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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한국독립군(韓國獨立軍)의 항일무장투쟁(抗日武裝鬪爭) 연구(硏究)

by 8866 2006. 5. 22.
한국독립군(韓國獨立軍)의 항일무장투쟁(抗日武裝鬪爭) 연구(硏究)

장 세 윤(張 世 胤)*

Ⅰ . 머 리 말

Ⅱ. 재만(在滿)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및 한국독립군 (韓國獨立軍)의 결성(結成)
1. 3부통합운동(三府統合運動)의 전개(展開)
2.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의 결성(結成)
3. 한국독립군(韓國獨立軍)의 조직(組織)

Ⅲ. 한국독립군(韓國獨立軍)의 한중연합(韓中聯合) 반만항
일전투(反滿抗日戰鬪) 1. 일제(日帝)의 중국동북지방(中國東北地方) 침략(侵略)과 각종반만항일군(各種反滿抗日軍)의 봉기 (蜂起)
2. 서난현전투(舒蘭縣戰鬪)
3. 한국독립군(韓國獨立軍)의 재편(再編) 및 강화(强化)
4. 쌍성보전투(雙城堡戰鬪)
5. 경박호전투(鏡泊湖戰鬪)
6. 사도하자전투(四道河子戰鬪)
7. 동경성전투(東京城戰鬪)
8. 대전자령전투(大甸子嶺戰鬪)
1) 전투개황(戰鬪槪況)
2) 전과분석(戰果分析)

Ⅳ. 동녕현성전투(東寧縣城戰鬪)와 한국독립군 활동의 종언
1. 동녕현성전투(東寧縣城戰鬪)
2. 한국독립군 활동의 종언(終焉)

V . 한국독립군(韓國獨立軍) 항전(抗戰)의 특징(特徵)과 그 의의(意義)

Ⅵ. 맺음말

Ⅰ.머리말

최근 한국근·현대사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이 고조되면서 독립운동사에 관한 연구도 활발히 진행되어 많은 연구업적이 축적되어 가고있다. 그러나, 우리민족의 독립운동 형태중 가장 직접적이며 적극적 투쟁방식인 무장독립운동에 대한 연구는 아직도 많은 미해결의 과제를 남기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1930년대에 중국동북(東北)지방1) 에서 활약한 한국독립군(韓國獨立軍)이나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 그리고 중국공산당(中國共産黨) 만주성위원회(滿洲省委員會) 산하에서 활동한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후일의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내의 한인(韓人) 무장세력 등에 관한 체계적 연구는 별로 없는 실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을 야기한 가장 큰 이유는 자료의 부족과 외적(外的) 제약(制約) 등 연구환경의 어려움 때문이라고 생각되기도 하지만, 연구자들의 안일한 자세나 무관심에서 비롯된 측면도 없지 않다.

....1930년대 초 중국동북에서 활약한 대표적 한인(韓人) 무장세력으로는 한국독립당의 한국독립군과 조선혁명당의 조선혁명군을 꼽을 수 있다. 1931년 9·18사변(소위‘만주사변(滿洲事變)’) 이후 1932년 3월(月) 이른바‘만주국(滿洲國)’이 수립되자 중국동북지방의 민중들은 1940년대 초반까지 광범한 반만주국(反滿洲國)·항일운동(抗日運動)을 전개하였다. 한국독립군은 1932∼3년 동만(東滿) 및 북만(北滿)2) 지방에서, 조선혁명군은 1930년대 초∼1937·8년까지 주로 남만(南滿)의 동변도(東邊道)3) 지방에서 각각 중국의 반만항일군(反滿抗日軍)과 연합하여 일제(日帝)와 투쟁하였다.

.... 이들 양대 민족주의계4) 무장집단은 한(韓)·중합작(中合作)의 형태를 취하며 괴뢰 만주국군 및 일본군과 항전하여 많은 전과를 거두었다. 국민부(國民府) 및 조선혁명당·조선혁명군에 대한 연구가 많지는 않지만 몇몇 연구자들에 의해 꾸준히 진행되고 있음에 비하여5) 재만(在滿) 한국독립당 및 한국독립군에 관한 연구는 크게 미흡한 실정이다.6) 특히 한국독립군이 큰 역할을 한 대전자(大甸子)전투는 일본군에 큰 타격을 가하는 주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실상(實相)이 구체적으로 규명되지 않고 있다.

....이에 필자는 그동안 별로 주목받지 못했던 재만 한국독립당 계열 한국독립군의 항일(抗日)무장투쟁을 조명 해보고자 한다. 한국독립군의 주요인사(人士)들은 내외적으로 처한 어려운 환경―일(日)·만(滿)군경의 발호와 중(中)·한인(韓人) 공산주의 세력의 확산, 그리고 이에 따른 지지기반의 상실 등―때문에 동만(東滿)지방에서의 활동을 중단하고 1933년 말(末)에 중국관내(中國關內)로 이동하였다. 이들은 대부분 후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광복군에 합류하게 된다.

....그러므로, 한국독립군 항쟁(抗爭)의 실태를 밝히고 그 의의를 규명하는 작업은 해외무장독립운동의 맥락(脈絡)을 파악하고 독립운동 전통의 강인한 지속성과 일관성을 확인하는 의미있는 과정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또 한국독립군의 한중연합작전(韓中聯合作戰)은 일제(日帝)의 중국동북지방 침략으로 형성(形成)된 동아시아 민중의 반(反)파시즘·반제연합전선(反帝聯合戰線)이라는 시각에서도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된다.

....본고(本稿)에서는 이를 위하여 먼저 재만(在滿)한국독립당과 한국독립군의 조직과정을 간략히 살펴본 뒤 중국의 반만항일의용군(反滿抗日義勇軍)과 합작(合作)하여 전개한 한국독립군의 주요전투를 집중적으로 고찰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어서 한국독립군 활동의 종료과정과 주요인물의 중국본토(本土)로의 남하(南下),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中央陸軍軍官學校) 낙양분교(洛陽分校)로의 편입과정 등을 살펴봄으로써 한국독립군 활동의 특징과 의의를 규명해 보고자 한다. 그런데, 필자는 한국독립군의 주요전투 가운데 특히 대전자령(大甸子嶺)전투의 실상을 밝히는 데 많은 비중을 두고자 한다.

....근래 독립운동사 연구의 방법론(方法論)을 둘러싸고 좌익운동도 민족운동(民族運動)의 일부분이라는 입장에서 연구하여야 하며, 독립운동의 흐름을 거시적으로 파악하여 성격(性格)의 변화나 발전단계를 추적하여야 한다는 의견이 제시되고 있다.7) 필자도 여기에는 공감하는 바이다. 무장항쟁사를 연구할 때는 단순한 전투사의 나열이나 사실규명에 그치지 않고 여러 가지 사실을 종합하여 그 의미(意味)를 추출하고 독립군 단체·조직의 성격이나 이념(理念), 존립의 사회경제적 기반, 참가계층의 출신배경이나 성격분석 등에 보다 더 큰 비중을 두어야 함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그러나, 한국독립군을 비롯하여 조선혁명군 등 1930년대 중국동북에서 활약한 무장독립운동세력의 투쟁에 대하여는 최소한의 기본적 사실조차 구체적으로 해명되지 않고 있다고 판단된다.

따라서, 필자는 일본 외무성문서 등 새로운 자료를 활용하여 우선 한국독립군 항쟁의 정확한 사실 규명에 이 글의 초점을 맞춘 뒤, 그러한 사실들이 뜻하는 바를 밝혀 한국민족운동상에서의 위치를 재검토하고자 한다.

Ⅱ. 재만(在滿)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의 결성(結成)

1. 3부통합운동(府統合運動)의 전개(展開)

....1920년대 후반 중국관내(中國關內)에서는 제민족운동(諸民族運動) 정당(政黨)·단체(團體)들 사이에 민족유일당(民族唯一黨) 조직운동이 전개되고, 국내에서도 신간회(新幹會) 운동이 활발하게 추진되고 있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동(東)·남(南)·북만(北滿) 지역에 정립(鼎立)하고 있던 참의부(參議府)·정의부(正義府)·신민부(新民府) 등의 독립운동 단체들도 1925년 삼시협정(三矢協定) 8) 체결이후 중국관헌의 탄압이 심화되고, 공산주의 세력이 확산되는 가운데 중국동북지역 한인(韓人)들의 효율적인 장악과 권익옹호, 그리고 적극적이며 효과적인 대일투쟁(對日鬪爭)을 추구하기 위해 민족유일당(民族唯一黨)을 조직함으로써 3부(府)를 통합코자 하였다.

....이러한 민족유일당 조직문제는 먼저 정의부(正義府)측에서 제기되었다. 그리하여 민족유일 당 조직문제를 토의하기 위한 회의가 1928년 5월 길림성(吉林省) 화전(樺甸), 반석현(磐石縣) 등지에서 정의부를 비롯한 18개 단체 대표들이 회합한 가운데 「전민족유일당조직촉성회의(全民族唯一黨組織促成會議)」라는 명칭으로 개최되었다.9) 이 때 참의부와 신민부 대표는 참석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 회의는 유일당 결성의 방법론의 차이―단체본위·단체중심(中心)·개인본위 조직론 등―와 유일당에 대한 참가단체들의 태도차이 등으로 인하여 회의 참가자들은 「전민족유일당 조직촉성회」측과 「전민족유일당 조직협의회」 측으로 양분되어 회의는 결렬되고 말았다.10)

....이같이 전민족유일당 조직회의가 실패로 끝난 뒤 「협의회」측의 주도단체인 정의부(正義府)는 유일당 조직회의에 참석치 못하였던 참의부·신민부와의 통합을 모색하였다. 이리하여 동년(同年) 9월 길림(吉林)에서 3부(府)통합을 위한 2차 회의가 시도되었는데, 여기에는 3부대표가 회동(會同)하였다. 그러나 이때도 신민부·참의부 대(對) 정의부의 의견대립, 신민부 군정파(軍政派)와 민정파(民政派)의 내분(內紛), 참의부의 대표(代表)소환 문제등이 얽혀 정식회의는 개최되지도 못하였다.11) 결국 일종의 군사(軍事), 행정(行政), 지방정부적(地方政府的) 성격(性格)을 띠고 있던 3부(府)의 통합운동이 좌절됨에 따라 민족운동의 역량강화라는 당면과제의 실현은 어렵게되었다.

....3부(府)통합운동이「협의회」와「촉성회」로 대립되어 실패한 후 양측은 서로 다른 유일당(唯一黨)·군(軍)이 조직(組織)파 민정기관(民政機關)을 세우게 되었다.

....「전민족유일당 조직촉성회」 계열은 1928년 12월 하순 길림(吉林)에서 회합(會合)하여 과도적 임시기관으로서 「혁신의회(革新議會)」를 조직하고 참의부와 신민부의 해체를 공동선언했다(신민부 민정파와 참의부 침룡준(沈龍俊) 계열은 이를 부인함). 여기에는 신민부의 김좌진(金佐鎭)·황학수(黃學秀)·정신(鄭信) 등 군정위원회측(軍政委員會側)과 참의부의 김희산(金希山(김승학(金承學)))계 및 정의부에서 이탈한 김동삼(金東三)·김상덕(金尙德)·김원식(金元植)·이청천(李靑天) 계열의 인사(人士)가 참여하였다. 이 혁신의회는 존속기간을 1년으로 하고 16명의 중앙(中央)집행위원을 선출하였으며 중앙집행위원회·군사위원회와 민정위원회 등의 부서를 두었다. 또, 남일구(南一區)·중일구(中一區)·북일구(北一區)등의 관할지대를 두어 재만한교(在滿韓僑)들을 통치하려 하였다. 혁신의회는 또 「민족유일독립당 재만책진회(在滿策進會)」를 조직하여 민족유일당 조직운동과 친일파 숙청, 일제주구(走狗)기관의 타도에 주력하기도 하였다.12)

....한편, 정의부 주류파·신민부 민정위원회측과 참의부 침룡준(沈龍俊)계의 「협의회」 측 인사(人士)들은「민족유일독립당 재만책진회」에 대항하여 「민족유일당 조직동맹」을 결성하고 통일된 자치정부(自治政府)와 유일당을 구성코자 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1929년 3월 길림성성(吉林省城(길림(吉林)))에서 각파의 대표자들이 참석한 3부 통일회의를 개최하였는데, 여기에서 마침내 합동의 의견이 성립되어 동년 4월 새로운 합동기관으로써 「국민부(國民府)」를 조직하고, 종래 3부(일부 잔존세력)의 사무를 이에 인계함으로써 참의·정의 ·신민 3부는 정식으로 해체되기에 이르렀다. 이후 같은 해 12월에 조선혁명당과 조선혁명군이 성립됨으로써 국민부(國民府)의 면목은 일신(一新)되고 체계적인 당(黨)·정(政)·군(軍)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13) 그리하여 이들은 주로 남만(南滿)지방의 한인(韓人)들을 기반으로 준자치행정과 군사활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국민부(國民府)가 조직된 뒤인 1929년 5월 혁신의회가 해체되자 김좌진·정신(鄭信)·민무(閔武) 등은 구 신민부의 기반 위에 동년 7월「한족총연합회(韓族總聯合會)」를 조직하고 강령규약·보안조례 등을 제정, 발표하였다. 이들은 그 본부를 길림성(吉林省) 영안현(寧安縣) 산시역전(山市驛前)에 두었는데, 주석(主席)에 김좌진이 취임하여 이 조직을 재만한인의 유일한 자치기관으로 발전시키고자 하였다. 한족총연합회는 군사활동보다는 교육 및 산업진흥과 자치제(自治制) 확립, 그리고 반공투쟁 등에 주력하고 있었다.14)

....결국 1920년대 말∼1930년대 초 중국동북지방의 한인 민족주의운동은 비록 3부통합운동에서는 실패하였으나, 운동의 흐름은 한족총연합회와 국민부(國民府)의 양계열로 통합 흡수되었다고 하겠다.15) 이들 양대 세력이 한 조류(潮流)로 합류(合流)하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점진적으로 비교적 체계적이고 효율적인 당(黨)·정(政)·군(軍) 체제를 구비하게 된 사실은 그들의 역량강화와 적극적 대일항쟁(對日抗爭)을 위해서는 매우 바람직한 방향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1920년대 말∼30년대 초 중국동북의 정세는 재만한인(在滿韓人), 특히 민족주의(民族主義) 계열의 독립운동가들에게는 대단히 험난한 시기였다.

//그러므로, 이러한 긴박한 정세에 부응하여 자체조직을 정비·강화하는 자위수단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2.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의 결성(結成)

1920년대 후반 재만한인(在滿韓人)들은 중국관헌의 압박, 중국인 지주와의 대립, 일제(日帝)와의 정치·경제적 대립과 갈등, 그리고 한인사회(韓人社會) 내부의 계급분화(1930년 연변지방16) 의 경우 한인의 약 88%가 농민, 그 중의 약 57%가 자(自)·소작(小作) 또는 소작농(小作農), 그 외 중국동북거주 한인은 1929년의 경우 98% 이상이 소작농17)와 사상적 대립이라는 제모순(諸矛盾)에 직면하였다. 이러한 배경에서 1920년대 초 민족주의 운동의 유력(有力)한 근거지였던 재만 한인사회는 공산주의 사상이 전파·확산되어 사상적 분열과 대립이 심화되었다. 특히 1926년 조선공산당 만주총국(滿洲總局)이 영안현(寧安縣) 영고탑(寧古塔)에, 1928년에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滿洲省委員會)가 봉천(奉天)에 설치된 뒤 중국동북지역에서의 공산주의 운동은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한인 공산주의자들이 조선공산당 각파 만주총국을 해체하고 중국공산당에 가입하면서 중국동북(中國東北)의 공산주의 운동은 더욱 격화되었다. 즉 1930년 5월의「간도 5·30폭동」18) 과 그에 뒤이은 연변지방에서의 일련(一連)의 폭동은 이 지역에서의 한인(韓人) 민족운동(民族運動)에 커다란 전기(轉機)를 마련하였던 것이다. 말하자면 5·30폭동에 뒤이은 일련의 폭동을 계기로 연변, 나아가 중국동북지방에서는 민족주의 운동이 점차 쇠퇴하고 공산주의 운동이 고양(高揚)되기 시작한 것이다.19) 이같은 추세는 중국공산당의 좌경 맹동주의적(盲動主義的)「이립삼로선(李立三路線)」의 등장 이후 주로 한인들에 의해서 1931년 말∼1932년 초에 진행된「추수투쟁」과「춘황(春荒)투쟁」20) 등으로 더욱 고조되었다.1929년 경 재만한인중 연변지방에 거주하는 사람이 차지하는 비중은 약 64%였다. 21) 이처럼 연변지방에 대다수의 한인들이 거주하고 있음에도 1920년대 후반에서 1930년대 초에 걸쳐 정의·참의·신민부 등과 국민부·한족총연합회 등 유력한 민족주의계 독립운동 단체들이 이 지역에 근거를 두지 못한 까닭은 이 곳에 일제(日帝)의 탄압이 쉽게 미친다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 지방에서 공산주의 운동이 점차 민족운동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된 데에 그 원인이 있다고 볼 수 있다.22)

1920년대 후반 중국동북지역에서 민족유일당운동 및 3부통합운동(府統合運動)이 전개될 때 한인(韓人) 공산주의자들도 다수가 여기에 참가, 민족협동전선(民族協同戰線)을 형성코자 하였다. 실제로 공산주의자들은 「전민족 유일당 조직촉성회」나 신민부(新民府) 민정파(民政派)측에 가담하여 3부통합운동이나 국민부(國民府)의 조직에 영향을 끼치기도 하였고, 혁신의회(革新議會)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처음에는 압도적으로 우세한 민족주의 진영에 각파별로 고립분산되어 편입되는 방식(方式)으로 민족주의 진영에 침투하였다. 그 결과 민족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의 상당수가 좌경화하게 되고 민족주의 계열 독립운동은 재만한인들의 점진적 지지기반의 상실로 인하여 차츰 쇠퇴하게 되었다.23)

이와 같은 경향은 재만한인들의 열악한 사회경제적 여건 때문에 민족모순 보다는 계급모순을 앞세우는 공산주의자들의 혁명논리(革命論理)가 쉽게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는 측면에서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민족유일당 운동을 계기로 제기되었던 중국동북지방에서의 민족·공산 양진영의 협동전선은 1929년 말∼1930년 중반에 걸쳐 완전히 파기되기에 이르렀고, 이제 양진영은 철저히 대립·투쟁하게 되었다.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공산주의 세력이 크게 증대되고, 국민부(國民府)가 수립되자 북만(北滿)일대에 근거하고 있던 혁신의회―한족총연합회 계열의 민족주의 독립운동가들은 이에 위기의식을 느끼고 민족주의 진영을 재정비하여 새로운 단체를 조직하고 대일항쟁(對日抗爭)과 반공(反共)투쟁을 적극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 마침내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24) 을 결성하게 되었다.1930년 1월 김좌진(金佐鎭)이 공산분자에 의해 피살된 뒤 홍진(洪震)·이청천(李靑天)·민무(閔武)·안훈(安勳(조경한(趙擎韓))·황학수(黃學秀)·신숙(申肅)·이장녕(李章寧)·정신(鄭信) 등은 동년(同年) 7월(月) 한족총연합회와 생육사(生育社)25) 등을 모체로 하여 중동선(中東線) 연변 위하현(葦河縣)에서 한국독립당을 조직하였다.26)

한국독립당은 초창기에는
1. 민본정치(民本政治)의 실현(實現)
2. 노본경제(勞本經濟)의 조직(組織)
3. 인본문화(人本文化)의 건설(建設)

이라는 삼본주의(三本主義) 당강(黨綱)과 당규(黨規)를 제정한 뒤 중앙(中央)집행위원회를 조직하고, 운영방침은 이 위원회에 일임하기로 하였다. 한국독립당은 이후 각지의 주민회를 연합하여 일반주민을 결속하고 공산주의자의 활동을 저지하기 위하여 표면기관으로 1931년 2월 「한족자치연합회(韓族自治聯合會)」를 조직하였다.27) 그리고 당(黨)내부에는 총무·조직·선전·군사·경리·감찰 등 6종의 위원회를 두었고, 당의 조직체계는 중앙당부(中央黨部), 지당부(支黨部), 구당부(區黨部) 등의 3급조직을 두었다. 한국독립당은 이후 동(東)·북만(北滿)의 구의병·유림(儒林)·대종교(大宗敎) 등의 집단을 망라하여 진영을 강화하였다. 그리하여 얼마되지 않은 1931년에는 당원이 수만에 달하고 군구(軍區)가 36개로 확대되기에 이르렀다.28)

한국독립당의 초창기 주요 간부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중앙위원장 홍진(洪震)
총무위원장 신숙(申肅)
조직위원장 남대관(南大觀)
선전위원장 안훈(安勳)(조경한(趙擎韓))
군사위원장 이청천(李靑天)(본명(本名) 지대형(池大亨))
경리위원장 최호(崔灝)
감찰위원장 이장녕(李章寧)29)

또, 동당(同黨)의 창립시 결의사항으로는 아래의 사항을 확인할 수 있다.
1. 당의 지부는 현지부(縣支部)·구지부(區支部)로 3칭체계를 둘 것.
2. 군(軍)은 당군(黨軍)으로 편성하되 전 만주를 15구(區)로 나누어 신병(新兵)을 모집하며 3 개월씩 일기(日記)로 미리 훈련할 것.
3. 당원(黨員) 및 청소년 훈련을 적극 추진하여 적색(赤色)의 오염을 방지할 것.
4. 농민성인에 대한 강습은 농한기나 추동간(秋冬間) 야간을 이용할 것 등30)

한국독립당에서 활약한 주요인물(人物)들을 분석해보면 대부분 양반·지주출신 인사(人士)들이었고, 한학(漢學) 수학이나 무관학교(武官學校)를 졸업한 사람들이 많았다. 또 지역적으로는 경기·충청 등 기호지방 출신이 많았다.31) 여기에 대종교·유림출신 인물들이 가세하였으므로 한국독립당의 색채는 자연히 민족주의적 색채를 띠게 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위의 결의사항을 통하여서도 재확인된다고 하겠다. 따라서 한국독립당의 활동은 이 시기에 민족주의 진영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고 있던 공산주의자들과의 투쟁이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예를 들면 1930년 8월 초순 180여명의 한인(韓人) 공산당원들이 합수선(哈綏線) 해림참(海林站)의 한국독립당 본부를 습격한 사건이 있었는데,32) 이와 반대로 한국독립당의 남대관(南大觀)·권수정(權秀貞) 등은 길림성(吉林省) 당국으로부터 「탐공대(探共隊)」 조직을 허가받아 1931년 6월경 동·북만 일대에서 공산주의자들을 토벌한 적이 있었다.33)

한국독립당은 비밀결사(結社)였으므로 그 활동이 공개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으나, 1931년 9·18사변 이후 군사활동을 강화하기 전까지는 대체로 한족총연합회, 한족자치연합회, 한족농무연합회 등의 표면기관을 지도하며 한인(韓人)들의 자치조직 건설이나 교육·산업진흥, 그리고 반공투쟁 등에 전력(全力)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동당(同黨)은 남만주에서 국민부(國民府)를 지도·옹호하던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과 그 성격이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또, 9·18사변 이후 크게 활약한 한국독립군(韓國獨立軍)은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과 유사한 기능과 성격을 가진 것이었다.34)

3. 한국독립군(韓國獨立軍)의 조직

한국독립당은 1931년 일제(日帝)가 중국동북지방에 대해 전면적 침략을 개시한 9·18사변이 폭발하자 동년 11월 2일 길림성(吉林省) 오상현(五常縣) 대석하자(大石河子)에서 긴급중앙(中央)회의를 열고 다음과 같은 중요 3안(案)을 의결하였다.

1. 각군구(各軍區)에 총동원령을 내려 정개적(整開的) 군사행동(軍事行動)을 개시할 것(앞에서 언급했듯이 1931년에 군구는 36개로 확대되었음).
2. 당내(黨內) 일체의 공작을 군사방면(軍事方面)에 집중할 것.
3. 특파원을 길림성(吉林省) 항일군사당국(抗日軍事當局)에 파견하여 한중합작(韓中合作)을 상의할 것.35)

동당(同黨)은 이 결의에 따라 같은 달 10일 중동선(中東線)철도36) 연변을 중심으로한 각 군구(軍區)에 총동원령을 내려 소집 (재향군인)과 징막(徵幕)(청장년)을 실시하는 한편 당(黨) 군사위원장 이청천(李靑天)을 총사령으로 하는 한국독립군의 편제를 아래와 같이 정하였다.

총사령장관 이청천(李靑天)
부사령장관 남대관(南大觀)
참 모 관이장녕(李章寧)(후임 신숙(申肅))
재무겸 외교관 안야산(安也山)
의용군 훈련대장 이광운(李光雲)
의용군 중대장 오광선(吳光鮮)
암살대 대장이출정(李出正)(이우정(李禹正))
의용군 소대장 이춘정(李春正)
별동대(別動隊) 대장한광빈(韓光彬)
헌병대 대장배성운(裵成雲)
통신부대겸 검사역 신원균(申元均)(신숙의 장남(長男))
구국군(救國軍)후원회 (원호회) 회장 권수정(權秀(수(守))貞)
서기장 홍만호(洪萬湖)(홍진(洪震))
고문겸 대일구국회(對日救國會) 회장 서일봉(徐日鳳)37)

위의 편제를 분석해보면 초창기의 한국독립군은 사령부, 즉 지휘부 위주로 편성되어 있고 실제 전투부대, 즉 병력은 그리 많지 않았음을 쉽게 알게된다. 초창기 부대의 규모는 약 150여명 정도였다(주 37 참조).그러나, 이러한 편제방식은 일종의 민병(民兵)내지 의용군적(義勇軍的) 성격을 띠는 무장세력의 형성에 있어서는 일반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국민적(國民的) 기반이 없는 해외(海外)라는 여건에서 무장집단을 창건하기가 그렇게 용이한 작업이 아니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와 같은 약소한 전투부대의 창건도 큰 의의를 갖는다고 보아야 한다.한국독립군은 한국독립당의 앞에서의 결의에 따라 11월 12일 당·군의 대표 신숙(申肅)·남대관(南大觀)등을 이두(李杜)·정초(丁超) 등의 부대에 파견하여 한국독립군과의 합작(合作)을 협상케 하였다. 이들은 그달 말경 목적지에 도착하여 중동철도호로군(中東鐵道護路軍)의 사령관 정초(丁超) 및 제 2 군장 양문휘(楊文揮), 제 3 군장 고봉림(考鳳林) 등과 면담하여 좋은 결과를 얻었다. 이에 동년 12월 11일 한국독립군 총사령 이청천은 최악(崔岳)·오광선(吳光鮮)·심만호(沈萬湖)·김청농(金靑)·최관용(崔寬用)·최종원(崔鍾元)·한무빈(韓武賓) 등과 함께 중국군 사령부에 가서 양군 연합의 구체적 조건을 논의하였다. 이때 서로 약속한 사항은 다음과 같다.

1. 한중양군(韓中兩軍)은 어떤 열악한 환경을 막론하고 장기항전(長期抗戰)을 맹세한다.
2. 중동철로(中東鐵路)를 경계로 하여 서부전선은 중국군이 맡고, 동부전선은 한국독립군이 담당한다
< 3. 한중양군(韓中兩軍)의 전시(戰時) 후방교련은 한국독립군의 장교가 부담하고, 한국독립군의 소요일체(보급)자료는 중국군이 공급한다(단, 한국독립군의 징집병력 수량에 따라 점검후 제공)는 것 등등.38)

이로써 9·18사변으로 비롯된 일제(日帝)의 침략에 한·중 양군의 연합전선이 구체화되었다. 이에 한국독립군은 총사령부의 위치를 흑룡강성(黑龍江省) 의난현(依蘭縣(삼성현(三姓縣)))에 임시로 정하고 한영호(韓永浩)·최관용(崔寬用) 등을 당중앙(黨中央)에 파견하여 이러한 사실을 보고하게 하였으며, 후방 각군구(各軍區)의 대오들이 계속 전선(戰線)에 집중할 것을 촉진하였다.39)

이후 한국독립군은 동(東)·북만(北滿)의 각 지역을 밀산(密山)·호림(虎林)·동녕(東寧) ·왕청(旺淸)·목릉(穆陵)·영안(寧安)·무송(撫松)·화룡(和龍)·혼춘(琿春)·연백(延白)·액목(額穆)·길림(吉林)·오상(五常)·서란(舒蘭)·아성(阿城)·쌍성(雙城)·돈화(敦化) 등 현(縣)단위로 크게 나누어 징집책임위원으로 조경한·오광선·심만호 등 12명을 파견하여40) 각자 소관구역에서 새로 모집한 장정을 「33제」로 편성케 하였다. 33제란 30명을 1소대, 3소대를 1개중대, 3중대를 1개대대, 3대대를 1개연대, 3연대를 1개사단으로 편성하는 편제방침을 말한다. 또 한국독립군은 하사(下士)이상 각급 대장은 소집한 재향군인 가운데서 우선 임시로 임명하여 초급훈련을 실시한 후 총사령부의 명령에 의하여 소정지역으로 이동, 무기와 기타 보급을 받고 작전에 임할 것을 결정하였다.41)

이와 같이 한국독립군은 길림자위군(吉林自衛軍) 등 중국의용군과의 교섭을 진행하는 한편, 모병활동 및 군사훈련에 매진하며 대일항전(對日抗戰)에 대비하였다.다음에는 한국독립군의 항전(抗戰)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Ⅲ. 한국독립군(韓國獨立軍)의 한중연합(韓中聯合) 반만항일전투(反滿抗日戰鬪)

1. 일제(日帝)의 중국동북지방(中國東北地方) 침략(侵略)과 각종반만항일군(各種反滿抗日軍) 의 봉기(蜂起)

한국독립군은 9·18사변 이후 중국동북에서 봉기(蜂起)한 반만항일군(反滿抗日軍)과 연합하여 대일항쟁(對日抗爭)을 전개하였다. 그러므로 이러한 반만항일군(反滿抗日軍)에 대하여 간략히 훑어보도록 하자.1931년 9월 일제(日帝)는 소위「유조구(柳條溝)사건」을 조작하여 중국동북지방에 대한 본격적 침략을 개시하였다(9·18사변). 당시 중국동북의 총수 장학양(張學良)(동북변방군사령관(東北邊方軍司令官)겸 동북정무위원회(東北政務委員會) 위원장(委員長))은 외형적으로 일제(日帝)의 관동군(關東軍)보다 압도적으로 우세한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국민정부의 동의하에 일본군(日本軍)의 침공에 대하여 부저항정책을 취하였다.42) 따라서 일제(日帝)는 손쉽게 동북(東北)지방을 석권하였고 구동북군벌(東北軍閥)의 매판적 관료들과 야합하여 1932년 3월 마침내「만주국(滿洲國)」을 수립 할 수 있었다.중국동북의 민중들은 처음에는 이러한 일본군(日本軍)의 침략에 항거하여 항일투쟁(抗日鬪爭)을 전개하였으나,「만주국」이 수립된 뒤에는 괴뢰 「만주국」의 성립을 인정치 않으며 만주국군과 관헌에 저항하고 일제(日帝)의 침략에 반대하여 양자(兩者)를 모두 물리치겠다는「반만항일운동(反滿抗日運動)」43) 을 광범위하게 전개하게 되었다.

9·18사변 이후 봉기한 각종 반만항일(反滿抗日)부대의 총수(總數)는 1932년에는 36만여명을 헤아릴 정도의 대규모 세력이었으나, 거듭된 만주국 군경 및 일본군의 「토벌」로 1934년에 이들은 4만여명으로 격감했고, 1937년에는 9천5백, 그리고 1939년에는 3천여명으로 줄었다가 1941년 초를 고비로 거의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44) 이러한 각종 반만항일투쟁의 주요세력은 크게 보아 구봉천군벌(奉天軍閥)계의 지방주둔군 지휘관과 그 예하병력, 대범회(大凡會)·홍창회(紅槍會) 등과 같은 종교집단, 그리고 중국동북의 전통적 마적집단, 또 중(中)·한인(韓人) 공산주의자들의 무장세력, 조선혁명군·한국독립군 등의 한인(韓人) 민족주의 세력 등으로 대별된다.45)

이들 각종부대는「반만항일(反滿抗日)」의 기치를 들고 혹은 독자적으로, 혹은 연합해서 투쟁을 전개하여 만주국군과 일본군에 심대한 타격을 가하였다. 이들 항일군(抗日軍) 가운데 소위 「병비(兵匪)」로 유명하였던 구동북군(東北軍)계 항일부대의 지도자로는 동변도(東邊道)·연변지방의 당취오(唐聚俉)·이자영(李子榮)·왕덕림(王德林)·오의성(吳義成) ·공헌영(孔憲榮) 등, 남만주(南滿洲)일대 요동(遼東)의 등철매(鄧鐵梅)·이춘윤(李春潤), 길림성(吉林省)의 풍점해(馮占海)·궁장해(宮長海)·전신(殿臣) 등, 요서(遼西)지방의 고북풍(考北風), 동부 국경지방의 유만괴(劉萬魁), 북만(北滿)의 이두(李杜)·정초(丁超)·마점산(馬占山)·소병문(蘇炳文)·장전구(張殿九), 열하(熱河)지방의 탕옥린(湯玉麟) 등이 있었다. 이들은 의용군(義勇軍)·구국군(救國軍)·자위군(自衛軍) 등의 명칭을 썼으며, 중국본토(本土)의 국민당정부(國民黨政府)와 연계되어 있었다.46) 1930년대 초에는 이들이 이끄는 부대들이 반만항일(反滿杭日) 세력의 주류(主流)를 형성하였으나, 후반기에는 중공(中共)계열의 항일군(抗日軍)이 투쟁의 주류를 이루었다.

한국독립군은 위의 저명한 반만항일(反滿抗日) 지도자의 부대중 이두(李杜)·정초(丁超) 등의 길림자위군(吉林自衛軍)·중동철도호로군(中東鐵道護路軍), 왕덕림(王德林) 휘하의 오의성(吳義成)·공헌영(孔憲榮) 등이 거느리는 길림구국군(吉林救國軍)과 직접·간접으로 연결되어 반만항일(反滿抗日)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므로 이하에서는 한국독립군과 연계되어 일제(日帝)와 투쟁한 길림자위군(吉林自衛軍)과 길림구국군(吉林救國軍)에 관하여 간단히 고찰하기로 한다.길림자위군은 일본측이나 중국공산당에서는 반길림군(反吉林軍)이라고도 불리운 구동북(舊東北) 길림성군(吉林省軍)의 일부 부대였다. 길림성(吉林省)에서는 9·18조(條) 길림성 대리주석(代理主席)겸 동북변방군길림부대(東北邊防軍吉林部隊) 부사령(副司令) 희흡(熙洽)이 관동군(關東軍)의 후원을 받아 독립을 주장하고 9월 말 무렵에 임시 길림성정부(吉林省政府)를 세웠는데, 이러한 친일적·매판적 움직임에 반발하여 1931년 11월 12일 성윤(誠允)은 빈현(賓縣)에 길림성정부(吉林省政府)를 세우고 주석(主席)이 되었다.47)

그 뒤 의난진수사(依蘭鎭守使)겸 동북변방군(東北邊防軍) 길림부대(吉林部隊) 제24여장(旅長) 이두(李杜), 대리호로사령(代理護路司令) 정초(丁超), 제22여장(旅長) 조의(趙毅), 형점청(刑占淸), 풍점해(馮占海) 등이 성윤(誠允)의 길림성정부(吉林省政府)에 가담하여 1932년 1월 31일에 길림자위군(吉林自衛軍)을 조직하고 선언을 발표, 희흡(熙洽)의 괴뢰정권과 일본군에 항거(抗拒)하였다.48)길림자위군은 구동북군계(舊東北軍系) 정규군(正規軍)과 북만주 일대의 희흡(熙洽)정권을 반대하는 10개 현(縣)을 기반으로 하는 길림성정부(吉林省政府)를 바탕으로 하여 항일(抗日)의 기치를 올렸다. 그러므로 길림자위군은 군소 구동북군(舊東北軍)의 연합군·관병적(官兵的) 성격이 강하였다고 할 수 있다. 길림자위군의 이러한 특성 때문에 한국독립군도 여기에 합세할 수 있었던 것이다.49) 길림자위군은 1932년 2월의 쌍성(雙城)·하얼삔 전투 등에서 크게 활약하였다.

그러나, 만주국이 수립된 뒤 길림자위군은 일(日)·만(滿)군경의 「토벌」로 점차 어려운 상황을 맞게 된다. 그리하여 정초(丁超)부대는 1933년 1월에 투항하고 이두(李杜)부대는 소련영내로 퇴각하고 말았다. 이후 길림자위군은 풍점해(馮占海), 궁장해(宮長海) 등에 의해 지도되다가 대도회(大刀會)·홍창회(紅槍會) 등과도 연결되면서 1934년 경까지 왕덕림(王德林) 등의 길림구국군(吉林救國軍)과 함께 완강히 항전하였다.50)따라서 한국독립군이 1932년 초 북만(北滿)일대에서 크게 세력을 떨친 길림자위군(吉林自衛軍)에 가담하여 반일(反日)투쟁을 벌인다는 것은 전투역량의 강화나 자기세력의 보존·진작을 위해 매우 바람직한 방향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한국독립군의 한중합작(韓中合作) 상황을 일제관헌 기록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남대관(南大觀)·권수정(權守貞) 등은……장학양(張學良)·장작상(張作相) 계통의 일파가 소화육년(昭和六年)(1931년 : 필자) 11월 빈현(賓縣)에 반길림정부(反吉林政府)를 수립하고 길림(吉林)임시정부를 잠칭, 맹렬한 배일(排日)책동을 개시하자 이 일당의 간부들에 접근하여 그의 양해·원조하에 배일(排日)을 책모하고, 전(前) 한족총련합회(韓族總聯合會) 간부였던 이청천(李靑天)·신숙(申肅)등의 주요인물과 합하여 아성현(阿城縣) 대석하(大石河)에 한국대독립당(韓國大獨立黨)이라는 것을 조직하여 이청천을 총사령으로 하고 남대관(南大觀)을 부사령으로 하는 한국독립군(韓國獨立軍)을 편성하였다.

이와는 별도로 당내(黨內)에 구국군후원회라는 것을 조직하여 반길림군(反吉林軍)에 대하여 군자금을 모집 헌금함과 동시에 배일(排日)운동을 치열하게 계속하였다.‥‥‥(중략(中略))‥‥‥그 후 소화칠년(昭和七年) 1월 하순 길림군(吉林軍)과 반길림군(反吉林軍) 정초일파(丁超一派) 사이에 항쟁(抗爭)이 격화되어 길림군중의 일부가 반길림군(反吉林軍)으로 되돌아서는 바람에 북만(北滿)의 정세가 위태롭게 되었다. 이에 일본군(日本軍)이 출동하자 이청천 등을 간부로 하는 한국독립군은 정초군(丁超軍)으로부터 무기의 지급을 받고 대원(隊員)을 모집하여 일본측 기관의 파괴, 일본요인의 암살 등을 기도하고 지방혼란의 기회를 이용하여 누차 하얼삔 시내에 잠입하여‥‥‥반길림군(反吉林軍)과 책응하고 반일군사행동(反日軍事行動)에 참가하였는 바‥‥‥(후략(後略))51)

위의 문서는 일제(日帝)의 침략을 미화(美化)하고 있는 등 몇가지 과오가 발견되기는 하지만 대체로 앞에서 언급한 한국독립군의 활동과 부합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한편 1932년 2월 초순 연변지방에서는 왕덕림(王德林) 등이 지휘하는 길림구국군(吉林救國軍)이 봉기(蜂起)하였다. 한국독립군은 1933년 초∼중반 이 구국군(救國軍)과 연합하여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왕덕림(王德林)은 연길진수사(延吉鎭守使) 길흥(吉興)부대(길림성육군(吉林省陸軍) 제(第)1여(旅) ; 3여(旅)라는 설(說)도 있음)의 3 영장(營長)으로 돈화현(敦化縣)에 주둔하고 있었으나, 친일파 희흡(熙洽)이나 길흥(吉興)의 명령을 거부하고 돈화(敦化)에서 기의(起義)하였다.

그는 그 후 그곳에서 부대의 강화에 노력하며 많은 기타 항일(抗日)부대들을 흡수·통합하거나 연합하여 세력을 증대시켰다. 이리하여 그의 부대는 동녕(東寧)·돈화(敦化)·장안(章安)·목릉(穆陵)·영안(寧安)·수분(綏芬)·밀산(密山)·안도(安圖)·혼춘(暉春)·왕청(汪淸) 등지의 11현(縣)에 분주(分駐)하여 각지에서 한동안 맹위를 떨쳤다.52) 왕덕림(王德林)은 자신의 부대를 농(農)·공(工)·상(商)·학병(學兵)의 연합군, 즉 민중의 무장세력으로 규정하였다.53) 이같은 입장에서 한 때 중국공산당 무장유격대와의 공동작전이 가능하였다고 한다.길림자위군의 대부분이 구동북군 출신이고 한 때 빈현정부(賓縣政府)의 정규군적 성격을 띠고 그에 상응하는 기능을 수행한 데 비하여 구국군은 상당수의 구동북군이 포함되기는 했지만 동북의 민중에 의한 대오(隊伍), 즉 구국의 의지를 갖고 자발적으로 참여한 민중의 무장집단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 부대는 왕덕림(王德林)·유만괴(劉萬魁)·오의성(吳義成)·이해청(李海靑)·공헌영(孔憲榮) 등을 주요 지휘관으로 하였다.54)

왕덕림(王德林) 부대는 초창기에 중공당(中共黨) 연화(延和) 중심현위원회(中心縣委員會)에서 파견한 이연녹(李延祿)·맹경청(孟涇淸)·김대륜(金大倫(본명-本名)김동식(金東植) ; 한인-韓人)55) 등이 참가하고 있었는데 1932년 2월 8일 연길현(延吉縣) 소성자(小城子)에서 「중국국민구국군(中國國民救國軍)」―통칭 길림구국군―을 조직하였다. 이 때 구국군의 지도부는 총지휘에 왕덕림(王德林), 부지휘 공헌영(孔憲榮), 전방사령(前方司令) 오의성(吳義成), 참모장 이연녹(李延祿)이었다. 물론 처음에 이 구국군은 구래(舊來)의 동북군(東北軍)을 주축으로 하였으나, 1933년 1월 중공당(中共黨)의 「1월서한」 이후 「위로부터의 통일전선」과 관련하여 다수의 공산주의자가 침투하여 주요직책을 맡게 되었다.56)길림구국군은 1932년 3월에는 영안(寧安)을 점령하였는데, 이 때 이미 1만5천여명에 이르는 대규모 부대가 되어 이를 오여(五旅)로 편성, 구국군 총부를 동녕(東寧)에 두고 장기항전체제를 갖추었다. 동년(同年) 7월말 무렵에는 길림자위군과 공동작전을 취하게 되었으나, 내부분열의 결과 많은 손실을 입고 실패하였다. 1933년 1월 왕덕림(王德林)·공헌영(孔憲榮) 등은 일본군의 「토벌」에 동녕(東寧)을 잃고 구국군 상층부는 붕괴상태에 빠졌다.57) 그러나, 오의성(吳義成)·시세영(柴世榮) 등은 잔존부대를 이끌고 기타 항일(抗日)부대와 연합하며 항전을 계속하였다.

한국독립군은 1932년 1·2월에는 길림자위군의 사복성(謝復成)부대와 함께 서란현(舒蘭縣)전투를, 9∼11월에는 고봉림(考鳳林)부대와 연합하여 쌍성보(雙城堡)전투를 치렀다. 또 1933년에는 길림구국군의 시세영(柴世榮)부대와 연대(連帶)하여 경박호(鏡泊湖)전투, 사도하자(四道河子)전투, 동경성(東京城)전투, 그리고 한국독립군 최대의 격전인 대전자령(大甸子嶺)전투를 전개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다음에서는 이러한 전투의 실상에 대하여 고찰하기로 한다.

2. 서란현전투(舒蘭縣戰鬪)

한중합작(韓中合作)에 관한 논의(論議)는 9·18사변 이후 새삼스럽게 처음 등장한 것이 아니었다. 대한제국(大韓帝國)이 식민지로 전락한 이래 중국동북지방에 망명하여 조국의 해방을 염원해왔던 애국지사들은 일제(日帝)를 타도하기 위해서는 중국과 연대하여 공동투쟁하여야 한다는 사실을 누누이 강조하여 왔던 것이다.따라서 한국독립군의 한중연합작전 이전에도 한중합작 논의는 많았다. 대표적 예를 들어보면 중국국민당의 동북(東北)지역 공작책임자 공패성(貢沛誠)과 김좌진(金佐鎭) 사이에 밀약이 성립된 적이 있었다. 즉 중국측으로부터 무기와 자금의 원조를 받아 4개사단의 병력을 양성하여 한중연합군(韓中聯合軍)을 편성, 대일(對日) 독립전쟁(獨立戰爭)을 전개하려는 계획이 추진된 적이 있었다.58)

또 1930년 11월에 남경(南京)의 국민당정부(國民黨政府)에서 특파한 동삼성당무지도위원(東三省黨務指導委員) 장심결(張心潔)과 한국독립당 사이에 양측의 합작공작(合作工作)이 협의되어 상호 협력키로 합의한 적이 있었으나, 이 때도 구체적 방안이 실천되지는 못하였다.59)그러나, 9·18이후 일제침략의 마수(魔手)가 분명하게 드러나고, 중국인 대중과 일제와의 사이에 적대적 관계가 선명히 노출되자 동북(東北)에서의 한중합작은 새로운 국면(局面)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제 한중 양민족은 중국동북지방에서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에 반대하고 그것을 격퇴시키겠다는 데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게된 것이다.한국독립군이 1931년 말∼1932년 초 동(東)·북만(北滿)지역에서 진용을 재정비하고 병력을 소집·징모하며 항일길림성정부(抗日吉林省政府)와 길림자위군·중동철도호로군 등에 합작을 구체화하고 있을 때 일본군과 친일적 길림군(吉林軍)이 북만(北滿)지방으로 대거 공격해 왔다.

그러므로, 한국독립군은 충분한 병력과 장비 등을 확보하여 전시체제(戰時體制)를 갖추기도 전에 큰 시련에 부딪혀야 했다. 그리하여 한국독립군은 총사령부 밑에 통합된 지휘체제를 구비하지도 못하고 또 모집된 장정들의 무장도 별로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각지에 고립·분산된 형태로 중국의용군과 연합하여 전투에 임하게 되었다.60) 한국독립군은 1931년 말 청장년(靑壯年) 징모사업에 매진한 결과 6개 대대 약 1,600여명을 편성할 수 있었다. 61) 이같이 병력모집사업은 비교적 순조로이 진행되었으나, 장비와 보급―무기·탄약과 식량·피복 등―이 부족하여 중국 반일(反日)부대의 도움을 요청치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1932년 1월 초 북만주의 오상(五常)·서란현(舒蘭縣) 일대에서 조경한(趙擎韓)·권오진(權五鎭) 등이 모병, 편성한 한국독립군 1개 대대(편제상(編制上) 270명 내외)는 독립군의 본부가 있는 방정현(方正縣)으로 이동하는 도중에 태평천(太平川) 부근에서 약 2,000여명 규모의 길림자위군 제 9사(師) 사복성(謝復成)부대를 만나 이에 합류, 공동작전을 전개하게 되었다. 조경한 부대는「한국독립군 유격독립여단」으로 명칭을 붙이고 길림자위군으로부터 무기를 지원 받아 무장을 강화할 수 있었다. 즉, 한국독립군유격독립여단은 사복성(謝復成)부대로부터 소총 70정, 탄환 5000발, 수류탄 1200개, 장창(長槍) 200자루를 빌려서 무장한 후 사령부와는 별도의 작전을 벌이게 되었던 것이다.62)

그러면 이 때 「한국독립군 유격독립여단」은 사(謝)의 부대와 어떤 관계에 있었던가? 넓은 의미에서 본다면「한중연합」또는「한중합작」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상 이 무렵은 한국독립군의 병력이 소수였고 무장이 충분치 못하여 중국군의 도움을 받아야 했으므로 명실공(名實共)히 양자가 대등한 관계에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된다. 중국동북에서의 일제(日帝)침략군의 격퇴라는 동일한 목표를 위해 양자는 연합하였지만, 현실적인 힘의 역학(力學)관계는 어느 정도 작용하였으리라고 추측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 명칭이 시사해 주듯이 「한국독립군 유격독립여단」은 사복성(謝復成)부대에 편입되는 형식을 취하고, 사복성(謝復成)의 전체적 지휘를 받았을 것으로 보이지만, 한인병사(韓人兵士)들은 고립분산적으로 중국인부대에 각개 흡수되는 것이 아니라 단위부대(單位部隊)의 체제를 유지한 채 자위군(自衛軍)의 지원군 내지 동맹군 형식으로 상당한 독자적 작전권(作戰權)을 행사하였을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63)

한국독립군과 길림자위군 양군은 서란현(舒蘭縣)의 현성(縣城)을 공격하기로 정하고 1932년 1월 23일 소산자(小山子)로 진출한뒤 정찰대를 파견하여 적정(敵情)을 탐지케 하였다. 이들은 적의 병력배치와 주변의 지형을 자세히 파악하는 데 성공하였다. 한(韓)·중(中)양군은 같은 달 27일 소산자(小山子)를 출발하여 29일 밤 서란현성 주변 8∼12km지점에 병력을 분산 배치하여 성(城)을 포위하였다. 64)

서란현성의 공격시 자위군은 자정을 기하여 동서남(東西南) 3방면으로 포위공격하기로 하고 한국독립군 유격독립여단은 성의 북문 밖 8km지점의 산계곡길 양편에 매복하여 적의 퇴로를 차단·섬멸키로 약속이 되었다. 그 곳의 지형이 동 ·서 ·남 방면을 봉쇄하면 부득이 이통현(伊通縣)으로 빠지는 한국독립군 매복지점으로 퇴각치 않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65) 자위군이 성을 공격하자 약 2시간 반의 전투 끝에 성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1개분대 ·길림군(吉林軍) 1개중대는 중과부적으로 자위군의 진공(進攻)을 견디지 못하고 과연 한국독립군의 매복지점으로 패퇴하여 왔다. 이 때 한국독립군이 일제사격과 함께 수류탄을 집중공격하니 일본군과 길림군(吉林軍)은 거의 전멸되고 말았다.전투결과 한중양군은 적 150여명을 살상하고 소총 121정, 탄환 8,000여발을 비롯하여 박격포 2문, 포탄 22상자, 기관총 2정 등의 많은 무기와 피복 100여벌, 군마(軍馬) 5필, 화폐 200만원(길림성대양(吉林省大洋)) 등을 노획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영하 37도를 전후한 강추위 속의 전투였지만 통쾌한 초전(初戰)의 승리로 한국독립군 유격독립여단은 사기충천하였다. 66)

한중양군은 성을 점령하여 이틀간 휴식을 취한 뒤, 현성(縣城)을 출발하여 액목현(額穆縣)을 향하여 행진하던 도중 장광재령(張廣才嶺)67) 부근에서 일본군·길림군(吉林軍) 2개대대와 조우(遭遇)하였다. 한중양군은 패주하는 척하면서 고지(高地) 다섯군데를 재빨리 점령하여 적을 불리한 지형으로 유도, 맹공격을 가하였다. 이에 적군은 큰 타격을 받아 궤멸하고 말았다. 이 때 적군은 200여명이 살상되었고 100여명은 패주 하고 말았는데, 길림군 500여명은 투항하였다.68)1932년 1월 말∼2월 초 북만주 하얼삔 일대에는 이두(李杜)·정초(丁超)의 연합군이 일본군의 하얼삔 입성(入城)을 저지하기 위해 쌍성(雙城)·하얼삔 부근에서 완강하게 항전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 무렵 북만주지방의 일본군은 하얼삔 부근, 장춘(長春)·길림(吉林)·심양(瀋陽) 등 대도시에는 비교적 많은 병력을 주둔시킬 수 있었으나, 그 외의 중국동북지역 전체를 확실히 장악할 수는 없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한국독립군은 각처에서 봉기한 항일의용군(抗日義勇軍)과 연계될 수 있었다.조경한·권오진 등이 인솔하는 한국독립군 유격독립여단은 사복성(謝復成) 부대와 함께 1932년 2월 초순 200여명의 길림군이 주둔하고 있던 액목현성(額穆縣城)을 공격하여 큰 접전 없이 그 곳을 점령하고, 50여일간 머물며 부대를 훈련·정비한 뒤 3월 말경 중동(中東)철도 연변지역을 따라 북상하였다.69)

북상도중 연합군은 흑룡강성(黑龍江省) 오상현(五常縣) 충하진(河鎭) 근처에서 1개 사단 규모의 일(日)·만군(滿軍) 연합부대가 북상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이에 한중양군(韓中兩軍)은 일·만연합군의 북상을 좌절 또는 지연시킬 목적으로 급히 일면피(一面陂) 방면으로 진로를 변경하여 태평천(太平川) 동쪽 납봉산(拉鳳山) 계곡에 이르러 약 8km 능선에 일곱군데의 진지를 구축하고 적이 통과하기를 기다렸다. 양군(兩軍)은 마침내 적군의 후미 1개대대 가량의 병력이 치중차량을 보호하고 지나가는 것을 습격하여 약 2시간 동안 치열한 교전을 벌였다. 그리하여 후미(後尾)의 적군이 점차 패퇴할 무렵 갑자기 일본군의 항공기가 공습하여 폭격을 가하고, 이미 통과하였던 적의 중군(中軍) 약 1연대가 되돌아와 맹렬한 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이후 양측은 1시간 가량 격전을 치러 양측의 사상자가 상당수에 달하였으나 한중연합군은 전세가 불리하여 부득이 분산·패퇴치 않을 수 없었다.70)

이 납봉산(拉鳳山) 전투에서 사복성(謝復成) 부대는 많은 피해를 입었고, 사기가 극도로 저하되어 동만(東滿)지방으로 이동하였고, 한국독립군 유격독립여단은 사(謝)부대와 결별하여 독자적 행동을 취하게 되었다. 이후 조경한·권오진 등이 이끄는 한국독립군은 한국독립 군 총사령부 소재지인 방정현(方正縣) 방면으로 북진하였다.71)

3. 한국독립군의 재편 및 강화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조경한·권오진 등이 이끄는 한국독립군의 1지대는 사령부와는 별개의 작전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러면 당시 한국독립군의 지도부는 어떤 상황에 처해 있었던가?

한국독립군의 군사행동이 본궤도에 진입하기 전인 1932년 2월 12일경 일본군과 길림군 연합의 대부대가 수 십대 비행기의 지원을 받으며 북만주 일대로 대대적으로 침공해 왔다. 이같은 침공의 목적은 하얼삔 교외에서 일본군의 하얼삔 진입을 완강히 방해·저지하고 있는 이두(李杜)·정초(丁超)등의 길림자위군·중동철도호로군의 연합부대를 격파하고, 또 항일(抗日)태도를 견지하고 있는 빈현(賓縣)소재 길림성정부(吉林省政府)를 전복하기 위한 것이었다.72)이 때 이청천이 거느린 한국독립군은 길림자위군과 함께 위사하(葦沙河)·일면피(一面陂) ·오길밀(烏吉密)·밀봉참(密蜂站)·동빈(同賓)·방정(方正)·의난(依蘭) 등지에서 격전을 치렀으나 앞에서 설명한 대로 중국측의 적극적 지원을 받을 수 없어 식량과 탄약의 보급이 두절되고, 한·중 양군의 통제와 협력이 미비하여 참패를 당하고 사방에 흩어지고 말았다. 즉 당시 총사령 이청천은 참모장 신숙과 한국독립군 1지대를 인솔하고 의난(依蘭)·방정(方正) 등지를 전전하며 역전(力戰)하였지만 압도적 우위를 점한 일본군(日本軍) 등의 공세로 전세가 불리하여 흑룡강성(黑龍江省) 통하현(通河縣)과 송화강(松花江) 일대로 퇴각하여 각 부대를 수습·정리하기에 노력하였던 것이다. 이 때 패배한 한국독립군 각 부대는 2개월 동안이나 상호연락이 끊겼고, 일본군과 길림군은 요지(要地)를 점거하여 더욱 엄중한 경계를 취하였으므로 한국독립군은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하였다.73)

1932년 3월 초순 길림자위군 전적(前敵)총지휘부가 흑룡강성(黑龍江省) 연수현(延壽縣(동빈현(同賓縣)))으로 이동한 뒤 한국독립군은 합작교섭을 전개, 자위군 산하 고봉림(考鳳林)부대에 합류하여 다시 공동작전을 취하게 되었다. 이후 한국독립군의 사령부와 주력부대는 흑룡강성(黑龍江省) 주하(珠河)·연수현(延壽縣) 일대에서 일(日)·만군(滿軍)의 진공(進攻)에 맞서 자위군과 함께 격전을 치렀으나, 결국 패퇴하여 송화강(松花江) 이북 목난지방(木蘭地方)으로 철수하고 말았다.74) 이 때 독립대장 안종명(安鍾鳴)75) 은 부대를 인솔하고 고봉림(考鳳林) 부대와 함께 3월 3일 아성(阿城)에 이르러 이틀간의 치열한 격전을 벌여 한 때 아성(阿城)을 점령하기도 하였다.한편 그 무렵 사령부에 합류하지 못한 다른 부대들은 어떤 형편에 있었는가 보기로 하자. 한국독립군 제 3·4·5 대대(大隊)의 차철(車澈)·지상기(池相奇)·전북빈(全北賓) 등의 부대는 자위·호로연합군 제 3·5여(旅)의 유지광(劉志光), 궁영무(宮英武) 등의 부대와 함께 한달 가량 고전하였으나 끝내 일면피(一面陂) 이북지역으로 퇴각하게 되었다. 또 신재만(申在滿) 등의 각 부대는 무장을 갖추지 못한 채 소집에 응모한 청장년을 이끌고 북상하다가 적군의 갑작스런 추격을 받아 각지에 흩어지고 말았다.76)이와 같이 한국독립군은 초기에는 일본군·길림군의 공세가 치열한 가운데 사령부와 각 지대가 유기적으로 통합·연계되지 못하고, 또 길림자위연합군과의 협조도 원활치 못하여 본연의 목적을 효과적으로 달성할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각지에 분산된 부대를 수습 ·통합하여 진영을 재정비·강화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ㅍ이에 따라 조경한·권오진 등이 거느리는 한국독립군의 일지대와 합류한 김창환(金昌煥) 이규보(李圭輔)·공창준(公昌俊)·정람전(鄭藍田)·한해강(韓海岡)·차철(車澈) 등 일부 간부들은 1932년 5월 1일 아성현(阿城縣) 대석하(大石河)(당지부 소재지이며 제 1 대대장 오광선(吳光鮮)의 농장)에서 한국독립군 비상회의를 열고 아래의 4가지 사항을 결정하였다.

1. 군사운동을 다시 정돈하되 대석하(大石河)를 임시 중심지대로 정하여 이미 분산된 부대와 사병을 수습하는 한편, 신병을 계속 모집·훈련할 것.
2. 곧 사람을 파송하여 지(池)총사령 및 소속직원과 직속부대를 대석하(大石河)로 맞아오도록 할 것.
3. 처음 군사협정을 체결한 이두(李杜)의 군대는 행방을 알 수 없으므로 현재 대석하(大石河) 부근에 주둔하고 있는 유력(有力)부대 길림자위군 제 7 려 고봉림(考鳳林)과 합작(合作)교섭을 전개할 것.
4. 김창환(金昌煥)을 부사령으로 추대하여 임시로 총사령의 임무를 대리하게 할 것.77)

위의 결정은 한국독립군 진영의 재정비와 한중연합의 재강화로 집약된다. 당시 사산(四散)된 한국독립군의 미약한 병력으로는 큰 성과를 기대할 수 없기 때문에 이러한 단안은 불가피한 형편이었다.이 결정에 따라 5월 3일 조경한·안종명·이규보 등을 영발둔(永發屯)에 주둔하고 있던 고봉림 부대를 방문하여 고봉림 및 참모장 조린(趙麟)과 한중합작을 교섭한 결과 양측의 합작이 순조로이 성립하였다. 이에 대석하(大石河)에 있던 한국독립군은 영발둔(永發屯)으로 이동하여 고봉림부대와 함께 그 곳에 주둔하게 되었다.

한국독립군은 그 후 신병모집과 훈련에 주력하며, 때로는 농민들을 돕는 등 대민(對民) 봉사에 종사하기도 하였는데, 간혹 부근에 산재한 만주국군(우환장(于煥章)부대)을 소탕하는 소규모의 전투를 7∼8차례나 벌이기도 하였지만 대규모 작전을 삼가하고 있었다. 6월 말경 총사령 이청천과 참모장 신숙, 부관 최만취(崔晩翠), 제 2대대장 최악(崔岳), 별동대장 심만호(沈萬湖) 등이 소속부대를 이끌고 한중연합군의 주둔지인 쌍성현(雙城縣) 납림장(拉林場)(이청천 등이 도착하기 며칠 전에 영발둔(永發屯)에서 이동)으로 이동하여 왔다.78)이로써 각지에 분산되었던 한국독립군은 이청천 총사령이 지휘하는 단일부대로 통합되었다. 그 뒤 한국독립군은 당(黨)의 결의에 따라 김창환(金昌煥)을 총부사령으로 하여 진용을 재편성하고 병력모집과 훈련에 매진하여 전열을 정비·보강하였다.79)

4. 쌍성보전투(雙城堡戰鬪)

1) 1차 쌍성보전투

한국독립군은 납림장(拉林場)에 집결하여 새로운 체제를 갖춘 뒤 1932년 7월 경 당(黨) ·군(軍) 연석회의를 열고 당과 군에 대한 중요대책을 결정하였는데, 여기에서 한중(韓中)양군의 하얼삔진공(進攻) 목표가 세워졌다. 동년(同年) 8월 한중연합군은 준비를 마치고 하얼삔 공격을 실천하려 하였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아 이 계획을 중단하고 병력의 증모(增募)와 군사훈련에 치중하여 장차 쌍성보를 공격 점령키로 계획을 변경하였다.80)

쌍성보(쌍성현성(雙城縣城))는 장춘(長春)―하얼삔간 철도 사이에 위치한 길림·흑룡강성의 요충지로서 중국(中國) 동북(東北) 물산의 집산지였고 친일적 부호와 고관대작(高官大爵)들이 많이 거주하는 일제침략의 중심지였으므로 전략적 가치가 매우 높은 곳이었다. 이 곳에는 만주국의 「초비단(剿匪團)」 사령관 우침징(于琛)의 본대(本隊)가 있어 방비(防備)가 가장 견고한 곳으로 알려져 있었다.81)

쌍성보 공략에서 한국독립군은 1932년 9월 중순(음력 8월 15일(日) 중추절(仲秋節))을 기하여 길림자위연합군 제 1·2군과 연합하여 진공(進攻)하기로 결정하였는데, 제 1 군은 동문으로, 제 2군은 남문으로, 3군인 고봉림부대와 한국독립군은 서문으로 일시에 협공키로 하였다.82)그리하여 한국독립군은 9월 19일(음력 8월 14일)에 주둔지인 납림장(拉林場)을 출발하여 2∼3일간 약80km를 행군하여 쌍성보 서문밖 4∼8km정도 되는 지점에 도착하여 고봉림부대에 합세하였다.그런데 이 전투에는 근처에서 활동중이던 홍창대(紅槍隊), 흑창대(黑槍隊) 등의 종교세력 의용군도 가담하여 쌍성보 공격에 참가한 전체병력은 2∼3만명이나 되었다.83)9월 20일(음력 8월 15일) 밤 8시경에 연합군은 공격을 개시하였다. 공격시 당초예정대로 동·남문은 자위군 제 1·2군이, 서문은 고봉림군과 한국독립군이 맡았는데 북문쪽은 비어두어서 적이 퇴각할 수 있게 하였다. 홍창대·흑창대로 하여금 중도에 매복, 적을 섬멸케 하려는 의도였다.

당시 성내에는 만주군 2개대(隊)(약3,000여명)와 일본군 소수병력이 수비하고 있었다.84) 3방면에서 포위한 연합군이 일시에 총공격을 가하자, 피아간에 약 2시간에 걸쳐 대공방전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마침내 연합군의 맹렬한 공격에 적은 견디지 못하고 서문이 먼저 함락되었고, 동·남문도 격파되었다. 이에 일본군은 먼저 북문밖으로 탈출하여 쌍성역(驛)쪽으로 도주한 뒤 박격포와 기관총을 난사하며 북문으로 패주하는 만주군을 엄호하였으나, 결국 만주군은 매복하고 있던 홍창대의 공격을 받고 거의 궤멸되고 말았다. 일본군도 전세가 불리하여 퇴각하다 홍·흑창대의 기습을 받고 과반수가 사상되었다.85)이리하여 쌍성보는 마침내 연합군에 의하여 함락되었다. 이 전투에서 한국독립군은 서문(西門)돌파의 주역으로 크게 활약하였다. 쌍성보전투에서 한국독립군과 고봉림군의 사상자는 각각 30∼40 여명에 지나지 않았다. 반면 만주군은 1/3인 1,000여명의 사상자를 냈고, 2,000여명이 투항하였다. 투항자들은 반만항일군(反滿抗日軍)에 흡수되었다. 이 전투에서 한국독립군이 획득한 무기·탄약·피복·식량 등의 물자는 매우 많아서 수개월 동안이나 쓸 수 있는 분량이었다고 한다.86)

쌍성보를 점령한 연합군은 이 곳이 평지에 위치하여 방어에 부적당하고 수만명이나 되는 연합군의 보급물자 확보에도 어려움이 있다고 판단하여 쌍성보에서 남쪽으로 20km가량 떨어진 우가둔(牛家屯)으로 이동하였다. 다만 일부 부대는 성내외에 분산배치되어 적의 침공에 대비하였다. 얼마 후 일(日)·만(滿)연합군의 대부대가 쌍성보를 탈환하기 위하여 반격해 왔는데, 수비군인 중국군 내부에 반란이 있어 쌍성보는 다시 일·만군이 장악하였다.87)이 무렵 한국독립군은 부대훈련과 사병모집에 박차를 가하였다. 하지만 9·18사변 후 북만주지방의 정세가 불안하고, 다수의 교포들이 국내로 되돌아가거나 안전한 곳으로 피난을 갔으므로 한국독립군은 병력충원에 애로가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창환·조경한·차철 등은 이러한 난관을 무릅쓰고 북만(北滿) 각지를 순회하며 징모사업을 추진, 상당한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88)



2) 2차 쌍성보전투 1932년 11월 고봉림군의 참모장 조린(趙麟)과 한국독립군 참모진은 쌍성보 공격을 위한 작전회의를 열고 일부 병력을 쌍성보 교외의 철로변 요지에 매복시켜 일(日)·만군(滿軍)의 증원부대를 차단하도록 하고 11월 17일을 기하여 총공격을 개시한다는 계획을 세웠다.89) 이에 따라 한국독립군은 주공(主攻) 부대의 일부로서 쌍성보 공격에 참가하게 되었다.90) 한중연합군은 공격개시 바로 전에 일부병력을 하얼삔과 장춘(長春)의 양방면에서 쌍성보에 이르는 교외의 양쪽 철로변에 매복시켜 적의 응원부대의 내습에 대비하였다. 이러한 예상대로 과연 적의 증원부대를 태운 열차가 오는 것을 적시(適時)에 차단, 폭파하여 커다란 전과를 거두었다.91)마침내 11월 17일 오후 6시 한국독립군과 고봉림 부대는 다시 쌍성보를 공격하게 되었다. 한국독립군은 주력부대의 일부분 병력으로서 정면과 좌우 3방면에서 공격에 가담하였다. 개전초기에는 일(日)·만군(滿軍)의 저항이 거셌으나, 미리 성안에 침투해있던 편의대(便衣隊(일종의 선발 첩보·유격부대))가 기습을 가하고 뒷산을 점령한 연합군의 산포대(山砲隊)가 성내에 집중포격을 감행하자 일·만군은 맹공을 견디지 못하여 패주하였고 일부는 투항하였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 1개 중대가 거의 전멸하였다.92)

쌍성보가 한중양군에게 다시 점령된 뒤인 11월 20일 하얼삔에 주둔해 있던 일(日)·만군(滿軍)은 폭격기까지 동원하여 대규모 병력으로 반격해 왔다. 연합군은 이를 예상하고 7개 요소지점에 부대를 분산 배치하였으므로 적군이 쉽게 접근하지는 못했지만, 적기의 공습이 무척 심했고 전투가 대단히 치열하게 벌어졌다. 결국 항공기와 대포 등 우세한 화력과 장비를 구비한 일(日)·만군(滿軍)의 맹공격으로 21일 저녁 고봉림군 진영이 먼저 적군에 돌파되어 한국독립군은 22일 새벽까지 무너져 가는 전선을 독려하며 항전을 계속하였으나, 전세가 크게 불리하여 마침내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공방전에서는 피아간에 사상자가 매우 많았는데 한국독립군도 피해가 컸으나 마필과 보급품의 손실이 컸고, 인명피해는 고봉림군에 비하여 비교적 적은 편이였다. 이 전투에서도 한국독립군은 전투의 주력부대로서 두드러진 활약을 보였다.93)일(日)·만군(滿軍)의 반공(反攻)으로 패퇴한 한·중연합군은 쌍성보를 탈출하여 쌍성보 동남쪽의 오상현(五常縣) 밀림지대로 도피하였는데, 일(日)·만군(滿軍)은 항공기의 지원을 받으며 4일에 걸쳐 거의 120km를 추격해 왔다.94) 이에 한중양군은 이러한 추격을 피하여 쌍성보에서 더 멀리 떨어진 오상현(五常縣) 충하진(河鎭)으로 철퇴(撤退)하였다. 여기에서 한·중 양측은 각기 회의를 개최하였다. 고봉림군(考鳳林軍)은 인명피해가 많은 데다가 다수가 도주하여 사기가 극도로 저하되고 군수물자도 부족하였기 때문에, 월동(越冬)의 어려움을 이유로 적군에 투항하였다가 재기(再起)하기로 방침을 정하였다.95) 그러나 한국독립군은 절대 투항할 수 없다는 데에 의견의 일치를 보고 고군(考軍)의 항복을 적극적으로 만류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군(考軍)이 투항방침을 고수하자 결국 한국독립군은 고봉림군과 결별하여 11월 27일부터 독자적 활동방침을 결정하기에 이르렀다.96)

그러나, 한국독립군도 월동(越冬)에 즈음하여 활동의 어려움을 통감하고 잠시 해산하였다가 겨울을 넘긴 뒤 기회를 보아 춘계(春季)에 재기(再起)하기로 하고 부대를 일단 해산하였다. 한국독립군의 이청천·조경한·신숙 등 지휘부 주요인사들과 이들을 끝까지 따르는 장병 40여명 등은 굳건한 항전(抗戰)과 재기의지(再起意志)를 다짐하며 오상현(五常縣) 사하자(沙河子) 지방으로 이동하였다.97) 결국 제 2차 쌍성보 방어전의 실패로 인하여 한국독립군은 큰 타격을 받고 항전(抗戰)활동을 일시적으로 중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5. 경박호전투(鏡泊湖戰鬪)

1932년 11월 29일 한국독립당의 주요인물들은 사하자(沙河子)에서 당중앙회의(黨中央會議)를 소집하고 아래의 사항을 의결하였다.

1. 군사활동 지점을 개정(改定)하여 동만(東滿(연길(延吉), 화룡(和龍), 왕청(汪淸), 동녕(東寧), 혼춘(琿春), 영안현(寧安縣) 등))으로 한정하고, 그 곳의 길림구국군 수뇌부에 특파원을 파견하여 한중합작(韓中合作)을 논의케 한다.
2. 각군구(軍區)의 수훈(受訓)장정을 재 징집할 것.
3. 황학수(黃學秀)를 부사령으로 선임함.98)

이 결의에 따라 한국독립당에서는 강진해(姜振海)·공진원(公震遠)·심만호(沈萬湖) 등 3인을 한국독립군의 대표로 동녕현(東寧縣)의 길림구국군총부(總部)에 파견하여 합작을 교섭케 하였다. 이 때 길림구국군은 1932년 4월 한국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제19사단의 간도파견군이 출동한 이래 항전활동에 큰 타격을 받고 있었다. 특히 동년(同年) 12월에는 간도파견군의 대「토벌」작전으로 구국군은 거의 사산된 상태였고 왕덕림(王德林) 등이 거느리는 일부 부대가 동만(東滿)의 국경근처 산악지방을 근거지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도 1933년 1월 간도파견군 및 관동군(關東軍)의 동녕현(東寧縣)일대 토벌작전으로 시베리아 지방으로 도피하고 말았다.99) 그리하여 동만(東滿)지방에서는 왕덕림(王德林)의 예하 오의성(吳義成)이 길림구국군 전방사령관(前方司令官) 총사령대리로서 요진산(姚震山), 시세영(柴世榮) 등의 잔존부대를 형식상 지휘하였으나 오의성(吳義成)도 당시에는 부재중(不在中)이었고 각부대는 분열되어 독자적 행동을 취하고 있었다.100) 따라서 대표로 파견된 3인은 한·중연합을 구체적으로 상의할 수 없었다.한국독립군은 한국독립당 제15지당부이며 한국독립군 제12군구(軍區)이고, 교포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는 사하자(沙河子) 지방에서 병력의 징모·재소집과 훈련에 열중하여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이에 한국독립군은 위의 결의에 따라 먼저 동만(東滿)지방으로 옮겨간 후 그 지역의 구국군과 연합하기로 하였다.101) 한국독립군으로서는 만주국이 수립되어 체제가 정비되면서 하얼삔 주위의 북만주지역이 점차 일(日)·만군(滿軍)의 세력권에 흡수됨에 따라 활동에 위협을 받게되고 군의 존립기반이 되는 한인교포들도 현저히 줄어들어 큰 곤란을 겪게 되었다. 그러므로 일제(日帝)의 직접적 압력을 피하고 투쟁의 활력을 얻기 위해서는 한인(韓人)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는 동만(東滿) 및 중·소 국경의 변경지방으로 근거지를 이동시켜야 할 필요성이 대두하였던 것이다.1933년 1월 13일 마침내 한국독립군은 길림구국군 제14사(師) 시세영(柴世榮)부대와 연합하여 잠정적으로 부대의 명칭을 「중한연합토군(中韓聯合討軍)」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2월 10일에는 참모장 신숙과 참모 김상덕(金尙德)을 남경(南京)의 국민당정부(國民黨政府)에 특파하여 무기와 탄약 등에 대하여 직접적 후원을 요청하도록 하였다.102)

경박호(鏡泊湖)전투는 한국독립군이 동만(東滿)지역으로 이동하던 도중 일(日)·만(滿)군과 조우하여 전개한 전투였다. 1933년 2월 우가둔(牛家屯)에 머물고 있던 한국독립군은 그달 28 일경 구국군 제14사(師) 시세영(柴世榮)부대와 함께 동진하여 경박호 동쪽에 이르렀는데, 그날 일본군 약 1개 대대가 동경성(東京城)을 출발하여 경박호쪽으로 진격하여 온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이에 한중연합군은 적의 통과가 예상되는 호수주변 계곡의 양쪽 산기슭에 부대를 나누어 매복시키고 대기하였다. 과연 저녁에 전초대 1개분대와 기병(騎兵) 1개중대(일본군인지 만주군인지 미상)가 지나간 뒤 일(日)·만군(滿軍) 후속부대가 빙판위를 행군하며 양군의 매복지점에 도달하였다. 이에 연합군은 빙판 위에 그대로 노출된 적군을 향하여 일제사격을 가하였다. 불의의 기습을 받은 적은 당황하여 제대로 응전하지도 못하고 사방으로 흩어져 도주하고 말았다. 그들을 추격한 한중연합군은 적 1개대대를 거의 전멸시키고 소총 및 경기관총 70정, 실탄 6,000여발, 기타 물품을 노획하는 전과를 거두었다.103) 경박호전투는 한국독립군의 동만(東滿)에서의 최초의 승전이었다.

6. 사도하자(四道河子)전투

1933년 3월 한중연합군은 사도하자(四道河子)104) 에 주둔하며 한편으로는 사병징모, 또 한편으로는 단기적 훈련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때 동만(東滿)일대에 있는 원종교(元宗敎) 신도 신굴(申)·안태진(安泰振) 이하 500여명이 교주 김중건(金中建)의 유명(遺命)에 따라 한국독립군에 응모, 편입하였고 점차 지원하는 청년이 증가하여 한국독립군은 군세가 나날이 증대·발전하였다.105)

그 해 4월 14일 한·중연합군은 이러한 군세의 진작(振作)에 불안을 느낀 영안현(寧安縣) 주둔 일·만군의 연합부대가 한중연합군을 공격하여 온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이에 한중연합군은 적군을 유인하여 포위·섬멸시킬 계획으로 병력을 4로(路)로 나누어 적을 역습하고자 하였다. 그 계책은 1로는 소부대로 편성하여 적을 유인케 하고, 제 2·3로는 주력부대로서 삼도하(三道河)뒤의 분령(忿嶺) 및 사도구(四道溝) 좌우협곡에 배치하여 적의 침입을 기다리게 하며, 제 4로는 이도하자(二道河子) 입구(入口)에 매복하였다가 적의 후방연계와 퇴로를 차단하여 수송중인 보급품을 탈취한다는 내용이었다.106)

마침내 4월 15일 새벽, 적은 예상대로 약 1사(師)의 병력으로 영안현 남쪽 황가둔(黃家屯)에서 이도하자(二道河子) 방면을 거쳐 사도하자(四道河子)로 침입하였다. 이것은 완전히 한중연합군의 계략에 빠진 셈이었다. 이에 연합군 각 부대는 적의 퇴로를 끊고 포위한 뒤 지시지점을 향하여 맹공을 퍼부었다. 그 결과 적군은 거의 과반수가 섬멸되고 패잔병은 금창구(金廠口) 방면으로 도주하였다. 각군은 이를 추격하여 큰 전과를 얻었고 16일 새벽에야 전리품을 수습하고 부대를 정돈, 개선하였다.107)5월 2일에는 이러한 승세를 틈타 유격대를 분파하여 목림자(木林子)·금창구(金廠口)·주가둔(朱家屯)·황가둔(黃家屯)의 일(日)·만군(滿軍)을 대소 20여차례의 전투 끝에 거의 소탕하는 맹위를 떨쳤다. 이와 같은 전투로 한중연합군은 많은 전리품을 획득했을 뿐만 아니라 사도하자(四道河子) 일대의 일(日)·만군(滿軍)에 커다란 손실을 입혀 당분간 사도하자(四道河子) 주변지역에는 일·만군이 주둔하지 못하였다.108)

7. 동경성(東京城)전투

사도하자(四道河子)전투 직후 한국독립군은 5월 29일 부사령 황학수(黃學秀)로 하여금 편의대(便衣隊) 1대를 인솔케 하고 북만(北滿) 각군구(各軍區)로 파견, 장정을 징모하여 전투지역으로 동원토록 하였다. 그 뒤 한중연합군은 영안현성(寧安縣城)을 점령하기 위하여 먼저 동경성(東京城)을 공격하기로 하였다. 동경성은 영안현 서남쪽에 위치한 발해의 고도(古都)로서 영안현 방위상의 요충지임과 동시에 교통의 요지였으며 일(日)·만군(滿軍)의 식량보급기지 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이곳을 점령함으로써 영안을 고립시키고 아군의 군량을 확보하며 활동의 거점으로 삼을 수 있는 중요한 곳이었다.109)

한중연합군은 6월 7일 동군(同軍)을 3로(路)로 구분하여 동경성을 공략하였다. 이때 편의대를 성내에 미리 침투시켜 내응(內應)케 하였다. 제(第) 1 로(路)는 기병(騎兵)으로써 마안산(馬鞍山)을 경유하여 목단강(牧丹江) 연하(沿河)의 산릉(山陵)일대로 진출케 하고 허장성세로 적이 동경성을 지원하지 못하게 하였는데, 만약 적이 증원을 나오면 영안현성으로 진공(進攻)하도록 하였다. 제 2 로는 1여(旅)로써 영안현성과 동경성 사이에 매복케 하여 교량·전선(電線) 등을 먼저 폭파·절단하여 원병(援兵)을 차단케 했다. 제 3 로는 주력군으로서, 좌우익으로 나누어 동경성을 협공케 하였다. 그리하여 그날 저녁에 공격을 시작하여 3시간 정도 혈전을 벌였으나, 서문(西門)공격을 맡은 한국독립군이 먼저 성문을 격파하고 성내로 진입하였다. 일본군이 전세가 불리함을 알고 북문으로 도주하였지만, 복병에 거의 궤멸되었다. 만주군 여장(旅長) 마도재(馬道才)는 부하 수명을 데리고 겨우 도망하였고, 만주군 대부분은 항복하였다. 전투가 한창일 때 영안현성의 적은 감히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방포(放砲)하며 경계할 뿐이었다.110)

한중양군은 입성하여 일면(一面) 주민을 위무하고, 또 한편으로는 전장(戰場)을 정리하였다. 전리품은 사도하자(四道河子)전투 때보다 많았는데, 특히 식량이 많았기 때문에 연합군의 활동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양군(兩軍)은 영안현성을 점령치 않으면 동경성을 수비하기가 어려웠고, 후속보급이 곤란한 데다가 적군 대부대의 역습이 예상되었으므로 그 곳에서 철수하여 왕청(汪淸)·동녕현(東寧縣) 사이의 산림(山林)지대로 이동하였다.111)

8. 대전자령(大甸子嶺)전투

1) 전투개황

한국독립군의 항전사상 최대의 승전이 바로 대전자령전투라 할 수 있다. 지금까지의 전투대상이 주로 만주군이었음에 비하여 이 전투는 일본군을 상대로 벌인 대규모 작전이었던 것이다.

동경성으로부터 철수하여 왕청현(汪淸縣) 동북의 산악지대에서 활동하고 있던 한중연합군은 1933년 6월 하순(25일경) 노송령(老松嶺)을 넘어 동서검자(東西子)에 이르렀다.112) 이때 연합군은 대전자(大甸子(일명 나자구(羅子溝)))에 머물고 있던 일본군―한국주둔 제19사단의 「간도파견군」113), 대장은 지전신길(池田信吉) 대좌(大佐)―이 연길현으로 철수하리라는 첩보를 입수하였다. 이 간도파견군은 1932년 초 연변지방에서 왕덕림(王德林)의 구국군이 봉기하여 일(日)·만(滿)당국의 치안을 교란시킬 뿐만 아니라 일(日)·만군(滿軍)의 활동에도 상당한 지장을 초래하고 있었으므로, 이를 「진압」하기 위하여 동년(同年) 4월 3일 연변지방에 출동하여 만주국 군경을 지원하여 왔던 부대였다.114)

그런데, 1933년 중반에 접어들어 간도파견군과 일·만 당국의 끊임없는 토벌로 반만항일군(反滿抗日軍)은 적지 않은 타격을 받고 그 활동이 위축되고 있었다. 이에 일제(日帝) 당국자들은 어느정도의 성과를 거두었다고 판단하여 연변일대의 치안을 만주국측과 본래의 위수(衛戍)구역 담당군인 관동군에 임무를 넘기고 한국으로 철수시키려 하였다.115) 이에 따라 간도파견군은 관동군 소속 간도지구 경비대(대장 인견대좌(人見大佐))와 교대하게 되었다.

동년 6월 25일 관동군 경비대가 연변지방에 들어오자, 간도파견대는 6월 28일부터 나자구에서 한국으로 철수하기 시작했다.116)이러한 일본군 철수의 정보에 접한 한중양군은 3일간 100여km를 강행군하여 6월 28일 경 대전자 북방 4km지점인 노모저하(老母猪河)에 도착하였다. 대전자는 수분대전자(綏芬大甸子), 또는 나자구(羅子溝)로 불리우던 곳으로 연변지방에서 연해주(沿海州)로 들어가는 길목의 요충지였다.117) 여기에서 연길(延吉)쪽으로 들어가는 길은 대전자(大甸子)남쪽 12km지점(태평구(太平溝) 부근)에서 훈춘방면으로 가는 남쪽길과, 백초구(百草溝)를 경유하여 서쪽으로 가는 통로가 있었다. 훈춘쪽으로 가는 남로(南路)는 험준하였으나 상태가 서로(西路)보다 비교적 좋은 반면 우회해야 하며, 백초구로 향하는 서쪽도로는 약 16km정도의 험준한 협곡과 울창한 산림으로 이루어져 일렬(一列)종대 행군이 불가피하고 험난하지만 거리가 더 가까웠다.118) 따라서 이 양자 가운데 일본군이 어느 길을 통과할 것인지가 중요한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와 같은 철수노선의 선택은 간도파견군이 19사단의 각 부대에서 차출한 혼성부대였으므로 각 부대의 주둔지가 달라 한국내의 어느 곳을 도착지로 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파견대장인 지전대좌(池田大佐)가 회령(會寧)을 주둔지로 하는 보병 제75연대장이었기 때문에, 회령을 한국내의 우선적 도착예정지로 정했을 가능성이 많았으리라고 추정된다.119) 그러므로 회령을 귀환목적지로 한다면 왕청(汪淸)―연길(延吉)―용정(龍井)을 경유하는 도로를 택할 가능성이 크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일본군의 철수노선은 훈춘쪽으로 우회하는 길보다는 백초구(百草溝)―연길(延吉) 방면으로 가는 지름길인 서로(西路)를 택할 여지가 많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 한중연합군의 지휘부는 이러한 일본군의 내부사정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군의 진로문제로 매우 고심하였다.일본군은 1년 2개월 가량 체류했던 나자구의 주둔지에서 그들이 사용했거나 비축하고 있던 많은 군수물자를 싣고 귀환하기 위하여 근처의 민간인들로부터 우마차(牛馬車)를 강제로 징용하기 시작했다.

이에 한국독립군은 첩보대를 파견하여 징용된 우마차의 수량과 이동노선, 출발시일 등을 정탐케 하였다. 그 결과 징용된 우마차는 3천여양(輛), 출발행로(行路)로 왕청(汪淸)방면으로 가는 길을 택하였고 출발시각은 오전 8시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120) 그리하여 연합군은 적군을 유리한 지점에서 무난하게 매복·공격할 수 있는 지점을 선정하여 부대를 배치하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한국독립군은 6월 28∼9일 경 대전자 서쪽 화개산(華蓋山)을 우회하여 적통과 예상지점인 대전자령의 양편 산허리에 매복하였다.121)대전자령은 태평령(太平嶺)이라고도 하는데, 일본군이 왕청쪽으로 가려면 반드시 지나가야 하는 지점이었다. 이 곳의 지형은 약 1km정도 되는 길다란 협곡으로서 마치 을자(乙字) 모양으로 굽어졌는데, 양쪽은 높이가 800∼1,000미터나 되는 험준한 절벽과 울창한 산림지대로 되어있어 적을 공격하기에는 매우 알맞은 곳이었다.122)이 전투에 한국독립군은 주력부대 약 500여명, 구국군은 2,000여명이 참가하였다. 한국독립군은 주력으로서 300여명이 고개의 가운데부분, 정상 즉 제일 높은 곳에 배치되고 고개의 입구와 출구에는 한국독립군 100여명씩과 구국군이 혼합 배치되었다.123) 연합군은 계곡 양편 산기슭에 구축되있는 참호(일본군이 파놓은 것을 역이용)속에 매복·대기하여 일본군의 습격준비를 완료하였다.124) 한국독립군 총사령 이청천은 공격을 개시하기 전에 아래와 같은 주의사항을 장병들에게 하달하였다.

1. 공적개시는 적군의 후방이 태평령고개 3분의 2 이상의 지점에 도달할 때 총사령의 신호에 의해 개시할 것.
2. 일본군에게만 공격하고 적재된 군용품에는 손해가 없도록 극히 주의할 것.
3. 탄환은 풍부하니 각자 300발 이상을 준비하여 사격개시 전에는 침묵을 지킬 것.
4. 적군의 전멸 후에 군용품 몰수에는 명에 따라 차례차례 정리에 착수할 것.125)

위의 지시사항을 통하여 우리는 한국독립군의 주요목표의 하나가 군수물자의 노획에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작전행동은 정규군이 아닌 비정규군, 특히 안정된 보급루트를 확보할 수가 없이 일종의 유격전을 수행해야 하는 의용군 부대의 경우는 불가피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오히려 이와 같은 적으로부터의 노획물자 활용은 적에게 타격을 줄 수 있는 효과적 방법일 뿐 아니라, 지지기반이 되는 주둔지 부근의 인적·물적 자원의 손실이 없이 자기부대의 전투력을 유지, 확충할 수 있는 매우 효율적인 보급품 확보책인 것이다. 그러므로 전투개시전에 이렇게 적으로부터의 군용품 등 물자의 획득가능성을 일깨워 주는 것도 추위와 굶주림에 지친 병사들에게는 효과적인 사기진작(振作)의 방법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126)

이리하여 한국독립군은 일본군이 연합군의 매복지점을 통과하기를 기다렸으나, 때마침 출발하기로 한 예정일 아침(28일 경) 계속 폭우가 쏟아져 일본군의 출발이 지연되었다. 일본군은 출발을 3일간 연기하였던 것이다. 이에 한중연합군은 폭우와 굶주림에 시달리면서도 일본군에 노출되지 않도록 비밀유지에 노력하며 일본군의 통과를 끈질기게 기다렸다.127)드디어 3일 후인 6월 30일 아침 6시경에 일본군은 나자구를 출발하여 많은 자동차와 우마차에 화물을 적재하고 대전자령을 향해 출발하였다. 선두는 자동차부대, 가운데는 우마차의 행렬 그리고 후방에는 다시 자동차 여러대가 뒤를 따르고 있었다.128) 당시 일본군―간도파견군―은 일년이 넘는 동안의 연변에서의 임무를 마치고 귀환하는 도중이었고 파견부대에 소요되었던 각종 비축물자를 운송하는 자동차나 우마차의 행렬이 많았으므로 대체로 경계가 소홀하고 방심하기 쉬운 상황이었으며 한중연합군이 공격하기가 수월했던 것이 사실이라 할 수 있었다.

당시 간도파견군은 지전(池田)대좌가 인솔하는 주력부대 500명 (보병 제75연대 소속부대가 대부분으로 추정됨)과 산포대(山砲隊) 본부 및 산포(山砲) 2개중대(포4문)·함흥부대(보병 제74연대) 보병 3개중대·기관총대 1개중대·야포 2개중대 (포4문)·기병 1개소대 등으로 이루어졌다. 따라서 보·포·기·공병의 혼성 2개대대 규모를 합친 약 천삼백명 가량이었다.129) 이들 부대 외에 회령으로부터 간 화물호송대 병력과 화물자동차 100대·우마차 500여대 등이 합류하였으니 철수하는 일본군의 규모는 약 1,600여명의 상당히 많은 병력이었음을 헤아릴 수 있다.130)

오후 1시경 일본군의 전초부대가 지나간 뒤 화물자동차를 앞세우고 본대(本隊)가 계곡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일본군의 후미(後尾)부대가 연합군이 매복한 골짜기 안으로 완전히 들어선 뒤 총공격을 개시하자고 약속이 되어 있었지만, 시세영부대의 일대(一隊)가 적의 후미부대가 다 들어오기도 전에 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이에 한국독립군측에서도 일제히 총공격을 감행하였다. 한국독립군은 사격과 함께 바위를 굴러내려 일본군을 살상시키고 자동차·우마차를 파괴하거나 운송불능의 상태에 빠뜨리며 적을 완전히 포위, 고립시켰다. 불의의 기습을 받은 일본군은 고지를 향하여 사격을 가하며 산발적인 저항을 시도하였지만 지형이 불리한 데다가 집중적이며 일사불란한 응전이 아니었기 때문에 큰 효과를 내기가 어려웠다. 반면에 한국독립군과 시세영부대는 절대적으로 유리한 지형에서 집중적이며 조직적으로 맹공을 퍼부었으므로 일본군은 큰 피해를 입지않을 수 없었다. 결국 매복에 걸려든 간도파견군의 많은 병력은 중무기와 차량 등을 방기한 채 도주코자 하였으나, 거의 궤멸되고 말았다. 계곡에 들어서지 않은 일본군중 1개중대가 후방으로 돌아서 능선을 타고 오르며 한국독립군 주력부대의 배후를 향하여 박격포를 난사하였다. 그러나 이들도 그 배후를 다시 기습한 연합군의 공격을 받고 곧 패퇴하고 말았다.131)

대전자령전투는 4∼5시간에 걸쳐 치열하게 전개된 대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한중연합군은 약2개대대 병력의 일본군을 완전히 격파하는 빛나는 승전을 거두었다. 일본군은 이 전투에서 많은 병력이 살상되거나 도주하여 매우 치명적 손상을 받았고 일부 부대가 겨우 빠져나가는 데 그쳤다. 뿐만 아니라 막대한 군수물자를 연합군에게 탈취당하여 커다란 손실을 입게 되었다.132)

대전자령 계곡에서 가까스로 빠져나간 일본군의 일부 병력과 화물자동차·우마차 등의 호송대 행렬은 6월 30일 오후에 화피전자(樺皮甸子) 동쪽에서 약 400명의 연합군(길림구국군인지 아니면 한국독립군인지 불명)과 또다시 교전하였는데, 이후에도 다른 군소 반만항일(反滿抗日)부대의 수차례의 습격을 받는 수모를 겪으며 가까스로 7월 4∼5일 경에야 백초구에 도착하였다.133)대전자전투 당일인 6월 30일 오후에 또 비가 내리고 날이 저물었으므로 한중연합군은 그 이튿날인 7월 1일 아침에 전장을 정리하였다. 이를 통하여 한중연합군은 일본군의 보(步)·기(騎)·포(砲)·공(工)·치중병에 부속된 각종 무기와 탄약, 피복, 식량 등 엄청난 물량의 군용품을 노획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전리품의 내역을 간략히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군복 3,000여 착
군량·문서·기타 군용품 200여 마차
대포 3존(尊)
산포(山砲)·박격포 등 10여존(尊)
담요 3,000여장
소총 1,500정 134)

....이러한 막대한 군수물자의 노획은 우리나라의 독립전쟁사상 최대의 전과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전투에서 입은 한국독립군의 피해는 별로 없어서 경상자 4·5인이 발생하였을 뿐이었다.135) 그러면 위의 전과가 과장되거나 왜곡되었다고 볼 수는 없는 것인가? 당시의 일본외무성 경찰기록이나 조선일보 기사를 통하여 확인해 보도록 하자.

2) 전과분석(戰果分析)

....1933년의 한 일본외무성 경찰기록은 다음과 같이 반만항일군(反滿抗日軍)의 동정을 파악하고 있다.

....<사료(史料) A>

....“비적(匪賊) 서영장(徐營長)이 이끄는 약 300명의 적단(賊團)은 왕청현(汪淸縣) 나자구(羅子溝) 철퇴(撤退)의 아(我) 파견군에 추수(追隨)하여 피난중인 재주만선인(在住滿鮮人) 천6백여명을 그 도상(途上)에서 습격하여 130여명의 사상자를 냈음”136)

....또, 당시의 조선일보(1933년 7월 9일자)는 「조선군사령부 발표」임을 밝히면서 「나자구(羅子溝) 피난민중 일천륙백명사산(一千六百名四散), 토병(土兵)의 습격으로 30명 사상, 행방불명(行方不明)도 오십명(五十名)」이라는 제하(題下)에 아래와 같이 보도하고 있다. 약간 장황한 감이 있지만 기사전문(記事全文)을 인용해보기로 한다.

....<사료(史料) B>

.. “회녕(會寧)에서 간 라자구(羅子溝)수비대에서 환송하는 화물을 호송하기 위하야 륙월 이십륙일 백초구(百草溝)를 출발한 석정조장(石井曹長)이하 이십칠명은 이십구일 라자구에 도착하고 그 이튿날 새벽 세시에 하차(荷車) 백대를 가지고 다시 백초구를 향하야 출발하였는데 그 일행중에는 라자구에서 피난민 사천여명과 피난민의 우마차(牛馬車) 오백여대가 뒤를 달려 칠월 일일에 국자가(局子街)에 도착한 후 륙일 오전 여섯시 삼십분에 회녕(會寧)에 돌아왔다. 이 호송대는 호송중 수차 반군(반군(反軍))과 싸왓는대, 그 교전상태를 보면 륙월 삼십일 새벽에는 태평구(太平溝) 부근에서 약 사천명의 반군과 교전하고 칠월 일일에는 장가점(張家店) 부근에서 약 삼백의 구국군과 교전하고, 이일에는 새벽에 로령(老嶺)부근에서 사오십명의 반군과 교전하얏는데 이상 수차의 싸움으로 말미암아 반군이 버린 시체가 일백, 일본군 이명 부상, 하차 십사대 행방불명, 피란민 사상 삼십명, 피란민중 행방불명이 된자 오십명, 병으로 죽은자 사십명이며 그 밧계 우마차 백대가 행방불명이 되엿는데 백초구에 도착하야 조사한 결과 사천명 피란한 민중에서 일천륙백명은 사방으로 흐터지고 는 반군에게 사로잡히어 행방이 불명된 것이 판명되여 잇다”

....위의 사료(史料) A·B(이하에서는 A,B로 약칭함)에 나오는 피난민과 우마차의 일본군 추종설은 과연 사실이라 할 수 있는가? 먼저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검토해보기로 하자. ....약 1년 2개월간 주둔했던 일본군이 철수한다고 하여 과연 4천 내지 천육백여명에 달하는 많은 피난민과 500여대의 우마차가 일본군의 철수대열에 따라 나설 수 있는가? 물론 중국동북의 불안한 정세속에서 일본군의 보호를 받으며 안일한 생활을 영위하고자 하는 농민이나 상공업자들도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상당수가 일본군을 뒤따라 피난해갔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

....1935년 경 나자구에는 2000여 호의 주민들이 있었는데 한인(韓人)들이 절반이나 되었다.137) 따라서 9·18사변 직후의 나자구 인구는 이보다 적었으리라고 추측된다. 4천여명의 피난민이라고 하면 1933년 중반 나자구 인구의 절반이 넘을 것으로 추정되는 많은 숫자이다. 그러므로 당시 대부분이 농업이나 임업(林業)에 종사하고 있던 4천여명의 중(中)·한인(韓人)들이 자기들의 생활기반이 되는 나자구의 토지(土地)나 산림(山林)지대를 버리고 일본군을 뒤따라갔을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보아야 한다.

....또, B의 기사에 따르면 피난민의 우마차 500여대가 뒤를 따랐다고 하는데 이것이 가능한가? 당시 연변지방의 중(中)·한인(韓人)들은 대부분이 소작농 또는 자작(自作)·소작(小作) 겸업의 농민이었기 때문에 매우 빈곤하였다. 따라서 농우(農牛) 1마리만 가져도 「부농(富農)」에 낄 정도였다. 때문에 주변지역에서 많은 피난민들이 운집하였다 하더라도 농민들이 소유하기가 대단히 어려운 우마차에 짐을 싣고 피난해온 사람들은 별로 없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우마차 500여대는 일본군이 그들의 철수시 군수물자를 적재하기 위해 각처에서 강제로 징용한 것이 거의 확실하다고 하겠다. 결국 B의 기사―한국주둔 일본군사령부의 발표―중 피난민과 우마차의 일군(日軍)추종설은 허구임이 분명하다고 분석된다.

....다음 두번째로「비적(匪賊)」또는「반군(反軍)」의 피난민 습격설에 대하여 그 진상을 규명해보기로 한다. 우선 A와 B의 내용에 차이가 있음이 주목된다. 즉 A에서는「비적」이 피난민을 습격하였다고 하는데 B에서는 반군(反軍)과 호송대가 교전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A에서 언급하고 있는「비적(匪賊)」이 단순한 마적 등이 아니라 구국군 계통의 반만항일군(反滿抗日軍)이라는 사실은「영장(營長)」이라는 문구(文句)로 단정할 수 있다. B의 내용 가운데는 반군(反軍)이 직접 피난민을 공격하였다는 기사가 없고 장가점(張家店) 부근에서 약 삼백의 구국군과 교전하였다고 하는데, A에서 설명하고 있는 서영장(徐營長)부대의 규모와 일치하고 있다.

....A는 일본외무성 경찰의 기록이고, B는 「조선군사령부」의 공식발표이다. 따라서 A가 간접적으로 전달받았거나, 아니면 잘못 알려진 정보를 수록했을 가능성이 있는 자료임에 비하여 B는 전투에 참여했던 주체의 기록이므로 보다 더 구체적이면서도 정확하게 그 실상을 수록하고 있을 것이라고 판단된다. 그러나, B는 외부에 발표하기 위한 홍보(弘報)내지 선전적 성격을 띠기 때문에 오히려 더 자의적이고 작위적인 가공의 사실이 내포될 확률도 많다. 따라서 양자는 철저한 비판과 검증을 통해 냉정히 재분석되어야 한다.

....9·18이후 봉기한 각종 반만항일군(反滿抗日軍) 가운데는 마적출신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이들은「반만항일(反滿抗日)」을 빙자하여 주민들을 습격, 약탈과 살상행위를 자행하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 이들은 어떤 면에서는「비적(匪賊)」이라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도 A에서 보듯이 피난민을 습격하여 대거 130여명을 살상시키거나, B에서와 같이 사천명의 피난민을 습격하여 1,600여명을 사산 또는 행방불명케 할 정도로 무자비하고 무원칙한 대량살륙 행위를 자행하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왜냐하면 민중들은 그들의 생존기반이었기 때문에 부분적인 살상이나 약탈행위, 그리고 부호나 친일주구배들을 납치 또는 감금하여 재물의 조달을 요구하는 사례는 상당수 있었지만 현지 주민들을 마치 「토벌」하듯이 대량으로 학살하지는 않았던 것이다.138)

....우리는 A·B를 통하여 공격의 주체가 반군(反軍), 즉 길림구국군(吉林救國軍)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구국군은 구동북군(舊東北軍)이 상당수 가담하고, 여기에 광범한 중국동북의 민중들이 합세하였으므로, 일반비적들과는 달리 비교적 체계가 잡히고 규율이 있으며 항일(抗日)에 대한 신념이 뚜렷하였다. 그러므로 A·B의 기사에서 이들이 피난민을 습격하여 큰 피해를 냈다고 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고 할 수 있다. 특히 B에서는 명백히 호송대가 반군(反軍)과 수 차례 교전하였다고 적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B의 기록을 통하여 「반군(反軍)」이 피난민을 습격한 것이 아니라 일본군(日本軍)을 공격하였다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것이다.

....B의 기사를 검토해 볼 때 의심나는 사항은 그뿐이 아니다. 우선 B에 따르면 피난민·우마차 등이 딸린 일행이 나자구에서 국자가(局子街)(연길(延吉))까지 하루만에 도착하였다고 하였는데, 이는 지극히 그 사실성이 의심스러운 것이다. 왜냐하면 나자구에서 국자가까지는 약 170km139) 내외에 달하는 산악지대의 먼길이고, 상당히 험악한 도로인데 이런 길을 화물자동차 100대, 우마차 500대, 피난민 4천명 등이 함께 가는 긴 행렬이 하루만에 주파하기는 어렵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피난도중 병으로 40명이 죽었다는 기사도 마찬가지이다. 불과 2∼3일 사이에 어떻게 40명이 병으로 한꺼번에 급사하겠는가? 이 기사는 일본군의 전사자를 위장 발표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마지막으로 A·B를 통하여 대전자전투에서 거둔 한중연합군의 전과(戰果)에 대해 고찰해보자. 물론 A·B양자는 내용에 큰 차이가 있다. 하지만 A의 피난민 숫자와 B의 나중에 확인된 행방불명 숫자 1,600여명이 일치하고 있다. 그리고 A에서의 사상자 숫자 130여명과 B에서의 사상자·피난중 행방불명자·병사자를 포함한 숫자 120여명이 비슷한 숫자를 나타내고 있다. 그러므로 필자는 A·B에 나오는 1,600여명을 철수하는 일본병력의 규모로, 그리고 피난민 사상자 숫자 130여명을 일본군 사상자 숫자로 파악하고자 한다. 즉 지전(池田)대좌가 인솔하는 일부대(一部隊)와 혼성 2개대대 등의 간도파견군 1,300여명에 트럭 100대, 우마차 500여대를 운행하는 호송대 병력을 합하면 거의 1,600여명이 된다. 결국 철수하는 일본군은 약 1,600여명 이었으리라고 추정되는데, 이들 중 많은 병력과 트럭, 우마차 등이 한중연합군의 매복지점에서 기습을 받고 괴멸적 타격을 받았으며, 여기에서 일본군이 최소한 130여명 이상의 사상자를 냈으리라고 추측되는 것이다.

....B에서는 하차(荷車) 14대와 우마차 100대가 행방불명이 되는 큰 피해를 입었다고 하면서도 반군(反軍)의 유기시체가 일백, 일본군 부상자 2명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주장을 펴고 있다. 4천여명의 적과 교전하여 부상자 2명을 냈을 뿐이라고 하니 그것이 진실이 아님을 쉽게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례로 판단하건대 피탈된 트럭이나 우마차도 B에서 기록된 수량 이상이 되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결국 우리는 앞에서 열거한 한중연합군의 노획물자 전과가 약간의 오차는 있겠지만 대체로 큰 과장없이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을 검증(檢證)·확인하였다. 《투쟁사》에서 밝힌 노획물량은 일본군이 발표한 피탈물량―화물차 14대와 우마차 100여대 분량―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으나,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일본군측의 발표가 매우 축소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일군(日軍)측의 발표를 확대 해석해보면 양자는 거의 유사한 물량에 도달할 수 있다.

....일본군이 나자구(羅子溝)에서 철수하다 대전자령(大甸子嶺)에서 큰 피해를 입고 한국으로 패퇴한 뒤 나자구 일대는 구국군(救國軍)과 한국독립군 등의 유력한 근거지가 되었고140) 일제측은 전투에서 주력으로 크게 활약한 한국독립군의 존재를 재인식하게 되었다. 일제관헌기록은 이후 한국독립군의 동정을 다음과 같이 추적하고 있다.

....“민족파(民族派) 불령단(不逞團)의 대두 : 화전현(樺甸縣)지방에 근거하여 조선독립(朝鮮獨立)을 표방·행동하여 온 불령국민부(不逞國民府) 군사부장 이청천(李靑天)일파는 소화오년(昭和五年)(1930년 : 인용자) 이래 공산당의 압박에 의해 소련령 송전관(松田關)지방에 잠입하여 침묵하여 왔으나, 근년(近年) 공산파가 반만항일공작(反滿抗日工作)에 기울어 민족주의(民族主義)와 공통되는 점이 있자 최근 다시 대두하며 왕덕림(王德林) 반란부대 잔당 장광복(張光福) 등과 기맥을 통하여 동지 이백명을 규합, 중한혁명군(中韓革命軍) 반일철혈단(反日鐵血團)이란 것을 조직하여 액목현(額穆縣) 도림하(都林河)지방에 근거하여 간도평야 진출의 기회를 엿봄”141)

....물론 위의 문서는 이청천(李靑天)을 국민부(國民府) 군사부장으로, 연합한 중국군 부대를 장광복(張光福) 부대로, 그리고 활동무대를 액목현(額穆縣) 지방으로 잘못 인식하고 있는 등 문제가 있다. 하지만 한국독립군 총사령 이청천 등의 활약에 따른 세력대두, 그리고 이에 따른 관심과 경계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간도파견군이 대전자령에서 참패하였음은 압록강 대안(對岸)지방 및 나자구 일대에 대한 일본군의 추계(秋季) 「대토벌전」을 통해서도 이를 역설적으로 증명할 수 있다. 즉 1933년 8월 중순 관동군(關東軍)의 독립수비대가 압록강 대안의 반만군(反滿軍)을 대대적으로 공격하였고, 10월 초순에는 일군(日軍)의 혼춘(琿春)·밀강(密江) 토벌대가 연변부근 중(中)·소(蘇) 국경지방의 공산군과 반만군(反滿軍)을 대거「토벌」하였다.142) 또한 그해 11월 중순에서 하순에 걸쳐 일본군은 대부대를 동원하여 나자구를 4면에서 포위, 대대적 공세를 펼쳤던 것이다.143)

....이상에서 고찰한 바와 같이 한국독립군은 대전자령전투에서 비록 길림구국군 시세영부대와 연합, 한중합작의 형태를 취하였다고는 하지만 전투의 주역으로서 크게 활약하였다. 대전자령전투는 청산리·봉오동 대첩에 버금가는 빛나는 대첩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Ⅳ. 동녕현성전투(東寧縣城戰鬪)와 한국독립군(韓國獨立軍) 활동의 종언(終焉)

1. 동녕현성전투(東寧縣城戰鬪)

대전자령(大甸子嶺)전투에서 대승한 한국독립군은 약 2개월간 대전자(大甸子)에 주둔하여 휴식하면서 노획품을 분배, 무장을 강화하며 훈련을 실시하는 등 부대의 재편성과 전력강화에 노력하였다.144)이 무렵 백두산 근처의 안도현(安圖縣) 일대에서 활동하고 있던 길림구국군 대리총사령 오의성(吳義成)은 대전자전투에서 한(韓)·중연합군(中聯合軍)이 대승했다는 소식을 듣고 부대를 이끌고 대전자(나자구) 부근으로 이동하여 왔다.

따라서 그동안 독자적으로 활동해 오던 시세영(柴世榮)부대는 오의성 취하에 통합되었고, 한국독립군도 오의성이 지휘하는 구국군 부대와 협동하게 되었다.145) 당시 오의성 부대는 일(日)·만군(滿軍)의 반만항일군(反滿抗日軍)에 대한 압력이 가중됨에 따라 큰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었다. 이에 오의성(吳義成)은 한국독립군과 같은 민족주의계 무장세력과도 제휴함은 물론 기타 항일(抗日)부대 및 중국공산당계 유격부대, 심지어는 마적 등과도 연합하여 항일(抗日)역량의 집중과 자기세력의 증진을 도모하게 되었다.146) 그리하여 한국독립군은 오의성부대를 주축으로 하는 여러 반일(反日)부대와 함께 공동으로 투쟁을 전개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한국독립군의 오의성부대와의 합작은 결과적으로 한국독립군이 해체하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고 말았다. 이미 앞의 Ⅲ장 1절에서도 설명한 바와 같이 구국군 내부에는 창건초기부터 상당수의 중(中)·한인(韓人) 공산주의자들이 침투해 있었는데 대전자전투 이후에 합류한 오의성부대에도 주보중(周保中)을 비롯한 적지 않은 공산주의자들이 존재하여 주요 직책을 맡고 있었고 한인(韓人) 공산주의자들로 구성된 「별동대(別動隊)」가 따로 편성되어 있었다.147) 특히 중국공산당에서 파견된 주보중(周保中)이 총참모장이 되면서 구국군 각부대는 오의성(吳義成)의 말을 듣지 않고 주보중의 지휘를 따르는 경우가 많아 중국공산당의 영향력이 증대되고 있었다.148)

따라서 한국독립군은 오의성부대 내의 좌익세력의 공산화공작과 음해·모략으로 점차 어려운 지경에 빠지게 되었고, 동시에 이들과의 대립과 갈등이 심화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이러한 경향은 1933년 9월 초순의 동녕현성(東寧縣城)전투 이후 더욱 본격화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이 전투이후 중공당(中共黨)계열의 한인(韓人)부대가 합류하게 되어 좌익세력이 더욱 증대되었고, 이에 따라 이들의 적화(赤化)운동과 한국독립군에 대한 중상모략·음해공작이 더욱 치열해졌기 때문이다.한국독립군과 오의성(吳義成)부대 등 연합군은 각부대가 연합해서 부대원의 숫자가 크게 증가하자 보급문제가 중요한 관건이 되었다. 이들 반만항일군(反滿抗日軍)은 국가적 차원의 후원이나 보급지원도 없고, 물자나 재원을 확보할 근거지도 없을 뿐 아니라 마적까지도 포함한 잡다한 군대였다. 그러므로 이들은 주변의 도시나 농촌을 습격·약탈하여 보급문제를 해결하는 사례가 많았다. 한국독립군과 오의성부대는 월동준비, 즉 보급물자를 확보하기 위하여 동녕현성(東寧縣城)을 공격하게 되었다.149)

원래 한국독립군의 활동기반은 재만 한인(韓人) 농민·교포의 납세와 국내 특별수입에 의존했었다. 그러나, 9·18사변으로 일제가 중국동북(中國東北)을 강점(强占)하고, 동북의 질서가 극도로 혼란하게 되자, 한인(韓人)농민들의 정착영농(營農)이 원활치 못하게 되었고 국내(國內)와의 연락도 두절되고 말았다. 그러므로 한국독립당·군은 재만한인들을 효과적으로 장악할 수도 없게 되었다. 이에 따라 존립기반이 크게 타격을 받게 되었으며 자연히 재정적 궁핍이 뒤따라 그 활동도 위축되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독립군은 이같은 문제를 타개하기 위해 중국의 반만항일(反滿抗日)부대와 합작함으로써 숙식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고 무기·탄환 등의 확보에도 도움을 받았다. 즉, 한국독립군은 중국의 항일(抗日)부대와 합작으로 전투를 수행한 뒤 노획품을 분배하여 식량·피복과 무기·탄약 등을 확보, 조달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150)동녕현성(東寧縣城)은 1930년대 초 한 때 왕덕림(王德林)이 이끄는 구국군의 주요근거지였고 한인 민족주의자들의 기반이기도 했었다. 그러나, 1933년 9월 초순에는 약 500명의 일본군과 1,500여명의 만주군 기타 많은 경찰과 자위단 등이 주둔하여 있었다. 그들은 대포와 장갑차 등 현대적 무기를 갖추고 있었으며 성안에는 견고한 방어시설이 구축되어 있었다. 때문에 동녕현성은 정치·군사상의 요충지였고, 적군의 병기창과 군수품저장소가 있어 연합군이 군수물자를 획득하기에는 적당한 곳이었다.151)

9월 6일 나자구에서 이동하여 온 한국독립군은 오의성 휘하의 시세영(柴世榮)·사충항(史忠恒)152)·김산(金山) 등의 부대 및 중국공산당의 훈춘·왕청 유격대 한인(韓人)부대와 연합하여 동녕현성을 공격하게 되었다. 이들의 총병력은 약 1,500여명에 달하였다.153) 밤 9시경 연합군은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때 중공유격대는 성의 서문 밖 서산포대(西山砲臺)를 습격하고 기타 부대는 서문과 동·남문쪽을 공격하기로 하였다.154) 한국독립군은 사충항(史忠恒)부대와 함께 서문쪽 공격을 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155)중공(中共)유격대는 서산포대를 격전을 치른 뒤에 점령하였고 서문방향으로 진공(進攻)한 사충항부대와 한국독립군은 일본군의 완강한 저항을 받아 매우 고전하였으나, 결국은 서문을 돌파하는 데 성공했다. 동문과 남문을 공격한 시세영, 김산 등의 부대는 비교적 순조로이 성문을 격파하고 동녕현성 시가지에 진입하였다.

동녕현성전투는 이튿날 아침까지 지속되었다. 연합군은 이 전투에서 성을 3방면에서 돌파, 거의 점령하였고 적군은 성내의 한 구석을 차지하고 계속 저항하였다. 성내의 만주군은 연합군이 성에 들어와서 군수물자를 약탈하지 않으면 저항하지 않겠다고 연합군과 약속하였으나, 동남문에 진입한 일부의 연합군이 군수물자를 약탈하자 만주군은 격렬하게 저항하였다. 여기에 일본군이 합세하여 대포·장갑차를 앞세우고 대거 반격해 왔다.156) 이리하여 연합군은 점차 수세에 몰리게 되었고, 결국은 일(日)·만군(滿軍)의 증원부대가 내원(來援)할 것을 우려하여 성을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일(日)·만군(滿軍)은 많은 병력을 투입하여 연합군을 추격해와 연합군은 상당한 피해를 입었는데, 구국군 여장(旅長) 사충항(史忠恒)은 이 전투에서 부상당하였다.157) 한국독립군도 이 전투에서 총사령 이청천이 부상당하고 군의관 강진해(姜振海) 등 수십명이 전사하였다.158) 한국독립군 등 연합부대는 이 전투에서 비록 패퇴하기는 하였지만, 수백명의 일·만군을 살상하고 대량의 무기와 군수물자를 노획하는 다대한 전과를 거두었다.159)

2. 한국독립군 활동의 종언(終焉)

동녕현성전투 이후 중공(中共)의 왕청·훈춘 유격대의 일부부대(대부분이 한인(韓人), 대체로 약 50명 내외)는160) 시세영·사충항려(史忠恒旅)와 연합하여 나자구일대에 주둔하면서 이들과 협동작전을 전개하게 되었다.161)

한국독립군도 이 전투 이후 시세영부대 등과 함께 대전자(大甸子(나자구(羅子購)))에 주둔하게 되었는데, 이미 위에서 설명했듯이 오의성부대 내에는 한인(韓人) 주축의 별동대, 중공(中共) 계열의 왕청·훈춘 유격대 일부병력 등이 존재하고 있었다. 특히 참모장 주보중(周保中)162) 은 중공당원(中共黨員) 호택민(胡澤民)·왕윤성(王潤成)·왕송백(王松栢)·진한장(陳翰章(오의성부대 비서장))등과 함께 오의성부대 내의 공산화와 통일전선(統一戰線)공작을 진행시키고 있었다.163) 또한 사충항(史忠恒)·시세영(柴世榮) 부대에도 상당수의 중공당(中共黨) 한인(韓人) 공산주의자들이 침투하여 정치공작을 전개하던 중이었다.164)

그러므로 민족주의 이념으로 무장한 한국독립군은 차츰 이들과 대립하게 되었고, 주보중(周保中)의 영향력이 증대하고 있던 오의성(吳義成)부대 가운데서 점차 고립되었다. 또한 연변지방 한인(韓人)들의 다수가 차차 좌경화하여 한국독립군은 그 존재기반을 잠식당하여 가는 곤란한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165)1933년 9월∼10월 초순경 시세영(柴世榮) 등은 한국독립군에 대하여 구국군에 합류할 것과 독립군 무장의 반수 이상을 시세영부대로 넘기라는 무리한 요구를 수차례나 강요하였다.166) 시세영의 무기이양 요구는 대전자령전투 이후의 노획품 분배시 한국독립군과의 사이에 발생한 반감(反感)에서 기인하였다. 물론 이러한 요구는 한국독립군에 의해 거절되었다. 이에 시세영은 한국독립군에 대한 좋지 않은 감정을 더욱 굳히게 되었다. 이때 한국독립군을 친일부대라고 하는 등 모략·이간질해오던 주보중(周保中) 등과 한인(韓人) 공산주의자들은 이러한 기회를 틈타 한국독립군을 음해하고자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167)

이러한 상황에서 대전자령 및 동녕현성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은 일본군이 곧 반격을 가하여 오리라는 첩보가 입수되었다. 이에 한국독립군은 구국군 각 부대의 장교들과 그에 대한 방어 계획을 협의하였다. 그 결과 한국독립군은 총사령 이청천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주보중(周保中) 등이 주장한 작전계획에 따라 4개부대로 분산 배치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은 주보중(周保中) 등을 비롯한 오의성부대 내의 중(中)·한인(韓人) 공산주의자들, 그리고 이들과 야합한 시세영(柴世榮) 등이 한국독립군의 무장해제를 강요하기 위해 취한 음모였다.168)

그해 10월 주보중은 오의성의 명령을 빙자하여 오의성부대(시세영부대소속) 약 2개 사(師)를 동원, 한국독립군 사령부를 기습포위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이청천 총사령 이하 사령부요원 80여명을 구금한 뒤 다시 많은 병력을 동원하여 4개처에 분산배치되었던 독립군부대를 포위하고 전원의 무장해제를 강요하였다. 결국 이러한 사태로 한국독립군은 장교 등 330여명이 체포되어 대전자 시가에 구금되었고, 다수의 대원이 사산(四散)·도주하고 말았다.169) 이를 계기로 한국독립군은 무장을 박탈당하여 해체의 위기에 직면하였다.

이러한 사태가 발생하게 된 배경으로는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공산주의자들의 한국독립군에 대한 포섭·통일전선공작이 실패한 뒤 격화된 음해공작, 그리고 시세영의 자기세력 증강을 위한 요구―구국군으로의 합류와 무기이양 등―가 좌절된 데 대한 반발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170)

이와 같은 한국독립군의 위기는 조경한 등의 끈질긴 노력으로 구국군 대리총사령 오의성이 주보중 등의 음모임을 뒤늦게 깨닫고 주보중 등 공산주의자들을 응징·축출함으로써171)해소되었다. 체포·구금되었던 한국독립군 성원(成員)들은 동년 10월 초순경 풀려났고, 압수당한 무기도 나중에 되찾게 되었다.172) 이에 따라 한국독립군은 다시 재기(再起)를 기도하였다. 그러나 이미 다수의 장병이 구국군의 포위를 벗어나기 위해 사산·도피한 데다가 구국군에 대한 악감정과 적개심이 깊어져 더이상 구국군―구체적으로 말하면 오의성·시세영부대―과는 공동보조를 취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따라서 한국독립군의 잔여병력은 오의성부대와 결별하고 독자적으로 행동하게 되었다.그러나, 이 시기의 연변지방은 공산유격대의 근거지인「소비에트」가 다수 창건되는 등, 공산세력이 증대되고 있어 한국독립군은 지지기반을 구축하기가 대단히 어려웠고,173) 또한 동년(同年) 가을에 일본군의 동북지방, 특히 연변의 나자구(羅子溝) 일대에 대한「토벌」작전이 대대적으로 개시됨에 따라 그 활동이 위축되지 않을 수 없었다.이와 같이 한국독립군이 곤경에 빠져 있을 때 중국관내(中國關內)에서 활약하고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중국국민당정부의 협조로 한인(韓人)청년들을 중국 군관학교(軍官學校)에 입학시켜 군사교육을 받게 함으로써 조국광복전쟁에 대비한 핵심적 간부들을 양성코자 하였다. 그리하여 임시정부는 중앙육군군관학교(中央陸軍軍官學校) 낙양분교(洛陽分校)에 한국청년군사간부 특별훈련반을 설치하고 중국동북에서 활동하고 있던 독립군의 주요간부들과 청년들을 중국관내로 이동시켜 교육시킬 계획을 수립하였다. 여기에서 이청천은 교관겸 책임자로 선정되었다.174)

한편, 한국독립당·군은 내외적으로 처한 위기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조경한 등을 남경(南京)의 국민당정부(國民黨政府)에 파견하여 군사원조를 청하기로 결정하였다(앞에서 설명한 바 있지만 한국독립당에서는 이미 1933년 2월에 신숙·김상덕 등을 같은 목적으로 남경(南京)에 파견한 적이 있었으나, 이들은 활동이 여의치 않아 남경(南京)에 체류하고 있어 연락이 두절된 상태였다). 한국독립군의 잔여부대는 신굴(申), 최악(崔岳), 최만취(崔晩翠), 안태진(安泰振) 등이 이끌고 영안(寧安), 목릉(穆陵), 밀산(密山) 등지의 산림지대로 이동하게 되었다.175)그런데, 1933년 10월 초순 이규보(李圭輔)·오광선(吳光鮮) 등을 통하여 한국독립군에 임시정부의 위와 같은 계획이 전달되었다.176)

그리하여 10월 20일경 마침내 한국독립당 당수 홍진(洪震) 및 총사령 이청천(李靑天)·조경한·오광선·공진원(公震遠)·김창환(金昌煥) 등 한국독립군 주요간부들과 한국독립군 가운데에서 선발된 군관학교 입학지원자 등 40여명은 중국관내로 먼저 이동하게 되였다.177) 이들중 홍진·이청천·조경한 등 일부간부는 제정당(諸政黨) 및 임시정부에 합류하였고, 대다수의 청년들(34명)은 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 특별훈련반에 입교하여 군사교육을 받았다. 이 훈련반은 이청천 등이 데리고 온 청년 34명 이외에 중국관내 북경(北京)·천진(天津)·상해(上海)·남경(南京) 등지에 있던 청년들이 합류, 92명이나 되었다.178) 이들은 1933년 12월에 입학하여 1935년 4월에 62명이 졸업하였으나, 일본의 항의로 제 1 회 졸업생을 배출한 뒤 폐쇄되고 말았다.179)임정의 계획에 따라 총사령 이청천 등 주요간부들과 군의 우수한 인적자원이 대거 이동하였으므로 한국독립군의 활동은 사실상 새로운 국면(局面)을 맞이하게 되었다.

즉 한국독립군의 주요성원들이 중국관내로 옮기게 되자 사실상 한국독립군의 활동은 이제 동(東)·북만(北滿) 일대에서 종식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180) 물론 최악, 안태진 등이 거느리는 일부 지대(支隊)병력이 밀산(密山)·호림(虎林) 등의 산악지대에서 활동하며 중국본토로의 이동을 거부하고 완강하게 항전을 지속하였지만 이들의 활동은 오래 지속되지 못하였으며, 큰 성과를 거두지도 못했다. 이들은 얼마후에 사방으로 흩어졌거나, 아니면 상당수는 중국공산당 계열의 유격대―동북반일연합군(東北反日聯合軍)·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 등―에 흡수·편입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하여 1932∼3년 동·북만주 지방에서 혁혁한 전과를 거두었던 한국독립군은 거의 자취를 감추고 말았고, 이에 따라 이 지역에서의 한인(韓人) 민족주의계(民族主義系) 독립군의 활동도 그 종말을 고하였다.181)그러나, 중국관내로 이동한 한국독립군의 주요성원들은 후일 임시정부 및 그와 관련된 각 정당(政黨)―신한혁명당·민족혁명당·통합 한국독립당 등―에서 크게 활약하였고, 중앙군관학교(中央軍官學校) 낙양분교의 특별훈련반을 통해 배출된 인재들은 대부분 광복군의 기간요원(基幹要員)들이 되었다.

V. 한국독립군 항전(抗戰)의 특징과 그 의의(義意)

이상에서 한국독립군의 항일무장투쟁에 대하여 비교적 상세하게 고찰하였다. 이제 한국독립군 항쟁의 특징과 그 역사적 의의를 간략히 요약·정리해 보기로 한다.한국독립군의 항일무장투쟁에 있어 중요한 특징은 다음과 같은 몇가지로 집약(集約)할 수 있다.첫째, 한국독립군은 한국독립당의 당군(黨軍)으로서 민족주의 이념에 따라 조국의 해방을 위해 투쟁한 무장세력이라는 점이다. 그러한 성향(性向)은 한국독립군에서 활약한 주요간부들이 대부분 양반·지주출신에 유림·대종교·원종교(元宗敎) 등과 관련되었고, 한학(漢學)수학이나 무관학교(武官學校) 졸업이라는 학문적 소양을 갖춘 인사(人士)들이었다는 데에서 상징적으로 찾아볼 수 있다. 따라서 이들이 지도하는 한국독립군은 당시 중국동북지방에서 세력을 확산시키고 있던 공산세력과 대립·투쟁하였고, 끝내는 좌익세력의 증대로 존립기반이 위축당하고 나중에는 군의 활동도 큰 지장을 받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그러나,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도 남만주지방의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과 함께 민족주의 세력을 대표하여 한인(韓人)들의 권익을 보호하고, 반공(反共)투쟁을 수행하며 조국과 민족의 독립과 해방을 위해 끈질기게 투쟁하였던 것이다.

둘째, 한국독립군은 대체로 중국동북의 반만항일군(反滿抗日軍)과 연합하여 공동으로 작전을 전개하였다. 물론 한중연합의 형태를 취하였지만 한국독립군은 여러 전투에서 주력(主力)부대로서 크게 활약하였다. 이러한 한중합작(合作)의 투쟁방식은 자기세력의 미약이라든가 무기·식량 등 보급체계의 미비를 중국의용군에 의존함으로써 어느정도 보충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으나, 항상 상대방과 갈등요건을 내포하고 있었으며 여러가지 한계를 갖기 마련이었다. 한국독립군이 주로 연합의 형태로 반만항일(反滿抗日)투쟁을 벌인 것은 강력한 독자적 전투능력을 보유하지 못한 데서 기인(起因)하였다.

결국 합작하였던 오의성(吳義成)·시세영(柴世榮) 등의 길림구국군 부대와 대립하고 끝내 이들과 결별하였던 과정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하지만 대전자령(大甸子嶺)전투 등의 사례에서와 같이 한중연합(韓中聯合)형태의 투쟁이 큰 효과를 발휘할 수 있었음은 긍정적 의미에서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세째, 한국독립군은 상비적(常備的) 무력(武力), 즉 정규군(正規軍)이 아닌 민병(民兵) 내지 의용군(義勇軍)적 성격을 띠었다. 물론 한국독립군은 초기에는 비밀 결사(結社)로서 군구제(軍區制)를 시행하여 인적(人的) 자원(資源)을 동원할 수 있었으나, 중국동북(中國東北)에 만주국(滿洲國)이 수립되고 일제(日帝)가 전동북(全東北)을 장악하자 이같은 방식(方式)은 유지될 수 없었다. 한국독립군의 이러한 성격은 9·18사변 이후 군(軍)의 지지기반이 되는 한인사회(韓人社會)와 유기적으로 연결될 수 없다는 데에서 오는 현상이기도 하였다.그러한 이유 때문에 한국독립군은 경우에 따라 군을 해산하였다가 사태가 호전되면 병력을 재소집하거나, 징모하는 등 일정한 조직체계와 부대규모를 구비하지 못했다.

이와 같은 요소는 한국독립군으로 하여금 강력한 전투력을 유지·보존할 수 없게 하는 취약점이라고 할 수 있었다.네째, 한국독립군의 전술적 특징은 정규전의 형태보다는 기습, 매복이라든가, 지형·지세를 유리하게 이용하여 적에게 타격을 가하고 근거지를 이동하는 변칙적 비정규전, 즉 일종의 게릴라전 내지 유격전의 형태를 띠었다는 것이다. 물론 중국의용군과 연합하여 대규모 공격을 가하는 정규전 형태의 전투도 있었으나, 대체로 비정규전 형태의 투쟁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나, 이러한 투쟁전술은 적의 세력이 강대하고 아군의 전투력이 열세에 처한 상황에서는 유효하고 적절한 방략(方略)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독립군은 이러한 작전으로 많은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한국독립군의 다섯번째 특징은 전투이후 획득한 노획물자를 중요한 보급원(補給源)으로 활용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만주국이 수립된 뒤 일(日)·만(滿)군경이 동북을 석권하자 군수물자 확보는 최대의 난제(難題)가 되었다. 그러므로 안정되고 충분한 지지기반이나 보급원을 마련할 수 없었던 한국독립군이 이러한 방식을 채택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그렇다고 하여 한국독립군이 중(中)·한인(韓人) 농민이나 도시 등을 습격하여 약탈한 사례는 거의 없었고, 오히려 대민(對民)봉사활동을 통하여 지지기반을 넓히려고 노력하였던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그러면 위와 같은 특징을 띠고 1930년대 초 동·북만 지역에서 투쟁한 한국독립군의 활동은 어떠한 역사적 의의를 갖는가? 그것은 대체로 다음의 몇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첫째, 중국의 길림자위군·길림구국군 등과 합작하여 공동투쟁함으로써 중국동북에서의 한인(韓人) 민족해방운동에 크게 기여함은 물론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에 상당한 타격을 가하였다는 점이다. 물론 한국독립군 자체의 독자적 능력은 일제(日帝)에 치명적 손상을 줄 수 있을 만큼 성장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1932∼3년 여러 전투를 수행하여 많은 일·만군을 살상하고 다대한 군수물자를 노획하는 등 적지 않은 전과를 거두었던 것이다.둘째, 한국독립군에서 활약한 주요인물들이 1933년 말에 중국본토로 이동, 그곳에서 활동하고 있던 민족운동세력에 합류함으로써 민족운동의 질적·양적 발전에 공헌하였다.

즉 이들은 통합 한국독립당 등의 정당(政黨)과 임시정부, 광복군(光復軍)에 가담하여 크게 활약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한국독립군의 항일무장투쟁은 우리민족의 독립운동 전통의 강인한 지속성과 일관된 불굴의 투쟁정신을 고양시키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세째, 한국독립군의 항전은 일본제국주의의 동아시아 침략에 맞선 동아시아 민중의 반제연합전선(反帝聯合戰線)의 형성(形成), 나아가 반(反)파시즘 운동의 발전에도 이바지하였다. 중국동북의 항일의용군(抗日義勇軍)과 연계되어 일제(日帝)와 투쟁함으로써 중국의 반제(反帝)민족운동 발전에 부분적으로 공헌함은 물론 중국동북에서의 한(韓)·중(中) 양민족의 반제운동(反帝運動)에의 연대(連帶)·우의(友誼)를 돈독히 한 것이다.

이와 같이 한국독립군의 항일무장투쟁은 우리의 민족운동사상 각별한 위치와 중요한 의의를 점(占)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Ⅵ. 맺 음 말

식민지 피압박 민족의 민족해방운동182) 은 여러가지 형태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무장항쟁은 제(諸)민족해방운동의 형태중 가장 진취적이며 구체적 투쟁방식이고 최고의 유형에 속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것은 많은 희생이 수반되며 광범한 대중의 지지 기반과 인적·물적 토대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참가자들의 불굴의 투쟁정신과 투철한 자주독립정신, 그리고 신명을 바치는 희생정신을 요구하는 처절한 투쟁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우리민족의 항일무장투쟁은 민족운동사에서 중요한 위치와 의의를 차지하여 마땅하며 더욱 철저하고 활발한 연구가 집중적으로 수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그러나, 우리민족의 항일무장투쟁연구는 일천하고 영세하여 기본적 사실조차 체계적으로 규명되지 못하고 있는 사례가 많다. 따라서 정확한 사실규명이 없이 섣불리 어떤 가치판단의 기준으로 그러한 운동을 평가하기란 대단히 위험한 일일 것이다.

필자가 장황하게 한국독립군의 전투를 서술하였지만, 자료의 부족과 필자의 능력부족으로 충분히 만족할 만한 연구가 되지 못하고 전투사의 나열위주로 되고 말았으며, 몇가지 의심나는 점을 해결하지 못하였다는 아쉬움이 있다. 이러한 과제는 앞으로 보완하고자 한다.필자는 이 논문을 집필하면서 독립운동사, 특히 무장투쟁사의 연구에 있어 최우선 과제가 사실(史實)의 규명에 있다는 점을 통감하였다. 이 문제가 해결된 뒤에야 의미부여와 평가 등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독립운동사연구에 있어 냉정하고 객관적이며 합리적인 과학적 연구자세가 요청된다고 하겠다.

필자는 이 논문에서 대전자령(大甸子嶺)전투를 집중적으로 고찰코자 하였으나 여러가지 한계로 처음에 의도했던 바와 같은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필자는 이 전투에 참가한 일본군이 반총(飯塚)연대가 아니라 한국주둔 제19사단에서 파견된 지전대좌(池田大佐) 인솔의 간도파견군―약 1,300여명의 혼성대―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 전투에서 간도파견군 전부대가 전멸한 것은 아니고 대전자령 계곡에 진입한 많은 병력이 궤멸적 타격을 받았으며, 한국독립군이 이 전투에서 많은 군수물자를 전리품으로 노획하였다는 사실을 입증하였다. 또한 사도하자(四道河子)전투에서는 기존의 통설(通說)대로 일본군 1개사단이 출동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였고, 한국독립군의 해체경위와 주요 인물들의 중국본토(中國本土)로의 남하(南下)과정에 대해서도 나름대로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했다고 자부해 본다.한국독립군의 항일무장투쟁은 우리민족의 독립운동사에서 커다란 의의와 위치를 부여받아야 한다고 생각된다.

특히 대전자전투는 청산리대첩에 버금가는 커다란 전과를 거둔만큼 많은 관심과 연구가 뒤따라야 하며, 그에 상응하는 높은 평가를 받아야 한다는 문제를 제기하고자 한다. 다만 1930년대 초∼중반 중국동북지방에서 활약한 한국독립군과 조선혁명군 등 민족주의계 무장세력이 중국공산당 계열의 유격대 등에 밀려 이 지역에서 쇠퇴하고 말았던 사실은 민족해방운동에 대한 전략·전술이나 이념, 그리고 대중의 지지기반획득 등에 있어서 한계를 드러낸 것이었다고 지적할 수 있겠다.

*주 석*
* 본연구소(本硏究所) 연구원(硏究員)

1) 중국동북지방(中國東北地方)은 현재(現在)의 요령성(遼寧省), 길림성(吉林省), 흑룡강성(黑龍江省) 등 중국동북(中國東北)의 삼성(三省)을 가리킨다. 흔히 이곳은「동삼성(東三省)」등으로 불리우기도 하지만, 본고(本稿)에서는 원칙적으로「중국동북(中國東北)(지방(地方))」이라는 명칭을 쓰기로 하되 당시 일반적으로 쓰이던「만주(滿洲)」라는 지명(地名)도 경우에 따라 사용(使用)키로 한다. 예컨대, 동북지방(東北地方)을 다시「북만(北滿)」, 남만(南滿)」,「동만(東滿)」등으로 세분(細分)할 경우와 「재만한인(在滿韓人)」등의 예(例)가 그러하다.

2) 동만(東滿)지방은 주로 현재 중국의 연변조선족자치주(延邊朝鮮族自治州)―흔히 간도(間島)라고 불리웠던 연길(延吉)·화룡(和龍)·왕청(汪淸)·혼춘현(琿春縣) 등에 안도(安圖)·돈화현(敦化縣)을 포함한 지역―를 가리키는 지역이다. 남·북만주의 구별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說)이 있지만 북만(北滿)지방은 주로 길림성(吉林省) 북부와 흑룡강성(黑龍江省)을 포함한 지역을 뜻하는데, 일반적으로 북위(北緯) 45도의 위선(緯線)을 경제로 남·북만주로 구별한다고.한다. 현용순(玄龍順)·이정문(李政文)·허용구(許龍九)(편저(編著)),《조선족백년사화》 제 2 집(심양(瀋陽), 요령인민출판사(遼寧人民出版社), 1984), p.213 산기총여(山崎摠與),《만주지명대사전(滿洲地名大辭典)》(동경(東京), 국서간행회(國書刊行會), 1937; 1977 재간(再刊))

3) 동변도(東邊道)지방이란 대체로 요령성(遼寧省) 동남부(東南部)·길림성(吉林省) 남부(南部)와 압록강 이서(以西) 사.이의 지역을 말하는데, 안동(安東)·흥경(興京)·통화(通化)·봉성(鳳城)·관전(寬甸)·환인(桓仁)·임강(臨江)·집안(輯安)·장백(長白)·안도(安圖)·무송(撫松)·무순(撫順)·본계(本溪)·해룡(海龍)·휘남(輝南)·유하(柳河) 등의 제현(諸縣)이 이에.속한다.진서운(陳瑞雲)· 장류학(張留學)·송세장(宋世章),《양정우장군전(楊靖宇將軍傳)》(하남인민출판사(河南人民出版社), 1985), p.61

4) 당시 민족주의(民族主義)의 개념(槪念)은 「민족해방주의(民族解放主義)」와 동일(同一)한 의미(意味)로 쓰이는 경우도 있었으나, 사회주의(社會主義), 무정부주의(無政府主義) 등과 대립(對立)하는 것으로, 즉 민족의 해방을 기하지 않고 종주국(宗主國)의 정치(政治)에 의존하여, 또는 자기 민족의 실력을 양성, 향상(向上)시켜 복리(福利)의 증진(增進)을 도모하는 합법(合法)온건한 주장과, 민족 해방을 유일한 목적으로 하는 것의 2가지를 포함하였다고 한다.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경무국(警務局),《고등경찰용어사전(高等警察用語辭典)》(경성(京城) : 1933), p.371. 본고(本稿)에서는 민족주의 운동의 개념(槪念)을 「민족해방주의」운동의 뜻으로 사용하되 범위를 축소하여 민족.해방운동의 일부분으로 즉, 공산주의 운동과 대립되는 민족운동의 한 형태로 파악하고자 한다.

5) 국민부·조선혁명당·조선혁명군에 대한 연구도 아직은 일천한 단계지만, 이들에 관한 연구로서 비교적 자세히 언급하고 있는 연구로는 다음의 것들을 들 수 있다.이명영(李命英), 〈일제(日帝)의 만주침략(滿洲侵略)과 반만항일운동(反滿抗日運動)―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을 중심(中心)으로 하여―〉,《성대논문집(成大論文集)(인문(人文)·사회계(社會系))) 제18집 (1973)._, 〈민족주의자(民族主義者)와 공산주의자(共産主義者)의 항일무력투쟁비교(抗日武力鬪爭比較)〉, 위의 책 제25집(1979).정원옥(丁原鈺), 〈재만국민부(在滿國民府)의 항일독립운동(抗日獨立運動)―국민부(國民府)·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의 조직(組織)과 활동(活動)을 중심(中心)으로―〉, 《아세아학보(亞細亞學報)》 제11집(1975. 5), 아세아학술연구회.김준엽(金俊燁)·김창순(金昌順),《한국공산주의운동사》제4권(고대 아세아문제연구소,1974; 청계연구소 1986재간(再刊) 조범래(趙凡來), 〈국민부(國民府)의 결성(結成)과 활동(活動)〉, 《한국독립운동사연구》제2집(1988), 독립기념관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추헌수(秋憲樹), 〈조선혁명당과 한국독립당의 활동〉,《한민족독립운동사》제4권(국사편찬위원회, 1988)

6) 재만 한국독립당에 대한 연구로는 아래의 논문을 찾아볼 수 있다.박환,〈재만(在滿)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에 대한 일고찰(一考察)〉,《한국사 연구》59 (1987. 12). 한국사연구회. 추헌수, 앞의 논문.한국독립군에 관해서는 자료부족 탓인지 깊이 있는 연구논문이 거의 없는데, 전사적(戰史的) 측면에서 한국독립군의 활동을 어느 정도 상세히 취급하고 있는 단행본(單行本)으로는 아래의 것들을 들 수 있다.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독립군항쟁사(獨立軍抗爭史)》, 1985. 이재(李宰)·강성문(姜性文)·이현수(李秀)·백기인(白奇寅)·김대중(金大中)·강석화(姜錫和),《한민족전쟁사총론(韓民族戰爭史總論)》(교학연구사(敎學硏究社), 1988)중국에서의 한국독립군·조선혁명군에 대한 연구로는 연변대학 교수인 황용국(黃龍國)의 다음의 논문이 있다. <조선독립군(朝鮮獨立軍)의 무장항쟁(武裝抗爭)(1931∼1937)〉, 《한국무장독립운동(韓國武裝獨立運動)에 관(關)한 국제학술대회논문집(國際學術大會論文集)》(한국독립유공자협회, 1989). 또 조선혁명군에 관한 연구로는 박창욱, <조선혁명군과 양세봉〉(1989. 8, 연변대학 조선학 국제학술대회 발표논문)을 꼽을 수 있다.

7) 강만길(姜萬吉), 〈한국민족해방투쟁사 연구현황과 문제점), 《한국근현대 연구입문》(역사비평사, 1988), pp.72∼73

8) 삼시협정(三矢協定)은 1925년 6월 중국의 봉천성(奉天省)과 조선총독부 사이에 맺은 전문(全文) 8조의 비밀협정으로 한인독립운동가(특히 무장독립운동자)를 체포·단속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는 그 뒤에 맺은「취체한인변법시행세칙(取締韓人辨法施行細則)(전문 12개조)」과 함께 중국관헌들의 재만한인(在滿韓人) 박해·구축(驅逐)의 구실이 된 협정이라 할 수 있다. 삼시(三矢)협정의 명칭은 중국에서는「쌍방상정취체한인변법강요(雙方商定取締韓人辨法綱要)」, 일본에서는「불영선인(不逞鮮人)의 취체법(取締法)에 관한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봉천성간(奉天省間)의 협정(協定)」으로 되어있다. 삼시협정(三矢協定)과 시행세칙의 상세한 내용은 추헌수(秋憲樹)(편(編)),《자료한국.독립운동(資料韓國獨立運動)》4(상(上))(연세대출판부(延世大出販部), 1975), pp.1130∼1133. 일본(日本) 외무성(外務省)편(編),《일본외교년표병주요문서(日本外交年表主要文書)하(下)》(동경(東京),원서방(原書房),1966), p.75를 참고하기 바람.

9) 경상북도 경찰부,《고등경찰요사(高等警察要史)》(여강출판사 영인본, 1986), pp124∼125.국사편찬위원회(편(編)), 《한국독립운동사(韓國獨立運動史)》4(정음문화사, 1968), p.875 10) 경상북도 경찰부, 앞의 책, pp. 125∼126 단체본위·단체중심·개인본위 조직론의 구체적 내용은 독립운동사 편찬위원회(편(編)), 《독립운동사자료집》제10집. 1976. pp.403∼4를 참조하기 바람.

11) 경상북도 경찰부, 앞의 책, p.127; 국사편찬위원회(편(編)), 앞의 책, pp.876∼877.

12) 경상북도 경찰부, 앞의 책, p.127. 국사편찬위원회(편), 앞의 책, p.878. 채근식(蔡根植), 《무장독립운동비사(武裝獨立運動秘史)》(대한민국 공보처, 1947) pp.151∼152 혁신의회에 대하여는 박영석(朴永錫), 〈혁신의회연구(革新議會硏究)〉, 《재만한인독립운동사연구(在滿韓人 獨立運 動史硏究)》(일조각(一潮閣), 1988), pp.179∼203을 참고바람.

13)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편), 앞의 책, pp.469-470.

14) 위의 책, p.470. 한족총연합회에 대해서는 박 환,〈「한족총연합회」의 결성과 그 활동(活動)〉, 《한국사 연구(韓國史硏究)》 52(1986,3), pp.183∼205를 참조바람.

15) 민족유일당 및 3부통합운동에 관한 구체적 내용은 아래의 연구를 참고하기 바람. 윤병석(尹炳奭), 〈1928·9년(年) 정의(正義)·신민(新民)·참의부(參議府)의 통합운동(統合運動)〉, 《사학 연구(史學硏究)》 21 (1969). 정원옥(丁原鈺), 〈재만독립운동 단체의 민족유일당운동〉, 《한민족독립운동사》 4. 박영석(朴永錫), 〈민족유일당운동(民族唯一黨運動)―1920년대(年代) 후반(後半) 중국만주지역(中國滿洲地域) 을 중심(中心)으로―〉, 《재만한인독립운동사연구(在滿韓人獨立運動史硏究)》

16) 연변지방(延邊地方)은 1930년(年) 경에는「간도(間島)」라고도 불리우던 지역이었다. 일반적으로 간도(間島) 라 하면 백두산서남(西南). 압록강 이북(以北) 그리고 압록강의 지류(支流)인 동가강(冬佳江)과 송화강(松花江) 상류(上流) 일대의 「서간도(西間島)」와 백두산 동북(東北) 두만강 이북과 송화강(松花江), 목단강(牧丹江) 상류(上流) 노야령(老爺嶺) 이남(以南), 혼춘(琿春) 일대의 「북간도(北間島)」로 구별된다. 여기에서 말하는 연변지방이라 함은 주로 북간도(北間島) 일대를 가리키는 의미(意味)로 사용코자 한다. 당시 이곳에는 연길 (延吉), 화룡(和龍), 왕청(汪淸), 혼춘(琿春) 등 4현(縣)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혼춘현(琿春縣)은 연변(간도) 지방과 따로 구분되기도 하였다. 현재(現在) 중국(中國)에서는 이 지역(地域)을 「연변(延邊)」이라 부르고 있는데, 본고(本稿)에서도 이곳을 연변(지방)이라고 표기하기로 한다. 이곳은 1952년(年) 연변조선민족자치구(延邊朝鮮民族自治區)가 창립 되었고, 1955년(年) 연변조선족자치주(延邊朝鮮族自治州)로 개칭되었다. 현재(現在) 이 주(州)에는 연길(延吉), 도문(圖們) 2개(個) 시(市)와 연길(延吉), 돈화(敦化), 화룡(和龍), 혼춘(琿春), 왕청(汪淸), 안도(安圖) 등 6개(個) 현(縣)이 있으며 주(州)면적은 약 4만 2,700평방km로서 길림성(吉林省) 면적의 약 1/4을 차지하고 있다. 한인(韓人)은 1982년(年) 당시 주내인구(州內人口)의 42.32%인 75만 4,500여명, 한족(漢族)은 57.4% 인 107만 4,200여명, 만주족(滿洲族)은 불과 1.93%인 3만 6,000여명이 거주하고 있다. 《연변조선족자치주개황》집필소조, 《연변조선족자치주개황》(연길(延吉), 연변인민출판사(延邊人民出版社), 1986), pp.2, 16, 79.

17) 연변지방 한인(韓人)의 농민 및 자소작(自小作)·소작농(小作農)의 비율은 만철(滿鐵) 조사과(調査課), 《만철조사.월보(滿鐵調査月報)》 1933년 1월호 p.115에 의거 추출함. 연변지방은 한인(韓人)들에게 어느 정도의 토지소유권(土地所有權)이 인정되는 등 중국동북(東北)의 다른 지역보다는 조건이 비교적 좋은 곳이었다. 연변부근 길림(吉林)지방의 예(例)를 살펴보면, 거의 99%의 한인 농가가 소작농(小作農)이라는 놀라운 결과(結果)가 나온다. 여기에 자소작농(自小作農)이 소작농(小作農)에 포함되어 있을지도.모르나, 그렇다하더라도 연변지방의 그것(57%)과 비교하면 큰 차이가 난다.

길림지방(吉林地方) 한인농가(韓人農家) 계급별(階級別) 구분(1929년)
계급별 
호수(戶數) 
인구(人口) 
비 고 
지주(地主) 
자작농(自作農) 
소작농(小作農) 
24(0.63) 
17(0.45) 
3,741(98.9) 
127(0.75) 
99(0.58) 
16,778(98.67) 
인구 중에는 그 가족 전부를 포함 
계 
3,782(100%) 
17,004(100%) 




자록 :〈소화오년길림지방조선인사정(昭和五年吉林地方朝鮮人事情)이(二)관(關)スル건(件)〉, 대한민국 국회 도서관 소장 일본(日本) 외무성(外務省), 육(陸)·해군성방서(海軍省方書) Micro film 현상인화 복사 제책본 (이하에서는<문서〉로 약칭함), 제2,300권, sp. 205-4 p.9954를 참고로 작성. 비고 : 일본 길림(吉林) 총영사관내 18) 이에 대해서는 졸고(拙稿), 〈1930년 중국연변(中國延邊간도(間島)) ‘5·30봉기(蜂起)’의 성격(性格)〉, 성대(成大),대학원(大學院) 석사학위(碩士學位) 논문(論文)(1988)을 참고하기 바람.

19) 일제(日帝)관헌 기록은 이러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술(記述)하고 있다. “본년중(本年中(1930년 :필자주)) 재만불영선인(在滿不逞鮮人) 운동은 일신시기(一新時期)를 획(劃)한 상태. 즉 민 족파의 쇠퇴에 승(乘)한 공산파는 그 공작에 총력을 기울여 전만(全滿)을 풍미하고, 다시 중국공산당에 가맹(加盟)을 완성하여 공산운동의 고조시대를 출현시켜‥‥‥(중략(中略))‥‥‥민족파의 운동은 일장일이 (一張一弛), 드디어 본년(本年1930년(年))에 이르러 공산파에 제압되어‥‥‥하략(下略)‥‥‥”〈소화오년간도혼춘급동접양지방치안개황(昭和五年間島琿春及同接壤地方治安槪況)〉, 〈문서〉, 제319권, sp. 205-5, pp.6842∼6843.

20) 추수·춘황투쟁에 대하여는 조선족략사편참조, 《조선족약사》(연길(延吉), 연변인민출판사(延邊人民出版社), 1986; 백산서당, 1989재판(再版) pp. 123∼126을 참고하시오.

21) 만주국군정부(滿州國軍政部) 고문부(顧問部), 《만주공산비の연구(滿洲共産匪の硏究)》제 1집(신경(新京), 1936; 동경(東京), 극동연구소출판회(極東硏究所出版會), 1969복간(復刊)), p.509, 이훈구(李勳求) 《만주 (滿洲)와 조선인(朝鮮人)》(평양, 숭실전문학교 경제학연구실, 1932), p.96을 참고로 추출함. 즉 일본대사관의 조사에 따르면면.1929년에 597,677명이 중국동북에 거주하는데, 연변지방에는 382,405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되어 이 비율을 적용한 것이다. 그러나, 대체로 일본측의 한인(韓人)조사는 다른 조사와 비교하면 숫자가 적게 파악되고 있다.

22) 다음의 표는 그러한 상황의 이해가 참고가 될 것이다. 다만 공산주의 운동 자체가 선전·선동을 매우 중요시 하기 때문에 이 표로만 대세를 판단하기에는 약간 무리가 있을 수 있다. 또 압수물의 분류기준도 문제가 된다.

―연변지방에서 압수된 선전문(일제 관헌조사)―
. 
1929 
1930 
1931 
1932 
종별 
부수 
종별 
부수 
종별 
부수 
종별 
부수 
공산주의 선전물 
민족주의 선전물 
183 
230 
2,183 
1,675 
339 
212 
15,407 
11,599 
757 
124 
7,438 
3,674 
1,314 
23 
24,966 
87 
계 
413 
3,858 
551 
27,006 
881 
11,112 
1,337 
25,053 


자료 :〈소화사년(昭和四年) 간도(間島)·혼춘급동접양지방치안개황(琿春及同接壤地方治安槪況)〉, 〈문서〉 제316권, pp.6080∼6081 〈소화오년(昭和五年)> 간도급접양지방불령선인( 間島及接壤地方不逞鮮人)ノ행동(行動)ニ관(關)スル정황(情況)〉, 〈문서〉 제319권, pp 6869∼6870. <소화육년(昭和六年)〉간도급접양지방불령선인( 間島及接壤地方不逞鮮人)ノ행동(行動)ニ관(關)スル정황(情況)〉, 〈문서〉 제321권, pp.7257∼7258. 〈소화칠년(昭和七年)〉간도혼춘현(間島琿春縣)ヲ함(含)ム급접강지방치안정황(及接江地方治安情況)〉, 〈문서〉 제326권. p.8283을 참고로 작성(作成)함.

23) 3부(府)를 비롯한 민족주의계 단체들의 사상적 전환상황에 대해서는 만주국군정부(滿洲國軍政部) 고문부 (顧問部)..앞의 책, pp.408∼409에 소상히 기록되어 있다.

24) 한국독립당은 대표적인 민족주의 정당이었다. 이 당은 1929년 상해(上海)에서 조직된 한국독립당, 1935년 9월 중국.항주(杭州)에서 재건된 한국독립당, 그리고 1940년 5월 기강(江)에서 조직된 통합(統合) 한국독립당 등 여러 계통이 있었고, 해방 뒤에도 남한(南韓)에 조직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본고(本稿)에서는 재만(在滿) 한국독립당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데, 이하에서 말하는 한국독립당은 「재만(在滿) 한국독립당」을 지칭하는 개념으로 사용코자 한다. 기타 한국독립당에 관한 상세한 내용은 조범래(趙凡來), 〈한국독립당연구(韓國獨立 黨硏究)(1929∼1945)〉, 《한국민족운동사연구》 제 2집 (1988), pp.163∼202를 참조바람.

25) 생육사(生育社)는 1929년 봄 홍진(洪震)·황학수(黃學秀)·이청천(李靑天)·김좌진(金佐鎭)·이장녕(李章寧)· 김창환(金昌煥)·박일만(朴一萬) 외(外) 수명의 발기(發起)로 오상현(五常縣)에서 창립되었다. 이 단체는 표면적 으로는 친목·식산(殖産)·수양 등을 목적으로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민족주의계 독립운동가들이 망라된 비밀 결사로서 생산·저축.등을 장려하여 독립운동자금을 충실케 하려는 목적과 인재(人材)양성 등을 목적으로 조직 되었다고 한다. 〈소화오년길림지방조선인사정ニ관スル건(昭和五年吉林地方朝鮮人事情ニ關スル件)〉, 〈문서〉 제2.300권, SP.205-4. p.10034

26) 신숙(申肅), 《나의 일생(一生)》(일신사(日新社), 1963), p.94, 이하에서 이책은 《일생(一生)》으로 줄여 씀. 채근식, 앞의 책, p.156..재만 한국독립당이 이미 1928년에 결성되었다는 기록이 있다(김승학(金承學)(편(編)),《한국독립사(韓國獨立史)》독립문화사(獨立文化史), 1966, p.384). 그러나 이 때 조직되었던 것은 한국독립당이 아니라 민족유일당을 결성하기 위한 과정에서 형성된 모임이나 단체 (예를 들면 「민족유일당 재만책진회」 등)를 지칭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한국독립당의 결성장소에 대하여 조경한옹(趙擎韓翁)은 영안현(寧安縣)이라고 회고하였다(조경한(趙擎韓), 《자강회고록(自岡回顧錄)》, 한국종교협의회. 1984, p.90 ; 이하에서 이 책은 《회고록》으로 약칭함)

27) 《일생(一生)》 p.94..이때 한족자치연합회(韓族自治聯合會)가 아니라 한족농무연합회(韓族農務聯合會)나 한족동맹회(韓族同盟會)가 조직되었다는 이설(異說)이 있다. 즉 평강산이(坪江汕二)는 1931년 2월에 한족총 연합회의 무력파(武力派)가 한족농무연합회(韓族農務聯合會)·한족동맹회(韓族同盟會)(군사부(軍事部)) 등을 결성하여 북만(北滿)일대에서 맹위를 떨쳤다고 하였다(《조선민족독립운동비사(朝鮮民族獨立運動秘史)》, 동경(東京), 암남당서점(巖南堂書店), 1966; 고려서림, 1986복각(復刻). p.104). 또 조선총독부 경무국(편(編)), 《최근(最近)に어(於)けける조선치안상황(朝鮮治安狀況)(1933·1938)》(동경(東京), 암남당서점(巖南堂書店), 1966복각(復刻)), p.257 에는 한족동맹회 군사부 내부에 한(韓)테러단(團)이 설치되어 있어 자금수집과 반대파 (反對派)에 대한 테러 행동을 전개하였다고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고등법원 검사국.사상부에서 발간한 《사상월보(思想月報)》제3권 9호(1933년 12월), p.33에는 한족총연합회의 문치파(文治派)가.1931년 1월 아성현(阿城縣)에서 한족자치연합회를 조직하고 다음에 이를 한족농무연합회로 수정, 한족총연합회의.해체를 성명했다고 파악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독립당에서 활동하였던 오광선(吳光鮮)에 의하면 「한족농무연합회」는 한국독립당의 표면조직 이었다고 한다(김준엽·김창순, 앞의 책, p.196에서 재인용). 신숙에 따르면 한족자치연합회는 1931년 4월 경 내부분쟁.으로 곧 해체되고 말았다고 한다(《일생(一生)》. p.98)

28) 김학규(金學奎), 〈삼십년래한국혁명운동재중국동북(三十年來韓國革命運動在中國東北)〉, 《광복(光復)》 (제1권 제3기, 1941년 5월 :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87 영인),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정훈처 편행 (編行)

29) 채근식, 앞의 책, p.157. 이하에서는 《비사(秘史)》로 줄여 쓰기로 함.

30) 《회고록》, p.91 조경한옹(翁)은 위의 책에서 1930년 7월 구 신민부(新民府)진영과 새로 수습된 대소 단체의 대표들이 영안현 (寧安縣)에서 대표자회의(代表者會議)를 열어 고문·위원장·부위원장과 집행위원, 총무부위원·민정부의원· 군사부위원·조직 .부위원·훈련부위원·선전부위원·조사부위원 등을 선출하였다고 회고하였다. 따라서 앞에서 김학규(金學奎)가 당내에.두었다고 하는 6종의 위원회와는 약간 차이가 난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볼 때 1979년 에 출판된 회고록보다는 1941년의 기록인 김학규의 진술이 더 신빙성이 있다고 해석된다.

31) 박환, 〈재만(在滿)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에 대한 일고찰(一考察)〉. pp.143∼145.

32)〈중앙일보(中央日報)(남경(南京))〉, 1930,8,4자, 추헌수(秋憲樹)(편(編)), 앞의 책 4(하(下)). p.1586

33) 이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문서〉 제321권 소화육년칠월이일재간도강전총령사발신폐원외무대신완보고요지(昭和六年七月二日在間島岡田總領事發信幣原外務大臣宛報告要旨)〉,SP.205-5, pp.7125∼7129 참조.

34) 당시 한국독립당·군의 활약은 일반적으로 국민부(國民府)나 조선혁명당·군의 그것에 비교하여 잘 알려지지 않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실제로 필자가 조사한 일본 외무성문서나 조선일보(朝鮮日報) 등에는 한족총(자치) 연합회 한국.독립당·군에 대한 기록이 매우 드물게 나타나는 반면(反面), 국민부나 조선혁명당·군의 활동은 매우 빈번하게 나타나고.있다. 이는 전자(前者)외 세력이 후자(後者)에 비하여 미약한 데서 기인(起因)한 측면이 없지 않으나, 한국독립당·군은 비공개 조직이었으므로 보안유지가 철저하여 일제관헌이 탐지하기가 어려웠던 때문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다.

35) 일청(一靑)(조경한(趙擎韓)), 〈「구일팔(九一八)」후한국독립군재중국동북살적략사(後韓國獨立軍在中國東北殺敵略史)〉, 《광복(光復)》 제 2 권 제 1 기 (1942, 1 ;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87영인), p.53. 이하에서 이 글은 《광복(光復)》으로 약칭함. 조경한(趙擎韓)옹은 《회고록》 p.95에서 1931넌 3월에 한국독립당에서 결의한 조항으로 다음의 것들을 들고 있다.1. 한국독립군을 다시 일으키되, 군을 한국독립당의 당군으로 예속시켜 당에서 정훈대표(政訓代表)를 파견, 정치훈령을 베풀 것. 2. 각 병사구의 재향군인을 곧 소집하고 새로 청장년(靑壯年)을 징모할 것. 3. 중동선호로군(中東線護路軍)겸 길림자위군(吉林自衛軍) 총·부사령관 이두(李杜)·정초(丁超) 장군에게 교섭하여 공동항일작전(共同抗日作戰)과 무기원조를 협약할 것.4. 당무(黨務)총력을 군사원조와 선전에 경주할 것. 그러나, 위의 결의사항은 1931년 11월의 결정사항으로 추측된다. 왜냐하면 중국군과 공동작적을 전개하기로 결정한 것은 9.18사변 이후 가능하기 때문이다. 또 신숙(申肅)도 9.18 이후 임시 당대회를 열어 중국항일군 (中國抗日軍)과 연합활동할 것을 결정하였고, 전시체제하에 한국독립군을 편성하였다고 회고하고 있기 때문 이다(《일생(一生)》, p.100) 그런데, 한국독립당이 대석하자(大石河子)의 긴급회의를 소집하기 전인 1931년 10월 18일 남대관(南大觀)· 권수정(權秀貞) 등이 한족총연합회·국민부·한족농무연합회·조선혁명당 대표 30여명을 석도하자(石道河子)에 소집하여 시.국대책회의를 개최하였다는 일제(日帝)관헌의 기록이 있다. 이에 따르면 이 회의에서「재만한교총연합회」를 조직.하고, 동회(同會)내에 연합선전부 및 연합총군부(總軍部)를 설치 할 것과 중국군대와 공동전선을 펴 일본군에 대항할 것을 결정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한국독립당의 긴급회의도 여기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한교총연합회」나 「연합총군부」등은 성립되지 못한 것으로 판단 된다. 이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독립운동사자료집》 10,pp.610∼611을 볼 것.

36) 중동선(中東線)철도란 중국동북지방의 만주리(滿洲里)―하얼삔―수분하간(綏芬河間)과 하얼삔―여대(旅大 (여순(旅順)·대련(大連))간(間) 전장(全長) 2,430km의 철도를 말한다. 당시 중국에서는 중동철도(中東鐵道), 일본에서는 동청(東淸)·동지(東支)·북만철도(北滿鐵道)라고 불렀는데, 현재 중국에서는 장춘철로(長春鐵路) 라고 부르고 있다. 이 철도는 1896년 노청(露淸)밀약 이후 러시아에 의해 1898년 3월 착공되었으나, 1900년 6월 의화단(義和團) 사건으로 중국인들에 의해 건설중인 철도가 파괴되기도 하였다. 결국 러시아는 동년 7월부터 러시아군을 파견. 만주를 점령한 뒤 건설을 재개하여 1901년 10월 이 철도를 완공하였다. 그러나 철도운행을 개시한 것은 1903년 7월이었고, 공사가 완전히 끝난 것은 1904년 말이었다. 노일(露日)전쟁 이후 1905년 노일(露日)강화조약으로 일본은 이 철도의 남부지선(支線)인 관성자(寬城子(장춘(長春)의 북쪽)) 이남의 철도와 이에 따르는 제권리 (諸權利)를 양도받아 「남만주철도주식회사(南滿洲鐵道株式會社)」를 설립·운영하여 중국동북침략에 적극 활용하였다. 기타 구체적 내용은 외무성외교사료관(外務省外交史料館) 일본외교사사전편찬위원회(日本外交 史辭典編纂委員會), 《일본외교사사전(日本外交史辭典)》(동경(東京), 대장성인쇄국(大藏省印刷局), 1979), pp.600∼604를 참고하기 바람.

37)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제 5 권, p.599 ------------ 편(編), 《독립운동사자료집》10,p.619 한편, 조경한옹(翁)은 한국독립군 총사령부의 간부등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총사령 지청천, 참모장 이장녕(후 임신숙), 정훈대표 조경한. 참모 신숙·조경한·김상덕(후임), 부관 최만취·이규보·전성호, 영군 (營軍)인물 이응서·오.광선·최악·최해룡·차철·지상기·손무영·윤X주(尹X胄)·전북빈(全北濱)·안종오(安鍾嗚) 등 150여인(《회고록》, p.95∼96) 부사령 남대관(南大觀)과 구국군후원회 회장 권수정(權秀貞)은 한족총연합회계 인물들인데, 이들은 한국 독립군과 연계되어 반공투쟁과 군자금 모집 등으로 상당히 독자적 행동을 취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그 과정에서 상당한 횡포를 부려 말썽이 되기도 하였다. 특히 권수정(權秀貞)(본명(本名) 이종녕(李宗 寧), 이강훈옹은 이종형 이라고 증언)은 1930∼31년 반공투쟁을 구실로 다수의 무고한 한인들을 살상하기도 했다. 그는 1932∼3년 경에는 일제(日帝)에 투항하여 친일파로 변절, 일제의 밀정으로 변신하였다. 그는 해방 이후 제 2 대 민의원(民議員)까지 지냈으나 교통사고로 사망했다고 한다(이강훈옹 증언 : 이정식(李庭植)· 김학준(金學俊), 《혁명가(革命家)들의 항일 회상(抗日回想)》, 민음사(民音社), 1988, pp.429∼431에서 재인용 ; 〈소화육년시월구일관동청경무국장발신외무차관완통요지(昭和六年十月九日關東廳警務局長發信外務次官宛通要旨)〉,〈문서〉제2301권. SP.205-4.p.10255; 조선총독부 경무국 보안과, 《고등경찰보(高等警察報)》 제 2 호, p.44)

38)《광복(光復)》 p.53, 《회고록》 p.96.《광복(光復)》은 11월 초순에 길림자위군(吉林自衛軍)과 중동철도보호로군(中東鐵道保護路軍)의 연합군 총부 (總部)가 흑룡강성(黑龍江省) 방정현(方正縣)에 있었다고 적고 있는데, 이는 잘못된 것으로 파악된다. 길림 자위군이 공식적으로 성립된 때는 1932년 1월 31일이기 때문이다. 위의 《광복(光復)》의 기록이 사실이라면 한국독립군이 대표를 파견하여 한중연합을 협상한 시기는 1932년 2∼3월 경이었으리라고 추정된다. 한국독립군에 관한 사료(史料)는 지극히 빈약하여 필자가 주로 참고할 수 있는 1차 자료는 《광복(光復)》지와 조경한옹의 회고록 등에 불과하고, 기타 보조자료도 일본 외무성문서와 조선일보 등 그리 많지 않은 실정이다.

39) 《광복(光複)》, p.53.

40) 이때 한국독립군은 조선혁명군 대표 이탁(李鐸), 동아혁명군(東亞革命軍) 대표 이범석(李範奭) 등과 함께 중한군사.위원회(中韓軍事委員會)를 조직하고 의용군 모집을 개시하였는데. 권수정과 남대관은 영안(寧安) 으로, 이청천은 오상(五常)으로, 신숙은 아성(阿城)에, 심만호·최관용은 유수(楡樹)로, 윤필한(尹必漢)은 빈현 (賓縣)으로 가서 모병에 노력하였다는 다른 기록이 있다(《재지만본방경찰통계급관내상황보고잡찬(在支滿本邦警察統計及管內狀況報告雜纂) 1932,p.93《외사경찰보(外事警察報)》 124(1932.11), p.76; 박환, 〈재만(在滿)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에 대한 일고찰 (一考察)〉, p.152에서 재인용).

41) 《회고록》, p.96.

42) 9.18사변 당시 장학양(張學良)의 군대는 정규병 25만·비정규군 8만·포(砲) 260문에 달하였다. 1931년 9월 중순 장학양(張學良)이 11만의 병력을 이끌고 북경(北京)·천진(天津) 등에 출동하였으므로, 중국동북에 잔류한 병력은 22만,포 200여문을 헤아렸다. 이에 비하여 일본군(日本軍)의 재만(在滿) 총병력은 주답(駐)사단 5천· 포 20수문·독립수비.6개 대대 약 5천 4백, 계 1만 4백에 지나지 않았다. 물론 그 후 한국에 주둔하고 있던 「조선군(朝鮮軍)」의 보병 5개대대·기병 1개중대·포병 2개대대·공병 1개중대로 된 혼성여단이 이에 가담 하기는 하였지만, 동북군(東北軍)과의.외형상 양적 차이는 현저하였다. 매본사삼(本捨三), 《대관동군사(大關東軍史)》(동경(東京), 국서간행회(國書刊行會), 1984), pp.90,93,95. 장학양(張學良)은 9월 19일 북경(北京)에서 동북군(東北軍)에 대하여 부저항(不抵抗)을 명령하였고, 국민정부 (國民政府)는 9월 23일 전국군대에 일군(日軍)과의 충돌을 피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곽정이(郭廷以)(편(編)), 《중화민국사사일지(中華民國史事日誌)》제3책(第三冊)(대북(臺北),중앙연구원(中央硏究院) 근대사연구소 (近代史硏究所), 1984), pp,79.83

43) 반만항일운동(反滿抗日運動)은 일본제국주의의 중국동북 지배에 대한 모든 형태의 총체적(總體的) 저항운동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는 초기의 국민당(國民黨)계 구동북군(東北軍)의 무장투쟁과 중국공산당계 동북항일 연군(東北抗日聯軍) 등의 농촌을 기반으로 하는 무장항쟁뿐만 아니라 도시에서의 민족적 자각에 의한 노동운동, 도시·농촌을 포함한 민중들의 일상적 수준에서의 저항 등 3유형 모두를 포함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사학 잡지(史學雜誌)》 제96편(編) 제 4 호(1987년 4월), 동경대학문학부사학회(東京大學文學部史學會), p.87, 영목륭사(鈴木隆史)의 일본제국주의(日本帝國主義)の만주지배(滿洲支配)》에 대한 서평(書評)). 반만항일운동(反滿抗日運動)은 무장항일주체(抗日主體)의 소장(消長)이라는 관점에서 대체로 세시기로 구분된다 이에 관한 소상한 것은 전중항차랑(田中恒次郎), 〈일본제국주의(日本帝國主義)の만주침략(滿洲侵略)と반만항일운동(反滿抗日運動)〉, 《일본제국주의(日本帝國主義)の만주이민(滿洲移民))》(동경(東京), 용계서사(龍 溪書舍), 1976), 만주이민사연구회(滿洲移民史硏究會)편(編). pp.626∼7을 참고하기 바람.

44) 만주국국사편찬위원회(滿洲國國史編纂委員會), 《만주국사각론(滿洲國史各論)》(동경(東京) 1971), pp.301∼ 302;.이명영(李命英), 〈1930년대(年代) 재만한인(在滿韓人)의 항일무장투쟁(抗日武裝鬪爭)〉, 《아세아학보 (亞細亞學報)》제11집(1975), p. 150에서 재인용.

45) 1933년 1월 26일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중공(中共) 만주성위(滿洲省委) 각급당부(各級黨部)에 보낸 서한 (소위.일월서간(一月書簡))을 통하여 각 항일부대(抗日部隊)와의 통일전선(統一戰線) 결성을 강조하였는데, 여기에서 각종 반일(反日)유격부대의 성격을 다음과 같은 4가지 유형으로 구분하였다.

1. 순수한 구길림군계(吉林軍系)―장학양(張學良) 휘하의 각 장령(將領)(마점산(馬占山), 이두(李杜), 정초(丁超), 소병문(蘇炳文), 주제청(朱霽靑) 등)에 의해 지도됨. 이들은 지주자산(地主資産)계급과 부농(富農)에 의존하고 있으며 노동자·농민의 대중적 성질 및 각종 혁명운동을 적시함.
2. 왕덕림(王德林)부대로 대표되는 반일의용군(反日義勇軍)부대―대부분은 농민·노동자·소자산계급으로 구성되어 국민당(國民黨)의 영향은 비교적 적고 어떤 때는 어느정도까지 공산당의 영향하에 수용할 수 있다.
3. 각종의 농민유격대(대도회(大刀會)·홍창회(紅槍會)·자위단(自衛團))―소자산계급·지식분자도 참가하지만 대부분 농민이다. 그들은 정치적·군사기술적으로 미숙하여 대부분은 지주·부농 및 구길림군(吉林軍) 장교의 영향과 지휘에 있다.
4. 적색(赤色)유격대―공산당 지도하의 노동자·농민·혁명병사·기타 혁명분자로 구성된 부대. 가장 혁명적 부대이지만, 영향력이 미약하여 운동의 기본세력이 되지 못하고 있다. 일본국제문제연구소(日本國際間題硏究所) 중국부회(中國部會)(편(編)), 《중국공산당사자료집(中國共産黨史資料集)》제6권(동경(東京), 경초서방(勁草書房), 1973), pp. 177∼8. 일제(日帝)관헌이나 만주국 당국에서는 이들 부대에 대하여 구동북군계의 항일군(抗日軍)을 병비(兵匪) 또는 정치비(政治匪)로, 종교세력의 항일군(抗日軍)을 종교비(匪) 또는 회비(會匪)로, 한인(韓人) 민족주의계 독립군 을 선비(鮮匪)로. 마적계(馬賊系) 항일(抗日)부대를 토비(土匪)로, 그리고 중국공산당계 유격대를 공비(共匪) 또는 사상비(思想匪)로 구분하여 불렀다(주 44참조) 참고로 반만항일운동(反滿抗日運動) 세력의 추이(推移)에 대한 관동군(關東軍)측의 통계를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시기별(時期別) 
토비(土匪) 
정치비(政治匪) 
공비(共匪) 
계(計) 
1931년 9월 이후 
1932년(年) 
1933년(年) 
1935년(年) 
1937년(年) 
1938년(年) 
1940년(年) 
49,500 
69,150 
36,080 
13,650 
6,400 
1,350 
450 
170,000 
100,000 
25,000 
7,900 
2,000 
― 
― 
500 
850 
2,220 
9,200 
6,500 
4,400 
1,480 
220,000 
170,000 
63,300 
30,750 
14,900 
5,750 
1,930 


주(註) : 1. 1940년은 5월말의 숫자임 2. 이 표의 숫자는 매년 각월의 숫자를 평균한 것으로 숫자의 기초는 주로 헌병대의 보고에 의함. 자료: 관동헌병대사령부(關東憲兵隊司令部), 《만주공산운동개사(滿洲共産運動槪史)》(1940), p.107; 천전교 이(淺田喬二), 《일본제국주의하の민족혁명운동(日本帝國主義下の民族革命運動)》 (동경(東京), 미래사 (未來社),1973), p.434에서 재인용. 위의 표에 기재된 반만항일부대원의 숫자는 매우 축소되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중국측의 자료에 의하면 동북항 일연군(東北抗日聯軍)의 경우 최대시 3만∼4만 5천여명에 달하였다는 주장도 있다(《북방론총(北方 論叢)》 편집부(編輯部), 《동북항일연군투쟁쟁사략(초고)(東北抗日聯軍鬪爭爭史略(初稿))》1980. 3, p.98; 《중공당사대사연표(中共黨史大事年表), 인민출판사(人民出版社), 1981, p.44; 서촌성웅(西村成雄), 《중국 근대동북지역사연구(中國近代東北地域史硏究)》(경도(京都). 법률문화사(法律文化史), 1984), pp.295, 303 에서 재인용)

46) 《만주국사각론(滿洲國史各論)》, p.304. 손걸(孫杰), 《동북항일연군제사군(東北抗日聯軍第四軍)(빠리, 파려구국 출판사(巴黎救國出版社), 1936), pp.12∼13; 이명영(李命英), 〈1930년대 재만한인의 항일무장 투쟁〉, p. 150에서.재인용.

47) 곽정이(郭廷以)(편(編)), 앞의 책, p.106

48) ---------------------, 위의 책, pp.106,133; 서촌성웅(西村成雄), 앞의 책, pp.228∼9 전중항차랑(田中恒次郎), 앞의 논문, p.641 길림자위군 조직 이전의 이두(李杜)·정초(丁超)의 직책에 대해서는 이설(異說)이 있다. 또 《동북항일연군투 쟁사(東北抗日聯軍鬪爭史)(초고(草稿))》(1986.10월(月)),p.50에서는 하얼삔에서 이두(李杜)를 총사령으로 한 길림자위군과 정초(丁超)를 총사령으로 한 중동철도호로군이 편성되었다고 하여 양군(兩軍)은 별개의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황용국(黃龍國), 앞의 논문, p.124에서 재인용). 그러나, 곽정이(郭廷以)는 《중화민국사사일지 (中華民國史事日誌)》p. 135에서 이두(李杜)·정초(丁超)를 길림자위군의 테두리 속에 포함시키고 있다. 이두 (李杜)·정초(丁超)의 부대는 때로는 길림자위군과 중동철도호로군으로 따로 불리우기도 하고 때로는 양자가 길림자위연합군(吉林自衛聯合軍)이라고 통용(通用)되기도 했었다(조선일보 기사(記事)의 경우)이두(李杜)·정초(丁超)의 부대는 만주국(滿洲國) 수립 전에는「반길림군(反吉林軍)」이라고 통칭(通稱)되는 경우가 많았다.

49) 1932년 1월 31일의 길림자위군 선언(宣言)을 살펴보면「산림유격대(山林遊擊隊) 통령(統領)」이라는 직책이 있는.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길림자위군이 마적이나 기타 부대와의 연합에도 주목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 선언(宣言)은 이두(李杜) ·정초(丁超)가 각각 길림자위군 총사령, 중동(中東) 철도호로군 총사령의 직함으로 연명(連名)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전중항차랑(田中恒次郞), 앞의 논문. p.649 를 참조하시오.

50) 역현석(易顯石)·장덕양(張德良)·진숭교(陳崇橋)·이홍균(李鴻鈞), 《“구일팔(九一八)”사변사(事變史)》,(심양 (瀋陽).요령인민출판사(遼寧人民出版社),1981), pp.269∼296. 원인산(元仁山), 《동북의용군(東北義勇軍)》(합이빈(哈爾濱)), 흑룡강인민출판사(黑龍江人民出版社). 1982), pp.11∼75 ; 서촌성웅(西村成雄). 앞의 책, p.228, 전중항차랑(田中恒次郎), 앞의 논문, p.642에서 재인용.

51)〈재만조선인(在滿朝鮮人)의 불령행동(不逞行動) 및 단속상황〉, 《독립운동사 자료집》 10, pp.611∼612. 다른 한 기록은 한국독립군의 활동에 관해 아래와 같이 묘사하고 있다. “당관내(當管內) 각지에 산재(散在)하는 선인(鮮人)은 거의 각계(各系) 민족주의 불령단체(不逞團體)에 속하여 음으로 양으로 불령행동(不逞行動)을 감행하는 음모의 책원지(策源地)가 되어왔다는 것은 이미 주지(周知)의 사실로서‥‥‥근년(近年) 갑자기 대두한 공산당의 진공(進攻) 등으로 인하여 활동지반이 현저히 축소되었지만 ‥‥‥한족총연합회는‥‥‥(만주)사변 발생과 동시에 일본군의 입길(入吉(길림입성(吉林入城):인용자))을 보고 멀리 영안(寧安)·오상(五常) 등의 지방에 그 종적을 감추기에 이르렀으나, 이들 불령선인(不逞鮮人)은 다시 병비(兵匪)를 이용하여 초지(初志)를 관철하려고 획책하는 일이 적지 않은데‥‥‥한족총연합회 남대관(南大 觀)·권수정(權守貞) 등은 중동선(中東線) 산시(山市)에서 부하 약 40여명과 함께 병비(兵匪)와 합류하여 영안현 하(寧安縣下) 일반 선인(鮮人) 각호(各戶)로부터 매월 300적완(吊宛)의 군자금(軍資金)을 모집하고 있다‥‥‥” <소화칠년구월사일재돈화우파분서장발신길림삼강총령사대리완보고요지(昭和七年九月四日在敦化宇波分署長發信吉林森岡總領事代理宛報告要旨)〉,〈문서〉제2,302권SP·205-4,pp.10449∼10451. 위의 기록은 한국독립당·군의 활동을 이미 해체된 한족총연합회의 활동으로 잘못 알고있다.

52) 서촌성웅(西村成雄), 앞의 책, p.228

53) 진빈화(陳彬)(편(編)), 《동북의용군(東北義勇軍)》, 1932, p.163; 전중항차랑(田中恒次郎), 앞의 논문, p.643에서 재인용

54) 전중항차랑(田中恒次郎), 위의 논문, p.642.

55) 김대륜(金大倫)에 관한 구체적 사항은 흑룡강성사회과학원(黑龍江省社會科學院) 지방당사연구소(地方黨史 硏究所)·동북열사기념관(東北烈士紀念館)(편(編)), 《동북항일열사전(東北抗日烈士傳) 제2집 (합이빈(哈爾濱), 흑룡강 인민출판사(黑龍江人民出版社), 1981), pp. 185∼188을 참조바람.

56) 원인산(元仁山), 앞의 책. pp.76∼86; 서촌성웅(西村成雄), 앞의 책, p.229에서 재인용.

57) 위와 같음

58) 이강훈옹(李康勳翁) 증언, 《혁명가(革命家)들의 항일회상(抗日回想)》 p.426에서 재인용.

59) 《회고록》, p.92.

60) 한국독립당에서는 빈현(賓縣)의 항일길림성정부(抗日吉林省政府)에 권수정(權秀貞)을 파견하여 주석(主席)인 성윤(誠允)에게 아래와 같은 조건을 제시하였다고 한다. 1. 한국독립군에게 소총 1천정, 기타의 부속품을 공급할 것.2. 군인 징집동원비 1만5천원(元)을 지출할 것. 3. 한인(韓人)군대를 중국군대와 독립해서 편성할 것(《외사경찰보(外事警察報)》 124(1932. 11), p.76; 박환, 〈재만 한국독립당에 대한 일고찰〉, pp. 151∼152에서 재인용). 그러나, 이러한 조건은 실현되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당시 성윤정권(誠允政權) 자체가 희흡(熙洽) 등의 친일정권과 일본군의 압력으로 한국독립군을 도울 여력(餘力)이 없었기 때문이다.

61) 《회고록》, p.97.

62) 위의 책, pp. 105∼106.

63) 이러한 상황은 다음의 자료를 통하여 어느정도 확인할 수 있다. “‥‥‥이상의 불영단(不逞團)은 그후도 이합집산을 반복하면서 도처에 준동을 계속하고 있던 바, 1월 하순에 한국독립군의 이청천 일파와 홍진(洪震)일파의 사이에 내분이 일어나 이청천파는 정초(丁超)의 군대에 편입 (編入)되어 한국독립연대(韓國獨立聯隊)라 하고 삼성(三姓)·부금(富錦) 방면에 횡행하며, 홍진일파는 유만괴 (劉萬魁)의 구국군에 가담하여 영안현(寧安縣) 방면으로 집결하였다‥‥‥‥”(방점은 인용자가 붙임)〈재만 조선인의 불령행동(不逞行動) 및 단속상황〉, 《독립운동사 자료집》10, p.612. 위의 자료는 각지에 분산되어 있던 한국독립군의 각부대를 마치 파쟁때문에 그러한 것처럼 악의적(惡意的)으로 왜곡하고 있으나, 중국항일군(抗日軍)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참고가 된다 하겠다.

64) 《회고록》 p. 106.

65) 서난현(舒蘭縣)은 길림성(吉林省)에 속하는데, 길림(吉林)의 북북동(北北東) 165리(里) 지점의 철도연선에 위치하고 있다. 이 곳의 북방은 평야지대이나 동서남 방면은 산악지대이다. 이 지역은 산악지대이기 때문에 인구(人口)가 .희박하고 상업도 발달하지 못하였으며, 농산물이 적고 산림(山林)자원이 많은 곳이다. 1937년경의 인구는 916호(戶)에 5,866 인으로 조사되고 있다. 산기총여(山崎摠與), 앞의 책,p.393

66)《회고록》, pp. 106∼107. 조경한(趙擎韓), 〈대전자대첩(大甸子大捷)〉, 《군사(軍史)》창간호(1980. 12),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pp. 85-56. 서란현 전투는 《광복(光復)》에는 전혀 언급이 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이 전투에 관한 기록은《회고록》과 〈대전자대첩(大甸子大捷)〉에 크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그러나 사람의 기억력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차 점차 쇠퇴한다는 일반적 현상을 고려한다면 서란현 전투에 대한 위의 기록들은 약간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없지 않은 것으로 생각된다.

67) 조경한옹(翁)은 노야령(老爺嶺) 근처에서 일군(日軍)과 길림군(吉林軍)을 만났다고 서술하였다(《회고록》, p. 107, 〈대전자대첩(大甸子大捷)〉, p.86). 그러나 서란현에서 액목현으로 가는 도중에 적과 마주쳤다면, 이 지점은 노야령산맥(老爺嶺山脈)이 아니라 장광재령산맥(張廣才嶺山脈) 주변으로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노야령 (老爺嶺)은 액목현(額穆縣)과 경박호(鏡泊湖)의 훨씬 남쪽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한국 독립군이 불과 며칠 사이에 서란현에서 수백 km를 남하(南下), 다시 북상(北上)하고 있었다는 행군노선(路線)이 나오는데 이러한 진로(進路)는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68) 《회고록》, p. 107 조경한옹은 〈대전자대첩(大甸子大捷)〉, p.86에서는 2개대대 중 200여명이 도주하였다고 하여 약간 다르게 서술 하였다. 이 전투에서의 전과(戰果)는 어느 정도 검토(檢討)의 여지가 있다고 하겠다. 즉 한중연합군의 병력이 최대로 잡아 2,300여명인 2개 대대의 일·길림군 정규병력(물론 길림군이 다수였을 것으로 보이지만 전체병력 규모는 800∼900여명 정도로 추정됨)을 거의 궤멸시키고 500여명이나 항복을 받았다는 사실은 객관적으로 볼 때 상당히 어려운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의문은 일본군의 비중이 어느 정도이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본다. 조경한옹은 이 전투에 대한 기술(記述)에서 만주국이 수립되기 전인데도 마치 「만주국군(滿洲國軍)」이 있었던 것처럼 「만군(滿軍)」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조(趙)옹의 서술대로 1932년 3월 이전의 전투가 확실하다면 이때의 중국군은 희흡(凞洽) 휘하의 친일적 길림군(吉林軍)으로 보아야 한다. 또 조(趙)옹은 여기에서 일군 (日軍)의 비중이 어떠한 지 상세히 밝히지 않아 전투의 진상을 규명하는데 의문을 제기하게 한다.

69) 《회고록》, p.108. 그런데, “1932년 4월 24일 왕덕림배하(王德林配下) 오의성(吳義成)이 거느리는 병비(兵匪) 약 500명이 액목 현성(額穆縣城)을 습격하여 방화(放火)·약탈을 감행하고 이를 점령하였는데, 그달 27일 일본군이 출동하여 격퇴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는 다른 자료가 있다(〈소화칠년구월사일부재돈화우파분서장발신재길림삼강총영사대리완보고요지(昭 和七年九月四日附在敦化宇波分署長發信在吉林森岡總領事代理宛報告要旨)〉, 〈문서〉 제 2,302권, sp.205-4,p.1048). 필자로서는 양 기록의 차이를 명쾌하게 밝힐 수는 없으나, 액목현성이 반만항일군(反滿抗日軍)에 피습·점령 되었던 사실은 분명하다고 하겠다.

70) 《회고록》, pp. 108∼109. 이 무렵 한국독립군의 활동을 일제관헌측은 그 윤곽만 어렴풋이 탐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면 한 문서는 “‥‥‥(일본군의 길림(吉林) 입성후) 도망한 불령선인(不逞鮮人) 등은 돈화(敦化)·액목(額穆)· 오상(五常)지방에 집합하여 형세를 관망중이다”라고 적혀 있는 것이다(〈소화육년십일월이사일부관동청경무국장발신외무차관완 통보요지(昭和六年十一月二四日附關東聽警務局長發信外務次官宛通報要旨)〉,〈문서〉제 2,301권, sp.205-4, p 10238).

71) 《회고록》 p.109.

72) 《일생(一生)》, pp.100∼101, 〈조선일보(Micro film)〉, 1932.2.5 자(字)

73) 《광복(光復)》, p.53. 이 때의 전투에서 이두(李杜)·정초(丁超) 연합군의 피해는 막대한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일보 1932년 2월 14일자 신문은 「제○단사령부 발표, 하얼삔 12일발(發) 전통(電通)」이라며 길림자위 군의 참패를 보도하였다. 이에 따르면 하얼삔 교외 및 쌍성보 부근의 전투에서 이두(李杜)·정초(丁超) 연합 군의 손실은 1개연대 전멸을 포함하여 전사자만 1,800여명, 부상자 약 2,000에 달했다고 한다. 물론 위의 기사는 일본군의 발표이므로 반일(反日)연합군(軍)의 피해는 과장되어 있으나. 이(李)·정군(丁軍)의 참패는 사실이었던 것 같다. 따라서 단위부대를 유지한 채 이(李)·정(丁) 양연합군에 합류하여 이 전역(戰役)에 참가하였을 것으로 보이는 한국독립군도 상당히 많은 피해를 입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74) 《일생(一生)》 pp. 101∼104고봉림(考鳳林)부대의 소속에 대하여는 제설(諸說)이 있다. 신숙은 고봉림(考鳳林) 부대가 길림연합군(吉林聯合 軍)의 제 7 단이라 하였으나, 《광복(光復)》p.53 에서는 자위·호로연합군 제 3 군이라 하였고, 《회고록》 p.110 에서는 「길림자위군(吉林自衛軍) 제칠여(第七旅)」라고 하였다. 또 조선총독부 발행 《국외(國外)ニ어 (於)ケル용의조선인명부(容疑朝鮮人名簿)》(경역(京域), 1934),p. 163에는 중로제삼군(中路第三軍)이라고 되어 있다. 조경한옹은 《회고록》에서 이때 이청천이 제 1·2대대를 이끌고 송화강(松花江)을 건너 혹통강성 탕원현 (湯原縣)으로 임시 퇴주(退駐)하였다하여 신숙(申肅)과 엇갈리는 진술을 하고있다. 그러나 이 무렵의 정황은 이청천과 함께 행동을 취한 당시의 참모장 신숙의 기록이 더 신빙성이 있을 것으로 판단되어 신숙의 기록을 취하였다.

75) 《광복(光復)》, p.53 《광복(光復)》에서는 독립대장이 안종선(安鍾宣)이라고 하였는데, 《회고록》 p.110에서 는 안종명(安鍾鳴)이라고 밝히고 있다. 앞의 《國外ニ於ケル容疑朝鮮人名簿》 p.5에는 안만이(安萬伊)라고 되어 있는데 별명(別名) 중「종명(鍾鳴)」 이라는 이름이 보인다. 그러므로 독립대장은 안종명(安鍾鳴)이 확실하다고 할 수 있다. 위의 《명부(名簿)》에서 안종명은 1932년 9월 「반길군(反吉軍) 고봉림군(考鳳林軍)」에 합류하였다고 적혀 있다. 따라서 안종명이 고봉림군(考鳳林軍)과 연합투쟁한 사실은 입증된다고 하겠다. 또, 애국동지원호회(편(編)), 《독림운동사》. 1956, p.275에는 「별동제장(別動際長)」 안종선(安鐘宣)이 3월 30일 중국(中國)제 3호로군 고봉림부대와 공동작전으로 아성을 탈환했다고 기재되어 있다. 그리고 김승학 (金承學), 《한국독립사》(독립문화사, 1966), p.384에는 독립군대대장 오광선(吳光鮮)이 중국제 3호로군 여단장 고봉림(考鳳林) 부대와 공동작전으로 3월 30일 아성(阿城)을 탈환하였다는 내용이 실려있다. 그러나 이러한 여러 기록들 중 《광복(光復)》이 비교적 사실에 가까운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76) 《광복(光復)》 p.53. 조경한옹은 《회고록》 pp.109∼110에서 동년(同年) 3∼4월 경 제 3 대대장 전북빈이 길림자위군 제 5려 궁사지(宮司志)부대와 합작투쟁하였다고 했으며, 제 4대대장 한무빈(韓武彬)(한광빈(韓光彬)?)은 자위군 제 7여(旅) 사청산(謝靑山) 부대와 합류, 중동선(中東線) 남부에서 적의 후방 교란작전을 폈고, 제 5대 대장 안종명은 자위군 고봉림(考鳳林) 부대와 합작하여 아성현(阿城縣)으로 퇴각하였다고 회고하였다. 따라서 한국독립군 각 대대의 활약상과 중국측 부대에 대한 기록이 《광복(光復)》과는 상당한 차이가 나지만 《광복 (光復)》의 내용이 사실에 더 가까울 것으로 추측된다. 또 신숙은 《일생(一生)》, p.95에서 장학양(張學良)예하 손덕전군(孫德全軍)의 군법처장(軍法處長)으로 활동한 김국빈(金國賓)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데 조경한옹이 언급하고 있는 인물은 전북빈(全北賓)이 아니라 김국빈(金國賓)일 가능성도 있다. 그런데, 이 때 한국독립군이 일면피(一面陂) 이북지역으로 철수한 것은 2월 하순 이래 정초군(丁超軍) 등 반길림군(反吉林軍)이 길림군 2천여명을 격퇴하고 일면피(一面陂) 등 동부중동(東部中東)철도 일대를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조선일보〉 1932. 2.23∼24일자).

77) 《회고록》, pp. 110-111

78) 위의 책, pp. 111∼112 한 일제관헌 자료는 한국독립군의 구성원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조사·파악하고 있다.

성 명 별명(別名) 생년월일 주 거 본 적 적요(摘要) 안만이(安萬伊) 종명(種鳴), 해강(海崗), 응삼(應三), 중일(重一),
본동(本洞)
1985. 7. 13
경상북도 상주군
이안면(利安面)
안용리(安龍里)47
1932년 반길군(反吉軍) 고봉림군(考奉林軍)에 합류함

김아일(金亞一)
길림성(吉林省)
빈현(賓縣)
1932년 초두 왼쪽의 주거지에서 동지 남대관(南大觀)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을 조직함

최관용(崔寬用)

.


최악(崔岳)
단주(檀舟)
길림성(吉林省)
이하 불상(不詳)
중로제삼군(中路第三軍) 한군독립영(韓軍獨立營) 연장(連長)

최만취(崔萬翠)

중로제삼군(中路第三軍) 수종원(隨從員)

신해문(申海文)
대균(代均)

중로제삼군(中路第三軍) 한군독립영(韓軍獨立營) 하사(下士)

신열(申烈)

중로제삼군(中路第三軍) 한군독립영(韓軍獨立營) 부관(副官)

심만호(沈萬湖)

중로제삼군(中路第三軍) 군수계(軍需係)

이달수(李達洙)

반만항일단체(反滿抗日團體)길림자위군(吉林自衛軍) 노제삼군(路第三軍)소속 한군독립영(韓軍獨立營) 중사(中士)

양승만(梁承萬)
길림성(吉林省) 이하 불상(不詳)
반만항일(反滿抗日)단체 길림민중자위군(吉林民衆自衛軍) 중로제삼군(中路第三軍)소속 한군독립영(韓軍獨立營) 상사(上士)

이천민(李天民)
봉천성(奉天省) 이하 불상(不詳)

원래 한족동맹회(韓族同盟會)의 영수. 동북의용군(東北義勇軍) 제구로(第九路)에 편입을 허가받아 동로선인의용군(同路鮮人義勇軍) 총지휘에 임명됨

자료 : 조선총독부, 《국외(國外)ニ어(於)ケル용의조선인명부(容疑朝鮮人名簿)》, 1934, pp.5.74.161.163.177.217.285.293.

위의 표를 통하여 우리는 한국독립군이 중동철도호로군 제 3 군 고봉림부대에 「편입」되는 방식으로 합류 하였지만 「한군독립영(韓軍獨立營)」이라 하여 독자적으로 구별되고 있고, 또 연장(連長)·부관(副官)·상사 (上士)·중사(中士)·하사(下士) 등의 계급체계를 두고 있음을 알게 된다. 특히 여기에서 최악(崔岳)이나 최만취 (崔晩翠)의 직책이 조경한옹의 기억과 거의 일치하고 있는 점이 이채롭다. 위의 인물중(人物中) 이천민(李天民) 은 이청천(李靑天), 신해문 (申海文)은 신숙의 차남 신화균(申化均)일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달수(李達洙)는 본명이 지달수(池達洙)로 이청천의 아들일 가능성이 많다.

79) 신숙에 의하면 이 무렵 고봉림군의 규모가 비록 잡군(雜軍)이지만 2천여명에 달하였고, 한국독립군도 수백명에 이르렀다고 한다(《일생(一生)》, p. 111). 한편 일본 외무성 문서는 이청천의 동정을 아래와 같이 추적하고 있다. “이건 국민부(國民府) 수령 이 청천은 동지선해림(東支線海林)부근에서 이전의 국민부 및 한족연합회, 기타 불영단계(不逞團系)의 무장대 약 200명을 규합, 구국군 엄호대를 조직하고 4월 20일 영안현(寧安縣) 남호두 (南湖頭)로 이동하여 병비(兵匪) 왕덕림(王德林) 부대와 합대(合隊)함”(〈소화칠년중간도(昭和七年中間島(혼춘(琿春)을 포함) 급접양지방중요치안사항월별표(及接壤地方重要治安事項月別表)〉5월(月)조,〈문서〉제326권, sp. 205-5, p.8257) 위의 기록을 감안하고 한국독립군의 당시 편제를 반영한다면 당시 한국독립군의 규모는 최대로 잡아 1,000 여명, 대체로 300∼400여명 정도가 되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80) 조경한옹은 《광복(光復)》 p.54에서는 강북의용군(江北義勇軍) 이해초(李海超) 부대가 아성현전투에서 패하여 공격 의도가 누설되었기 때문에 계획이 변경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지헌모(池憲模), 《청천장군(靑天 將軍)의 혁명 투쟁사(革命鬪爭史)》(서울, 삼성출판사(三星出版社), 1949; 이하에서는 《투쟁사》로 약칭함) p.122에는 6월 말∼7월 중순까지 하얼삔 일대에 폭우로 홍수(洪水)가 발생, 작전계획이 바뀌었다고 서술되었다. 필자의 의견으로는 《투쟁사》의 기록이 더 사실과 근접(近接)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런데, 《투쟁사》는 한국 독립군이 연합한 부대가 풍점해(馮占海)군대의 고복식(高福植) 부대라고 하여 다른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81) 《일생(一生)》, p. 111. 《투쟁사5》 p. 122

82) 《일생(一生)》, p.111. 《광복(光復)》p.54에는 동(東)·남(南)양문을 고군(考軍)이 맡고 서문(西門)을 한국 독립군이 맡았다고 하였다. 또 《투쟁사》p.122에는 쌍성을 중심한 경빈선(京濱線)의 차단과 하얼삔 방면에서 내려오는 오가역(五家驛) 근처는 독립군이 담당하고 난준(蘭晙)역 부근은「중국구국군」이 분담키로 하였는데, 성공략에는 쌍방이 협동하여 공격키로 하였다고 달리 서술되어 있다.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신숙의 기록이 더 정확할 것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조경한·신숙 두 사람 모두 쌍성 보전투의 참가인원을 3만 또는 수만으로 회고하고 있는데, 1개여(旅)(제3군) 규모인 고군(考軍)이 수만 병력에 달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봉림군 단독으로 동(東)·남문(南門)을 공격했거나, 소수의 한국독립군 단독병력으로 서문을 공격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83) 《회고록》 p. 113에서는 연합군의 숫자가 약 3만에 달한다고 하였으며, 신숙도 《일생(一生)》 p. 112에서 수만에 달한다고 했고 《투쟁사》 p. 130에서는 한국독립군이 3천여명, 중국구국군이 2만에 이른다고 하여 대체로 세 사람이 거의 일치하는 공해를 나타내고 있다.

84) 성내의 수비병력에 관하여서도 제(諸)기록에 차이가 있다. 《회고록》 p.113에는 만군(滿軍) 1개 사단, 《광복(光復)》 p.54에는 만주군 2개여(旅), 《투쟁사》p.156에는 일본군 1개 연대가 넘는 병력이라 하였는데 《일생(一生)》pp. 111∼112에는 만주군의「초비(剿匪)」사령부가 있다고만 했고 일본군에 대해서는 전혀 설명되지 않고 있다. 필자의 비견으로는 약 2개여(旅) 정도의 만주군과 소수의 일본군이 있었을 것으로 분석된다.

85) 《광복(光復)》 p.54, 〈대전자대첩(大甸子大捷)〉 p.86. 《회고록》 pp. 113∼114. 《일생(一生)》 p.111

86) 〈대전자대첩(大甸子大捷)〉 pp.86∼87. 《회고록》 p.114. 쌍성보전투에서 거둔 위와 같은 다대(多大)한전과(戰果)는 약간 과장되어 있지 않을까? 《투쟁사》 pp. 125∼ 126에서는 한국독립군이 주공(主攻)을 맡고, 길림자위군은 무기·탄약 ·식량 등의 운반·보급 등에 치중한 것처럼 서술되고 있다. 그러나 이는 과장된 표현이라고 하겠다. 물론 보급품은 자위군측에서 크게 도움을 받았겠지만 한국독립군은 이 전투에서 서문측을 공격하는 부분적 기능을 수행하였던 것이다.

87) 《광복(光復)》 p.54

88) 《회고록》 pp.114∼116

89) 《회고록》 p.116 신숙은 쌍성보 재공격의 중요한 동기가 월동기(越冬期)에 즈음한 연합군의 보급물자 획득, 즉 동계피복(2천 벌 정도)의 확보에 있었다고 하였고, 재공격의 시기도 10월 중순이었다고 하였다(《일생 (一生)》 pp. 111∼112). 신숙의 재공격 동기에 대한 설명은 신뢰도가 높은 것이라고 생각된다. 실제로 일본 관헌 기록은 소위(所謂) 「비적(匪賊)」 활동의 주요 목표가 물자의 약탈과 만주국 치안의 교란에 있기 때문에 주요 공격대상지가 물자의 집산지 또는 정치의 중심지라고 지적하고 있다.〈마적급병비ノ행동(馬賊及兵匪ノ行動)」〉,〈문서〉제2,302권 sp.205-4.p.10411.

90) 조경한옹은 〈대전자대첩(大전子大捷)〉 p.87에서 이때 한국독립군이 200명씩 15개부대(총 3000여명)로 편성되어 공격의 전위(前衛)를 담당하고, 중국군은 탄약과 식량 등을 보급케 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 《투쟁사》p.125에서도 이와 유사한 내용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한국독립군이 과연 3천여명의 부대규모에 도달할 수 있었는가에 대하여는 의문의 여지가 없지 않다. 이 정도의 대규모 부대라면 굳이 고봉림군에 편입되어 공동작전을 수행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필자의 추측 으로는 300∼500여명 전후가 되지 않을까 한다. 그러므로 한국독립군은 쌍성보 재공격시에도 주공의 일부로서 참가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91) 《회고록》 p.116, 〈대전자대첩(大甸子大捷)〉 p.87. 《투쟁사》 pp. 128∼129에서는 이와 달리 쌍성보공격을 개시하여 적과 교전 도중 5,000여명의 후원부대와 대포·자동차 등을 태운 열차가 오는 것을 매복·습격하여 큰 전과를 거두었다고 서술하였다.

92) 《회고록》 p.110, 《광복(光復)》 p.54, 〈대전자대첩(大甸子大捷)〉 p.87, 《투쟁사》p.126

93) 《광복(光復)》 p.54, 《비사(秘史)》 pp.173-174.애국동지원호회, 《독립운동사》 p.276. 한국독립군의 투쟁에 대한 우리측의 기본사료는 《광복(光復)》과 《투쟁사》, 《일생(一生)》 등을 꼽을 수 있다. 위에서 인용한 《비사(秘史)》·《독립운동사》, 그리고 《한국독립사》등의 한국독립군의 활동에 관한 서술은 필자가 조사한 바로는 《광복(光復)》의 내용을 거의 그대로 전재(轉載)하고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서적들은 거의 천편일률(千編一律)적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쌍성보전투에 대한 《투쟁사》, 《일생(一生)》, 《광복(光復)》 등의 기술(記述)은 상이(相異)한 점이 많다. 예컨대 《광복(光復)》은 이 전투를 1차와 2차로 구분하고 있고, 2차 전투에서 쌍성보를 다시 점령 하였다가 일(日)·만군(滿軍)의 반격으로 패퇴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일생(一生)》에서는 쌍성보공격은 2차례 시도되었지만, 2차 진공(進攻) 때에는 성을 점령하기도 전에 성내에서 대기하고 있던 일(日)·만군(滿軍)의 대규모 공격을 받아 퇴각하였다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또 《투쟁사》는 쌍성보전투는 한번밖에 없었던 것처럼 진술하고 있으며, 철도로 증원 오는 응원부대를 섬멸하였다는 사실을 크게 다루고 있다. 쌍성보전투에 관한 이상과 같은 여러 서적 중《광복(光復)》이 비교적 정확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투쟁사》는 p. 130에서 이 전투의 결과 한국독립군 10여명, 중국군 1만2천여명이 전사하였다고 했다고 했다. 또 신숙에 의하면 고봉림군 2000여명 가운데 겨우 800여명만이 잔존하였다고 한다(《일생( 一生)》 p.113). 이로 미루어 짐작컨대 2차 쌍성보전투는 매우 치열하였고. 한중연합군의 피해가 막심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나, 고봉림군에 비하여 한국독립군의 피해가 너무 적어서 그 진실성에 의문을 자아내게 한다. 한국독립군이 주공(主攻)부대로 참전했다면 자신의 손상도 많았을 것으로 보아야 한다.

94) 《회고록》 p.117

95) 위와 같음. 《광복(光復)》 p.54. 당시 항일군(抗日軍) 중 일만군(日滿軍)에 투항하였다가 다시 반일(反日)투쟁으로 전환하였던 사례가 상당수 있다. 대표적 예로 흑룡강성 대리 주석 마점산(馬占山)을 들 수 있다. 이 무렵 일(日)·만(滿) 당국에서는 반일 (反日)의용군의 투항을 권고하면서 병기의 매입, 직업알선 귀순자의 가족·생명·재산보호 등을 보장한다는 조건을 내세웠다. 이에 관한 상세한 내용은 〈소화칠년구월사일부재돈화우파분서장발신재길림삼강총영사대리완보고요지(昭和七年九月四日附在敦化宇波分署長發信在吉林森岡總領事代理宛報告要旨)〉,〈문서〉제2, 302권,sp.205-4,pp.10426∼10427을 참고하기 바람.

96) 《광복(光復)》 p.55

97) 《일생(一生)》 p.113.

98) 《광복(光復)》 p.55. 조경한옹은 이 회의에 대하여 《회고록》 p. 118에서는 이와 달리 다음과 같이 회고 하였다. “① 동만 산악일대에 반거하는 구국군과 제휴하기로 의결한 바 제 6중대장 공진원(公振遠), 별동대장 심만호 (沈萬湖), 군의감 강진해(姜振海), 산악향도대장 허경삼(許敬三)을 파견하여 그 곳 정세를 탐지하게 하였고, ② 장래 군비(軍費)는 동만(東滿)교포에게 염출하기로 예정하고 우선 당면한 피복은 사하자(沙河子) 군구(軍區) 에서 판출케 할 것을 의결, 실천하였고 ③ 사하자(沙河子)의 중국인 민간방위대장 양모(楊某)의 세력이 크므로 그의 도움을 받기 위해 교섭하기로 의결, 최중산(崔中山)을 파견하여 교섭한 바 상당한 지원을 받았고 ④ 황학수(黃學秀)를 부사령, 최중산(崔中山)· 김상덕(金尙德)을 참모로 각각 보충 임명하였다.” 위의 내용은 《광복(光復)》보다 구체적이므로 당시 한국 독립군의 실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하겠다.

99) 〈간도급접양지방공비(間島及接壤地方共匪), 불영선인ノ행동정황(不逞鮮人ノ行動情況)〉, 〈문서〉제329권, sp.205-5, p.8880.왕덕림(王德林)·공헌영(孔憲榮) 등은 그 뒤 시베리아를 거쳐 남경(南京)의 중국국민정부에 합류하였다.

100)《광복(光復)》 p.55. 《회고록》 pp. 118∼119. 황용국(黃龍國), 앞의 논문, p.127.

101)《회고록》 pp. 118∼119.

102)《광복(光復)》 p.55. 《일생(一生)》 pp. 114∼115 중국측 자료(《화미주간(華美周刊)》1권 34기(期), p.817; 황용국(黃龍國), 앞의 논문, p.127 재수록)에는 시세영(柴世榮)이 제4로사령(路司令)으로 표기되어 있다. 당시 구국군에서도 자기역량의 강화를 위하여 다른 항일(抗日)부대와 적극적으로 연합을 도모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일제의 정보문서를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소화팔년중간도급접양지방월별비적세력소장표(昭和八年中間島及接壤地方月別匪賊勢力消長表)〉1월조(月條), 〈문서〉 제329권, SP.205-5. p.8881 참조). 이 무렵 한국독립군이 구국군과의 합작에 노력하고 있었음은 조선일보 1933년 2월 8일자 기사로 뒷받침된다. 즉. 여기에서 이청천이 왕덕림(王德林)을 만나러가던 길에 마적대(馬賊隊)에게 피살되었다고 잘못 보도되었던 것이다.

103) 《회고록》 p. 120.《광복(光復)》 p.55. 조경한옹은 《광복(光復)》에서는 적군의 규모가 기병 2천여명이라 하였는데, 《회고록》에서는 일·만군 약 2개 대대규모라 하였다. 또 《광복(光復)》에서는 시세영부대와 연합한 이후 2월(月) 하순 이 전투를 수행하였다고 기록 하였는데, 《회고록》에서는 1월 하순경 독립군 독자적으로 전투를 벌인 뒤에 시세영부대와 합류한 것으로 서술하였다. 그러나 신숙은 시세영부대와 합작이 성립한 뒤, 즉 1933년 2월에 남경(南京)에 파견되었다고 했다(《일생(一生)》 pp. 114∼115). 그러므로 경박호전투는 구국군과 연계된 이후 수행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시세영부대는 당시 1개사(師) 규모이므로 대체로 수백명, 많게 보아도 1천여명을 크게 넘지 못할 것으로 짐작되며 한국독립군도 독자적으로 전투를 수행할 만한 전투능력과 부대규모를 갖추지는 못했었다고 보인다. 따라서 한중연합군의 병력은 대체로 1천여명을 초과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유추된다. 그러므로 이 전투는 양군의 연합작전으로 간주해야 하며 적군의 규모도 1개 대대 가량으로 해석해야 한다. 소수의 의용군이 정규군 2천여명을 격파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편 일제관헌의 한 문서는 이 무렵 오의성(吳義成)이 이끄는 구국군 약 500명이 영안현(寧安縣) 남호두(南 湖頭)에 반거(蟠居)하여 부근의 「비적단」과 밀접한 연락을 취하며 소도시 주재 일본 군·경(警)기관의 습격을 기도하고 있다고 구국군의 동태를 추적하고 있다.(〈문서〉제329권,sp.205-5,p.8883).남호두(南湖頭)는 경박호 남동(南東)쪽 기슭에 위치한 곳이므로 한국독립군 등의 경박호전투와 관련된 기록일 가능성이 없지 않다.

104) 당시 사도하자(四道河子)라는 지명은 중국동북(中國東北)에 2∼3개가 있었다. 즉, ① 왕청현(汪淸縣) 나자구 (羅子溝) 서쪽 6Km지점에 위치한 사도하자(四道河子); 이곳은 산악지대의 매우 편벽한 촌락으로서 1933∼4 년의 경우 겨우 28호 가량의 중(中)·한인(韓人)이 거주하는 지역이었다. (정협길림성연변조선족자치주위원회 문사자료위원회편, 《연변문사자료》제2집(연길, 연변인민출판사, 1984), p.150) ② 북만주의 사도하자(四道河子) :영안현(寧安縣) 북쪽·목능현(穆陵縣) 서북(西北)·목단강(牧丹江) 이동(以東) 일대의 이도하자(二道河子)·삼도하(三道河) 및 사도구(四道溝) 근처에 위치하고 있다(《광복(光復) 》, p.55, 산기총여(山崎摠與), 앞의 책, pp.361,372 참조). ③ 남만주(南滿洲)의 사도하자(四道河子) :환인현 (桓仁縣) 서부에 위치함. 한국독립군과 시세영부대가 격전을 치른 사도하자(四道河子)의 위치는 ②의 북만주에 위치한 곳이라고 할 수 있다.

105) 《광복(光復)》, p.55. 조경한옹은 여기에서는 사도하자(四道河子)전투 이전인 3월에서 4월 초순에 신포 (申砲) 등이 합류하였다고 했다. 그러나 《회고록》 p.124에서는 동경성(東京城)전투 뒤인 6월경 합세하였다고 회상하였다. 그런데 《회고록》 pp.125∼126에 신굴(申) 등 원종교도의 한국독립군으로의 가담은 중공당원(中共黨員) 으로서 구국군 제18여장(旅長)이었던 이연녹(李延祿) 등의 김중건 암살과 원종교도 박해였다고 한다.

106) 《광복(光復)》p.55. 현재 사도하자(四道河子)전투에 관한 가장 상세한 자료는 《광복(光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조경한옹은 자신의 후일의 기록인 《회고록》이나 〈대전자대첩(大甸子大捷)〉에서는 매우 간단하게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광복(光復)》 이외의 다른 기록이 별로 없기 때문에 다른 자료와 비교·검토 하는 등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그 실상을 해명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다.

107) 《광복(光復)》 p. 55. 사도하자(四道河子)전투에 참가한 일(日)·만군(滿軍)과 한중연합군의 부대규모를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대부분의 기존서적에 일·만군의 병력이 1개 사단이었다고 기록되고 있는 것은 명백히 잘못된 사실이라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비사(秘史)》p.176; 애국동지원호회, 《독립운동사》 p.277; 《한국독립사》 p.386;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편(編)), 《독립운동사》제 5 권, p.630; 신재홍(申載洪), 〈한중연합군의 항일전과 독립군의 수난〉, 《한민족독립운동사》 4, p.428등). 왜냐하면 《광복(光復)》에는 일(日)·만군(滿軍)「약(約) 1사병력(師兵力)」이라 하였는데, 필자의 견해로는 이것이 결코 정규 일(日)·만군(滿軍) 1개사단을 의미하는 바가 아니라는 점이다. 1개 사단규모의 대병력이 출동했다면 일본(日本)측 기록에도 분명히 언급이 될 것인데, 필자가 조사한 바로는 이러한 기록을 전혀 찾을 수 없었다. 또 이미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당시 중국동북(中國東北)에는 약 1개사단 규모의 관동군, 그리고 연변지방에는 제19사단의 간도파견군(약 1,300명 규모의 보기포공병(步騎砲工兵) 혼성대)이 활동하고 있었다. 이들은 동북(東北)의 각지에 분주(分駐)하고 있었으므로 이러한 부대들이 반만항일군(反滿沆日軍)을 진압코자 한꺼번에 집결하여 대규모로 공세를 취한 적은 거의 없었다. 또 당시 한국독립군의 세력이 점차 확대되고 있었고, 시세영부대에도 상당수의 공산주의자들과 비적(匪賊)출신 인사들이 가담하여 무시 못할 세력을 형성 하였지만, 일(日)·만군(滿軍) 1개 사단을 섬멸할 정도의 실력을 갖추지는 못했었다. 그러므로 일(日)·만군 (滿軍) 1사(師)는 1개중대 내지 1개대대, 최대로 보아도 1개연대 규모를 넘지 않는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108)《광복(光復)》 p.55. 《광복(光復)》은 중일전쟁기(中日戰爭期)인 1942년 1월 광복군 정훈처에서 발간한 정훈 ·대외홍보용 잡지겸 기관지였다. 따라서 그 내용은 다분히 선택적이며 의도적인 선전용 팜플렛의 성격을 띤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요소 때문에 그 사실성을 경시해서는 안되겠지만 그 내용이 상당히 과장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109) 《광복(光復)》 p.55. 《회고록》 p.121.

110) 《광복(光復)》 p.55. 《회고록》, p.122. 조경한옹은 《회고록》에서는 동경성 공략의 시기가 4월 말, 제 1·2로에 배치한 부대규모는 약 1개대대라고 기억하였다. 그리고 약 40분의 시가전 끝에 성을 점령하였으며, 이 전투에서 600∼700여명의 적을 사살하였 다고 했다. 그러나 적 600∼700여명 사살이라는 전과는 약간 과장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일본측 자료에는 동경성 전투에 관한 언급이 별로 없다. 다만 1933년 5월 왕청현(汪淸縣) 춘명향(春明鄕) 소왕청(小汪淸) 부근에 반거(蟠居)행동중인 구국군 이영장(李營長) 일파의 비적 약 3백명이 영안현방면(寧安 縣方面)으로 이동하였다는 기록(〈소화팔년중간도급접양지방월별비적세력소장표(昭和八年中間島及接壤地方月別匪賊勢力消長表)〉,〈문서〉제329권, sp.205-5, pp.8884∼8886)을 찾아볼 수 있다. 여기에 나오는 이영장(李營長) 등 약 3백명은 한국독립군을 지칭하고 있을 가능성이 많은데, 이들이 영안현 방면으로 이동 하였다고 했으니 동경성전투와 관련될 수 있는 기록이라고 생각된다. 한편, 애국동지원호회에서 간행한 《독립운동사》p.278에는 만주군 여장(旅長)이 곽세재(世才)로 기재되어 있다.

111) 《광복(光復)》, pp.55∼56. 사도하자(四道河子) 및 동경성(東京城)전투에 관해서는 《일생(一生)》이나 《투쟁사》에는 전혀 언급이 되지 않고 조경한옹의 기록인 《광복(光復)》과 《회고록》 등에서 간략히 소개되고 있을뿐이다. 그런데 조(趙)옹의 두 기록은 다른 점이 상당히 발견된다. 예컨대 《광복(光復)》에서는 사도하자전투 직후인 5월 2일에 근처의 일(日)·만군(滿軍)을 격파하였다고 하는데, 《회고록》에서는 4월 말의 동경성전투 이후 그러했다고 밝히고 있다. 필자가 이러한 기록차이의 진상을 밝히기에는 한계가 있으나, 사도하자나 동경성전투에 대한자료가 극히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유일한 자료인 조(趙)옹의 기록을 엄밀히 판별해 가면서 사실을 밝힐 수밖에 없다고 생각된다. 이같은 기준에서 볼 때 조(趙)옹의 기록은 대체로 과장된 면이 없지 않다고 할 수 있다. 필자가 품고 있는 의문의 하나는 경박호전투 이후 그 곳에서 100km 이상 떨어진 사도하자로 북상하여 전투를 치르고, 다시 100여Km를 남하(南下), 동경성전투를 수행했다는 한국독립군의 행로(行路)가 과연 당시 상황에서 가능하느냐 하는 점이다.

112) 《광복(光復)》, p.56.

113) 국내의 대부분의 기존 논문과 단행본은 《광복(光復)》의 기록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여 대전자령전투에 참가하였던 일본군이 반총(飯塚)연대(나남 주둔 72연대)라고 잘못 파악하고 있다. 그러나 필자가 확인한 바에 의하면 당시 나자구(羅子溝)에 주둔하고 있던 부대는 한국주둔 제19사단 예하 회녕(會寧)주둔 보병 제75연대장 지전신길(池田信吉) 대좌(大佐)를 대장으로 하는 간도파견부대였다. 이 부대는 제19사단 관하(管下) 보(步)· 기(騎)·포(砲)·공병(工兵) 등의 혼성 2개 대대와 지전(池田)이 거느리는 주력부대 등 약 1,300여명 규모였다.〈소화칠년중간도(昭和七年中間島)(혼춘현(琿春縣)을 포함)급접양지방중요치안사항월별표(及接壤地方重要治安事項月別表)) 4월조(月條), 〈문서〉 제326권 sp.205-5, p.8254.〈소화팔년일월이칠일부재간도영정총령사발신재만무등대사완보고요지(昭和八年一月二七日附在間島永井總領事發信在滿武藤大使宛報告要旨)〉.〈문서〉 제327권, sp.205-5, p.8361. 반총(飯塚)연대는 대전자전투에서 패배한 일본군이 이를 보복하기 위해 1933년 11월 하순 대대적으로 나자구 일대를 공격 할 때 출동한 부대였다(조선일보, 1933.11.21자 참고

114) 〈문서〉 제326권, p.8254.

115) 〈간도공비취체문제(間島共匪取締問題)ニ관(關)スル척상관저모담회개황(拓相官邸懇談會槪況)〉, 〈문서〉, 제327권, sp.205∼5, pp.8498-8501.

116) 〈소화팔년중간도(昭和八年中間島)(훈춘현을 포함)급접양지방중요치안사항월별표(及接壤地方重要治安事項月別表)) 6월조, 〈문서〉 제329권, sp.205-5, p.8835. 《추사(秋史)》, p. 177에는 「반총(飯塚)연대」가 한중연합군을 전멸시키려고 공격해 온 것처럼 서술되어 있다. 《투쟁사》는 pp.133∼134에서 나자구의 일본군을 막연히 일군(日軍)의 「동만지대(東滿支隊)본부 사령부」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청천이 한중연합군의 일본군 습격설을 의도적으로 유포하여 그것 때문에 일본군이 이동한 것처럼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군 철수의 직접적 동기는 위에서 고찰했듯이 자체의 철수계획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117) 대전자(大甸子(나자구(羅子溝)))는 왕청현(汪淸縣) 속하는데 영안(寧安), 동녕(東寧), 혼춘현(琿春縣)과의 접경지 .역에 위치하고 있다. 이 곳은 1930년대 초에는 약 8천여 명의 주민에 만여쌍의 경작지 밖에 없는, 교통이 불편하고 .수림(樹林)이 무성한 산간벽지였다고 한다. .정협길림성연변조선족자치주위원회 문사자료위원회(편), 앞의 책, p. 150.

118) 《회고록》, p. 128. 〈대전자대첩(大甸子大捷)〉, pp.88∼89.

119) 당시 제19사단의 각 부대별 주둔지는 다음과 같다

부대명 사단 사령부 보병 37여단 보병 38여단 기병 27연대 공병 19대대
주둔지 나 남 함 흥 나 남 나 남 회 령
부대명 보병73연대 보병74연대 보병75연대 보병76연대 야포병25연대
주둔지 나 남 함 흥 회 령 나 남 나 남

자료 : 일본근현대사사전편찬위원회(日本近現代史辭典編纂委員會)(편(編)),《일본근현대사사전(日本近現代史辭典)》(동경(東京), 동양경제신문사(東洋經濟新聞社), 1978), p.899. .실제로 조선일보 1933.7.9자에는 6월 26일 백초구를 출발한 호송대가 7월 6일 오전 6시에 회령에 도착 했다고 보도.하였다. 이로 미루어 간도파견대의 귀환예정지는 회령이 틀림없었다고 할 수 있다.

120) 《투쟁사》, pp. 134∼135.

121) 《회고록》, p. 129. 대전자전투의 시기에 대해서 《회고록》은 7월 15∼20일 사이로, 《투쟁사》는 6월 6∼ 10일 중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광복(光復)》의 기록대로 6.28∼7.4 사이로 보는 것이 옳다. 조선일보 1933.7.9 보도기사와 《광복(光復)》의 기록날짜가 대체로 일치하기 때문이다.

122) 《투쟁사》, p. 136. 한국독립군의 배치에 관해서 《회고록》은 약간 다르게 적고 있다. 소상한 내용은《회고록》, p.129 참조

123) 《투쟁사》, p. 136. 지헌모(池憲模)는 위의 책에서 한국독립군이 합작한 부대가 왕덕림(王德林)의 중국구국군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명백히 잘못된 것이다. 한편 애국동지원호회(편), 《독립운동사》는 p.278에서 독립군이 2,500명, 중국군이 6,000명이라고 하였고, 조경 한옹도 〈대전자대첩(大甸子大捷)〉p.90에서 한국독립군이 2,500, 시세영부대가 2,000명이었다고 했다. 이 기록들은 과장된 서술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투쟁사》는 이 전투에 독립군 500여명이 참가했다고 하는데. 비교적 사실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124) 《투쟁사》, p. 136. 〈대전자대첩(大甸子大捷)〉, p.89.

125) 《투쟁사》, p. 137. 이 때 이청천의 다음과 같은 훈시가 있었다고 한다. “태평령의 공격은 3천만 대한인민(大韓人民)을 위하여 원한을 복수하는 것이다. 총알 한개 한개가 우리 조상의 수천, 수만의 영혼이 보우(保祐)하여 주는 피의 대가(代價)이니 제군(諸君)은 단군의 아들로 굳세게 용감히 모든 것을 희생하고 만대자손을 위하여 최후까지 싸워라. ”

l26) 당시 항일(抗日)부대의 경우 일반적으로 ① 적이나 친일파의 재산을 몰수, ② 항일(抗日)헌금의 모집, ③ 주민들로 부터의 누진세(累進稅)의 징수라는 세 가지의 재원(財源)확보책이 있었다고 한다. 《동북항일열사전(東北抗日烈士傳)》제 1집, p.222.

127)《투쟁사》, p. 139. 이 무렵은 한반도와 연변지방 일대가 장마철이었던 것 같다. 조선일보 1933년 6월 말∼7월 초 기사(記事)는 경남북과 전남지방의 폭우피해를 호외까지 발행하며 크게 보도하고 있다. 그러므로 《투쟁사》나 《회고록》 의 폭우에 관한 기록이 사실임이 증명된다고 하겠다.

128) 《투쟁사》, p. 139.

129) 〈소화칠년사월일일부재간도말송시찰부장발신천보산분서장완공신요지(昭和七年四月一日附在間島末松視察部長發信天寶山分署長宛公信要旨), 〈문서〉, 제335권, sp.205-5, pp9995∼9997 이러한 부대편성은 1932년 4월 3일 출동 당시의 상황이었으므로, 1933년 6월말의 철수 무렵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부대의 편성과 규모에 큰 차이가 있지는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130) 〈조선일보〉 1933.7 9자 《투쟁사》에는 3,000여대의 우마차가 징용되었다고 했는데, 조선일보에는 500여대라고 보도되었다. 우마차의 정확한 숫자를 헤아릴 수는 없으나, 나자구가 궁벽한 산악지대의 소읍(小邑)이라는 점을고려하면 그 곳에서 3,000여대를 일시에 동원하기는 어렵다고 보아 조선일보의 보도(일본군사령부 발표)기사를 택하였다.

131) 《회고록》, pp.130∼131.《광복(光復)》, p.56.《투쟁사》, pp.142∼144.

132) 《광복(光復)》, 《투쟁사》, 《회고록》등에서는 이 전투에서 일본군 1개 연대병력을 거의 전멸시켰다고 하였다..그러나 이는 약간 과장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필자의 견해로는 이때 철수하던 간도파견군이 전멸하 다시피 한것은 아니고 매복지점인 골짜기에 들어왔던 일본군의 병력과 자동차·우마차 등만이 태반을 잃는 치명적 타격을 받았다고 판단된다.

133) 〈조선일보〉 1933.7.9자.

134)《회고록》, p.131. 《투쟁사》, p.145. 이와는 달리《비사(秘史)》p.179에는 군복이 3만착, 담요 300장이라 하였고, 애국동지원호회(편),《독립운동 사》p.279에서는 박격포 5문, 군량·문서·군용품 등이 20여 마차, 평사포가 3문이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전술(前述)한 바와 같이 간도파견군의 부대규모나 조선일보 기사(1933.7.9) 등을 종합하여 볼 때 《투쟁사》의 기술(記述)이 사실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135) 《회고록》, p.131. 조선일보 1933.7.9 기사는 「반군(反軍)」이 버린 시체가 일백, 일본군 부상이 2명이라고 보도(일본군사령부 발표를 그대로 실음)하고 있어 양자간의 주장이 너무나 상반되고 있다. 그러나 일본군의 피해가 막.심하다는 사실은 분명 하다고 생각된다.

136) 〈간도급접양지방공비(間島及接壤地方共匪), 불영선인ノ행동정황(不逞鮮人ノ行動情況), 〈문서〉 제329권, sp.205-5, p.8886.

137) 김동화·김철수·리창역·오기성(편저), 《연변당사 사건과 인물》(연길, 연변인민출판사, 1988), p. 118.

138) 일본외무성 경찰기록이나 《만주공산비の연구(滿洲共産匪の硏究)》 등 일제 관헌기록을 찾아보면 이러한 사례는.쉽게 찾아볼 수 있다. 9.18사변 직후 중국의 마적들이 한인(韓人)들을 일제(日帝)의 앞잡이, 주구(走狗)라 하여 한인(韓人)들을 습격, 살상이나 약탈행위를 자행한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위의 기록에서와 같은 대규모 습격·살상.행위는 드물었다고 할 수 있다.

139) 이 거리는 《연변조선족자치주 개황》에 수록된 연변조선족자치주 지도를 참고로 추정·계산한 것이다. 따라서 약간의 오차가 있을 수 있다.

140) 이러한 사실은 아래의 기록으로 확인한 수 있다. .“세력불상(不詳)의 구국군:왕청현(汪淸縣) 나자구(羅子溝) 및 연길현(延吉縣) 삼도외(三道) 주둔의 황군(皇軍) (일본군의 자기부대에 대한 칭호 : 인용자)이 철퇴(撤退)하자 오지에 있던 대소적단(大小賊團)은 호기 (好機)가 왔다고 하며 동지방(同地方)에 위집(蝟集)하고. 다시 지난번에 안도현성(安圖縣城)으로부터 패주한 오의성일파(吳義成一派) 비적단은 7월 중순 연(延)·돈현(敦縣)(연길·돈화현 :인용자) 경계의 송을령(松乙嶺) 삼림지대로 이동하고, 동녕현(東寧縣)에서 행동중인 원(元) 구국군 부사령 공헌영 일파와 연락하며 그 부근 일대의 적단(賊團)을 그.통제하에 두고 구국군사령부를 나자구(蘿子溝)에 정하여 재기(再起)를 기도함.” 〈간도급접양지방공비(間島及接壤地方共匪),불영선인ノ행동정황(不逞鮮人ノ行動情況), 〈문서〉 제329권, .sp.205-5, p.8887.

141) 〈소화구년오월십칠일부재간도영정총영사발신재만○대사보고적록(昭和九年五月十七日附在間島永井總領事發信在滿○大使報告摘錄)〉 중 〈소화팔년중간도(昭和八年中間島)(琿春縣ヲ含ム) 급접양지방중요치안사항월별표(及接壤地方重要治安事項月別表)〉8월조(月條), 〈문서〉 제329권, sp.205-5, pp.8836∼8837.

142) 〈조선일보〉, 1933,10.11자.

143) 조선일보 1933년 11월 18일자는 이러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2천 공군(共軍)토벌차 토벌부대 나자구를 포위, 조선인이 다수 주거함으로 공격개시되면 극념여일(極念 慮一)」간도 왕청현 춘경향(春耕鄕) 나자구(羅子溝)에 공산당 약 2천명이 몰려와서 동지방(同地方)에 웅거 하야 반일반만(反日反滿)의 폭동공작을 한다는 정보가 있어 그동안 사면으로 그들을 포위하느라고 동편 으로는 동녕(東寧)에서 .토벌부대가 서행(西行)하고, 북에서는 황정자(荒頂子)에서 역시 토벌부대가 남하 (南下)하고, 서편으로는 목능(穆 .陵)에서 토벌부대가 동진(東進)하고, 남(南)에서는 ○○부대가 북상(北上) 하여 포위하던 중 십칠일까지에 포위망이 완전히 펴졌으므로 불일(不日)간 일제토벌을 개시하리라는 바‥‥ ‥(중략(中略))‥‥‥집결된 공산당이 이천명이나 되므로 토벌의 충화가 열리는 때에는 비상한 장면으로 나타내이리라 한다. ” 위의 기사는 오의성(吳義成)·시세영(柴世榮) 등의 길림구국군부대를 공산군으로 잘못 알고 있지만, 이를 통하여 이 무렵 구국군의 규모가 약 2천명 내외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므로 《투쟁사》에서 대전자전투시 구 국군이 2천여명이라고 한 것과 일치하고 있다. 그러나 이 무렵은 이미 한국독립군이 오의성(吳義成)· 시세영(柴世榮) 등의 부대와 결별한 뒤였다.

144) 《회고록》, p.135.《광복(光復)》, p.56.《투쟁사》, p. 146.

145) 《회고록》, p.135.
오의성부대의 이러한 움직임을 다음의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다. “반만구국군(反滿救國軍) 전적총사령(前敵總司令) 오의성(吳義成)은 부하 천여명을 거느리고 안도현(安圖縣)으로부터 돈화(敦化), 영안(寧安)을 경유, 8월 초순 왕청현(汪淸縣) 나자구(羅子溝)로 이동하고 황군(皇軍)철퇴 후 동지방(同地方)에 위집(蝟集)하여 있던 소적(小賊)집단을 회유·개편하여 그 총세는 약 2천에 이르는데, 일면(一面)으로는 소련측과 기맥을 통하고 소만(蘇滿)개전시에는 제적(制敵)행동을 교환조건으로서 무기의 공급방법을 교섭함.”〈소화팔년중간도급접양지방월별비적세력소장표(昭和八年中間島及接壤地方月別匪賊勢力消長表)〉8월조(月條),〈문서〉 제329권, sp.205-5, p.8888.

146) 한국독립군과 오의성부대와의 연합상황을 일본외무성 경찰기록은 아래와 같이 기술하였다. “‥‥‥‥구국군(救國軍) 전적총사령(前敵總司令) 오의성일파(吳義成一派)는 사산(四散)한 부하 천여명을 규합 하여 재소(在蘇) 왕덕림(王德林)과 연락, 소련측으로부터 무기, 탄약, 군사교관 등의 원조를 받고 일면(一面) 공 비(共匪),민족계(民族系) 불영선인(不逞鮮人),북경반일회(北京反日會)등과 기맥을 통하여 장기항일(長期沆日)을 표방, 기세를 올리며‥‥‥ (후략(後略))”(방점은 인용자(引用者))〈간도급접양지방비적ノ행동ニ관スル정황(間島及接壤地方匪賊ノ行動ニ關スル情況)〉, 〈문서〉 제329권, sp.205-5, p.8876. 위의 기록에서 민족계 불영선인(不逞鮮人)은 한국독립군 관련인물들을 지칭하는 것이 틀림없다고 분석된다.

147) 《회고록》pp.144∼146,173에는 오의성부대 내의 한인(韓人) 공산주의자들로 조직된「반일특공대(反日特攻隊)」의 존재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이광(李光)이 조직한 이 부대의 처음 명칭은 「항일 별동대(抗日別 動隊)」였고 출발 초기에는 민족주의적 성향을 띠었지만, 이광(李光)이 피살된 후 공산주의적 색채를 띠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중국측 자료 《조선족백년사화》 제 2집 PP.216∼217에는 “1931년 말에 중공(中共) 왕청현위(汪淸縣委)에서 이광(李光) 등을 구국군 오의성부대에 파견하여 그 안에서 중공당이 영도 하는 「별동대」를 조직하였다.”또 “1933년 5월에 이광(李光)이 희생된 후 별동대의 성원들이 왕청(汪淸) 유격대에 편입되었다.”고 하여 중국공산당의 주도로 조직되었다고 하였다. 한편 일제측 기록은 오의성부대 안의 한인(韓人) 별동대원 몇 명의 신상을 다음과 같이 조사·파악하고 있다.

성 명 생년월일 주 거 본 적 적요(摘要)
한영일(韓永一)
1907
길림성(吉林省)
연길현(延吉縣)
중공당(中共黨) 당원겸 구국군 제1로(路) 오의성부대 별동대 반장. 1928년 중공당(中共黨)에 가입

정원용(鄭元龍)
1907
길림성(吉林省) 간도
이하 불상(不詳)
중공당(中共黨) 당원겸 구국군 제1로(路) 오의성부대 별동대원, 중공당 북특위영안현위남구(北特委寧安縣委南區)책임으로서 활동중인 바 1932년 이후 전기(前記) 오의성부대에 붙게 됨

박동희(朴胴熙)
(별명 박성용(朴成龍))
1884
함경북도 명천
중공당(中共黨) 당원겸 구국군 제1로(路) 오의성부대 별동대원, 대납자명동학원고등과(大拉子明東學院高等科) 졸업. 원래 ML파 조선공산당원으로 활동 중 1930년 검거되어 국자가(局子街) 모범감옥에서 6개월간 구금되었던 적이 있음.

자료 : 《국외ニ어ケル용의조선인명부(國外ニ於ケル容疑朝鮮人名簿)》, pp.26.223.250. 위의 표를 통하여 별동대가 처음부터 중공당의 영향하에 조직된 공산주의자들의 조직임을 알 수 있게 된다.

148)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 제오군(第五軍)》(합이빈(哈爾濱), 흑룡강인민출판사(黑龍江人民出版社), 1986),.p.19; 허동찬(許東粲), 《속김일성평전(續金日成評傳)》(서울, 북한연구소(北韓硏究所) 1988), p.222에서 재인용.

149) 허동찬, 위의 책, pp.225.228.

150) 《회고록》, p.139.

151) 허동찬, 앞의 책, pp.225,228. 김동화·김철수·리창역·오기송(편저), 《연변당사 사건과 인물》. p.143.

152) 사충항(史忠恒)에 관하여는 《동북항일열사전(東北抗日烈士傳)》 제 2집, pp.71∼76을 참고하기 바람.

153) 《조선족약사》, p.144. 《연변당사 사건과 인물》, p.144. 신현무(申鉉武)·김봉각(金鳳珏)·최홍빈(崔洪彬), 〈동만항일군사유격근거지발전개술(東滿抗日軍事游擊根據地發展槪述)〉, 《복인보간자료중국현대사(復印報刊資料中國現代史)》k4, 1982, 19(북경(北京), 중국인민 대학서보자료사(中國人民大學書報資料社)), p.90. 광복(光復)》에는 동녕현성전투가 9월 10일로 기록되어 있으나, 이홍문(李鴻文)·장본정(張本政)(주편(主偏)), 동북대사기(東北大事記)(하권(下卷))》(장춘(長春), 길림문사출판사(吉林文史出版社). 1987), p.804에는 9월 6일 약 3,000여 병력이 참가했다고 했다. 또 일제의 정보문서에는 9월 6일 비적 약 2,000이 오전 2시부터 공격을 개시했다고 파악하고 있다(허동찬, 앞의 책, p.227 참조). 한편 《연변당사 사건과 인물》은 이 전투에서 훈춘유격대는 철수할 때 합류했다고 밝히고 있다. 154) 《연변당사 사건과 인물》, p.154. .《동북항일열사전(東北抗日烈士傳)》 제 2집, p.72. 155) 《광복(光復)》 p.56에 따르면 한국독립군이 성을 공격할 때 구국군이 지원하지 않아 큰 피해를 입고 패퇴 하였다고 한다. 《동북항일열사전(東北抗日烈士傳)》 사충항열사전(史忠恒烈士傳) 등과 기타의 중국측 자료에 의하면 동·남문측을 공격한 부대는 쉽게 성내에 진입한 반면, 사충항(史忠恒) 등의 부대는 서문으로 공격하여 큰 피해를 입었다고 했다. 그러므로 한국독립군은 서문측 공격에 가담 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156)《연변당사 사건과 인물》. pp.144∼145. 《동북항일열사전(東北抗日烈士傳)》 제 2집, pp.72∼73.

157) 《연변당사 사건과 인물》, p.145.

158) 《회고록》, p.212.

159) 동녕현성 전투에서의 일(日)·만군(滿軍) 살상에 대한 기술(記述)은 저서마다 상당한 차이가 있다. 신현무(申鉉武) 등의 앞의 논문에서는 일군(日軍) 200여명과 만주국군(滿洲國軍) 300여명을 살상시켰다고 하였고,《동북대사기(東北大事記)(하권(下卷))》는 일군(日軍) 150여명과 만주국군 70명을 사살하였다고 적고 있다. 반면(反面) 일제측의 기록은 1933년 3월 10일의 동녕현성전투는 피아의 전사·전상수를 상세히 기록하고 있는데 비하여 9 월의 전투는 그러한 기록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한편 조경한옹은 《광복(光復)》에서 동녕현성 전투에서의 패퇴를 폐기로 한국독립군이 오의성·시세영부대와 결별한 것처럼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필자가 확인한 바에 의하면 이 전투에서의 실패 때문에 한국독립군이 오의성 부대와 결별하고 해체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160) 허동찬, 앞의 책. p.228.

161) 《조선족약사》, p.145.

동녕현성전투는 오늘날 중국과 북한에서 큰 비중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중국측의 입장에서 보면 이 전투 뒤 중공 계열의 유격대가 본격적으로 반만항일부대와 연합, 중공(中共) 중앙(中央)의 1.26서한의 지시에 따라 통일전선을 결성하였기 때문에 중요한 의의를 부여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반면 북한에서는 왕청(汪淸)유격대 대장이 김일성 이었고, 더 나아가 1,500여의 반만항일군이 연합하여 전개한 이 전투 자체를 김일성이 지휘했다 고 왜곡하여 선전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측의 이러한 주장은 현재 중국측의 여러 기록들에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중국측의 여러 단행본(單行本)에는 왕청(汪淸)유격대 대장이 양성룡(梁成龍)이었고. 그 규모도 겨우 40∼50여명에 지나지 않는 미약한 세력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상세한 내용은 《조선족약사》, pp.144∼145; 《연변당사 사건과 인물》,pp.143∼145;《조선족백년사화》 제 2집 . pp. 216∼217; 허동찬, 앞의 책, pp.224∼234를 참고하기 바람.

162) 주보중(周保中)은 운남성(雲南省)의 소수민족인 백족(白族)출신으로 운남성(雲南省) 대리현에서 1902년에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해리원이고 자(字)는 소황(紹黃)이다. 그는 1923년 운남강무학교(雲南講武學校)에 들어가 3년 동안 수학한 후 1926년 4월 국민정부(國民政府)의 국민혁명군(國民革命軍)에 가담하여 북벌전쟁에 참가하였다. 그 는 1927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한 뒤, 1928년 말 소련에 유학하였고, 1931년 말경에 중국으로 돌아왔다. 그 후 그는 중공당(中共黨)의 명령을 받고 중국 동북지방에 파견되어 중공(中共) 만주성위 군사 위원회 서기, 수녕반일동맹군장(綏寧反日同盟軍長)광 당위원회(黨委員會) 서기겸 군사위원회 주석, 동북항일 연군 제 5군 군장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해방 이후 길림성(吉林省) 주석(主席)을 지냈으나, 1964년 2월 북경 (北京)에서 병사하였다. 그는 1932년 5월 길림자위군 선전부에서 일하였지만. 7월에는 길림 구국군에 가담, 구국군 총부(總部)의 총참의(總參議)가 되었고, 얼마 뒤에는 참모장이 되었다. 한준광(韓俊光)·권오근(權伍根)·남대명(南大明)(편역(編譯)), 《주보중문선》(연길, 연변인민출판사, 1987), pp. 1∼7. Donald W. Klein, Anne B. Clark, Biographic Dictionary of chinese communism, 1921∼1965, Volume Ⅰ (The East Asian Research Center at Harvard University, 1971), pp.225∼228. 조경한옹은 《회고록》에서 이름을 알 수 없는 주(朱)참모라고 회고하고 있는데, 중국(中國)측의 여러 기록을 검 토해 보면 그는 주보중(周保中)이 틀림없는 것으로 해석된다.

163) 〈진한장렬사전(陳翰章烈士傳)〉, 〈동부항일열사전(東北抗日烈士傳)〉 제 3집, p.86; 이명영(李命英), 《권력(權力)의 역사(歷史)》(성대출판부(成大出版部), 1983), p.311에서 재인용.

164) 이러한 사실을 한 중국측 자료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1933년 6월 중공(中共) 왕청현위원회(汪淸縣委員會)에서는 「1.26」지시를 관철하기 위한 「현위」의 결의를 통과시켰다. 양성룡(梁成龍)은 이때 왕청현 일대에서 활동하고 있던 오의성. 사충항(史忠恒), 시세영 (柴世榮), 이삼협(李三俠) 등 구국군부대와 적극적으로 연계하고, 또 유격부대에서 우수한 동지를 선발하여 그들 속에 정치공작원으로 보냈다. ”(《연변열사전》 1, p. 199; 허동찬, 앞의 책, p.220에서 재인용).

165) 일제측의 자료에 따르면 1930년 초반의 경우 각파 한인(韓人) 공산당원 및 공산주의자가 거주 한인(韓人)의 1/10을 차지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소화오년삼월사일부재간도강전총영사발신폐원외무대신완보고요지(昭和五年三月四日附在間島岡田總領事發信幣原外務大臣宛報告要旨)〉, 〈문서〉 제316권. sp.205-5, p.6179). 또 1933년 1월의 경우 한인공비(韓人共匪)의 폐해를 시정하는 것이야말로 간도치안의 9할을 성공시키는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소화팔년일월이칠일부재간도영정총영사발신재만무등대사완보고요지(昭和八年日月二七日附在間島永井總領事發信在滿武藤大使宛報告要旨)〉), 〈문서〉 제327권, sp.205∼5, p.8392

166) 《투쟁사》. pp. 150∼151.

167) 《회고록》, pp.146∼147, 182∼183.
《투쟁사》 pp.150∼151에서는 오의성(吳義成)이 이청천에게 민족주의 사상을 버리고 공산주의 노선으로 전환, 오의성부대에 합류하라고 강요하였다고 하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오의성은 공산주의자가 아니기 때문이다(황용국(黃龍國), 앞의 논문 참조).

168) 《회고록》, pp. 149∼150.

169) 위의 책, pp. 150∼151. 《투쟁사》, p. 151. 구국군의 무장해제 강요는 중공(中共)의 유격대에 대해서도 시행된 것 같다.《동북항일열사전(東北抗日烈士 傳)》 제 3집, p.86에는 오의성(吳義成)이 1933년 10월 유격대의 무장을 해제하려고 하였으나, 진한장(陳翰 章)·왕윤성(王潤成) 등의 노력으로 위기를 벗어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170) 조경한옹은 《회고록》에서 한국독립군과 구국군과의 갈등이 주로 주중중(周仲中)과 중(中)·한인(韓人) 공산주의자들의 음해공작 때문인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시세영 등의 반감(反感), 그리고 무기이양 및 구국군으로의 합류요구 등이 거부된 데 대한 반작용(反作用)도 크게 반영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171) 이러한 오의성과 주보중의 대립·결별에 대하여 일본군 당국자와 코민테른은 공통적으로 주보중 등의 급진· 좌경적 태도에서 기인하는 것이라 하여 비판하고 있다. 즉, 이로 말미암아 오의성부대와 기타 부대와의 통일 전선(統一戰線)이 분열하고 말았다고 보는 것이다. 구체적 내용은 《만주공산비の연구(滿洲共産匪の硏究)》제1집, p.78; 김정명(金正明)(편(編)), 《조선독립운동(朝鮮獨立運動)》(동경(東京), 원서방(原書房), 1967), p.889 참조바람. 그런데 《만주공산비(滿州共産匪)の연구(硏究)》는 여기에서 중국공산당이 한 때 구국군중의 급진분자로서 중한반일병사위원회(中韓反日兵士委員會), 중한유격대(中韓游擊隊). 병민혁명위원회(兵民革命委員會)를 조직하여 항전(抗戰)에 동요적인 수뇌부를 배제(排除)하고 그 통솔하의 부대를 자기 영도하에 탈취하려고 했다고 기록하고 있어 주목된다. 한편, 조경한옹은 《회고록》p.178에서 주보 중(周保中)이 오의성에게 총살당했다고 하였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라고 판단된다.

172) 《회고록》, pp.152∼191
당시의 일제측 자료는 한국독립군과 오의성·시세영부대 등 연합군의 내분상황을 그 해 9월경에 일어났던 사건으로 탐지하여 아래와 같이 기록하였다. “왕청현(汪淸縣) 나자구(羅子溝) 부근에 근거한 반만호국군(反滿護國軍) 오의성일파(吳義成一派)는 소련측으로부터 다수의 무기를 공급만고 중추절(仲秋節) 전후를 기하여 간혼(間琿(간도·혼춘-인용자(引用者))) 주요 도시 습격을 획책하여 이를 결행하려 할 때 내분이 일어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으나, 그 후 부대의 편성·교체 및 융화 조정에 의해 통제를 회복, 다시 평야습격의 기세를 보임.”
〈소화팔년중간도급접양지방월별비적세력소장표(昭和八年中間島及接壤地方月別匪賊勢力消長表)〉 9월조, 〈문서〉 제329권, sp.205-5, p.8889.

173) 동만(東滿)지역의 소비에트에 대한 소상한 내용은 《만주공산비の연구(滿州共産匪の硏究)》 제 1집, pp.80∼83을.참고하기 바람

174) 《회고록》, pp.210.217.

175) 위의 책, p.192.《광복(光復)》, p.56. 이청천 등의 이동과 한국독립군 잔존부대의 영안(寧安)·밀산(密山) 등지로의 이동경위에 대해서는 제설(諸說)이 있다. 그러나 《광복(光復)》 이 가장 정확한 자료로 생각된다.
한편 임시정부의 「명령」 내지 「지시」로 한국독립군의 주요 인사들이 남하(南下)한 것으로 보고 있는 일부 단행본(신재홍(申載洪), 앞의 논문. pp.439∼440)이 있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이들의 이동은 스스로가 처한 내외적 상황을 냉정하게 판단하여 자율적으로 결정한 사항이라고 해석해야 한다.

176)《일생(一生)》 pp.118, 124.《회고록》. p.210.《투쟁사》, p.162.

177) 김구(金九), 《백범일지(白凡逸志)》(서문당, 1989), p.309.《일생(一生)》, p.124.《광복(光復)》, p.56. 이때 중국본토로 이동하게 된 한국독립당·군 관련인사들의 숫자에 대하여는 제설(諸說)이 있다. 일제 정보기관에 의하면 20여명설(《고등경찰보(高等警察報)》제 2호. p.44; 《최근(最近)に어(於)ける조선치안상황(朝鮮治安狀況)(1933·38년)》, p.242), 50여명설(《최근(最近)に어(於)ける조선치안상황(朝鮮治安狀況)(1936년)》), pp.328.349; 《고등경찰보(高等警察報)》 제 4호, p.133; 《사상정세시찰보고집(思想情勢視察報告集)(중화민국재유불영선인(中華民國在留不逞鮮人)の동정(動靜))》,p.19), 80여명설(《고등경찰보(高等警察報)》 제 6호, p.310) 등이 있다. 그러나 박영준(朴英俊)씨는 약 40여명이 이동하였다고 회고하였다(이현희(李炫熙)(편(編)), 《한국독립운동 증언 자료집》,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6, p.150). 또 김승곤(金勝坤)씨는 이청천과 함께 남하(南下)하여 낙양분교(洛 暘分校)에 입교(入校)한 청년이 34명이었다고 하였다(이현희(李炫熙) (편(編)), 위의 책, p.44). 김승곤(金勝坤)씨의 이러한 증언은 1935년 12월 5일자 동경형사지방법원재판소(東京刑事地方法院裁判所) 검사 태전내조(太田耐造)의 보고에 낙양분교(洛陽分校) 입교자 중 이청천파(李靑天派)가 34명이라고 하여 성명, 추정연령, 응모지 및 본적지 등 개략적 신상을 파악하고 있는 사실에 비추어 거의 사실에 가까운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투쟁사》 pp,163∼164에는 1차로 이청천, 오광선(吳光鮮) 권준(權晙), 이복원(李復源), 최용덕(崔用德), 김관오(金官五), 장두권(張斗權), 윤익헌(尹益憲), 김용화(金龍華), 이붕해(李鵬海), 이덕수(李德秀),강태희(姜泰熙),고명무(高明茂),박명진(朴明鎭), 이창준(李昌俊), 최관용(崔寬用)이외 간부 23명 등 39명이 선발되어 북지(北支)로 건너갔다고 하였다. 여기에 후일(後日) 조경한, 홍진, 이규보 등이 합세하였으니 관내로 이동한 한국독립군계열 인물들은 대체로 40∼50명 정도가 되지 않을까 한다.

178) 한국독립군 장병 중 중앙군관학교 낙양분교 특별훈련반에 입교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들 중 확인할 수 있는.30명의 명단을 주로 일제측 자료에 의존하여 파악해 보면 아래와 같다.

성명 추정연령 응모지 및 본적 적요(摘要)
이경옥(李慶玉) 28 만 주 이청천의 장남
이영식(李英植) 28 만주(간도·길림방면)
왕덕산(王德山) 29 〃
이 무(李 武) 21 〃
윤여복(尹如福) 19 〃

황운용(黃雲龍) 24 〃
전태산(全泰山) 32 〃
홍송삼(洪宋三) 20 〃
최병권(崔炳權) 21 〃
이의명(李義明) 19 〃

고운기(高雲起) 28 〃
장사충(張思忠) 23 상해(上海), 경기도
심명철(沈明哲) 28 만 주(滿 州)
박태양(樸太陽) 21 경북 대구
신해문(申海文) 26 만 주

이춘산(李春山) 28 〃
당상여(黨相如) 27 〃
염응택(閻應澤) 28 경성(京城)용산(龍山)소재 선린상업학교졸업
장 걸(張 傑) 20 경 성(京 城)
이종환(李鐘煥) 21 상해(上海)추원규(秋元圭)에 해당함.

장중진(張重鎭) 20 경 성(京 城)
김유신(金有信) 20 북평(北平(북경-北京)) 1935년12월 정주철도국에 근무중.
송해산(宋海山) 26 신의주 신의주에 거주 중 시계점에 있었음.
남일봉(南一峰) 25 경 성
이담산(李淡山) 36 만 주

정만리(程萬里) 27 〃
이만영(李萬英) 21 〃
조운산(趙雲山) 38 〃
김 혁(金 革) 23 평 양 평양의 실가(實家)는 운동구점임.
심광식(沈光植) 25 만 주

자료 : 〈소홧비년하이강(昭和十年夏以降)に어(於)ける중화민국재유불령선인단체(中華民國在留不逞鮮人團體)の정황(情況)〉, 《사상정세시찰보고집(思想情勢視察報告集) (중화민국재유불령선인(中華民國在留不逞鮮人)の동정(動靜))》(경도(京都),동양문화사(東洋文化社), 1976), pp.259∼261. 위의 인물 중 왕덕산(王德山)은 한국독립군에 있을 때는 조경한의 부관으로 복무하였고(《회고록》 p.96에는 왕덕삼(王德三)으로 나옴). 전태산(全泰山)은 《회고록》 p. 192에 신병징모차 조경한과 동행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본명(本名)임이 확인된다. 고운기(高雲起)는 공진원(公震遠)의 별명(別名)이다. 그리고 신해문(申海文)은 신숙(申肅)의 차남인 신화균(申化均)으로 추정된다(《일생(一生)》, p.125 참조). 이춘산(李春山)은 중국적(中國籍)한인(韓人)으로 중공당원(中共黨員)이었던 사람이 있었는데, 동일인(同一人)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의 가명인지 확인할 수 없다.

위 표에 기재된 성명은 대부분 가명일 것으로 생각된다.대부분이 20대이지만 30대도 3명이나 끼어 있어 이채롭다.

179) 호춘혜(胡春惠), 《중국안의 한국독립운동》, 신승하(辛勝夏)(역(譯)), 단대출판부(檀大出版部), 1978, p.52.

180) 당시 한국독립당원이었던 이우석(李雨錫)옹의 증언에 따르면 이 무렵 한국독립당은 매우 어려운 처지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당(黨)·군(軍)은 사방에 흩어져 정상적인 체제가 유지되지 못한 것 같다. 홍진·이청천 등이 중국 본토로 가려하였으나. 여비가 없어 가지 못할 정도였다는 것이다. 이에 이우석(李雨錫)옹이 여비를 마련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으나, 이루지 못하고 임시정부에서 이규보(李圭輔)에게 보낸 비용으로 가까스로 임시정부에 갔다고 한다. 박영석(朴永錫), 〈일제하 만주·노령지역에서의 민족독립운동 일사례(一事例) 연구>, 《일제하독립운동사연구 (日帝下獨立運動史硏究)》(일조각(一潮閣), 1984), pp. 202∼203 참조. 그러므로 이청천 등 주요인사(人士)들이 남하(南下)하기 전에도 이같이 어려운 사정이었다면 핵심적 인물들과 40∼50여명에 달하는 우수한 인력(人力)이 대거 이동한 뒤의 한국독립군은 사실상 유명무실한 상태, 즉 해체상태로 보아야 한다.

181) 이후 동만(東滿)지방은 한인(韓人)들이 구성원의 대부분을 이루는 중공(中共)계열의 유격대가 대일투쟁의 주류를 이루게 된다.

182) 민족해방운동(民族解放運動)의 개념을 적확(的確)히 정의(定義)하는 것은 필자의 능력(能力) 밖이나, 여기에서는.식민지 피압박 약소민족이 제국주의 지배국을 타도하고 봉건적(封建的) 잔재(殘滓)를 청산하며, 조국과 민족·개인(인간)의 해방을 쟁취하여 새로운 민족국가(民族國家)를 건설(建設)하기 위한 모든 형태의 총체적 운동을 지칭하는 것으로 규정(規定)코자 한다.
출처 : 살맛 나는 세상이야기들...
글쓴이 : 크레믈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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