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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 화북지대(華北支隊)의 팔로군(八路軍)과의 연대투쟁(連帶鬪爭)

by 8866 2006. 5. 22.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 화북지대(華北支隊)의 팔로군(八路軍)과의 연대투쟁(連帶鬪爭)

염인호(廉仁鎬)*

1. 서론(緖論)

2.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 화북지대(華北支隊)의 결성과 그 활동방침(活動方針)
1)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의 팔로군(八路軍)지역 이동의 (原因)과 과정(過程)
2) 화북지대(華北支隊)의 결성(結成)과 팔로군(八路軍) 및 화북조선청년연합회(華北朝鮮靑年聯合會)와의 관계
3) 화북지대(華北支隊)의 활동 방침

3. 간부훈련반(幹部訓練班) 개설(開設)과 자체(自體) 교육(敎育)

4. 무장선전(武裝宣傳) 활동(活動)

1) 무장선전 활동(活動)의 전략적 목표와 부대(部隊) 편성
2) 중국인(中國人)을 향한 선전
3) 일본군(日本軍)을 향한 선전
4) 조선인(朝鮮人)을 향한 선전
5) 주요(主要) 전투(戰鬪)

5. 결어(結語)

1. 서 론 (緖論)

군대를 건립해서 일본군과의 무장투쟁을 전개하려는 중국(中國) 관내지방(關內地方) 조선인 좌파민족운동가들의 염원이 모아져 1938년 10월 10일 호북성(湖北城) 무한(武漢)에서 조선의용대(대장 金元鳳)가 건립되었다. 건립된 조선의용대는 중국군사위원회정치부 소속이었지만 관내 조선인 좌파 통일전선인 조선민족전선연맹의 행동대오이기도 하였다. 조선의용대의 주력은 1941년 여름 화북(華北)의 팔로군(八路軍) 근거지(根據地)로 이동하여 그곳에서 이미 항일운동을 전개하고 있던 청년들과 함께 1941년 7월 7일 조선의용대 화북지대(朝鮮義勇隊 華北支隊)를 건립하고 일제 패망때까지 화북 각지에서 항일전을 수행했다. 이사이 1942년 7월 조선의용대 화북지대(朝鮮義勇隊 華北支隊)는 조선의용군 화북지대(華北支隊)로 개편(改編)하였다.1)

조선의용대 화북지대(朝鮮義勇隊 華北支隊)(이하 화북지대(華北支隊))의 1년간(1941. 7∼1942.7)의 활동은 다음 세가지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첫째 이 기간 화북지대는 조선의용대·조선의용군(朝鮮義勇隊·朝鮮義勇軍) 7년의 항일역사 가운데 가장 처절하게 싸웠다는 점에서이다. 화북지대는 1941년 12월 12일의 호가장전투(胡家庄戰鬪)에서 4명, 1942년 5월의 반소탕전(反掃蕩戰)에서 3명의 전사자를 낸 데서 알 수 있듯이 매우 치열하게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중국국민당·공산당 양 지구에서는 호가장전투(胡家庄戰鬪) 전사자에 대한 추도식을 대대적으로 치렀고2) 팔로군 근거지에서 중공은 이 전투 전모를 소학교 교과서에 싣기까지 하였으며,3) 미주교포신문 『독립』에서조차 전투 상황을 상세하게 실었던 바,4) 호가장전투는 조선인의 대일항전의 의지를 해외 조선인과 중국민중에게 드높인 계기가 되었다. 윤봉길의 상해(上海) '홍구공원의거(虹口公園義擧)'가 김구·한국독립당(金九·韓國獨立黨)의 정치적 자산(政治的資産)이 되었듯이 호가장전투와 1942년 5월의 반소탕전은 이른바 연안계열이 조선 대중에게 내세울 수 있는 가장 의미있는 정치적 자산이 되었다.5)

둘째 화북지대 1년간의 활동은 국제적 의의가 매우 컸다는 점이다. 화북지대 활동기간인 1941년 6월 22일 독소전쟁이 개시되어 소련은 2차대전의 한 당사자가 되었고 일본군은 독일을 지원하기 위해 한달 뒤인 7월 하순 프랑스 식민지 월남의 남부지역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또 같은 해 12월 일본이 미국 영국에 대항하여 태평양전쟁(太平洋戰爭)을 야기(惹起)함으로써 동아시아 정세는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변화되었다. 이러한 국제변동속에서 각 조선인 민족운동 단체는 나름대로 대응했지만 그중에서도 화북지대는 가장 치열하게 대응하였는데 민족의 해방은 국제 열강의 지지위에서만 완전히 달성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화북지대의 활동은 국제적 측면에서도 매우 큰 의의를 지녔던 것이다.

세째 화북지대는 이 1년간의 활동을 경과하면서 중국국민당군 소속의 부대에서 중공 팔로군 소속 부대로 탈바꿈했다는 점이다. 중공의 지휘를 받게 된 후 부대는 성장을 거듭하다가 해방 후 만주에 들어가 국공내전에 참전하였을 뿐 아니라. 6·25전쟁 직전에 북한으로 이동하여 한국전쟁에 참전하였다. 따라서 중공에 의한 의용대의 장악은 우리 현대사에서 큰 사건일 수밖에 없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의의를 가진 화북지대 활동 전모를 밝히는데 일차적인 목표를 두고 최근에 입수된 『조선의용군 화북지대 총결(朝鮮義勇隊 華北支隊 總結)』(이하 『총결(總結)』을 기초로 하여 그 활동을 상세히 밝히고자 한다.6) 그 중에서도 특히 화북지대가 어떻게 중공과 관련을 맺게 되는가를 밝히는데 주력코자 한다. 이 문제를 해명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세가지 과제를 설정하였다.

첫째 황하 이남의 조선의용대 주력이 어떤 경로를 통해 팔로군 근거지로 이동하는가 하는 점이다. 그간의 많은 연구에서 이 문제에 대해 여러 가지 각도에서 해명을 시도해왔고 성과 또한 적지 않았다. 본고에서는 최근 입수한 조선청년전위동맹(朝鮮靑年前衛同盟)측의 내부 문건을 통해 그 실상을 보다 명확히 구명하고자 한다.

둘째 북상한 의용대원들이 화북지대를 결성했을 때 화북지대의 위치가 어떠했는가를 밝히고자 한다. 그간의 연구에서는 대체로 화북지대 결성 자체가 중공(中共) 혹은 그 대리 기관 화북조선청년연합회(華北朝鮮靑年聯合會)에 주도되었고, 화북지대(華北支隊)가 결성됨으로써 화북의 의용대원들과 중경 조선의용대 대본부(총대)(朝鮮義勇隊 大本部(總隊))와의 관계는 사실상 단절되었다고 보고 있으나, 여러 자료를 통해 볼 때 화북지대 결성 자체는 어디까지나 중경 대본부의 전략하에 이루어진 것이며 중경 대본부의 영향력은 여전히 관철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세째 화북지대가 중공 팔로군과 연대 항일투쟁을 전개했던 그 실상을 밝히고자 한다. 화북지대는 특히 무장선전활동을 주요 활동 방침으로 설정하고 1941년 9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이 활동을 전개하였는데 본고에서는 화북지대가 어떤 전략적 목표하에서 그같은 활동을 전개했으며 실제 활동은 어떠했는가를 밝히고자 한다. 아울러 이 과정 속에서 중공 팔로군의 역할이 어떠했으며 이 활동을 통해 팔로군과의 관계는 어떻게 변해 나갔는지 조명코자 하는 것이다.

2.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 화북지대(華北支隊)의 결성과 그 활동방침(活動方針)

1) 조선의용대(組鮮義勇隊)의 팔로군 지역 이동(八路軍 地域 移動)의 원인(原因)과 과정(過程)

무한(武漢)에서 건립된 조선의용대 주력이 어떤 이유로 그리고 어떤 경로를 통해 화북(華北)의 중공 팔로군(中共 八路軍)지역으로 이동했는지는 조선의용대·조선의용군 역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문제였다. 지금까지 연구에서도 그에 대한 해명이 시도되어 왔으나 그다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최근에 공개된 자료 『전위동맹 내부(前衛同盟 內部)의 분기(分岐)』(이하 『분기(分岐)』)에서는 그 상황이 비교적 명확히 밝혀져 있다. 『분기(分岐)』에 따르면 관내 좌파진영은 크게 전위동맹내 최창익(崔昌益)계열과 반최창익전맹계반(反崔昌益前盟)계 - 민혁당(民革黨)연합계열로 나뉘어져 있었으며 팔로군 지역으로의 이동은 이 양대 진영에 의해 두 가지 방향으로 진행된 것이다.

팔로군지역으로의 이동은 관내지방 조선인 좌파의 합의였던 동북노선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동북노선(東北路線)'은 조선군중이 없는 중국 관내지방(中國 關內地方) 민족운동의 고립상황을 탈피하기 위해서는 조선군중이 많은 중국 동북지방(東北地方)(만주(滿洲)) 으로 조직적으로 이동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그 핵심 내용은 조선민중에 의거해서 민족운동을 전개하자는데 있었다. 동북노선(東北路線)의 주창자는 1936년 경 중국으로 망명하여 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이하 민혁당)에 입당한 최창익(崔昌益)이었다. 최창익은 민혁당내에 건립된 비밀조직 조선청년전위동맹(朝鮮靑年前衛同盟) (이하 전맹(前盟))의 책임자였는데 그의 주장은 많은 지지를 받았다. 특히 중일전쟁 발발후 중국군관학교 성자분교(星子分校) 강릉분교(江陵分校) 조선인 학생들에게 큰 지지를 받았으며 이로 인해 이 학교 졸업식에 즈음하여 개최된 민혁당 제3차임시전당대표대회(1938,.5)에서는 동북노선이 당의 노선으로 확정되었다.7)

그러나 현실은 당론대로 전개되지 않았다. 민혁당 총서기 김원봉(金元鳳)이 이를 곧바로 실천하지 않자 이에 불만을 품은 당내 전맹(前盟)계 청년들은 한구(漢口)에서 민혁당을 탈당하고 조선청년전시복무단(朝鮮靑年戰時服務團)을 건립하여 중국의 항일전쟁 지원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동북진출을 독자적으로 모색하였다. 그러나 자금난 등 제반 사정의 미비로 성공하지 못하였으며 전맹내부에서도 동북노선에 회의를 품은 사람들이 반기를 들게 되었고 이들의 작용에 의해 전맹(前盟)측은 조선의용대 건립(1938. 10. 10)에 가담하여 그 제(第)2구대(區隊)가 되었다. 이에 앞장섰던 사람은 김학무였다. 이런 속에서 최창익은 전맹(前盟) 대표직에서 물러났던 것으로 보이며 전맹(前盟)을 대표하여 조선의용대 지도위원에 취임하였던 김학무가 지도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최창익은 "동북노선이 원칙상 정확하다. 그러나 혁명자는 어디까지든지 그 지대(地帶)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해야 한다"고 함으로써8) 한발 물러섰다.

그러나 1938년 10월 말 무한(武漢)이 함락되고 의용대 대본부는 광서성 계림(廣西省 桂林)으로, 제1구대(第1區隊)(민혁당계)는 호남성 9전구(戰區)로, 제(第)2구대(區隊)는 호북성(湖北省) 5전구(戰區)로 이동하게 되자 최창익은 다시 동북노선(東北路線)을 주창하였다. 그는 1938년 12월 "동북노선(東北路線)이 정확하다. 한구(漢口)에 있을 때 그곳을 떠나지 못한 것이 잘못이다. 지금 동북진출이 가능하다. 5전구(戰區) 동지들에게 이 준비를 위하여 경제를 절약하도록 했다."는 편지를 " 전맹(前盟) 중앙동지(中央同志)"(전맹(前盟) 중앙위원회(中央委員會) -필자)에게 보냈다.9) 김학무 등 전맹 중앙간부들이 의용대 대본부(義勇隊 隊本部)를 따라 계림(桂林)으로 이동한 반면 최창익은 2구대(구대장 이익성(李益星))과 동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최창익은 이때 " 우리가 당장 동북(東北)에 간다는 말이 아니다. 우선 서북(西北)에 집중(集中)하고 투쟁을 통하여 간다"고 주장하였다.10) 그는 서북행, 구체적으로 말하면 중공 연안행(中共 延安行)을 주장했으며 따라서 그는 중공 지역으로 부대를 일단 이동하고 중공의 항일 투쟁에 합세하여 동북으로 장차 진출하자는 주장을 폈던 것이다.

최창익의 편지를 접한 "계림 중앙위원회(桂林 中央委員會)"는 "동북구호(東北口號) 취소(取消)를 결의(決議)"했다.11) 그러나 2구대원들에 대한 최창익의 설득은 주효하여 그 결의는 실천되지 못하였다.12) 1939년 3월 제2구대 전위동맹원 대부분은 "서북(西北)"(이때는 서안(西安)-필자)로 이동하였는데 " 5.1전구(戰區)를 합하면 전후 30명 동지가 의용대공작을 방기"하였다고 한다.13) 서안(西安)에서 최창익은 중공 조선인 당원 무정(武亭)을 통해서 연안 입성을 도모하였다.14)

이와 병행하여 최창익 일파는 1939년 들어와, 중국 관내지방에서 일기 시작한 민족통일 전선운동에 대해서 반대하였다. 1939년 들어와 조선민족전선연맹(朝鮮民族前衛聯盟)으로 결집된 좌파 진영과 한국광복운동자연합회(韓國光復運動者聯合會)로 결집된 우파 진영간에 통일운동이 전개되었는데 그 결과 좌파의 대표격인 김원봉(金元鳳)과 우파의 대표격인 김구(金九) 양자는 1939년 5월에 발표한 "동지 동포 제군에게 보내는 공개통신"에서 민족 역량을 통일을 주장하고 개인본위의 통일당 건립을 함께 주장하였다.15)

이러한 개인 본위의 통일당 건립에 대해 계림(桂林)에 있던 전맹 중앙(前盟)(中央)도 찬동했다.16) 반면 최창익은 1939년 2월 무렵 전맹 중앙(前盟)(中央)(계림(桂林))에 보낸 편지에서 "지금 통일문제에 있어서는 연맹(聯盟)이 타당하다. 그러나 우리는 실제공작에 주중(注重(치중(置重)-인용자))해야 한다"고 하여17) 당 형태의 통일을 반대하였을 뿐 아니라 실제공작 주력을 주자함으로써 통일전선운동 자체에 회의를 표시하였다.18) 1939년 8월 기강(기江)에서 열린 7당통일회의에서 전맹은 연맹(단체 본위) 형식을 주장해 이탈하였는데 이는 최창익의 주장이 전맹 내부에서 관철되었음을 의미한다. 최창익파 의용대원의 서안으로의 집결과 통일운동에 대한 그의 부정적 주장은 기강회의 실패의 한 원인이 되었다.

최창익 일파·허정숙·노민·이상조·신한청 등 다수는 연안으로 들어가 항일군정대학(抗日軍政大學)(항대(抗大))에 입교하였다. 1938년 하반기에서 1939년 상반기 기간에 항대에 등교한 조선학생은 30여명에 달하였다.19) 1939년 7월 10일 항대는 전방(前方)으로 이전하게 되었고 당시 항대에 재학 중이던 조선학생 대부분은 항대(抗大) 총교(總校)를 따라 전방으로 가게 되었다. 1940년 초에 전방 진찰기군구(晉察冀軍區)에서 항대를 졸업한 조선학생들은 팔로군 진동남(晉東南(太行山)) 근거지에서 팔로군의 항일 활동에 참가하였다.20) 이 청년들을 중심으로 하여 1941년 1월 10일 태항산의 팔로군정치부(八路軍政治部) 소재지에서 화북조선청년연합회(이하 조청(朝靑))가 건립되었다.

이때 참가한 인원은 20명이었는데 21) 회장은 팔로군 포병학교 고장 무정(武亭)이 맡았지만 그 성원 대부분은 최창익계 전맹원들이었다.

조청(朝靑)은 일제타도, 화북거주 조선인 보호와 단결, 전 조선민족에 의한 항일통일전선 결정과 무장투쟁의 전개 등등을 그 목표로 내걸었다.22) 조청은 특히 조선의용대의 팔로군 지역으로의 이동을 추진하였다. 『조맹보고초안(朝盟報告草案)』에 따르면 조청은 회원 이극(李克)·노민(魯民)·왕극강(王克强) 3인을 국민당 지구인 낙양(洛陽)과 중경(重慶) 방면으로 파견하여 그곳 조선혁명단체와 연락을 취하고, 다른 한편 그곳 혁명분자들을 신사군·팔로군(新四軍·八路軍) 지역으로 집중하도록 공작했다고 한다.23) 또 조청 건립에 참여했던 노민의 회상에 따르면 자신은 조직의 지시에 따라 낙양으로 들어가 의용대원의 북상을 지도했다고 한다.24)

이상에서 보듯이 최창익 일파는 관내 지방 민족들이 처한 고립상황을 타파하기 위한 동북진출을 의용대의 중공지역 이동을 통해서 실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들은 국민당지구 활동이나, 중국국민당, 조선인 우파 단체 등에 대해서는 기대를 걸지 않았던 것이다. 의용대를 이탈해가면서 전개한 이들의 행동이 비록 의용대의 역량분산을 가져오기도 했으나 앞서 화북 팔로군 근거지에서 일정한 토대를 마련했던 점은 의용대 북상과 관련하여 의의가 있는 일이었다.

의용대 주력의 팔로군 근거지로의 이동은 김원봉(金原鳳)·김학무(金學武) 등 국민당지구 의용대 간부들에 의해 추진되었다. 준비없는 동북진출이나 서북행(西北行)(연안행((延安行))을 반대하고 그 대신 중국 국민당지구에서 착실한 활동을 통해 국민당 군(軍)·정(政)·당(黨) 인사들의 지지를 얻어 절차를 밟아 동북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그들의 주장은 의용대 기관지 『조선의용대통신』에서도 산견되고 있으나 한 전맹원이 작성한 『분기(分岐)』에서는 매우 상세하게 밝혀져 있다. 『분기(分岐)』의 필자는 김학무일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김학무는 비록 전위동맹 간부였지만 조선의용대 부지대장(朝鮮義勇隊副支隊長) , 정치조 조장(政治組組長)(정치지도원)등 고위직을 맡아 김원봉과 행동을 함께 해왔던 사람이었고25) 기관지 『조선의용대통신(朝鮮義勇隊通訊)』에서 의용대를 대표하여 여러 논설을 실었다.

『분기(分岐)』의 필자는 최창익의 행동과 주장을 강도높게 비판하였다. 그는 동북노선 제기 자체는 중국항전참가가 갖는 중요한 의의를 망각하였고 동북행의 실제 가능성과 동북행 방법에 대한 충분한 고려없이 제창된 것이라고 비판하였다.26) 그는 만주사변 발발이후 동북이 중요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중일전쟁 발발이후에는 "새로운 국면과 정세가 전개"되어 상황이 바뀌었다고 주장하였다. 일제의 침략루트를 따라 일제의 유도에 의해 조선 동포들이 " 북평((北平)·천진(天津)·상해(上海)·광주(廣州)등 도시는 물론 심지어 중국 오지(奧地)에까지 이래(移來)"하였으므로 "지금 중국의 해안 일대와 기타 철로 연선을 사실상 동북의 연장(延長)과 같은 곳"이라고 하였다.27) 그는 또 관내지방(關內地方)활동이 국제적 연대를 강화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아울러 일본군대를 향한 반전 선전활동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28) 그는 따라서 관내지방에서 우리 운동의 근거지와 연락거점을 건립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중국 항전 참가, 적군와해, 윤함구(淪陷區) 동포동원, 의용대의 무장화와 확대, 중국 및 기타 국제운동과의 연계" 이 모두가 절박하고 중요한 임무이며 공작이라고 주장하였다.29) 그는 특히 제2구대원의 이탈을 "분열적 행동" "우리의 진공 역을 삭약(削弱)한 분산적 행동", 한 걸음 더 나아가 "국제적 신의"와도 관련된 문제라고 지적하였다.30) 이런 주장은 반최창익 전맹원들의 주장일 뿐 아니라 같은 행동을 취하고 있던 민혁당측의 주장이기도 했을 것이다.

이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반최창익파의 주된 관심은 "어떻게 관내운동(關內運動)을 조선(朝鮮)과 동북운동(東北運動)에 결부(結付)시키며 운동을 고립상태에서 구해낼 것인가"에 있었다.31) 그들에게 있어서 중국 관내 지방에서의 활동은 동북(東北)과 조선진출(朝鮮進出)의 한 수단으로서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조선의용대 대가(隊歌)의 "양자(揚子)와 황하(黃河)를 뛰어 넘고 피묻은 만주벌 결전에 원쑤를 동해로 내어 몰자"라는 가사에서 32) 볼때 국민당지구 의용대의 동북 진출의 소망을 잘 읽을 수 있다. 여건이 주어지면 언제든지 북상할 수 있는 정신적 태세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민혁당이나 반최창익파 전맹은 최창익파와는 반대로 관내지방 민족통일전선운동에 매우 적극적이었다. 『분기(分岐)』의 필자는 군중이 없는 관내지방에서 역량을 통일 단결시키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한편 좌·우 각 당파는 하나의 정당으로 통일되어야 하며 33) 통일 신당내에서 광범한 민주주의가 보장되어야 한다고 피력하였는데 34) 이러한 주장은 민혁당의 그것과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기대했던 기강의 통일회의가 실패로 끝나자 의용대 대본부는 화북행을 결의하였다. 1939년 10월 의용대 창립 1주년 기념식에서 대장 김원봉(金原鳳)은 "조선동포에 대한 호소공작(呼訴工作)"을 전개해야한다고 역설하고 기관지 『조선의용대통신(朝鮮義勇隊通訊)』(1939.11.1)에서는 한인이 많은 화북으로의 북상을 주창하였다. 같은 무렵 부지대장(副支隊長) 겸 정치조장(政治組長) 김학무(金學武)는 적후방(敵後方)공작을 전개하여 거점을 마련해야만 관내 혁명의 고립에서 탈출하여 동북 및 조선운동과 연계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35) 민혁당계 지대장 전맹계 부지대장의 같은 주장으로 미루어 볼 때 화북진출은 국민당 지구 의용대원 전체의 의사가 집약된 것임이 분명하다.

이러한 주장들은 첫째 1938년 5월 결정된 동북진출의 실현을 확인하는 것이며 둘째 팔로군 지역으로 간 의용대원들과의 단결을 촉진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결의에 따라 이때부터 의용대 각 부대는 나뉘어 서서히 북상하였고 마침내 1941년 봄 황하를 건넜으며 그해 6월 팔로군 지역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조맹보고초안(朝盟報告草案)』에 따르면 이때 이동한 인원은 80여명이었다.36)

1938년 민혁당 전당대회에서 합의한 동북노선에 대해 최창익은 그후에도 줄곧 이 노선의 실현을 주창하였던 반면 비판자들은 그것의 적절치 못함을 지적하였다. 주장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최창익이 서북행을 통해 동북으로 진출하려 했던 점에서, 그리고 김학무(김원봉까지 포함) 등이 착실한 관내 운동을 통해 동북으로 장차 진출하려 했다는 점에서 양자는 그 방법론에서만 차이가 있었을 뿐 보다 큰 목적에서는 일치하였던 것이다. 목적이 같았던 양측은 서로 다른 경로를 거쳐 1941년 6월 화북 팔로군 태항산 근거지에서 재회하였던 것이다. 양 진영은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를 건립하고 공동투쟁을 전개하였는데 1942년 5월 그간의 활동 상황을 『총결(總結)』에서 정리했던 것이다. 이들은 『총결(總結)』에서 화북행의 원인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조선의용대 화북진출 문제는 제기된지 오래였다. 그 원인은 주로 (1) 조선의용대와 중국 국민당과의 관계는 정당한 정치적 혁명적 관계라기 보다 오히려 협애한 이용적 성질을 띄었고 사상적으로 삼민주의사상(三民主義思想)의 통일을 간접·직접으로 요구하였고 행동상으로 불소(不小)한 제재(制裁)가 있었다. 이것은 대오 자신 발전에 일종 저애(咀碍)였다. (2) 00 0000(판독불능-인용자) 화중(華中)·화북(華北) 일대는 적구 조선인 동포를 대상으로 혁명활동을 전개하는 데 불리하였다. 이것이 조선의용대 대부분 동지가 팔로군 항일(抗日) 근거지에 진출한 주요 원인이다. 더욱이 무림사변(茂林事變)후 중국 국내 형세의 변화는 그 실현을 촉성한 조건이었다.37)

요컨대 북상의 원인을 국민당과의 관계, 그리고 조선동포 문제 두 가지에서 찾았던 것이다. 의용대와 국민당과의 관계는 상호 "이용적"관계였음은 분명하다. 국민당지구에서 비젼을 발견하지 못하고 일찍이 연안행(延安行)을 결행했던 최창익파 = 조청계열은 물론이고 국민당과 관계가 비교적 원만하였던 민혁당계열 또한 마찬가지였다. 주지하듯이 민족혁명당은 의열단 등 5당이 통일되어 1935년 7월 남경에서 건립되었다. 그후 2년간의 활동 가운데서 구 한독당의 조소앙 등, 구 신한독당의 이청천 등, 구 조선혁명당의 김학규·최동오 등이 이탈함으로써 민혁당은 1937년 봄 이후에는 의열단계가 그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의열단은 만주사변 발발이후 중국국민당과 합작해 항일활동을 전개했으나, 최종 목적을 프로레타리아 혁명에 두었기 때문에 자주 국민당과 마찰을 빚었으며 민혁당 또한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나아가 조선의용대의 활동에서도 국민당측이 여러 제약을 가했다는 사실은 위 『총결(總結)』의 기록 외에서도 확인되고 있다.38) 1939년 10월의 북상 결의에 다라 북상이 순차적으로 이루어져 의용대가 낙양인근에 집결하고 있을 즈음에 발생한 환남사변(晥南事變-무림사변(茂林事變))은 북상을 촉진시켰던 것이다.39)

다음으로 조선군중을 찾아 나섰다는 점이다. 이점은 동북노선에 대한 앞의 논의에서 충분히 설명이 되었을 것이다. 1941년 9월 중경을 떠나 이듬해 4월 말 팔로군 태항산 근거지에 도착했던 민혁당 간부 김두봉은 도착 소감을 피력하는 가운데 "그곳에 조선인이 있으면 우리는 그곳으로 간다. 그곳에 공작이 진행되면 우리들은 그 작전에 협조하기를 원한다"고 하였다.40) 조선인을 찾아 나선다는 점은 앞서 본 최창익파나 민혁당 - 반최창익 전맹파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이었다.

이상에서 의용대의 팔로군 지역 진출 과정을 두 그룹으로 나누어 보았거니와 이동의 원인을 다시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그것은 첫째 민족운동을 조선군중 가운데서 전개해야 한다는 관내 좌파 운동가들의 공동 염원에 따른 것이었다. 단지 한쪽에서는 국민당 지구에서 활동하여 국민당측의 인정을 받은 위에 순서를 밟아 북상하였으며 다른 한쪽에서는 일찍부터 중공과 결합하여 진행하였던 것이다. 둘째 국민당과의 갈등 관계 때문이었다. 특히 1939년 들어와 국민당이 반공 입장으로 돌아섰고 환남사변까지 일으키자 진보적 청년들로 구성된 국민당 지구 의용대원들은 서둘러 팔로군 지역으로 이동했던 것이다. 세째 역량의 통일 단결을 위해서였다. 민혁당 - 반최창익파 전맹원들은 관내 지방 통일운동에 매진했으나 실패하자 흩어진 의용대원들간의 단결을 촉진시키고 대본부의 통제력 강화를 위해 의용대원의 한곳 집결의 필요성을 느꼈고 따라서 팔로군 지역으로의 이동을 단행했던 것이다.

2) 화북지대(華北支隊)의 결성(結成)과 팔로군(八路軍) 및 화북조선청년연합회(華北朝鮮靑年聯合會)와의 관계

북상한 의용대원들은 팔로군 지역 조청(朝靑) 성원들과 함께 곧 공동의 조직 건립에 나섰다. 양측의 간부들은 무정 같은 극소수를 제외하면 대부분 무한분열(武漢分裂)(1938.6)이전 민혁당에서 함께 활동했던 사람들인 까닭에 양측의 제휴는 크게 보면 재통합의 성격을 지녔다. 이하에서는 양측이 통합하여 건립된 조선의용대 화북지대와 팔로군 그리고 조청과의 관계를 살피기로 한다.

연구자에 따라서는 의용대 주력이 팔로군 근거지로 이동하게 됨에 따라 중국국민당과 김원봉(金元鳳)은 더 이상 운동의 주도권을 행사할 수 없게 되었으며 이로써 중국공산주의자와 무정(武亭)이 승리했다고평가하고 있다.41) 나중의 결과는 그렇게 되었지만 이동 자체가 그러한 결과를 초래한 것은 아니었다. 또 화북지대가 무정의 주도하에 조직된 것으로 이해하는 경우도 있다.42) 김원봉과 무정에 대한 이러한 평가는 해방직후 '무정(武亭) 높이기'의도가 분명히 들어 있는 『신천지』 독립동맹 특집호(1946년 3월호), 그리고 잘못된 일제 첩보 자료에43) 의존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의용대 북상 직후 양측의 동향에 대해 『총결(總結)』은 아래처럼 서술하고 있다.

1941년 7월 7일 조선의용대 제1·2·3지대 다수 동지들과 이미 근거지에서 공작하던 동지들로서 통일적으로 화북지대를 성립하고 형식상 중경 대본부(重慶 隊本部)와 조직체계를 유지하였으나 실제상으로 중공 팔로군 지도와 원조 밑에 중국 항전의 최일선에서 공작을 진행하게 되었다.

조선청년연합회(朝鮮靑年聯合會)와의 관계에 있어서 화북지대 대다수 동지가 조청(朝靑) 조직원인 점과 전 지대(全支隊)가 조청(朝靑)의 영도를 원하는 점에서 화북지대는 조청(朝靑)의 행동대로 규정하고 일절 사업상 화북지대(華北支隊)는 조청의 영도를 확보하기로(따르기로-인용자) 결의하였다. 결과 과거 조직상 행동상 분립 현상을 일소하고 통일을 완성하였으며 이것이 전체 동지의 단결에 양호한 정신적 영향을 주었으며 통일의지를 생산시킨 물질적 기초이었다. 이 전변(轉變)은 우리 내부의 혁명이었으며 금후 사업승리를 보장하는 기본적 인소(因素)의 하나였다.44)

이 기록에서는 첫째 화북지대의 건립 날자를 7월 7일이라고 정확히 밝히고 있다. 중일전쟁 발발 4주년 기념일날 이 같은 조직을 결성했다는 점은 중국의 항일전쟁을 지원하는 "의용(義勇)"대(隊)의 위상에 걸맞는 행위일 것이다. 팔로군 근거지로의 이동이 6월이었다는 점에서 우선 아주 빠른 시기안에 양측이 통합하여 화북지대를 건립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과거 동지의 재통합 과정이었던 까닭에 신속하게 진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화북지대의 지대장은 박효삼(朴孝三), 부지대장은 이익성(李益星), 정치지도원은 김학무(金學武)가 각각 맡았다.45) 지대장을 무정(武亭)이 맡지 않고 박효삼이 맡은 것은 중공이 산하에 "더 많은 한인을 붙잡고 싶어" "민족진영을 이탈하여 연안쪽으로 찾아드는 한인들에 대해 각별히 중후한 정치적 대우"를 하느라고 그랬을 것으로 파악하는 견해도 있다.46)

그러나 이 개편은 북상직후 곧바로 이뤄졌다는 점이 시사하듯이 중공이나 중공당원 무정(武亭)의 주도하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중공지역에 와서 크게 개편했다가 보다는 구 조선의용대 체제를 그대로 따랐던 것이었다. 조선의용대 1,3혼성 지대자으로서 북상을 이끌었던 박효삼(朴孝三)이 최고 간부가 되었고, 제2구대장(第2區隊長)이었던 이익성(李益星)이 부지대장을, 그리고 조선의용대 부지대장 겸 정치조장이었던 김학무(金學武)가 그대로 정치 지도원이 되었던 것이다. 이들로써 이때 화북지대의 지대부(사령부)가 건립된 것으로 판단된다.

둘째 이 기록에서는 화북지대는 형식상 중경 대본부 체계하에 놓여 있었지만 실제상으로는 팔로군의 원조와 지도하에 놓이게 되었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그런데 이때 "중공 팔로군(中共 八路軍)"과 대칭되는 존재는 의용대(義勇隊) "대본부(隊本部(총대(總隊))"이기 보다는 국민당군(國民黨軍)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의용대는 국민당 지구에서는 역시 "실제상으로" 국민당군대의 "지도와 원조"밑에 놓여 있었다. 팔로군 지역이었던만큼 150명 미만인 미소(微小)한 인원의 의용대가 전적으로 팔로군의 지도와 원조를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그것은 김원봉(金元鳳)과 중공 주은래(中共 周恩來)가 의용대 북상을 합의했을 때47) 이미 예상될 수 있는 일이기도 하였다.

물론 중경 대본부의 지도력이 직접 미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중경 의용대 대본부(重慶 義勇隊 隊本部)의 지도를 대신하여 담당했던 것은 새로이 건립된 화북지대 지대부였을 것이다. 1939년 말 의용대는 구대(區隊)를 지대(支隊)로, 대본부(隊本部)를 총대(總隊)로 바꾸기로 중국군사위원회측과 합의하면서 이미 유격전 단행을 예비하였던 것이다.48) 적후방 유격전에서는 작전, 보급, 신입대원 모집과 교육 등 제반 활동은 현재 부대 지휘부(화북지대 지대부(華北支隊 支隊部))에서 결정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대본부 체계하에 남았던 것은 향후 국민당 지역에 남은 잔류 의용대원과의 공동 행동을 예상한 의도적인 조처이기49) 이전에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었다.

세째 『총결(總結)』에서는 화북지대가 조청(朝靑)의 행동부대 위상을 지녔음을 밝히고 있다. 화북지대와 조청(朝靑)의 관계가 매우 긴밀했을 것이라는 주장은 이미 있어 왔으나50) 여기서는 그 상하 관계를 분명히 하고 있을 뿐 아니라 화북지대원 대다수가 조청(朝靑) 성원이라는 점을 밝히고 있다. 민혁당 화북특파원 윤세주가 조청(朝靑) 진기예변구(晉冀豫邊區-화북지대(華北支隊)) 지부(支部)의 부회장을 맡았고,51) 민혁당 화북지부 간부였던 양민산(楊民山)이 조청(朝靑) 지부 간사(幹事)였다는 점에서52) 전위동맹 계열을 물론이고 민혁당계열 대부분도 가맹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화북지대가 조청의 행동부대로 '공식적'으로 규정된 시기는 화북지대 건립 당시가 아니라 1942년 7월 독립동맹 건립 때였다. 1943년 12월에 작성된 문서에 따르면 건립 당시 화북지대는 "중경에 있는 조선의용대 본부의 지도하에 있는 것을 선포"53)하였는데 1942년 7월 독립동맹을 결성하면서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는 명칭을 조선의용군 화북지대로 바꾸었고 아울러 "화북조선독립동맹의 행동 대오로 규정"하였다. 행동대오로 규정한 이유는 (1)화북지대 대원 전부가 독립동맹 맹원이고 (2)실제 공작에 있어서 화북지대는 독립동맹과 불가분리적(不可分離的) 관계였으며 (3)중국 내정상(內情上)관계로 대본부와 연락을 취할 수 없는 점에서라 하였다.54)

화북지대원들이 조청에 가담하는 과정은 위 『총결(總結)』과 다른 문서에서 확인되고 있다. 『총결(總結)』에 따르면 화북지대 중견 대원 40여명은 화북지대 건립 당일인 7월 7일부터 8월 15일까지 약 40일동안 화북지역 활동 준비의 일환으로 대토론을 전개했는데 그 중의 하나가 화북지대원들의 조청(朝靑) 조직에 대한 인식을 노이기 위한 토론회였다. 이때 화북지대 대원들은 진광화(陳光華) 노민(魯民)으로부터 조청(朝靑) 의 정치주장(政治主張), 강령(綱領), 조직원칙(組織原則) 등에 대해 3차례의 보고를 듣고 이에 근거하여 토론을 전개하였다 이 토론의 결과 대원들은 조청의 정치 주장이야말로 통일의 기초임을 인식하게 되었다고 한다.55) 이러한 토론을 거쳐 조청에 가담한 것이 분명하다. 그점은 화북지대원의 한사람이었던 김학철(洪性杰)의 조청 가담 싯점이 1941년 7월 하순이라는 "홍성걸판결문(洪性杰判決文)"에서 확인된다.56)

북상한 대원들이 조청에 가담하게 된 동기는 아래에서 짐작된다. "홍성걸판결문(洪性杰判決文)"에 따르면 북상한 의용대원들은 "네18집단군(팔로군-인용자) 정치부의 영도 밑에 공동으로 그 목적달성에 매진하려는 의논이 일치하여져서 의용대는 연합회에 가입하고 역시 의용대에 참가하여 이를 강화하고 그 공통목적 수행의 실행기관으로 할 것을 결정"했다고 한다.57) 또 국민당 지구에서 작성된 문서에 따르면 민혁당원들은 "화북에 원래부터 있던 조선 혁명단체와 일치 협동하여 공작하기 위해" 또는 "공작의 편리를 위해" 조청(朝靑)에 가담했다고 한다.58) 사상적인 동기 보다는 팔로군 지역 활동이라는 지역적 특성, 그리고 조선인 역량의 통일단결이라는 공작상의 동기 때문에 가담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대거 가맹으로 조청 조직을 대대적으로 정비해야 할 필요성은 당연히 대두되었을 것이다. 『조맹보고초안(朝盟報告草案)』(1943,12)에 따르면 "1941년 말에 와서 조청 간부회의는 1942년 3월 1일에 조청 제2차 대표대회를 소집할 것을 결의하고 대회주비공작(大會籌備工作)을 진행"하였다.59) 그러나 1942년 2월 일본군의 대대적인 '소탕전' 발동으로 조청 간부회의에서는 5월 1일로 연기했다가 역시 일본군의 5월 소탕전 때문에 재차 연기되어 7월 10일에야 개최되었던 것이다.60) 이렇게 볼 때 『총결(總結)』의 탈고 싯점인 1942년 5월경에는 화북지대를 조청의 행동부대로 규정짓는다는 점이 화북지대내에서 이미 합의되었던 것이고 그 점이 『총결(總結)』에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요컨대 화북지대는 건립 당시에는 조청의 행동대오로 규정된 바 없었고 조청에 대한 토론이 진행되는 속에서 그러한 행동대오로 규정할 것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졌고 그것이 '공식적'으로 1942년 7월에 가서야 확정되었던 것이다.

이 조청은 통일전선 조직이었다. 1941년 6월 현재 팔로군 근거지에 집결한 인원은 147명이었는데 당파별로 보면 전맹원(前盟員)이 56명, 민혁당원(民革黨員)이 27명, 민혁당 탈당파(한빈(韓斌)파-필자)가 13명, 조선해방동맹원이 6명, 한국국민당원(韓國國民黨員)이 1명, 당파에 속하지 않는 신래자(新來者)가 44명이었다.61) 이때 통일의 형식은 각 당파 존재를 인정한 단체 본위가 아니라 개인본위 가맹 형식을 택했던 것이다.

이 통일전선 조직과 중경 민혁당 중앙과의 관련은 어떠했는가. 민혁당원의 조청 가맹은 현지 당원의 독자적 판단에 따른 것인가? 결론은 그렇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점은 조청에 가맹하여 간부를 맡았던 윤세주의 존재에서 먼저 확인된다. 윤세주는 김원봉과 함께 1919년 의열단을 건립한 이래 그와 행동을 같이해 온 김원봉의 분신격의 인물이었다. 그가 팔로군 지역으로 들어올 때 그는 민혁당 화북특파원(民革黨 華北特派員)을 겸하고 있었다.62) 당의 특파원은 대개 당 지부가 없는 지역에서 당세 확장과 당지부 조직 건립에 있어 전권을 가진 사람이었다.63) 따라서 그는 민혁당 중앙의 지시하에 화북에서 민혁당 확대를 의도했으며 그의 조청가맹도 그 일환이었을 것이다. 1941년 9월 중경을 출발하여 화북지대 주둔지로 오게 되는 김두봉 역시 화북지대내의 민혁당 당세 강화 임무를 부여받았음이 분명하다.64)

실제 조청 건립후에도 화북지대내 민혁당원들은 당지부 건립에 노력했던 것으로 보인다. 중경(重慶)에서 이후 작성된 "조선민족혁명당중요간부간명이력표(朝鮮民族革命黨重要幹部簡明履歷表)"에 따르면 화북에는 민혁당 화북특별지부(華北特別支部)가 있었고 그 주요 간부로 박효삼(朴孝三)·김백연(김두봉)(金白淵(金枓奉))·김세광(金世光)·양민산(楊民山) 등이 있었다.65)

국공관계가 점차 악화되면서 민혁당 화북지부가 드러내놓고 활동했을 가능성은 적다. 윤세주가 1942년 5월 전사하고, 화북 조선인 대오내 반국민당 정서가 높아지면서 민혁당 화북지부는 뚜렷한 활동없이 소멸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943년 12월 당시에도 "아직도 조맹(朝盟)(화북조선독립동맹(華北朝鮮獨立同盟)-인용자) 맹원 각자 또는 특히 노동지(老同志) 들 간에 있어서 종래의 소종파적 의식 잔여(小宗派的 意識 殘餘)를 완전히 양기(揚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고 지적되고 있는 점으로 보아66) 민혁당 출신들은 오랫동안 동류의식, 특히 중경 민혁당 중앙에 대한 연대 의식을 가졌을 것으로 보인다.

요컨대 북상 의용대원내 민혁당원들도 대부분 조청에 가맹하였지만 그러한 가맹은 중경 민혁당 중앙과의 연계하에서 혹은 그 지시하에 이루어졌던 것이며 가맹후에도 민혁당 화북특파원 혹은 민혁당 화북지부를 중심으로 하여 영향력 확대를 꾀했음이 분명하다. 또 화북지대가 조청의 하위 행동부대로 점차 규정되어 갔지만 중경의 의용대 본부 혹은 민혁당 중앙의 화북지대에 대한 통제력은 화북지대내 민혁당 세력을 통해 일정부분 관철되었음이 분명하다. 나아가 독립동맹 건립 당시에도 미약하나마 그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첫째 독립동맹 중앙집행위원 김두봉, 박효삼, 이춘암 등등은 여전히 민혁당 당원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며 둘째 조선의용군 화북지대가 비록 독립동맹 행동부대로 규정되었다고는 하나 이 부대가 "중경에 있는 조의군(朝義軍)(조선의용군-인용자) 대본부와 관계를 탈리(脫離)한다는 의미는 아니다"라는 1943년 12월 기록에서 볼때67) 그러하다.

3) 화북지대(華北支隊)의 활동 방침(活動 方針)

이미 언급한대로 화북지대(華北支隊) 중견대원 40여명은 화북지대 건립 당일인 1941년 7월 7일부터 8월 15일까지 약 40일 동안 화북지역 활동 준비의 일환으로 대토론을 전개했다 그 하나는 위에서 본대로 조청에 대한 인식을 높이는 토론이었다. 그 밖의 토론에 대해 그 주요 내용과 결과를 열거하면 아래와 같다.

첫째 지대원들은 내부 단결 강화를 위한 토론을 전개하였다. 토론은 분열되었던 지난날의 현상에 대한 자기비판으로부터 개시되었다. 토론은 조를 나누어 2차례 진행되었다. 토론의 방식은 "과격(過激)을 반대하고 온화(溫和)한 것을 채취(採取)하였고 급진(急進)을 반대하고 점진(漸進)을 채취(採取)하였다"고 한다.68) 서로 다른 환경에서, 서로 다른 당파에 소속하여 지내왔던 까닭에 서로의 근본을 부정하는 방식의 토론은 조청·화북지대로 통합된 대오의 분해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에 이처럼 온건과 점진의 방법을 택했을 것이다. 이러한 방식은 1943년 초부터 의용군내에서 강력하게 전개되었던 정풍운동(整風運動)과 대비된다. 토론의 결과 각 대원들은 "동지에 대한 보수적(保守的 ) 태도를 폐기하고 성견(成見)(기존 견해((旣存見解)-인용자)의 중압으로부터 해방되어 강한 정치적 단결을 보장하는 성의와 노력이 주요한 경향"으로 자리잡았다고 한다.69)

둘째 대원들은 향후 무슨 공작을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3차례 토론하고 향후 활동 방침을 결정했는데 이점은 뒤에서 다시 자세히 논하기로 한다.

세째 대원들은 화북지역 활동전개에 반드시 알아야 할 팔로군 근거지 제 정황에 대한 토론을 전개하였다. 대원들은 중공측 활동가들의 보고를 청취하는 한편 팔로군 지역 활동 경험이 있던 최창익(崔昌益)의 보고를 듣고 그 보고에 근거하여 2차례 토론회를 가졌다. 이때 주로 정권문제(政權問題)와 중공 변구정부의 경제정책 등을 다루었다. 아울러 대원들은 팔로군의 혁명운동의 경험과 작풍을 학습하기 위해 팔로군(八路軍) 야전정치부(野戰政治部) 주임(主任 )나서경(羅瑞卿)으로부터 보고를 청취하였다. 대원들은 이 토론회를 거쳐 "중공 팔로군에 대한 맹목적 동경"에서 벗어나 팔로군 근거지의 구체적 상황에 대해 초보적인 지식을 갖게 되었으며 중공 팔로군에 대한 믿음을 가졌고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는 팔로군의 정신을 배우게 되었다고 한다.70)

이 40일간의 토론에서 조청·화북 지대(朝靑·華北支隊)는 향후 활동방침을 결정지었다. 조청(朝靑)은 향후 활동의 총 방향을 (1)무장선전 활동(武裝宣傳 活動) (2)간부 양성(幹部 養成) (3)적구(敵區)와 동북(東北) 조선(朝鮮)내 조직 활동으로 정하였다. 이렇게 결정한대는 아래와 같은 객관적 정세와 주관적 역량에 대한 타산이 밑에 깔려 있었다.

화북지대원들은 객관적 정세는 매우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총결(總結)』에 따르면 독일의 소련 침략을 계기로 평화와 자유를 애호하는 일절 국가가 소련을 중심으로 반파시스트 통일전선을 결성하여 파시스트 최후 소멸을 위해 투쟁하고 있으며 일절 약소 민족이 자기 민족해방투쟁을 견결히 진행함으로써 일치하여 소련 항전을 적극 원조하고 있다고 하였다.71) 이와 아울러 일본은 북진(北進)(소련침략-필자)할 것이냐 남진(南進) (영 미 관할의 태평양 방면 침략 -필자)할 것이냐 혹은 서진(西進) (중경(重慶)으로 진공-필자)할 것이냐를 결정하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이러한 국면은 확실히 조선민족 전도의 광명(光明 )에 극(極)히 유리(有利)"하다고 평가하였다.72)

문제는 주체 역량이었다. 『총결(總結)』에서는 "주관적 준비와 역량의 발전은 객관 형세의 발전에 비하면 망진막급(望塵莫及)" 즉 먼지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고 평하였다. 이러한 객관 형세의 유리함과 주관적 역량의 부족함은 "우리 공작의 가강(加强)과 발전(發展)을 급속히 요구"하고 있다고 보았다.73) 그러한 형세하에서 무장선전활동(武裝宣傳活動), 간부양성(幹部養成), 적구조직활동(敵區組織活動)등 3가지로 공작 총방향이 결정되었던 것이다.

이 세가지는 모두 준비공작으로서의 의미를 지녔다. 그점은 "무장선전공작은 명백의 무장투쟁을 위하여 반드시 진행할 공작이며, 간부 배양은 장래 혁명형세를 영접할 준비이며, 적구(敵區) 동북(東北)조선(朝鮮)내 조직공작(組織工作)의 건립은 조직 자신의 군중적 발전을 위하는 것이다"고 규정한 데서 알 수 있다.74) 이 3대 방침은 사실 그 이후 일본이 패망할 때까지 변함없이 실천되었던 방침이기도 하다.

이러한 결정이 있기까지는 적지 않은 진통이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총결(總結)』에서는 토론가운데서 "간단(簡單 )한 유투쟁주의(唯鬪爭主義) 대하여 타격을 가하는 토론"이 있었다고 밝히고 있다.75) 유투쟁주의(唯鬪爭主義)의 실체가 무엇인지는 확실히는 알 수 없으나 아마도 선전활동같은 준비공작에 시간을 보내기보다는 일본군과 직접 맞부딪쳐 싸우자는 주장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총결(總結)』에서는 대토론에서 "공작이 선전적 범위를 벗어나지 못한데 대한 조급성과 소극성을 극복하고 금후 무장선전의 필요와 의의를 강조한 것"을 토론의 성과를 꼽고 있다. 이 귀절에서는 두 가지를 알 수 있는데 그 하나는 대원들 사이에 "선전적 범위를 벗어나지 못한데 대한 조급성"이 있었다는 점이다.

이점은 의용대원들이 국민당 지구를 벗어났던 이유의 하나가 선전적 범위를 벗어나지 못한데 따른 불만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팔로군 지역에 와서는 선전을 뛰어 넘는 활동을 원했음을 알 수 있다.

두번째로 "무장선전의 의의를 강조한 것"을 "토론의 성과"로 꼽았다는 점에서 볼 때 대원들이 무장선전에 모두 동의하지 않았음을 역으로 짐작할 수 있다. 실제 이후 전개된 제2차 무장선전활동에서 대원들 사이에는 "적과 부딛쳐 보려하는 모험적 심리가 존재"하였고 "선전(宣傳)에 대한 중요성을 홀시(忽視)하는 현상(現狀)"이 있었다.76)

마지막으로, 『총결(總結)』에서는 뚜렷이 나와 있지 않지만 공작의 범위를 태항산 근거지만이 아니라 전 화북의 팔로군 근거지로 확대한다는 결의가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점은 실제 "9월에 주(朱)(주혁(朱革)-인용자)와 노(魯)(노민(魯民)-인용자) 양 동지는 산동(山東)에, 10월에 임(林)(임평(林平)-인용자)·채(蔡)(채국번(蔡國藩)-인용자)·고(高)(고생호(高生鎬)-인용자)·김(金)(김무(金武)-인용자) 등 4동지를 기찰진(冀察晉)에 파(派)하여 산동에 화북지대 제1대(第1隊), 기찰진(冀察晉)에 제2대(第2隊)를 조직함으로써 조선의용대 조직 확장의 초보 공작을 개시하였다"는 기록에서 알 수 있다.77) 진찰기군구(晉察冀軍區)로 들어간 임평 채국번 등은 1941년 12월 10일 조청 진찰기분회와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 제2대(第2隊)를 창립하였다.78)

이상 40일간의 대토론에서 대원들은 상당 수준의 공동 인식에 도달하였던 것만은 분명하나 그런속에서도 국민당지구에서 올라온 대원과 기존 조청원간의 노선 대립이 있었으며 중공의 후광을 업은 후자의 노선이 관철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3. 간부훈련반 개설(幹部訓練班 開說)과 자체 교육(自體 敎育)

화북지대(華北支隊)는 대토론 결의에 의거하여 1941년 8월 16일부터 간부훈련반을 개설하여 자체 교육을 실시하였다. 이 간부훈련반에 대한 그간의 견해에도 착오가 있었다. 한 연구에 따르면 1941년 8월 조선의용대원에게 공산주의적인 정치훈련을 실시하기 위해 무정을 교장으로 하여 화북조선혁명청년학교가 개설되었다고 한다.79) 이를 인정한다면 무정은 초기부터 북상한 대원들을 재교육시킬 수단을 마련했다는 것이며 그만큼 화북지대에 대한 영향력이 강화되었고 이는 역으로 중공의 화북지대에 대한 지배력이 그만큼 일찍부터 강했다는 얘기가 된다. 그러나 그 근거를 삼고 있는 첩보자료가 잘못된 것이었다.80)

실제 간부훈련반은 전체 북상대원 재교육을 위해서가 아니라 의용대내 신입대원 30여명을 대상으로 실시되었으며 그 기본 목적은 그들을 하급간부로 양성하는데 있었다.81) 훈련기간은 8월 16일부터 10월 18일까지 2개월이었으며 간부훈련반 교장은 박효삼이었다.82) 훈련 내용은 정치(政治)와 군사(軍事), 그리고 과외교육(課外敎育),구락부 활동(俱樂部 活動 )이었다.

정치학습의 목적은 충실한 민족해방 투사가 될 수 있도록 민족 각오를 높이며, 계급투쟁과 민족투쟁을 이해할 수 있는 초보적 사회과학을 습득케하고 시사분석과 조직의 강령·정책·결정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사상의식을 높이며 조직성을 강화하는데 있었다.83) 과목은 조선문제(朝鮮問題), 정치상식(政治常食), 시사문제(時事問題)였다. 조선문제(朝鮮問題)(교원 윤세주(尹世胄))에서는 조선의 사회경제 분석에서 시작하여 혁명동력, 혁명전도문제(革命前途問題)까지 다루도록 하였다. 정치상식(교원 최창익(崔昌益))에서는 중공 항일군정대학(抗大) 정치상식(政治常識) 교재에 근거하여 사회발전사(社會發展史), 국제문제(國際問題), 정당문제(政黨問題) 등을 다루기로 하였다. 시사문제(교원 김학무(金學武))에서는 매주 시사를 분석하고 연구키로 하였다. 정치과목의 각 학과 수업 시간은 10시간 이었고 수업은 교원이 먼저 인쇄된 강의 요지(제강(提綱))를 배포하여 강의하고 이 요지와 강의에 근거하여 학생들이 토론하는 방식을 채택하였다.84)

조선문제(朝鮮問題)는 예정된 진도를 끝냈으나 정치상식(政治常食)은 겨우 사회발전사만 끝냇고 국제문제나 정당문제는 들어가지조차 못하였다. 그 이유를 『총결(總結)』에서는 너무 상세하게 강의 되었기 때문이라고 했으나85) 인류의 역사를 계급투쟁 시각으로 정리한 사회발전사를 그것이 생소했던 대원들이 이해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으로 보인다. 시사문제(時事問題) 수업에서는 『신화일보(新華日報』·조선신문(朝鮮新聞)·중문잡지(中文雜誌)를 교재로 택하였는데 교원은 매일 시사를 말로 강의(담보(談報))하고 매주 시사요지(時事要旨)(제강(提綱))를 작성하여 분석해줌으로써 시사문제에 대한 대원들의 흥미 고취에 힘썼다.86)

군사과목(軍事科目)의 목표는 대원들로 하여금 전선활동(戰線活動)에 적응할 수 있는 초보적 군사지식을 습득케하고 나아가 그들이 분대를 지휘할 수 있는 하급간부가 되게 하는데 있었다. 교육 방침으로 (1) 일절 구령과 명령어는 완전히 우리말로 하도록 하고 (2) 형식에 치중하기 보다는 내용 파악에 치중하며 (3) 간단한 동작에서 복잡한 동작으로 심입(深入)하도록 하였다. 또 (4) 훈련실시는 소강다작(小講多作)을 위주로 하고 동작은 분대장을 따라 하도록 했으며 (5) 야외교련(野外敎鍊)을 많이 실시하되 정황(情況)에 따라 진행하도록 하였다.87)

실제 과정을 보면 첫째 제식훈련은 38시간 실시하였는데 비록 대원들이 정확하게 일치된 동작을 보여주지는 못했지만 일반적 요령은 다 이해하였고 각 대원들은 분대교련까지 할 능력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둘째 분대 단위 전투, 주군(駐軍) 행군(行軍)간의 경계(警戒), 공격(攻擊) 과 방어(防禦) 등 10여 과목은 30시간에 걸쳐 교수되었는데 진도가 빨랐다고 한다. 세째 사격 교육의 경우, 비록 실탄사격은 못했으나 대원들은 이에 대한 원리를 일반적으로 이해하였다고 한다.88)

과외교육의 목표는 정치·군사 학습을 보조하며, 간부와 대원, 대원 상호간의 단결을 강화하고, 사작(寫作) 발표능력 등 일반 문화 수준을 높이며 불량 경향을 제거하는데 있었다.89) 과외교육은 화북지대(華北支隊) 정치지도원(政治指導員)이 구락부(俱樂部)를 통해 주로 진행하였다.90)

이상의 간부훈련반 활동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 중일전쟁 발발후 중국 관내지방(關內地方)에서 최초로 조선인 자신들에 의한 군사정치 교육기관이 운영되었다는 점이다. 조선 의용대 간부들을 다수 배출한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中國中央陸軍軍官學校) 성자(星子)·강릉분교(江陵分校)는 중국인들을 대상으로한 군관학교였다. 조선의용대 건립 이후 다수의 대원들은 서남유격간부훈련학교(西南遊擊幹部訓練學校)에 입교하여 학습하였으나 이 역시 중국인들을 대상으로 한 학교였다. 간부훈련반은 조선인을 대상으로 조선인 자신이 운영한만큼 군사 용어를 조선어로 고쳐 사용할 수 있었다. 조선의용군으로 개명된 이후에도 화북조선청년혁명학교(태행산(太行山))·조선혁명군정학교(연안(延安))·조선혁명군정학교산동분교(산동)·항일군정대학 화중분교 조선인반(화중(華中)) 등 각지에서 교육기관이 개설되었고 해방후 중국 동북지방(만주)로 진출해서도 조선의용군은 연길(延吉)·화전(華甸) 등지에서 군정학교를 설치하여 교육하였는데 이 간부훈련반은 그 전신의 의미를 지닌다 하겠다.

둘째 훈련반 활동은 그간 화북지대 간부성원들의 경험을 총화하여 신입대원에게 전수했다는데 큰 의의가 있다. 교원들은 군대 경력이 풍부한 사람(박효삼 등), 국민당지구에서 정치선전에 주력해온 사람(윤세주 김학무 등) 그리고 중공지역에서 경험을 쌓은 사람(최창익 등) 등이었던 까닭에 그들의 풍부한 경험이 이 교육을 통해 전달되었을 것이다.

세째 훈련반 학습을 통해 중공 항일군정대학(抗日軍政大學)의 교수 방법이 전수되었다는 점이다. 그점은 교육과목이 항대(抗大)와 같이 정치(政治)·군사(軍事)·문화(文化)=과외활동(課外活動)으로 설정되었고91) 최창익이 항대 교재를 참고했다는 점에서 확인된다. 항대일(抗大)의 설치 목적은 군사·정치·문화·경제 등 각 방면의 간부 인재를 양성하고 당군(黨軍)의 충실을 도모하는데 있었으며 학생들은 대체로 6개월간 교육훈련을 받고 졸업하여 중공의 각급 군정기관(軍政機關) 및 기타 단체에 배치되었다.92) 이처럼 항대(抗大)식 교육이 쉽게 접목될 수 있었던 것은 최창익 등 다수의 조선인들이 항대에 참여한 경험을 지녔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항대식 학습을 통해 중공 팔로군의 정세인식, 작풍 등등이 화북지대와 접목되었음은 물론이다.

4. 무장선전활동(武裝宣傳活動)

1) 무장선전활동(武裝宣傳活動)의 전략적(戰略的) 목표(目標) 와 부대편성(部隊編成)

화북지대는 40일간의 토론에서 무장선전활동 전개를 당면 과제의 하나로 설정하였다. 무장선전활동이란 무장한 상태에서 근거지(根據地)와 유격구(遊擊區) 그리고 적구(敵區)를 넘나들면서 선전하는 활동이었다.93) 중일전쟁이 무한함락을 계기로 속전속결전에서 지구전으로 전이(轉移) 하자 선전전(宣傳戰)의 비중은 대단히 높았다. 지구전으로 돌입한 후 중공 팔로군은 일본군과의 정면충돌은 피하고 적 후방지역 중국인에 대한 장악력을 증대시키고 일본군 와해에 힘을 쏟았는데94) 그 기초적 활동이 무장선전활동이었다.

화북지대의 무장선전활동은 1차와 2차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제1차 무장선전활동은 훈련반 학습이 진행되는 동안인 1941년 9월 5일부터 10월 20일까지 전개되었다. 화북지대는 과거 대적 선전활동 경험이 있고 중국어에 능통한 30명으로 무장선전대를 조직하고 대장 왕자인(王子仁)·지도원 김창만 (金昌萬) 그리고 조청(朝靑) 간사(幹事)(양민산楊民山, 진한중(陳漢中)로 지도부(隊部)를 구성하고 활동에 착수하였다.95)

제2차 무장선전활동은 11월 초에 개시되어 이듬해 3월 말까지 5개월동안 전개되었다.96) 1차 선전활동이 실습적이었던 것이라면 2차의 경우는 일본군의 소탕전에 맞선 실제적인 것이었다. 『총결(總結)』에 따르면 "적(敵) 소탕전(掃蕩戰)의 급보(急報)를 접하고 촉급하게 훈련반 필업식(畢業式)을 마친 11월 3일 밤 필업동지까지 합하여 제2차 무선대(武宣隊)를 조직한 후 당일(익일의 오기인 듯-인용자) 새벽에 지대부(支隊部)(사령부)를 떠나 전선을 총 출발하였다."97) 제2차 활동은 적의 소탕전(掃蕩戰)에 맞선 반소탕전(反掃蕩戰)의 성격을 띠었다. 그러나 제2차 무장선전활동은 아래같은 보다 큰 전략적 목표하에 전개되었던 것이다.

금번 공작이 비록 과거 무선공작(武宣工作)(1차 공작-인용자)의 계속이나 그러나 시기와 임무의 중한 것으로 보아 과거 보다 새로운 의의가 있었다.

1. 히틀러 침소전쟁(侵蘇戰爭)이 이미 4개월을 경과하여 레닌그라드 모스크바 위급의 첩보가 날라드는 때였다. 그러나 모스크바 회의와 영미 양국 수상의 태평양회의의 결과로 전세계 반팟쇼진선(戰線)은 일익(日益) 공고해지었고 상반(相反)으로 덕국(德國)은 외교상 실패하고 정치상 더욱 고립하였다. 이때 진행하는 우리의 항일공작은 약소민족의 혁명대오로서 세계반팟쇼 진선에 참가하여 침소전쟁(侵蘇戰爭)을 반대하는 간접적 실제행동이다.

2. 연안(延安)에서 동방약소민족(東方弱小民族) 10억 5천만 인구를 배경으로 동방 반팟교동맹이 성립되었다. 이 시기에 항일공작을 진행하는 것은 우리의 실제투쟁으로서 동방 반팟쇼 동맹을 옹호 지지하는 혁명 의의가 있다. 더우기 ABCD진선의 결성, 적의 장사진공(長沙進攻)실패, 정주실함(鄭州失陷), 진찰기소탕전(晉察冀掃蕩戰)의 실패, 적의 군사행동 방향의 미정(未定)-남진(南進)? 북진(北進)? 혹은 서진(西進)?- 등 객관 정세의 유리한 조건은 우리공작에 더 큰 의의와 활기를 부여하며 직접 적의 소탕은 반대하는 반소탕의 의의가 있다.

3. 민족생활의 파산을 당한 적구(敵區)-화북(華北)- 20만 조선동포가 생활난으로 적의 기편(欺騙) 정책하에 기로에서 방황하고 있는 때 그들을 반일전선에 참가케 하기 위하여 선전 조사 조직공작을 진행하는 것은 직접 조선혁명 자신 발전에 관계되는 새로운 의의가 있다.98)

첫째 제2차 무장선전활동은 침소전쟁(侵蘇戰爭)을 반대하며 세계반파쇼전쟁 참여라는 의의가 있다는 것이다. 이 무렵 동아 국제정세는 현격히 변하고 있었다. 1941년 6월 22일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일본군은 7월 하순에 남부 월남을 점령하였고, 8월에는 중국의 각 도시와 공장지대를 폭격하였다. 일본은 특히 8월 중순부터 각처에서 병력을 징발하여 약 6개 사단을 집결시킨 후 포함(砲艦) 20여척 기정(汽艇) 200척 100여대의 항공기까지 동원하여 9월 7일부터 호남성 성도 장사(湖南省 省都 長沙)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였다.99) 이러한 일본군의 대공세는 독일의 소련 침공에 호응한 것이었다. 이로써 유라시아 대륙의 서(西)와 동(東)에서 독일·이탈리아·일본 등 파시스트진영과 영국·프랑스·소련·중국을 축으로 하는 반파시스트진영간의 격돌이 시작되었다. 이런 정세속에서 중공은 이제까지의 항일전쟁이 세계반파시스트 전쟁의 일환으로 성격 변환되었다고 규정하였고 조선의용대 화북지대 또한 그러한 입장을 견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특히 화북지대는 침소전쟁(侵蘇戰爭)을 반대하는 투쟁에 참여하고 있다는데 큰 의의를 두었다. 전통적으로 조선인 좌파 진영에서는 소련을 민족해방운동의 진정한 지원자로 여겨 왔는데100) 중국 관내지방 좌파단체들의 경우 소련의 대일전쟁 참여를 민족해방의 결정적 시기로 설정하기까지 하였다. 나아가 소련 방위를 자신들의 임무로까지 설정하기도 했다. 조청(朝靑) 화북지대의 소련에 대한 지지 또한 각별하였다. 1942년 1월 10일 화북지대 성원들이 진찰기 변구(晉察冀 邊區)에서 조청(朝靑) 진찰기분회(晉察冀分會) 를 결성하면서 '위대한 소련민족이 스탈린의 영도하에서 일제의 맹우 히틀러와 싸움으로써 일제는 고립되었고, 소련의 항전은 정의의 전쟁이며 중화민족과 소련인민의 철과 같은 단결을 배우겠다'고 선언하였다.101) 특히 『총결(總結)』의 제1페이지에는 담배 파이프를 물고 있는 스탈린 초상화를 크게 싣기까지 하였다.102) 화북지대는 일본군에 대한 공세를 전개하여 일본군을 중국에 묶어둠으로써 일본군의 소련 진공을 다소나마 막아보자는 차원에서 제2차 무장선전활동에 착수했던 것이다.103)

둘째 제2차 무장선전활동은 동방각민족반파시스트동맹(이하 동방동맹)의 옹호 지지라는 의의가 있다는 것이다. 동방동맹의 결성 과정은 아래와 같다. 1941년 9월 21일 팔로군(八路軍) 총사령(總司令) 주덕(朱德)은 몽고족·회족·장족·이족·묘족 등 중국내의 소수민족 대표, 그리고 월남·필리핀·조선·일본 등 외국인 대표 등 50여명을 소집하여 연안(延安)에서 동방각민족우인좌담회를 개최하였다.104) 이어서 같은해 10월 말 동방각민족반파시스트 대회를 개최하여 동방동맹을 결성하고 강령을 채택하였다.105) 동방동맹의 활동 총방침 즉 종지(宗旨)는 "동방민족의 역량을 단결하고 반파시스트 통일전선을 건립하고 공고히 하며 중국 소련 및 일절 독일·일본·이탈리아 파시스트로부터 압박받는 민족을 원조하고 공동으로 파시스트 강도를 타도하며 동방 각민족의 자유 평등과 해방을 위해 노력한다"는 것이었다.106)

조청회장(朝靑會長) 무정(武亭)은 위 연안의 회의에 참석하였으며 조청(朝靑)은 동방동맹에 가맹하였고 무정은 동방동맹(東方同盟)의 간부의 한 사람이 되었다.107) 따라서 이후 조청과 조청을 계승한 독립동맹은 이 동방동맹의 지침에 따랐다.108) 제2차 무장선전공작활동이 동방동맹의 건립과 시기를 같이한다는 점에서 이 무장선전활동은 동방동매의 존재를 과시하며 조선인의 동방동맹에 대한 지지의 태도를 과시하겠다는 전략속에서 결정되었다고 볼 수 있다.

세째 제2차 무장선전활동은 재화북(在華北) 조선인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겠다는 명백한 의지를 갖고 추진되었다. 물론 이는 제1차 무장선전활동과 궤를 같이 하고 있으나 화북지대원들은 선전·조사·조직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방침을 결정하였다. 특히 조사 방면에서 "적정(敵情)·적구(敵區)·조선동포의 거주상황(居住狀況), 직업(職業), 사상동향(思想動向), 선전(宣傳)에 대한 감수정도(感受程度)와 반응(反應), 적(敵)의 적구(敵區) 조선인(朝鮮人)에 대한 정책(政策) 및 조선동포간(朝鮮同抱)의 조직상황(組織狀況) 등을 조사하여 일절 공작의 근거(根據)"를 삼도록 할 것을 규정하고 나아가 "선전공작의 영향과 조사공작에 근거하여 가능한 사회관계 및 개인 관계를 통하여 적구내 조직공작을 진행할 것"을 설정하였다.109) 화북지대는 제2차 무장선전활동을 위하여 지대부(사령부-필자)와 제1대 제2대 제3대를 조직하였다. 지대부는 지대장, 정치지도원, 중앙특파원 등 3명으로 구성하였다.110) 지대장은 박효삼이었고 정치지도원은 김학무였으며111) 중앙특파원은 조청 지회장 진광화(陳光華)로 추정된다. 그러나 조청 조선의용대 지회는 각 대가 분산됨에 따라 실제 지도가 불가능하여 잠시 활동을 정지하고 각대에 조청 독립지회를 두고 중앙특파원이 이를 지도하였으며, 따로 시파원(時派員)을 두어 조사 연구공작을 담당케 하였다.112)

각(各) 대(隊)에는 대장(隊長), 지도원(指導員), 조청 독립지회장(朝靑 獨立支會長) 등 3인으로 대부(隊部, 지휘부)를 결성하였다. 대장은 행정, 공작상의 지휘를 담당하였고 지도원(指導員)은 대의 정치, 공작력 향상 및 선전품 제작의 지도를 담당하였다. 조청(朝靑)을 대표한 독립지회장(獨立支會長)은 주로 조사 및 조직 활동을 담당하였다.113)

제2차 무장선전대(武裝宣傳隊)의 활동 구역은 석가장 안양(石家庄 安陽) 사이 1400리에 걸친 평한선(平漢線) 일대였다. 무장선전대 제1대가 담당했던 지역은 팔로군(八路軍) 태행군구(太行軍區) 제5분구(第5分區)의 자현(磁縣) 안양(安陽) 무남(武南) 등지,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안양(安陽)의 전부, 임북(林北) 자현(磁縣) 탕현(湯縣)의 일부 지역이었다.114)

<지도>조선의용대 화북지대 활동지역
출전 : 중국공산당(中國共産黨) 군세력(軍勢力) 분포도(分布圖)(1941년말) 『사상정세시찰보고집(思想情勢視察報告集)』10

제1대(第1隊)의 대장 이익성(李益星) 지도원(指導員)은 진한중(陳漢中), 화청련 지회장은 호철명(胡哲明), 그리고 두 개 분대의 분대장은 이지강(李志剛)·하진동(河振東)이었다.115) 제2대가 맡았던 지역은 태항군구 제1분구(第1分區)의 원씨(原氏)·찬황(贊皇)·임성(臨城) 일대였다.116) 제2대 대장은 김세광(金世光), 지도원은 이동림(李東林), 지회장은 유신(柳新), 분대장은 조열광(趙烈光)·손일봉(孫一峰)이었다.117) 제3대의 활동지역은 팔로군(八路軍) 태행군구(太行軍區) 제6분구(第6分區)의 사하(沙河)·형태(刑台)·무안(武安) 3현인데 중공측의 평한선대와 변구정부 제6전서(專署)(행정독찰전원공서行政督察專員公署)가 있었다.118) 제3대 대장은 왕자인(王子仁) , 지도원(指導員)은 박무(朴茂), 지회장은 신억(申憶), 분대장은 한경(韓璟) 마덕산(馬德山) 등이었다.119)

2) 중국인(中國人)을 향(向)한 선전(宣傳)

의용대의 북상의 주 목적이 화북지역 조선인에 대한 공작에 있었지만 당장 접하는 존재는 중국민중이었다. 당시까지 팔로군의 활동이 아직 조선인 집거지(集居地)(예컨대 기동(冀東)지방의 조선인농장(朝鮮人農場))에까지 미치지 못하였기 때문에 주 접촉 대상은 중국인 촌락의 민중일 수 밖에 없었고 실제 제1,2차 무장선전활동에서 주력했던 선전대상은 중국 민중이었다.

중국민중에 대한 선전은 중공이 사활을 걸고 있던 활동이었다. 중공이 일제의 끊임없는 토벌에도 불구하고 화북(華北)·화중(華中)에서 세력을 확대하고 특히 화북(華北)에서 국민당 지반 대부분을 석권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들이 노력한 민중획득 활동의 성과였다. 중공은 선전을 민중획득의 제1수단으로 삼았다.120) 중공(中共)은 '선전(宣傳)은 작전(作戰) 보다 중요하고, 모든 공작의 발단(發端)이며 민중동원(民衆動員)의 가장 유력한 무기(武器)'라고 판단하였으며 팔로군 정치구부, 행정기관 외곽 민중단체 등 각종 조직을 동원하여 철저히 선전활동을 전개하였다.121)

화북지대(華北支隊)로서는 중국민중에 대한 무장선전활동을 전개하여 중공을 지원함으로써 중공 팔로군과의 관계를 강화할 수 있고 또 민중선전의 방법을 터득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 적극 그 활동에 참여하였다. 중국민중에 대한 선전활동은 좌담회(座談會)·연환회(聯歡會)·군중집회(群衆集會) 등의 형식으로 전개되었다. 특히 제1차 선전대의 활동은 대부분 중국민중에 대한 선전공작에 할애되었다.122)

화북지대는 좌담회(座談會)를 통해 조(朝)·중(中)인 상호간의 이해를 증진시키며, 현지 정형을 파악하고, 공동 투쟁의 목표와 진행 방법을 설정할 수 있었다. 제1차 무장선전대는 좌담회(座談會)를 4차례 개최하였는데 참가인원은 모두 90여명이었고 중국측 참가 인사는 중공 변구정부 공작인원과 참의원(參議員), 팔로군 간부, 지방 신사(紳士), 구망단체(救亡團體) 간부, 펑년대 간부, 소학교 교사 등 다양하였다.123) 제2차 무장선전활동 경우 1·2·3대가 치른 좌담회를 다 합치면 154차에 참가 인원은 1,398명이었다.124) 좌담회(座談會)가 중국 군 정 민간 단체 간부들과의 회합이라면 연환회(聯歡會)는 간부는 물론이고 일반 성원까지도 함께 참여하는 것인데 그 목적은 상호 정서상 정치상의 융합과 공작상의 연계를 일층 강화하는데 있었다.125)

가장 주력하였던 것은 군중집회였다. 제2대 성원으로 무장선전활동을 전개하였던 장례신의 회고에 따르면 무장선전대는 낮에는 주로 준비사업을 하고 밤에는 적의 점령구로 들어가 군중선전과 적군 와해 사업을 벌였다. 마을에 들어서면 무장선전대원들은 군중집회를 열어 반제 선전 연설을 하거나 노래를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126) 제1차 무장선전대가 치른 군중대회는 14차에, 참가인원1,500명, 촌수는 46개촌이었다.127) 제2차 무장선전활동에서 1·2·3대가 치른 군중대회는 촌의 경우, 226개촌의 29,134명을 대상으로 108차에 걸쳐 전개하였다. 아울러 가두(街頭)에서는 약 100여차에 걸쳐 약 4천명을 동원하여 선전하였다.128) 그리고 화북지대는 제2차 무장선전활동에서 중국민중을 향하여 중문은 40종, 17,420매를 살포(撤布)하였다.129)

3) 일본군(一本軍)을 향(向)한 선전(宣傳)

무장력에서 뒤떨어졌던 중공 팔로군은 일본군(日本軍)과의 정면 충돌은 가급적 회피하는 대신 일본군의 경비 소홀을 틈타 일본군(日本軍) 분초소(分哨所), 소분둔대(小分屯隊), 황협군(皇協軍) 그리고 열차·자동차·공장·광산 등을 습격하거나 철도·도로·교량·통신선을 파괴하였다. 또 때로는 창고·공장·광산 등을 불태우거나 일본군 장병과 일반인 및 친일중국인을 암살·납치하였다. 아울러 중공은 일본군 후방교란을 위해 일본군 장병과 일반인 그리고 친일(親日) 남경정부(南京政府)치하의 군민(軍民)에 대한 선전활동에 힘을 쏟았다.130) 특히 중공은 일본군을 내부에서 와해시키기 위한 선전활동에 주력하였다. 중공은 일본군이 비록 현대적 정예 군대이지만 장병들은 일본 군벌의 기만과 압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출정하였고 또 매우 피곤해 하고 있으므로 그들에게 자신들이 기만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꾸준히 선전하면 일본군은 내부에서 붕괴될 것이라고 판단하였다.131) 따라서 중공은 일본군에 대해 주로 그들의 사기를 꺾는 내용을 선전하였다.132) 중공은 팔로군 각 사단·여단·연대·대대·중대에 설치된 정치부 또는 정치지도원 자리에 유능한 당원을 배치하여 선전활동을 담당케 하거나 각급 행정기관, 외곽민중조직 등을 통해 수행하였다.133) 선전 방법은 중일전쟁 초기에는 주로 선전문의 살포, 벽서, 녹지호(鹿地互) 등 재중 일본인 좌익 인사를 이용한 라디오 방송 등이었는데 이후 점차 발전시켜 전선(戰線)에서의 구호선전(口號宣傳)(함화喊話-필자)과 통신을 주요 수단으로 택하였다.134)

일본군에 대한 위같은 선전을 위해서는 일본의 사정에 정통하고 일본말을 잘 아는 요원들이 필요하였다. 일제 자료에 따르면 중공은 일본군 포로공작을 중시하여 포로를 우대하고 이들로 하여금 자신의 전우와 소속부대에 대해 반전(反戰)을 선전 선동하도록 하였다. 또 원활한 대일본군 선전 공작을 위하여 중공군은 대내에서 일반 병사에 대하여 일본어를 교육하기도 하였다.135) 조선의용대 대원들은 대부분 일본어에 능숙하고 일본사정에 비교적 정통하며, 또한 화중(華中)·화남(華南)에서 일본군에 대한 선전활동에 주력했었다는 점에서 대일본군 선전에는 매우 중요한 인재일 수 밖에 없었다.

화북지대원들은 전선에서 일본군에 대한 선전에 매우 주력하였다. 이때 가장 많이 사용된 수단은 문자선전이었다. 문자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중국민중에게는 군중집회같은 구두선전에 주력한 반면 일본군에 대해서는 전단살포(傳單撒布) 표어부착(標語附着) 등 문자선전에 주력하였던 것이다. 제2차 무장선전활동 때 제1·2·3대가 뿌린 일본문 전단은 115종 42,719였다.136)

전단살포(傳單撒布)는 적에 대한 기습전과 통신선 교통로 파괴활동 등과 동시에 단행되었다. 몇가지 예를 들어 보자. 화북지대 제1대는 1941년 11월 28일부터 같은 달 30일까지 팔로군 무남독립영(武南獨立營)과 함께 홍산(紅山) 이북 적구(敵區)에 진출하여 적(敵) 거점(據點) 및 공로에 일문(日文) 전단 4,620매 중문(中文) 전단 80매를 살포(撒布)하고 전선 300근을 끊어 왔다. 12월 20일에는 무남현(武南縣) 3구(3區)에서 민간인 80명을 동원하여 화촌(和村 일본군 주둔지-필자) 우익(右翼) 공로(公路)를 파괴하고 민간인의 협조를 얻어 봉쇄구(封鎖溝) 수백미터를 파괴하였으며 아울러 전단 4,000매를 살포하였다.137) 또 북양의 남정의구(北陽義 南正義溝) 등지에서 팔로군 부대와 함께 전투에 참가하고 이어 전선(電線) 480근을 절취(切取)하고 전단 3,600매를 살포(撒布)하였다.138)

구두선전(口頭宣傳) 즉 대적(對敵) 함화선전(喊話宣傳)도 병행 전개하였다. 제2대는 1941년 12월 9일 무장(武庄)에서 적의 석보루(石堡壘) 200미터에 접근하여 일본군의 죄악, 태평양전쟁의 전도(前途) 및 사향정서(思鄕情緖)를 자극하는 대적(對敵) 함화(喊話)를 하였다. 이때 적은 사격하지 않고 듣기만 하였다.139) 또 1941년 12월 18일에서 1942년 1월 사이에 제2대는 낭하(浪河) 등 2곳에서 대적(對敵) 함화(喊話)를 전개하였다. 이 함화후 적은 의용대원 체포를 목적으로 편의대(便衣隊, 사복조)를 파견하여 3일간 호구조사를 실시하였다.140) 제3대는 42년 1월 14일 팔로군과 함께 형동 중매화(刑東 中梅花)에서 일본군에 대한 함화를 전개하였다. 그곳에는 일본군 흑전(黑田) 소대장 이하 15명과 황협군(皇協軍) 30여명이 수비하고 있었는데 의용대원들은 태평양 전쟁과 관련한 일본의 전도(前途), 조선의용대와 일본인각성연맹(日本人覺醒聯盟)의 활동 목적과 의의를 한시간동안 설명하였다. 함화(喊話)가 끝난 후 대답을 요구하자 적은 기관총 사격으로 응하였다.141) 제1대는 안양(安陽)에서 중공의 구간부(區幹部)들에게 대적 함화 요령을 3차례에 걸쳐 학습시켰다.142)

4) 조선인(朝鮮人)을 향(向)한 선전(宣傳)

앞에서 언급했듯이 의용대는 화북 조선인에 대한 공작을 주 목표로 삼고 북상했다.143) 제2차 무장선전활동 경우 적구 조선인에 대한 공작 방침은 『총결(總結)』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적의 내선일치(內鮮一致) 선전(宣傳)에 대립하여 적의 일절 기편(欺騙)과 마취정책(痲醉政策)을 폭로함으로써 동포들의 민족 각오를 제고하며, 민족의 광명(光明)한 전도(前途)에 대한 신심(信心)을 제고(提高)하며, 적의 민족분열정책에 대립하여 조 중(朝 中) 인민(人民)의 단결을 호소 조장하며, 민족의 입장에서 조국 광복 사업에 참가하도록 선전 교육하며, 적구 동포내(同胞內)에 조직 사업을 전개하여 역량(力量)의 준비(準備)에 노력할 것.144)

선전과 아울러 적구내 조직활동도 전개하기로 했지만 중국인들이 대부분 농촌지역에 거주했던 것과 달리 조선인은 일본군의 통제가 심한 적구(敵區) 성시(城市) 거주했기 때문에 그것은 어려웠다. 따라서 화북지대는 주로 선전 활동 그것도 전단살포, 표어부착 같은 방식을 택하였다. 이들 수단을 통해 조선의용대의 존재와 주장이 중국인 혹은 일본군을 통해 조선인에게 전달되는 것이므로 간접 방식이었다. 제2차 무장선전활동 때 제1·2·3대가 살포한 한글 전단은 72종 13,262매였다.145)

간접선전 방식은 중공 기관지를 통해서도 행해졌다. 이미 본대로 채국번(蔡國藩)·임평(林平) 등 4명은 진찰기군구(晉察冀軍區)로 가서 1941년 10월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 화북지대(華北支隊) 제2대와 조청 진찰기분회(晉察冀分會)를 건립하였다. 이때 현지 중공 기관지 『진찰기일보(晉察冀日報)』는 이 조선인 조직에 대해 지면을 대폭 할애하여 화북지대의 주의 주장을 상세히 소개하였다.146) 이 소식은 여러 경로를 통해 진찰기군구(晉察冀分區)와 가까운 조선인이 다거지(多居地)인 북평 천진(北平 天津) 등에까지 전달되었을 것이다.

화북지대는 보다 과감하게 간접 선전을 전개하기도 했다.147) 화북지대 제1대는 적거점(敵據點) 화촌(和村)에서 2리 떨어진 지점에서 적의 통신선(通信線)을 절단하여 도청하는 한편 거짓 정보를 주었다. 그 내용은 조선의용군 2천명이 진공한다는 내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적은 전화를 받고 2천여명의 조선의용군이 진공한다하여 화촌(和村)·자산(磁山)·팔특(八特) 일대에 거주하는 조선동포 전부와 심지어 조선인 통역관까지 전부 다른 곳으로 이동시켰으며 화촌(和村) 정보사령(情報司令)은 의용대 선전품을 수집, 연구하면서도 사병들에게 비밀을 엄수하도록 하였다.148)

직접 선전 또한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제1차 무장선전대는 직접 적구 성시에 들어갈 수 없어 조선인에 대해서는 간접적으로 밖에 선전할 수 없었는데 이에 대한 반성으로 화북지대는 우편을 통해 소량이라도 직접 전달할 것을 결정하였다.149) 그에 따라 제2차 무장선전활동 때 제1대는 적구내의 인간관계를 이용하여 5통의 선전 편지를 조선인 통역관에게 보내기도 하였다.150)

조선동포를 향한 이러한 선전활동은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다. 팽성경비대(彭城警備隊)의 조선인 김통역(金通譯)은 화북지대의 선전품을 보고 울었으며 봉봉신 병영(峯峯新 兵營) 통역 김(金)은 화북지대가 산발한 통행증을 보존하였고, 팽성 복택사령(福澤司令)은 황협군(皇協軍) 간부회의에서 '조선의용대 선전은 매우 위해하다 속지 말라'고 하였다.151) 일제측에서는 화북지대원들에게 역선전을 하기도 하였다. 일제의 사주하에 "화북조선인유지일동(華北朝鮮人有志一同)""봉봉신조선인거류민회(峯峯新朝鮮人居留民會)""자현조선협려회(磁縣朝鮮協勵會)" 등의 명의로 "고조선의용군 제사(告朝鮮義勇軍 諸士)에게"라는 선전물을 대량 살포하였다.152)

그리고 적구내 조선인속에서의 비록 적은 규모이기는 하지만 조직활동도 전개하였다. 40일간의 토론에서도 적지역에서의 조직 공작 전개를 화북지대 목표의 하나로 설정한 바 있었다. 조직 활동은 원래 조청(朝靑) 계통을 통해 실시하도록 되어 있었다. 조청(朝靑)의 적구공작 책임자는 이철(李哲), 윤공흠(尹公欽))이었다.153) 제2차 무장선전활동 시작 당시, 각대의 조청 독립지회장이 맡았던 임무의 하나는 조직 조사 활동이었다.154) 이때 조직과 조사활동은 적구내 조선 민중속에서의 조사와 조직을 의미함이 틀림없다. 그러나 그후 화북지대 지대부가 적구공작 책임자 이철(李哲)과 함께 적구공작위원회(敵區工作委員會)를 조직하여 적구공작의 계획과 진행을 전담(全擔)하였다. 반면 조청(朝靑) 중앙은 1·2·3 각대에게 적구공작을 하지 말 것을 지시하였고 공작 전개가 가능할 경우에도 지대부에 요청하여 허가를 얻어 하도록 하였다.155)

이 조직 활동에 대해서 일제는 매우 우려하였고, 또 의용대의 조직 활동 규모를 크게 잡고 있었으나156) 사실상은 그렇게 강력하게 전개되지는 못하였다. 『총결(總結)』에 따르면 공작에 필요한 포섭대상이 각지에 있었으나 그들과 확고한 연계를 건립하지 못했다고 하였다.157) 특히 1942년 7월 조청 제2차 대표대회에서는 1941년 가을부터 전개된 적구 조직 공작이 무계획적으로 자유방임적으로 전개되었다고 비판되었다.158)

5) 적군과의 전투

무장선전활동을 하다가 화북지대는 일본군과 직접 전투를 치르기도 하였다. 원래 무장선전 공작에서는 전투는 가급적 회피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일본군이 조선의용대를 소탕키 위해 적극적으로 공격해올 때는 어쩔 수없이 싸울 수밖에 없었다. 2차무장선전활동 기간 전투는 팔로군과 함께 치루었던 것이 10여차례 있었으며 화북지대 단독으로 싸웠던 것이 2차례였다.159) 이하에서는 화북지대 단독으로 싸웠던 전투 호가장전투(胡家庄戰鬪)와 읍성전투(邑城戰鬪)를 보기로 한다.

1941년 12월 12일에 있었던 호가장전투를 먼저 보자. 제2대는 1941년 11월 12일부터 29일부터 29일까지는 선전물 준비, 지방정형조사(地方情形調査) 및 자체 정신동원공작(精神動員工作) 등의 준비를 하였다.160) 이후 본격적으로 유격지역에서의 무장선전활동에 착수했다. 12월 2일에는 원씨현 한 지점에서 좌담회를 하고 같은날 북영(北營)에서는 군중집회(400여명 참가)를 전개하였다. 3일에는 흑수하(黑水河)에서 군중집회(참가자 400여명)를 하고 4일에는 왕가장(王家庄) 등에서 촌급(村及)간부와 좌담회를 개최하였고 6일에는 소촌(蘇村)에서 군중집회(참가자 300명), 10일에는 소장(蘇庄)에서 군중집회(참가자 200여명)를 열었다.161) 이 와중인 9일에는 무장(武庄)에서 적의 석보루(石堡壘) 200미터에 접근하여 대적 함화를 하기도 하였다.162)

이렇듯 원씨현(原氏縣)에서 활발한 선전활동을 전개한 제2대는 원씨현 공작을 끝내기 위해서 현(縣) 민중대회(民衆大會)(서안사변 기념대회-필자)를 12일 개최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의용대의 동향을 세밀히 주시해 오던 적은 제2대를 소탕하기 위해 11일부터 준비하였다. 적은 12일 새벽 300여명을 동원하여 제2대가 숙영하는 호가장 마을을 포위하고 일망타진코자 하였다.163)

습격은 12일 여명(黎明)에 전개되었다. 의외의 총성에 전 대원이 놀라 깨어본즉 적은 벌써 2리(800미터) 정도 거리에서 발견되었다. 대원들은 짐을 쌀 사이도 없이 총만 가지고 집합하여 서쪽 고지를 점령하려 하였으나 적의 맹렬한 사격 때문에 여의치 않자 방향을 남쪽으로 바꾸었으나 역시 적의 사격이 맹렬하였다. 포위당한 것을 알고 다시 고지를 점령키로 결심하였다. 이에 혈전이 개시되었다. 대원들은 기관총과 소총으로 대응사격하면서 포위망 돌파에 나섰다. 몇배나 강한 적의 화력을 뚫고 대부분 대원은 탈출했으나 손일봉(孫一峰)·최철호(崔鐵鎬)·왕현순(王現淳)·박철동(朴喆東) 등 4명은 전사하고 김학철은 중상을 입은 후 체포되었다. 그리고 대장 김세광(金世光) 분대장·조열광(趙烈光) 대원·장례신은 부상당하였다.164) 적군이 호가장을 습격할 수 있었던 것은 호가장내의 중국인 스파이가 몰래 밀고했기 때문이며 전투는 팔로군이 응원옴으로써 끝났다.165)

『총결(總結)』에서는 호가장의 참변이 일어났던 것은 대원들의 경각성이 너무 부족하였고 조사가 미비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호가장은 민중조건이 불량하고 민병조직이 약한데 제2대는 전현대회소집을 수일전 적구에 통지하였을 뿐 아니라 모든 사항은 중공 변구 현정부에게 의뢰했기 때문이라 하였다.166) 지대부(支隊部)에서는 대장(隊長) 김세광(金世光)이 호가장전투에서 중상을 입자 이철중(李鐵重)을 파견하여 대신 제2대를 지휘하게 하였다.167)

읍성전투(邑城戰鬪)의 경과는 아래와 같다. 이 전투는 화북지대 제3대가 치른 1-4차의 무장선전활동 가운데 제3차 활동 과정에서 발생했다. 읍성(邑城)에 도착한 제3대 대원들은 읍성 교회당에서 군중대회를 소집하였는데 경계는 팔로군 측이 맡아 읍성 동쪽 2키로 지점에 배치되었다. 의용대원들이 4∼500명 군중에게 선전문을 배부하고 선전 연설을 하는 중 일본군 40명, 황협군(皇協軍) 10여명 그리고 편의대(便衣隊,사복조) 10명으로부터 기습을 당하였다. 적들은 읍성 서문밖에 병력을 매복시킨 후 먼저 편의대로 하여금 의용대원들에게 사격을 가하였다. 뜻밖의 기습을 당하자 군중집회장은 극도로 혼란되었고 후퇴할 퇴로도 없었다. 이에 대장 왕자인(王子仁)과 일부 대원이 건물 꼭대기에 올라가 수류탄을 던지고 교회당안에 있던 대원들은 일제 사격을 가하자 편의대는 도주하였다. 이틈을 타서 전 대원들은 3패로 나누어 서문으로 돌격하여 탈출하였다. 전투 중 대원 황신오(黃信伍) 1명만 경상을 입었다.168)

화북지대가 치른 중요 전투 중에 『총결(總結)』에는 나오지 않지만 1942년 5월 반소탕전(反掃蕩戰)이 있었다. 일본군 북지파견군(北支派遣軍)은 42년 들어와 근거지에 대한 소탕전을 대대적으로 전개하였다. 42년 2월에는 제1차 소탕전을 전개하였는데 이때 동원된 일본군 병력은 4만여명이었다.169) 1차 소탕전이 3월 30일로 끝나자 5월에는 본격적으로 20개 사단 약 40만명을 동원하여 제2차 소탕전을 시작하였다. 이때는 전차와 비행기까지 동원하였다.170) 5월 초순부터 개시된 일본군의 소탕전이 중순을 넘어서서 하순에 이르는 즈음 적의 포위망은 최후의 일선까지 압축되어 팔로군 총사령부와 의용대 지대부가 있던 마전(馬田)조차 적의 대포 사격권내로 들어갔다.

이로써 팔로군과 의용군의 최고간부급 인물들이 전부 포위당하였다. 팔로군 총사령부는 어느 한 지점을 공격, 점령하여 위지(危地)를 탈출코자 의용대에게 두개 고지 점령할 것과 포위당하고 있는 전군이 탈출할 때까지 그 고지를 사수할 것을 명하였다. 이에 의용대는 지대장 박효삼(朴孝三)의지휘하에 일본군과의 치열한 접전 끝에 두 고지를 점령하였고, 팔로군 부대는 두 고지 사이를 통해 탈출하였다.171) 이 포위 돌파전 속에서 팔로군측에서는 사령부 참모장 좌권(左權) 등이 전사하였고 의용대측에서는 진광화(陳光華), 조청((朝靑), 진기예지회(晉冀豫支會) 지회장)와 윤세주(尹世胄) , 동 부지회장)가 전사하였다.172)

이상의 무장선전활동을 통하여 획득한 성과는 적지 않았다. 첫째 각지의 조선인들에 대한 영향력이 강화되었다. 조선의용군 수천 수만명이 활동한다는 소식이 동포사회에 전해졌고 동포 내부에서 조선의용대를 선전하는 사람과 동정분자가 생겼으며, 민족자각이 향상되었다. 『총결(總結)』에서는 그 결과 적구 조직 공작의 기초가 마련되었다고 평가하였다.173) 둘째 일본군(日本軍)이나 황협군(皇協軍)에게도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다. 외국인 혁명대오 존재 자체가 황협군의 민족의식을 향상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일본군이나 황협군은 조선의용대의 존재를 알게 되자 의용대의 선전에 공포심을 느끼고 소탕하기 위해 수차 습격하였고 의용대를 내부로부터 와해시키기 위해 역선전을 전개하기도 했다.174) 세째 선전활동을 통해 화북지대 대오 자신은 선전기술을 익히게 되었고 대원들의 심신이 단련되었으며 단결력 또한 향상되었다.

무엇보다도 큰 영향은 이 과정을 통해 중공 팔로군과의 관계가 긴밀해졌던 것이다. 『총결(總結)』에 따르면 "아무 실천이 없이 조선혁명자라는 조건만 가지고 중국 군(軍)·정(政) 각계(各界)와 긴밀한 혁명공작관계"가 수립될 수 없다고 하고 "우리는 실제 공작을 통해 공동 임무를 기초로 형제와 같이 굳게 단결하였으며 공작상 상호 긴밀히 배합하여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었다. 동시에 군 정 각계로 하여금 적구 조선동포문제에 대하여 과거 보다 적극적으로 유효한 정책을 취하도록 환기시켰다."고 자평하였다.175) 실제 이와 시기를 같이 하여 각 변구 정부는 조선인 우대를 위한 각종 법을 제정하여 이를 뒷받침했던 것이다.176)

5. 결어(結語)

이상의 조선의용대 화북지대의 결성과 활동에서 다음을 알 수 있었다. 첫째 국민당지구에서 결성된 조선의용대 대원 대부분이 화북 팔로군 근거지로 이동한 이유는 다음 세가지로 정리될 수 있다. 그 하나는 대원들이 조선민중속에서 민중에 의거하여 투쟁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일제의 만주 점령 이후 중국 관내지방은 조선인 민족운동가들의 안전한 기지 역할을 하였으나 반대로 조선 민중없는 속에서 운동이 이루어져야 했던 한계를 지녔다 그래서 일찍부터 관내 좌파 단체들은 조선 국내와 동북지방 조선인 민중과의 결합을 시도했으며 의용대 건립 직전에 개최된 민혁단 제3차 임시전당대표대회에서는 동북 진출을 공식 결정하였다. 그러나 동북에 당장 진출할 수단이 없었다. 이에 최창익 일파는 중공지역으로 대오를 이동시켜 중공의 항일투쟁에 합세하여 동북으로 진출한다는 방침을 정했고, 그 방침에 따라 의용대 2구대원 일부를 이끌고 연안으로 들어갔으며 이후 1941년 1월 중공당원 무정과 함께 조청을 건립했다.

반면 전맹내 최창익 반대파와 민혁당은 국민당지구에서 중국군과 합세해 항일운동을 전개한 다음 중국측의 신뢰를 획득한 후 동북으로 진출한다는 방침을 정하고 실천하였다. 이들은 일본군 침략루트를 따라 조선인들이 많이 이주해 오자 화북행을 결행하여 같은해 봄 황하를 건너고 같은해 6월에 팔로군 근거지로 이동하였다.

또 하나의 이유는 국민당과의 갈등 때문이었다. 만주사변 발발후 국민당은 한편으로는 중공과 대결하였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만주회복이라는 민족적 임무 달성에 노력하였다. 항일과 고토회복이라는 공통목표하에 관내 지방 조선인 좌파 진영은 이때부터 국민당과 결합해 항일 운동을 전개해왔다. 특히 중일전쟁 발발로 중국내 국공합작이 강화되자 조선인 좌파들은 중국 항일전에 직접 참가할 목적으로 조선의용대를 국민당의 지원하에 건립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조선인 좌파와 국민당 사이에는 사상적 갈등이 내재해 있었으며 특히 중일전쟁이 속전속결에서 지구전으로 돌입한 1939년부터 공산당에 대한 국민당의 공세가 강화되자 의용대원들은 위기의식을 느끼게 되었다. 때마침 화북에서 중공 팔로군이 세력을 넓혀나가자 이동을 결의하고 실천에 옮겨 1941년 여름 주력이 팔로군 근거지로 이동했던 것이다.

나머지 하나의 이유는 민족운동의 통일단결을 위해서였다. 반최창익전맹(反崔昌益前盟)-민혁당(民革黨) 연합세력은 1939년 초부터 조선인 우파단체들과의 통일단결에 노력하였으나 1939년 기강통일회의가 실패로 끝나자 분열된 조선인인 좌파세력의 통일 단결을 위해 북상을 결행했던 것이다. 팔로군 태항산 근거지에 집결한 청년들은 1941년 7월 7일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를 공동으로 건립하였고 이어서 북상 대원들은 대부분 조청에 가맹하였으며 점차 조청을 화북지대 상부 지도조직으로 인정하였다.

둘째, 조선의용대 화북지대 건립으로 화북지대원과 중경 대본부와의 관계가 단절되었거나 의용대 대본부의 통제력이 소멸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북상 직후 곧바로 화북지대가 건립되었고, 지휘부(지대부)가 원 의용대 지휘체계를 계승하고 있다는 점에서 화북지대의 건립은 중공이나 조청의 주도하에 이루어졌다고 볼 수 없으며 팔로군 지역 북상을 결정한 대본부(隊本部)의 방침에 따랐던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화북지대가 중경(重慶)과 멀리 떨어져 있었던 까닭에 중경 대본부가 직접 화북지대를 일일이 지도할 수는 없었고 유격전 특성상 강한 권한을 갖기 마련인 현지 지휘부 즉 화북지대 지대부에 의해 통제되었다. 즉 화북지대 지대부는 중경(重慶) 대본부(隊本部)를 대리했던 것이다.

또 민혁당원들은 중경 당 중앙의 지침에 따라 조청에 가맹하였으며 가맹이후 조청내에서는 전맹계와 민혁당계가 세력균형을 이루었던 것으로 보인다. 중경(重慶) 민혁당 중앙은 조청내 민혁당원들을 통해 조청에 대한 영향력 확보에 노력하였던 것이다. 화북지대는 따라서 팔로군의 강력한 원조와 지도를 받으면서 활동했으나 중공과는 정치상으로는 일정한 거리를 둔 독립부대로서의 위상을 지녔던 것이다. 독립부대로서의 화북지대는 자체적으로 조선의용대 간부훈련반을 개설하여 신입대원에 대한 교육을 실시하였다. 이때 중공 팔로군식 작풍이 의용대와 접목되었음은 분명하나 교육 내용, 교관진 등은 자체적으로 결정하였던 것이다.

세째, 화북지대는 팔로군과 결합하여 어느 때보다 강력하게 항일운동을 전개했는데 그 주된 방식은 무장선전활동이었다. 화북지대는 파시스트 진영의 소련 침략반대, 동방동맹 지지옹호, 적구 조선동포 획득이라는 전략적 목표를 가지고 이 활동에 착수하였다. 중국 군대와 결합한 선전활동은 의용대가 국민당 지구에서도 활동했던 바이기도 하였다. 차이점은 국민당 지구에서는 전선에서 일본군에 대한 선전이 주였다면 팔로군 지역에서는 중국민중에 대한 선전에 가장 많은 노력을 투여했다는 점이다. 특히 화북지대는 국민당지구에서와는 달리 적구 조선인들을 대상으로 한 선전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활동 가운데서 국민당 지구에서는 겪지 못한 치열한 전투도 전개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것으로 호가장전(1941.12.12)와 읍성전투 그리고 1942년 5월 반소탕전이 있었다. 이러한 활동을 했던 화북지대는 적어도 제2차 무장선전활동 종료(1942.3.말)까지 팔로군과의 관계는 '협조'와 '연대'의 수준이었다.

그러나 독립부대로서의 위상은 치열한 활동가운데서 점차 옅어졌다. 거듭되는 일본군의 대소탕전속에서 전개되는 독자적 활동은 호가장전투에서 실증되듯이 부대 전체의 소멸을 초래할 수도 있는 위험한 일이었다. 그런속에서 팔로군은 화북지대의 활동에 점차 제약을 가하기 시작하였다.177) 특히 1942년 4월 중공은 화북지대를 팔로군 정규편제하에 끌어들였다. 팔로군 제129사단 정치부 주임 채수번(蔡樹藩) 등은 같은 해 4월12일자 문서에서 조청과 조선의용대 화북지대 인원들을 "우리 부대(팔로군 129사단-인용자) 정규(正規) 편제내(編制內)로 끌어들일 것"을 지시하였다.178) 이로써 화북지대는 중국 국민당군대에서 팔로군 휘하로 '공식' 이관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이관은 화북지대의 독자적 활동이 갖는 폐해를 막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 국공관계가 악화되는 속에서 의용대의 국민당과의 단절을 중공이 의도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또 1942년 7월 건립된 독립동맹은 조선의용군 화북지대를 하위 행동부대로 공식 규정함으로써 의용대(의용군)는 중경에 본부를 둔 조선민족전선연맹의 부대에서 '공식적'으로 화북의 조선독립동맹의 부대로 변신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위상도 이듬해 1월 6일 무정이 팔로군 태항산 근거지로 와 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에 대한 장악력을 높여가면서 변하였다. 무정이 독립동맹에 적극 간여하면서 독립동맹의 최고기관인 중앙상무위원회(中央常務委員會)는 그 기능이 점차 무력해졌다.179)

특히 동방각민족반파시스트동맹(동방동맹) 대표자격으로 무정은 조선의용군 화북지대의 지도 권한을 독립동맹에서 동방동맹으로 이관시킬 것을 독립동맹 상무위원회측에게 요구하였다. 독립동맹은 상급기관의 의견을 존중한다는 취지에서 이를 받아들였다.180) 이로써 독립동맹은 의용군 화북지대에 대한 지도력을 공식적으로 상실하였다. 독립동맹 건립후 민혁당계 수뇌 김두봉과 탈민혁당계 수뇌 한빈은 연안으로 이동하였고181) 조선의용군 화북지대 부지대장 이익성(李益星)(전맹계)과 정치지도원 김창만(金昌萬)(전맹계)은 무정에 의해 해임됨으로써182) 화북지대에 대한 민혁당계와 전맹계의 통제력은 약화되었다. 의용대의 팔로군 지역으로의 이동을 선두에 서서 추진하였던 최창익은 이후 팔로군 지역에서 점차 소외되었다. 이리하여 조선의용대(조선의용군)에 대한 지도력은 김원봉에서 최종적으로 무정에게로 이동되었으며 이 과정은 의용대(의용군)에 대한 중공 영향의 강화 과정이기도 하였다.

*주석*

* 서울시립대학교 강사

1)조선의용대 화북지대에 관해서는 아래 논문이 참고된다. 이정식(李庭植) 「한인공산주의자(韓人共産主義者)와 연안(延安)」, 『사총(史叢)』8, 1963(원문은 Chong-Sik Lee, 1962 "The .Korean Communis Yenan". The China Quarterly Jan-Mar)..삼천전소(森川展昭), 「조선독립동맹의 성립과 활동에 관하여」, 이정식 한홍구 『항전별곡』, 거름, 1986(원문은『조선민족운동사연구(朝鮮民族運動史硏究)』1, 1984).탁목창지(鐸木昌之), 「잊혀진 공산주의자들-화북조선독립동맹을 중심으로」, 위의 책(원문은 『법학연구(法學硏究)』57권 4호, 경응대학(慶應大學) 법학연구회(法學硏究會), 1984)...한홍구(韓洪九), 「화북조선독립동맹(華北朝鮮獨立同盟) 의 조직과 활동」,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석사학위논문, ...1988.김영범(金榮範), 「조선의용대 연구(朝鮮義勇隊 硏究)」, 『한국독립운동사연구』2,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88..조동걸, 「조선의용군 유적지 태항산 연안을 찾아서」, 『역사비평』, 1992년 가을호..장세윤(張世胤), 「『해방일보(解放日報)』에 보도된 화북조선독립동맹의 활동(活動)」, 『오송이공범교수정년퇴임기념동양사논총(五松李公範敎授停年退任紀念東洋史論叢)』, 1993..염인호(廉仁鎬), 『조선의용군 연구(朝鮮義勇軍 硏究)-민족운동(民族運動)을 중심(中心)으로』, 국민대학교 국사학과 박사학위논문, 1994..

2) 염인호,.위의 학위논문, p.103.
3)「호가장전투(胡家莊戰鬪)」, 『신천지(新天地)』46년 3월호, p.226.
4)『독립』, 1943년 10월 27일자.
5) 해방후 46년 3월에 발간된 『신천지(新天地)』 독립동맹(獨立同盟) 특집(特輯)에서는 독립동맹(獨立同盟)의 활동가운데 호가장 전투와 5월 반소탕전을 부각시켜 싣고 있다.

6)『총결(總結)』 은 1942년 5월 5일자로 탈고되었고 작성한 장소는 진동남(晉東南), 즉 중공 팔로군(八路軍) 태행산(太行山) 근거지(根據地)였다. 이 『총결(總結)』은 화북조선청년연합회(華北朝鮮靑年聯合會)(이하 조청(朝靑)) 제2차대회(1942.7)를 준비하기 위해 작성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총결(總結)』은 화북지대(華北支隊) 결성과 조청과의 관계, 화북지대원의 40일간의 자체 토론(1941.7.7∼1941.8.15), 제1차공작 (간부훈련반(幹部訓練班) 활동(活動))과 제(第) 1차(次) 무장선전활동(武裝宣傳活動): 1941.8.16∼1941.10), 제2차 무장선전활동(1941.11∼1942.4) 그리고 제 2차 무장선전활동에 대한 평가 등 크게 다섯 부분으로 되어 있다.

7) 염인호(廉仁鎬), 앞의 학위논문, p.27.
8)『전맹내부의 의견분기(前盟內部의 意見分岐)』(이하 『분기(分岐)』), p.7
9)『분기(分岐)』, p.15.
10)『분기(分岐)』, pp.7∼8.

11)『분기(分岐)』, pp.16.
12) 39년 1월 15일 최창익은 1전구의 오민성(吳民星) 등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즉 "당면한 문제"(의용대 공작-필자에 "취미도 진진(津津)할가 하오나 우리조직(전맹-인용자)의 전도와 조선혁명 전체적 이해감을 고려하와 만사를 용감하게 원리대로 해결해주기를 성망(盛望)……".(『분기(分岐)』,p 19.)
13)『분기(分岐)』, p.15.
14) 염인호(廉仁鎬), 앞의 학위논문, p.48.
15) 이에 대해서는 강만길, 『조선민족혁명당과 통일전선』, 화평사(和平社), 1991,p. 247.

16)『분기(分岐)』, pp.21∼25.
17)『분기(分岐)』, p.26.
18) 최창익이 38년 12월 무렵 전맹 중앙위원 석성재(石成才)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연맹이고 무엇이고 서북에 오라" 는 말이 있었다고 한다(『분기(分岐)』, p.26.
19)『조맹보고초안(朝盟報告草案)』(1943년 12월) p.445. 이 문서의 집필자는 최창익으로 짐작된다.
20)『조맹보고초안(朝盟報告草案)』, p.447.

21) 위와 같음.
22) 탁목창지(鐸木昌之), 앞의 논문, p.73.
23)『조맹보고초안(朝盟報告草案)』, p.449.
24) 로민, 「청춘시절의 추억」『중국의 광활한 대지위에서』, "조선의용군발자취"집필조, 연변인민출판사, 연길, 1987(이하 『광활』, p.145.
25) 염인호(廉仁鎬), 앞의 학위논문, p.65.

26)『분기(分岐)』, p.4.
27)『분기(分岐)』, pp.12∼13.
28)『분기(分岐)』, p.13.
29)『분기(分岐)』, p.14.
30)『분기(分岐)』, p.17.

31)『분기(分岐)』, p.11.
32) 염인호(廉仁鎬), 앞의 학위논문, p.70.
33)『분기(分岐)』, p.24.
34)『분기(分岐)』, pp.29∼30.
35) 염인호, 앞의 학위논문, pp.61∼62.

36)『조맹보고초안(朝盟報告草案)』, p.449.
37)『총결(總結)』, p.1
38) 그러한 사실은 『해방일보(解放日報)』1944년 10월 20일자에서도 확인된다. 그 기사에 따르면 팔로군 교동 군구 정치부에서는 400여명의 참석하에 국경절(10월 10일)을 기념한 시사좌담회를 개최하였는데 이때 조선의용군(朝鮮義勇軍) 교동(膠東) 책임자 노해(노민-필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이전에 국민당군대와 어깨겯고 싸웠습니다. 우리는 일본놈들의 땅크장갑차를 까부셨고 일본놈들의 범아가리에서 국민당 군관을 구해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국민당 정부와 통수부에는 우리에게 해산하라는 명령을 내렸읍니다. 장개석은 자기의 심복인 강철(강택의 오기인듯-인용자)을 우리 조선 의용대에 보내었습니다. 강철은 '조선혁명은 마땅히 삼민주의를 원칙을 삼아야 한다'고 하면서 '만약 접수하지 않으면 다시는 원조해주지 않으며 중국 싸움터에서 싸우는 것을 허용하지 않겠다'고 을러메었읍니다.-(후략)(『광활』 pp.721∼722에서 번역수록).

39) 무림사변(茂林事變) 환남사변(晥南事變)의 경과는 다음과 같다. 장강이남(長江以南)에서 활동하였던 중공 신사군은 중공 중앙의 지시에 따라 양자강(陽子江) 이북으로 철수하기 결정하고 1941년 1월 4일부터 이동을 개시하였다. 그런데 이동중 신사군을 무림(茂林)에서 국민당 군대 7개 사단으로부터 습격을 받아 9,000여명의 병력 손실을 보았고 신사군(新四軍) 군장(軍長) 엽정(葉挺)은 포로가 되었고 부군장(副軍長) 항영(項英), 참모장 주자곤(周子昆), 정치부 주임 원국평(袁國平) 등이 전사하였다. 이 사변으로 제2차 국공합작은 사실상 파탄되었다.(육호관(肉戶寬), 『항일전쟁시기(抗日戰爭時期)の팔로군(八路軍), 신사군(新四軍)』, 『중국팔로군(中國八路軍), 신사군사(新四軍史)』, 하출서방신사(河出書房新社), 동경(東京), 1988, pp.94∼95).

40)『해방일보(解放日報)』 1942년 5월 12일자(국가보훈처(國家報勳處), 『해외(海外)의 한국독립운동사료(韓國獨立運動史料)』(5)-중국편 , 1992, p.247 수록)
41) 스칼라피노·이정식, 『한국공산주의운동사』1, 돌베개, 1986, p.242.
42) 삼천전소(森川展昭), 앞의 논문, p.32 : 심지연, 『조선신민당연구(祖先新民黨硏究)』, 동녘, 1988. p.30. 삼천전소(森川展昭)에 따르면 북상한 의용대원들이 기존의 조선의용대 화북지대에 가담하게 되면 조선의용대장 김원봉이 북상한 대원들에 대한 통제권을 잃게 된다고 하였다(같은 논문, p.35.)
43) 대표적인 것으로 41년 8월 무정을 교장으로 하는 화북조선혁명청년학교가 개설되었다는 내용을 들 수 있다(『재지불령선인단체계통표(在支不逞鮮人團體系統表)』『특고월보(特高月報)』, 43년 1월호). 이점은 뒤에서 다시보기로 한다.
44)『총결(總結)』, p.2.
45)『재지불퇴선인단체계통표(在支不退鮮人團體系統表)』, 『특고월보(特高月報)』, 1943년 1월호.

46) 김준엽, 김창순, 『한국공산주의운동사』, 제5권, p.112. 한편 심지연은 "조선의용군"이 아닌 "조선의용대"화북지대로 명명했던 이유의 하나는 국민당 정부에 대해 임정과 김원봉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한 조처로 파악하였다(심지연,앞의 책, pp.30∼31).
47) 심지연, 앞의 책, pp.221∼224.
48) 염인호(廉仁鎬), 앞의 학위논문, p.67.
49) 한홍구(韓洪九), 앞의 논문, p.40.
50) 김영범(金榮範), 앞의 논문, p.505.

51)『재지불령선인단체계통표(在支不逞鮮人團體系統表)』, 『특고월보(特高月報)』, 43년 1월.
52)『총결(總結)』, p.9.
53)『조맹보고초안(朝盟報告草案)』, pp.503∼504.
54)『조맹보고초안(朝盟報告草案)』, p.504.
55)『총결(總結)』, p.3. 진광화(陳光華)는 조청 진기예지회 지회(조선의용대 지회) 회장이었고 노민은 낙양에서 의용대원의 북상을 주도했던 사람이었다.

56)『홍성걸(洪性杰)에 대한 민족혁명당 관계』, 『독립운동사 자료집』(별집 3),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8, p.360.
57)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위의 책, p.360.
58) 양소전(楊昭全) 등편(等編), 『관내지구조선인반일독립운동자료휘편(關內地區朝鮮人反日獨立運動資料彙編)』하(下), 요녕민족출판사, 심양, 1987, p.832 : 같은책, p.844.
59)『조맹보고초안(朝盟報告草案)』, p.451.
60)『조전맹보고초안(朝盟報告草案)』, p.452.

61)『조맹보고초안(朝盟報告草案)』, pp.458∼459.
62) 염인호, 앞의 학위논문, p.104.
63) 해방후 한국독립당은 김학규를 한국독립당 동북특파원으로 임명하여 파견하였는데 김학규는 이후 동북에서 당지 부 건립에 성공하여 한국독립당 동북지부 위원장에 취임한 사례가 있다.
64) 김두봉(金枓奉)의 팔로군 지역 이동에 대해 여러가지 설이 있지만 그가 민혁당 고위 간부로서 김원봉과 행동을 밀접히 해온 사람이란 점에서 또 그가 김원봉 부인 박차정(朴次貞)과 인척간이었고, 딸 상엽을 김원봉에게 맡기고 출발했다는 점에서 그의 북상은 김원봉과의 합의속에서 이루어진 것이 틀림없어 보인다.
65) "조선민족혁명당중요간부간명이력표(朝鮮民族革命黨重要幹部簡明履歷表)"

66)『조맹보고초안(朝盟報告草案)』, p.461.
67)『조맹보고초안(朝盟報告草案)』, p.504.
68)『총결(總結)』, p.3
69) 위와 같음.
70) 위와 같음.

71)『총결(總結)』, p.4.
72) 위와 같음.
73) 위와 같음.
74) 위와 같음.
75)『총결(總結)』, p.3.

76)『총결(總結)』, p.30.
77)『총결(總結)』, p.12.
이후 오랫동안 조선의용대(조선의용군) 화북지대 산동(山東) 부대(部隊)는 화북지대 제1대(第1隊), 화북지대 진찰기(晉察冀) 부대(部隊) 는 화북지대 제2대(第2隊)로 불리웠다. 화북지대는 제2차 무장선전활동 때 태항산 근거지에서 화북지대(華北支隊) 제1, 2, 3대(第1, 2, 3隊)를 조직하므로써 명칭상의 중복과 혼란을 초래하고 있는데 이 제1, 2, 3대는 제2차 무장선전활동 기간(1941.11∼1942.3) 한시적으로만 존재했다.
78)『진찰기일보(晉察冀日報)』41년 12월 11일자, 17일자(국가보훈처(國家報勳處), 앞의 책, pp.230∼234).
79) 탁목창지(鐸木昌之). 앞의 논문, p.78.
80) 『특고월보(特高月報)』에 따르면 41년 9월에 설립된 화북조선청년학교(華北朝鮮靑年學校)(요현(遼縣) 소재)의 교장은 무정(武亭), 부교장은 진광화(陳光華), 교사는 왕지연(王志延) 이건우(李建宇) 석정(石正) 박무(朴茂) 박효삼(朴孝三)이며 개교는 42년 1월이라고 하고 있다(재지불령선인단체조직계통표(在支不逞鮮人團體組織系統表), 『특고월보(特高月報)』, 43년 1월호)

81) 『총결(總結)』, p.4~5.
82) 신한청(愼韓靑)(신억(申憶))은 회고록에서 학교 교장은 박효삼(朴孝三), 정치위원은 최창익(崔昌益)(이건우), 교원으로는 최창익(崔昌益) 김학무(金學武) 한빈(韓斌)(왕지연(王志延) 윤세주(尹世胄)(석정(石正)) 진광화(陳光華) 박무(朴茂) 등이 참가했다고 하였다.(신한청(愼韓靑) 『재중관내조선인민적항일구국운동화조선의용군(在中關內朝鮮人民的抗日救國運動和朝鮮義勇軍)』 6, 1992, 미간행, p.989). 학교의 정식 명칭이 『총결(總結)』에서 조선의용대 간부훈련반으로 나와 있는 점으로 보아 이 학교의 교장은 조선의용대의 최고 간부 박효삼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화북조선청년학교(華北朝鮮靑年學校)(교장 무정(武亭))는 42년 11월에 태행산(太行山)에 건립되었다.
83) 『총결(總結)』, p.5
84) 『총결(總結)』, p.5~6

중앙항일운동 대학(中央抗日運動大學) 에서는 전술(戰術), 정치학(政治學), 경제학(經濟學) 및 철학(哲學) 등을 교수하였는데 주요 과목과 교재 편찬자(괄호안)는 다음과 같다. 군사방면 (1) 전략론(戰略論)(항대편(抗大編)), (2) 기본전술(基本戰術)(항대편(抗大編)), (3) 유격전술(遊擊戰術)(항대편(抗大編)) 정치경제방면(政治經濟方面) (1)정치상식(政治常識)(소련번역본(蘇聯飜譯本)) (2) 정치학강요(政治學綱要)(진찰기변구정부주도(晉察冀邊區政府主度) 임박거 저(林泊渠 著) (3) 정치경제학(政治經濟學)(침지원 저(沈志遠 著)) (4) 민족통일전선(民族統一戰線)(항대편(抗大編)) (5) 2월혁명과 10월혁명(소련번역본(蘇聯飜譯本)) (6) 좌익소아병(左翼小兒病)(레닌) (7) 인류사회발전사(人類社會發展史) (8) 무산계급(無産階級) 혁명(革命) 의 필연성(必然性)(소련번역본(蘇聯飜譯本)) (9) 제국주의(帝國主義)(항대편(抗大編)) (10) 당(黨)의 주장(主張) 등이었고 철학방면(哲學方面)은 (1) 변증법적(辨證法的) 유물론(唯物論)(마르크스) (2) 신철학대강(新哲學大綱)(모택동 저(毛澤東 著)) 등이었다(동경형사지방재판소검사국(東京刑事地方裁判所檢事局). 앞의 글, p. 128-128)

85) 『총결(總結)』, p.6
86) 위와 같음.
87)『총결(總結)』, p. 5∼6
88)『총결(總結)』, p. 6
89)『총결(總結)』, p. 5
90) 과외교육의 구체적인 내용은 『총결(總結)』, p. 7 참조.

91) 육호관(肉戶寬), 「팔로군(八路軍), 신사군(新四軍)の실상(實相)」, 육호관(肉戶寬) 외 『중국팔로군(中國八路軍), 신사군사(新四軍史)』, 하출서방신사(河出書房新社), 동경, 1988, P.479.
92) 동경형사지방재판소검사국(東京刑事地方裁判所檢事局), 앞의 글, p. 127
93) 42년 3월에 발간된 『특고월보(特高月報)』에 따르면 일제는 조선의용대가 소총 100정, 권총 20정, 수류탄 약간을 소지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특고월보(特高月報)』, 42년 3월호, p.212).

94) 중국공산당은 38년 11월의 6중전회(中全會)에서 모택동의 보고연설에 기초하여 "중국(中國) 목전(目前) 의 항전형세(抗戰形勢) 및 목전(目前)의 긴급임무(緊急任務)에 관(關)한 결의(決意)"를 채택하였는데 그 제4항에서 "광대한 적후방에 유격전쟁을 발전시켜 보다 많은 항일근거지를 건립 공고히 하여, 적의 점령구역을 축소시키고 아울러 주력군의 작전에 배합한다"고 규정하엿다.(동경형사지방재판소검사국(東京刑事地方裁判所檢事局), 앞의 글, p.65).
95) 제1차 무장선전대의 활동은 『해방일보(解放日報)』 41년 10월 7일자(국가보훈처(國家報勳處), 앞의 책, p.445)와 『해방일보(解放日報)』41년 10월 (국가보훈처, 앞의 책, p.445 : 『광활』,p.684)에서 일부 전하고 있다.
96) 제2차 무장선전활동은 원래는 3개월을 예정하였다. 그러나 일제가 42년 2월 대대적으로 소탕전(제1차 소탕전)을 감행해옴에 따라 무장선전활동은 자연 소탕전이 끝나는 3월 말까지 연장되었던 것이다.
97) 『총결(總結)』, p.12.
98) 『총결(總結)』, p.12-13.
99) 김홍일(金弘壹), 『대륙(大陸)의 관노(慣怒)-노병(老兵)의 회상기(回想記) 』, 문조사(文潮社), 1972, p.340.
일본군은 중국군의 끈질긴 저항에 부딛쳐 9월 30일부터 패퇴하기 시작, 10월 8일 원진지로 후퇴하였다. 이 전투를 제2차 장사회전(長沙會戰)이라 한다.
100) 민혁당 총서기 김원봉이 44년에 민혁당 재미 간부 이경선에게 보낸 편지에서조차 그러한 내용을 담고 있다.

101) 『진찰기일보(箕察晉日報)』41년 12월 17일자(국가보훈처(國家報勳處), 앞의 책, p.231)
. 102) 화북지대 출신 김학철(金學鐵)의 회고에 따르면 히틀러의 진격작전으로 소련군의 방어선이 하나하나 무너지자 그것은 의용대원들의 사기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김학철, 『최후의 분대장』, 문학과 지성사, 1995, p.253).
103) 김학철의 회고에 따르면 독소전쟁이 터지자 일본 제국주의가 북진하지 못하도록 이를 견제하는 일이 자신들에게도 주어졌으며 그것은 국제주의적 의무였다고 한다.(김학철, 앞의 책, p.251)> 이때는 소련으로서 전무후무한 시련기였는데 소련은 중공이 이 어려운 때 적극적으로 도와주지 않은데 대해 매우 섭섭해 했고 그래서 일제 패망후 중공을 한때 홀시했다고 한다.
104) 해방일보(解放日報) 41년 9월 22일자.
105) 해방일보(解放日報) 41년 11월 1일자(양소전(楊昭全) 등편(等編), 앞의 책, p. 1466)

106) 위와 같음.
107) 위와 같음.
108) 양소전(楊昭全) 등편(等編), 앞의 책, p.1125.
109)『총결(總結)』, p.13.
110)『총결(總結)』, p.22.

111)『특고월보(特高月報)』, 42년 8월호
112)『총결(總結)』, p.22
113)『총결(總結)』, p.23.
114)『총결(總結)』, p.13-14. 팔로군(八路軍) 태행군구(太行軍區)의 사령은 유백승(劉伯承) 정치위원은 등소평(登小平)이었다.(동경형사지방재판소검사국(東京刑事地方裁判所檢事局), 앞의 글, 별표 제구(別表 第九))
115) 『총결(總結)』, p.13.
한편 대원은 최지남(崔指南) 이한중(李漢中) 윤치평(尹治平) 한철익(韓鐵翼) 유상곤(劉相坤) 오주승(吳柱昇) 차용철(車鏞徹) 최아립(崔亞立) 하0당(夏0堂) 이문호(李文浩) 김기억(金基億) 장중진(張重鎭) 최봉원(崔鳳元) 김성만(金成萬) 왕자인(王子仁) 관건(關建) 왕련(王連) 민0호(閔0鎬) 등이었다(「재지불영선인단체조직계통표(在支不逞鮮人團體組織系統表)」, 『특고월보(特高月報)』 1943년 1월)

116) 『총결(總結)』, p.17.
117) 『총결(總結)』, p.13.
제1대 대원은 제1분대원으로 최경원 장예신(張禮信) 허금산(許金山) 김흠(金) 한청도(韓淸道) 최봉록(崔鳳錄) 고상철(高相喆) 봉오식(奉五植) 신용순(申容純) 김0(金0)등이었고 제2대원으로는 김학철(金學鐵) 박철동(朴喆東) 왕현순(王現淳) 조소경(趙少卿) 문명철(文明哲) 송은산(宋銀山) 김성국(金聖國) 곽동서(郭東曙) 조관(趙寬) 등이 있었다.
(「재지불영선인단체조직계통표(在支不逞鮮人團體組織系統表)」, 『특고월보(特高月報)』 1943년 1월)
118) 『총결(總結)』, p.19
119) 『총결(總結)』, p.13.
대원은 김운국(金雲國) 신억(申憶) 김0(金0) 진국0(陳國0) 이종철(李鐘哲) 이화림(李華林) 강자생(姜子生) 장평산(張平山) 이동호(李東浩) 주문0(朱文0) 양계(楊界) 등이었다(「재지불영선인단체조직계통표(在支不逞鮮人團體組織系統表)」, 『특고월보(特高月報)』 1943년 1월) 한편 제1·2·3대에 속하지 않았던 사람들로 유수대(留守隊, 대장 여운길(呂運吉))가 구성되었는데 대원은 아래와 같다. 남자로서는 최창익(崔昌益) 왕지연(王志延) 장진광(張振光) 권손(權孫) 마춘식(馬春植) 이경민(李經民) 양민산(楊民山) 이달(李達) 이대성(李大成) 이철준(李哲俊) 박성호(朴成浩) 김평(金平) 촌상(村尙) 신태식(申泰植) 호일화(胡一華) 0광(0廣) 주연(朱然) 장지민(張志民) 여자대원으로는 문정원(文正元) 장수연(張秀廷) 조명숙(趙明淑) 권혁(權赫) 등이었다.(「재지불영선인단체조직계통표(在支不逞鮮人團體組織系統表)」, 『특고월보(特高月報)』 1943년 1월).

120) 동경형사지방재판소검사국(東京刑事地方裁判所檢事局), 앞의 글, p.67.
121) 동경형사지방재판소검사국(東京刑事地方裁判所檢事局), 앞의 글, p.68. 중공이 중국민중에 대해 선전했던 내용. 선전 방침과 방법 등은 같은 글, pp.68-79에 자세히 나와 있다.
122) 제1차 무장선전대가 전개한 좌담회 연환회 군중대회 습격전 참가 등 주요 행적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이 일지에서는 의용대원들의 숨가쁘게 전개되었던 활동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9/17 안양현(安陽縣) 제8구 정부 공작인원과 일차 좌담회(座談會)
9/17저녁 서방좌(西傍佐)에서 신1여 1단 지전원(新1旅 1團 指戰員) 500여명과 연환대회(聯歡大會)
9/18 적(敵)의 공로 수리 방해를 위한 팔로군의 매복 습격전에 참가
9/19 적선군중대회(積善群衆大會)
9/21 적(敵)의 봉쇄구(封鎖溝) 파괴 작전에 참가

9/21 서방좌(西傍佐) 팔구(八區) 정부(政府) 소재지(所在地) 에서 장북현(北縣) 제(第) 8구(區) 각촌민대표와 9·18기념대회 및 전사동지추도대회 (戰死同志追悼大會)
9/25 안양(安陽) 6구서(區署) 와 좌담회(座談會)
9/25 석림구(石林口)에서 6촌(村) 민중대회(民衆大會)
9/27 하장(下庄)에서 6촌(村) 민중대회(民衆大會)
9/28 수치성(水治城)과 황가둔(黃家屯) 적 보루(堡壘) 습격전에 참가

9/29 복두(卜頭)에서의 4촌(村) 민중대회(民衆大會)
9/29하오 청욕(淸)에서의 5촌(村) 민중대회(民衆大會)
9/30 동방좌(東傍佐)에서 7촌(村) 민중대회(民衆大會)
9/30하오 공광(公)에서 4촌(村) 민중대회(民衆大會)
10/1상오 진수촌(陳水村) 민대회(民衆大會)

10/1하오 도리촌(都里村) 민중대회(民衆大會)
10/4 천문(泉門)에서 안양 항일정부공작 인원 등과 좌담회(座談會)
10/5저녁 양유장(羊臾庄)에서 신1여 1단 지전원 500여명과 연환회(聯歡會)
10/10 서왕착(西王着)에서 6촌(村) 민중대회(民衆大會)
10/10 청년대 등과의 좌담회(座談會)

10/12 자현 중가벽(磁縣 中賈壁)에서 현정부, 구망단체(求亡團體), 소학교(小學校) , 청년대(靑年隊) 인사들과 좌담회(座談會)
10/14 백두진(白頭鎭)에서 4촌(村) 민중대회(民衆大會)
10/15 북가벽(北賈壁) 민중대회(民衆大會)

123) 『총결(總結)』, p.10.
124) 『총결(總結)』, p.22.
125) 『총결(總結)』, p.10.
126) 장례신, 「피어린 그날의 싸움」, 『광활』, p.285.
127) 『총결(總結)』, p.10.
128) 『총결(總結)』, p.22.
129) 위와 같음.
130) 동경형사지방재판소검사국(東京刑事地方裁判所檢事局), 앞의 글, p.139.

131) 위와 같음.
132) 중공측이 일본군 장병을 향해 전개했던 선전의 구체적 내용은 위의 글, pp.140-141 참조.
133) 동경형사지방재판소검사국(東京刑事地方裁判所檢事局), 앞의 글, p.140.
134) 동경형사지방재판소검사국(東京刑事地方裁判所檢事局), 앞의 글, p.143. 녹지호(鹿地互)의 활동에 대해서는 같은 글, pp.190-191 참조.
135) 동경형사지방재판소검사국(東京刑事地方裁判所檢事局), 앞의 글, p.143.

136) 『총결(總結)』, p.22.
137) 『총결(總結)』, pp.14-15.
봉쇄구(封鎖溝)(봉쇄선(封鎖線))는 팔로군 근거지와 일본군 점령지 사이의 교통관계를 차단하고 특히 기근에 시달리는 팔로군 근거지로 물자가 들어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일본군이 중국민중을 동원하여 만든 구덩이다. 대체로 넓이는 20여자, 깊이가 10여자되었고 그 위에 풀잎 등으로 덮어 위장해 놓았는데 한번 떨어지면 빠져 나오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일본군은 팔로군 근거지 주변에 4중 5중으로 봉쇄구를 팠는데 총 연장 길이는 만리장성의 10배에 달했다고 한다.(서병곤(徐丙坤), 「1942년(年) 5월(月) 반소탕전(反掃蕩戰)」, 『신천지(新天地)』 1946년 3월호)
138) 『총결(總結)』, p.15.
139) 『총결(總結)』, p.18.
140) 『총결(總結)』, p.19.

141) 『총결(總結)』, pp.20-21. 일본인각성연맹(日本人覺醒聯盟)에 대해서는 동경형사지방재판소검사국(東京刑事地方裁判所檢事局), 앞의 글, p. 191 참조.
142) 『총결(總結)』, p.17.
143) 『특고월보(特高月報)』 42년 3월호 p.212에 따르면 조청 화북지대의 공작 방침을 "중국공산군과 늘 밀접한 연락을 유지하고 또 동북항일군(재만주)와도 연락하여 일본군 점거지내 잠입하여 화북재주 20만 조선인 특히 그 청년층을 획득하여 장래 이로써 조선공산당의 전선으로 하고자 함" 이라고 하였다.
144) 『총결(總結)』, p.13.
145) 『총결(總結)』, p.22.

146) 『진찰기일보(晉察冀日報)』41년 12월 11일자, 17일자(국가보훈처(國家報勳處), 앞의 책, pp.230-234).
147) 『총결(總結)』, p.15.
148) 『총결(總結)』, p.16.
149) 『총결(總結)』, p.11.
150) 『총결(總結)』, p.16.

151) 『총결(總結)』, p.17. 의용대의 선전이 조선인 통역들에게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은 김학철, 앞의 책, p.236에서도 확인된다.
152) 『총결(總結)』, p.26.
153) 『총결(總結)』, p.23.
154) 위와 같음.
155) 위와 같음.

156) 『특고월보(特高月報)』. 1942년 3월호 pp.213-214에 따르면, "작년(1941년-인용자) 말 동대원(同隊員)(조선의용대원-인용자) 김창만(金昌萬) 외 22명이 중요 임무를 띄고 북경(北京) 기타 요지로 밀파(密派)된 모양인데 그들 종래의 불령책동(不逞策動) 및 행선지 불명(行先地 不明)의 김택(金澤) 외 2명 등에서 추찰(推察)하건데 금후(今後) 어떠한 불온사단(不穩事端)이 야기될지 추측하기 어려워 그 동향에 대해서는 엄중 경계를 요한다고 사료되는 바이다. "고 하고 19명의 행선지를 각각 밝히고 있다. 북경방면은 김창만(金昌萬) 김위(金위) 조련(趙連) 심성택(沈聖澤) 진동명(陳東明) 김무(金武) 임평(林平) 고생호(高生鎬), 하북성(河北省) 방면은 최계원(崔啓源), 봉학(奉學), 하남성(河南省) 방면은 김파륜(金巴崙) 이철(李哲) 강진세(姜振世) 호유백(胡維伯) 최영(崔英) 양계(陽界), 청도(靑島)방면은 주혁(朱赫), 상해방면은 강홍구(姜弘九) 이소민(李蘇民), 호북성(湖北省) 종상현(鐘詳縣) 방면은 김해암(金海岩) 등이며 행선지(行先地) 불명자(不明者)는 김택(金澤) 심성운(沈星雲) 조열광(趙烈光) 등이었다.

157) 『총결(總結)』p.31. 구체적으로는 제1대의 경우 적통역관 및 적구'유력(有力)' 신사(紳士)와의 연계에서 그러했으며 제2대의 경우 찬황(贊皇) 임성(臨城)의 조선 청년과의 연계에서 그리고, 제3대의 경우 황협군(皇協軍)의 대대장과의 관계에서 그러했다는 것이다.
158) 그 비판 내용은 아래와 같다. 첫째 조사공작 선전공작 조직공작이 상호 결합되지 못하였고 둘째 통일적 지도 없는 가운데 각 공작원의 자유행동을 방임하였으며 세째 공작비 낭비가 심했고 네째 비밀 엄수 기술 연구가 미비했으며.다섯째 공작원이 일정 지역서 고정되어 활동하지 않고 일종의 여행형식으로 배회하였다.(『조맹보고초안(朝盟報告草案)』, pp.484-485.

159) 『총결(總結)』p.22.
160) 제2대원이었던 장례신의 회고에 따르면 공작 임무를 받고 동욕을 떠난 제2대원 23명은 주야로 강행군하여 이틀후에 200키로미터나 떨어진 원씨현(原氏縣) 경내에 도착하였다고 한다(장례신, 앞의 글, p. 285).
161) 『총결(總結)』p.17.
162) 『총결(總結)』p.18.
163) 위와 같음.
164) 위와 같음.
165) 전투 발발 원인과 경과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해서는 약간씩 차이를 보이고는 있지만 다음과 같은 자료에서도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독립』43년 10월 27일자 : 『신천지(新天地)』46년 3월호, p.223: 김학철, 앞의 책. pp.270-275.

166) 『총결(總結)』p.18.
167) 『총결(總結)』p.23.
168) 『총결(總結)』p.21.
169) 서병곤(徐丙坤), 앞의 글, p.212.
170) 서병곤(徐丙坤), 앞의 글, p.213.

171) 서병곤(徐丙坤), 앞의 글, p.215.
172) 서병곤(徐丙坤), 앞의 글, p.216. 진광화 윤세주의 전사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항일전투(抗日戰鬪)의 희생자(犧牲者) -민족(民族)의 꽃.김창화 씨(金昌華 氏)」, 『신천지(新天地)』 46년 3월호, pp.227-229 참조. 5월 반소탕전에서 그밖에 호철명(胡哲明)이 전사했다.
173) 『총결(總結)』p.27.
174) 『총결(總結)』p.26-27.
175) 『총결(總結)』p.26.

176) 염인호(廉仁鎬), 앞의 학위논문, pp.99-100.
177) 염인호(廉仁鎬), 앞의 학위논문, p104.
178) 위와 같음.
179) 『조맹보고초안(朝盟報告草案)』작성자는 1943년 들어와 조맹 각 부문 공작이 조맹 상무위원회나 집행위원회를 거치지 않고 이루어지고 있으며 또 조직계통을 거치지 않고 개인에 의해 독립동맹 군중대회가 소집되고 있는 등 조맹내 민주주의가 붕괴되고 있음을 비판하고 있다. 이 작성자(최창익으로 추정)는 구체적으로 거명하고 있지는 않지만 무정의 독단 행위를 비판한 것임이 분명하다. 무정은 그러한 독단적 행위를 중공이 당시 광범위하게 전개하고 있던 정풍운동의 이름으로 전개했던 것으로 보인다(『조맹보고초안(朝盟報告草案)』, pp.500-503).
180) 『조맹보고초안(朝盟報告草案)』pp.504-505. 그 이유는 독립동맹은 군중단체이므로 조선의용군을 지도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비록 무정의 요구가 받아들여졌지만 이에 대한 반발은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동방동맹 또한 군중.단체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181) 조선의용대를 지도하기 위해 연안이 아닌 태항산으로 온 김두봉(金枓奉)이 독립동맹 결성직후 연안으로 이동한 이유는 김학무의 사망 문제와 함께 앞으로 밝혀야 할 과제의 하나이다.
182) 『조맹보고초안(朝盟報告草案)』. p.505.
출처 : 살맛 나는 세상이야기들...
글쓴이 : 크레믈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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