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 전통의상 가운데 가장 섹시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중국의 치파오, 지금도 수많은 여성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중국의 고급 음식점이나 호텔에서는 종업원들이 치파오(旗袍: 중국 여성들이 입는 전통의상)를 입고 있는 것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치파오는 엉덩이 아래부터 양 옆선이 발목 아래까지 터져 있는 옷으로, 중국의 만주족 처녀들과 귀부인들이 즐겨 입던 옷이다. 치파오를 입은 날씬한 여인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다리가 살짝살짝 드러나 보이는 모습은 여간 섹시한 것이 아니다. 1972년 국교를 정상화하기 위하여 베이징을 방문했던 미국 닉슨 대통령의 영부인 패트 여사에게 외신 기자들이 치파오에 대한 느낌이 어떠냐고 물었을 때 패트 여사는 “저 치파오를 보고 중국 인구가 이처럼 많은 이유를 비로소 알게 됐다"고 답했을 정도로 치파오는 정말로 아름답고 화려하며 또 관능적이다.
치파오의 기원 ‘파오복'
치파오는 고대 ‘파오복'의 일종으로 그 발원은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 시기의 전통의상은 ‘심의(深衣)’라 불렸는데 춘추전국시대부터 한대(漢代)까지의 사람들이 즐겨 입었다고 한다.
후세의 치파오는 파오복과 일정한 연원관계가 있긴 하지만 사실상 파오복과 치파오는 다른 점이 많다. 파오복은 위아래를 분리하여 재단한 후 그것을 윗도리와 아랫도리를 연결하여 일체가 되게 하는 느낌을 준다. 치파오는 오히려 위아래를 구분하지 않았으며 기본적으로 윗도리와 아래치마의 의미를 없앴다.
스타일의 변화
그동안 치파오(파오복)의 스타일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한대(漢代)까지는 심의 형태의 두루마기였다가 당대(唐代)에는 둥근 카라에 주름이 들어간 두루마기 형태로 변했고 명대(明代)에 와서는 몸통에 주름이 없는 직선의 두루마기 형태로 바뀌었다. 공통적으로 모두가 전형적인 넓은 몸통의 두루마기식이다.
파오복이 의미하는 것은 일을 하지 않는 상류층 인사들, 지배계층 그리고 지식인들의 한가한 문화생활의 모습들을 담고 있다.
청대(淸代)의 통치자는 마술(馬術)과 궁술(弓術) 그리고 만주어를 강조하고 각 지역의 생활습관과 풍습에 따라 옷 입는 방식을 유지하게 하는 등 전통을 보존하기 위해 노력하는 한편 만주족의 의복과 장신구 등은 한족들에게 동화되도록 하는 정책을 폈다. 그리고 만주족과 몽고족 여성들에게 한족 여성들의 옷차림을 모방하지 못하도록 금지시켰지만 많은 이들이 명령을 어기고 한족 여성들의 옷차림을 모방했으며 또 성행하기까지 했다.
청대 후기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한족 여인들이 만주족 옷차림을 모방하는 경향이 높아졌다. 만주족과 한족 여성들의 이 같은 서로간의 호기심이 의복과 장신구 등에 대한 차이를 점점 감소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치파오도 점점 전국적으로 유행하게 되었다.
20세기에 들어서 1910년대와 1920년대 초기는 도시 여성들 사이에 한때 문명신장(文明新裝)이라는 새로운 복장이 유행하였다. 서양의 새로운 의상인 문명신장은 서양에서 유학하던 학생이나 중국 본토 상류층 집안의 여학생들이 앞장서서 입었고 도시 여성들이 이런 유행을 따라했다.
1920년대에서 1940년대까지는 근대 중국 여장(女裝)의 가장 눈부시고 찬란한 시기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1930년대는 최고의 시기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 시기에는 다른 어떠한 의복으로도 치파오를 대신 할 수 없게 만든 중요한 시기였다고도 말할 수 있다.
1920년대가 치파오의 유행이 시작된 시점이라면 1930년대는 치파오가 지금의 완벽한 형태를 갖추는 시기였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시기의 치파오는 얌전하고 성숙하게 보이도록 만들어졌는데 경전(經典)의 작품이라고 할 만하다. 전 세계 누구라도 다 알고 있는 Chinese Dress는 바로 1930년대의 치파오를 가리키는 것이다. 치파오 문화는 1930년대에 완성되었고 현대 치파오의 창조시기에 속한다. 이 시기에 와서야 중국에서 진정한 유행복이 생겨났다고 말할 수 있겠다.
치파오는 주로 도시의 부녀자들 사이에서 유행했는데 그 스타일은 유행에 따라서 변화가 다양하였으며 그 길이와 크기는 해를 거듭할수록 훨씬 새롭게 교체되었다.
1930년대 초반, 치파오의 길이는 무릎까지였고 소매길이는 팔꿈치까지였으며 허리부분은 작게 만들어졌다. 1932년에서 1938년까지의 치파오는 길이가 길고 몸에 딱 맞게 만들어져 여성들이 날씬하게 보이게끔 하는 게 유행하였다. 특히 1934년 전후의 치파오는 하단의 길이가 바닥을 쓸 정도로 적어도 발목 부분까지 내려왔다.
1930년대 치파오가 처음 유행한 발원지는 수도인 베이징이 아니라 바로 전국의 유행복을 주도하였던 상하이였다. 상하이의 유행이 곧 중국 전체의 유행이었을 정도로 상하이는 유행에 민감한 도시였다. 서양 복장의 특징에 융합되어 들어온 해외파 치파오 역시 자연스럽게 상하이에서부터 전국 각지로 유행하게 되었다. 이렇게 상하이문화의 중요한 대표로서 상하이식 치파오는 많은 중국 여성들의 사랑을 받으며 점점 그 위치를 확고히 하고 있었다. 우리가 말하는 1930년대 치파오는 바로 상하이식 치파오다. 1930년대 상하이식 치파오 스타일은 두 가지 큰 특징이 있었는데 한 가지는 중국과 서양의 스타일을 접목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변화가 다양하다는 것이다. 1930년대는 치파오가 경전으로 가는 과정의 완성단계였다고 말할 수 있다.
1940년대는 1930년대부터 시작된 치파오의 황금시대를 연장시킨 시기였다. 항일(抗日)전쟁이 시작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의미없이 죽어갔지만 여성들은 여전히 찻집이나 극장 등을 자주 드나들었고 대다수의 국민들도 전쟁 중에 의복과 장신구에 신경을 쓰는 행위를 사치스러운 일로 생각하지 않았다. 전쟁이 길어지고 점차 경제가 어려워지면서부터 치장에 대한 욕심이 사라져 간편하고 몸에 맞는 복장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의 치파오는 1930년대 바닥을 쓸 정도로 길었던 치마의 길이도 다시 종아리까지 올라오게 되고 치파오에 부착했었던 여러가지 화려한 장식들도 이용하지 않는 등 실용적인 스타일로서 1940년대 치파오의 독특한 품격을 형성하였다.
1949년 공산당이 정권을 잡으면서 백성이 주인이었던 새로운 시대에 유행을 주도하는 것은 평민들이었다. 민주, 집단주의 등 시대적 정신이 반영된 간편하고 소박한 실용적인 옷이 유행하기 시작하였으며 동시에 건국 초에는 의류업계에도 큰 변화가 생겨 기계를 이용한 대량생산을 시도하였고 아울러 가공수출을 목표로 의류공업이 중점 육성되던 시기였다.
1966년부터 1976년까지 중국 전통문화의 큰 재해(災害)로 기록되어지는 10여년간의 문화혁명 시기에 치파오 역시 예외일 수는 없었다. 정치에 민감했던 많은 중국인들은 불어 닥칠 풍파를 미리 예상하고 전통문화로서의 가치가 훌륭한 물건들을 감추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고 특히 상류층과 지식인들로부터 전해 내려온 치파오는 일찌감치 공격대상이 되어버렸다. 이 와중에 얼마나 많은 정교하고 아름다운 치파오가 찢겨 나갔는지 모른다.
이 시기에는 전통을 보존하고 살려야 한다는 의지가 아무리 강했던 사람이라 할지라도 치파오를 집 안의 낡은 서랍 속에 잘 숨겨놓을 수밖에 없었다. 치파오를 입는다는 생각은 당시에 꿈도 꿀 수 없을 정도로 전통적 가치에 대한 탄압이 혹독했기 때문이다.
치파오가 대륙에서 푸대접받은 기간에도 해외에서는 여전히 많은 사랑을 받았다. 문화혁명을 겪지 않은 해외체류 중국인들이 치파오의 전통을 이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디자인에서도 날이 갈수록 정교함을 더했다. 디자이너들은 치파오를 곡선화하는 방향으로 신경을 썼고 치마의 폭을 작게 하여 꽃병과 같이 제작,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았다. 치파오는 국제의상대회에서 여러 차례 우수한 성적을 거두며 전 세계 유명 의상 디자이너들에게 호평을 받았다. 그 독특한 매력은 그들의 디자인에 많은 영향을 주기도 하였는데 '피에르가르뎅'은 중국 치파오의 스타일과 도안을 보고 이것으로 영감을 얻어 적지 않은 작품을 디자인했다고 솔직하게 말하기도 하였다. 치파오가 해외에서 갈수록 인기를 얻게 되자 세계적인 영화배우들이 중국에 와서 치파오를 예약하기도 했다. 이 시기에 중국 대륙에서는 여러가지 이유들로 인하여 치파오가 유행할 수 없었지만 전 세계적으로 사랑을 받기 시작한 그때부터 지금까지 치파오의 지위는 확실히 다시 상승하고 있다. 최근 10년 사이 중국에서 다시 모습을 나타낸 치파오는 예복으로서 국제적인 예의를 취해야 하는 공식적인 자리에서 각광받고 있으며 국제무대에서도 여전히 호평과 함께 각종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며 화려하게 부활하고 있다.
중국의 고급 음식점이나 호텔에서는 종업원들이 치파오(旗袍: 중국 여성들이 입는 전통의상)를 입고 있는 것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치파오는 엉덩이 아래부터 양 옆선이 발목 아래까지 터져 있는 옷으로, 중국의 만주족 처녀들과 귀부인들이 즐겨 입던 옷이다. 치파오를 입은 날씬한 여인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다리가 살짝살짝 드러나 보이는 모습은 여간 섹시한 것이 아니다. 1972년 국교를 정상화하기 위하여 베이징을 방문했던 미국 닉슨 대통령의 영부인 패트 여사에게 외신 기자들이 치파오에 대한 느낌이 어떠냐고 물었을 때 패트 여사는 “저 치파오를 보고 중국 인구가 이처럼 많은 이유를 비로소 알게 됐다"고 답했을 정도로 치파오는 정말로 아름답고 화려하며 또 관능적이다.
치파오의 기원 ‘파오복'
치파오는 고대 ‘파오복'의 일종으로 그 발원은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 시기의 전통의상은 ‘심의(深衣)’라 불렸는데 춘추전국시대부터 한대(漢代)까지의 사람들이 즐겨 입었다고 한다.
후세의 치파오는 파오복과 일정한 연원관계가 있긴 하지만 사실상 파오복과 치파오는 다른 점이 많다. 파오복은 위아래를 분리하여 재단한 후 그것을 윗도리와 아랫도리를 연결하여 일체가 되게 하는 느낌을 준다. 치파오는 오히려 위아래를 구분하지 않았으며 기본적으로 윗도리와 아래치마의 의미를 없앴다.
스타일의 변화
그동안 치파오(파오복)의 스타일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한대(漢代)까지는 심의 형태의 두루마기였다가 당대(唐代)에는 둥근 카라에 주름이 들어간 두루마기 형태로 변했고 명대(明代)에 와서는 몸통에 주름이 없는 직선의 두루마기 형태로 바뀌었다. 공통적으로 모두가 전형적인 넓은 몸통의 두루마기식이다.
파오복이 의미하는 것은 일을 하지 않는 상류층 인사들, 지배계층 그리고 지식인들의 한가한 문화생활의 모습들을 담고 있다.
청대(淸代)의 통치자는 마술(馬術)과 궁술(弓術) 그리고 만주어를 강조하고 각 지역의 생활습관과 풍습에 따라 옷 입는 방식을 유지하게 하는 등 전통을 보존하기 위해 노력하는 한편 만주족의 의복과 장신구 등은 한족들에게 동화되도록 하는 정책을 폈다. 그리고 만주족과 몽고족 여성들에게 한족 여성들의 옷차림을 모방하지 못하도록 금지시켰지만 많은 이들이 명령을 어기고 한족 여성들의 옷차림을 모방했으며 또 성행하기까지 했다.
청대 후기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한족 여인들이 만주족 옷차림을 모방하는 경향이 높아졌다. 만주족과 한족 여성들의 이 같은 서로간의 호기심이 의복과 장신구 등에 대한 차이를 점점 감소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치파오도 점점 전국적으로 유행하게 되었다.
20세기에 들어서 1910년대와 1920년대 초기는 도시 여성들 사이에 한때 문명신장(文明新裝)이라는 새로운 복장이 유행하였다. 서양의 새로운 의상인 문명신장은 서양에서 유학하던 학생이나 중국 본토 상류층 집안의 여학생들이 앞장서서 입었고 도시 여성들이 이런 유행을 따라했다.
1920년대에서 1940년대까지는 근대 중국 여장(女裝)의 가장 눈부시고 찬란한 시기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1930년대는 최고의 시기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 시기에는 다른 어떠한 의복으로도 치파오를 대신 할 수 없게 만든 중요한 시기였다고도 말할 수 있다.
1920년대가 치파오의 유행이 시작된 시점이라면 1930년대는 치파오가 지금의 완벽한 형태를 갖추는 시기였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시기의 치파오는 얌전하고 성숙하게 보이도록 만들어졌는데 경전(經典)의 작품이라고 할 만하다. 전 세계 누구라도 다 알고 있는 Chinese Dress는 바로 1930년대의 치파오를 가리키는 것이다. 치파오 문화는 1930년대에 완성되었고 현대 치파오의 창조시기에 속한다. 이 시기에 와서야 중국에서 진정한 유행복이 생겨났다고 말할 수 있겠다.
치파오는 주로 도시의 부녀자들 사이에서 유행했는데 그 스타일은 유행에 따라서 변화가 다양하였으며 그 길이와 크기는 해를 거듭할수록 훨씬 새롭게 교체되었다.
1930년대 초반, 치파오의 길이는 무릎까지였고 소매길이는 팔꿈치까지였으며 허리부분은 작게 만들어졌다. 1932년에서 1938년까지의 치파오는 길이가 길고 몸에 딱 맞게 만들어져 여성들이 날씬하게 보이게끔 하는 게 유행하였다. 특히 1934년 전후의 치파오는 하단의 길이가 바닥을 쓸 정도로 적어도 발목 부분까지 내려왔다.
1930년대 치파오가 처음 유행한 발원지는 수도인 베이징이 아니라 바로 전국의 유행복을 주도하였던 상하이였다. 상하이의 유행이 곧 중국 전체의 유행이었을 정도로 상하이는 유행에 민감한 도시였다. 서양 복장의 특징에 융합되어 들어온 해외파 치파오 역시 자연스럽게 상하이에서부터 전국 각지로 유행하게 되었다. 이렇게 상하이문화의 중요한 대표로서 상하이식 치파오는 많은 중국 여성들의 사랑을 받으며 점점 그 위치를 확고히 하고 있었다. 우리가 말하는 1930년대 치파오는 바로 상하이식 치파오다. 1930년대 상하이식 치파오 스타일은 두 가지 큰 특징이 있었는데 한 가지는 중국과 서양의 스타일을 접목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변화가 다양하다는 것이다. 1930년대는 치파오가 경전으로 가는 과정의 완성단계였다고 말할 수 있다.
1940년대는 1930년대부터 시작된 치파오의 황금시대를 연장시킨 시기였다. 항일(抗日)전쟁이 시작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의미없이 죽어갔지만 여성들은 여전히 찻집이나 극장 등을 자주 드나들었고 대다수의 국민들도 전쟁 중에 의복과 장신구에 신경을 쓰는 행위를 사치스러운 일로 생각하지 않았다. 전쟁이 길어지고 점차 경제가 어려워지면서부터 치장에 대한 욕심이 사라져 간편하고 몸에 맞는 복장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의 치파오는 1930년대 바닥을 쓸 정도로 길었던 치마의 길이도 다시 종아리까지 올라오게 되고 치파오에 부착했었던 여러가지 화려한 장식들도 이용하지 않는 등 실용적인 스타일로서 1940년대 치파오의 독특한 품격을 형성하였다.
1949년 공산당이 정권을 잡으면서 백성이 주인이었던 새로운 시대에 유행을 주도하는 것은 평민들이었다. 민주, 집단주의 등 시대적 정신이 반영된 간편하고 소박한 실용적인 옷이 유행하기 시작하였으며 동시에 건국 초에는 의류업계에도 큰 변화가 생겨 기계를 이용한 대량생산을 시도하였고 아울러 가공수출을 목표로 의류공업이 중점 육성되던 시기였다.
1966년부터 1976년까지 중국 전통문화의 큰 재해(災害)로 기록되어지는 10여년간의 문화혁명 시기에 치파오 역시 예외일 수는 없었다. 정치에 민감했던 많은 중국인들은 불어 닥칠 풍파를 미리 예상하고 전통문화로서의 가치가 훌륭한 물건들을 감추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고 특히 상류층과 지식인들로부터 전해 내려온 치파오는 일찌감치 공격대상이 되어버렸다. 이 와중에 얼마나 많은 정교하고 아름다운 치파오가 찢겨 나갔는지 모른다.
이 시기에는 전통을 보존하고 살려야 한다는 의지가 아무리 강했던 사람이라 할지라도 치파오를 집 안의 낡은 서랍 속에 잘 숨겨놓을 수밖에 없었다. 치파오를 입는다는 생각은 당시에 꿈도 꿀 수 없을 정도로 전통적 가치에 대한 탄압이 혹독했기 때문이다.
치파오가 대륙에서 푸대접받은 기간에도 해외에서는 여전히 많은 사랑을 받았다. 문화혁명을 겪지 않은 해외체류 중국인들이 치파오의 전통을 이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디자인에서도 날이 갈수록 정교함을 더했다. 디자이너들은 치파오를 곡선화하는 방향으로 신경을 썼고 치마의 폭을 작게 하여 꽃병과 같이 제작,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았다. 치파오는 국제의상대회에서 여러 차례 우수한 성적을 거두며 전 세계 유명 의상 디자이너들에게 호평을 받았다. 그 독특한 매력은 그들의 디자인에 많은 영향을 주기도 하였는데 '피에르가르뎅'은 중국 치파오의 스타일과 도안을 보고 이것으로 영감을 얻어 적지 않은 작품을 디자인했다고 솔직하게 말하기도 하였다. 치파오가 해외에서 갈수록 인기를 얻게 되자 세계적인 영화배우들이 중국에 와서 치파오를 예약하기도 했다. 이 시기에 중국 대륙에서는 여러가지 이유들로 인하여 치파오가 유행할 수 없었지만 전 세계적으로 사랑을 받기 시작한 그때부터 지금까지 치파오의 지위는 확실히 다시 상승하고 있다. 최근 10년 사이 중국에서 다시 모습을 나타낸 치파오는 예복으로서 국제적인 예의를 취해야 하는 공식적인 자리에서 각광받고 있으며 국제무대에서도 여전히 호평과 함께 각종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며 화려하게 부활하고 있다.
출처 : 중국통상과(中國通商科)
글쓴이 : 중국통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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