朝鮮族自治州)에 관한 논자(論者)의 관심은 그곳에서 주로 문혁기(文革期)가 끝난 1980년(年) 이후의 한인(韓人)들의 항일열사전(抗日烈士傳)과《조선족백년사화》(전3권),《조선족략사》등에 접하고, 일제하(日帝下) 만주무장독립운동(滿洲武裝獨立運動) 중에서도 공산주의운동(共産主義運動)에 대한 보다 생생한 묘사에 접하게 된 데서 비롯되었다.

이 도서들은 중공당(中共黨)의 당사(黨史)속에서 항일투쟁사관(抗日鬪爭史觀)이 규정되고 비록 조선족열사(朝鮮族烈士)의 투쟁기라 할지라도 중국(中國)의 반침략(反侵略)촵실지회복(失地回復)과 공산화(共産化)의 목표를 가진 항일투쟁(抗日鬪爭)의 범주에서 다루어진다. 그러나 중국동북(中國東北)에서의 항일투쟁(抗日鬪爭) 특히 항일(抗日)유격대,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 항일연군(抗日聯軍)에서 그토록 많은 한인(韓人)들이 지도적 역할을 감당했다는 사실에 접하고 놀라지 않을 수 없으며 우리 만주무장독립 운동사의 대대적 보완이 불가피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우선 본고(本稿)에서는《연변조선족자치주개황》에 들어있는 항일투쟁시기(抗日鬪爭時期)의 역사적(歷史的) 개황(槪況)을 검토하여 중국현대사(中國現代史)의 관점에서 14년간(年間) 즉 "9.81사변(事變)"에서 "7.7사변(事變)"을 거쳐 해방까지의 항일투쟁사(抗日鬪爭史)의 줄거리를 잡는데 관심을 두었고, 둘째로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의 성립(成立)과 1940년(年)의 붕괴, 그리고 소련영(領)의 국제홍색(國際紅色) 88여단(旅團)의 두 야영에 도피한 경과를 임은(林隱)의 북조선왕조성립비사(北朝鮮王朝成立秘史)》와 대조.검토함으로써 그 실태(實態)를 파악하는 데 역사적 흥미를 느낀 것이다. 연변(延邊) 등 동북(東北) 항일열사전(抗日烈士傅) 속에서 북한(北韓)의 김일성(金日成)(또는 김성주(金聖柱))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 것이 사실이다. 최석천(崔石泉)(최용건(崔庸健)), 김책(金策), 허형식(許亨植) 등의 사적에서 항일연군(抗日聯軍)의 한인집단(韓人集團)이 소련의 88여단(旅團)에 약 4년(年) 내지 5년간 특수정치교육을 받아 1945년(年) 9월(月) 북한(北韓)에 소련군(軍)과 더불어 입국(入國)한 것을 추정하는 데 충분한 방증을 얻은 것이다.

《아리랑의 노래》의 주인공 김산(金山)=장명(張明)의 억울한 누명을 쓴 최후(最後)와 민생단사건(民生團事件)으로 인민재판에 의해 희생된 많은 한인공산주의자(韓人共産主義者)들의 비운(悲運)의 죽음을 비감한 마음으로 읽으며 공산주의운동속의 처참한 비인간적(非人間的) 현실(現實)을 접하게 된다. 이 항일열사전(抗日烈士傳)이나 그밖의 도서 속에는 "좌적과오(左的過誤)"라는 평가(評價)가 수없이 되풀이 되는데, 중공당(中共黨)의 이립삼로선(李立三路線) 등에서 문혁기(文革期)까지 이른바 "극좌맹동주의적(極左盲動主義的) 과오(過誤)"가 되풀이된 역사(歷史)의 어두운 그늘도 이 항일열사전(抗日烈士傳)들 속에는 한많은 원혼을 달래주려는 듯 분노에 찬 필치로 서술되어 있다.

*주 석*
* 본연구소(本硏究所) 비상임연구위원(非常任硏究委員), 고려대학교(高麗大學校) 교수(敎授)

1) 상게(上揭),《개황(槪況)》p. 1.
2) 간도령유권논쟁(間島領有權論爭)에 대해서는 신일격(申一激),《연변조선족자치주(延邊朝鮮族自治州)의 성립(成立)》(아세아문제연구소간(亞細亞問題硏究所刊)) 참조(參照).
3) 《개황(槪況)》, p.54.
4) 《개황(槪況)》, p.60.
5) 《조선족략사), p.54.

6) 《개황》, p.61.
7) 《개황》, p.61.
8) 《개황》, p.64.
9) 《개황》, p.63∼64.
10) 좌좌목춘륭저(佐佐木春隆著),《한국독립운동의 연구(韓國獨立運動の硏究)》(국서간행회(國書刊行會)), 1985), p.664.

11) 좌좌목(佐佐木), 상게서(上揭書), p.646.
12) 《조선족략사》, p.152.
13) 《개황》,p.72.
14) 좌좌목춘륭저(佐佐木春隆著),《한국독립운동의 연구(韓國獨立運動の硏究)》,p.659.
15) 《개황(槪況)》, p.73.

16) 《개황(槪況)》, p.73.
17) 《만주공산비의 연구(滿洲共産匪の硏究)》, pp.434∼5.
18) 좌좌목(佐佐木), 상게서(上揭書), p.746.
19) 대촌익부역(大村益夫譯),《개황(槪況)》일역본(日譯本), p.228 역괘(譯 ) 4) 참조(參照).
20) 각보중(脚保中)에 관해서는 <나젊은 애국자 진한장>,《장백의 투사들-연변항일렬사전-》(연변인민출판사, 1982), p.110 참조.

21) 《개황》, p.75.
22) 좌좌목(佐佐木) , 상게서(上揭書), p.753.
23) 《만주공산비의 연구(滿洲共産匪の硏究)》, p.394.
24) 《현대사자료(現代史資料) 30(조선(朝鮮) 6)》; 좌좌목(佐佐木), 상게서(上揭書), p.753∼5.
25) 《개황》, p.75.

26) 《개황》, p.75.
27) 임은(林隱)《북조선왕조성립비사(北朝鮮王朝成立秘史)》(일역본(日譯本) 자유사(自由社), p.109.
28) 임은(林隱), 상게서(上揭書), p.111.
29) 임은(林隱), 상게서(上揭書), p.110.
30) 《장백의 투사들-연변항일렬사전-》(연변인민출판사, 1982).

31) 《조선족략사》(연변인민출판사, 1986),《중국소수민족략사총서》출판설명 p.1.
32) 현룡순(玄龍順), 이정문(李政文), 허요구(許謠九) 공편저(共編著),《조선족백년사화》 제1집(료녕민족출판사, 1985, 심양).
33) 이명영(李命英),《김일성정전(金日成正傳)》p.121.
34) 독립기념관, 제2회 독립운동사학술심포지움, 1988 발표 논문.
35) 《조선족백년사화》제1집, p.326.

36) 《조선족백년사화》제1집, p.327.
37) 상게서, p.332.
38) 상게서, p.332.
39) 《조선족략사》p.204.
40) 《조선족백년사화》제2집과 박창욱 주편《조선족혁명렬사전》제2집 (료녕민족출판사, 1986)의 <허형식>, pp.87∼104.

41) 임은(林隱), 상게서(上揭書), p.64.
42) 임은(林隱), 상게서(上揭書), p.64.
43) 임은(林隱), 상게서(上揭書), p.110.
44) 임은(林隱), 상게서(上揭書), p.110.
45) 《조선족혁명렬사전》제2집. p.103.

46) 임은(林隱), 상게서(上揭書), p.103.
47) 《조선족혁명렬사전》제2집, p.100.
48) 《조선족략사》, p.230.
49) Kim San and Nym Wales(The John Day Company, New York, 1941).
50) Song of Ariang, 일어역본(日語譯本)의 역자후기(譯者後記), p.282.

51) 《조선족혁명렬사전》제2집, p.66.
52) 《장백의 투사들》, p.201.
53) 《장백의 투사들》, p.201.
54) 《장백의 투사들》, pp 201∼2.

출처 : 살맛 나는 세상이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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