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의미의 공간
  • 자연과 인간
한국사

연안파 장령 2

by 8866 2006. 2. 6.

 

 

 

  김웅 金雄.

              위 사진:왼쪽 첫번째. 연합군 사령관. (두번째 사람은 부 정치위원 박일우) 

              아래 사진:오른쪽 첫번째 김웅, 두번째 박일우

              왕신호 王新虎 또는 王子仁이라고도 함.

              다른 자료에서는 왕자인이 최인崔仁으로 되어 있음. 혼돈이 있는 듯 하다.

 

 

  1914년 경상북도 출생.

  1930년대 중국으로 이주.

  1933년 9월 남경중앙군관학교 입학. 제 10기 보병반.

  당시에는 조선족학생 모두가 자신의 신분을 비밀에 부쳤다.

  학생들은 이름도 중국이름으로  고쳐 가명을 쓰도록 되었는데 당시 김웅의 이름은 王新虎였다.

  같은 반에 두명의 조선족학생이 있었는데 한 명은 崔仁(왕자인으로 개명. 인민군 7사단, 12사단 사단장)이고 다른 한 명은 崔德新(1936년 황포군관학교 졸업 후 광복군 장교)이 함께 공부했다. 최인과 최덕신은 늘 마주앉으면 조선광복과 전도에 대해 담론했지만 그때까지 이론을 그리 접하지 못한 김웅은 한쪽 옆에 묵묵히 앉아 그들의 말을 듣기만 했다.

  1936년 졸업. 최인은 조선민족혁명당으로 가고 최덕신은 상해임시정부로 가서 광복군장교로 되었다. 김웅은 혼자 가만히 연안으로 갔다. 1937년 연안항일군정대학에서 학습하고 1940년 군사교관으로 팔로군 2종대를 따라 蘇北으로 남하했다. 후에 신사군 제 3사단 敵工科의 간부로 승진했다. 주로 적정 정찰, 포로 심문 번역, 통역임무를 수행했다. 1941년 같은 적공과의 조선족 간부인 李成鎬와 함께 화북조선청년연합회소북근거지분회를 설립했다. 1942년 항일대학 제 5분교 교육장에 임명, 아울러 分管外籍學員隊(주요 조선족)를 책임졌다.

  1942년 8월 화북조선청년연합회는 조선독립동맹으로 발전했다. 이 시기 그는 3사단 8여단 작전훈련과 부과장, 과장을 역임했고 또 22연대 참모장으로도 재직했다. 일본군의 <보병사격교정>을 번역.

  1944년 1월 이성호를 도와 조선의용군화북지대를 건립했다.

  일본 투항 후 화북의용군은 3사단과 함께 동북으로 진군했다. 조선의용군 제1제대 초기간부는 60여명뿐이었지만 무순, 본계, 통화지구에서 부대를 대폭 확장했다.

  1945년 말 통화, 유화, 淸原에서 세 개의 조선족 중대와 집안, 환인에서 두 개 조선족대대와 정식 합병하여 조선의용군남만제 1지대로 편성되었다. (방호산이 있던 의용군부대일 가능성이 높다)지대장은 김웅의 군관학교동창인 최인(왕자인)이 임명되었다.

  1946년 2월 16일 동북민주연군총부의 지시에 따라 이 지대를 이홍광지대로 재편하였다. 김웅은 사령관으로하고 최인을 부사령관으로 임명했다.

  1947년 김웅은 조선으로 귀국하여 인민군 훈련사업을 주관했다. 1948년 2월 인민군 창립 후 총참모부 소장 훈련국장으로 발령되었다.  당시에는 항일파 즉 소련파가 우세를 점했고 연안파는 홀대받았다. 특히 제 4사단은 대부분 소려파간부여서 김웅의 영향이 약했다.

 1950년 6월 23일 중장 1군단장으로 임명되었다.

    

'한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일제시대 헌병 경찰제도  (0) 2006.02.07
연안파 장령 3  (0) 2006.02.06
소련파 장령 1  (0) 2006.02.06
연안파 장령 1  (0) 2006.02.06
하바로프스크 88국제여단  (0) 2006.02.05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