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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중국복식사

by 8866 2005. 11. 15.

                        중국복식사

 

http://www.anseo.dankook.ac.kr/~ahns/cul-67.html

중국복식의 기본적인 형태는 문명이 발달하기 시작한 시기인 상, 주 때에 마련되었다. 의복의 기본형은 신자의 두 배의 옷감을 반으로 접어 중간에 구멍을 뚫어 머리를 넣고 앞과 뒤를 매어서 입었다. 이 때는 원시적인 무술과 토템의 숭배로 공리효용을 가치의 원리고 하는 사고방식과 자연에 대한 정복의 신념이 비교적 높았으며, 중국후세복식의 자연적인 영향을 주었다. 중국은 광활한 대륙과 유규한 역사, 다양한 민족 구성으로 인하여 각 민족의 풍습이나 사상, 관습이 복식생활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따라서 각 시대나 민족에 따라 같은 명칭의 복식이라도 색채나 형태에 있어서 각각의 특징적인 미의식을 갖추고 있다.

 복식은 입는 사람의 신분과 지위를 반영할 뿐 아니라 일종의 전례나 의식의 상징이기도 하다. 역대 복식의 제도와 색체 등의 제반 변화는 당시 사회의 생활상태, 정치, 경제, 학술 및 사상 등의 요소에 깊은 영향을 받고 있다. 춘추전국시대에는 봉건질서가 붕괴되고 각국이 잇달아 군국주의를 실시하며 부국강병정책에 힘을 쏟으면서 북방민족의 가볍고도 몸에 맞는 기마복식이 중원에 전래되었으며, 이는 한족과 호족의 복식 사이에 일어난 최초의 융합으로 기록된다. 위진시대에 정치체제가 난립하여 현학이 유행되면서 자연의 본성을 추구하는 심리가 생기자, 사대부는 예의와 관습의 구속을 벗어나고자 하여, 혜강, 완함 같은 무리들이 머리에 띠를 두르고 옷섶을 아래까지 열어젖히고 나무신을 신은 채 산림 사이를 노닐었다고 한다. 복식이 그 시대의 사상을 역력히 반영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호가 중국을 어지럽히던 남북조시대는 정치적 암흑기요 혼란기 였으나 예술과 종교방면에서는 오히려 눈부신 성취가 있었는데, 이는 한족과 호족의 복식에 있었던 두 번째의 대융합이라 할 수 있다. 호인과 혈연관계를 가진 이연 일가가 당으로 천하를 통일하자 복조의 귀족자제들의 상당수가 당의 대신이 되었다. 중국의 전통적인 예의나 사상에 대한 구속력이 비교적 약하고, 국세가 강성해져 외국과의 내왕이 빈번해지자, 당의 복식은 마침내 중외의 한복과 호복을 함께 받아들여 더욱 참신하고 아름다워졌을  뿐만 아니라 대담해지고 국제화되었다. 송인은 유학, 도가, 불교의 세 사상을 융합하여 이학을 이루었고, 문학, 사학, 시, 사의 각 방면에서 찬란한 업적을 거두었다. 복식에서는 하늘이나 조상을 숭배하는 제사 의식때 입는 예복은 화려한 기품을 추구하는 한편, 일상복은 간단하고 소박하였다. 만주족의 청이 중원에 들어온 초기에는 민심을 모으기 위하여 명의 복식제도인 한인의 의관을 계승하였으며, 조정에서는 한족과 만족의 신하들이 두열로 열립하였다. 순치 2년에 만청의 제업이 날로 공고해지자 두발을 깎게 하고 복식을 바꾸려는 정책을 강행하였으나, 한인의 완강한 저항으로 점차 물러서게 되었다. 이어 명대 말엽의 유신이던 김지준이 건의한 '십부종'이 받아들여 지면서 한인들은 부분적이나마 전통 복식과 의례, 풍속들을 계속 보존할 수 있었다. 이상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역대의 복식을 탐구하는 것은 바로 사학연구의 일부분이다. 중국은 예로부터 예악의 나라요, 의관의 나라로서, 한 이래로 역대의 복식제도가 모두 역대사서나 문헌 가운데서 발견되고 있다.

 

 1) 상(商), 주(周), 춘추전국(春秋戰國), 진(秦), 한(漢)

 문명이 발달하기 시작한 시기인 상, 주나라 때는 봉건제도, 궁정의식, 조상숭배 등을 중요하게 여겼던 시기로 이에 따라 의례에 필요한 관복제도가 완비되었고, 이 시기에 완비된 관복제도는 이후 중국 관복제도의 기본적인 토대로 자리잡게 되었다. 통일제국의 성립으로 인하여 황제의 복식이 생겨나게 되었고, 이에 따른 통치체제의 정신문화가 예술 전반에 기반이 되었다.

 '주례'에 근거하여 주나라의 관복제도를 보면 주대의 제왕과 백관은 모두 예복을 입었는데 예복은 면류관과 곤복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또한 의식의 내용에 따라 복식도 구별되었다. 허리띠 아래에는 폐슬을 착용하였는데 귀한 자의 존엄을 유지하기 위한 상징이 되었다. 이외에 면복에는 적석(붉은 신)을 착용하였다.

 춘추전국시대는 나라에 따라 각각의 습속이 달랐으나 공통적으로 성해했던 복식으로는 심의와 호복이 있다. 심의는 남녀, 문무, 귀천을 막론하고 모두 입었던 옷의 형태로 양옆에 옷깃을 덧대어 둘러서 띠에 매어입던 옷이다. 호복은 서호의 복장으로 소매폭이 좁아 활동하기 편리한 복식이다.  

  진한시대의 남자복식을 보면, 포, 곤의 , 고, 관, 건, 책이 있고, 신발류는 리가 있다. 진한시기의 남자들은 포를 즐겨 입었다. 한시대는 수구를 축소시켰는데 그것을 '거'라고 하였고 큰 옷소매는 '몌'라고 하였다. 곤의는 벼슬아치들이 평상시 한가로이 거할 때 입었으며 포의 양식과 비슷하다. 두식은 관, 건, 책이 있다. 신발양식인 이는 고두의 비단신으로 위에는 꽃무늬를 수놓았다. 여자복식의 종류로는 심의, 규의, 단의 유군이 있다.

 

 2) 위진남북조

 이시기는 정치적으로 분란의 시기였으나 사회, 사상, 문화의 모든 분야에서 여러 민족이 섞이게 되고 문화적 융합이 이루어지는 시기였다. 따라서 복식도 다양하게 변화하였고 점차적으로 교류되는 시기였다.

 남자복식의 대표적인 옷은 삼이다. 이시기는 큰 소매와 나막신이 유행하였다. 여자복식은 대부분 한나라 시대의 것을 이어받았은데  심의가 유행하였고 신발과 머리장식은 더욱 화려해졌다. 불교의 성행으로 불교문양 복식이 가미되었고 주변국의 장식풍이 받아들여 졌다.

 

 3) 당  

 수, 당시대는 진시황 이후 중국이 통일을 이룩한 시기로 국토가 넓어지고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와도 문화를 교류하여 국제적으로 개방하였으며 경제가 성장하는 등 여러 방면에서 안정과 부흥을 이룬 시기였다. 문학, 예술, 의학, 과학기술의 여러분야에서 전성기를 이루어 복식은 더욱 개방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남자복식의 대표적인 것으로는 원령포삼이 있는데, 단령포삼이라도고 한다. 단령은 중앙아시아의 영향은 받은 것이다. 남자 두식의 대표적인 양식인 복두 이후에 건자를 장유존비를 불문하고 모두 썼다. 보편적으로 오피와를 신었으며, 복두와 단령의 착용시에는 오피육합화를 신었다. 여자복식은 유군복, 반비, 피백, 남장, 호복등이 있다. 유에 비해 조금 길었던 상의로는 삼이 있는데 이것이 일상복식이었다.

 

 4) 송

 당대와는 달리 정치 정세가 안정되지 못하여 분쟁과 타협을 계속하였으며 배타적인 분위기의 복식 특성을 정립해 나가는 시기였다. 아라비아의 여러나라, 페르시아, 인도, 한국, 일본, 인도차이나 반도 등의 나라와 대외무역이 성행하여 외국의 물품들이 중국복식 및 일상생활에 큰 영향을 주었다.

 왕은 대례복으로 원령난삼을 착용했다. 난삼은 당나라 때부터 입혀지다가 송나라 때에 가장 유행한 것으로 상급관리부터 하급관리들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착용하였다. 사대부가 일상복으로 모삼을 입었고 복두는 송나라 사람이 광범위하게 사용하였다. 복건은 서민은 많이 쓰지 않았으나 일반 문인, 유생들이 썼다. 송대의 황후는 적의, 대, 수, 환패, 구룡화채관을 착용하였다. 송대의 부녀복식은 일반적으로 유, 오, 삼, 배자, 반비, 배심, 피백, 군을 입었다. 개두건은 검정 비단으로 만든 것으로 여자의 나들이용 얼굴가리개로 사용하였고 화관과 패식은 남녀 모두 각자의 신분에 맞게 사용하였다.

 

 5) 명

 주원장이 1368년에 명을 건립하여 한족이 실권을 잡자 원대에 행해졌던 언어, 풍습, 복식 등을 모두 금하고 순수한 한족의 문화를 정착시켜 한, 당, 송을 능가하는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따라서 명대에는 중화사상이 절정에 달하였고 전통적인 한족 문화와 복식이 소생하였다.

 명대복식은 당, 송대에 이미 수립되었던 복식제도가 원대에 문란해졌었기 때문에 건국 후 한족의 의례를 회복해 관복제도를 재정비했다. 제도개혁의 범위가 상당히 넓어져 복식도 구체적으로 제한되었는데 이 때에도 다른 시대와 마찬가지로 복식이나 복식도안, 색 등에서 엄격한 제한과 구별이 있었다. 명대에는 황제가 현의로 된 면복을 별로 착용하지 않았으며, 상복에 12장문을 베풀어 곤복으로 입었다. 조복은 포삼, 양관, 운두리, 홀판, 패수 등으로 구분되었다. 상복으로는 반령포를 입었다. 편복은 포, 단의, 군 등을 입었고 강남인은 대부분 포초혜를 신었고, 북방인은 혁화를 신었다. 관복은 황후, 왕비, 명부가 모두 착용했던 것으로 일반적으로 홍색의 대수삼, 심청색의 배자, 채색의 수를 놓은 피자, 주옥금봉관, 금수화문리 등을 착용하였다. 편복은 명부의 한거시와 평민 여자의 의복이었다. 군자는 치마로서 그 안에는 슬고를 덧입었다. 수전의는 명대 여성의 전형적인 복식으로 여러 가지 색깔을 섞어 이어서 만든 민간부녀의 예술품이다. 두식은 계를 에워싸 장식하였다.

 

 6) 청

 청대는 만주족이 설립한 왕조로 건립초기에는 한족 진압정책을 강경하게 실시하였다. 따라서 의복이나 두식 또한 한족의 양식을 금지하였으며 만주족이 혼거함으로써 자연적으로 서로 영향을 주고받아 새로운 형태와 양식이 생겨났으며 서양문물의 도입으로 인하여 의생활 또한 서양적인 색채를 띠게 되었다.

 황제 조복은 명황색의 조복, 조관, 화로 구성되어 있다. 일반 관원들은 화의라고 부르는 망포를 입었다. 남자복식은 포, 마괘, 오, 마갑, 삼, 고를 입었다. 청대에는 일상복에 직접 방형(네모난형) 또는 원형을 상의에 수놓는 특별한 보자의 양식을 취하였는데 이것을 보복이라고 하였다. 상의의 겉옷으로 황족은 사차를 입고 평민은 불개차를 입었다. 신발류는 공복에는 화를 신고, 편복에는 혜를 신었다. 청대의 여자복식은 남자복식과는 달리 만주족의 복식이 각각 유지되었다. 그러나 점차적으로 한족의 여자복식은 만주족의 여자복식에 융화되어 특유의 청대복식을 만들어갔다. 황족명부예복은 기본적으로 남자의 조복과 같으나 하피만을 여자의 전용으로 더 입었고 봉관을 썼다. 청대의 황후조복은 조관, 조포, 조군과 조괘로 구성되어 있다. 고자는 일반여성들이 입었고 한족의 전족은 목저궁혜를 신었고 만주족의 전족은 목저혜를 신었다. 청말부터 입기 시작한 치파오는 태평천국과 중화민국을 거쳐 현재까지도 민속복으로 입고 있다.

* 참고문헌

복식문화.....유송옥, 이은영, 황선진 저.....학문사.....p 65∼84
중국복식 5000년 (上).....손경자 역.....도서출판 경춘사.....p 21∼35
세계복식사 문화사전.....세계복식사 편찬위원회.....한국사전연구회.....p 86∼93

http://www.anseo.dankook.ac.kr/~ahns/cul-49.html

 

          중국 의복 문화의 시대별 흐름

 

고고학적 발굴에 의하면 직물이 6000D년 전에 이미 등장하고 있음이 이미 확인되고 있다. 중국 최초의 고대 직물(織物)은 마(麻)와 갈(葛)의 섬유를 재료로 만들어졌다. 마와 갈의 직물은 섬서성(陝西省), 반파(半坡) 등 신석기 토기유물에 찍힌 문양을 통해 확인되고 있다. 또, 강소성(江蘇省), 오현(吳縣)의 신석기 유적지에서는 세 개의 갈포(葛布) 조각이 발견되었다.

고대 중국의 마 종류 중 의복을 만들 수 있는 것은 대마(大麻)와 저마(紵麻)이다. 대마는 흔히 한마(漢麻)라 하고 저마는 중국초(中國草)로 불린다. 특히 저마는 가는 섬유질과 직조 후 염색이 쉽고 탈색이 어려워 최고의 직물로 꼽힌다.

은상대의 복식문화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상세히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은나라를 지칭하는 문자로 의를 사용하고 있으며, 은민족의 족제(族祭)를 의로 표기하고 있음은 은상민족의 복식 문화가 다른 이민족과 크게 구별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이러한 복식 문화는 주대에 들어서면서 다양하게 발전하였는데. 가장 중요한 문화적 배경은 제사의례였다. 제사의복인 제복은 길제(吉祭)와 흉제(凶祭)에 따라 달랐다. 주대 황제는 면복(冕服)을 입었는데, 의는 검은색으로 상은 담홍색을 입었으며, 옷에는 열두 가지의 문양, 즉 십이복장(十二服裝)을 사용했다. 12복장은 다시 의에 사용하는 6장과 상에 사용하는 6장으로 나뉘는데, 의에 사용하는 것은 일, 월, 성, 산, 용, 화충이며, 상에 사용하는 것은 종이, 조, 분미, 보, 불 등이다. 이들 중 일, 월, 성 등은 밝은 광명을 뜻하고, 산은 은연자중함을, 용은 임기응변으, 화충은 아름다음을, 조는 정결함을 분미는 풍성함을 도끼인 보와 불은 결단과 용맹을 나타낸다.

기원전 221년 진시황은 중국을 통일하고 문자와 도량형을 통일했는데. 이 때 6국의 복식도 통일했다. 진이 망하고 한이 들어서면서는 "진을 이어받아  대부분 그 옛 것을 따랐다."라고 했다.

진, 한 대의 특징적인 복식은 포복(袍服)이다. 포는 길이가 종아리까지 내려오는 긴 옷으로 의와 상의 구분없이 길게 내려입는다. 한대의복의 특징은 색상에 있다. 특별히 색상이 발달한 이유는 전국시대 추연이 제창한 오덕종시설 때문이다. 이 오덕종시설은 목, 화, 토, 금, 수의 오행을 황제의 권위와 도덕, 색깔과 결부시킨 철학이다. 당시 한무제는 자신을 황제의 덕인 토덕으로 연계하여 토덕의 색깔인 황색을 숭상하였다. 머리에 두르는 두건 역시 서민은 흑색, 차부는 홍색, 상복은 흰색, 가마꾼은 황색, 주방 사람은 녹색, 관노와 농민은 청색 등으로 구분하는 등 한대의 복식문화는 색상이 주도하는 특이한 현상을 나타내었다.

위. 진. 남북조로 불리는 시기는 사상적으로 도교가 성해하던 시기이다. 전쟁이 불러 온 무질서와 도교가 추구하는 신선세계에 대한 동경이 당시 복식문화에 잘 반영되고 있다. 특히 빈번한 전쟁은 복식의 풍격을 자주 변화시켰다. 위. 진. 남북조시대에는 북방민족의 의복도 중원에 전해졌다. 북방민족의 복식은 말을 타고 활을 쏘기에 적합한 단의(短衣)와 바지가 중심이었는데. 이를 고습( 褶)이라고 한다. 이 밖에 위. 진. 남북조시대에는 당시 성행한 불교의 영향으로 복식에는 연꽃, 인동초등의 문양이 등장했고, 또 실크로드를 통한 서역의 것들도 이입되어 수왕금, 관화문모직물 등의 도안이 등장했다.

당대에 들어서면서 민족 대융합이 진행되었으며, 복식 또한 여러 민족의 복식이 반영되었다. 또, 당대는 복식의 색상이 관직에 따라 엄격히 집행되기도 하는 등 새로운 복식문화가 자리잡았다. 특히, 수대까지만 해도 금하지 않았던 황색을 당의 고조 무덕 때부터 황제만의 색깔로 규정했다. 그 후 청대말기까지 황색은 황제를 상징하는 색상으로 정착되었다.

송대는 수공업이 발달하면서 방직업이 크게 발달하여 수많은 종류의 견직물과 색채들이 등장했으나, 복식은 당대만큼 풍부하고 화려하지는 않았다. 특히 염색과 자수 등의 공예는 모두 정교하며 색상 또한 영롱했지만, 복식이 당대처럼 개방적이고 사치스럽지 않았는데. 이는 당시 통치사상이던 이학과 관계가 깊다. 당시의 이학은 부자, 군신은 천하의 상리로, "천리를 보존하고 인욕을 멸해야 한다."라는 철학원리를 선양했다. 이러한 철학체계는 미학에도 영향을 주어 송대의 미학은 대단히 이성적인 특성을 지녔다.

원대 몽골족은 기마에 편리한 복장을 하고 있어서 남녀 모두 주로 착수포(소매가 좁은 포)를 입고 있었으며, 둥근 옷깃에 큰 앞자락이 특징이었다. 그 후 원대는 한족의 조복을 채용하면서 점차 당. 송의 제도를 참작하며 복식을 변형시켜 면복(冕服), 조복(朝服), 공복(公服) 등을 정착시켰다. 남자의 복장은 편리함을 따라 발전해갔다. 대부분 비단으로 만들고 우임을 채택했으며 부녀들은 좌임의 포를 즐겨 입었는데, 보랏빛, 금색, 다갈색, 붉은 연지색 등의 색상을 좋아했다.

명대는 민족의 정통성을 세우기 위해 한 대의 제도를 재건하려고 했으며, 따라서 관복제도를 맨 먼저 조정하였다. 명대의 복식은 형태는 물론 도안 등에 이르기까지 모두 구체적으로 제한되었다. 즉, 백성들은 용, 소 등의 동물 문양과 현, 황, 보라색 등을 사용할 수 없었으나, 신종 만력(1573년)이후 금령이 해이해져 한때 곱고 화려한 복식이 유행하기도 했다.

청대는 만주족이 중원을 통치한 시기로 한족들의 문화는 모두 개혁되고 있었다. 청대는 한족의 모든 문화를 바꾸려고 하면서 잔학한 진압정책을 폈다. 황색은 황제의 색으로 황제가 하사한 것이 아니고는 절대로 황색을 입을 수 없었다. 또, 용이 그려진 용포는 황제를 상징했으며, 용 또한 민간에서는 사용할 수 없었고 발톱이 4개인 용은 망이라 하여 사용을 허락하였다.

           #《중국 문화의 이해》P.183~187인용#

 

☞중국 의복의 착용 부위별 분류

중국의복은 착용 부위에 따라 두의(頭衣), 체의(體依), 족의(足衣)의 세가지 형태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 두의(頭衣)

두의란 모자를 의미하는데, 진 . 한 대에 이기까지 모르는 명칭은 없었다. 두의는 남자의 경우는 관, 면, 변이 있고, 여자의 경우는 잠이 있다.

 

 1) 관: 관은 귀족의 성인남자가 쓰고 다니는 모자로, 남자가 만 20세가 되면 관례를 행했다.당시 귀족들은 관례를 지내고 관을 쓰지 않는 것은 예에 어긋나는 것으로 "군자는 죽어도 관을 벗지 않는다." 하는 말이 있는데, 그 만큼 당시 사회에서의 관은 중요했다. 만일 귀족이 잘못을 저지르면 면관사(免冠, 관을 벗으며 사죄함.)를 행했다. 관을 쓰기 위해서는 머리를 묶어야 했기 때문에 성인남자를 뜻할 때 결발, 속발이라고도 했다. 고대중국에 관을 쓰지 않는 사람은 네 부류인데, 어린아이, 범죄자, 이민족, 평민이었다. 어린아이의 경우는 머리를 길게 묶어 내리거나 머리 위쪽 좌우에 묶어 올리기도 했는데, 이것이 뿔과 같다 하여 총각이라고 했다. 범죄자의 경우는 모두 머리를 깍아 버렸기 때문에 창두 라고도 불렸다. 또, 평민은 두건만을 머리 에 두르고 다녔다.

 

 2) 면: 면은 머리 위에 장방형이 판을 쓰고 이마 쪽에 구슬을 달아 내리는 것으로, 천자, 제후, 대부들이 제복이었다. 후에는 천자의 면만 류(류, 면 앞뒤로 내린 구슬장식)를  장식할 수 있었기 때문에 면류라는 것으로 천자를 대신하기도 했다.

 

 3) 변: 변은 면과 비슷하나 류의 장식이 없는 것으로 피변과 작변으로 구분한다. 피변과 작 변으로 구분한다. 피변은 흰사슴 가죽을 여러 장 잇대어 만든 것이다. 작변은 북은  바탕에 검은 무늬를 넣은 것인데, 이 둘은 색깔만 다를 뿐 동일한 모습이다.

 

 4) 잠: 남자가 20세에 관을 쓰던 것처럼 여자는 15세에 잠을 꽂았다. 여자는 먼저 머리를 위로 얹은 후 비단으로 싸서 잠으로 고정시켰는데, 여자가 잠을 꽂게 되면 결혼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여자의 혼기가 되었음을 뜻했고, 이를 급잠 이라고도 했다. 고대 여성은 검고 윤기 있는 긴 머리카락을 아름답게 여겼으며, 이러한 머리를 잠으로 꽂  는 것을 멋으로 여겼다. 따라서, 머리가 검지 않거나 윤기가 나지 않는 여성은 남의 머리카락을 사용하기도 해서, 고대에 이미 체라는 가발이 등장하기도 했다.

 

2. 체의(體衣)

체의란 몸에 걸치는 섬유의복으로 보통 의와 상으로 구분하고 있다. 의는 상의를 뜻하며, 고대에는 짧은 상의와 긴 상의, 홑상의와 겹상의가 있었다. 짧은 상의는 유 또는 요유라고 했는데, 요유는 옷이 허리 정도까지 내려왔다.  상의는 심의(심의, 때로는 상하의가  함께 붙어 있는 경우도 있따. )라고 했는데, 옷이 넉넉하여 신체의 모든 부분을 잘 감출 수 있었다.대개 소순(素純, 무늬가 없는 흰색)의 옷감으로 만들었다.

홑상의는 단( )이라고 했으며, 겹상의는 겹( ) 또는 복(複)이라고 했으며, 겨울에 입는 것으로 솜을 넣은 겹상의, 짧은 웃옷을 복유(複孺)라고도 했다. 또, 겨울에 추의를 막기 위해 입던 한의(寒衣)로 구(구)가 있는데, 구는 가죽으로 만든 겨울용 상의이다.

이밖에 잠잘 때 쓰는 침의(寢衣)가 있다. 침의는 피(被) 또는 금(衾)이라고 불렸는데, 피는 작은 것이고 금은 대피(大被)로 보다 큰 것이며, 이는 옷이 아닌 이불을 뜻했다. 침의는 부자인 경우 수를 놓은 것을 사용하기도 했으며, 가난한 경우 문양없는 백색의 침의만을 사용하기도 해서 포금(布衾) 또는 포피(布被)라고 하며 청빈한 생활을 상징했다.

상은 하의로 군 이라고도 불렸는데, 이는 낮에 입는 활동복이다. 그 크기를 보면 (의례)(상복(喪服)에서 정현(鄭玄)은 "무릇 상의 크기는 앞은 세 폭, 뒤는 네폭이다."라고 주해를 달고 있는데, 현대의 측량단위로 하면 약 4미터에 해당되는 길이이다.

 

 1)남성의 체의의 특성

한 대 남성복장 중 대표적인 것은 포의 일종인 첨유( 유)와 요금포이다. 첨ㅇ는 긴 길이에 옷깃이 교차하는데 오른쪽으로 여미는 것이 있었고, 다른 하나는 요금포로 전신을 몸 뒤로부터 휘감아싸는 방식이었다. 그 후 첨유는 시대에 따라 옷깃, 옷의 길이, 폭, 소매의 장단, 대소가 변화하면서 발전되어 갔다. 당대에 남자들이 일상적으로 입고 있던 복식으로 원렬포삼(圓領布)이 있다. 원령포삼은 북방민족의 복식이며, 또 둥근깃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원령의 명칭을 얻었다. 원령포삼은 문관의 것과 무관의 것이 구별되는데, 문관의 것은 길이가 길어 복숭아뼈 아니면 땅에 닿았고, 무관의 옷은 길이가 짧아 무릎까지 왔으며, 소매는 별로 넓은 편이 아니었다. 명대의 남성민복은 크게 선비들이 입던 사령대금관수삼, 옷깃이 비스듬하고 소매가 넓은 삼)과 일반평민이나 농부들이 입던 삼, 군, 고로 나누어 볼수 있다. 선비들이 입던 삼은 길이가 연장자들의 경우 신발에까지 늘어지는 것도 있었거, 그 후 점차 짧아졌으나 소매는 점점 길어졌다.

청대 남자복식의 기본은 포에 있었으며 특징은 명대의 관의 대수(넓은 옷에 큰 소매)를 고쳐 착수통신(소매가 좁고 몸에 붙는 옷)으로 만든 데 있다. 이 포는 황족은 옆의 네 군데를 터서 입었으나 평민은 트지 않았다. 소매는 손목이 좁아 전수라고 하기도 하고 말발굽과 같이 튀어 나오 있어 라고도 했는데, 이는 북방의 추위를 피하기 위해 손을 덥도록 고안된 것으로 수렵을 하고 활을 쏠때에는 걷어올려 활동에 장애를 받지 않았다. 예를 취할때는 전수를 내려야 했고, 예가 끝나면 다시 걷어올려야 했다.

 

 2) 여성의 체의의 특성

여성의 체의를 한 대의 여성복식은 이전의 심의를 이어받아 입고 있었는데, 크게 보아 남성의 포복과 유사한 점이 많았다. 한 대 여성들의 심의는 허리나 둔부에 비단띠를 도여매는 것이 특이했으며, 의령이 매우 깊어 안에 입는 내의와 중의가 모두 드러나 심의의 의령과 함께 모두 드러났기 때문에 이를 삼중령심의 또는 삼중의 라고 했다. 또, 당시의 복식은 옷깃을 서로 다른 색깔로 붙이기도 했기 때문에 중연의 라고도 불렸다.

위. 진. 남북조시대 부녀들은 남자들이 이미 입지 않고 있던 심의를 여전히 즐겨 입었다. 여성 심의의 변화는 앞자락에서 일어났다. 아랫폭은 삼각으로 재단하여 만들었고, 위는 넓고 아래는 뾰족하여 여러 겹으로 겹쳤다. 당시 부녀들은 꽃을 수놓은 신발을 신고 금과 비취 또는 꽃으로 머릴 장식하는 등 화려한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이는 당시 군대를 따라다녔던  기녀들이 일으킨 유행으로, 귀족들의 부녀와 기녀들이 앞다투어 모방을 했다.

수. 당. 오대 시기의 여자복식은 중국복식사에 있어서 가장 정교하고 화려한 시기로 세인을 놀라게 했는데, 중요한 것으로 유군복 남장, 호복의 변형을 들 수 있다. 유군복은 단유(짧은 저고리) 또는 삼을 입고, 아래는 장군(긴 치마)을 입으며, 반비(짧은 덧옷), 또는 피백(어깨에 걸치는 비단)을 걸치는 형식의 복식이다. 남장은 남자복식을 입는 것으로 역시 당대 여성복식의 큰 특징이다. 당시 여성들이 남성복식을 즐겨 입은 것은 초탈한 먹을 내기 위한 것과 당시 이복에 남녀의 차이가 많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호복은 당대에 서역과의 관계가 빈번해지면서 자연스레 유입된 복식으로 당대 부녀들의 이목을 일신시켰다.

호복의 특징은 소매가 좁고 옷깃이 넓게 열린 것이었으며, 혼타모라는 끝이 뾰죽한 모자를 함께 쓰기도 했다. 당대 부녀의 화려한 복식과 함께 특기할만한 것은 면장으로 불리는 화장술과 전족이었다. 당시의 기녀들은 얼굴에 둥근점, 달, 돈, 새, 매화 등의 그림을 그리기도 했는데, 궁녇ㄹ과 일반 부녀들도 이를 흉내내었으며, 특히 이마 위에 매화를 그리는 매화장이 크게 인기가 있었다. 또, 입술에 검정기름을 발라 마치 슬프게 울고난 모습을 만드는 것도 인기 있는 화장술이었다. 전족은 오대에 주로 등장해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1천여년 동안 유행했는데, 초생달과 같이 작은 발로 연꽃 위에선 춤을 출수 있다는 표현이 유행하기도 했다. 송대의 부녀복식은 유, 삼, 반비, 군 등의 대부분 당대의 것을 답습했으나, 틎깅적인 것으로 배자가 있다. 배자는 옷깃이 대칭으로 나란한 것인데, 소매는 넓고 좁은 두 가지가 있었고, 길이는 무릎을 중심으로 오르내렸다. 또, 말흉이라는 속옷이 있었는데, 오늘날의브래지어와 비슷한 것이었다. 명대 부녀들의 복식은 송대의 것을 대부분 답습했으며 대표적인 것은 피자가 있다. 피자는 채색의 수를 놓아 황후 등 귀족들이 입었는데, 채색구름, 바닷물, 붉은 태양을 수놓았고, 문양에 딸라 신분의 귀천을 나타냈으며, 넓이는 3촌 3분, 길이는 7척 5촌이었다. 일반적인 것으로 자화(자색꽃무늬)가 있는 거친 포로 옷을 지었는데, 황금색과 대홍, 아청, 정황색등의 자수는 금지되고, 자색, 녹색, 준홍색 등만을 사용했다. 명대의부녀들은 바지인 고를 거의 입지 않았으며, 대부분 치마인 군을 입었다. 명대복식 중에서 특이한 것은 여러 가지 색의 천을 이어서 만드는 수전의를 들 수 있는데, 수전의란 조각조각이 마치 논의모습과 같기 때문에 붙인 명칭으로 백가의 라고도 불렸다. 주로 아이들의 옷이나 이불과 요를 만드는데 활용되었다. 청대 부녀의 복식은 남자와 달리 한족의 복식문화를 견지하고 있었는데, 따라서, 청대 초기 부녀들의 복식은 명대의 것과 상통하고 있었으나, 시일이 지나면서 점차 청대 복식의 특성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청대 부녀복식 중 특색 있는 것으로는 기포를 들 수 있다. 기포란 기녀의 포라는 뜻이다. 크기가 넉넉하고 허리는 평평하며 곧았고, 길이는 길어 발끝까지 달했는데 모두 수를 놓았으며 옷깃은 우측으로 여몄다. 그러나 기포는 점차 청대 말기 외래 문명과 접촉하면서 새로운 모습으로 개량되어 갔다.

 

3.족의(足衣)

족의는 버선과 신발류로 나뉜다. 버선은 말(襪)로 <설문해자>에서는 "말은 족의이다."라고 설명하고 있으며, 면이나 비단 또는 삶은 가죽으로 만들었다. 말은 귀족들이 비단으로 만든 것을 신었으며, 가난할 경우 맨발로 생활을 했다. 신발류에는 구( ), 리(履), 극( ), 석( ) 등이 있었다. 구는 보통 초(草), 마(麻), 피(皮) 등을 재료로 하는 가장 오래 된 신발이다. 즉, 구와 이는 동일한 물건이 시대에 따라 변모한 명칭이며 현대에는 혜(鞋)로 바뀌었다. 풀로 엮어 만든 구는 초구(草 ) 또는 관구(菅 )라고 하는데, 초구는 대부분 여름에 신었으며 겨울에는 가죽으로 만들어 신었다. 석은 비단이나 마로 바닥을 대고 거기에 나무를 붙인 것으로 , 제후와 황제 역시 석을 신었는데, 적석, 흑석, 백석의 세 가지 색깔을 구비하여 신었으며 왕후는 흑석, 청석, 적석을 신었다. 극은 고대 중국의 목리(木履)로 나무로 깎아 만들었으며, 바닥에는 앞뒤로 두 부분이 튀어나오게 했는데, 이를 전치(煎齒), 후치(後齒)라고 했다. 위.진. 남북조 때의 사대부들은 극을 손수 깎아 신는 것이 유행이었으며, 또 멋을 부리고 방습을 위해 동물의 기름을 덧칠했는데 이를 납극(臘 )이라고 했다.

#《중국 문화의 이해》P.188~198인용

 

☞계층별, 성별에 따른 의복 생활

황제와 관리들의 의상은 온갖 정성이 다 들어간 매우 값진 옷이라는 점이 특징이다. 황제가 쓰는 왕관은 기원전 2698년 황제에 의해 최초로 만들 어졌다고 한다. 왕관의 옆테두리는 귀를 가렸고, 앞면에는 보석을 매달아 천한 것을 보아서는 안 되는 직조공을 상기시키고 있다. 귀를 가리는 이 유는 중상 모략의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함이라고  한다. 서기 713년 당나라의 현종은 즉위 2년 째되 던 해 사치 금지령을 내려 당시 유행하던 화려한 옷들을 입지 못하게 하였다. 그 자신 궁궐 안에다 거대한 화롯불을 피워 수놓은 값진 옷들과 보석들 을 태움으로써 모범을 보이기도 하였다. 그러다 그 는 후에 위풍당당한 옷을 즐겨 입기 시작하였고,  육체적인 쾌락에 몰두하더니 급기야 아들을 위하여  왕위를 포기하기까지 하였다.

중국 군인들은 생가죽에 금속을 씌워 만든 쇠사슬 갑옷이라든가 동판 갑옷 및 투구들을 착용하였다. 일반 병졸들은 삼십 내지  육십겹의 나무 껍질 종이로 속을 채운 상의(JACKET)를 입었다. 오늘날 육군은 하늘색 또는 황갈색의 군복을 입고, 해군은 감청색 군복을 입는다.

중국 남성들은 대부분 쪽빛 물을 들인 목면 옷을 입는데, 부유한 사람들은 이 위에 비단 외투를 걸치기도 한다. 상류층은 여름에 얇은 비단이라든가 갑사 또는 모시로 짠 기다란 까운을 착용하는데, 이 옷은 오른쪽 가슴께에서 깃을 여미게 되어 있으며, 위로부터 아래까지 이삼 인치 간격으로 헝겊 단추라든가 금 또는 수정 단추를 달아 옷을 채운다. 하의로는 느슨한 바지를 입고 있다. 여기에 비단 또는 목면 버선과 두꺼운 창을 땐 천, 이를테면 공단 등으로 만든 신을 신고 비단 또는 목면 모자를 쓴다.

여성용 의상은 대체로 길다란 옷 위에 소매가 넓은 비단 또는 목면의 웃옷을 걸치고, 그 밑에 헐렁한 바지를 입는데, 발목에서 잘룩하게 졸라매기도 한다. 발을 죄는(전족) 풍습은 이제 서서히 사라져가고 있다.

중국인들은 특히 정교한 장신구들을 좋아하기 때문에 보석 등에 커다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옛날 중국인들의 보석들은 상징적인 그림들로 아주 화려하게 세공되어져 있기 마련이다.

#《중국 문화 중국 정신》p.359~372인용

 

 ☞중국 복식 금기

중국에는 "십리에서 사람을 알아본고, 백리에서 옷을 알아본다."라는 속담이 있는데, 이는 의복과 사회적 가치 판단의 밀접함을 반영한다. 또, 중국인들은 의복의 색상, 재료, 형태, 제작 등에 관한 많은 금기들이 있으며, 그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은 색상이다.

중국인들이 가장 금기시하는 색상은 황색, 자색, 향색 등의 이른바 귀색(貴色)이다. 이들 색상은 대부분 황색이나 귀족을 대표하던 색상들로 특히 황색은 천자를 상징하였으므로 민간에서 황색옷을 입으면 반역의 오해를 받았다. 자색의 경우는 송대 귀족들의 색상으로 변해  역시 민간에서 함부로 사용하 수 없었고, 향색은 청대에 귀색으로 채택되어 역시 민간에서의 사용이 금지되었다.

중국 민간의 의복 색상 중에서 녹색, 벽색, 청색은 천색(賤色)으로 원. 명. 청대에는 창기와 배우등의 천한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만이 입었다. 또, 원대 이후에는 부인이 기녀 노릇을 하거나 불륜의 관계에 빠진 남편을 녹두건로 불렀다.

중국인들이 천색 외에 또 꺼리는 것으로 흉색(흉색)이 있는데, 이것은 백색과 흑색으로 모두 상장례와 관계가 있다. 따라서 ,혼례 등에는 순백색과 순흑색을 절대 금기시하며 길함을 상징하는 붉은색을 주로 사용한다.

그러나, 주대에는 염색기술이 크게 발달하지 않아 일반 민간에서는 대부분 백색옷을 입었으며, 상복의 경우는 거침과 세밀함으로 구분하였다

재료는 일반 민간의 복식의 경우는 특별한 금기가 없으나 수의를 만드는 경우 먼저 단(비단의 종류)을 사용하지 않았다 .이는 단(緞)의 음이 '단자절손(자손을 단절시킴)'의 음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또,양포(농가에서 자가 생산한 포)를 쓰지 않았던 것은 양포의 양(洋)이 음양의 양(陽)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구의는 죽은 사람을 음지로 보내는 것인데, 양자가 들어간 양포를 쓰게 되면 양지로 떠도게 된다는 미신 때문이다.

#《중국 문화의 이해》p.230~232인용

 

☞중국 현대인의 의생활

중국은 지역과 민족의 측성에 따라 의복구조가 천태망상이나 그 중 전통적으로 중국 복장을 대변하는 것으로 치파오와 중산복이 있다.

치파오는 워내 만주적의 전통복장으로 되어 있다. 원통형으로 다리 옆부분이 갈라지고 앞에는 단추가 달려 있으며, 칼라가 목부분을 둘러싸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실용성이 없어 지금은 일상생활에서 입고 있는 중국인을 보기가 어려우며, 다만 고급식당의 복무원, 쇼장의 안내원들은 많이 착용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중산복은 손문선생이 현재 생활에 편리하게 고안한 옷으로 지금까지 현대 중국인이 가장 애용하는 복장이었다. 현재는 농촌이나 나이가 많은 사람의 입은 모습을 볼 수 있으나 젊은 사람이 입은 모습은 보기가 힘들다.

지금은 젊은 계층을 위주로 서양의복 문화가 널리 퍼져있다. 예전의 중국 도시, 농촌의 거리 풍경은 회색과 검은색의 연속이었으나 개방 이후 유흥업소 등의 접대부, 대학생 위주로 멋내기 옷을 많이 입게 되어 이젠 중국 어느 도시를 가던 예쁜 옷을 입은 중국인을 흔히 볼 수 있다. 데도시에서는 세계 최신 유행이 바로 수입되는가 하면 현대미와 중국 전통미를 결합하는 방향으로 발전되고 있다.

 

중국복식

http://www.anseo.dankook.ac.kr/~ahns/cul-09.html

 중국 복식의 기본적인 형태는 문명이 발달하기 시작한 시기인 주(周)때에 마련되었다. 의복의 기본형은 신장의 두 배의 옷감을 반으로 접어 중간에 구멍을 뚫어 머리를 넣고 앞과 뒤를 매어서 입었다. 이때는 원시적인 무술과 토템의 숭배로 공리 효용을 가치의 원리로 하는 사고방식과 자연에 대한 정복의 신념이 비교적 높았으며, 이것은 중국 후세 복식의 자연적인 사상에 영향을 주었다.

 중국은 광활한 대륙과 유구한 역사, 다양한 민족 구성으로 인하여 각 민족의 풍습이나 사상, 관습이 복식생활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따라서 각 시대나 민족에 따라 같은 명칭의 복식이라도 색채나 형태에 있어서 각각의 특징적인 미의식을 갖추고 있다. 여기서는 명(明),청(淸)나라에 복식에 대하여 소개한다.

 

  명(明)

 주원장이 1368년에 명을 건립하여 한족이 실권을 잡자 원대에 행해졌던 언어·풍습·복식 등을 모두 금하고 순수한 한족의 문화를 정착시켜 한(漢), 당(唐), 송(宋)을 능가하는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따라서 명대에는 중화사상이 절정에 달해있었고 전통적인 한족 문화와 복식이 소생하였다.

명대복식은 당(唐), 송(宋)대에 이미 수립되었던 복식제도가 원(元)대에 문란해졌기에 건국후 한족의 의례를 회복해 관복제도를 재정비했다. 제도개혁의 범위가 상당히 넓어져 복식도 구체적으로 제한되었는데 이때에도 다른 시대와 마찬가지로 복식이나 복식도안, 색 등에서 엄격한 제한과 구별이 있었다. 명대에는 황제가 현의된 면복을 별로 착용하지 않았으며, 상복에 12장문을 베풀어 곤복으로 입었다. 관리의 조복 규정을 대단히 엄격하였다.명대의 관리상복으로는 반령포(半嶺袍)를 입었으며 반령포에는 가슴 앞과 등 뒤에 보자를 달았는데 보자문양으로서 신분의 등급을 구분하였고 동물을 표지로 삼았다. 보자와 관복의 문양도 등급간에 차이를 두었는데 이 규정은 정하는 때에 따라 바뀌어지기도 하였으나 아주 급격한 변화는 없었다.

편복(便服)은 각 신분에 따라 다소의 차이가 있었는데 그 종류는 포(袍), 단의(短衣), 군(裙) 등을 입었다. 사인 등 선비는 사령대금관수삼을 입었는데 이것은 우임으로 된 큰 깃이 사선으로 여며지고 소매가 넓은 포의 형태이다.

 여자복식 관복은 황후, 왕비, 명부가 모두 착용했던 것으로 일반적으로 홍색의 대수삼, 심청색의 배자, 채색의 수를 놓은 피자, 주옥금봉관, 금수화문리을 착용하였다. 피자는 당에서도 성행했던 피백을 칭하는 것으로 송에서도 피백으로 사용하였는데 명에서는 피자라고 하여 사용되었다. 여기에는 채색구름, 바닷물, 붉은 태양 등을 수놓기도 하였는데, 피자의 무늬는 품계에 따라 달랐다.편복은 명부의 한거사와 평민 여자의 의복으로, 기본적인 것은 당송의 옛 제도를 따랐다. 일반 부녀는 대부분이 자화조포로써 옷를 지었는데 금의 사용을 허가하지 않았다. 배자의 형식은 송나라의 배자와 그 형태가 비슷하나 더욱 다양하게 발전하였다. 비갑은 원래 유목 민족들이 경쾌하게 입던 겉옷으로서 명대 여인들이 경쾌하게 즐겨 입었다. 군자는 치마로서 그 안에는 슬고를 덧입었다. 군자의 양식은 8내지 10폭의 재료를 사용하였는데, 허리에 수십가락의 주름을 잡기도 하였다. 그외에 명대 여자복식에 수전의가 있는데, 수전의는 명대 여성의 전형적인 복식으로 여러 가지 색깔을 섞어 이어서 만든 민간부녀의 예술품으로 백가의에도 사용하였다. 이것은 한국의 조각보와 유사한 양식으로 볼 수 있다

 

  청(淸)

  청대는 만주족이 설립한 왕조로 건립초기에는 한족 진압정책을 강경하게 실시하였다. 따라서 의복이나 두식 또한 한족의 양식을 금지하였으며 만주족의 양식대로 머리를 깎게하고 복식을 바꾸도록 하였다. 이 시기는 한복과 만주족이 혼거함으로써 자연적으로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아 새로운 형태와 양식이 생겨났으며 서양문물의 도입으로 인하여 의생활 또는 서양적인 색채를 띠게 되었다.  남자복식에서 황제의 조복은 용포로서, 용포는 청대에 황제만이 입었던 관복이었다. 일반 관원들은 화의라고 부르는 망포를 입었다. 이것은 관원과 명부가 외괘 안에 입던 복식이었으며, 이들의 등급은 망수나 망조수로 구별하였다.남자복식도 만주족과 한족의 복식이 함께 혼용되었는데 청대의 남자복식은 포(袍), 마괘(馬 ), 오( ), 마갑(馬甲), 삼(衫), 고(袴)를 입었다. 모든 복식은 소매를 좁게 하고 몸통도 불필요한 여분을 착수통신(窄袖筒身)으로 만들었다. 이것은 주로 광활한 대륙의 기마생활에 편리하게 정착된 양식으로 볼 수 있다. 의금은 단추로 매게 되었고, 령구는 무령에다 령의를 더하는 식으로 변하였다. 청대에는 일상복에 직접 방형 또는 원형을 상의에 수놓는 특별한 보자의 양식을 취하였는데 이것은 보복(補服)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붙이는 보자의 양식은 명대의 것과는 차이가 있다. 보복은 청대 관복 중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포보다 약간 짧으며 대금, 수단이 평평한 것으로 앞에 보를 수놓은 것이었다. 이때에도 등급에 따라 보자의 도안이 달랐다. 포와 오는 일종의 상의의 겉 옷으로 대부분이 개차였는데, 황족은 사차(四 )였고 평민은 불개차(不開 )를 입었다. 그중 개차대포는 전의라고 불렀는데 수구 밖으로 돌출한 전수는 그 모양이 말발굽과 비슷하였기 때문에 속칭 마제수(馬蹄袖)라고 하였다. 그 모양의 연원은 북방의 악천후와 추위를 피하기 위한데 있으며 수렵을 하고 활을 쏠 때에는 걷을 수 있어서 행동에 장애를 받지 않았다. 결금포(缺襟袍)는 말타기에 편리하도록 전금의 아랫폭이 갈라졌고 오른쪽이 왼쪽에 비하여 1척 정도가 짧았다. 이것을 행장(行裝)이라고도 하였으며, 말을 타지 않을 때에는 짧은 앞쪽을 옷 사이로 단추로 잠갔다. 매괘는 길이가 허리보다 짧은 웃옷으로 소매는 팔꿈치 정도 길이로 행괘(行 )라고도 하며, 여밈은 주고 끈을 사용하였다. 예복용으로는 심홍, 장자, 심합, 논, 회 등의 색을 사용하였고, 황색은 황제에게서 하사받은 것 이외에도 착용할 수가 없었다. 마갑은 소매가 없는 짧은 옷으로 배심 또는 감견이라고도 하였으며, 남녀가 모두 입었고 처음에는 속에 입었지만 후대에는 겉에 착용하였다. 령의는 일종의 깃의 형태로 령이 없는 예복에 달았던 것을 말한다. 모양이 소의 혀와 같아서 우설두라고도 하였다. 여름에는 사, 겨울에는 가죽,또는 융을 사용하였으며, 단추로 매어 사용하였다. 피령은 목과 어깨에 두르는 것으로 관원들이 조복 위에 둘렀던 것으로 수를 놓아 장식하였다. 청대의 남자들의 바지는 허벅지가 넓은 장고를 주고 착용하였고 퇴대를 매었다. 수복은 량모와 난모가 있었고 관원들은 관정을 보석으로 장식하여 등급을 구별하였다. 여자복식은 남자복식과는 달리 한족과 만주족의 복식이 각각 유지되었다. 그러나 점차적으로 한족의 여자복식은 만주족의 여자복식에 융화되어 특유의 청대복식을 만들어갔다. 황족명부예복은 기본적으로 남자의 조복과 같으나 하피만을 여자전용으로 더 입었고 봉관을 썼다. 하피는 청대에 이르러서는 배심과 같이 넓어졌고 가운데 금수를 놓아 등급을 구별하였으며, 아래에는 술을 달았다. 봉관하피는 평민 여자가 결혼할때에도 입을 수 있었다. 청대의 황후 조복은 조관, 조포, 조군과 조괘로 구성되어 있다. 조포는 명황색 단으로 만들고, 위에는 구룡과 구름을 함께 수놓았으며 바닷물과 팔보를 함께 수놓았다. 목둘레와 소매는 석청색을 이었고 금으로 연을 둘렀고, 조포 의 어깨위에는 용문을 수놓은 피령을 덧둘렀다. 조포 위에 입은 조괘는 소매 없는 대금, 무령으로서 그 형태가 배심과 유사하며, 겉에는 용, 구름, 팔보 등을 수놓았다. 고자는 일반 여성들이 입었던 것으로 허리띠를 왼쪽으로 늘어뜨렸는데 초기에는 좁았으나 후기에는 넓고 긴 것을 좋아하였으며, 띠 끝에 꽃무뉘를 수놓아 장식하였다. 운견은 청 초기에는 부녀들이 예를 행하거나 신혼때의 복식으로 입었고, 말기에는 어깨에 늘어뜨리는 형태가 되었는데, 이것은 의복이 더러워지는 것을 방지해주는 역할을 하였다, 정말부터 입기 시작한 치파오는 태평천국, 중화민국을 거쳐 현재까지도 민속복으로 입고 있다.

 지금까지 알아본 중국의 역사를 장식하였던 나라들의 복식문화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중국은 오랜 문명국 가운데 하나이며, 땅이 광활하고, 인구가 많고, 역사가 오래되었다. 그렇기에 문화, 과학기술 등의 큰 성과를 축적되어 왔고, 그 연원이 유구하다. 뿐만 아니라 인류문명의 지표가 되는 복식은 특히 전형적인 동방의 아름다움을 잘 나타내며 세계복식 가운데에 우뚝 솟아 있다. 중국 복식의 기원은 대단히 빠르며 인류의 탄생을 따라서 형성되기 시작하였으니 400만년 이전으로 추산할 수 있다. 만약에 실물로부터 살펴볼 수 있는 산정동인(山頂洞人)의 목걸이 장식을 근거하면, 18,000년이 되며 오랜 옛 선민의 전설에 이르면 더욱 뜻이 있고 흥미가 있다. 중국복식 품격은 광활한 강역을 바탕으로 하여 지역의 차이를 형성하였으며 남의 것을 모방하지 않았다. 최근 몇 년 동안의 국민생활 수준이 대폭적으로 높아지게 되면서 복식에 대해서도 새로운 요구를 하게 되었다. 청년은 현대화를 추구하고, 중년은 몸에 맞는 아름다운 복식을 희망하고 있다. 그러므로 복식미를 주장하는 사조가 전국을 퍼지게 되었다. 90년대의 복식을 전망하면 실용성보다는 미를 중시하고, 공통성보다는 개성을 중시하고, 서양의 모방보다는 시대감각을 구비한 민족성을 중요시할 것이다. 그리고그들 새로운 복식의 재료는 물론 새로운 디자인이 끊임없이 출현하게 될 것이다. 복식은 예술품으로 민족 문화의 상징이며, 생활의 새로운 광채를 더하게 될 것이다.

   참고자료

『중국복식사』  華梅(지은이),       경춘사,   1992

『복식』        조효순(지은이),      대원사,   1990

『복식 문화』유송옥 외 2명(지은이),  교문사,   1997


 
출처 : 연어알 |글쓴이 : 북극해 [원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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