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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항일 유격대 집단의 형성과정 연구

by 8866 2006. 5. 22.

항일유격대 집단의 형성과정 연구



염인호(廉仁鎬)*

1. 서론(緖論)
2. 항일유격대집단의 정치적 부상
3. 항일유격대집단의 재생산
4. 맺음말

1. 머리말

많은 사람들은 北韓體制가 곧 붕괴될 것이라고 예측하거나, 식량과 에너지 난을 견디지 못해 개혁과 개방으로 정책 전환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북한 전문가들도 대체로 북한이 변해야만 한다는 전제로부터 연구를 시작한다.1) 그런데 北韓當局은 지난 수년간의 위기를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관리했고, 최근 들어 오히려 "主體의 强性大國"을 주장하고 있다. 주민의 기아사망이 문제되는 상황에서도 북한 당국자들은 "궤도수정 없는 외길"을 걸으며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자체 힘으로 개발하였다. 북한은 외부세계에서 정확하게 이해하기 어려운 체제인 것이다. 북한 전문가들도 현재 북한에서 도대체 무엇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알지 못하며, 앞으로 어떤 목표를 향해 나아갈 것인지에 관하여 제대로 된 답변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다만 모두가 북한은 무언가 크게 바뀌어야 한다고 말할 뿐이다.


북한의 변화와 그 실현주체 및 바람직한 발전방향을 논하기 위해서는 북한체제 형성의 경로와 특징 및 성격 등에 관한 기초적 탐구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변화된 것과 고정불변의 것을 나눌 기준을 세울 수 없으며, 나아가 발전의 방향이 무엇이고 그것을 이끌 주체가 누구인지 변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본 연구는 반세기 전에 북한 정권을 창출한 후 지금까지도 그것을 이끌고 있는 북한 정치체제 내 영도핵심세력인 항일유격대집단의 초기 형성과 그들의 정치적 특징 및 자기세력의 재생산기제를 살펴보고자 한다.


3·1운동의 실패 이후 주권쟁취를 위한 민족운동의 주류는 무장투쟁이었는데, 그 뿌리는 한말 의병전쟁에 있었다. 1920년대 무장투쟁을 주류로 한 다양한 형태의 주권쟁취투쟁에 대하여 민족주의자들은 '독립운동'으로, 사회주의자들은 '해방운동'으로 인식하였다. 무장투쟁의 흐름은 이후 초기독립군전투, 광복군 그리고 조선의용군 등의 무장활동 및 김일성세력집단의 항일무장투쟁으로 발전하였다. 그런데 무장투쟁은 일제의 탄압이 심했기 때문에 주로 국외에서 전개되었다. 국내는 무장투쟁을 위한 지리적 여건이 좋지 못했으며, 운동의 군중적 토대도 취약하였다. 한반도 주변지역은 지리적으로 광활하고, 일제 탄압의 밀도도 떨어졌으며, 당지 주민들은 망명객과 이주민이 많았기 때문에 운동의 토대가 좋았다.2) 결국 국내에서 조직된 무장투쟁체가 만주로 이주하여 독립군운동을 전개하였고 이 과정에서 수많은 무장대오가 활약했지만, 이들이 1930년 초 약화되면서 주된 세력은 임정을 찾아 관내로 들어갔다. 이후 만주사변을 거치며 새로운 공산주의자들이 이 지역에서 등장하면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1980년대 중반 이전까지 남한 학계의 주된 견해는 김일성의 무장투쟁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김일성 가짜설'을 다양하게 퍼트렸으며, 그것에 대한 의문을 원천적으로 봉쇄하였다. 한편 남한의 일부 연구자들과 미국 등지의 연구성과에서는 김일성에 의한 무장투쟁을 역사적 사실로 인정했지만, 전투 중심으로 제한하여 그 의미를 상대화하거나 축소 평가하였다.3)


북한 학계의 공식견해는 金日成이 조직, 영도한 抗日武裝鬪爭이 "첫 민족해방전쟁, 혁명전쟁으로서 조국해방의 최후 승리를 이룩한 역사적 대사변"이라고 주장하며4), 나아가 抗日武裝鬪爭의 경험이 北韓政權 수립의 역사적 뿌리라고 이해한다. 北韓의 학자들은 黨의 요청에 따라 과거의 사실을 다시 발굴하거나, 관점을 바꾸어 해석을 달리하면서 연구해 왔다. 따라서 北韓의 연구성과는 북한현대사의 각 단계마다 그들에게 중요하고 의미있는 문제가 무엇이었으며, 그러한 문제들을 어떠한 방식으로 해결해 나갔는지에 대해 우리에게 알려준다. 그러나 '自力革命 發展' 주장의 문제점이 드러날 수밖에 없는 金日成遊擊部隊의 입북 전후 행적을 포함한 일부 활동을 상세하게 다루지 않고 있으며, 주변 공산주의국가 및 공산당의 영향에 대해서도 지적하지 않고 있다.


북한 이외 지역에서의 항일무장투쟁에 대한 본격 연구는 和田春樹로부터 본격화되었다. 그는 "滿洲派" 집단 내 133명의 면면과 역할을 검토하면서 '遊擊隊國家論'을 제시하였다.5) 和田春樹는 金日成의 抗日武裝鬪爭을 '조작된 역사'가 아닌 '실재했던 역사'로 재구성했던 기왕의 성과 위에서,6) 다시 그것이 北韓의 현재도 규정하고 있다는 중요한 지적도 빠뜨리지 않았다. 그런데 和田春樹가 遊擊隊國家 형성의 내적 조건이라고 제시했던 '唯一革命傳統 生成메커니즘'은7) 共産圈硏究의 유력한 방식인 ‘크레믈리놀로지'(Kremli-nology)를 北韓政治에 단순 적용시킨 작업가설에 머물렀다.8)


커밍스(B. Cumings)가 파악한 北韓의 權力構造는 '革命的인, 民族主義的 組合主義' (Revolutionary Nationalist Corporatism) 형태로서 기왕의 모든 마르크스-레닌주의체제에서 가장 크게 벗어난 것이었다.9) 커밍스의 설명은 北韓 權力構造의 특성을 '內在的 順應性'에 초점을 맞춰 최초의 연구성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지적했던 "독특한 북한적 현상"과 관련하여 과거 朝鮮이 '隱遁王國'이었고, 傳統的 儒敎의 영향에 기인했을 것이라는 추정 외에 더 이상 분석하진 않았다.10) 鐸木昌之는 그것을 "首領의 領導를 代를 이어 계속적으로 실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體制"라고 개념화하였다.11) 鐸木昌之의 정리는 北韓에서의 權力 集中과 再生産을 그들이 사용하는 용어로써 명료하게 드러낸 것이었다.


본 논문에서는 抗日遊擊隊集團12) 이 언제, 누구에 의해서, 어떻게 만들어졌으며, 구성요소 각각의 연관은 어떠했고, 왜 그렇게 기능했는지에 관하여 幹部13)들을 중심으로 해명하고자 한다. 즉, 북한 인민정권 건설에 성공한 정치집단의 구성원은 누구였는가? 함께 무장투쟁에 복무한 사람들 가운데 누가 포함되고, 누가 배제되었는가? 그 기준은 무엇이었을까? 그들이 다른 사람들과 틀렸던 점은 무엇이었나? 다른 유사집단과의 관계는 어떠했는가? 그들의 진정한 욕구는 무엇이었나? 그것을 실현시킬 수 있는 능력이 과연 그들에게는 있었는가? 또 그것을 위해 어떻게 자신들을 조직화했는가 등의 물음에 나름대로 답을 찾아보고자 노력할 것이다.


본 논문은 抗日遊擊隊集團의 형성과정을 시간적 순서에 따라 재구성하는 방식이 아닌 실질적으로 그것이 의미를 획득하는 시점에 초점을 맞추어 논의를 시작한 후, 그 개념이 정치사회적으로 확산되어 뿌리내리는 과정을 해명하는 방식으로 구성하였다. 따라서 머리말에 이어 2장에서는 2백여 명에 불과했던 抗日遊擊隊集團이 다른 공산주의자들과의 협력과 경쟁 속에서 북한지역 政治機構體系 창출을 주도하는 "공산주의 핵심"으로 부상하는 과정을 정리하고자 한다. 3장에서는 抗日遊擊隊集團 再生産과 관련하여 일제하 김일성세력집단의 항일무장투쟁과 그 과정에서 희생당하여 오늘날 '항일혁명열사'로 추앙받고 있는 사람들을 정리하고자 한다.


본 논문은 새로 발굴한 문헌사료와 회고 및 증언을 활용하여 역사적 사실에 접근하고자 노력하였다. 먼저 韓國戰爭 시기의 '虜獲文書'를 이용하였으며, 金日成 저작에 대한 문헌분석도 병행하였다. 해방 직후부터 金日成의 연설이나 보고는 책자로 제작되어 당원과 주민에게 사상교양을 위한 자료로 보급되었다. 金日成의 초기 저작집으로는 1948년 1월 勞動黨出版社가 간행한 {김일성장군중요논문집}, 1948년 8월부터 1949년에 걸쳐 國立人民出版社가 간행한 {조국의 통일독립과 민주화를 위하여} 전2권 등이 간행되었다. {金日成選集} 초판은 1953∼1954년에 발행되었다.14)


北韓에서는 1958년부터 抗日武裝鬪爭에 대한 回想記가 집중 간행되었고, 1966년부터 抗日革命傳統敎養이 본격화되었으며, 金正日의 주도로 1970년대 중반부터 金日成의 抗日武裝鬪爭 시기의 연설을 간행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유일하게 남겨진 자료였던 林春秋의 日記를 원안으로 참가자들의 기억을 되살렸기 때문에 그 구체적 신빙성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林春秋15) 는 抗日遊擊隊集團 가운데 대표적인 인텔리로서, 抗日武裝鬪爭 초기부터 역사기록과 저술활동을 하였다. 그는 延吉縣 朝陽川에서 金日成의 담화를 기록으로 남긴 때부터 "抗日遊擊隊 從軍歷史家"로서 南湖頭會議를 비롯한 주요 회의들에 빠짐없이 참가하여 회의기록을 남겼다.16)


中國측 자료로 대표적으로 이용한 것은 東北地區革命歷史文件匯集編輯委員會에서 편찬한 {東北地區革命歷史文件匯集}, 吉林省 白城市, 中央黨案館·遼寧省黨案館·吉林省黨案館·黑龍江省黨案館 共同出版(1990∼1992年) 이다.


文獻資料를 보완해줄 證言과 回顧로는 前 朝鮮勞動黨 副部長 徐容奎17) , 前 內務省 副相 姜相鎬, 前 朝鮮人民軍 將星 朱紅星 등에게서 직접 청취하거나, KBS와 中央日報社가 소장하고 있는 朴秉律·朴吉龍·李相朝·張學鳳·鄭尙進 등의 證言錄取錄을 이용하였다.18)

2. 항일유격대집단의 정치적 부상

抗日遊擊隊集團은 다양한 정치세력이 정국의 주도권 장악을 위해 경쟁하던 蘇聯軍 점령지역의 중심지인 평양에 1945년 9월 하순 등장하였는데, 金日成을 중심으로 한 통일 단결의 수준이 상당히 높았다.19) 지도자 金日成은 국내에서 활동했던 共産主義者들에 비하여 대중적으로 크게 알려져 있었다.
金日成은 1946년 5월 7일 작가들의 요청에 응하여 抗日武裝鬪爭을 회고하면서 투쟁의 주객관적 조건이 혹심하였다는 점을 우선 지적한 바 있다.20) 즉 "우리에게는 밖으로부터 하등의 후원도 없었고 아무 공급도 받지 못하였다. 맨 처음 우리에게는 아무 무기도 없었다. 우리는 그 모든 것을 피로써 빼앗았고, 피와 바꾸어 왔다 …… 이 점이야말로 '세계에서 가장 무서운 유격대'라고 일본제국주의자를 떨게 하고 세계를 경탄케 한 것으로 우리 유격대의 특징의 첫 번째이며 영광스러운 조건의 하나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는 유격부대의 활동이 자생적으로 출발하였고, 대중을 기반으로 독자의 재생산체제에 근거하여 발전하였다고 주장했다. 이와 함께 항일무장투쟁을 통해 조직된 군대를 사회변혁의 중심도구로 성장·발전시키기를 원하였다. 때문에 "전투 그 자체가 유격대의 본신사업이 아니라 그것은 한 수단이요, 궁극의 목표는 조선민족의 해방을 위한 정치적 위업의 수행"이라고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21)


1930년대 초부터 1940년대 초에 이르는 시기에 형성된 抗日遊擊隊集團의 人脈은 해방후 北韓政權의 수립과 관련해 살펴볼 때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 抗日遊擊隊의 최고 지도자였던 金日成은 1930년대 抗日武裝鬪爭을 통해 대중에게 널리 알려졌으며,22) 이로 인해 해방후 "일제를 격멸시킨 청년영웅"으로 개선하여 환영을 받을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1936년의 普天堡戰鬪, 1939년의 茂山戰鬪를 통해 金日成은 스스로의 힘으로 대중적 권위를 창출했다.23) 반면 朴憲永으로 대표되는 국내에서 활동했던 공산주의자들은 지하운동을 주로 했기 때문에 대중에게 크게 알려지지 못했다. 그렇지만 공산주의자 사이에서의 영향력은 별개 문제였다. 해방공간에서 金日成이 '대중과의 결합'을 강조한 반면 朴憲永이나 吳淇燮 등이 '전위세력의 결집'을 강조했던 사실은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과거 경험 차이의 반영인 동시에 현실에서의 지지기반에 기초한 당내 주도권 확보와 관련된 사항이었던 것이다.


둘째, 抗日遊擊隊集團은 中國共産黨員으로 당활동을 시작했고, 1940년 이후 蘇聯極東軍司令部의 직접 지도 아래 있었다. 이들은 상부기관이 정한 노선과 정책에 입각하여 국제주의 원칙과 조선혁명의 독자성을 동시에 추구하였다.24) 이 과정에서 그들에게 가능했던 당사업은 주어진 범위에서 우선 기층당조직을 결성하고 그것을 확대 강화하는 일이었다.25) 해방후 朴憲永 등이 전국중앙 차원의 문제해결을 위해 사람들을 서울로 끌어올렸던 것과 달리, 金日成은 역으로 정치공작원을 郡黨 수준에 파견하여 기층당조직을 장악하도록 했다. 朴憲永이 중앙조직을 장악하고 지방조직을 포섭하는 방식이었다면, 金日成은 지방에 자기세력의 재생산기반을 마련하고 중앙을 포위 장악하는 방식을 선택하였다.26)


셋째, 抗日遊擊隊集團은 다른 국내외 정치세력보다 확고한 일체감을 형성하고 있었다. 특히 '反民生團鬪爭'과27) "고난의 행군"을 이겨냈다는 자신감은 국내 공산주의자들과 구별되는 독특한 정체성을 형성하였다. 抗日遊擊隊集團은 해방후 이를 "혁명가적 기풍과 규율"로 선전하며 북한 준거집단의 기준으로까지 설정하였다.28) 그러나 일제하 민족해방운동에는 다양한 공산주의세력이 참가하여 숱한 고난을 겪었고,29) 민족주의세력 역시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抗日遊擊隊集團과 그들을 일찍부터 추종한 인물들 이외의 세력은 抗日遊擊隊의 투쟁경험과 성과를 상대적으로 평가하였고, 결국 운동의 주류 설정과 관련하여 "종파"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네째, 抗日遊擊隊集團은 불리한 조건 속에 유격근거지를 만들고, 그 속에서 대중조직을 만들었던 경험을 가졌다.30) 이것은 해방후 "朝鮮革命의 根據地論", "民主基地論"으로 이어졌다.31)


다섯째, 抗日遊擊隊集團은 유격전 형식을 기본으로 무장투쟁을 조직 전개하였던 경험에 입각하여 북한 인민군대의 창설도 각 지방에서 분산적으로 소부대를 조직하고 그것을 공고화시킨 후, 대부대로 결집시키는 방법을 채택하였다. 해방후 抗日遊擊隊集團은 黨과 內閣에는 자신들과 다른 계열들을 적절히 안배하거나 직위를 양보하기까지 했지만, 자신들의 권력이 武裝鬪爭으로부터 기원했던 점으로부터 軍隊만은 자신들이 직접 장악하였다.32)


抗日遊擊隊集團은 蘇聯 지도자들에게도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었다.33) 金日成은 하바로프스크 시절 제1극동전선군 사령관 메레츠꼬프, 군사위원 슈띄꼬프(Штыков Т.Ф.)와 자주 만났으며, 제25군 사령관 치스쨔꼬프(Чистяков И.М.)나 집단군 지휘성원인 레베제프(Лебедев Н.Г.)와도 친분관계를 맺었다. 1945년 여름 극동소련군총사령부 소재지였던 하바로프스크에서는 회의가 자주 열렸으며, 金日成은 거기에서 바실례프스끼, 말리노프스끼 등도 만났다. 金日成은 소련의 대일전 직전, 88여단 지휘관들과 함께 모스크바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소련군 총참모부가 소집한 회의에는 바실례프스끼·메레츠꼬프·슈띄꼬프 등도 참석했다. 金日成은 거기서 獨逸駐屯蘇聯占領軍總司令官과 獨逸管理監督理事會 소련대표를 맡고 있던 쥬꼬프(Жуков Д.А.)를 만났다.


대일작전과 관련된 회의가 끝난 다음, 蘇聯共産黨 中央委員會 政治局 비서 쥬다노프(Жданов А.А.)도 방문하였다. 쥬다노프와의 토론에서 그는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우리나라에 대한 소련의 정치적 지지이다. 蘇聯이 앞으로 국제무대에서 우리를 적극적으로 지지해주고 조선문제가 조선인민의 이익과 의사에 맞게 해결되도록 힘써주기 바란다"고 부탁했다고 뒷날 회고하였다.34) 金日成의 모스크바 방문은 그가 북한의 지도자로 등장하는 것과 관련하여 정치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소련은 모스크바로 金日成을 직접 불러들여 그의 인품을 검증하였고, 해방후 金日成으로 하여금 정국을 주도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었다. 소련이 金日成을 해방후 북한의 指導者로 일찍이 점찍은 사실은 자신들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그의 투쟁경력, 자질 등을 고려한 결과일 것이다.35)


해방 이후부터 1945년 연말까지야말로 이후 북한 정국의 전개방향을 결정지은 중요한 시기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시기에 소련군은 지방차원에까지 점령지배기구를 설치·정비하였고, 이에 대응하여 북한지역 정치세력들 사이의 역관계와 공산주의자들 내부의 주도권이 결정되었다.36)


그러나 이 시기 북한 지역 정치동향 분석에서 가장 중요하게 분석되어야 할 抗日遊擊隊集團의 동향과 활동에 대해서는 기초적인 분석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이하에서는 抗日遊擊隊集團의 구성, 귀국 경로, 귀환 상황 등 기초적인 사실을 우선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해방 직후 抗日遊擊隊集團의 활동과 관련하여 주목해야 할 점은 이들의 초기 활동노선문제이다. 抗日遊擊隊集團은 북한지역에서 建黨建國·建軍의 핵심을 자임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金日成은 1945년 8월 20일 蘇聯의 野營地에서 朝鮮人 幹部들에게 새 국가 건설의 3대 과업을 제기하였다고 한다.37) 그가 朝鮮工作團委員會의 軍事政治責任者로서 장래의 활동 전망을 제시했을 가능성은 높다. 그러나 金日成의 연설이 20년이 경과한 시점에서 공개된 점을 고려할 때 사료로서의 가치는 떨어진다.
金日成은 먼저 "해방된 조국에서 노동계급의 혁명적 당을 창건할 것"을 주장하였다. 노동계급의 당 없이는 각계각층의 민주역량을 혁명의 편에 묶어 세울 수 없으며 人民武力을 건설하는 사업을 수행할 수 없다고 인식하였던 것이다. 둘째, 民主主義人民共和國 수립의 과제를 제시하였다. 그는 항일무장투쟁 과정에서 人民革命政府를 건설했던 경험을 내세우면서 "民主主義的 人民戰線" 노선의 중요성을 강조하였고, 人民政權을38) 수립한 후 내세워야 할 행동강령을 밝혔다. 셋째, 정규무력의 건설을 지적하였다. 그는 독자적 민족군대를 가져야만 혁명의 전취물을 보위할 수 있다고 강조하면서 이미 조직된 "朝鮮人民革命軍"이 정규 무력 건설의 밑천이라고 자부하였다.39)
위의 주장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抗日遊擊隊集團이 처음부터 자파 중심의 당을 조직하고자 하였으며, 다른 공산주의자들의 당 창건과 신국가건설운동을 무시하거나 외면하였고, 항일무장투쟁의 역사를 '革命傳統'으로 내세우며 자신들이 주도하는 군대를 창설하고자 노력했다는 점이다. 金日成이 말하는 建黨이 '創黨'을 의미하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黨 건설을 우선 과제로 내세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해명해야 할 것은 抗日遊擊隊集團의 구성원과 귀환 준비 및 귀국경로 문제이다.


1945년 7월 말 蘇聯極東戰線軍八八獨立步兵旅團 소속 조선인 대원들은 金日成·崔庸健·金策을 중심으로 하바로프스크 근처에서 朝鮮工作團을 결성하였다. 朝鮮工作團은 中國共産黨과 분리되어 朝鮮의 解放과 黨 건설사업을 준비 지도하는 기관이었으며, 그 구성원은 金日成·崔庸健·金策·安吉·徐哲·金一·崔賢 등이었다. 朝鮮工作團의 군사정치책임자는 金日成이었고, 黨委書記는 崔庸健이었다.40) 그런데 崔庸健은 周保中과 함께 中國 東北地方으로 나갔다가 10월에 입북하였다.41)


朝鮮工作團 本隊는 9월 5일에 야영지를 떠나 귀국길에 올랐다.42) 그들의 입북은 소련의 정치적 고려에 따라, 시기와 경로가 결정되었다. 抗日遊擊隊集團은 하바로프스크를 떠나 군용열차를 이용하여 牧丹江으로 이동하였다. 이들은 牧丹江市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이 결성한 高麗人民協會에서 개최한 抗日聯軍凱旋歡迎大會에 참석하였다. 金策은 대회에서 한국에 개선하면 전체 인민을 단합시켜 자주독립의 새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투쟁할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43) 그런데 압록강철교가 끊어졌기 때문에 선박을 이용하기 위해 블라디보스톡으로 갔다.44) 抗日遊擊隊集團은 군함을 타고 1945년 9월 19일 원산에 상륙하였다.45) 이들을 맞이한 것은 원산시 軍警務司令官 꾸추모프(Кучумов В.И.)대좌와 소련군 장교 太成洙·鄭尙進·韓一武 등이었다.

 

이들의 귀환 자체가 비밀이었기 때문에 북한 주민의 거족적 환영은 없었다. 원산을 통한 입북 인원이 정확하게 몇 명이었는지 밝혀진 사실은 없다. 다만 金日成과 함께 귀환한 兪成哲의 증언에 따르면 60명 정도였다고 한다.46) 이 숫자는 290여 명이라는 周保中의 증언과 크게 차이가 난다. 뒷날 북한에서 간행된 자료에 등장하는 抗日遊擊隊集團의 숫자와도 일치하지 않는다. 兪成哲이 증언한 60여 명은 1945년 8월 25일 작성된 蘇聯極東戰線軍88獨立步兵旅團 第1大隊 성원 60명과 대체로 일치한다. 따라서 먼저 그들을 <표 1>로 정리하였다.


다음 <표 2>는 蘇聯極東戰線軍88獨立步兵旅團 第1大隊 소속 2路軍系 인물을 정리한 것이다. 원래 南滿의 경우 1930년대 초 엠엘파계통의 朝鮮共産黨 출신이 상당수 있었지만,47) 1945년까지 남은 인물은 위의 입당일에서 확인되듯이 없었다. 吉東省委 소속 2로군 7군에 한국인들이 많았지만, 李永鎬·金德泳·서창수·金有吉·李哲洙 등 崔庸健과 함께 활동한 일부 사람만이 확인 가능하다.


<표 1> 蘇聯極東戰線軍88獨立步兵旅團 第1大隊 소속 1路軍系 인물

성 명
지 위
계급
출 생
소 속 당
교육
부임지
비 고

권순길
소대장
중위
1918
中共黨1942
초등2년
혜산
사단장

金??一
참모장고문
상위
1910
??〃??1932
초등
신의주
함북 출생. 본명 金在範. 1932년 中共黨 입당, 1935년 10월 金日成부대 가담. 金日成遊擊部隊 연대 정치위원. 1945년 11월 朝鮮共産黨 평북도당 조직부장. 1946년 3월 평북도당 위원장. 1946년 4월 당 중앙위 상무위원·정치위원. 1947년 인민군 문화부사령관. 1948년 8월 最高人民會議 제1기 대의원. 1949년 5월 내각 민족보위성 문화부장. 1953년 8월 당중앙위 부위원장·상무위원·정치위원·군사위원. 1954년 3월 내각 부수상 겸 농업상. 1959년 1월 내각 제1부수상. 1962년 9월 당 중앙위 부위원장·정치위원. 1972년 12월 정무원 총리. 1976년 4월 국가 제1부주석(『로동신문』 1984년 3월10일자)

金??日
사수
하사
1910
??〃??1942
초등4년
평양
소련 태생

金京石
소대장
상위
1910
??〃??1931
중등
진남포
함북 학성출생. 1931년 共産黨 입당. 1932년 金日成遊擊隊 입대. 8·15 후 勞動黨 남포시당 위원장, 평양시당 위원장, 勞動黨 중앙위원, 黨檢閱委員會 부위원장. 1968년 공화국영웅칭호. 1962년 死.

金萬益
소대장
중위
1917
??〃??1936
초등5년
철원
함북 온성 출생. 汪淸縣에서 성장. 靑年義勇軍으로 小汪淸縣 전투 참가. 1933년 金日成遊擊隊 입대. 崔春國중대원. 1950년 9월 전사

金明俊
사수
병사
1910
??〃??1938
초등2년
후창
獨立軍 출신으로 金日成遊擊隊에 합류. 해방후 金日成 부관. 사단장

金炳洙
사수
병사
1921
?
초등3년
강계
평북 강계. 1936년 즙안현에서 철도노동자. 1938년 金日成遊擊隊 입대. 1950년 전사

金成國*
사수
병사
1920
?
초등3년
후창
군단장, 金日成軍事大學 총장

金龍淵*
사수
병사
1916
中共黨1939
초등3년
원산
1998년 9월 사망. 人民軍 차수

金日成
대대장
대위
1912
??〃??1932
중등
평양
주석, 당총비서. 1994년 死.

金佐赫*
사수
상등병
1913
??〃??1934
초등4년
정주
호위총국비서, 김광영과 김숙희 父

金忠烈
기관총사수
병사
1921
??〃??1936
초등2년
갑산
군단장

朴成哲*
분대장
중사
1913
??〃??1936
중등
길주
함북 길주 출생. 滿洲 용정 대성중학교, 1935년 대성중학 동창 金一·林春秋와 반일운동, 1936년초 金日成遊擊部隊 입대. 8·15후 평양학원 부원장. 보안간부훈련소 부원장. 38경비대 연대장. 1957년 勞動黨 중앙위원. 1966년 제2부수상. 1975년 정무원 총리. 1977년 국가부주석. 1998년 9월 당서열 5위, 박춘보 父

徐??哲
소대장
중위
1911
中共黨1932
중등
원산
양강도 후창 출생. 화전민의 아들. 간도지방에서 성장. 1930년 5·30 폭동 참여, 의전 졸. 磐石유격대. 남만에서 활동하다가 1938년 金日成遊擊部隊에 편입. 1949년 초 '남조선인민유격대' 이호제부대 참모장으로 경북까지 진출. 1949년말 입북. 1956년 勞動黨 중앙위원. 1958년 人民軍 총정치국장. 1960년 대남사업국 부국장. 1966년 정치위원. 1970년 最高人民會議 常任委員會 부위원장, 黨檢閱委員會 위원장. 1974년 人民武力部 총정치국장. 1992년 死.

손종준
위생병
병사
1922
〃 1942
초등 2년
신의주
안도에서 농사. 벌목노동자로 일하던 문맹자. 19세에 오중흡 7연대에 입대. 해방직후 경비대와 평양학원. 군단장(중장), 손명선의 父(『로동신문』 1998년 2월 23일자).

沈允卿
사수
상등병
1919
?
초등 3년
청진
독립여단장. 함남 단천. 1936년 金日成遊擊隊 입대. 8·15후 청진철도경비대장. 1951 한국전쟁 중 전사

安??吉
부대 대장
대위
1907
中共黨1932
중등
청진
함북 경흥 출생. 1923년 용정대성중학 반일단체활동 중 2년 중퇴, 이후 琿春에서 사립학교 교원. 1932년 共産黨 입당, 1933년 金日成遊擊隊 입대, 중대 정치위원장, 연대정치위원. 함북도당 책임비서, 勞動黨 중앙위원. 1946년 보안간부훈련대대부참모장. 안예린의 父. 47년 死(『민주조선』 1947. 12. 16)

安靜淑
위생관
병사
1909
??〃??1934
초등 2년
평양
사단장. 1938년 대부대기동작전에 참가. 全昌哲의 부인. 『회상기』 2, 252쪽

吳在元*
사수
병사
1923
??〃??1935
초등 3년
덕천
萬景臺學院 원장

吳俊玉
사수
병사
1910
??〃??1937
초등 2년
무산
함북 종성 출생. 1919년 汪淸縣 석현 이주. 1932년 金日成遊擊隊 입대. 8·15후 정규무력 조직에 복무.1960년 死

吳振宇
소대장 고문
특무 상사
1917
??〃??1937
초등 4년
안주
인민무력부장, 원수. 1995년 사망

柳京洙 (柳三孫)
사수
하사
1915
??〃??1936
초등 3년
혜산
탱크사단장, 군단장. 함남 신흥. 1932년 金日成遊擊隊 입대. 한국전쟁시 탱크여단장. 最高人民會議 대의원. 勞動黨 중앙위원. 1950년 8월 공화국 영웅칭호. 1958년 死

유진제
위생관
중사
1913
??〃??1935
초등 2년
해주
사단장

李斗益*
위생관
하사
1919
??〃??1942
초등3년
혜산
군사령관, 차수. 만주 延吉 출생. 1930년대 중반 金日成部隊 입대. 金日成 호위대원, 전령병. 해방후 金日成호위부대 중대장. 1961년 勞動黨 중앙위원. 1980년 당군사위원. 1983년 金日成호위부대 사령관 겸 수도호위사령관. 인민무력부 부부장

李斗讚
사수
상등병
1916
??〃??1939
초등2년
온성
빨치산시기 부상, 후방총국 부총국장

李鳳洙
위생관
하사
1901
中共黨1931
초등 4년
무산
함남 단천 출생. 한문서당에서 동양의학 공부. 1931년 반제청년동맹 활동. 1932년 琿春縣 경신향 금구 당책임비서. 1933년 金日成遊擊隊 입대, 병원장. 8·15이후 해주시당비서. 萬景臺學院 원장. 人民軍黨委員會 검열위원장. 黨中央委 검사위원장. 1967년 死

李五松
분대장
중사
1925
共 靑 員
초등 2년
신의주
金日成 호위병, 사단장

李乙雪*
사수
중사
1919
中共黨1937
초등 2년
함흥
함북 무산 출생. 和龍으로 이주. 1936년 金日成부대 입대. 해방후 金日成호위부대 중대장, 38경비대 대대장. 1961년 勞動黨 중앙위원. 1971년 총참모부 부총참모장. 1976년 제1부총참모장. 1980년 중앙위원, 군사위원. 현재 국방위원회 위원. 李鍾玉부주석의 조카. 원수, 호위총국장, 1998년 9월 당서열 8위

林春秋
소대장고문
상사
1912
??〃??1932
중등
사리원
부수상, 림강철의 父

全文燮
분대장
상사
1912
??〃??1939
초등 3년
갑산
함북 무산. 8·15전 金日成 호위병, 전령병. 해방후 김일성호위부대 중대장·대대장. 1961년 勞動黨 중앙위원. 1965년 소련군사학교 유학. 1971년 호위국장 겸 호위사령관. 1981년 국가검열위원회 위원장. 최고인위 상임위 부위원장. 1998년 死

전창렬
사수
병사
1917
??〃??1936
초등 3년
회령


全昌哲
분대장
상사
1905
??〃??1931
평양
유격대 군정훈련 강사, 왕청에서 소학교 교원, 1961년 이후 당중앙위원. 1982년 死(『로동신문』 1982년 3월 13일자).

趙正哲
분대장
하사
1916
??〃??1935
초등 5년
갑산
함남 북청 출생. 중학과정 독학. 1933년 延吉현의 광산에서 노동 중 金日成遊擊隊 입대, 이후 중대 정치지도원, 중대장, 길주 성진 북청 등지에서 祖國光復會 조직확대 사업. 1939년 연대 정치위원. 8·15후 평양학원 정치부교장. 평양 제2정치군관학교 정치부교장. 해군군관학교 정치부교장. 1950년 남해여단 정치부여단장으로 전사

朱道逸
사수
병사
1921
??〃??1935
초등 2년
금천
人民軍 차수, 許昌淑 동생 허영숙의 夫

崔??賢
소대장
상위
1907
??〃??1932
초등
2년
강계
인민무력부장. 1930년 琿春에서 무장투쟁 시작. 1933년 9월 金日成遊擊部隊에 합류. 1948년 38경비여단장. 체신상, 黨 중앙위원 역임. 1982년 死(오찬흥, 1988 『한생을 싸움의 길에서』, 222∼223쪽)

崔仁德*
분대장
상사
1918
??〃??1937
중등
개성
人民軍 차수, 동해군구사령관

최장만
사수
상등병
1924
??〃??1943
초등
3년
희천
함북 북청에서 성장. 8·15전 父가 反日會 회장으로 활동 중 학살. 母는 1937년 동기토벌에 희생. 1938년 북만 饒河에서 金日成遊擊隊 입대. 8·15후 건군 활동. 1950년 대대장으로 영등포에서 전사

崔春國
소대장
상위
1914
中共黨1933
초등4년
온성
사단장. 함북 온성 출생. 1930년 온성에 진공한 金日成과 회합. 1932년 汪淸縣에서 金日成遊擊隊 입대, 중대정치위원, 독립여단 연대장, 경위연대 연대장 겸 정치위원. 1946년 가을 보안간부훈련소 제1소 제2분소장, 제3분소장. 1949년 송악산전투에서 공훈. 1950년 인민군탱크부대를 지휘하였으며, 안동전투에서 전사

太炳烈
사수
상등병
1916
??〃??1945
초등2년
철원
함북 무산 출생. 간도지방에서 성장. 1930년대 중반 金日成遊擊隊 입대. 1957년 당중앙위 노동적위대부 부부장. 1960년 당중앙위원회 군사부장. 最高人民會議 제3기∼8기 대의원. 1966년 당중앙위원회 위원. 1980년 중앙위원, 군사위원.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관 관장. 부참모총장, 인민군대장 등 역임, 태삼룡의 父

韓益洙
소대장고문
특무상사
1912
??〃??1935
초등3년
회령
당 중앙위 검열위원장, 총정치국장. 1961년 당중앙위원(민족보위성 부상). 1970년 당 정치위원 역임. 1978년 死(『로동신문』 1978년 9월 15일자)


비고:*는 1999년 말 현재 생존자를 표시한 것임


자료:비고에 밝힌 이외의 근거는 국방성문서보존소, 문서군 2, 목록 19121, 문서철 2, 14∼15쪽;1983년 과학·백과사전출판사가 출판한 {백과전서} 전6권;{항일빨치산 참가자들의 회상기} 1∼2;{인민의 자유와 해방을 위하여} 1∼4;金日成 {세기와 더불어} 1∼8권 등 활용. 그외 국가안전기획부가 펴낸 {북한 주요인물 100인집}과 통일원 간행 {북한의 기관 및 단체별 인명록}을 이용했으며, 대한매일신문사에서 간행한 {북한인명사전}도 활용. 전 조선노동당 부부장 徐容奎의 증언도 참고하여 작성


<표 2> 聯極東戰線軍88獨立步兵旅團 第1大隊 소속 2路軍系 인물

성 명
지 위
계 급
출 생
소 속 당
교 육
부임지
비 고

金德永
소대장
중위
?
中共黨1935
중 등
금 천


金有吉
사수
상등병
1908
??〃??1934
초등2년
길 주
사단장

서창수
소대장고문
소위
1910
非 黨 員
초등2년
신의주


李永鎬*
소대장
상위
1910
中共黨1934
초등4년
개 성
대장, 최고인위 상임위부위원장

李哲洙
중사
병사
1915
??〃??1938
초등3년
함 흥
함남 신흥. 1937년 혁명운동 참가, 1950년 7월 유곡리전투에서 전사

崔基哲
위생관
중사
1922
共 靑 員
초등2년
단 천


崔敏哲
부분대장
상등병
1916
中共黨1932
초등2년
안 주
1집단군사령관

崔勇進*
중대장
상위
1915
??〃??1936
초등2년
정 주
부총리

비고:*는 1999년 말 현재 생존인물을 표시한 것임
자료:국방성문서보존소, 문서군 2, 목록 19121, 문서철 2, 14∼15쪽에 나와 있는 <표> 등을 참조하여 재작성

다음의 <표 3>에 정리된 이들은 金策과 함께 北滿地方에서 고락을 나눈 사람들이었다. 북만지방의 제3군·제4군·제5군·제7군의 경우 崔庸健·金策·李學福·許亨植·金光俠·姜健 등 한국인 간부들의 활동은 두드러졌지만, 대원 가운데 한국인의 비율은 東滿에 비해 현저히 떨어졌다. 때문에 蘇聯으로 월경한 인원도 적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1970년 11월 朝鮮勞動黨 第5次 黨大會를 계기로 당 중앙위원이 대체로 1로군 중심으로 선임되면서, 3로군 계열의 상당수 인물은 金日成 직계와 다른 길을 걷게 된다.


한편 위의 <표 2>에서 崔庸健은 부참모장이었고, 姜健은 2대대 정치담당부대대장·4대대장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빠져 있다. 그 외 許鳳學·金光俠·吳白龍·朴英淳·趙明錄·白鶴林·金昌奉·池炳學·鄭炳甲·朴禹燮·金陽春·조명원 등은 보로실로프와 하바로프스크 소재 蘇聯極東軍 첩보부대에 배속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48) 또 여성대원이었던 金貞淑·김철호·朴京淑·朴京玉·許昌淑·金玉順·金明花·王玉環·리숙정·全順姬·장히숙·리계향·김성옥·정만금 등도 蘇聯極東戰線軍88獨立步兵旅團 第1大隊에 편제되지 않았는데 주로 집단농장에 파견되었다.49) 吳白龍·金佐赫 등 10여 명은 蘇聯極東軍 전초부대와 함께 전투를 벌이며 귀국하였다. 또 金光俠·姜健·林春秋·이경석·李斗洙·兪昌權·金東奎·趙明善 등은 中國 東北地方으로 파견되었다가 뒷날 돌아왔다.50)


여자와 노약자들은 1945년 10월 말경 선박을 이용하여 하바로프스크를 출발, 웅기로 귀환하였다. 金日成의 부인 金貞淑51), 金一의 부인 許昌淑, 姜健의 부인 박정숙, 金光俠의 부인 柳明玉, 李鳳洙의 부인 안순화 등과 金京石, 趙正哲, 崔春國 등의 부인 그리고 黃順姬·연보배·양옥경 등도 함께 귀환하였다. 金正日도 이때 같이 들어왔다.52)

<표 3> 蘇聯極東戰線軍88獨立步兵旅團 第1大隊 소속 3路軍系 인물

성 명
지 위
계 급
출생
소속당
교육
부임지
비 고

姜相鎬
분대장
하사
1915
中共黨 1936
초등3년
평양
1934년 입대. 1950년 지휘관. 1969년 死

金大弘
사수
상등병
1911
??〃?? 1935
초등3년
해주
군단장

김룡화
사수
상등병
1908
非黨員
초등3년
청진
기계화사단장

김윤상*
특무

상사
특무상사
1912
中共黨 1932
초등4년
희천
국가건설위원회 위원장

金曾東
소대장고문
특무상사
1924
??〃?? 1931
초등2년
사리원
중국 길림에서 성장. 8·15후 평양학원·중앙보안간부학교 교원. 한국전쟁시 사단장으로 참전하였으며, 1955년 사망

김지명
사수
병사
1905
??〃?? 1936
초등3년
덕천


金??策
부대

대장
대위
1903
??〃?? 1930
중등
함흥
朝鮮勞動黨 부위원장. 함북 성진. 1930년 中國共産黨, 투옥(1927∼1930년, 1930년∼1931년). 1935년 東北人民革命軍 제3군 제4단 정치위원, 1938년 제3군 정치부주임, 1939년 북만성위 서기 등을 역임. 1945년 평양학원 초대원장. 1946년 北朝鮮臨時人民委員會 부위원장. 1947년 북조선인민위원회 수석 부위원장 겸 민족보위국장. 1948년 부수상 겸 산업상. 1951년 한국전쟁시기 군사위원회 위원, 전선사령관. 1951년 심장마비로 사망. 본명 金洪啓, 이명 金在民. 김국태의 父(『로동신문』 1951년 2월 2일자;『근로자』 1951년 2호, 24∼28쪽)

류응삼
사수
병사
1911
??〃?? 1936
초등2년
단천
군단장

리종산*
사수
병사
1923
??〃?? 1935
초등3년
철원
부참모총장, 차수. 1949년 10월 9일 김일성의 강선제강소 방문시 수행. 조선인민군 대장. 『조선』 1996년 8월호, 5쪽

朴長春
부분

대장
병사
1914
??〃?? 1935
초등3년
해주
군단장. 중국 만주에서 성장. 1930년 혁명운동 참가. 1932년 입대. 8·15후 황해남도 안악에서 당과 지방주권기관 사업. 1950년 한국전쟁 중 전사

이재윤*
분대장
상사
1924
??〃?? 1943
초등3년
진남포
당중앙위조직부부장, 임업상

張相龍
사수
병사
1905
??〃?? 1937
초등2년
강계
사단장

비고:*는 1999년 3월 현재 생존인물을 표시한 것임
자료:국방성문서보존소, 문서군 2, 목록 19121, 문서철 2, 14∼15쪽에 나와 있는 표 등을 참조하여 재작성



아래 <표 4>는 해방 직후 북한에 귀환한 것으로 알려진 抗日遊擊隊 성원 가운데 제1대대에 배속되지 않았던 인물 일부의 약력을 정리한 것이다.


<표 4> 解放 直後 歸還한 抗日遊擊隊 주요 構成員들


이 름
생몰 일자
활 동 개 요
비 고

姜渭龍
미상
8·15전 金日成遊擊隊. 1992년 공화국영웅칭호. 1995년 현재 대안중기계연합기업소 설비조립직장 명예작업반원

강증룡
7연대 소대장, 朴祿金의 남편

김명숙
1935년 처장즈유격근거지자위대. 1939년 9월 崔賢부대에 입대
『회상기』 2, 116∼ 125쪽

金明花
∼1987
延吉縣 王隅溝遊擊根據地에서 유격대 생활을 시작. 1935년 金日成遊擊隊에 입대하여 車廠子에서 작식대원으로 공작. 1936년 봄 6사에 배속
『회상기』, 13∼25쪽

金秉植
崔春國의 연락병. 1939년 여름 金日成遊擊隊 독립여단. 1961년 당 중앙위원, 건설상
『회상기』 1, 120∼ 139쪽

金玉順
女盟 중앙위원장, 金日成遊擊部隊員으로 북만에 파견되었다가 1940년 재합류. 최광의 부인.

金益鉉
金日成경위연대. 1998년 最高人民會議 개회시 당 서열 27위

金鐵萬
1920년대 부모를 따라 간도지방 이주. 1930년대 중반 金日成遊擊部隊員. 1941년 소련원동군 특수정찰부대 정찰대원으로 복무. 1946년 보안간부훈련소 대대장. 1950년 인민군 연대장. 1958년 제7사 사단장(소장). 1964년 민족보위성 작전국장. 1968년 부총참모장으로 월맹에 군사단장 파견. 1970년 勞動黨 중앙위원. 1979년 당중앙위 군사비서. 1985년 당 군사위원회 부위원장. 1998년 最高人民會議 개회시 당 서열 17위
국가안전기획부, 『북한주요인물 100인집』

김철억
1909.11.21∼ 1951. 5. 9
1938년 8월 상순 조선민족해방동맹 동맹원으로 박달과 함께 공작 중 체포되어 해방후 출소. 지방당조직 책임일군으로 일하다가 한국전쟁 중 전사. 그의 아들 金英秀는 萬景臺學院 출신
장철호, 1996 「영생하는 전사」 『조선』 5월호

김철호
삼도만유격근거지에서 활동 중 유격대 입대. 崔賢 부인
『회상기』 3, 344∼351 쪽

南東洙
무산지구대홍단전투에서 부상
『회상기』 2, 13∼27쪽

리권해
1939년 봄 15도구전투에서 중상을 당하며, 金日成 보위

리명선
1937년 제2사 정치위원 연락병. 1938년 8월 金日成부대 합류
『회상기』 2, 42∼66쪽

李英淑
1934년부터 유격대 원호사업. 1938년 12월 유격대 입대.
「수기-2월의 명절을 맞을 때마다」 『금수강산』 102호, 1998년 2월호

리용구
1936년 2월 金日成부대에 입대

리인도
1936년 남호두 鏡泊湖 소재 재봉대 대원

朴京淑
미상
金日成遊擊部隊 제8단 기마부대 소속. 1937년 초가을 해륜현전투 참가. 1950 「빨치산시대를 회상하면서」, 『조선여성』 2호, 32∼33쪽

朴斗慶
1893.5. 7∼ 1974. 9.14
1931년 金日成계열과 연계, 혁명운동 가담. 1934년 金日成遊擊部隊 입대. 8·15후 조선인민군 후방사업부문 담당

朴英淳
∼1987
1961년 당중앙위원. 1970년 당중앙위원. 1980년 당중앙위원. 국가안전보위부 과장 박재수 父
『로동신문』 1987년 8월 19일자.

白鶴林
1921∼
함북 무산 출생. 만주 간도지방에서 성장. 1930년대 중반 金日成 경호대원, 전령병. 해방후 金日成호위부대 중대장. 1960년 군사정전위원회 위원, 1961년 金日成 호위처장 겸 金日成 수석부관. 1965년 호위사령관. 1967년 사회안전성 제1부상. 1970년 당중앙위원. 1978년 인민무력부 제1부부장. 1979년 당 정치위원. 1980년 당군사위원. 1986년 사회안전부장. 1998년 국방위원회 위원

송승필
1933년 유격대 병기창 성원, "延吉폭탄" 제작
『회상기』 3, 249∼ 257쪽

沈泰山
1921. 4. 5∼ 1949. 9.29
중국 동북에서 성장. 1935년 11월 金日成遊擊部隊 입대. 8·15후 평양학원 교무주임. 조선인민군 연합부대 참모장. 1949년 병사

吳白龍
1914∼ 1984. 4.
함북 회령 출생. 1933년경 抗日遊擊隊 참가. 경위중대 책임자. 한국전쟁시 제8사단장. 1956년 4월 호위국장·중장. 1961년 2월 내무성 부상 겸 호위총국장. 9월 당 중앙위원(제4차대회). 1962년 10월 最高人民會議 제3기 대의원. 1963년 12월 내각 민족보위성 부상. 상장. 1968년 10월 당 군사부장. 1969년 1월 군사위원회 부위원장·노농적위대 사령관. 1972년 12월 중앙인민위원회·국방위원회 부위원장
공군 및 반항공사령관 오금철과 해군사령부 정치부장 오철산의 父

오죽순
1921. 2.14∼ 1974. 8.21
중국 동북에서 성장. 1936년 金日成遊擊部隊 입대. 8·15후 정규무력조직 사업. 1974년 병사

王玉環
목단강에서 共靑員으로 지하공작 후 북만유격대에 입대. 한족으로서 崔庸健의 부인이며, 해방후 女盟 부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회상기』 3, 367∼ 376쪽

全文旭
∼1989
장백현에서 농사를 지으며, 항일구국청년회원으로 사업중 1937년 金日成부대에 입대
『회상기』 2, 71∼79쪽

全河哲
1924∼
양강도 후창. 8·15전 만주 용정 대성중학 중퇴. 金日成大學. 1955년 勞動黨 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 지도원. 1967년 最高人民會議 제4기 대의원. 1980년 勞動黨 중앙위원. 1983년 주석궁 참사실장
全昌哲의 동생

정일권
1934년 7월 朴成哲 중대원
『회상기』 3, 319쪽

趙明錄
1922∼
간도 延吉 출생. 1938년 金日成호위병, 전령병. 해방후 金日成호위부대 중대장, 대대장. 1974년 勞動黨 중앙위원. 1977년 最高人民會議 제6기 대의원, 공군사령관. 1980년 중앙위원, 군사위원. 현재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


崔??光
1917∼
함북 후창 출생. 8·15전 만주 용정 대성중학 중퇴, 항일유격대원으로 北滿에 파견되었다가 1941년 재합류. 해방후 보안간부훈련소 연대장. 38경비연대 참모장, 연대장. 1948년 인민군 1사단장. 1948년 最高人民會議 대의원. 1952년 강진군관학교 교장. 1961년 勞動黨 중앙위원. 1963년 인민군 총참모장. 1980년 정무원 부총리


최성숙
조선농업근로자동맹 중앙위원회 위원장
『조선』 1996년 8월호, 5쪽

崔順山
1911. 9. 9∼ 1965.11.13
중국 延吉에서 성장. 1931년 혁명운동 가담. 1934년 金日成遊擊隊 입대. 반일부대 작식대사업을 통해 반일연합전선 사업에 복무

崔庸健
1900. 6.22∼ 1976. 9.19
평북 염주군 하석리. 8·15전 투옥(1919년∼1921년) 中國共産黨 활동(1926년∼1946년), 북만에서 유격투쟁(1931년∼1940년), 1946년 2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보안국장. 1946년 北朝鮮民主黨 黨首. 1948년 8월 最高人民會議 대의원. 9월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 초대 민족보위상. 1950년 전쟁중 민족보위상. 전후 내각부수상 겸 민족보위상. 1955년 勞動黨 중앙위원. 정치위원.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1957년 9월 最高人民會議 상임위원회 위원장. 1966년 10월 勞動黨 중앙위 비서. 1972년 12월 국가 부주석
최추해·金志剛·崔石泉. 周保中과 함께 장춘에 파견되었으나 1945년 10월 조선으로 돌아옴

韓昌奉
1922. 8.18∼ 1950.11.30
함남 흥원. 1937년 金日成遊擊隊 입대. 8·15후 정규무력건설에 복무. 한국전쟁에서 연대장으로 활동. 황북 토산군 신계리에서 전사.

홍춘수
독립군 출신. 독립군에 있을 때 평양, 강서, 안악, 사리원 등지를 다니면서 경제모연공작
『회상기』 3, 352∼ 366쪽;『회고록』 8, 297쪽

黃順姬
1936년 입대. 柳京洙 부인, 조선혁명박물관 관장

자료:비고에 밝힌 이외의 근거는 1983년 과학·백과사전출판사가 출판한 {백과전서} 전6권을 비롯하여 {항일빨치산 참가자들의 회상기} 1∼2, {인민의 자유와 해방을 위하여} 1∼4, 金日成 {세기와 더불어} 1∼8권 등 활용. 그외 국가안전기획부가 펴낸 {북한 주요 인물 100인집}과 통일원 간행 {북한의 기관 및 단체별 인명록}을 이용했으며, 언론사에서 간행한 {북한인명사전}도 활용. 전 조선노동당 부부장 徐容奎의 증언도 참고하여 작성

이들 이외에 抗日遊擊隊員으로 귀환한 인물로서 회상기 필자는 고현숙·공정수·金麗重·金慈麟·김정자·김평·柳慶熙·柳明玉·李國鎭·리봉록·리봉선·리훈·朴京玉·박선우·朴禹燮·石東洙·오병수·尹泰洪·任哲·張哲九·장히숙·全順姬·全姬·鄭炳甲·조도언·趙東旭·池京洙·池炳學·崔鳳松·최봉호·최채련·한천추·許鳳學·홍범·현철·黃貴軒 등이 있다.


또 金日成回顧錄에 나오는 인물로 해방후 귀환자는 김봉록·김선·김정필·김증손·김지명·金昌奉·金忠烈·김충원·김혜순·류응삼·리룡술·리명화·리숙정·리정인·리철호·朴光善·박창순·박훈·서순옥·安英·吳在元·전봉서·주재일·한초남·한태룡 등이다.


抗日遊擊隊集團이 귀국 후 제일 먼저 착수한 일은 각지에 政治工作員의 파견이었다. 이들이 권력을 장악해 간 방식은, 핵심으로 역할할 간부를 지방에 파견하고 지방에서 충원된 간부들이 이들을 보조하는 형태였다. 抗日遊擊隊集團은 각 지방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9월 20일 蘇聯軍 警務司令部의 협조를 얻어 抗日遊擊隊員들을 각 지방에 파견하면서, [새조선 건설과 공산주의자의 당면과업]이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53)


그 주된 내용은 대중에게 한국이 나아갈 길을 올바로 교양할 것, 불의의 사태에 대처할 수 있도록 산간지대에 기지를 건설할 것, 노동계급의 혁명적 당을 창건하기 위한 준비사업을 추진할 것, 지방정권기관들을 조직하고 그것을 강화하기 위한 사업을 할 것, 혼란된 사회질서를 바로잡고 인민의 안전을 보위할 것, 파괴된 산업을 복구정비하며 인민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투쟁할 것, 교육기관을 복구정비하고 운영할 것, 일제 사상잔재와 봉건유습을 타파하며 광범한 대중을 조직적으로 결속하여 민주주의민족전선을 형성할 것 등이었다.54)


金日成이 신국가 건설을 위한 포괄적 과제를 위와 같이 구체적으로 지시한 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이미 金日成이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 소련 지도자들과 조선의 장래 문제에 대하여 깊은 논의와 합의가 있었다는 점을 반증한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抗日遊擊隊集團의 金策(함흥), 安吉(청진), 金一(신의주), 徐哲(원산), 崔春國(청진), 柳京洙(신흥), 朴長春(안악), 金龍淵(남포), 李鳳洙·崔仁德·朴成哲(해주), 崔賢·金炳洙(강계), 吳振宇(회령), 太炳烈(철원) 등은 과업을 수행코자 각지로 나갔다.55) 抗日遊擊隊員들은 각 지역 경무사령부 부사령관 및 고문으로 47명, 통역요원으로 15명, 지역방위 및 여타 기관으로 37명이 배속되었다.56) 抗日遊擊隊員들은 蘇聯軍을 배경으로 활동함으로써 파견지역의 정치적 주도권을 점차 장악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국내 출신 공산주의자들의 반발이 상당했겠지만 확인된 사실은 거의 없다.


이들의 최초 파견활동은 보름 남짓한 기간으로 도당단체의 정비 강화를 축으로 진행되었다. 도당에서 일정한 활동근거를 만들면서, 자신들을 추종하는 당원들을 선별하여 군당과 면당에서 당활동의 시범을 보인 후, 산하 당단체에 파견하였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시·군 그리고 공장·기업소들의 당단체를 정비하거나 새로 당조직을 결성하였다.57) 이외에도 각 지방의 우수한 인재들을 선발하여 평양의 동료들에게 추천했다. 예를 들면, 咸鏡南道 共産黨委員會 제2비서로 파견된 金策의 경우 신혁이라는 인물을 선발하여 평양에 추천하였다. 抗日遊擊隊集團은 그를 본평양보안서 부서장, 다음에는 서장으로 내세웠다. 신혁은 10월 14일 金日成을 환영하는 平壤市歡迎群衆大會에 기마대원들과 수십 명의 보안대원들을 이끌고 평양공설운동장에 나와 金日成의 신변보호 임무를 수행하였다.58) 청진에 파견된 崔春國은 청진제강소 노동자 출신 어윤갑을 선발하여 평양으로 보냈다. 어윤갑은 나중에 勞動黨 연락부장이라는 중책에까지 올랐다.59)


결국 해방 직후 누가 정치세력을 결집시키고 새로운 사회질서를 창출해 나갈 것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은 누가 그 지역의 점령군과 긴밀하게 결합하여 주어진 요구를 관철시킬 것인가에 있었다. 북한지역에서 그 주도세력은 이미 1940년대 초반부터 소비에트사회주의연방과 연계돼 있던 抗日遊擊隊集團이었다.


이와 같은 현실 정치지형이 반영되어 김일성을 "절세의 애국자" "위대한 태양"의 이미지로 대중에게 형상화하는 동시에60) , 黨史에서도 "소부르주아 인텔리들로서 시작된 조선공산주의운동은 그들간의 무원칙한 종파투쟁을 일삼은 것과 공장·광산·기업소들의 노동자와 농촌의 근로농민 속에 침투 못하는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자기의 전투적이고 혁명적인 전위부대를 가지지 못한 조선공산주의자들과 조선근로인민은 반파쇼국제노선에서 자주적인 반일무장투쟁을 전국적으로 전개하지 못할 수밖에 없었다. 오직 동북과 화북에서 金日成 장군을 위시한 애국투사들이 반파쇼국제노선에서 반일유격전을 전개하여 온 것이 조선역사에서 특기할 사실로 되고 있다"고 정리하였다.61) 즉, 일제하 지식인 중심의 공산주의운동은 대중과 괴리된 채 파벌투쟁으로 일관하였다는 비판 위에서 金日成이 이끈 항일무장투쟁을 일제하 공산주의운동의 주류로 설정하였으며, 抗日遊擊隊集團이 영도하는 북한 권력구조 구축에 정통성을 부여하였던 것이다.

3. 항일유격대집단의 재생산

일제시기 抗日遊擊隊는 무장투쟁의 초기부터 "後備隊"를 키우기 위하여 東滿 각지에 창설되었던 遊擊根據地마다 兒童團學校를 운영한 바 있다. 이 학교들에서는 일제통치구역에서 희생된 유격대원들의 유자녀들과 근거지 주민의 자녀들을 공부시켰다.62) 이 전통을 이어서 1945년 10월 萬景臺 고향집에 들른 金日成은 萬景臺에 抗日遊擊隊 遺子女를 위한 학원 설립 구상을 세웠다. 이 사업은 抗日遊擊隊集團의 再生産과 밀접히 관련된 것이었다. 金日成과 그의 동료들은 抗日遊擊隊集團의 再生産문제가 金日成指導體系를 세우는 일로서, 한 세대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세대에 걸쳐 진행되는 장기적인 과제이며, 매우 어렵고 복잡할 것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따라서 金日成 指導體系를 계승 발전시켜 나갈 핵심세력으로 抗日遊擊隊集團을 중장기계획에 입각하여 키우고자 했던 것이다.


당시 항일유격대 유자녀들을 찾아서 공부시킨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유자녀들은 국내외의 여러 곳에 흩어져 있었고, 또 그들의 이름과 주소도 정확히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1945년 12월 청진시반일투사후원회를 방문한 金日成의 부인 金貞淑도 그곳의 간부들에게 항일투사 유가족에 대한 원호를 강조했다.63) 金貞淑은 유격대 동료 유자녀들을 탐문하여 학원에 데려오는 일부터 교사를 건축하고 학생제복을 만드는 일까지 맡아 처리하였다.64)


여기서는 누가 북한에서 "抗日革命烈士"로서 최고의 추앙을 받았는지를 먼저 정리하기로 한다. 아래 <표 5>는 金日成의 中國共産黨 共産主義靑年同盟 활동시기 동료로서 해방후 북한에서 "抗日革命烈士"로 추대된 인물을 정리한 것이다. 이들은 抗日遊擊隊集團의 모태를 형성했던 인물들이다.


<표 5> 金日成의 中共 共靑 활동시기 동료로서 "항일혁명열사"로 추대된 인물

이 름
생몰 일자
활 동 개 요
비 고

공??영
1906. 9. 9∼ 1930
평북 벽동. 1924년 金亨稷의 지도에 따라 반일투쟁. 1930년 金日成遊擊部隊 입대. 국내진공작전 중 장백에서 전사


金鐵柱
1916. 6.12∼ 1935. 6.14
평남 대동. 1926년 새날청년동맹 결성에 참가. 1929년 이후 공산주의청년동맹 활동, 1931년 동만 추수투쟁 참가. 1933년 共産黨 입당, 延吉縣 8구반제동맹 구위원회 중국인공작부장. 1935년 延吉縣 石人溝 부근에서 전사
金日成의 동생

金??赫
1907.10.11∼1930. 7
1930년 金日成과 카륜·고유수일대에서 활동, 『조선의 별』 창작 보급. 할빈에서 활동중 일제에 포위되자 자결(할빈도리사건)
김환 부총 리의 父

오중화
1899. 5.26∼ 1933. 7. 8
함북 온성 남양면 세선리. 서울에서 중학 졸업. 1924년 일가와 汪淸縣 석현마을로 이주, 교편생활. 1930년 석현에서 金日成과 회합. 汪淸縣 5구당 책임비서. 1931년 3월 체포. 1932년 석방후 汪淸縣 가야허유격구 사업. 1933년 일가 30여 명과 小汪淸유격구역으로 입주. 석현 봉오골에서 체포, 학살
오태희의 아들

車光洙 (차응선)
1905. 2.29∼ 1932.10.30
평북 용천. 8·15전 일본에서 고학. 길림에서 金日成과 연계, 타도제국주의동맹 성원. 1928년 柳河縣 고산자의 동성학원 교원. 1929년 汪淸縣 남만청총대회에 金日成과 함께 참가. 1930년 7월 입당, 이통현 고유수 삼광학교 교원. 1932년 安圖遊擊隊에서 활동. 敦化에서 전사

최효일
1906. 8. 9∼ 1931.12
평북. 1928년 金日成계열과 연계, 혁명운동 가담. 金亨權무장소조로 국내진공 군사정치활동 중 1931년 흥원에서 체포,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

자료:1983년 과학·백과사전출판사가 출판한 {백과전서} 전6권을 비롯하여 {항일빨치산 참가자들의 회상기} 1∼2, {인민의 자유와 해방을 위하여} 1∼4, 金日成 {세기와 더불어} 1∼8권 등 활용. 그 외 국가안전기획부가 펴낸 {북한 주요 인물 100인집}과 통일원 간행 {북한의 기관 및 단체별 인명록} 등 이용


비고:확인 가능했던 인물에 한정

앞의 인물 가운데 金日成의 동생 金鐵柱를 제외한 모두가 金日成보다 연상이었다. 공영은 金日成의 아버지 金亨稷과 함께 활동했는데, 항일무장투쟁이 본격화되기 전에 사망하였다. 金日成은 오중화·공영·車光洙·최효일·金赫 등에게서 이전의 운동경향을 전수받으면서 동시에 이들에게 자신이 中國共産黨으로부터 깨우친 새로운 의식을 전달하였을 것이다. 운동의 흐름이 바뀌거나 그 담당세대가 바뀔 때, 흔히 새로운 사상을 먼저 접하거나 자각한 연소자가 운동의 전반적 발전전망을 내놓는 경우가 흔히 있다. 金日成과 이들의 관계도 그렇게 추정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이들은 해방후 북한정권에 참여하지는 못했지만 金赫의 아들 金煥이 내각 부총리까지 지냈던 것처럼 이들의 2세들은 金日成의 권력장악 후 북한정권의 핵심간부로 등용되었다.


金日成의 東北人民革命軍 第2軍 獨立師(師長:朱鎭, 政治委員:王德泰) 시절은 한국인 항일유격대원들이 '反民生團鬪爭'으로 상징되는 中國共産黨 내부에서의 고난을 극복하며, 자신들을 조선 해방을 위한 부대로 자리매김시켜 나갔던 때였다. 이 시기는 독립군에 의한 무장투쟁이 사실상 끝나고, 池靑天 등 민족주의계열의 무장단체 간부들이 중국 관내로 이동하던 때와 일치한다.65) 1940년대 金日成이 직접 작성한 문건에는 東滿遊擊隊의 발전과정 중 착오로 "총살한 5백여 명 民生團 중에는 우리의 진정한 좋은 동지들이 피해자로 된 것이 적지 않?quot;고 지적하였다.66) 反民生團鬪爭에서 살아남은 10∼20대 공산주의자들은 경쟁 없이 독립군의 빈자리를 이어 받을 수 있었고, 이들을 주축으로 金日成은 유격대 주력부대를 새롭게 만들 수 있었다. 여기에는 安圖·臨江·撫松 일대에서 활동하던 소부대들의 합류와 개별적인 입대 지원자들도 커다란 힘이 되었다.67)


그러나 <표 6>에서 알 수 있듯이 이들 중 상당수는 1930년대 중반 항일무장투쟁 과정에서 희생되었다.

<표 6> 1932년 이후 金日成遊擊部隊에서 활동하다가 전사한 인물들

이 름
생몰 일자
활 동 개 요

강홍석
1912. 5.18∼1939.12.17
1931년 혁명운동 가담. 1932년 金日成遊擊部隊 입대. 소대장. 육과송전투에서 전사. 池順玉의 남편

金洛天
1907.12.17∼1935.3
함북 명천. 1931년 혁명운동 동참. 1932년 金日成遊擊部隊 입대. 민생단으로 몰려 汪淸縣에서 처형

김산호
1911. 1.11∼ 1937
中國 東北에서 성장. 1932년 金日成遊擊部隊 입대. 1936년 金日成遊擊部隊 8연대 정치위원, 東崗회의 후 撫松縣 파견 祖國光復會 문헌 전파. 1937년 전사

김삼손
1910. 9.29∼ 1935
中國 東北에서 성장. 1931년 혁명운동 참가. 1933년 共産黨 입당, 金日成遊擊部隊 입대. 1935년 일제의 기습으로 전사

김수복
1915. 7. 4∼ 1938.10
中國 東北에서 성장. 1931년 혁명운동 참가. 1933년 金日成遊擊部隊 입대. 1935년 車廠子에서 共靑支部 책임자로 활동. 祖國光復會사업으로 장백현 신흥촌에 파견 활동중 체포 처형

김영환
1905. 1.20∼ 1937
함북 경성. 1931년 延吉縣 화현리 중촌의 共靑員으로 혁명운동 참가. 1932년 金日成遊擊部隊 입대. 1937년 전사

김주현
1904. 9. 6∼ 1938. 9
中國 東北에서 성장. 1931년 혁명운동 참가. 1932년 金日成遊擊部隊 입대. 연대장. 臨江縣전투에서 전사

김중권
1912.11. 2∼ 1934
中國 東北에서 성장. 1931년 혁명운동 참가. 1933년 金日成遊擊部隊 입대. 양수천자 석두하자에서 전사

량형우
1909.12.24∼ 1939. 8
함북 회령. 1931년 혁명운동 가담. 1932년 金日成遊擊部隊 입대. 1938년 연대정치위원. 소사하고개전투에서 전사

李??光
1906.11. 1∼1933. 4.29
함북 종성. 1931년 혁명운동 가담, 12월 明月溝會議에 汪淸縣 혁명조직 대표로 참가. 1932년 金日成遊擊部隊 입대. 汪淸縣에서 체포, 학살

리달경
1913. 9. 1∼1937
延吉에서 성장. 1931년 혁명운동 참가, 共靑활동. 1932년 金日成遊擊部隊 입대. 1937년 전투에서 부상, 밀영병원에서 사망

리동학
1914. 6. 4∼1938.12. 1
함북 경성. 1931년 혁명운동 가담. 1934년 金日成遊擊部隊 입대. 유수하자전투에서 전사

李龍雲
1913.11.16∼1939
함북 경성. 1933년 金日成遊擊部隊 입대. 연대장. 敦化縣전투에서 전사

金??哲
1912. 4.14∼1934.10
함북 명천. 1931년 동만일대 추수투쟁 주도, 12월 明月溝會議에 延吉縣 共靑 대표로 참가. 1933년 金日成遊擊部隊 입대. 연대 共靑 책임일군으로 사업중 전사

김철진
1913. 8. 9∼1936. 1
함북 종성. 1932년 金日成遊擊部隊 입대. 유수촌전투에서 전사

김택환
1904. 8.13∼1938
함북 성진. 1931년 혁명운동 참가. 延吉 삼도만 대동구 반일지하혁명조직지부 당책임자. 1933년 金日成遊擊部隊 입대. 臨江전투에서 전사

김확실
1919. 7.10∼1938. 3
평안도. 1932년 共靑員으로 혁명활동 참가. 1934년 金日成遊擊部隊 입대, 민생단 혐의. 1935년 普天堡전투 참가. 몽강전투에서 전사

梁成龍
1912. 3.31∼1935. 9
1931년 혁명운동 가담. 1932년 汪淸유격대대 대대장. 1933년 민생단으로 체포. 小汪淸전투에서 전사

朴東根
1904. 7.17∼1934.10
함북 화대. 독립군에서 활동. 延吉縣 依蘭溝 동골에서 야학활동. 1931년 金日成부대와 연계, 동골에서 농민협회 반제동맹, 혁명호제회 등을 조직. 1932년 延吉에서 金日成遊擊部隊 입대. 민생단으로 몰려 학살

朴祿金
1915. 5. 3∼1940.10
함북 경성. 1932년 金日成遊擊部隊 입대. 1937년 장백현 신흥촌으로 파견, 李悌淳과 연계활동 중 체포. 함흥형무소에서 사망

朴先鋒
1915.11.17∼1938.10
함북 명천. 1934년 延吉에서 金日成遊擊部隊 입대. 臨江縣 와차구에서 토벌대와 전투중 전사

박수만
1907. 4.26∼1938. 4.27
1932년 延吉에서 金日成遊擊部隊 입대. 1938년 臨江 쌍산자전투에서 전사

박수환
1909. 5. 1∼1938.12
1931년 혁명운동 가담. 1934년 金日成遊擊部隊 입대. 토벌대와 전투중 전사

박원규
1906. 3.20∼1940. 3
1931년 혁명운동 가담. 1932년 金日成遊擊部隊 입대. 樺甸縣전투에서 전사

오일남
1914. 4.29∼1942. 5. 2
間島에서 성장. 1931년 혁명운동 가담. 1932년 金日成遊擊部隊 입대. 1934년 민생단 혐의. 1941년 개산툰일대의 기습전투에서 체포, 목단강형무소에서 사망

吳仲洽
1910. 7.10∼1939.12.17
함북 온성군 남양면 세선리. 1914년 汪淸縣으로 이주. 1930년 共靑에 가입. 汪淸縣 원가점지부에서 활동. 1931년 공산당 입당. 원가점당지부 서기. 추수투쟁 및 춘황투쟁 주도. 1933년 小汪淸유격구로 이주. 延吉과 和龍에서 적구공작, 金日成遊擊部隊 입대. 敦化縣 육과송전투에서 전사. 오길순(무력부 군수국장 조인택의 처)의 父.

尹昌範
1900.10.14∼1934.10
1925년 11월 의병활동 중 중국국민당군에게 체포, 1932년 7월까지 延吉감옥에 투옥. 1932년 출옥후 延吉에서 적위대 입대. 金日成遊擊部隊 입대. 독립연대 초대 연대장. 1934년 민생단 혐의로 체포, 호송도중 탈주했으나 다시 체포, 汪淸縣에서 처형

장용산
1903. 8. 5∼1935. 9
1932년 金日成遊擊部隊 입대. 1934년 民生團으로 체포되었다가 석방. 1935년 전사

전동규
1907. 3.25∼1939. 8
1931년 明月溝會議 후 反日人民遊擊隊 창건사업 적극 가담. 1933년 공천 琿春縣 서기. 1934년 金日成遊擊部隊 입대. 연대장. 대장강 대사하전투에서 전사

전만송
1913. 3.10∼1938. 9
1932년 金日成遊擊部隊 입대. 樺甸縣전투에서 전사

전철산
1908. 3. 5∼1937
1932년 밀산현에서 혁명운동 가담. 1934년 琿春縣에서 金日成遊擊部隊 입대. 1937년 가을 額穆에서 전사

조왈남
1916. 3.15∼1935.5
1933년 汪淸縣에서 金日成遊擊部隊 입대. 汪淸縣 석현에서 전사

車龍德
1899. 1. 5∼1934. 8
평안도. 1932년 和龍縣에서 金日成遊擊部隊 입대. 1934년 民生團員으로 체포된 후 석방. 安圖縣전투에서 전사

최금산
1916. 6.10∼1939
함북 길주. 1933년 汪淸縣에서 金日成遊擊部隊 입대. 南滿에서의 전투에서 전사

최인준
1914. 6.26∼1937. 6. 5
함북 무산. 1931년 혁명운동 가담. 1932년 汪淸縣에서 金日成遊擊部隊 입대. 1937년 독립여단 연대장. 鏡泊湖전투에서 전사

최일현
1906. 8.17∼1939.12.17
동북에서 성장. 1931년 혁명운동 가담. 지하조직활동. 1932년 金日成遊擊部隊 입대. 敦化縣 육과송전투에서 전사

최희숙
1909.12.16∼1941. 2
중국 延吉에서 성장. 1931년 혁명운동 가담. 共靑支部 서기, 용암부녀회 책임자. 1932년 金日成遊擊部隊 입대. 延吉 용신구에서 정찰후 귀대중 체포, 학살

한흥권
1912. 6.21∼1939
함북 온성. 1931년 봄 혁명운동 가담, 汪淸縣에서 共靑 활동. 1932년 金日成遊擊部隊 입대. 2차 北滿 원정시 전사

자료:1983 {백과전서} 전6권, 과학·백과사전출판사;{항일빨치산 참 가자들의 회상기} 1∼2권;{인민의 자유와 해방을 위하여} 1∼4 권;金日成 {세기와 더불어} 1∼8권


비고:확인 가능했던 인물에 한정

위의 인물들은 출생지·나이·경력 등이 서로 달랐지만, 1932∼1934년 사이 金日成이 지휘하는 유격부대에 합류했던 동료들이었다.68) 이들이 처음 유격투쟁을 시작할 당시 中國共産黨 내 조선인 간부였던 金明均·朴東根·朴吉·朱鎭·李相默·金聖道·金日煥·宋一·梁成龍·朴斗南 등이 民生團 혐의로 희생당하면서69) 위의 인물들은 유격부대의 중책을 맡을 수 있었다. 이후 中國共産黨과 東北人民革命軍 내에서는 과거 초급 지휘관·병사들이 고속 승진하여 리동학·김택환·리동걸·최처벌 등은 지휘관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위의 인물들의 활약과 희생에 힘입어 金日成은 유격대 지도자로서의 자기 존재를 부각시킬 수 있었고, 그 결과 만주에서 항일무장투쟁의 불을 지폈던 대부분 간부들의 불행한 운명과 달리, 현재 金日成遊擊隊員들은 北韓에서 "抗日革命烈士"로 추앙받게 되었다. 그 가운데서도 대표적인 인물은 북한당국이 '간부'의 기준으로 내세우는 吳仲洽이다.70) 북한당국은 오중흡을 예로 들어 김일성에 대한 충실성을 간부의 제일 커다란 자질로 제시하고 있으며, 궁극적으로 김일성의 풍모와 사업방법 및 작풍을 모든 간부들이 따라 배울 것을 요구하고 있다.


遊擊根據地 해산 직후 입대한 金日成遊擊部隊 대원 가운데 전사하거나, 일제에 의해 학살된 인물들을 정리하면 <표 7>과 같다. 그들은 모두 中國 東北에서 성장했으며, 유격근거지에서 조직활동을 경험하였다. 이들은 유격구 해산에 즈음하여 金日成遊擊部隊에 입대하였으며, 金日成과 抗日武裝鬪爭의 가장 어려운 시기를 함께 하다가 희생당했다.


金日成은 祖國光復會를 조직하고 1937년 普天堡戰鬪를 치루면서 대중적 명망성을 획득할 수 있었지만, 그 만큼 많은 동료들을 잃었다. 祖國光復會 국내조직에서만 1937∼1938년에 모두 739명이 검거되었다.71)

<표 7> 유격근거지 해산 직후 입대한 金日成遊擊部隊 대원들

이 름
생몰 일자
활 동 개 요

金鳳錫
1923. 1. 3∼1945. 8.14
중국 동북에서 성장. 1935년 혁명운동 지하조직에서 활동. 1936년 金日成遊擊部隊 입대. 1941년 소할바령회의 후 소부대에 편입, 함북일대에서 공작활동. 琿春전투에서 전사

김운신
1913. 9.16∼1940. 3
함남 단천. 1936년 金日成遊擊部隊 입대. 기관총사수. 홍기하전투에서 전사

김정덕
1920. 8.13∼1939
중국 동북에서 성장. 1937년 金日成遊擊部隊 소년중대원으로 활동. 계관라자전투에서 전사

김??진
1912.11.26∼1939. 8
중국 동북에서 성장. 1935년 金日成遊擊部隊 입대. 대사하전투에서 전사

김택만
1921. 7.27∼1940.11
중국 동북에서 성장. 1936년 金日成遊擊部隊 입대. 몽강전투에서 전사

김학송
1917. 9.10∼1942.10
중국 동북에서 성장. 1936년 金日成遊擊部隊 입대. 1940년 소할바령회의 이후 소부대원으로 합죽에서 활동. 경흥에서 전사

리계순
1916.11.15∼1938
和龍에서 성장. 1931년 혁명운동 가담. 1933년 용정에서 부녀회 조직. 1936년 金日成遊擊部隊 입대. 1938년 백두산밀영지 임시병원에서 토벌대에게 체포, 사망. 조선혁명박물관에 현재 달비가 보관중임. 리지춘의 동생

리권행
1921. 4.28∼1940. 6
중국 동북에서 성장. 1935년 金日成遊擊部隊 입대. 1940년 밀영에 침입한 토벌대에 의해 체포, 장백경찰서에서 사망

리순희
1917. 6.30∼1935
함북 출생, 중국 동북지방에서 성장. 1933년 汪淸유격구 아동단학교에서 공부, 이후 汪淸縣 共靑員 아동국장으로 활동. 1935년 金日成遊擊部隊 입대. 적구공작중 체포, 학살

朴吉松
1917. 8.18∼1943. 8.12
중국 동북 길림 출신. 1931년 혁명운동 가담. 1933년 共靑가맹 汪淸縣 아동국장. 1935년 라자구에서 지하활동. 1936년 6월 金日成遊擊部隊 입대. 1937년 中共黨 가입, 1943년 경성현 습격전투중 포로가되어, 사형당함. 박덕심의 아들.

池鳳孫
1915. 5. 5∼1943. 3
함북 부령. 1935년 金日成遊擊部隊 입대. 주로 적구공작과 연락임무 수행. 琿春縣에서 전사

최윤구
1903. 8.23∼1938.12. 2
1936년 獨立軍에서 副司令으로 활동중 11월 남만에서 金日成遊擊部隊와 연대하여 반일민족통일전선울 구축하였으며, 金明俊 등 독립군을 이끌고 金日成遊擊部隊에 입대, 樺甸縣에서 전사


자료:1983 {백과전서} 전6권, 과학·백과사전출판사
비고:확인 가능했던 인물에 한정

다음의 <표 8>은 祖國光復會 관련자로 일제에 의해 희생당한 인물을 정리한 것이다.

<표 8> 祖國光復會 관련 희생자로 "抗日革命烈士"가 된 인물


이 름
생몰일자
활 동 개 요

강??돈
1914. 7. 7∼1938
지식인. 장백현 18도구 영화동에서 祖國光復會 활동. 1937년 곰의골밀영으로 金日成을 찾아와 입대. 중대선전간사. 마당거우에서 전사. 李乙雪의 야학스승

權永壁
1909. 8. 8∼1945. 3.10
함북 경성. 용정 대성중학. 1931년 운동 참가. 1935년 金日成遊擊部隊 입대. 1936년 金日成遊擊部隊 선전과장. 1937년 普天堡전투 참가, 장백현 당위원장, 1945년 서대문형무소에서 사망

김세옥
1915.12.16∼1939. 5.23
함북 성진. 1937년 金日成遊擊部隊 입대. 대홍단전투에서 전사. 마국화의 애인

김영국
1915.11.15∼1938. 9
함북 길주. 지식인. 사립학교 교원, 祖國光復會 조직원으로 활동. 1937년 金日成遊擊部隊 입대, 사령부 비서처에서 『서광』 발행. 臨江전투에서 전사

김혁철
1910.10. 3∼1943. 3
함남 흥원. 1936년 혁명운동 참가. 1937년 金日成遊擊部隊 입대. 1941년 이후 소부대원으로 함북일대에서 활동. 국내공작작전 후 귀대중 두만강에서 전사

리동걸 (김준)
1909. 6.13∼1945. 3.10
함북 경흥(오늘날 선봉군). 1932년 金日成遊擊部隊 입대, 연대정치위원. 1939년 두만강연안 도처에서 지하혁명운동 중 일제 헌병에 체포. 6년 뒤 1945년 서대문형무소에서 사망

마동희
1912.10. 9∼1938. 1. 9
함북 성진. 1918년 함북 갑산군 운홍면 백암리로 이주. 1936년 金日成遊擊部隊 입대. 1937년 東崗군정학습 참가, 장백일대에서 權永壁·李悌淳과 연계 활동. 1937년 12월 혜산사건으로 파괴된 조직복구를 위해 파견활동 중 체포, 혜산경찰서에서 학살당함. 1962년 전기물 출간. 어머니 장길부, 처 김용금, 동생 마국화

朴寅鎭
1887. 9. 2∼1939. 3.16
함북 삼수. 1919년 3·1운동 참가 3년간 투옥 이후 독립군 활동. 갑산·삼수·풍산 등 8개 종리원장을 장악한 천도교 함남도정. 1936년 11월 천도교 대표로 祖國光復會 가입, 백두산밀영에서 金日成과 회합 이후 천도교 상층조직과 연계를 끊고 함남일대에서 祖國光復會 활동. 1938년 일경에 체포. 1939년 옥사

李悌淳
1910. 3.23∼1945. 3.10
함북 길주. 1934년 장백현 신흥촌에서 혁명운동. 1936년 10월 백두산밀영에서 金日成과 회합. 1937년 2월 祖國光復會 장백현위원회 위원장 겸 장백현당위원회 부위원장으로 金日成遊擊部隊와 연계활동. 1937년 10월 일제경찰에 체포, 서대문형무소에서 처형

지태환
1902. 4.29∼1945. 3.10
함남 정평군 신성리. 화전민가정 출신. 1921년 和龍縣으로 이주. 1934년 金日成遊擊部隊 입대. 사무장으로 활동. 1937년 봄 정치공작원으로 장백현 19도구에 파견. 祖國光復會조직사업. 생산유격대 발동하여 원호물자 마련, 정보수집, 군사정찰, 주구청산 등 활동. 1937년 12월 일제에 체포, 처형

최경화 (최후동)
1912. 4.25∼1938. 1
지식인. 1936년 혁명운동에 가담. 1937년 함남 삼수군 별동면 광생리서 祖國光復會 조직활동. 金日成遊擊部隊 입대. 『종소리』 주필. 정안툰전투에서 전사

최원일
1918.10.28∼1942
장백현 17도구에서 성장. 1936년 祖國光復會활동. 1937년 장백에서 金日成遊擊部隊 입대. 소부대활동중 전사


자료:{백과전서} 전6권, 과학·백과사전출판사, 1983

<표 8>의 인물들은 대체로 국내 출신자들로서 연고지를 고려하여 장백현에 파견되어 정치공작원으로 활동하던 중 희생당하였다.72) 金日成이 제기한 혁명적 대중단체 건설과 반일민족통일전선노선을 祖國光復會組織을 통해 실천하다가 일제에 체포 처형된 인물로는 權永壁·리동걸·李悌淳·지태환·김수복·馬東熙·朴祿金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의 권유로 祖國光復會를 통해 朝鮮人民革命軍에 입대한 인물은 강돈·김세옥·김영국·김혁철·최경화·최원일·李哲洙·金成國·金龍淵·李斗益·全文旭·趙明善·李乙雪·白鶴林·朱道逸 등이다.73) 天道敎 咸南都正으로 祖國光復會 회원이었던 朴寅鎭은 특이한 경력의 소지자였다.74) 목재노동자 출신 황수훈은 장백현위 조직부장으로 활동하였다.75) 祖國光復會 국내조직에서 입대했던 사람들은 최근까지도 북한의 지도집단 내에서 활동하고 있다. 李斗益은 당중앙군사위원·차수, 金龍淵은 1998년 9월 8일 인민군 차수로 승진하였다.76) 金日成遊擊部隊가 蘇聯極東軍에 배속되어 활동하던 시기에도 소부대활동 중 오일남·최희숙·김학송·朴吉松·池鳳孫 등 전사자가 발생하였다.77) 일제하 무장투쟁과정에서 전사하거나 옥사한 인물은 위에서 <표 5> ∼ <표 8>로 작성했던 인물들 이외에도 많이 있다.

 

대표적으로 李紅光·李學福·金槿·許亨植·마덕산·서광해·김정국·石山·안순복·金伯文·오응룡·곽지산·진광화·김학무·강석훈 등을 들 수 있다. 그 외 북한에서 펴낸 회상기에 전해지는 김동호·강남순·류치수·한주애·이동화·허성숙·박순일·리경숙 등은 金日成遊擊部隊에서 전사했지만, "항일혁명전사"가 되지 못하였다.78)


왜 일부는 "抗日革命戰士"가 되었고 다른 사람은 그와 같은 평가를 받지 못했는지의 기준은 명확하지 않다. 다만 金日成과의 직접 연관 및 개별적 투쟁공적의 차이가 아닐까 추측될 뿐이다. 이른바 "항일혁명전사"들은 모두 金日成과 한 번 이상 만난 적이 있으며, 직접 金日成의 지휘를 받으며 활동하였던 인물들이다.79) 金日成보다 상위 직급이나 지위에 있었던 인물은 대체로 배제되었으며,80) 咸境道와 東滿에서 활동한 인물이 많다. 이것은 현재 북한 권력의 중심부에 함경도 출신이나 그 2세들이 과반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점과 맥을 같이 한다.81)


金日成의 항일투쟁 시기 동료였던 金赫·車光洙·崔昌杰·한영애·金亨權·孔英, 金日成을 보위했던 오중흡·리동학·리권행, 죽는 순간까지 일제에 맞섰던 李光·權永壁·李悌淳·최희숙 등 126명은 나중에 평양 교외에 위치한 대성산 革命烈士陵에 묻혔다. 특별히 金策·安吉·柳京洙·金京石·崔庸健·崔賢·林春秋·姜健·吳仲洽·최희숙·金一·崔春國·吳白龍·吳振宇 등 14명은 金日成의 부인이자 金正日의 생모인 金貞淑과 함께 가장 윗 부분에 안치되었다.82)


金日成은 과거 자기 동료들의 가족을 찾아서 그 후손들을 위한 학원을 자신의 출생지인 萬景臺에 설립하였다.83) 이에 따라 설립된 平壤革命者遺家族學院은 일제하 민족해방운동 과정에서 희생당한 사람들의 자녀를 부모의 뒤를 잇는 공산주의 혁명가로 양성하기 위한 교육기관으로 처음부터 위상이 결정된 상태였다. 다른 학교나 군대가 일제시기의 시설을 이용했던 것과 달리 平壤革命者遺家族學院은 金日成의 생가 주변에 직접 교사를 건축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처음부터 특별한 혜택을 받았다. 金日成과 그의 전우들은 1946년 6월 朴英淳·林春秋·金佐赫 등 抗日遊擊隊 출신을 中國 東北地方에 파견하여 항일유격대의 2세들을 찾도록 하였다.

 

이들은 그 곳에서 흩어져 살고 있던 40여 명과 함께 귀국하였다. 그 후에도 2차례에 걸쳐 대표를 파견하여 유자녀들을 입북시켰다. 東北人民政府가 수립된 후에도 중국측에 의뢰하여 유자녀를 찾아내 데려왔다. 국내의 경우도 광범위한 실사를 통해 유자녀를 찾아내어 학교에 입학시켰다.84) 유자녀 외에 생존한 抗日遊擊隊集團의 가족들도 학원에 입학했다.


平壤革命者遺家族學院은 1947년 9월 1일 개교와 함께 320명이 입학하였다. 학생들의 연령은 최저 9세로부터 23세까지였으며, 남자 296명 여자 24명이었다. 입학생들의 부형은 伊藤博文 암살에 참가한 사람부터 3·1운동, 단천농조사건, 원산태평양노조사건 등 국내에서 대중운동을 전개한 사람, 항일무장투쟁에 가담하여 희생된 사람 등 다양하였다. 해방후 산업 운수기관에서 일하다가 산재를 당한 노동자의 자녀들도 일부 입학하였다.85) 姜健의 아들 강창수도 이때 입학하였다.86) 학생들은 선대의 유훈을 이어서 정치가나 군인이 되기를 원하였다.87) 유자녀들의 장래 희망은 抗日遊擊隊集團의 이해와 일치하였다.


抗日遊擊隊集團은 학교 설립의 취지로 '혁명'을 함께 했던 전우들의 자녀를 거두겠다는 혁명동지에의 신뢰와 의리를 내세웠다. 그러나 유가족학원 설립의 보다 중요한 목적은 "혁명의 源種場88) "으로서 抗日遊擊隊 血統을 가진 사람들을 조직적으로 교육하여 革命의 繼承者로, 黨의 核心이자 人民軍의 骨幹으로 양성하는 데 있었다. '源種場' 창설은 장래의 명맥을 잇기 위한 조치로써 '抗日遊擊隊集團 再生産體系'의 뿌리였던 것이다.


따라서 학생들은 처음부터 당정책과 유일사상체계를 교수받았다. 더불어 "충실성 교양"을 통해 사회주의·공산주의 계속혁명의 계승자로 육성되었다.89) 그것을 상징이라도 하듯이 金貞淑의 지도에 의하여 1948년 10월 24일 학원에서는 金日成 동상 제막행사가 거행되었다.90) 학원의 설립과 운영은 북한 권력구조의 운명과 관련된 중요한 문제였다. 만약 학원이 없었다면 金日成의 권력과 북한체제의 유지는 지금과 달랐을 것이다. 학원 출신자들은 金日成정권이 어려운 시기마다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이들은 한국전쟁 시기 야전의 중견간부를 맡았고, 1956∼1958년 "反宗派鬪爭"으로 생긴 군대와 정권기관의 빈 자리를 채운 '人力 源泉'으로 역할하였다. 또한 1960년대 말∼1970년대 초 '首領制' 확립의 선두주자로 활동하였고, 金正日後繼體制를 굳히는 지탱점이었다.


北韓 最高人民會議 第10期 第1次會議가 개최된 1998년 9월 5일 현재 국가지도기관 가운데 國防委員會 위원장 金正日, 제1부위원장 趙明錄, 위원 延亨默91) 을 비롯하여 最高人民會議 의장 崔泰福, 총리 洪成南, 中央裁判所 소장 金炳律92) 그리고 最高人民會議 常任委員會 위원 李吉松, 리철봉 및 代議員資格審査委員會 위원장 金國泰와 현철해, 豫算委員會 위원장 韓成龍과 위원 리태현 등은 모두 平壤革命者遺家族學院 출신이다. 그 외 朝鮮勞動黨과 軍隊의 領導勢力인 黨中央委員과 內閣 相들도 상당수도 平壤革命者遺家族學院 출신이다.93)


위의 인물 외에도 북한에서 領導集團을 이루었던 姜成山·徐允錫·金煥·金光鎭94) ·이하일·권이경·吳克烈·全夏哲·김영채·白範守·崔文善·김학봉·임수만·李吉松·林亨九·朴容錫·원동구·염재만·全今哲·이동철 등이 平壤革命者遺家族學院 출신이었다. 北韓軍의 원로격인 金斗南95) ·金江煥·吳龍訪 등이 제1기생이며, 김하규·전제성·이영수 등은 제2기생이고, 현철규가 제3기이다.


金一·崔賢·吳振宇·林春秋 등이 金正日을 朝鮮勞動黨과 北韓政權의 수위에 추대하는 데서 선구자의 역할을 하였다면, 平壤革命者遺家族學院 출신자들은 군대에서 검열사업을 통하여 金正日의 유일지도체제 확립에 적극 앞장섰다. 그들은 "김정일이 당과 국가, 군대를 영도해야 민족의 장래가 담보되고 백두산에서 개척한 주체의 혁명위업이 한치의 편차도 없이 대를 이어 빛나게 계승발전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96) 이 점은 아래 <표 9>로 정리한 平壤革命者遺家族學院 출신자들을 살펴보면 보다 분명해진다.

<표 9> 平壤革命者遺家族學院 출신자

성 명
출생
출신
지역
학 력
경 력
비 고

姜成山
1931
평양
萬景臺學院. 金日成대학 경제학부
1955년 黨中央委 조직지도부 지도원. 1968년 勞動黨 중앙위원. 1972년 最高人民會議 제5기 대의원. 1984년 政務院 총리 金日成의 이종사촌. 부인 리정애는 빨치산 李斗讚의 장녀. 金正日 후계체제 구축의 주역

金國泰
1924
함북 성진
萬景臺學院. 1948년 金日成대학 특설학부 졸업
1956년 黨中央委 간부부 지도원. 1966년 勞動黨 중앙위원. 1967년 最高人民會議 제4기 대의원. 1974년 勞動黨 고급당학교 교장. 현재 최고인위 대의원자격심사위원장 金策의 아들

金達玄
1941
평양
萬景臺學院
8·15 전 청진에서 유랑생활. 1963년 당 中央위 조직부지도원. 1980년 정무원 참사실 실장. 1987년 정무원 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
金日成의 조카. 아버지가 金日成항일유격대에서 활동하다가 1937년 갑상봉전투에서 전사.

金炳律
1926
평북 벽동
萬景臺學院.
1949년 金日成대학 특설학부 입학
8·15전 신의주펄프공장 노동자. 1955년 黨中央委 학교교육부 지도원. 1967년 最高人民會議 제4기 대의원. 1970년 勞動黨 중앙위원
아버지가 金日成 유격대 중대장으로 활동하다가, 1937년 普天堡전투에서 전사

金源田
1929
양강도 갑산
萬景臺學院.
1956년 金日成 대학
8·15전 화전민. 1958년 黨中央委 조직지도부 보조지도원. 1979년 勞動黨 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 부장. 1983년 勞動黨 양강도당 책임비서
아버지가 金日成遊擊部隊에서 활동 중 1930년대 초반 전사

金學奉
1926
함북 무산
萬景臺學院. 1950년 金日成 대학
8·15전 무산 산곡 목재판 노동자. 1956년 黨中央委 조직지도부 지도원. 1983년 勞動黨 평남도당 책임비서
아버지 김일배가 金日成遊擊部隊 간부로 활동하다가 1930년대 말 국내공작 중 일경에 처형됨.

金渙
1929
평북 후창
萬景臺學院. 金日成대학 화학공학부. 1953년 동독 유학
1962년 黨中央委 중공업부 과장. 1972년 勞動黨 중앙위원. 1972년 勞動黨학교 교육부장. 1983년 정무원 부총리
金赫의 아들. 金一의 조카사위

朴容錫
1928
함북 온성
萬景臺學院. 1949년 金日成대학 특설학부
1958년 黨中央委 교통운수부 지도원. 1967년 最高人民會議 제4기 대의원. 1976년 정무원 철도부장. 1980년 勞動黨 중앙위원
金一(박덕삼)의 장남

白範守
1928
함북 경성
萬景臺學院, 1950년 金日成대학
1955년 黨中央委 조직지도부 지도원. 1967년 직총 중앙위원장. 1967년 最高人民會議 제5기 대의원. 1980년 勞動黨중앙위원, 황해남도당 책임비서
아버지가 金日成遊擊部隊員으로 국내진공작전 중 국경수비대에 발견되어 전사.

徐允錫
1929
만주 간도
萬景臺學院. 1953년 金日成대학 정치경제학부
1953년 黨中央委 조직지도부 지도원. 1970년 勞動黨 중앙위원. 1972년 最高人民會議 제5기 대의원, 함남도당 책임비서
아버지가 金日成遊擊部隊員으로 활동 중 1938년 전사. 빨치산 全昌哲의 사위  

延亨默
1925
북간도
萬景臺學院
1955년 黨中央委 조직지도부 지도원. 1967년 최고인위 대의원. 1970년 당 중앙위원. 1974년 3대혁명소조 중앙지도부 책임자. 1986년 정무원 제1부총리
金日成 유격활동을 도왔던 집안 출신. 金日成의 인척동생인 김성숙의 남편

李吉松
1923
양강도 삼수
萬景臺學院. 1949년 金日成대학 특설학부
8·15전 삼수에서 목재노동자. 1957년 黨中央委 중공업부 지도원. 1970년 당중앙위원. 1972년 勞動黨 양강도당 책임비서. 1983년 정무원 교통운수위원회 위원장
아버지가 金日成遊擊部隊員으로 1937년 普天堡에서 전사. 아버지의 친구 全昌哲의 양자

林亨九
미상
양강도 갑산
萬景臺學院. 金日成 대학 특설학부
8·15전 갑산광산 노동자. 1955년 黨中央委 선전선동부 지도원. 1973년 정무원 인민봉사위원장, 勞動黨 중앙위원. 最高人民會議 대의원. 강원도당 책임비서.
父가 金日成部隊員으로 1939년 무산전투에서 전사. 金英柱와 소련유학동창이자 사촌동서간

全秉浩
1925
함북 무산
萬景臺學院. 金日成대학
1960년 黨中央委 조직지도부 지도원.
1972년 最高人民會議 제5기 대의원.
1975년 勞動黨고급당학교 교장, 勞動黨 중앙위원. 국방위원회 위원
아버지가 金日成遊擊部隊員으로 활동중 전사

崔文善
1930
함남 은율
萬景臺學院. 金日成 대학 특설학부
8·15전 화전민. 1958년 黨中央委 조직지도부 지도원. 1972년 最高人民會議 제5기 대의원. 1980년 勞動黨 중앙위원, 황해북도당 책임비서
아버지가 金日成遊擊部隊에서 활동중 전사

崔泰福
1929
함북 길주
萬景臺學院. 1949년 金日成대학
1959년 교육부 지도원, 1980년 정무원 교육위원회 위원장, 勞動黨 중앙위원.
아버지가 유격대원으로 활동 중 전사

韓相圭
1926
양강도 삼수
萬景臺學院. 1952년 金日成대학 특설학부
1955년 黨中央委 보조지도원. 1963년 중앙당학교 당건설강좌장. 1977년 最高人民會議 제6기 대의원. 1980년 勞動黨 후보위원. 1982년 최고검찰소장
아버지가 金日成遊擊部隊員으로 활동 중 전사

韓成龍
1923
함북 명천
萬景臺學院. 1949년 金日成 대학 기계공학부
8·15전 노동자. 1960년 黨中央委 중공업부 지도원. 1972년 당 중앙위원. 1972년 最高人民會議 대의원. 1972년 政務院 선박기계공업 부장, 당 중앙위원. 정치국 위원, 중앙위 경제정책검열부 부장
아버지가 金日成遊擊部隊 중대장으로 1938년 무산전투에서 전사

玄峻極
1925
함남 단천
8·15전 만주 용정 대성중학 중퇴. 萬景臺學院. 金日成대학 특설학부
1954년 당중앙위 선전선동부 지도원. 1967년 주중대사. 1980년 勞動黨 중앙위원. 1985년 당중앙위 국제사업부 부장. 1986년 最高人民會議 제8기 대의원. 1988년 노동신문 주필
아버지가 金日成遊擊部隊員으로 함북 온성탄광 공격중 전사

玄哲奎
미상
함북 온성
萬景臺學院. 金日成대학
8·15전 목공소 노동자. 1954년 黨中央委 조직지도부 책임지도원. 1970년 당 중앙위원. 1985년 最高人民會議 제7기 대의원, 함남도당 책임비서
아버지 현상규가 普天堡전투에서 전사.
1956년 반종파투쟁에서 공을 세움

자료:국가안전기획부, {북한 주요인물 100인전} 등 북한인명록과 서용규의 증언 등을 종합 정리
비고:확인 가능했던 인물에 한정

<표 9>에 나온 인물 외에도 학원 출신자는 상당수 있다. 李悌淳의 딸 리옥희 자매도 학원 출신이며, 당간부로 성장하였다. 맏딸 리옥희는 고려봉사지도국 당위원회 비서이다.97) 오중흡의 딸 오길순은 평양시피복공업총국 초급당비서로 있으며,98) 成始伯의 아들 성자립99) , 1954년 3월 19일 지리산 박양봉전투에서 전사한 朴榮撥의 아들 박명훈은 학원을 졸업한 후 군관학교와 金日成軍事綜合大學을 거쳐 북한의 "노력영웅"이 되었다.100) 홍순하의 아들 홍무웅과 딸들도 학원을 졸업하고 간부로 성장하였다.


金日成과 유자녀의 관계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리동춘의 아버지 리세진은 항일유격대에 입대하여, 和龍縣 7도구에 나가 지방공작사업을 하던 중 일제에 체포되어 1933년 3월 21일 사망하였다. 아버지가 희생된 다음날인 3월 22일 리동춘은 출생하였다. 그는 유자녀학원을 졸업하고, 한국전쟁 시기 친위중대를 거쳐 金日成綜合大學에 입학했지만 병으로 도중 중퇴하였다. 金日成은 그에게 군당에서 지도원으로, 과장으로 일하도록 하고 그후 학력이 부족한 그를 인민경제대학에 불러 수년간 공부하도록 뒷받침해 주었다. 그는 당중앙위원회 지도원을 거쳐 과장으로 사업하다가, 1968년 함북도당 제2비서를, 이듬해에는 함북도당 책임비서의 중책을 맡았는데, 그의 나이 36세 때였다. 이후 조선인민군 연합부대 정치위원, 黨中央委員會 조직지도부 부부장, 당中央委員會 위원, 最高人民會議 대의원 등을 역임하다가 1994년 5월 61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101)


항일유격대집단의 재생산은 혈통에 의한 국가영도 계승성의 틀을 마련한 것이며, 후계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던 기제였다. 북한이 강조하는 "혁명전통"은 단순한 족벌세습제를 위한 선전이 아닌 '빨치산혈통'의 재생산 이데올로기인 것이며,102) 현재 북한체제를 유지하는 견인력 역시 항일유격대집단의 존재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4.맺음말


본 연구는 항일유격대집단이라는 정치세력의 형성문제를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이 가운데 항일유격대집단의 형성에 대해서는 金日成 指導體系의 성립과 연계시켜 설명하고자 했으며, 그것이 사회적으로 의미를 획득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抗日遊擊隊集團 再生産體系 構築에 초점을 맞춰 고찰하였다.


항일유격대집단의 형성문제를 다룰 때 고려해야 할 역사적 전제요소로서는 첫째, 한국에서 프롤레타리아독재정권을 지향한 공산주의운동의 역사 둘째, 한반도 주변의 공산주의 집단·국가의 영향력, 셋째, 제2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함께 소련군이 38도선 이북지역을 점령하여 "소련을 지향"하는 질서를 북한사회에 덮어 씌우려 했던 규정력 등 세 가지였다.


본고에서 검토한 바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920년대 이후 무장투쟁의 흐름은 초기독립군전투, 광복군 그리고 조선의용군 등의 무장활동 및 김일성세력집단의 항일무장투쟁으로 발전하였다. 김일성세력집단은 1930년대 무장투쟁을 위한 지리적 여건이 상대적으로 좋았고 운동의 군중적 토대도 단단했던 東滿에서 무장투쟁의 주류세력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 金日成은 1930년대 초부터 중국 공산주의세력과 협력하여 공동투쟁을 전개한 바 있었고, 1940년대 초에는 소련극동전선군88독립보병여단에 소속되어 항일유격대집단을 이끌면서, 소련군 제1극동전선군과 연계를 유지해 왔다.


해방 직후 북한지역에는 무장투쟁을 통해 엮여진 2백여 명의 사람들이 정치무대에 등장하였다. 이들은 '抗日遊擊隊集團'으로 불렸는데, 통일 단결의 수준이 상당히 높았으며, 지도자 金日成은 국내에서 활동했던 공산주의자들에 비하여 대중적으로 크게 알려져 있었다. 그들은 북한 점령 소련군사령부와의 협력 하에 각계각층의 사회세력을 결집시키면서 새로운 사회질서를 창출해 나갔다. 그 과정에서 항일유격대집단은 1945년 해방 직후부터 1946년 초까지 비교적 짧은 시간 동안 북한의 黨·政·軍을 조직 장악해 나갔으며, 무장투쟁의 초기부터 "後備隊"를 키우기 위하여 東滿 각지에서 兒童團學校를 운영했던 경험을 살려 '戰友'들의 연고자들을 교육하여 항일유격대집단의 재생산체계를 만들었다. 산 자들이 죽은 자를 되살려내고, 죽은 자들에 의해 항일유격대집단의 '살아있는 신화'가 만들어졌다.

 

결론적으로 항일유격대집단은 일제하 항일무장투쟁을 통하여 배양되어 해방 직후 金日成의 정권 장악과 함께 그 원형이 성립되었으며, 항일무장투쟁사와 당사 서술을 통하여 북한역사에 확실히 각인되어 북한 전 사회영역에서 명실상부하게 활동지침과 반성의 기준이 되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항일유격대집단을 북한 권력구조의 핵심영도세력이라고 부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A Study on the Formation Process of Anti-Japan
Guerilla Groups

Gwang-Oon Kim

The purpose of this article is to disclose the process of the formation of anti-Japan guerilla groups. This article discloses when, by whom, how the guerilla groups were formed and how they were interrelated, and why they functioned in those ways. I did not try to disclose the process according to time of their formation. Instead I focused on the time when each group gained significant status, and I tried to disclose the process that each group used to begin to expand its influence politically and socially and establish a strong foundation.


Immediately after the liberation of the country, about 200 people who formed relationships through guerilla activities participated in the politics in North Korea. They were called "anti Japan Guerilla group." They had a strong companionship among themselves. The main leader Kim Il-Sung was well known to the public. He was more famous than any other communist activists who acted inside Korea. These poeple kept a close relationship with the USSR.

 

They gathered and directed political leaders in North Korea and established a new social order in North Korea. From the beginning of guerilla activity against Japan, they formed youth schools in the East Manchurian area to train the next generation for anti-Japan guerilla activities. The students of these schools usually were the children of the guerilla members. Of course, many of the guerilla members died in battle against Japan. Their children took over their fathers' places and fought not only for the liberation of their country but also for the revenge of their fathers' blood. Through this systematic training process, anti-Japan guerilla groups created living legends in Korean history.

*주석*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

1) 和田春樹, 『北朝鮮:遊擊隊國家の現在』, 岩波書店, 1998, p. 6;Don Oberdorfer, The Two Koreas : A Contemporary History, 1998, (『두개의 코리아』, 중앙일보사, 361쪽);최성, 1997 『북한정치사:김정일과 북한의 권력엘리트』, 풀빛, 20쪽 등 참조.
2) 림미화는 항일무장투쟁이 1930년대 후반기부터 국내외의 넓은 지역을 포괄하여 전개된 조건에서 그 기본판도는 국내였다고 주장한다(림미화, 「항일무장투쟁의 기번 판도에 대한 연구」, 『력사과학』 제4호, 1996, 7∼8쪽).
3) 항일무장투쟁에 대한 연구사 정리는 정창현, 「항일무장투쟁사연구」, 『남북한 역사인식 비교강의』, 일송정, 1989;金光雲, 「항일무장투쟁과 조국광복회운동」 『 쟁점과 과제 민족해방운동사』, 풀빛, 1990, 293∼301쪽;辛珠栢, 「항일무장투쟁」, 『한국역사입문』 3, 1996, 풀빛 등 참조.
4) 김한길, 『현대조선력사』, 사회과학출판사, 1983, 196∼197쪽.
5) 和田春樹(李鍾奭 역), 『金日成과 만주항일전쟁』, 창작과 비평사, 1992. 294∼319쪽. 和田春樹는1970년 11월 朝鮮勞動黨 第5次 대회 이후를 '遊擊隊國家의 成立'이라 는 제목으로 서술하였다. 그는 '滿洲派' 이외에는 延安系·蘇聯系·國內系·甲山系 등으로 구별하였을 뿐, 정파로 구분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들을 '정치적 분파'로 결 속했던 존재로 파악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和田春樹, 위의 책, 304∼305쪽). 본 논문에서도 和田春樹의 구별을 따랐다.

6) 李種奭은 和田春樹의 연구를 발전시켜 북한지도집단의 항일무장투쟁의 궤적을 실증적으로 규명한 기초 위에서 그들의 역사적 경험이 해방후 인민정권 수립과정에 미 친 영향을 ①金日成의 명망성 ②통일전선운동 ③민주개혁 ④대중조직화 ⑤무력기관 설립 등 다섯가지로 정리하였다(李鍾奭, 「북한지도집단과 항일무장투쟁」 『해 방전후사의 인식』 5, 한길사, 1989).
7) 和田春樹는 北朝鮮體制의 形成史를 두 단계로 나누었다. 첫 단계는 소련·동구와 마찬가지로 국가사회주의체제가 성립하는 1961년까지이다. 이 체제의 북한적 현상은 경제에서 생산관계의 사회주의적 개조와 정치에서 '滿洲派'에 의한 당·정의 독점적 장악의 실현이었다. 이전에도 金日成은 당·정의 정상에 있었지만, 그를 지탱하며 당 과 정부를 운영한 것은 延安系·蘇聯系·南勞黨系였다. 和田春樹는 한국전쟁이 끝나면서 전쟁 실패의 책임을 둘러싼 대립이 발생하였고, 1961년의 第4次 黨大會에 이르 러 주류파에 의한 일원적 지배가 실현되었다고 파악한다. 나아가 정상으로서의 滿洲派의 승리로 유일지도자 金日成이 만주파 속으로 끌려들어 갔으며, 이를 통해서 金 日成 개인의 리더십 대신에 滿洲派의 집단적 리더십이 등장하였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유일 지도자였던 金日成과 滿洲派의 위상에 모순이 발생하였으며, 이 모순의 해 결책이 1967년의 유일사상체계 확립이었고, 그 연장선상에서 최고사령관 金日成을 정점으로 한 唯一革命傳統의 遊擊隊國家가 1970년경에 만들어졌다는 것이다(和田 春樹, 「遊擊隊國家の成立と展開」 『世界』 10월호, 1993, 268∼277쪽).
8) Andrei N. Lankov도 'Kremlinology'를 북한정치 이해에 적용하여 북한정권 내 4개 '政派'의 존재를 부각시킨 후, 金日成이 覇權鬪爭을 주도했다고 서술하였다(안드레 이 란코프(김광린 역), 1995 『북한현대정치사』, 오름, 103∼132쪽). 현재 남한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북한에서의 '정치숙청'은 제1단계 남로당파 숙청(1952∼1955 년), 2단계 소련파 숙청(1953∼1956년), 3단계 연안파 숙청(1956∼1958년), 4단계 빨치산파 숙청(1966∼1969년)으로 구분하여 이해하고 있다(金甲哲 외, 『남북한체 제의 공고화와 대결』, 소화, 1996, 28쪽)
9) Bruce Cumings,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The Roaring of the Cataract 1947∼1950 Vol. Ⅱ, 1990, 293∼294쪽. Cumings의 주장에 의하면, "북한사회 주의의 가장 큰 일탈은 체제의 상층지도부, 곧 혁명의 실질적인 전위를 구성하는 핵심적인 지도부에서 나타났다. 관료적 위계질서 대신에, 조직원리는 엄격하게 짜여 진 내부 서클에서의 개인적 충성이었고, 이것은 끊임없이 바깥으로 확대되는 동심원들의 핵이 되었다. 이 개념은 합리적·법적이라기보다는 카리스마적이고, 관료주의 적이라기보다는 유기체적인 것이었다. 이 핵심을 상호 결합시키는 접착제는 항일유격투쟁의 카리스마에 기초한 개인적 관계였고, 그 이데올로기는 '혁명적 민족주 의'였다. 그 정치형태는 일종의 조합주의와 가장 근사한 것이었고, 그 결과 역시 이른바 '民族的 唯我論'(national solipsism)이라 부를 수 있는 그런 것"이었다(Bruce Cumings, 위의 책, 305쪽).
10) Bruce Cumings, 「Corporatism in North Korea」, 『Journal of Korean Studies』 4, 1982(김동춘 역, 1988 「북한의 조합주의」 『한국현대사연구』 1, 이성과 현실사, 341∼343쪽).

11) 鐸木昌之, 『北朝鮮:社會主義と傳統の共鳴』, 東京大學出版會, 1992, 6쪽.
12) 본 논문에서 사용한 '항일유격대집단'이라는 용어는 金日成과 함께 조직활동 또는 무장투쟁을 했던 '戰友'에 한정하여 사용하였다. 抗日遊擊隊 成員들은 자신들을 지 칭할 때 "戰友" 혹은 "우리"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하곤 하였다(『민주조선』 1947년 12월 16일자 「故安吉先生略史」 참조).
13) '幹部'(cadre)라는 용어는 러시아혁명 중 등장한 용어로 중국에서 혁명운동의 중심인물을 의미하는 용어로 번역되었다. 북한에서 '간부'는 "당의 기본 핵심역량"을 의 미하며, 당의 노선과 정책은 간부들을 통하여 당원들과 대중 속에 전달되며, 그 관철을 위한 활동도 간부들에 의하여 조직되고 집행된다(『백과전서』, 과학·백과사 전출판사, 1982). 그러나 해방 직후 북한에서 '간부'의 의미는 당원 여부를 가리지 않았으며, 국가 건설의 기본역량만을 의미하였다.
14) 『김일성저작집』의 경우, 1979년에 제1권이 처음 출판되기 시작하여 1996년 6월에 마지막으로 제44권이 나왔다. 여기에 포함된 글은 모두 1,405편이고, 쪽수는 모 두 22,976쪽으로 연설문·담화문·대담기록·보고문·발표문·서한·논문 등 다양하다. 또한 金日成이 생전에 남긴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는 1992년 4월에 첫 권이 나온 뒤로 1998년 7월 간행된 「계승본」까지 모두 8권이 나왔다. 『김일성전집』은 1992년 3월부터 출간되기 시작하여 현재 24권이 간행되었다. 金日成의 논저에 대한 문헌적 검토 비판은 Suh Dae-Sook, Korean Communism, 1945∼1980, The Univ. Press of Hawaii, 1981, 1∼272쪽;김병로, 『金日成저작해제』, 민족통일연구 원, 1993, 30∼35쪽 참조.
15) 林春秋:(1912. 3. 8∼1988. 4. 27) 金日成遊擊部隊 출신. 1945년 北朝鮮共産黨 평남도당 제2비서. 1950년 강원도당 위원장. 1962년 最高人民會議 常任委員會 서기 장. 1972년 中央人民委員會 서기장. 1980년 勞動黨 중앙위원. 1983년 國家 副主席.

16) 조선노동당 당사연구소 편, 『김일성동지 회고록:세기와 더불어』(계승본) 8권, 조선노동당출판사, 1998. 304쪽. 역사학자로서 林春秋는 항일무장투쟁시기에 정리 해 놓았던 金日成의 혁명활동일지를 기초자료로 하여 『항일무장투쟁시기를 회상하여』와 연대기식 종합회상기 『붉은 해발아래 항일혁명 20년』, 『불굴의 혁명투 사 김정숙동지를 회상하여』, 『불굴의 혁명투사 金鐵柱동지』 등을 집필하였다(박현철, 『등대』 278호, 1997,24∼25쪽). 평양을 방문했던 사람들의 전언에 의하 면, 林春秋의 수첩이 平壤革命博物館에 전시되어 있다고 한다.
17) 徐容奎:(1922∼1998), 그의 증언에 토대를 둔 저서로는 이태호, 『압록강변의 겨울』, 1991, 다섯수레;중앙일보 특별취재반,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상· 하, 중앙일보사, 1992;신평길(필명), 『金正日과 대남공작』, 북한연구소, 1996;정창현, 『곁에서 본 김정일』, 토지, 1999 등이 있다.
18) 인물에 대한 정리를 위해 『正路』, 『勞動新聞』, 『朝鮮』 등의 기사 및 1983년 과학·백과사전출판사가 출판한 『백과전서』 전6권, 『항일빨치산 참가자들의 회상기』, 『인민의 자유와 해방을 위하여』 등을 활용하였다. 그 외 國家安全企劃部의 『북한 주요 인물 100인집』, 統一院 간행 『북한의 기관 및 단체별 인명록』, 언론사들에서 간행한 『北韓人名辭典』, 미군정 G-2에서 1948년 간행한 Who's Who of Korean Personalities in North Korea 등도 활용하였다.
19) 이와 관련하여 安吉로 추정되는 한 遊擊隊員은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우리 유격대의 규율은 절대로 엄격한 것이었다. 규칙도 절대적이요, 명령도 절대적이다 …… 규율을 엄격히 세우는데 가장 필요한 것은 복종심이요, 그 복종심에 가장 필요한 것은 존경심이다. 실로 우리 유격대의 규율이 그 같이 센 것은 그 정신적 근거는 무 엇보다도 이 존경심이 두텁고 또 뿌리깊은 까닭이었다. 김일성장군에 대한 존경심은 그 절정이었다. 그에 대한 존경심과 복종심 가운데서 우리 유격대의 규율은 자라 났으며 억세갔다. 김일성장군은 즉 우리 유격대의 산 규율이었다. 규율은 생명이다. 즉 김일성장군은 우리 유격대의 생명인 것이?quot;(韓載德, 1947 『金日成將軍凱旋 記』, 53∼55쪽). 이 말은 金日成을 중심으로 共産黨이 통일 단결할 것을 강조하기 위한 당시의 요구를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20) "金日成將軍部隊"에 대하여 해방 후 최초로 언급한 출판물은 『정로』 1945년 11월 1일자이며, 그 구성원들이 이름을 밝히면서 공개 좌담에 참석했던 것은 1946년 2 월경이다. 林春秋·金成國·安吉은 서울에서 간행된 『신천지』 좌담회에서 일본군과의 투쟁 회고 및 향후 민족의 진로와 관련하여 진술한 바 있다(『신천지』 1946년 3월호, 230∼236쪽).

21) 韓載德, 앞의 책, 41∼42쪽.
22) 1943년 남한의 한 지방에서 소학교 6년생과 중학교 2년생을 모아놓고 현재 누가 제일 '위대'하다고 생각하는지를 무기명 설문지를 통하여 물은 결과 67%가 金日成을 적었다(鎌田澤一郞, 『朝鮮神話』, 創元社, 1950, 384쪽). 金日成의 존재는 많은 한국인들에게 신화였던 것이다.
23) 당시 金日成은 中國共産黨으로부터 "침착하고 교묘하며, 영활한 지휘"로 부대를 이끌었다고 평가 받았다(「東北人民革命軍第二軍之生産及其發展的經過(1938)」, 『 東北地區革命歷史文件匯集』 甲(53), 311쪽).
24) 東北人民革命軍 第2軍은 中國共産黨 산하의 黨軍이었지만, 朝鮮人측 입장에서 볼 때 그들은 "朝鮮人民革命軍"이기도 하였다(中國朝鮮族歷史足迹編輯委員會 編, 『決戰』 4권, 1991, 3쪽). "朝鮮人民革命軍"이라는 명칭을 둘러싼 다양한 논의에 대해서는 정창현, 「항일무장투쟁사연구」, 『남북한 역사인식 비교강의』, 1989, 270∼ 275쪽 참조. 동만에서 韓國人 抗日遊擊隊가 中共黨 소속으로 활동하면서 韓國解放의 부대로 거듭나는 과정에 대해서는 李鍾奭, 「북한지도집단과 항일무장투쟁」, 『해방전후사의 인식』 5, 한길사, 1989, 61?2쪽 참조.
25) 滿洲國軍政府顧問部, 『滿洲共産匪の硏究』, 1936, 86쪽. 「1948년 조선최고인민회의 대의원선거를 위한 입후보자 약력소개문」에 의하면, "김일성장군은 만주일대 에서 투쟁한 것만이 아니라 함경남북도, 평안남북도, 강원도 일대에 많은 정치공작원들을 파견하여 국내에 광범한 지하단체를 조직하고 국내의 민족해방운동을 지 도 격려하여 왔다"고 소개하였다. 당시 청진일철·미쓰비시제강소·토막동금광·유선탄광·회령탄광 등지에는 이들이 조직한 지하단체들이 활동하고 있었다(『思想彙報 』 8號, 163∼177쪽;『思想彙報』 14號, 9∼27쪽).

26) 중앙일보특별취재반,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상), 1992, 80∼83쪽 참조.
27) 1940년대 金日成이 직접 작성한 문건에는 동만유격대의 발전과정 중 착오로 "총살한 5백여 명 민생단 중에는 우리의 진정한 좋은 동지들이 피해자로 된 것이 적지 않다"고 지적하였다(「抗聯第一路軍略史」 東北抗日聯軍史料編寫組 편, 『東北抗日聯軍史料』(下)1942, 中共黨史資料出版社, 1987, 672∼675쪽).
28) 해방 직후 한 유격대원은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金日成遊擊隊 자체의 힘은 즉 이 부대의 단결의 힘이다 …… 장군을 위하여서 장군의 명령이라면 언제나 달게 죽으리라는 것은 대원들의 각오라느니보다 대원들의 일상생활 감정이요, 인생관이요, 철학이었다. 우리 유격대의 '힘'은 金日成 장군 주위에 뭉친 단결의 힘이다. 우리 유격대의 역사와 전통은 唯一首領 金日成將軍 주위에 뭉친 단결의 역사요, 전통이다"(韓載德, 『김일성장군개선기』(증보판), 1948, 50∼53쪽), 이 캠페인을 이끌었 던 韓載德은 1947년 8월 15일 "우리는 이 유격대가 가진 고귀한 정신과 체험에서 배우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유일한 지도자 주위에 뭉친 철벽같은 단결과 강철같은 규율, 조국과 인민에 대한 무한한 복무심과 필승의 신념, 정당한 투쟁전선등등. 모든 이런 것을 가능케 한 놀라운 애국적 혁명적 전통은 아직도 곤란에 가득찬 오늘의 우리들의 애국적 민주건국의 도상에서 그대로 살쿠어서 바로 배우고 본받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韓載德, 『김일성장군개선기』, 1947, 38쪽).
29) 예컨데, 金日成이 처음 유격투쟁을 시작할 당시 中國共産黨內 朝鮮人幹部였던 金明均·朴東根·朴吉·朱鎭·李相默·金聖道·金日煥·宋一·梁成龍·朴斗南 등은 바로 위에서 언급한 民生團 혐의로 같은 공산주의자들에게 희생당하였다(『장백의 투사들』 191∼204쪽;「中共東滿黨團特委工作報告(1933. 10. 25.)」 『東北地區革命歷史文件 匯集』 甲(30), 中央黨案館·遼寧省黨案館·吉林省黨案館·黑龍江省黨案館 共同出版, 17쪽, 47쪽).
30) 「東北人民革命軍政委連席會議」, 『東北地區革命歷史文件匯集』 甲(44), 432쪽.

31) 국내에서 활동했던 공산주의자들의 '民主基地論'에 대한 비판에 대해서는 鐸木昌之, 「朝鮮解放前後における金日成路線-史料批判をとお랴튠蒜?朝鮮共産黨北部 朝鮮分局' 創設と金日成路線」, 『アジア經濟』 ⅩXX-Ⅱ,1989, 참조.
32) 북한의 군대는 창설 초기부터 "김일성장군의 빨치산부대의 계승자"로 규정되었다(『조선중앙연감』 1949년판, 조선중앙통신사, 86쪽).
33) 中國人 共産主義 指導者들은 코민테른과 소련당국에 金日成을 높게 평가하여 보고하였다. 예를 들면, 周保中은 "金日成은 가장 훌륭한 군사간부이며 …… 中共의 朝 鮮人 同志들 중에서 가장 우수한 분자이다. 그는 滿洲 南部와 鴨綠江 東部, 朝鮮 北部地帶에서 중요한 활동을 할수 있다"고 蘇聯軍 極東司令部에 보고하였다(「周保 仲致王新林的信(1941. 7. 1.)」, 『東北地區革命歷史文件匯集』 甲(61), 296쪽).
34) 『김일성동지 회고록:세기와 더불어』(계승본) 8권, 조선노동당출판사, 1998, 441∼446쪽.
35) 朴吉龍에 의하면 "소련에서 벌써 金日成을 정해서 입북시켰다. 소련극동사령부에서 상부의 지시에 의해 그를 보냈다. 슈띄꼬프가 레베제프에게 金日成을 보내니 모든 편리를 도모하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朴吉龍:북한 외무부 부상과의 인터뷰 KBS 소장자료).

36) 미군정은 1945년 12월 모스크바에서 한국문제에 대한 결정을 확정하기 이전에 분단과 단독정부 수립에 관련하여 이미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넜다. Cumings가 볼 때 '냉전의 조숙한 戰士'(Cumings, 1990, 앞의 책, 36쪽)였던 미군정은 소련의 팽창주의와 연계되어 있다고 판단한 남한의 사회혁명을 저지하기 위해 방파제를 구축하고자 했기 때문이다(Cumings, 1981, 앞의 책, 136쪽). 미군정 당국은 남한 진주 직후부터 한민당을 비롯한 현지 우파세력과 동맹관계를 수립하고, 대신 좌파 정치세력을 탄압했다. 또한 식민지시대의 국가관료제가 再起되었을 뿐 아니라 독자적인 경찰·군대조직도 만들어졌다. 이러한 미국의 일방적인 단독정부 수립과정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1945년 10월 중순에 제기된 소위 남한 '과도정권론'(governing commission)이다. 모스크바3상회의에서 민주주의임시정부 수립을 결정했을 때, 남한 내부의 상황은 이미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다.
37) 金日成, 「해방된 조국에서의 당, 국가 및 무력 건설에 대하여」, 『인민정권 건설에 대하여』 1, 조선노동당출판사, 1978, 51쪽.
38) 보편적인 의미의 '人民政權'이란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유럽과 아시아의 일부 국가에서 추진된 人民民主主義革命(people's democratic revolu- tion) 과정에서 수립된 '人民共和國' 형태의 권력을 지칭한다. 人民政權은 러시아혁명을 통해 수립된 소비에트권력과 다르며, 파시즘에 대항하여 형선된 '人民戰 線'과도 구별된다. 그것은 노동계급의 정당이 지도하는 인민의 통일전선에 의거하고, 다당제 아래 보통선거제도에 의한 의회를 최고국가기관으로 한다. 권력은 반제 반봉건의 인민연합의 성격을 띠며, 민주주의적 제과제를 실현한다. 북한 人民政權도 이와같은 보편성을 공유한다. 그러나 한국의 역사적 경험과 당시의 국제관계 및 문화적 차이로 인해 나름의 특수성이 발현되었고, 지금에 와서 볼 때 그 차이는 너무도 컸다. 본 논문에서는 이 점을 '金日成 指導體系'라는 범주를 설정하여 부각시 키고자 한다.
39) 金日成, 위의 책, 51∼69쪽.
40) 彭施魯, 「在蘇聯北野營的五年」, 『黑龍江黨史資料』 第10輯, 1987, 77쪽.

41) 「訪問周保中同志記錄(1960. 1. 4)」(辛珠栢, 『만주지역 한인의 민족운동사:1920∼1945』, 아세아문화사, 1999, 491쪽에서 재인용).
42) 和田春樹, 위의 책, 285∼291쪽.
43) 중국조선족발자취총서 편집위원회 편, 『결전』 4, 민족출판사, 1991, 297∼300쪽. 이 책에서는 환영대회가 개최된 일자를 1945년 9월 2일이라고 서술하였다. 더불어 김광협·류창권·김동규·조명선 등은 그 곳에 남아서, 당조직과 기층정권을 수립하고, 군대 창건을 주도했다고 한다.
44) 한국일보사 편, 『증언, 金日成을 말한다』, 한국일보사, 1991, 52쪽.
45) 『동아일보』 1992년 8월 30일자. 이와 관련하여 金日成은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우리가 원산항에 상륙한 것은 1945년 9월 19일이었습니다. 그때 부두에서 우리 를 마중해 준 것은 원산시에 주둔하고 있던 소련군사령부 성원들이었습니다 …… 그날 부두에 나온 조선사람들 가운데서 기억나는 인물은 그 당시 소련군대에서 군 관으로 복무하고 있던 韓一武입니다."(1998 『김일성동지 회고록:세기와 더불어』 8권, 조선노동당출판사, 474쪽).

46) 한국일보사 편, 『증언, 김일성을 말한다』, 한국일보사, 1991, 50∼53쪽.
47) 「中共南滿特委工作報告第二號」, 『東北地區革命歷史文件匯集』甲(33), 9쪽.
48) 당시 항일연군 590여 명 가운데 197명이 소련군 첩보부대로 배속되었다(東北地區革命歷史文件匯集編輯委員會, 『東北地區革命歷史文件匯集』 甲(65), 中央黨案館· 遼寧省黨案館·吉林省黨案館·黑龍江省黨案館 共同出版, 1992, 115∼137쪽, 139∼160쪽, 182∼199쪽;周保仲, 『東北抗日遊擊日記』, 인민출판사, 1991, 659∼660 쪽.
49) 全順姬, 「다반촌밀영에서」, 『항일혁명투사들의 회상기』 3, 1987, 80∼87쪽.
50) 서용규가 林春秋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金日成은 이들에게 "동북지역에 가서 과거의 조직선을 복구하고, 옛 동지들을 찾아서 데리고 들어오라"고 지시했다 고 한다(서용규 증언).

51) 金日成이 金貞淑을 처음으로 본 것은 다흥왜회의를 하던 무렵이다. 延吉현 삼도만 능지영에 당비서처가 있었는데 김정숙은 그 비서처에서 일하고 있었다. 金日成은 능지영에서 소집된 비서처 일군들의 회의장소에서 김정숙을 만났으며, 그후 마안산에서 金日成부대에 편입된 김정숙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김일성동지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계승본) 8권, 조선노동당출판사, 1998, 159쪽).
52) 李五松, 「동지들의 뜨거운 사랑」, 『항일혁명투사들의 회상기』 3, 1987, 118∼127쪽;林隱, 『金日成正傳』, 沃村文化社, 1989, 145쪽;정창현, 『곁에서 본 김정 일』, 토지, 1999, 26쪽. 抗日遊擊隊集團 내에는 夫婦가 상당수 있었다. 여기에 더하여 金日成과 그의 부인 金貞淑의 직접 관여하에 항일유격대원인 金策·林春秋·金成 國·金明俊·손종준·吳在元·李乙雪·姜相鎬·太炳烈 등이 해방 직후 평양에서 혼인하였다(太炳烈·오찬복, 『태양을 모시고 60년』, 금성청년출판사(평양), 1997, 63쪽). 한 국의 전통에서 결혼은 개인의 문제를 넘어 가족과 가족 사이의 사회적 결합의 중요한 한 형식이다. 金日成과 그의 부인 김정숙이 抗日遊擊部隊 대원들의 혼사에 깊 게 관여했다는 것은 '항일빨치산가족'이라는 그들만의 폐쇄성으로 작용하여 이후 북한의 "同心圓的 社會構成"의 단초로 작용하였다.
53) 太炳烈·오찬복, 『태양을 모시고 60년』, 금성청년출판사, 1997, 33쪽. 金日成의 담화 「새조선 건설과 공산주의자들의 당면과업」은 1979년 4월 15일 조선노동당출 판사가 간행한 『김일성저작집』 1에 처음으로 실렸다. 이 글은 대단히 중요하지만, 당시 담화원고가 없기 때문에 저작집간행위원회에서 참석자들의 기억에 의존하 여 재구성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1979년에 와서 이 글이 실린 이유는 원고가 없는 상태에서 편찬위원들도 이 담화에 대하여 몰랐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54) 金日成, 「새 조선 건설과 공산주의자들의 당면과업」 『김일성저작집』 1권, 조선노동당출판사, 269∼279쪽;金一 외, 앞의 책, 6쪽.
55) 지방에 파견된 인물 및 파견지에 대해서는 북한의 과학·백과사전출판사에서 1982년 간행한 『백과전서』 등의 사전류와 『로동신문』에 실린 추모기사(예를 들면 「 우리에게는 金策동지와 같은 사람이 많아야 합니다」 『로동신문』 1994년 7월 1일자;『로동신문』 1997년 11월 5일자) 및 오찬흥, 1988 『한 생을 싸움의 길에서 』, 금성청년출판사, 21쪽 그리고 崔仁德, 1985 「단결이 없이는 새 사회 건설도 조국의 통일독립도 실현할 수 없습니다」 『인민들 속에서』 36, 조선노동당출판사, 25쪽 등을 종합하여 정리하였다.

56) 정찰부장 추븨린은 각 경무사령부 부사령관 및 고문으로 임명되는 사병과 하사관들을 장교로 임관해 줄 것과 기존 장교들에게는 계급을 승진시켜줄 것을 소련 극동군 사령관에게 요청하였다. 이에 따라 姜相鎬·林春秋·金曾東·吳振宇·李鳳洙·朴成哲·김지명 등 16명이 초급 장교로 승격되었다(「바실례프스끼에게 보내는 추븨린의 보고 」 국방성문서보존소, 문서군 2, 목록 19121, 문서철 2, 3∼4쪽, 18쪽).
57) 당시 抗日遊擊隊 대원들의 지방공작 가운데 安吉의 활동경험이 모범사례로 뽑힌다. 安吉은 함북 청진시에 파견되어 일제시기 자신들과 연계되었던 인물들을 찾아서 새롭게 당조직에 끌어들인 후, 그들을 중심으로 청진시당단체를 결성하였다. 이와 함께 청진제철소를 비롯한 공장·기업소 당조직을 정비 강화하여 당대열을 확장시 켰다고 한다(金一 외, 앞의 책, 22∼23쪽).
58) 『로동신문』 1994년 7월 1일자.
59) 兪英九, 『남북을 오고 간 사람들:南의 조직사건과 北의 대남사업』, 도서출판 글, 1993, 231쪽.
60) 1946년 7월에 창작된 「김일성장군의 노래」 가사는 "장백산 줄기 줄기 피어린 자욱, 압록강 굽이굽이 피어린 자욱"을 상기시키면서 "만주벌 눈바람아 이야기하라 밀 림의 긴긴 밤아 이야기하라"며 "만고의 빨치산" "절세의 애국자"로 김일성을 대중에게 각인시키고 있다.

61) 『당건설』, 100∼101쪽 RG 242 S.A. 2008 Box 9.
62) 朴英淳, 「세새대들을 사랑의 한품에 안아 혁명의 계승자로 키워 주시는 어버이수령님의 은덕에 충성으로 보답하여야 한다」, 『항일의 로혁명투사들이 새세대에게 들려주는 이야기(1)-친어버이의 사랑속에』, 금성청년출판사, 1982, 34쪽.
63) 金貞淑은 "그들은 숨을 거두는 마지막 시각에도 조국을 그리며 눈을 감지 못하였고, 사랑하는 부모처자들을 장군님께 부탁하였습니다. 조국이 광복된 오늘 이 땅위에 인민의 행복한 낙원을 건설하여 그들의 염원을 하루빨리 실현하는 것도 우리가 지켜야 할 의리이지만 그들의 유가족을 찾아서 잘 돌봐주는 것은 누구에게도 맡길 수 없는 우리 공산주의자들의 의무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김준성, 1997 「혁명가유자녀들을 주체혁명위업의 핵심골간으로 키우기 위한 불요불굴의 공산주의혁명 투사 김정숙동지의 활동」 『력사과학』 4호, 34∼35쪽).
64) 安燦一, 『주체사상의 종언』, 을유문화사, 1997, 287쪽.
65) 滿洲國軍政府顧問部, 『滿洲共産匪の硏究』, 1936, 113쪽;金成鎬, 『1930年代 延邊 民生團事件 硏究』, 백산자료원, 1999;警務局 保安課, 『高等警察報』 제2호,
44∼45쪽;白鶴林, 「그이께서는 우리를 이렇게 믿어주시었다」, 『인민의 자유와 해방을 위하여』 1권, 1969, 163∼174쪽;崔賢, 「두 번째 상봉」, 『항일빨치산 참가자들의 회상기』 5권, 1968, 3∼4쪽.

66) 「抗聯第一路軍略史」 東北抗日聯軍史料編寫組 편, 1987 『東北抗日聯軍史料』(下), 中共黨史資料出版社, 1942, 672∼675쪽.
67) 安圖縣 車廠子에서 활동하던 김택환부대, 林岡에서 활동하던 리동학부대, 延吉과 和龍의 반일자위대원들이 金日成이 새롭게 편성한 부대에 합류하였다. 金正淑도 이 때 金日成부대에 입대하였다. 그 외 인물로는 최희숙·박수완·김수복·리동백 등을 들 수 있다(전상길·임도준, 『백두산총서:혁명력사』, 과학기술출판사, 1992, 108∼ 110쪽;현룡순 외, 『조선족백년사화』 제2집, 477쪽).
68) 그런데 安圖遊擊隊 성원이었던 김일룡·박훈·李英培·金哲熙 등은 뒷날 "항일혁명열사"에 포함되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당 가입 여부일 것으로 추측된다. 건설동지사에 입당했던 車光洙·金赫·崔昌杰·桂永春 등은 모두 "항일혁명열사" 반열에 올랐기 때문이다.
69) 『장백의 투사들』 191∼204쪽;「中共東滿黨團特委工作報告(1933. 10. 25.)」, 『東北地區革命歷史文件匯集』 甲(30), 中央黨案館·遼寧省黨案館·吉林省黨案館·黑 龍江省黨案館 共同出版, 17쪽, 47쪽.
70) 金日成은 오중흡에 대하여 "나는 지금까지 50여 년 동안 혁명투쟁을 해오면서 숱한 간부들을 데리고 사업하여 보았지만, 오중흡 동무와 같이 충실하고 째인 사람은 보 지 못하였습니다"라고 평가하였다. 金正日은 1960년 초 인민군대에 오중흡 7연대를 따라 배울 것을 강조하였다고 한다. 그는 "혁명의 수뇌부 결사옹위의 화신"으로 받들어지고 있다(金日成, 『세기와 더불어』(계승본) 7권, 조선노동당출판사, 1996, 346쪽). 오중흡의 아버지 오창락, 그의 사촌인 오중화·오중옥·오중성, 그리고 친척인 오석영·오중보·오중선·오중협·오중룡 등도 일제에 희생당하였다(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중앙상임위원회, 『항일혁명투사들의 회상기』 1, 1987, 52쪽).

71) 「혜산사건판결서」 『思想彙報』 20號, 1939, 10쪽. 함흥지방법원에서 이 사건의 판결이 난 것은 1941년 8월 28일이다. 유죄판결만 167명으로 그중 사형 6명, 무기 징역 4명, 15년형 4명, 13년 6명, 12년 9명, 10년 18명, 8년 14명, 7년 7명, 6년 4명, 5년 8명, 4년 10명, 3년반 7명, 3년 49명, 2년반 5명, 2년 16명이었다.
72) 정치공작원의 주요 임무는 祖國光復會 조직, 조직원에 대한 정치학습, 생산유격대·부녀부·아동단 조직, 일제의 기밀 탐지, 경제모연공작, 모병공작 등이었다(朝鮮總督 府 警務局, 『最近における朝鮮治安狀況』, 1938, 412∼414쪽, 419∼420쪽).
73) 이들의 입대시기에 대해서는 1959년 간행된 『항일빨치산 참가자들의 회상기』 1권 참조.
74) 姜德相·梶村 編, 『現代史資料』 30集, みすず書房, 1976, 295쪽.
75) 송영, 『백두산은 어데서나 보인다』, 민주청년사, 평양, 1956, 189쪽.

76) 『조선중앙통신』 1998년 9월 8일자.
77) 『백과전서』에 '항일혁명열사'로 등재된 인물을 정리한 것이며, 이들 외에도 이치호·김홍수·곽지산·방일룡 등이 전사하였다(「金日成給周保仲的信(1943. 12. 24.)」 『東北地區革命歷史文件匯集』 甲(65), 259∼260쪽). 金日成의 제1대대 소속이었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이치호 등은 '항일혁명명열사'가 되지 못하였다.
78) 김동호는 和龍에서 적위대와 지하공작을 담당하다가 1933년 12월 희생당했다(朴英淳, 「가장 고귀한 정치적 생명을 위하여」, 『항일혁명투사들의 회상기』 3, 1987, 268∼289쪽). 강남순은 1936년 유격대 병기수리소에 근무하다가 전사하였다(朴英淳, 「잊혀지지 않는 강남순동지」, 『항일혁명투사들의 회상기』 3, 1987, 90∼ 101쪽). 류치수는 饒河에서 소작을 하다가 1936년 유격대에 입대하였으나, 1939년 겨울 전사하였다(金忠烈, 1987 「이 배낭을 동지들에게-류치수동지를 회상하며 」 『항일혁명투사들의 회상기』 3, 109∼117쪽). 한주애는 북만에서 활동한 인물로 삼의툰에서 지하공작 중 1935년 유격대 입대하였고, 1939년 초봄 일제에 체포되 어 사살당하였다(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중앙상임위원회, 『항일혁명투사들의 회상기』 2, 1987, 278∼297쪽). 이동화는 金日成遊擊部隊員으로서 楊靖宇 전령병으 로 활동하다가 1940년 2월 그와 함께 전사하였으며, 허성숙은 할힌골전투에서 전사하였고, 박순일도 1937년 전사하였다(『세기와 더불어』 7권, 269쪽, 363쪽). 리 경숙은 1937년 10월 20도구 우륵골 목재판전투에서 19세의 나이로 전사하였다(송영, 『백두산은 어데서나 보인다』, 민주청년사, 평양, 1956, 190∼194쪽).
79) 북한에서는 金日成을 직접 만났던 사람들을 이른바 "接見者"라고 특별 우대하고 있으며, 이들은 『인민들 속에서』 등에 金日成을 만나서 어떤 사랑과 배려를 받았는 지를 회고하곤 한다(김정연, 1995 『평양여자』(상), 고려서적, 64쪽).
80) 梁成龍의 경우 汪淸遊擊大隊 대대장으로, 정치위원 金日成보다 높은 직위였다고 볼 수 없다.

81) 1960년 이후 북한의 당·군 및 국가지도기관 성분의 50%이상을 함경도 출신이 차지하고 있다(국토통일원 편, 1969 『북한의 건군사와 군사주의 노선의 연구』 참조).
82) 「방북 스케치」 16(http://members.aol.com/reunikorea/998156. htm)
83) 金日成,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교육국장에게 준 지시(1946년 10월 27일)」 『김일성전집』 4권, 359쪽. 金日成은 "우리는 애국열사유자녀들을 양육하는데 특별한 관심을 돌려야 하며 그들을 혁명의 대를 이어나갈 훌륭한 일군으로 키워야 합니다"라고 말하였다(『김일성전집』 13권, 69쪽).
84) 서용규 증언;정창현, 『곁에서 본 김정일』, 토지, 1999, 122∼124쪽.
85) 북조선통신사, 『旬刊北朝鮮通信』 11월 중순호 №12, 1947, 1∼2쪽.

86) 안룡선, 『위대한 수령님과 전사 姜健』, 금성청년출판사, 1998, 275쪽.
87) 북조선통신사, 『旬刊北朝鮮通信』 11월 중순호 №12, 1947, 1쪽.
88) "源種場"이란 용어는 1958년 2월 金日成이 군을 방문하여 萬景臺學院을 "우리 후대를 길러낼 혁명의 원종장"이라고 하였던 것으로부터 유래한다. 이후 1974년 2월 金正日이 조선노동당 조직부 간부들과 담화하면서 다시 원종장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1997년 金正日이 萬景臺學院에 보낸 편지에서도 원종장이라는 표현을 사용 하였다.
89) 북조선통신사, 『旬刊北朝鮮通信』 11월 중순호 №12, 1947, 1∼2쪽.
90) 북한에서는 金日成의 동상은 세웠지만, 마르크스·엥겔스·레닌·스탈린 등의 동상은 세운 적이 없다. 외국인으로서 유일한 동상은 흥남에 세운 周恩來의 동상이라고 한 다(서용규 증언).

91) 延亨默:연보배의 조카로서 현재 國防委員會 부위원장이며 最高人民會議 제10기 1차회의 개최시 당 서열 18위였다.
92) 金炳律:1926년 생으로 노동자 출신의 유자녀. 노동당 평북도당 책임비서 역임.
93) 그들 외에 항일유격대 1세대와 일부 해방후 빈고농 및 노동자 출신이 있다.
94) 1937년 普天堡에서 전사한 김영환의 아들로 추정되는 항일빨치산 2세. 勞動黨 중앙위원 역임. 경제학자 金洸鎭과는 同名異人.
95) 1928년 평북 벽동 출생. 勞動黨 중앙위원.

96) 『김일성동지 회고록:세기와 더불어』(계승본) 8권, 조선노동당출판사, 1998, 316쪽.
97) 박영한, 「혁명가유자녀들을 따뜻이 보살펴주시며」 「조선』, 4월호, 1998.
98) 김태현, 「령도자와 혁명의 1세대」, 『조선』 1월호, 1995, 11쪽.
99) 『로동신문』 1997년 5월 26일자.
100) 「아버지와 아들을 영웅으로 내세워주시여-통일혁명렬사 박영발동지와 그 후대가 받아안은 높은 신임과 의리깊은 사랑」 『로동신문』 1998년 11월 2일자.

101) 『로동신문』, 1997년 9월 13일자.
102)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족벌체제'라는 용어는 '수령제'의 세습뿐만 아니라 항일빨치산집단의 가족적 연대의 세습까지를 포함한다. 와다는 '유격대국가론'을 통해서 항일무장투쟁이 어떻게 신화화되어 현실에 삼투되고 또 체제의 성격을 규정하게 되는지를 해명한다. 그에 의하면 북한에서 국가형성의 핵심적인 요인은 피포위의 식의 확산과 항일혁명전통의 결합이다(和田春樹, 「遊擊隊國家の成立と展開」, 277쪽).

출처 : 살맛 나는 세상이야기들...
글쓴이 : 크레믈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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