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도 조선인 친일 단체 『間島協助會』에 관한 연구 손 춘 일 목록 1. 머리말 2. 간도협조회 설립 목적 3. 간도협조회 조직 구성 4. 간도협조회의 주요 활동 5. 맺음 말 1. 머리말 일제는 중국 동북을 강점한 14년동안에 동북 각지에서 타오르는 항일무장투쟁을 깨끗이 소멸하기 위해 일본정규군을 동원해 항일무장대오에 대해 잔혹한 토벌을 감행하는 동시에 동북 각 지역에 현병경찰대를 설치하거나 친일무장단체를 조직하여 이에 협조하도록 하였다. 일제가 조직한 이런 외곽조직들을 보면 선후하여 현병대, 경찰서, 특무기관, 보안국 등 통치기구와 民生團, 協助會, 宣撫工作班, 武裝自衛團, 森林警察署, 特設部隊 등이 있었다. 간도협조회는 바로 그 가운데 하나에 불과한 것이다. 간도협조회란 주로 북간도지역 친일조선인들로 이루어 졌으며 1934년 9월부터 1936년말까지 북간도지역에서 악명 높은 친일 외곽조직이였으며 무장조직이기도 하였다. 간도협조회는 일본헌병대와 독립수비대가 북간도지역 中共 지하당조직을 파괴하고 항일유격대를 탄합하는데 일조하면서 항일투사에 대한 살인, 방화, 체포, 귀순, 파괴 등 온갖 만행을 다 저지렀으며 중공 지하당 조직과 항일무장대오에 대한 그 파괴력은 대단히 컸다. 그러나 지금까지 중국 동북지역 항일무장투쟁사연구에서 자료상 관계로 간도협조회에 대한 연구는 아직도 미미한 단계에 머물고 있으며 그 조직 구조와 구체적인 활동 상황에 대해 잘 밝히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필자는 본문에서 나름대로 수집한 자료로 그 면모를 밝혀 보려 한다. 2. 간도협조회 설립 목적 1931년 "9. 18"사변이후 중국 동북지역은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되었다. 그러자 전 동북지역에서 항일무장투쟁이 활발이 진행되었는데 그 가운데서도 역사적으로 반일정서가 깊고 중국공산당 하부조직이 많았던 북간도 조선인사회에서 중공 산하 항일유격대가 전 동북지역에서 가장 먼저 창립되고 발전되었다. 우선 북간도지역에서 중공 하부조직 발전 상황을 보면 1928년 2월에 용정촌당지부가 건립된 것을 시작하여 1928년 8월에 中共東滿區委가 창립되었다. 그리고 그 산하에 팔도구, 국자가, 동불사, 로두구, 광제욕, 옹성라즈, 삼도구, 화룡, 훈춘, 룡정 등 10개지부를 두었다. 1930년 2월에 이르러 중공연변특별지부위원회가 건립되고 8월에 延和中心縣委, 그 산하에 연길구위, 로투구구위, 개산툰구위, 삼도구구위, 평강구위, 하마탕구위 등 10개의 구위에 61개의 지부가 건립되었으며 당원이 470여명으로 증가하였다. 그해 10월, 동만지역 중공당조직의 신속한 발전에 비추어 중공 만주성위의 지시에 따라 동만특위를 내오고 원 연화중심현위를 연화현위로 고쳤다가 이듬해 8월에 延吉縣委와 和龍縣委로 나뉘었다. 1931년 3월까지 이르러 동만특위는 6개 현위와 19개 구위로 이루어 졌으며 그중 연길, 화룡, 훈춘, 안도, 왕청 5개 현의 중공당 당원이 636명으로 전 동북 당원 총수의 54.1%를 차지하였다. 특히 그 가운데서도 조선족당원이 96.5%를 차지하였다. 북간도지역에서 바로 이런 중공당 하부조직의 확대와 발전으로 "9. 18"사변전부터 이미 무장단체가 조직되여 있었다. 1931년 2월에 발표된 『東滿遊擊隊大綱』에서 유격대의 성격, 과업, 그리고 유격대에 대한 당의 령도, 유격대의 지휘계통, 전술 등을 상세하게 서술하였다. 사실 1930년 하반년에 이르러 화룡현 평강유격대, 연길현 로투구유격대, 왕청현 라자구유격대, 훈춘현 대황구별동대가 선후하여 건립되었다. "9.18"사변이 발발하자 이런 무장단체들은 북간도지역에서 재빨리 항일유격대로 전환하였다. 예컨대 1932년에 朴東根을 대대장, 朴吉을 정위로 한 연길현 항일유격대대가 설립되었으며 이어서 1933년 11월 梁成龍을 대대장, 金明均을 정위로 한 왕청현 항일유격대, 훈춘유격대(1933년 3월에 이르러 孔憲琛을 총대장, 박태익을 총정위로 한 훈춘현유격총대로 발전), 1933년 3월 張承煥을 대대장, 車龍德을 정위로 한 화룡현 유격대대가 창립되었다. 이들은 1933년초까지 북간도지역에서 항일유격근거지를 도합 10개를 창설하였는데 구체적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즉 연길현 의란구의 왕우구, 팔도구구의 석인구, 로투구의 葦子溝, 옹성라즈구 삼도만부근의 能芝營, 왕청현 2구의 소왕청과 마촌, 왕청현 5구의 삼도구(가야하), 泗水坪과 영창동, 훈춘현 荒區의 대황구, 훈춘현 영통라즈구의 연통라즈, 화룡현 평강구의 어랑촌, 삼도구구의 牛腹洞 등 근거지이다. 이와 같은 항일유격대의 발전과 유격근거지의 창설은 일제의 식민지통치에 크나 큰 위협이였다. 그리하여 일제는 1932년부터 1935년까지 동만항일유격근거지에 대하여 선후하여 3차례 대규모의 군사 토벌을 감행하였다. 제1차토벌은 1932년 봄부터 시작하여 1933년 3월에 끝났다. 1932년 4월 3일, 일제는 조선 라남 제19사단으로 구성한 간도파견대, 4월 17일 일본관동군 平賀부대, 쯔루미(鶴見)부대를 동만에 투입하였다. 이들은 우선 훈춘, 연길, 화룡, 왕청 등 현의 유격근거지를 공격하여 미친듯이 소탕하고 백성들을 잔혹하게 학살하였다. 그 가운데서도 1932년 8월 7일, 해란강화련리에서 빚어 낸 『해란강대학살사건』이 가장 유명하였다. 제2차 토벌은 1933년 11월하순부터 이듬해 봄까지 진행되었다. 일본군과 僞滿軍은 세갈래로 나뉘여 동만 각 근거지에 들이닥쳤다. 한갈래는 소왕청유격근거지로 향하고 다른 한갈래는 연길현 왕우구와 삼도만 유격근거지로 향하였으며, 그다음 한갈래는 훈춘 대황구, 연통라즈, 남구 유격근거지로 향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제2차토벌의 중점을 왕청 항일유격근거지에 두었다. 일제는 이렇게 1934까지 두번에 거쳐 동만항일유격근거지에 대해 무차별 토벌을 감행하였지만 결국 항일유격대를 소멸하지 못하였으며 동만유격대는 오히려 반토벌가운데서 더욱 확대되었다. 1934년에 이르러 항일유격대는 1253명으로 발전되고 왕청현에 중공 당원이 198명, 연길현에 189명으로 증가되여 "그 세력을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일제는 1934년 가을부터 동만유격근거지에 대해 또 다시 제3차 토벌을 감행하였다. 일제는 제3차 토벌에서 1934년 3월말에 결성된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를 소멸하는 것을 목적으로 많은 병력으로 주요한 도시, 큰 마을과 교통요지를 지키게 하고 다른 한편으로 정예부대를 출동시켜 곳곳에 진을 치고 방어시설을 구추하는 작전방침을 행하면서 항일유격지에 대한 토벌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일본 정규군부대가 진행한 이런 대규모적인 군사토벌은 일시적으로 항일유격근거지를 점령할 수 있었지만 항일유격대와 지하당조직을 소멸하는데는 역부족이였다. 이렇게 되자 일제는 "사상"과 내부로부터 항일무장대오를 근본적으로 분화시켜 일부 불견정한 항일유격대원들을 이른바 "귀순"시키는 방법으로 항일무장대오를 약화시키는 방법을 책택하기로 하였다. 즉 항일유격대의 내부를 와해시키자는 것이 일제의 목적이였다. 1934년 4월 일본관동군 "연길헌병대"가 설립됨에 따라 일본군 『동남방위지구』사령관 佐藤中佐, 『연길헌병대』대장 加藤伯次郞中佐, 『연길독립수비대』대장 鷹森中佐 등이 서로 밀모한 다음 친일파 김동환, 손지환, 김길준, 태리훈, 김영수, 김송렬, 허기락, 김우근 등 13명을 끌어 드려 1934년 9월 6일에 정식으로 『간도협조회』를 설립하고 동시에 이른바 선언, 강령 그리고 규약 등을 제정하였다. 간도협조회의 이른바 "선언"을 보면 먼저 항일사상 "변화"를 강조하였다. 즉 "마땅히 협애한 민족감정과 현실에 대한 불만 및 착오적인 계급투쟁사상을 견결히 포기해 버리고 동심협력하여 용감히 한갈래의 활로를 개척"해야 한다면서 항일사상을 포기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더나아가 "편협하고 산만하고 통체가 없고 불합리하며 경솔한 운동상황을 청산해 버리고 지금 발전하고 있는 만주국의 일원으로서 건설하려는 전투원으로 되여야 한다"고 역설하엿다. 그리고 강령에서는 "가장 견정한 사상으로 대중을 령도해야 한다"고 기본 임무에 대해 지적하였다. 여기서 특히 지적해야 할 것은 간도협조외내에서도 전적으로 항일유격대에 대한 와해와 파괴를 일 삼았던 특별공작대는 이와 별도로 『행동강령』을 규정하였는데 "공산당 및 항일반만군의 진영을 와해시키기 위하여 믿음직한 분자를 잠입시키고", "일반 민중속에 민음직한 분자를 잠임시키며", "공산당 및 항일반만군의 활동을 적발"한다고 명백히 지적하였다. 간도협조회는 바로 이런 이른바 사상 투쟁을 전제로 중국공산당 지하조직과 반만항일무장부대를 파괴하고 와해시키며 日僞軍警과 배합하여 정보를 수집하고 항일무장투쟁 지휘기관을 습격하여 지도자를 체포하거나 암살하며 백성들이 항일유격대에 대한 량식 공급을 봉쇄하고 물자운수대를 습격하며 항일유격대에 잠입하여 그들을 유인하거나 투항을 권유하며 이간, 무함, 모반 등 방법으로 항일대오를 약화시키려 하였다. 3. 간도협조회의 조직 구성 간도협조회의 조직 구성을 보면 매우 계통적이며 그 회원은 전 동만지역에 분포되여 있었다. 먼저 본부는 간도 연길 延字거리(즉 지금의 進學거리)에 두고 일본관동군 『연길헌병대』에 예속되였다. 그 다음 고문 3명, 정, 부회장 각각 1명, 그리고 산하에 서무부, 조직부, 선전부, 교양부, 산업부(산하에 둔전영과 장지영 두개 농장집단부락을 두고 항일유격대에서 자수한 자와 무직업 회원 1206명을 끌어 들여 농자짓게 하였음), 재무부, 정보계, 귀순계, 번역계, 로동소개소, 특별공작대와 협조의용자위단 등을 두었다. 그리고 각 지역에 분회를 두었는데 선후하여 5개지부, 25개구회를 설치하였다. 구체적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고문: 박두영, 최윤주, 장원준 회장: 김동한 부회장: 손지환 서무부장: 김길준, 김영수 재무부장: 태리훈 선전부장: 권영천 김영수 안용정(대리) 조직부장: 허리각 산업부장: 김우근 정보계주임: 한백순 귀순계주임: 감하성 번역계주임: 김영수 로동소개소주임: 김인배 특별공작대: 대장 김송렬(겸), 부대장 김하성(겸), 부대장 유중회 의용자위단: 단장 원치상 리응범 지도관 김동훈 본부공작원: (략) 그리고 본부직속(후에 연길현지부로 됨)외에도 연길구회, 조양구회, 동불사구회, 로투구구회, 이도구구회, 삼도구구회, 팔도구구회, 도문구회(1936년 8월 21일 도문지부로 고침), 량수천자구회(1936년 도문지회에 예속된), 용정구회, 개산툰구회, 왕청현구회(대두천구회), 배초구구회(1936년에 연길현지부에 예속됨), 춘양구회(리수구구회, 1936년에 도문지부에 예속됨), 라자구구회(1936년 8월 21일에 지부로 고침), 대황구구회(1936년에 도문지부에 예속됨),안도현지부(1936년 1월 15일 성립), 량강구구회, 대전자구회, 대포시하구회,명월구특별지부(1934년 10월 20일에 성립, 1935년 9월에 구회로 개칭. 현지부에 예속됨), 돈화현지부(1935년 12월 24일에 성립), 액목구회, 마호구회, 관지구회, 교하구회, 신참구회 등이 있었다. 여기에서 특히 지적해야 할 것은 전적으로 항일유격대에 대한 와해와 파괴를 일 삼았던 『특별공작대』와 『의용자위단』이다. 우선 『특별공작대』는 간도협조회가 성립된후 그 죄악적 목적을 실현하기 위하여 본부, 지부, 구회 가운데서 "가장 믿음직한" 공작원과 회원들을 뽑아 구성한 특별행동대이다. 『특별공작대』는 정, 부대장을 제외하고 고정된 인원과 고정된 지점에서 활동하는 것이 없고 다만 활동하는 필요에 따라 수시로 『특별공작대(반)』, 『사복공작반』, 『종군공작반』 등을 조직하였다. 간도협조회와 협화회가 합병될때까지 특별공작대가 수시로 조직된 상황을 보면 다음과 같다. (1). 1935년 9월 1일 본부에서 출발하여 동만항일근거지인 왕청현 요용구산구에서 활동한 본부특별공작대는 다음과 같히 이루어 졌다. 지휘: 김송렬 < 대원: 허기열, 최영혁, 장진성, 윤정일, 방두천, 최도권(장진성이하 모 두 대황구구회 공작원임 (2). 1935년 9월 19일에 량수천자 고려령에서 동북인민혁명군 식영운수대를 습격하기 구성된 본부특별공작대는 다음과 같다. 지휘: 김송렬 대원: 허기열, 강현묵 (3). 1935년 12월 안동현 송강에서 활동한 안도현 특별공작반은 다음과 같다. 지휘: 김송렬 정보계: 한백순 수색계: 정성충(명월구지부 반장) 지부설치계: 문관오(명월구지부 서무) 반원: 강현묵, 최영혁, 허진성, 김중식(명월구지부 공작원) (4). 1936년 1월 돈화현 관지, 사하연 등지에서 활동한 돈화특별공대는 다음과 같다. 지휘: 리경빈 대원: 허기열, 박용찬, 리동화, 리영일, 한영휘, 허일, 리한원(한영휘 이하 모두 돈화현지부 공작대임) (5). 1936년 2월 왕청현라자구일대에서 활동한 라자구특별공작반 구성사황은 다음과 같다. 지휘: 한일(왕청현 지부장) 서무계: 김형준(대황구 구회장) 재무계: 김성기(삼도구회 서무) 정보계: 김동렬 제1분반장: 김형준(겸) 반원: 장진성(대황구구회 공작원), 장원경(조양천구회 공작원) 제2분반반장 김돌렬(겸) 반원: 윤정일(대황구회 공작원), 김범주(왕청현지부 공작원), 김병 권(명월구지부 공작원), 최도권(대황구구회 회원) (6). 1936년 2월 돈화현일대에서 항일련군에게 투항 권고를 한 돈화특별공작반은 다음과 같다. 지휘: 김송렬 정보 및 경리: 박용찬 제1분반(보총대)반장: 리경빈 반원: 리한원, 한린성, 리영일 제2분반(보총대)반장: 한영휘 반원: 박용일, 주기준, 정창우, 최문송(이상 모두 돈화현지부 공작 대임) 제3분반(권총대)반장: 허기열 반원: 최영혁, 강현묵, 김용찬(리수구구회 공작원), 리홍범(돈화현 지부 공작원) (7). 1936년 5월 녕안현 남호두에서 유격구 탐사 활동을 한 본부 제1특별공작대는 다음과 같다. 지휘: 菊地(도문헌병분대 헌병오장), 未掘(헌병) 대장: 김송렬 부대장 겸 서무: 박용찬 대원:원정환(동불사구회 공작원), 장병활(왕청현지부 공작원), 한 원석(왕청현지부 공작원), 허기열, 허진성(로투구구회 공작 원), 채근(왕청구회장), 오기준(황청현지부 공작원), 최동규 (량수천자구회 공작원), 윤정일(춘양구회 공작원), 최영부, 강태권(명월구구회 공작원), 장진성(대황구구회 공작원), 황 시준(왕청현지부 공작원), 리성백(라자구구회 공작원) (8). 1936년 10월 안도현일대에서 활동한 본부 제2특별공작대는 다음과 같다. 대장: 유중희 정보계: 강태범(삼도구회장) 경리계: 김민건(명월구구회 서무) 대원: 원기범, 한성림, 강만수(로투구구회 회원), 김민건(겸) 제2분대장: 남성규 대원: 전국정, 최석환(로투구회 회원) 다음 『의용자위단』은 간도협조회 본부의 직접적인 지휘하에 있는 무장조직이며 "백정"이기도 하다. 의용자위단 단원은 간도협조회가 성립된 후인 1934년 10월 20일에 각지 회원가운데서 "大滿洲의 치안수비공작과 일본군의 행동을 지원하며 만주경내를 순결히 하고 왕도락토를 건설하기 위해 자원하여 자기를 희생하려는" 90여명의 골간분자들을 뽑아 구성하였다. 의용자위단 본부는 연길현 차조구에 설치하였으며 단장과 지도관을 각기 1명씩 두었다. 단부에는 서기국, 선전조직련락부, 정보부, 훈련부가 있었고 아래에 2개 분단, 8개 반(지금의 안도현 석문향)에 설치하였으며 제1분단은 남류수구, 제2분단은 차조구에 주둔시켰다. 자위단성원은 모두 황색 군복을 입었고 무기를 휴대하였다. 단장과 지도관은 대위 군계급을, 분단장은 소위계급, 교관은 준위, 반장은 상사, 단원은 상등병, 중등병, 하등병 등으로 나누었으며 성원들은 모두 고정적인 월급을 받았다. 의용단이 성립된후 먼저 차조구에 집중하여 연길 『독립수비대』대장 鷹森중좌와 金子소좌의 지휘하에 3개월간 군사훈련을 받았으며 그후 중국공산당과 항일무장부대의 활동상황을 수집하는 동시에 직접 일본토벌대와 본부특별공작대를 협조하여 도목구, 신선동, 차조구계관산, 유수천, 량병태 등지에 가서 여러 차례 군사토벌을 감행하였으며 항일무장투쟁에 상당한 어려움과 손실을 가져다 주었다. 4. 간도협조회의 주요 활동 간도협조회의 주요 활동 방식은 주로 7곱가지를 꼽을 수 있다. 첫째는 각지에 널려져 있는 회원들로 엄밀한 정보망을 형성하여 중공 지하당조직과 반만항일 부대의 활동과 민심 향배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며; 둘째는 특별공작반과 사복공작반을 항일근거지에 침투시켜 정보를 수집하고 지휘기관을 습격하여 지휘관을 체포, 암살하며; 셋째는 백성들이 항일근거지에 대한 양식 공급을 못하도록 봉쇄하고 항일유격대의 물자운수대를 습격하며; 넷째는 자수한 변절자들을 밀정으로 파견하여 중공 지하당 조직과 항일부대에 대한 유인과 투항을 하도록 하가나 또는 내부에 파고 들어 가 이간과 모함하는 등 수단으로 내부를 와해하며; 다섯째는 회원들가운데 골간분자들을 뽑아 의용자위단을 조직하여 관동군을 협조하여 항일부대들을 토벌하며; 여섯째는 동만 당, 정, 군이 묻어 놓은 문건, 무기 등을 파내거나 빼았는 것이며; 일곱번째는 로동소개소를 차려 놓고 직업을 소개해 준다는 미명으로 자수를 권고하거나 혹은 자수한 자들을 광산, 기업, 벌목노동자들속에 박어 넣어 정보를 수집하는 것 등이다. 그러면 여기서 간도협조회의 활동을 몇가지만 살펴 보기로 하겠다. (1). 항일부대에 대한 일제의 토벌에 협조하기 위해 많은 정보를 수집하였다. 사실 각 지역 간도협조회 회원은 모두 공작원이며 일제를 위해 그 지역의 지하당과 항일부대의 동태를 감시하여 수시로 정보를 제공하였다. 예컨대 특별공작대 부대장인 류중희는 중공 로투구지하당 조직을 파괴하라는 임무를 맡고 1934년 12월에 정찰을 거쳐 소태평구 계수동 5호촌이 연길현로투구구위의 소재지라는것을 발견하였으며 특별공자대를 동원해 구위 책임자 김룡수 등 13명을 체포하였다. 1935년 1월 24일, 일제는 연길현 마반산에 거주하며 간도협조회 특별공작대 분반장을 맡은 강현묵이 제공한 정보에 따라 중공 지하당 연길현 조양천지부와 로구 황백동지부를 수색하여 파괴시켰다. 1935년 10월 2일, 돈화현 공작원인 김남길이 제공한 정보에 따라 松井토벌대는 항일구국부대 20여명을 습격하였으며, 10월 9일에는 또 항일구국군 삼합부대가 이전한다는 정보를 김남길부터 제공받아 이 부대를 습격하였다. 1936년 5월 22일, 본부 공작원 허진성은 일본토벌대를 따라 녕안현 남호두지구에 가서 서만구, 이도구, 삼도구 일대의 항일련군 활동정보를 수집하였다. 1936년 7월부터 9월까지 로투구협조회는 공작원 최석환, 로동훈, 강만수, 황종욱을 파견하여 천보산광산 골짜기, 유수천 등지에 가 지하당과 유격대의 행방을 탐지하고 많은 항일련군 운수대원을 체포하였으며 상당한 량식과 물자(신, 각반)를 빼앗았다. (2). 항일무장대원들의 의지를 동요시키기 위해 이른바 "선전강연"을 하고 "귀순"삐라를 산포하여 그들을 유인 투항시켰다. 예컨대 간도협조회 부회장인 손지환은 1934년 9월에 직접 명월구에 가서 3일간 이른바 "선전포고"를 하고 그해 10월에 항일의용군 수령인 구승, 청산, 구성 등과 여러 차례 담판을 거쳐 그들을 투항시켰다. 그리고 11월 20일에 비행기를 타고 귀순권유에 관한 삐라 10만장을 동만지역에 산발하였다. 간도협조회 제1임 선전부장이였던 권영천도 조직부장 김송렬과 함께 1934년 9월부터 10까지 세차례나 조양천, 동불사, 로투구, 명월구, 팔도구, 이도구, 삼도구 등지에 가서 소위 선전강연을 하고 많은 삐라를 산포하였다. 1934년 10월 5일, 본부공작원인 함연호는 강항윤, 허동환과 함께 일본토벌대를 따라 남, 북하마탕에 가서 소위 선전공작을 하고 대량의 삐라를 산발한 동시에 17일 북하마탕에서 항일련군 사충항부태 부관 가구운 등 7명과 반일회 회원 22명을 체포하였다. 그리하여 협조회 제1차 전체회의에서 일본 연길현 헌병대대장과 협조회 회장의 상금을 수여 받았다. 1936년 1월 7일, 본부공작원인 김동렬은 회원 3명을 거느리고 동성용, 하동, 태평구, 석두하자 등지에 가서 주민 120여명을 모여 놓고 "선전강연"을 하였다. 1936년 1월 3일, 본부공작원인 허진성은 문관, 오등과 함께 흥륭하지구에 가서 주민 70여명, 안도현 태평구에 가서 주민 50여명을 모아 놓고 소위 선전을 하고 삐라도 산발하였다. 3. 직접 무장단원을 동원하거나 파견하여 많은 공산당 지하당조직과 항일대오를 파괴하거나 와해시켰다. 간도협조회가 성립된지 불과 9개월도 안 되는 사이에 중공 지하당조직과 연락소 170여곳을 파괴하였다. 예컨대 1935년 4월, 간도협조회 본부 서무부장인 김길준은 공작원 수명을 직접 거느리고 원 중공 연길현위 간부 최영혁을 체포하여 반변 시킨 다음 본부 공작원으로 리용하였다. 1935년 10월, 간도협조회회장인 김동한은 직접 공작원을 데리고 왕청현 삼다하자, 태평구, 요영구, 로무즈구 등지에 가서 왕청현위 산하 4개지부를 파괴하고 중공당원 100여명을 체포하였다. 그리고 그는 김영수 등을 데리고 화북지구에 가서 이 지역 지하당조직을 파괴하는 활동에 종사하였다. 이러한 공로로 김동한은 1936년 7월 10일에 일제로부터 "훈공"을 수여 받았으며 매달 120원의 수당금과 훈병하사관 군조급 대우를 받았다. 돈화지부 공작원 한영희는 1936년 1월 23일 리경빈의 지휘하에 돈화현관지에 가서 항일련군과 직접 전투를 하였는데 여기서 부상을 입었고, 7월 7일에는 괴뢰군 길림 제1교도대와 협력하여 항일련군 제2군 제1퇀 제1련을 습격하여 항일련군 전사 25명을 살해하는데 참여 하였다. 본부공작원 이경빈은 원래 독립군사관학교 졸업생이였는데 1934년에 협조회에 참가하여 공작대분반장 등 직을 맡았다. 1936년 1월 20일, 그는 특별공작대 대원 7명을 지휘하여 돈화현관지산속에서 항일련군 주둔지를 습격하여 항일련군 1명을 살해하였으며, 2월 20일 김송렬의 지휘하에 돈화에서 항일의용군 제3려 부관 마영구 등 50명을 유인하여 투항시켰다. 3월 2일에는 대황구에서 항일구국군 모부를 습격하여 구국군 인원 3명을 살해하였고 3월 13일에 공작원 박용촌 등 5명을 지휘하여 반일자위대원 정분옥, 아동단 분단장 조을록,아동단원 조을손 등 3명을 체포하였다. 1936년 2월, 라자구구회는 삼도하자 지하당 활동장소를 습격하여 중공 동만특위 조직부 부장 겸 중공 황청현특별지부서기 김재수, 중공 동만특위 량식부장 최경로 등을 체포하였다. 4. 중공 지하당이나 항일부대에 직접 공작원을 침투시켜 요언을 날조하거나 음모를 꾸며 중공 지하당조직과 항일무장대오 내부를 이간시켜 항일력량을 약화시켰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성공적으로 꾸면 낸 것이 바로 "공산당 내부에 이미 민생단원이 잠입하였다"고 날조하여 동만특위와 항일부대내부에서 "민생단사건"을 불러 일으킨 것이다. 1935년 1월초 간도협조회본부에서 배초구로 파견되여 간 허기렬, 허진성 등은 배초구분회장 한일에게서 사방대의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 량식운수대 책임자 한영호가 이직 밀영에 돌아가지 않았다는 소식을 듣고 한영호를 모해할 음모를 꾸몄다. 그들은 1월 5일 일제통치구의 지하당 공작인원으로 가장하고 사방대밀영지 제2초소에 찾아 가 한영호가 언제 돌아오는가 하는 소식을 탐문하는 척 하면서 보초병이 주의하지 않은 사이에 그 보초병을 때려 눕히고 보총 두 자루와 수류탄 두개를 빼앗아 가지고 달아났다. 그리하여 한영호는 돌아오자 마자 "민생단"분자로 몰려 갖은 고문을 다 받았다. 그는 피박을 못이겨 반혼미상태에서 자기가 민생단원이라고 승인하였으며 또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 사장인 주진과 제1퇀 퇀장 박춘 등 8명도 민생단분자라고 물어 넣었다. 박춘도 피박에 의해 중공 동만특위 조직부장 이상묵도 민생단분자라고 물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아무런 죄없이 체포되여 참혹하게 박해를 받았으며, 주진과 이상묵은 도망쳤고 40여명의 당, 정, 군지도간부들이 억울하게 살해되었다. 1935년 3월 13일, 간도협조회 본부의 강현묵, 리동화는 배초구분회의 황시준과 함께 왕청현 쟈피구유격구에 잠입하여 간도협화회 회장 김동한의 명의로 중공 동만특위 숙반위원회 주석이며 중공 왕청현위서기였던 송일에게 보내는 편지를 남겨 놓고 달아 났다. 편지에는 이렇게 냵다. "전번에 이야기한 유격구에 관한 비밀조사보고는 새로 파견한 공작원과 면담하기 바란다". 중공 동만특위에서는 이 편지를 발견하자 대뜸 진실로 믿고 송일을 총살하였다. 이렇게 간도협조회가 존재한 2년 남짓한 동안에 그들은 선후하여 동만특위 대리서기 진홍장, 특위 조직부장 리상묵, 김재수, 공청단 동만특위부녀부 책임자 최선일, 항일련군 제2군 제4사(원 제1사) 사장 안봉학 등을 체포하여 악독한 수단을 써서 투항시켰다. 1936년 3월말의 기재에 의하면 체포되여 투항한 자가 2284명인데 그 가운데 공산당원 196명, 항일무장인원 158명, 아동단원과 소선대원 183명, 반일회, 농민협회, 혁명호제회 회원 1041명, 공회, 학생회, 부녀대표대회 회원 487명이였다. 5. 맺음 말 위에서 간도지역 조선인 친일단체 간도협조회에 대한 상황을 살펴 보았다. 간도협조회는 완전히 일제의 군사토벌과 지하당 파괴를 위해 조직된 친일 단체이며 일본관동군 간도헌병대의 외각조직으로서 그가 존재하던 1934년부터 1936년까지 항일무장투쟁에 상당한 악영향을 주었다. 특히 간도협조회는 일제가 군사토벌로서 소멸하지 못하는 중공지하당조직과 항일련군을 각종 요언을 날조하거나 내부를 이간 놓는 방법으로 그 력량을 약회시켜 상당한 파괴력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간도협조회의 활동은 간도에서만 끝난 것이 아니다. 간도협조회가 중공 지하당과 항일부대에 대한 정보 수집 능력 그리고 파괴력이 일제의 인정을 받아 화부지구과 통화지구까지 파견되여 그 지구의 지하당조직을 사출하는데도 일조하였다. 간도협조회의 이런 파괴로 1935년이후 동만지역의 정세는 급격한 변화가 생겼다. 동만당, 정, 군내부에서 연속 3년간 "반민생단"투쟁을 벌려 천여명의 무고한 간부와 군중들이 살해되었기에 동만항일유격근거지의 항일력량은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설사가상으로 1934년 겨울부터 일제는 일본군 6개 사단과 위만 정안군 경비려단으로 출동시켜 동, 남만의 항일무장대오에 대한 전면적인 대토벌을 감행하였고 또한 집단부락을 강제로 만들어 여기에 자위단을 설치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1936년 3월, 주로 간도지역 조선족으로 이루어진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은 동북항일련군 제2군으로 개편되여 남, 북만으로 진군하여 새로운 항일유격근거지를 개척하지 안으면 안 되었다. 그러자 간도협조회의 존재도 그 의의를 상실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간도협조회는 일본관동군 헌병사령부의 지령에 따라 33명의 악질분자를 선발하여 『협조회 동변도특별공장부』를 조직하여 통화지구에 있는 항일련군 제2군에 잠입시켜 계속 파괴활동을 하게 하였다. 이 특별공작부는 1937년 12월까지 활동 하다가 『협화회 3강성특별공작부』에 편입된후 북만으로 파견되여 갔다. |
출처 : 살맛 나는 세상이야기들...
글쓴이 : 크레믈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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