彭施魯
88독립여단 2대대 3중대장 팽시로의 회고록 발췌
1940년 말 우리는 관동군의 추격을 피해 국경을 넘어 소련 경내로 들어갔다. 소련 변방군에게 무장을 해제당했다. 검사를 마치자 밤중에 트럭 몇 대가 오더니 우리 일행을 하바로프스크로 이송했다. 거기서 목욕하고 잠시 휴식을 취한 다음 시내에서 75km 떨어진 한 병영으로 이동했다.
그 곳에 먼저 도착해 있던 항일련군전사들이 우리를 환영했다.
병영은 산림 속에 은폐해 있었다. 흑룡강 가까이에 위치했다. 부근에 弗亞斯克이라는 작은 마을이 있어서 소련 사람들은 이 야영을 弗亞斯克野營이라고 불렀다.
해삼위 부근의 蛤마(두꺼비 마)塘에도 또 하나의 야영지가 있었는데 南영이라 했다.
이틀 뒤부터 3명의 소련홍군 교도관의 지휘하에 훈련을 시작했다.
1942년 8월 1일 남북야영지를 합병하여 동북항일연군 교도여단으로 개칭했다. 소련군 홍군 사령부에서 정식으로 소련원동군 제88독립보병여단이라는 군번을 수여했다. 여단장은 周保中이고 정치위원은 리조린이었다. 이들 두 사람의 군함은 少校였고 각 대대장과 중대장은 항일연군 간부가 맡고 副급은 소련홍군이 맡았다. 나는 2대대 3중대장으로 상위계급을 수여받았다.
당시 여단 인원은 700명에도 미달하여 당지의 소수민족들과 화교들을 모집하여 1500명으로 확대했다. 이 여단은 주로 漢族으로 구성되어 中國旅라 불렀다.
훈련은 주로 폭파작업, 지형 파악, 무장도하, 스키 타기, 낙하산익히기였다. 그리고 매주마다 문화학습과 정치교육을 받았다.
1945년 5월 독일이 전패하자 많은 홍군부대가 원동으로 집결했으며 그에따라 여단의 식사공급표준도 후방부대에서 제2선 작전부대수준으로 제고됬다. 검은 빵은 흰 빵으로 바뀌었고 이전에는 볼 수조차 없었던 黃油가 식탁 위에 올랐다. 점심 육식공급량도 증가했다.
여단은 십 몇개의 소부대로 나뉘어 국내로 잠입하여 정찰임무를 수행했다. 소부대 인원은 일반적으로 3-5인이었다. 낙하산으로 투하했다. 일본군이 목단강에 대거 집결할 때 목단강대교를 폭파해 적의 퇴로를 차단했다.
소련군이 진공을 개시하자 여단전사들은 소련군 통역으로 배치되어 군작전에 동참했다.
동북점령 후 57개조로 나누어 소련군을 협조하여 각 지방정권의 접관을 도와주었다. 각 조 조장들은 소련군 각 지 주둔군 위수부대 부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나는 소련군 운수기를 타고 가목사로 들어가 가목사 위수부대 부사령관으로 임관했다.
1945년 주보중의 명령으로 여단의 사명을 완수할 때까지 임무에 충실했다.
당시 주보중의 경호원 劉義權의 증언
1945년 7월 10일 주보중과 최석천은 모스크바로 가서 스탈린을 접견했다.
류의권도 주보중의 경호원 신분으로 함께 동행했었다.
크레믈리궁 소 회의실에서 접견했다.
스탈린은 당시 주보중의 소련 이름인 關特拉雪夫 동지라고 호칭했다.
1945년 8월 1일 주보중의 명령으로 88여단 모든 지휘관들의 이름을 고쳤다. 주보중은 黃紹元으로 최석천은 최용건으로 고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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