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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몽골제국(蒙古帝國)

by 8866 2005. 11. 16.
몽골제국(蒙古帝國)  
 

 

[몽골제국]


우이구르(오르콘)제국이 840년 키르기즈에 의해 멸망당하여 수 개로 분열된 후, 우이구르부족은 감주국, 사주국, 고주국 등 소왕국으로 우이구르 집단의 명맥을 유지해 나갔다. 이 후기의 우이구르 공국들은 중앙스텝, 즉 몽골민족의 중심 활거지역에는 직접적인 영향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있었다. 몽골민족의 중심 거주지역은 셀렝가, 오논, 케둘렌, 오르콘, 이르티쉬 등의 강들이 누비고 있는 대체로 오늘날의 몽골 지역이었다.


한편 튀르크계 돌궐제국과 우이구르제국이 멸망하였다고 스텝지대에서의 정치 활동이 종료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 기간은 분열과 정쟁(政爭)과 내란의 과도기였으며, 그 결과로 발생된 세력의 공백이 중국 변방에 제국의 출현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중앙 스텝은 10세기와 11세기 전 기간을 통하여 비교적 체계가 잡힌 우이구르족, 탕구트족, 거란족 등 군소 半정착국가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정착국가들의 관심은 주로 자신들의 변방국가들이었기 때문에 자연히 중앙스텝에 대해서는 소홀하게 되었고, 스텝의 서쪽에 있던 튀르크계 제국들도 극심한 내부 분열로 인해 중앙스텝에 대하여는 무관심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중앙스텝에 대한 세력의 공백기에 몽골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 것은 유목민족제국사에서 흔히 재현되는 것으로 힘의 공백을 메꾸는 새로운 제국의 탄생인 것이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이미 이전부터 이 지역에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던 메르키트, 나이만, 타타르, 맹고(萌古)족 등의 부족들이 모두 몽골계일 가능성이 많다.


몽골제국은 대체로 3기로 구분될 수 있다. 제 1기는 신생 부족 연맹의 지도자였던 테무진이 1206년 귀족들의 회의인 쿠릴타이에서 지도자로 추대받고 '칭기스칸' 이라는 왕명을 채택한 때부터 몽골의 통치 지배 체제를 확고히 구축한 몽케가 사망한 1258년까지의 창건과 평정 시대, 제 2기는 지리적으로 4개의 상이한 지역으로 분리되었던 시기로 쿠빌라이를 황제로 즉위시킨 쿠릴타이로부터 카이두의 추종자들이 최후로 톨루이 가문에 항복하였던 1260년부터 1303년까지의 제국시대이다. 그리고 제 3기는 제국의 쇠퇴와 멸망이 점차적으로 시작된 1355년경까지로 나뉜다.

 


 

1) 제 1 기 : 창건과 평정(1206 - 1258)


몽골 세력의 등장은 후일에 칭기스칸으로 추대된 테무진의 등장과 동일한 의미를 갖는다. 칭기스칸은 1155년에서 1167년 사이의 어느 날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칭기스칸이 출생할 때, 그의 부친 예수게이(Yesugey)는 타타르족의 두목 테무진 우게를 포로로 잡았고, 기념으로 적장의 이름을 따서 아들의 이름을 테무진이라 지었다. 이는 돌궐족과 몽골족에서 흔히 발견되는 관습으로 신생아의 이름을 출생 직전에 발생한 중요한 사건에 관련하여 이름을 짓거나, 산모가 해산한 후 제일 처음으로 본 물건의 이름으로 짓는 것이다. 테무진은 9세때에 그의 부친이 타타르인에 의해 독살되면서 빈곤과 어려움이 계속되는 청소년기를 보내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스텝의 환경을 극복하고 생존하였을 뿐 아니라,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을 모아 조직을 구성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양아버지 토그릴칸의 도움으로 몽골 부족들을 통합하고, 1203년 그의 추종자 19인과 함께 서약한 맹약을 거쳐 1206년 봄, 오논강에서 열린 몽골 부족들의 부족장 회의인 쿠릴타이에서 몽골족 최고의 지도자로 추대되었던 것이다. 그 때 그에게는 '칭기스칸'(바다의 왕)의 칭호가 주어졌는데, 그는 바로 이 이름으로 전 세계에 돌풍을 몰고 온 강력한 군주, 두려움의 존재가 되었다.


칭기스칸은 몽골제국을 창건한 후 주로 경제적인 이유로 인해 스텝의 독점 정복과 주위 정착국가들에 대해 세력을 확장하려는 야망을 갖게 되었다. 몽골의 일차적인 관심은 아시아 문화와 경제의 주도자였던 중국이었다. 당시 중국에는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가 있었다. 중국 정복을 위해서는 탕구트의 지배 지역을 통과해야 했기 때문에, 당초 칭기스칸은 탕구트 정복 계획은 없었으나 중국과의 전쟁에 앞서 1207년 탕구트와 먼저 전쟁을 치루어야 했었다. 그러나, 강인한 탕구트의 군사력에 부딪쳐 전쟁은 별 성과없이 끝났고, 칭기스칸은 1209년의 제 2차 침입을 감행하였다. 결국 이 전쟁은 칭기스칸의 승리로 끝났고, 탕구트의 군주는 몽골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협조를 약속하게 되어 중국으로 통하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몽골제국은 1211년 봄, 금나라에 대한 침공을 개시하였다. 이 전쟁은 중국의 한민족과 유목민족인 몽골족의 전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같은 알타이계 민족인 몽골족과 퉁구스계 여진족과의 싸움이었다. 이로부터 중원 정복은 1234년, 즉 칭기스칸 사망 후 근 10년 후까지 계속되었다. 칭기스칸은 중국 정복을 보지 못하고 탕구트의 반란을 제압하려 간 어느 여름 병사하고 말았다.


여진족(女眞族)의 금(金)나라는 몽골군에게 점령당하고 정복당한 최초의 정착국가였다. 이것은 몽골민족에게 뿐만 아니라 역대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족제국으로서도 최초의 정착왕조정복이라는 면에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중동과 이서지역 정복」


1206년을 전후로 하여 칭기스칸의 조정에 중동 지방의 이슬람 콰레즘제국으로부터 사절들이 왔다. 이들은 단순히 무역적인 관심과 그 가능성 타진에만 목적이 있었는데 반해, 몽골 조정은 이들을 외교적 차원에서 이해하여 외교사절로 극진히 예우했으며, 이들이 귀국할 때에 방문에 대한 예의와 콰레즘과의 관계 증진을 목적으로 칭기스칸의 친서와 함께 몽골귀족 일행을 동행케 하여 콰레즘 국왕을 방문하도록 하였다.


칭기스칸은 처음에 콰레즘이나 그 이서지역을 정복할 의사는 전혀 없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몽골의 사절단이 콰레즘국에서 두차례나 걸쳐 잔인하게 처형당하게 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아마도 오만하기 그지없는 콰레즘왕이 새로 부상한 스텝제국 몽골의 존재를 너무 무시했던 것 같다. 몽골은 1218년부터 그 보복 전쟁을 중동과 이서지역에서 시작하였다. 전쟁의 목적은 다분히 콰레즘에 대한 보복의 성격을 가진 것이었고, 몽골군은 거센 공세로 콰레즘국을 멸망시켰을 뿐 아니라 중동지역의 이슬람 제국의 대부분을 정복하였다.


도망하는 콰레즘왕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부하라, 사마르칸트를 비롯하여 아르메니아등의 전지역이 몽골군에게 함락되자, 중동의 다른 이슬람 국가들은 극심한 심리적 공포를 느끼게 되었다. 무슬림군대에는 이미 이전에 이곳에 정착한 같은 유목민족인 튀르크계 군인들이 많았으나, 몽골군의 침입에 효과적으로 저항한 군대는 하나도 없었다. 콰레즘에 대한 칭기스칸의 침공작전으로 몽골군은 페르시아지역 뿐 아니라, 러시아도 침입하게 되었다. 코카사스를 횡단한 몽골군은 큽착스텝에서 1230년 5월 큽착-러시아 연합군을 패퇴시켰다. 이들 몽골군은 별 저항을 받지 않고 계속 북쪽으로는 노브고로드, 서쪽로는 드니에프르강까지 진격해 들어갔다.

 


 

「오고데이의 통치」


한편, 칭기스칸 사망 후 그의 셋째 아들 오고데이(Ogodei)에 의해 계승된 몽골 제국은 정복 전쟁을 계속하면서 동시에 무력국가로부터 중앙 집권적 관료국가로 서서히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오고데이는 등극하자마자 칭기스칸이 시작한 정복사업을 재개하고 강화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금조의 분쇄(1233년)와 중원 및 고려 평정, 페르시아의 콰레즘 완전 제거와 함께 중동의 이슬람 압바스왕조 판도내로의 침투 확장, 풍부한 러시아 곡창 지대와 동유럽(폴란드, 헝가리등)까지 정복 사업을 수행하였다.


몽골은 정복한 지역들의 특성들을 최대한 살려주면서 조공을 바치게 하는 형태로 점령지 통치 행정을 실시하였다. 또한 몽골인과 친근 종족인 튀르크계 우이구르인들을 중심으로 하여 중국 한인, 여진인, 거란인, 페르시아인 그리고 심지어는 유럽인까지를 포함한 범민족적 중앙 행정부를 창설하였다. 여전히 국가 형태는 군사조직을 기본으로 하고 있었으나 이들 이민족의 영향으로 유목민족국가의 성격과 정착민족국가의 성격을 혼합시킨 국가모습으로 점차 변하게 되었다.


「구육의 통치」


오고데이의 뒤를 이어 1246년 왕위를 계승한 구육(Guyuk)은 오고데이 통치 말년의 실정(失政)으로 인해 발생한 각 지역의 자치독립적 경향과 제국 내부분열이라는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하였으나, 얼마 못가서 1248년 사마르칸트에서 서거하고 몽골제국은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1251년 몽골의 쿠릴타이는 유럽 원정시 뛰어난 공을 세운 몽케(Mongke)를 대칸(Great Khan)으로 승인하였다. 그의 재위 기간의 통치 치적은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몽케의 통치」


칭기스칸이 몽골 세계제국의 건설자였다면 몽케는 그 제국의 진정한 의미의 제 1대 황제였다. 몽케는 제국의 어려운 상황의 타개를 위해 유럽식의 봉건제도 성격을 결합한 정치형태를 발전시켰다. 후에 5인 총독제도를 채택하여 중앙 수도 카라코룸(Kara Korum)의 행정에 아릭 부게를, 중국 통치는 쿠빌라이에게, 중동 지방(일칸)은 홀레구, 칭기스칸의 둘째 아들 차카타이가 다스리던 중부스텝 유목 지역은 카라 홀레구, 큽착 스텝 지역(金호르드)은 베르게를 총독으로 임명하였다. 그리하여 각각 담당한 지역의 행정을 책임지고 지방 행정 관계사를 황제에게 직접 보고하게 하였다.


 

[쿠빌라이칸]

 

2) 제 2기 : 세계 제국 시대


1258년 몽케가 사망한 후, 카이두를 중심으로 한 오고데이 가계(家系)와 쿠빌라이를 중심으로 한 톨루이 가계의 분쟁이 재현되었으나, 1260년에 열렸던 쿠릴타이는 쿠빌라이를 지배자 대칸으로 선언하였다. 중국 정착문화에 도취되었던 쿠빌라이는 대칸에 선출된 후 곧 몽골제국의 행정 수도를 자신이 통치하던 영역내의 북경(北京)으로, 즉 유목지역으로부터 정착지역으로 옮겼다. 그 후 그는 계속 중국에 남아 정착민족지역에 근거를 잡고 몽골을 통치하였다. 그는 신속함과 신중함을 고루 갖춘 정치를 하였는데 특별히 중국문화에 비중을 두어 중국 자원을 고갈시키지 않으면서 몽골인에게 유익한 행정을 구상하였다.


쿠빌라이는 정착 지역 내부에서 확고한 지배력을 장악하지 못하면 유목 제국이 아무리 강성해도 오래 지속할 수 없다고 믿고 수도를 카라코룸에서 북경으로 옮겼던 것이다. 그러나 이 천도는 제국의 광대한 판도로 인하여 통신 시간의 증가를 요구하였기 때문에 한동안 중앙스텝의 카이두로부터 천도문제로 인해 강한 도전을 받게 되었다. 쿠빌라이는 중앙 카라코룸에 대한 경제 봉쇄 조치와 무력 제재를 병행하여 이 반란을 효과적으로 제어하였다.


쿠빌라이는 정복 사업도 계속하여 송(宋)을 완전히 정복하였을 뿐 아니라 동남아를 공략하고 중동과 왕래하는 해양로 확보를 위해 수마트라와 자바 공략도 기도하였다. 그리하여 실질적으로 몽골제국 역사상 그리고 전체 유목민족 역사상 전례없는 혁혁한 공적을 이루었다.


 

「일칸」


한편, 총독 분할 통치제도에 의해 4개의 칸국으로 분리된 지역들은 각각 계속적인 정벌과 함께 통치권을 확고히 해나갔다. 페르시아 중동지역 일칸(Ilkhan)의 통치자 홀레구는 칭기스칸이 시작한 정복 활동을 완성하는 일과 함께 중동 각 지역을 단일한 행정 체제로 평정코자 하였다. 특히 이슬람교의 정신적, 문화적 지주인 바그다드의 압바스 왕조 칼리프를 복속시키기에 노력하였다. 칼리프가 몽골의 지배권을 인정하지 않는 한, 정복된 무슬림들은 몽골 지배층보다 칼리프에 대해 더 충성심을 표현하였기 때문이다.


결국 1257년 가을 몽골군은 바그다드 압바스 왕조를 공격하기로 결정하고, 이락 영토를 통과하여 대대적인 진군을 하였다. 1년 후, 칼리프 군을 섬멸시킨 몽골군은 바그다드에 입성하여 압바스 왕가를 잔인하게 멸종시키고, 여러 도시를 약탈하여 비이슬람교도로서 절대적인 중동 이슬람의 군주가 되었다.


그러나, 이슬람 문화권에 위치한 일칸제국은 말기에 들어서는 지배층까지 서서히 이슬람화되기 시작했으며, 마침내 1295년 일칸 통치자 가잔이 개종함으로써 몽골제국이 아닌 이슬람 국가로서 단순히 몽골인 군주가 통치하는 국가가 되었다. 초기 몽골 국가의 중동 정벌 때에 기독교를 보호하고 이슬람교를 무자비하게 탄압하던 몽골은 가잔의 개종과 함께 완전히 이슬람 국가가 된 것이다. 가잔은 개종 후 제 1차 명령으로 기독교와 유대교 회당 불교 사원을 파괴시키도록 명령하였다. 그의 부친에 의해 건립되었던 불교 사찰이 그 때 모두 파괴되었다. 이것은 일칸에서의 스텝과 스텝 전통의 종식을 의미하며, 이 후에 일칸은 자신들의 근본을 중동에 두었고 중앙아시아의 조상들을 찾지 않았다.


「금(金)호르드」


몽골제국의 4개의 칸국 중 러시아 대륙의 金호르드朝(큽착칸국)와 차카타이칸국은 스텝 지대를 그 영토로 하고 있었다. 그 중 금호르드가 더 넓은 영토를 함유하고 있었으며, 중국이나 중동의 일칸과는 달리 영농정착민족의 거주지역인 러시아내에 위치하지 않으면서 그 곳을 지배하는 형태를 가졌었다. 큽착 칸국은 칭기스칸이 그의 장남인 '조치(Jochi)'에게 이르티쉬江과 알타이산맥을 연결하는 지역을 급여하고 큽착스텝과 그 이서(以西) 지역을 통치하도록 명령한 이후, '바투(Batu)'에게 계승되어 동유럽까지 더욱 판도가 확장되었다.


大칸이 카라코룸에서 통치하던 시기에도 금호르드는 몽골제국내에서 다른 칸국에 비해 비교적 半자치적인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결국 이미 이전에 이슬람화되었고 금호르드의 지배층에 많이 진출해 있을 뿐만 아니라, 비러시아계 사람들 중에서 가장 많은 인구를 형성하고 있는 튀르크족의 영향으로 일칸과 비슷하게 일찌기 이슬람을 수용한 금호르드는 현지 튀르크계 백성들과 튀르크계 지도층의 영향으로 튀르크화가 급속하게 촉진되었다.

 

「차가타이칸국」


마지막으로, 중앙아시아에 위치해 있던 차카타이(Chagatay)칸국은 엄밀한 의미에서 몽골제국 내에서 유일한 순수 유목국가였다. 이 칸국은 튀르키스탄(Türkistan)과 스텝 서부의 트란속시아나 지방을 포함하고 있었고 제국 내에 사마르칸트와 부하라 같은 도시도 존재했으나 아직 정착화되지는 않고 있었다. 정복지역 내에 거주하는 주민의 대다수는 유목 혹은 반유목 생활을 하는 튀르크족이었다. 몽골족의 원래 거주지역을 제외하면 피정복민족과 정복민족이 동일한 전통을 소유하고 있던 유일한 지역이었다. 이러한 차카타이칸국의 성격은 수적으로 적은 몽골인 지배층이 도리어 다수의 튀르크족에 의해 흡수되어 완전히 튀르크화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3) 제 3기: 쇠퇴와 멸망기


몽골제국이 몰락한 원인을 전반적으로 이해하려면 역사적 시대구분을 해보아야 하며 이를 위해서 모든 지역에 공통적으로 영향을 끼친 요소들과 원조(元朝), 일칸, 차카타이칸국과 큽착칸국(금호르드)등 각 제국에서 발생하였던 여건들을 분석하는 것에 촛점을 맞추어야 할 것이다.


「스텝 유목제국의 전통적 내부 분열성」


스텝의 전통은 몽골제국의 쇠퇴와 멸망기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몽골족은 스텝 전통의 성실한 계승자들이었으며, 또 그 전통을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튀르크계 고대 돌궐과 우이구르 및 기타 다른 여러 스텝 민족들의 제국 역사를 고찰해 보면 몽골제국이 붕괴하게 된 원인에 대해 좀더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12세기말 수십년간의 스텝의 정치정세가 어떠하였는지 알려주는 기록은 거의 없지만, 그 당시 그 곳에서 끊임없는 혼란과 격렬하고 급작스러운 변화가 진행되고 있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몽골제국은 건설 과정에서 스텝의 전통을 그대로 따랐는데, 과거의 스텝제국들은 비교적 단일한 민족 집단으로 구성되었으나, 몽골제국은 건설과정에서 비몽골계의 여러 부족 집단을 포함시켰고, 이들은 곧 새로운 제국의 구성분자로 완전히 흡수되었다. 이러한 부족연맹체가 형성되고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과거 스텝의 전통과 같이 칭기스칸이라는 카리스마적인 지도자의 영도력이 있었기 때문이었고, 이 영도력의 공백이 생기게 되자 제국의 내부는 긴장과 멸망으로 가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칭기스칸은 몽골제국이 과거의 유목민족제국들이 걸어간 운명의 전철을 밟게 하지 않으려는 조처들을 취하였으나, 그가 결정한 몇몇 사항들은 死후 심각한 「내부적인 불화」를 낳는 원인이 되었다. 그 결정들의 첫번째는 전쟁을 수행하는 군사지휘관들의 독자적 행동을 인정한 것이었다. 이러한 지방주의적 입장은 칭기스칸 사망후 즉시 지방 자치적인 분리주의 경향으로 발전하려는 추세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 때문에, 수도 카라코룸에 있는 제국의 황제는 이를 제거하기 위해 상당한 자원과 노력을 소모해야만 했었던 것이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다 치명적인 영향을 끼친 칭기스칸의 정책은 제국을 네 아들에게 분할한 것이었는데, 그러한 분할은 이권 추구에 따른 잠재적 분란이 형제간의 골육상쟁으로 발전될 수 있는 충분한 여지를 이미 내포하고 있었다.


이러한 주요 이유들로 인해 결속과 전쟁의 상태가 수시로 바뀌는 끊임없는 정치적 긴장, 즉 스텝 정치의 전형적인 현상이 몽골제국에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내부적 갈등으로 인한 전쟁들 가운데 제국의 약화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몽골 오고데이家의 지도자였던 카이두가 쿠빌라이에 대항하여 시작해 30년간 지속되었던 복위(復位)전쟁이었다. 이 전쟁은 칭기스칸이 세운 제국을 붕괴시켰던 단일 원인으로서는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카이두의 무력행사는 전통적으로 반역이라고 기술되어 왔으나, 「복위(復位)를 위한 투쟁」이라고 하는 것이 더 합당할 것이다. 카이두는 오고데이家의 과거의 영광을 회복하려고 했을 뿐 아니라, 스텝에 그 다이나믹한 근거를 둔 유목민족제국을 재건하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오고데이의 손자였던 카이두는 그 추종자들과 함께 단호하게 쿠빌라이의 권위를 부정하였다. 그 이유로 쿠빌라이가 소집한 쿠릴타이의 비합법성과 두 번째, 보다 중요한 이유로서 쿠빌라이가 쿠릴타이를 몽골제국의 중앙 수도가 아닌 영농 정착 지대인 중국에서 개최하였고, 수도를 전통적인 몽골인의 땅 스텝에서 영농지역 북경으로 옮김으로 유목민의 전통을 단절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이렇게 주장하고 나온 자들은 주로 정치적으로 소외되었던 그룹이었는데, 이러한 상황 속에서 카이두는 당시 권력을 잡고 있던 톨루이家에 무력으로 도전, 사실상 오고데이가의 재건을 도모하기로 결정하였던 것이다. 쿠빌라이의 반응은 카이두에 대한 경제 봉쇄와 반란에 대한 신속하고 무자비한 대응이었다. 카이두의 반란은 쿠빌라이가 사망한 뒤에도 7년동안 계속되었으며, 1301년 그의 군사들이 패배하고 카이두가 도주하다가 사망함으로써 1303년에 35년간 지속되었던 중앙아시아 몽골 연맹은 완전히 소멸하게 되었다.


카이두의 주된 적은 쿠빌라이, 즉 元朝였으나 그의 복위 기도는 제국의 다른 지역에도 영향을 주어 일칸과 금호르드간의 전쟁을 유발시켰다. 금호르드는 새로운 국가가 중앙스텝에 형성되는 것을 기뻐하지 않았고, 따라서 카이두의 협조 요청을 무시, 카이두의 성공 가능성을 약화시켰다. 카이두의 복위 기도는 몽골제국 전체의 경제자원과 군사력의 상당한 소모를 가져왔다. 그의 복위 기도는 스텝전통의 연속이었을 뿐 아니라, 몽골제국 창건 때부터 이미 그 불씨가 존재했었던 내부적 갈등의 발전이었다. 제국내의 각 칸국은 제국 전체의 통일보다는 분할을 택하여 독자적인 노선을 취하였다. 그러나, 각 칸국내의 지방의 상황은 몽골족들에게 불리하게 발전하여 1303년 이후 반세기 이내에 최종적인 멸망을 불러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즉, 중앙의 내분과 지방의 자치주의적 경향과 함께 피지배민족 문화의 우세가 몽골제국의 급속한 붕괴와 멸망을 가져오게 한 것이다.


「元朝의 멸망」


元朝는 카이두의 반란을 제외하면 쿠빌라이와 그의 후계자의 통치 기간은 주로 평온하였다고볼 수 있다. 원(元)은 스텝으로부터 들어온 민족에 의해 지배된 중국이었고, 그 지배자 몽골인들은 그들 자체의 전통을 버리고 수도를 중국 안에 건설하였다. 이러한 결정은 보다 유리한 경제적 위치를 점거할 필요성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었으나, 결국 그 지배자들을 스텝과 스텝의 전통으로부터 소외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중국 왕조의 전통적인 요건을 갖춤으로써, 도리어 몽골인 지배자들은 중국식 조정 분쟁과 복잡한 당파 싸움의 와중으로 끌려들게 되었다.


1328년과 1329년에 元朝는 정치적으로 일대 위기 내지 전환기를 맞이했는데, 당시 쿠빌라이의 후손들과 조정의 여러 당파 -몽골인과 한인- 간의 투쟁이 표면화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조정과 행정관료 내부에서 발생한 정치적 분쟁은 지방 전체에 중요한 영향을 주었다. 중앙정부가 약화되기 시작하는 징조가 보일 때, 지방이 독립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은 중국에서는 흔히 있는 현상이었고, 이외에도 몽골인들에게는 독립적인 행위를 취하려는 자연적인 성향이 있음을 이미 지적한 바 있다.


분란과 긴장, 논쟁과 몰이해는 1340년에 극에 달하였고, 관료들은 국가의 문제보다는 파당으로 나뉘고 다시 군소 파벌로 분열되어 세력 투쟁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한 당파 싸움은 결국 정부의 기능을 마비시켰고, 지방의 통치자들로 하여금 국가적 권익보다는 자신들의 권익을 추구하기 위한 행동을 취하게 하였다. 원(元)의 조정과 황제는 1350년경에는 이러한 사태에 대응할 능력을 상실했고, 지방에 대한 실질적인 통치권을 거의 잃어버리게 되었다.


14세기 중엽에 이르면서부터 반란과 봉기에 의해 제국 안정이 위협받기 시작했다. 1360년대 중반기에서부터 반란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1368년 주원장(朱元璋)의 군사들은 북경을 점령하고- 전투에 의해서가 아닌, 몽골인들이 스스로 수도를 버리고 스텝으로 돌아감으로써 - 명조(明朝)를 성립하였다. 그러나, 몽골인들이 스텝으로 철수한 것은 패주한 것이 아닌 전략적 행위였다. 그들은 스텝에서 세력을 재편성하고 금호르드의 후원을 받아 중국정벌을 재개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금호르드의 후원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1371년 명나라 군대는 몽골의 중국통치를 완전히 종식시키게 되었다. 원나라 내부의 분란과 여러 정책적 실정, 경제적 난국등의 이유외에도, 그 멸망의 근본적 이유는 영농정착민족 지역에 유목 제국이 존재함으로써 발생하는 원천적 모순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일칸제국의 와해」


페르시아에서 몽골인의 지배권이 소멸된 시기는 아주 분명한데, 그것은 1335년 11월 30일로서 일칸의 마지막 정통 지배자였던 아부사이드가 다른 사람과 약혼한 여자를 강제로 빼았고 그 약혼자를 처형함으로써 약혼녀 바그다드 하툰(Baghdad Khatun)에 의해 침실에서 독살된 날이 바로 멸망의 시작이었다. 그 후 일칸제국은 빈번히 교체된 꼭두각시 일칸들에 의해 통치되며 내란이 연일 계속되어 정치 활동은 마비되고 혼란시기가 계속되었다. 일칸제국의 분열은 1336년과 1337년 사이에 일어났다.


일칸제국의 말기에 발생한 혼란의 원인은 원조 멸망 때보다 그 자료가 더 미비하다. 그러나 현존 자료를 면밀히 검토했을 때, 그 기본이 되는 원인들을 짐작할 수 있다. 중동지역은 이미 튀르크민족의 지배를 경험한 지역이었다. 그러나 튀르크족의 정복과 몽골족의 정복은 큰 차이가 있었는데, 튀르크족은 형제 무슬림들이었고, 몽골인들은 전형적인 이교도이었으며, 그들은 몽골인을 '알라신이 내린 천벌'로 인식하고 있었다. 즉, 비록 몽골 지배자들이 이슬람으로 전향하였다고 하지만 아랍인들의 몽골인에 대한 적대감은 대단한 것이었고 이러한 까닭에 반몽골적 내란이 종교적인 사명, 즉 성전(聖戰)의 형식으로 곳곳에서 발생했던 것이다.


한편, 튀르크족의 몽골인에 대한 태도는 비록 그들이 이슬람교로 전향했지만 많이 달랐다. 튀르크족들은 몽골족들과 인종적, 언어적으로 가깝고 몽골군에 다수 참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쉽게 항복하여 몽골군에 흡수되었으며, 몽골인들도 그들에게 계속적으로 통치할 수 있는 지배자적 권한을 허용하였다.


일칸의 정치풍토는 항상 극도로 유동적이었고, 폭력과 피살이 비일비재하였다. 이렇듯 일칸제국 정치풍토의 특징이었던 불안정성은 몽골지배자들이 기존제도를 수정하여 확고한 지배권을 장악하지 못한데 원인이 있었다. 일칸에서의 반몽활동은 두 가지 이유에서 합리성이 주장되었는데, 하나는 몽골인들이 무슬림이 아니었다는 것과 두번째 그들에 대한 복속은 항상 위협에 의해 이루어져서 진정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일 칸제국의 모든 칸들은 시종 정복 왕조의 군주로 남아 있었지, 피정복민들과 융합하려고 하지 않았다.


「스텝의 분할」


몽골제국의 금호르드(Golden Horde)와 차카타이 칸국은 원나라와 일칸과는 상당히 달랐다. 중국과 페르시아에서는 농업이 경제 생활의 기본이었던 반면에, 금호르드와 차카타이 칸국에서는 유목 생활이 계속되었다. 또한 이 두 칸국의 피지배민족은 대부분 튀르크족(突厥)이어서 몽골족과 튀르크족간의 문화적, 언어적, 인종적 유사성은 두 민족간 차이를 모호하게 하였고, 결국 몽골인들의 지배적인 위치를 튀르크인들이 많이 담당하게 되었다.


「차카타이칸국」


행정적으로나 정치적으로 후진성을 면치 못했던 차카타이칸국은 튀르크계 민족과 카라키타이인, 페르시아인등 여러 민족들이 극소수의 몽골인 지배하에 헐겁게 결속되어 있던 나라였다. 유목민족적 생활 패턴을 계속 유지해 온 차가타이칸국은 지리적으로 고정된 수도도 없었다. 몽골제국의 유목민족 출신 창건자들과 같이 대부분의 차카타이칸국의 지배자들은 도시와 정착생활을 원치 않았으며, 칸국 자체 내의 도시들은 번번이 집권층에 의해 약탈당했었다. 차카타이칸국의 역사는 경제적, 정치적, 자원적으로 항상 약세에 있었던 만큼 혼란과 불안정은 이 제국의 특징이라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수없이 많은 군주들의 교체와 전쟁으로 분열되었던 차카타이칸국은 1369년 티무르(Timur)에 의하여 전혀 새로운 나라로 다시 통일되었다. 사실 쇠퇴라든가 멸망이라는 표현은 차카타이칸국에 해당되지 않는다. 칸국의 정치적 변화, 소수의 몽골 유목민이 다수의 튀르크 유목민에게 흡수되는 과정, 형태뿐이던 행정조직 등의 모든 현상은 그 공통이익을 추구하는 구성분자들이 성립하고 장악하고 있던 유목민 왕국의 전형적인 주기적 현상이었다. 구성원들이 추구하는 공통이익이 존재하지 않게 되거나, 중요성이 소실될 때 새로운 집단이 형성되어 등장하는 것이 상례였고, 그 새 집단이 강성하게 되어 새로운 왕국을 건설하게 되는 것이다.


「金호르드(큽착칸국)」


다른 칸국의 평균 존속기간이 약 1세기 정도이었던 것에 비해 금호르드칸국은 유일한 예외였다. 금호르드가 다른 칸국과는 달리 국가 존속을 오래 유지할 수 있었던 한 이유는 그 국가조직, 특히 유동적인 형세에 적시 적응할 수 있었던 구조의 특성 때문이었다. 금호르드는 주로 튀르크족이 거주하는 지역을 점령하였고 고정된 수도도 있었다. 국가 초기부터 금호르드는 영농민과 유목민을 포함하였고, 건전한 재정 및 경제 기반을 가지고 있었다. 금호르드가 다른 칸국과 달랐던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호르드의 지배층과 피정복지역의 원주민과의 관계였다. 금호르드는 유목민족 지역에 근거를 두고 현지 유목민인 튀르크족들을 국가 조직속에 흡수하였으며, 그 유목 지역에서 피정복 정착 지역인 러시아를 통치하였던 것이다. 금호르드의 지배자들은 스텝의 전통에 따라서 피정복 정착민족들을 직접 통치하기 보다는 먼 거리에서 종주권자의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금호르드의 정복자들은 조세와 공물의 수납과 문제 발생시의 해결의 역할로서 만족하였다.


그러나, 14세기 중엽, 금호르드(큽착칸국) 역시 몽골제국의 다른 칸국과 같은 운명을 당하게 되었다. 금호르드는 내란과 피정복민족들의 독립운동으로 인해 그 세력이 점차 약화되어 갔다. 마침내 외부의 압력과 침공보다는 내부의 분열과 강력한 지도자의 부재로 인해 몽골인들의 세력은 그 통치 지역에서 축출되고 강대한 세계적 제국의 위치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결국 금호르드가 큐축 메흐메트(Küchük Mehmet)를 마지막 칸으로 1465년 붕괴되면서 카잔공국, 크름공국, 아스트라칸공국등 3개의 튀르크족 공국이 탄생하게 되었고, 과거 금호르드의 장군들이었던 튀르크족 지배자들에 의해 통치되게 되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1547년 모스코바에서 중앙집권적 체제와 의회정치제도를 도입하여 러시아제국의 절대 지도자로 부상한 이반4세의 팽창정책에 밀려 카잔공국이 1552년에 붕괴되고 아스트라칸 공국이 1554년에 멸망하게 되었다. 이러한 러시아제국의 팽창정책과 연관하여 이반4세가 취한 잔인한 반이슬람 정책은 유명하여 그 후로 이반 4세는 '무서운 이반(Tsar Ivan the Terrible)'으로 불리어지고 있다. 한편 중동과 북부아프리카, 동구 유럽을 지배하고 있던 강력한 튀르크족 제국인 오스만제국에 의해 보호를 받고 있던 크름공국은 18세기말까지 계속 그 명맥을 유지해오다가 1783년 러시아제국에 의해 가장 뒤늦게 멸망당했다. 이리하여, 금호르드가 지배하던 러시아 스텝은 모두 러시아제국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제왕 티무르]

 

4) 제 4기: 티무르제국- 몽골제국 재건의 시도


원나라의 멸망, 일칸의 분열, 스텝 지대의 분할은 세계 강대 세력으로서의 몽골족 세력의 종료와 유목민의 영농정착민에 대한 위협적 존재로서의 위치가 종식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몽골민족의 정치적 세력이 완전히 영향력을 잃은 것은 아니었고, 제국의 재창건을 위한 많은 움직임이 있었다. 칭기스칸의 제국을 재건하려는 사람 중 대표적인 인물은 몽골족이 아닌 튀르크족 지도자 티무르(Timur)였다.


14세기 중엽 차카타이 칸국은 영농국가 전통과 유목민족 전통이 서로 갈등하는 불안한 나라였다. 이 중 영농국가 전통을 수립하려는 세력은 이슬람교와 더불어 트란속시아나를 지배하고 있었고, 그 형식적인 통치 계층은 몽골족 출신이었으나 실질적 세력은 튀르크계에 있었다. 이 튀르크계 가문들 중의 하나에서 1336년 티무르가 출생하였고, 바로 그가 후에 새로운 왕조를 건설하게 되었다. 그는 1369년 정복 전쟁을 완료하고 스스로 트란속시아나의 새 지도자인 동시에 칭기스칸의 계승자임을 선언하였다. 그는 칭기스칸의 제국을 재건할 것이라고 맹세하고 그 목표를 성취하기 위하여 정벌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그는 몽골 지배층의 후예가 아니었으므로 정통성의 약점을 가지고 있어 다른 몽골계 부족들의 호응을 얻지 못했다.


티무르가 건설한 제국과 칭기스칸의 제국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점이 존재했다. 그것은 제국 기반의 문제였다. 즉 칭기스칸의 제국은 기본적으로 단일 민족의 통치 체제를 구축하였고 확고한 기반 위에 성립된 것이었으나, 티무르제국은 그러하지 못하였다. 티무르제국의 근본적인 취약성은 지배층이 다수 민족으로 구성되었던 점이며, 그 문제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티무르와 그의 후계자의 개성과 탁월한 지도력 때문이었다. 티무르제국의 문화는 튀르크-페르시아 전통에 속하였고 법률제도는 튀르크-몽골제국이 확립한 것에 기반을 두었으며, 정치 및 종교 구조는 이슬람과 몽골 전통이 혼합된 형태였다. 더우기 티무르제국에는 스텝을 기반으로한 다이나믹한 중심이 없었고, 황실의 전통이 없었다. 그리하여 티무르가 사망(1405년)하고 수년 후에 티무르제국은 곧 붕괴되고 사라져 버렸다.

 

 나는 몽골의 푸른 늑대다.

     너희는 신의 군대다.

     우리의 신인 쾌쾌 탱그리와

     시조 불테치노는 항상 우리를 지켜보고 계신다.

     너희에겐 패배란 없다.

 

     나를 따르면 모든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다.  [대칸(大汗)]

 

출처: NAVER

 

 

 

참고 : 남송과 호라즘 제국의 멸망과정

 

 

[남송(南宋)의 멸망]


[몽골군의 침공을 저지한 방어 시스템]


영웅 칭기스칸에 의해 흥기하여 전 유라시아 대륙의 정복에 매진하고 있던 몽골과, 오대십국의 전란을 종식시키고 이민족의 압박을 받아오면서도 여전히 중화의 통일을 유지하고 있던 남송이 처음으로 교전을 벌였던 것은, 금이 멸망할 무렵인 1233년의 일이었다.


금의 영역이었던 중원의 지배권을 둘러싼 군사적 출동은, 머지않아 두 강대국의 전면 전쟁으로 발전하였다. 북방의 우수한 군마의 공급이 끊어져서 기병이 열세하였던 남송군은, 6만 명을 동원한 최초의 중원 회복 작전이 실패한 뒤에는 오로지 방어에만 전념하게 되었다. 그러나 공세로 돌아선 몽골 측에서도 우구데이 칸 치하인 1235~39년, 그리고 뭉케 칸 치하인 1257~59년에 두 차례에 걸쳐 대규모의 남송 원정군을 파견하였지만, 어느 쪽도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몽골군의 이러한 초기의 패배의 원인은, 크게 다음의 세 가지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즉,


①금과 남송의 장기간의 전쟁의 결과 중원이 완전히 황폐화되어서, 군대를 양성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게 되어버렸다는 점.


②남송은 엄청난 인구와 견고한 요새 도시들을 보유하는 농경민족 국가였기에, 지금까지 몽골군이 서방에서 전개하고 있었던 것과 같이 기병을 주력으로 하는 기동전으로는 남송에 대하여 전략적인 승리를 거두는 것이 지극히 어려웠다는 점.


③남송이 장강, 회수(淮水), 그리고 한수(漢水)라는 삼대(三大) 강을 천연의 요새로 삼고, 이들 강의 유역 전체에 걸쳐 강력한 띠 모양의 방어 시스템을 전개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특히 그 중에서도, 옛 제국의 수도인 개봉을 금에게 빼앗긴 뒤 부득이하게 왕조가 남쪽으로 옮겨와야 했던 1127년의 「정강(靖康)의 변」으로부터 한 세기 이상에 걸쳐 구축되어 온 ③의 방어 시스템은, 그 자체가 하나의 경이였다.


삼대 강 유역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회동(淮東), 회서(淮西), 호광(湖廣), 사천(四川)의 4개 군관구로 나뉘어져 있었다. 각 군관구에는 각각 병력이 1만 명에서 수만 명에 이르는 여러 개의 야전군이 배치되어 있었고, 대규모의 병참 기지와 고도로 정비된 군·정 조직으로부터 지원을 받고 있었으며, 어떠한 곳으로부터의 어떠한 공격에 대하여서도 난공불락이었다.


하지만 이처럼 완벽해 보이는 방어 시스템은, 또한 동시에 남송의 최대의 약점이기도 하였다. 정원이 약 40만 명(실제 동원 병력은 이보다 상당히 적었음)인 상비군의 대부분은 삼대 강 유역에 고정되어 있었고, 치밀하여 빈틈이 없다기보다는 이미 지나치게 복잡해진 병참 조직의 관료주의 속에 완전히 말려 들어가 있었으며, 군관구를 넘어서는 전략적 기동력은 거의 잃어버린 상태였다. 원래는 국가의 전략 예비군이어야 할 삼아(三衙)의 병력(황제 친위 군단) 약 12만 명도, 실제로는 회동 및 회서 군관구의 통제 하에 놓여 있어서 적재적소에 운용하는 것이 곤란하였다. 이처럼 국경의 광정면(廣正面) 방어에 자원의 태반을 쏟아 붓는다는 소위 「골든 방식」으로는 충분한 전략 종심(縱深, 깊이가 있는 방어 체계)을 확보할 수 없고, 게다가 작전의 주도권을 완전히 공격측에 넘겨주고 만다. 그리고 만약 방어선의 어느 한 곳이 결정적으로 돌파당하게 된다면, 그 순간부터 기동 예비군이 없는 배후는 완전히 무방비 상태가 되어서 방어선 전체가 무력화된다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것이다.


[쿠빌라이의 양양(襄陽) 포위 공격 작전]


그리하여 1259년 형 뭉케가 전사한 뒤 동생 아릭부케를 쓰러뜨리고 제국의 주인이 된 쿠빌라이 칸은, 위와 같은 교훈들을 충분히 숙지하고서 새로이 남송 침공 작전을 기획하였다. 그는 개봉을 보급 기지로 삼고 그 곳에 대량의 보급 물자를 쌓아두는 동시에, 하북(河北)의 교통망을 정비하여 후방 지원에 만전을 기하였다.


이번 공세의 목표는 과거 두 차례의 원정 때처럼 분산시키지 않고, 한수의 요충지에 위치한 양양을 공략하여 그 곳에서 방어선을 돌파한다는 단 한 가지에 집중되었다. 이것은 남송의 심장부인 회수 혹은 장강 유역을 직접 공격하는 것에 비해, 황폐화된 중원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되는 보급선의 길이를 보다 짧게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몽골군이 당초에 동원한 병력은 약 7만 명이었다. 이 부대는 총사령관인 아쥬가 직접 이끄는 몽골 기병 부대와, 부사령관이며 쿠빌라이에게 복속한 옛 군벌의 우두머리인 사천택(史天澤) 휘하의 중국인 보병 부대로 편성되어 있었다. 또한 이번 원정에는 공성 무기나 공병 등이 유난히 많이 추가되어 있어서, 병참을 충실하게 하면서 동시에 장기간의 포위전에 대비하고 있었다.


이에 대한 남송군 호광 군관구의 총 병력은 약 10만 명이었다. 양양에 주둔하고 있는 부대는 대략 1만 명에서 2만 명이었고, 그 중 2,000명은 한수 맞은편의 자매 도시인 번성(樊城)의 수비를 담당하고 있었다.


호광 군관구의 사령관은 땔감 장수에서 단숨에 대 군벌을 이루어낸 역전의 군인 여문덕(呂文德)이었지만, 그는 원정이 막 시작되려 하는 시점에 관직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몽골군의 침략을 사전에 예측하지 못하여 양양이 적의 공격을 받게 한 책임을 진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지만, 자세한 내용은 명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여문덕의 사직으로 인해, 양양지사를 맡고 있던 그의 동생 여문환(呂文煥)이, 아쥬와 사천택의 대군과 맞서 싸우게 되었다.


1268년 10월, 몽골군이 양양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였다. 몽골군은 전통적인 포위 공격 전술을 택하여, 우선 양양을 봉쇄하는 견고한 진지를 구축하는 일에 나섰다. 한수의 만곡부를 이루는 포위망 안에 양양을 완전히 가두어 버리기 위해, 산의 능선을 따라 호와 흙벽으로 연결된 보루(堡壘)가 만들어졌다. 이러한 봉쇄선은 양양 수비대에 대한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남송의 구원군을 저지하기 위해 안쪽과 바깥쪽의 이중 구조로 되어 있었고, 이것 전체를 「환성(環城)」이라고 칭하였다.


여문환은 몽골군의 축성 공사가 완전히 끝나기 전에 진지를 파괴하기 위해 성 안으로부터 출격하였지만, 적의 병력에 압도당하여 퇴각하였다. 일단은 돌파를 단념한 그는, 양양과 번성을 배다리로 연결하여 통합적인 방어를 꾀하였다. 몽골군은 이 당시에는 강력한 수상 전력을 보유하고 있지 않아서 남송군이 다리를 설치하는 것을 저지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번성도 봉쇄선으로 둘러싸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도 남송군이 접근하는 것이 보다 어려운 한수 북쪽 기슭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번성에 대한 봉쇄선은 이중이 아닌 단일 구조로 되어 있었을 것이다.


이듬해인 1269년에는 한수의 수상 병참선을 둘러싼 공방이 벌어졌다. 남송 수군은 봄에 물이 불어나는 시기인 3월에 쾌속 함대를 이용하여 위력 정찰적인 공격을 실시하였고, 7월에는 여름에 물이 불어나는 시기를 기다려 식량과 물자를 가득 실은 대 함대를 이끌고 양양으로의 병참선을 개통하고자 하였다. 몽골군은 이 무렵에는 현지에서 건조한 함선을 통하여 함대의 정비를 어느 정도 끝내 두었지만, 경험과 훈련 상태에서 앞서는 남송 함대는 적의 경계선을 돌파하여 포위 공격을 받고 있던 여문환에게 대량의 보급품을 공급하는 것에 성공하였다. 하지만 귀항 도중 몽골 함대의 역습을 받아 큰 피해를 입었다.


1270년 초두에 여문환은 보병과 기병 1만 명을 이끌고 출격하여 몽골군의 봉쇄선 중 가장 약한 부분인 한수 상류 남쪽 기슭의 만산(萬山) 진지를 공격하였지만, 실패하고 퇴각하였다.


[포위전의 승패를 결정한 「만쟈니크」]


1271년, 즉 쿠빌라이가 국호를 「대원(大元)」으로 정한 그 해에 남송군은 간신히 양양을 구원하기 위한 대 반격 작전의 준비를 끝마쳤다. 반격에 나설 부대는 삼아의 병력을 포함하는 10만 명의 정예 수륙 연합군이었다. 지휘관은 전전지휘사(근위군단장)로서 여씨 군벌과 친분이 있는 범문호(范文虎)였다. 국경선의 방어 시스템으로부터 병력을 추출하여 이 정도 규모의 기동 병력을 편성하는 데에, 실로 1년이 넘는 시간이 필요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움직임을 탐지한 아쥬의 요청에 응하여, 쿠빌라이는 수만 명의 병력을 전선으로 증파하였다.


범문호의 군대는 4월에 양회(兩淮) 지역에서 출발하여, 장강으로부터 직접 한수로 들어갔다. 아쥬는 증원 부대의 도착을 기다린 뒤, 적군과 같은 수인 10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맞서 싸우러 갔다. 몇 차례의 전초전을 치른 뒤 6월에 양양 하류의 녹문산(鹿門山)의 기슭에서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졌다. 남송군은 수륙 양면으로 나뉘어져 진격하고 있었지만, 수군은 물이 불어난 큰 강을 거슬러 올라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불리함을 안고 있었다.


이러 대해 아쥬는 자신의 함대를 셋으로 나누어, 아마도 먼저 중앙의 함대로 하여금 남송 함대의 정면으로 돌격하도록 하고, 적이 혼란에 빠져 있을 때를 틈타 남아 있는 두 개의 함대로 하여금 양 날개를 덮치도록 하였을 것이다. 남송 함대는 궤멸되었고, 수군의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된 육상 부대도 역시 무너져 버렸다. 양양 구원 작전은 완전히 실패로 돌아갔던 것이다.


범문호의 군대가 대패하였다는 비보를 통하여 외부로부터의 구원의 희망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 여문환은, 최후의 도박으로서 다시 한 번 수비대를 출격시켜서 봉쇄선의 최남단에 위치한 백장산(百丈山)의 몽골군 진지에 대한 공격을 실시하였지만, 또다시 격퇴되고 말았다.


그렇기는 하지만, 양양의 견고한 성은 그로부터 다시 2년간 항쟁을 계속하였다. 여문환에 대한 장병들의 신뢰는 흔들리지 않았다. 물자 비축에 있어서는 소금이 거의 다 떨어져가고 있었지만, 1272년에 호광 군관구의 결사대가 거룻배를 이용하여 이들 쌍둥이 도시들에 도착하여 소금을 공급하였다.


결국 포위전의 승패를 결정지은 것은 쿠빌라이가 전선으로 보낸 신무기였다. 이것은 서방의 훌레구 울루스로부터 초빙된 두 명의 무슬림 기술자들이 제작한 「만쟈니크」, 즉 페르시아식의 투석기였다. 사람의 힘으로 발사하는 종래의 중국식 투석기에 비해, 무게추를 동력으로 이용하는 만쟈니크는 발사체의 무게도 사정거리도 훨씬 우수하였다.


1273년 봄, 전선에서 조립된 만자니크의 포격은 우선 방어 상태가 보다 허약한 번성을 목표로 하였다. 1개월에 걸친 포격에 의해 성벽에 구멍이 뚫렸고, 몽골군은 성 안으로 돌입하였다. 그들은 배다리를 불태워서 번성을 고립시켰고, 시가전을 치른 끝에 그 곳을 제압하였다.


11월에는 양양에 대한 포격이 시작되었다. 시내의 건축물이나 방어 시설은 차례차례 파괴되었고, 수비대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지금까지 용감히 싸운 여문환조차도 구원받을 가능성은 이미 전무하다는 것을 인정하였고, 이듬해 3월에 몽골군의 권고에 따라 항복하고 성문을 열었다.


양양이 함락되면서 남송의 방어 시스템은 사실상 붕괴되었다. 1274년 쿠빌라이는 28만 명의 대병력을 동원하였고, 양양을 새로운 보급 기지로 삼아 남송의 후방 지역으로 물밀 듯이 밀고 들어왔다. 남송군은 이미 군관구를 넘어선 조직적인 저항을 전개할 수 없게 되었고, 전투다운 전투도 해 보지 못한 채 1276년에 제국의 수도 임안(臨安)을 잃고 말았다. 복잡하고 정교하기는 하였지만, 지나치게 특화되고 경직된 시스템에 의존한 국가의 취후였다.


참고로 양양 포위전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만쟈니크는, 중국에서는 훗날 「이슬람 투석기」라는 의미인 「회회포(回回砲)」 혹은 「양양포(襄陽砲)」라고 불리게 되었다.

 

 

[호라즘(콰레즘)제국의 멸망]

 

호라즘은 북으로는 아랄해에서 남으로는 페르시아 만까지, 동으로는 파미르고원에서 서로는 자그로스 산맥에 이르러, 대부분의 내륙아시아와 아프가니스탄, 그리고 이란 땅 전부를 차지함으로서 실크로드의 중심부를 장악하고 있었다. 카스피해와 발하쉬호 사이에 아랄해가 있다. 이 아랄해로 두 개의 큰 강이 흘러들어 오는데 동남쪽에서 흘러 들어가는 시르다리아 강과 서남쪽에서 흘러 들어가는 아무다리아 강이 그것이다. 이 두개강 사이의 지역을 트란속시아나라 불렀으며, 아무다리아 강의 서쪽지역은 코라산이라 불렀다.


이 트란속시아나 지방의 가장 위쪽, 즉 아랄해 바로 남쪽에는 불모지인 키질쿰 사막이 있었지만, 사막의 남쪽과 파미르고원, 그리고 역시 고지대인 힌두쿠쉬 사이의 광활한 지역은 땅이 기름지고 기후가 온화하여 사람이 살기에 좋은 곳이었다. 이 지역에는 호라즘 제국의 수도인 사마르칸드를 비롯해서 부하라, 우르겐치 등의 대도시와 그 밖의 크고 작은 도시들이 많았다. 그리고 시르다리아 강 연안에는 가장 북쪽의 오트랄을 비롯해서, 훼나케트, 잔드, 코젠드 등의 도시들이 연이어 있었다.


1216년 금의 수도를 함락한 칭기스칸은 2년 간 전 몽골군에게 휴식을 주어 다음의 원정준비에 대비하였다. 당시 중앙아시아의 여러 지역을 왕래하는 대상들은 여행을 통해 지리적인 특징, 군대의 배치, 주민들의 분위기, 궁정내의 당파 등에 대해 매우 유용한 정보를 서로 주고받았다. 드디어 2년 후인 1218년, 칭기스칸은 이르티쉬 강 하류로 대규모의 공병 요원과 군수 요원들을 보내 도로와 교량을 수리하였고, 방목 및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전진로 상의 목초지에 대한 상세한 정찰활동을 끝냈다.


1219년 마침내 칭기스칸은 그의 주력부대를 발하쉬 호 동쪽 이르티쉬 강 상류를 엄호물로 하여 병력을 모았다. 7월까지 집결된 총 인원은 10만의 몽골군 뿐만 아니라 카를룩의 군주 아르슬란 칸, 알마릭의 새로운 군주 수크낙-티긴, 그리고 이디쿠트인 바르축으로부터 복속민의 병력 3만이 충원되어 15만에 이르렀다. 이곳에서 칭기스칸은 식량조달과 도하 훈련을 위하여 대규모 집단사냥을 하였다.


칭기스칸은 그의 군대를 4군으로 나누었다. 제1군 5만의 병력은 칭기스칸 자신이 맡았고 4만의 병력으로 이루어진 제2군은 차가타이와 오고데이를 사령관에 임명했다. 3만의 병력인 제3군사령관에는 주치, 그리고 2만 병력으로 이루어진 제4군사령관은 제베였다. 칭기스칸은 적의 주의력을 분산시키기 위해 먼저 주치에게 군대를 주어 아쿰 사막과 카라 타우알라 타우 산맥 사이의 황폐한 골짜기로 흐르는 추강을 건너, 시르다리아 강 하류 쪽 저지대로 향하게 하였다.


주치는 발하쉬 호 서부지역의 말을 전부 본대로 끌고간 후, 마을과 들판에 불을 질러 더 이상 사람이 살수 없는 곳으로 만들어 버렸다. 코라즘의 자랄-알딘이 맞아 싸우려 그곳에 도착했을 때는 주치가 그의 임무를 끝낸 뒤였다. 몽골군의 후위대가 자랄-알딘과 전투를 치른 후, 몽골군은 평원의 마른풀 마저 불을 지르고는 연기와 화염 뒤로 사라져 버렸다. 코라즘은 20여만의 병력을 시르다리아 강을 따라 성곽도시들을 연결하여 방어선을 펼쳤다.


그 후 몇 달간 별다른 움직임이 없다가 1219년 7월, 몽골군은 진격을 시작했다. 제일 먼저 제베가 이끄는 제4군은 적을 교란시키기 위한 일종의 별동대로서 몽골군의 주력이 있는 이르티쉬 강변보다 훨씬 남쪽에 있는 카쉬가르 지방에서 남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제베군은 4,000 m 높이의 눈이 깊게 쌓인 테렉 고갯길을 통하여 빽빽이 들어찬 나무를 잘라 길을 만들며 파미르고원을 넘어, 페르가나의 대 분지에 도착하였다. 그곳은 넓은 들판과 낮은 언덕, 그리고 사람의 무릎과 허리까지 올라오는 갈대밭이 끝없이 서로 연결된 곳이었다. 그곳이 바로 코라즘의 영토였고 그곳으로부터는 시르다리아 강과 군사 및 경제요충의 도시 코젠드가 멀지 않았다.


코젠드는 사마르칸드로부터 동쪽으로 가장 가까이 있는 대도시여서 마치 사마르칸드의 동쪽 관문과도 같은 역할을 하고 있었다. 제베의 제4군은 시르다리아 전선의 남쪽 끝에 있는 코젠드로 진격하였다. 이로서 제베는 곧바로 타쉬겐트와 사마르칸드를 위협하게 되었다. 호라즘은 서둘러 이곳 시르다리아 강 상류에 부대를 보강하였다. 또 부하라에만 4만 병력을 집결시키고 사마르칸드에도 추가병력을 배치하였다.


[목표선정]


제베의 제4군이 코젠드로 향해 진격해 나갈 무렵, 칭기스칸의 주력은 추강을 건넌 후 아쿠 쿰 사막의 남쪽을 우회하여 폐허화된 발하쉬 호 서부지역을 곧바로 통과하였다. 아쿠 쿰 사막이 끝나는 시르다리아 전선의 북쪽 측면에서 몽골군 제1, 2, 3군은 시르다리아 강을 따라 내려가기 시작하였다. 칭기스칸은 두개 집단군을 시르다리아 강 방어선 정면을 공격하게 하고, 나머지는 자신이 직접 인솔하여 상대의 배후 깊숙한 곳에 있는 부하라를 공격목표로 시르다리아 방어선의 북측으로 우회하기로 하였다.


부하라와 시르다리아 강 전선 사이에 있는 사마르칸드는 몽골군이 앞뒤에서 협공하기로 하였다. 몽골군은 사마르칸드에서 합류하기로 하고 각기 부여받은 지점들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였다. 칭기스칸의 아들들이 이끄는 두개의 집단군은 계획에 따라 시르다리아 강 하류에서부터 형성된 전선을 휩쓸기 시작했고, 곳곳의 요새들을 쉬지 않고 공격하면서 제베가 있는 곳을 향해 상류로 진격하였다.


차가타이와 오고데이가 지휘하는 제2군은 곧바로 오트랄로 향하였다. 오트랄은 진흙과 질긴 갈대의 줄기를 섞어, 구워 만든 단단한 벽돌로 지어진 놓은 성벽과 해자로 둘러싸여 있었다. 이후 오트랄에서는 5개월 째 공방전에 벌어졌다. 오트랄 성내의 가옥은 나프타 화염의 공격을 받아 대부분 불탔고 거리에는 시신들이 즐비하여 악취와 파리떼가 들끓었다. 장기전으로 화살이 동이 나기 시작했다. 어느 날, 이날축과 합류했던 카라차는 이러한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탈출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몽골군의 포위망을 뚫기 위해 한쪽 성문을 연후 돌격하였으나 이때를 기다린 몽골군이 물밀듯이 오트랄의 성내로 진격해 들어왔다. 시가전에서 패한 방위군은 도시 내에 있는 시터델로 피신하여 다시 1개월을 버텼으나 결국 함락되었다. 파괴를 마친 그들은 2차 집결지인 사마르칸드로 말머리를 돌렸다.


주치의 제3군은 오트랄에서 북쪽으로 방향을 돌려 시르다라아 강을 따라 하류로 내려와 아랄해로 들어가는 곳에 있는 젠드와 시그낙으로 향하였다. 이들은 분산되어 있는 코라즘 제국의 병력을 섬멸하며, 코젠드를 점령하고 그들과 연합하기 위해 하류(북쪽)로 행군하는 제베의 병력과 합세하기 위하여 이동하였다. 젠드의 백성들은 투항했고 시그낙의 백성들은 저항하였다. 주치의 군대는 시그낙을 공격하여 성벽을 완전히 파괴한 후 사마르칸드로 향하였다.


[기습공격]


칭기스칸의 제1군은 오트랄을 피해 북쪽으로 가다가 갑자기 방향을 바꿔 남서방향으로 향했다. 이들의 행보는 차가타이와 주치의 맹렬한 공격에 가려져 눈에 띠지도 않고 재빨랐다. 그들이 시르다리아 강을 건너자, 그들의 눈앞에는 광활한 키질 쿰(붉은 모래) 사막이 펼쳐졌다. 이들은 투르크멘의 한도시인 자눅을 점령하여 키질 쿰(붉은 모래)사막을 통과하는, 오아시스가 이어지는 길을 알고 있다는 안내자를 찾아, 통과가 불가능하다고 알려진 약 600 km의 사막을 횡단하였다. 무하메드가 그런 사실을 알게 된 것은 4월 초에 들어서였고, 그때 이미 칭기스칸은 남쪽 사막 끝에 나타나 누루타를 함락시키고 부하라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 한번의 놀랄만한 기동으로 칭기스칸은 호라즘 전선 전체를 돌아서 적의 잠재 병력이 무수히 남아있는 서부지방이 시르다리아 전선과 연결되는 것을 막아 버렸다. 칭기즈칸은 일익 우회포위를 실시한 것이다. 이는 역사상 처음있는 전략적 기습이었다. 부하라는 사마르칸드를 코라즘의 서쪽영토와 연결해주는 길목도시로 아무다리아 강변에 연한, 고정인구 40만 가량의 큰 도시였다. 칭기스칸은 부하라의 성문중 하나를 열어두어 주둔군을 성밖으로 나오도록 유인하였다. 호라즘 병사들은 몽골군을 공격하는 척하면서 남쪽으로 도망쳤으나 아무다리아 강이 그들을 막고 있었고, 뒤에서 나타난 몽골군에 의해 전멸되었다.


일부 투루크 병사들만 남아있던 부하라 성은 기습 점령되었으며 수비대 전원이 살해되었다. 주민들은 성밖으로 끌려나와 다른 도시를 공략할 때의 화살받이로 이용되었다. 이로서 불과 1달 반만에 수적으로 열세한 몽골군은 30만에 달하는 적을 무력화시킬 수 있었다. 부하라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닿자 시르다리아 강을 방어하고 있던 호라즘군은 뒤의 공격을 염려하여 급히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호라즘왕 모하메드는 사마르칸드로 물러섰으며, 그의 아들 자랄-알딘은 아랄해 남쪽의 우르겐치에서 각지로 동원령을 내려 결전을 준비하였다.


이어 칭기스칸 본군과 다른 세 개의 집단군은 이제 사마르칸드에 집결하게 되었다. 무하메드의 모든 병력은 사방에서 집결한 몽골군에 의하여 포위되었으며, 서쪽 땅의 통신로는 차단되었다. 코라즘의 마지막 요새 사마르칸드에는 11만에 이르는 많은 투루크와 타직 병사들이 있었다. 코라즘의 캉글리군 5만이 코끼리를 투입한 뒤 공격에 나서자 몽골군은 선회가 가능할 때까지 후퇴하였다가 캉글리의 측면을 공격했고, 이로 인해 사마르칸드 주둔군은 반으로 줄어들었다. 이런 가운데 칭기스칸은 4일간 수많은 인간방패를 돌진시켜 항복을 받아냈다.


사마르칸드의 함락으로 전쟁은 결정되었다. 주민들은 먼저 성밖으로 끌려나갔으며 몽골군은 그들 가속 5만명의 목숨을 살려주는 대가로 금화 20만 디나르를 요구하였다. 또 6만 명에 달하는 기술자들을 사로잡아 공성포의 제조와 관련된 3만 명은 성을 공격할 때 대포를 발사하는 회회포 군단으로 편성하였으며, 나머지 3만 명에 달하는 장인들은 왕공과 공주 그리고 장군들에게 분배되었다. 이제 코라즘 제국은 후방병력들이 동원되기도 전에 주요성채가 함락됨으로서 불과 한달 남짓한 전투 끝에 새로운 방어선을 미처 구축하지 못한 채 무너졌다. 그 후 몽골은 1년 반 사이에 트란속시아나에서 호라즘 세력을 완전히 몰아냈다.


[철저한 추격]


칭기즈칸의 섬멸전은 철저하였다. 그는 고도의 기동성을 지닌 기병대를 이용, 상대의 무장역량과 지도자급 인물을 끝까지 추격하여 확실한 승리를 추구하였다. 사마르칸드가 위급할 때 후계자 자랄-알딘은 이를 구원하기 위하여 동진하였으나 성은 이미 함락되고, 역으로 칭기즈칸은 이 병력을 추격하였다. 이에 자랄-알딘은 코라산을 거쳐 아프가니스탄 산중의 가즈니로 피신하여 새로이 군대를 조직하였다. 자연 전장은 동부이란의 코라산과 아프가니스탄으로 옮겨졌으며, 자랄-알딘은 칭기스칸에게 계속 쫓겨 카불을 거쳐 더위가 심한 먼 인도로 도망쳤다.


이미 사마르칸드를 벋어난 호라즘 샤 무하메드는 아무다리아 강을 건너 서쪽으로 후퇴하였다. 몽골군을 아무다리아 강의 남쪽이나 서쪽으로 끌어들인 후, 장기게릴라전을 펼쳐, 공성전에 약한 유목민이 철수할 때를 기다려 한꺼번에 반격해 보려 한 것이다. 그러나 칭기스칸은 제베와 수베데이가 지휘하는 3만의 기병 분견대로 그를 추격하도록 하였다. 호라즘 샤 무하메드는 발흐로 도망쳤다가 서부 코라산의 니샤푸르로 피신하였다. 계속하여 그는 이라키아잠의 서북부 카즈빈으로 내달렸다. 그 후 다급해진 무하메드는 카스피 해의 작은 섬 아베스쿤으로 도망쳤다가 그곳에서 병사하였다. 이로서 코라즘 제국은 대단히 짧은 기간에 멸망되었고 다시 일어설 가능성까지 완전히 소멸되었다.

 

[月光愛人 / 李玟 ]

 
출처 : 행운유수 |글쓴이 : 이사금 [원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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