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의미의 공간
  • 자연과 인간
서양철학

라캉을 만나다 21

by 8866 2009. 4. 14.

 

라캉을 만나다 21

[에크리]를 통해 라캉을 마난다

글쓴이: 한살림

 

프로이트의 '부정'에 대한 라캉 세미나에 대한 단평

 

오늘 [에크리]에 실린 프로이트의 <부정>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라캉의 세미나를 읽었다. 철학자 장 이뽈리트가 <부정>에 대해 발제를 하고 라캉이 답변을 하는 형식을 갖추고 있다. 부록에 실려있는 장 이뽈리트의 논평을 다시 읽지 않고 라캉의 글만 읽었다. 철학자 이뽈리트의 글은 아직 나의 지식을 심화시키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나를 성급하게 헤겔로 유혹한다. 오늘 읽은 글은 <Introduction to Jean Hyppolite’s Commentary on Freud’s “Verneinung”>과<Response to Jean Hyppolite’s Commentary on Freud’s “Verneinung”>이다. 서지 정보에 따르면 이 세미나는 1954년 2월 10일에 이루어졌다.

 

가벼운 감기 몸살 때문이라고 애써 자위하기만 한 편의 독서 노트를 구성할만한 생각들을 긁어모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이 세미나에 대해 논평하지 않고 라캉의 <”도둑맞은 편지”에 대한 세미나>를 읽기로 했었다. 이 유명한 글을 읽기 시작했는데 갑자기 허전해져서 독서를 중단하였다. 그리고 프로이트의 <Verneinung 부정>에 대한 세미나에 대한 단평을 ‘작성해야만’ 했다.

 

이 세미나에도 라캉의 에고심리학 비판이 전면에 배치되어 있다. 에고심리학은 피분석자의 에고를 강화하여 현실적응력을 높이는 데 주력한다. ‘병든’ 에고는 이드 (또는 수퍼에고)의 과도한 간섭으로 약화된 채 방어기제로 무장하여 현실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는 데 어려움이 있어 성(性)과 일의 영역에 있어 정상적으로 기능할 수 없다. 그래서 정신분석학은 피분석자의 방어기제를 해체함으로써 그 자리에 자율적인 에고가 작동하도록 돕는 것을 목표로 한다. 에고심리학은 (자본주의라는) 현실을 전혀 의문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보수성을 여실히 드러낸다. 비판이론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이용하여 자본주의가 파시즘의 한 유형이라고 비판하는 것과 대조를 이룬다. 이 관점에서 현실에 잘 적응하는 사람은 정상화된 (normalized) 정신병을 앓고 있다. 여전히 계몽적 입문서로는 요긴한 에리히 프롬의 [자유에서의 도피]를 참조할 수 있다.

 

(나는 프롬의 책들을 통해 비판이론과 정신분석학을 처음 맛보았다. 가독성이 높은 글들이 사유를 전복또는 혁신하는 촉매로 사용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현실을 잘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 순간적인 면죄부로 사용되기도 한다. 기독교의 ‘고백’이나 ‘회개’가 흔히 추한 삶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사용되는 것처럼. 이 점에서 자본주의를 전면으로 비판하고 있는 프롬의 저서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베스트셀러로 유통되면서 기존 사회를 해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보다 강화하는 데 이용된다. 자본의 간계 (奸計)도 이성의 간계 못지 않다. 이는 포스트모더니즘에도 해당된다.)

 

라캉에 의존하지 않고서도 에고심리학이 전제하는 자율적 에고 (autonomous ego)은 실제 경험과는 유리된 추상(abstraction)이라고 할 수 있다. (추상을 현실로 가정하는 데서 나타나는 오류에 관하여 화이트헤드의 [과학과 근대세계]를 참조하기 바란다. 이 점에 대한 고전적 표명은 포이에르바하와 마르크스의 종교비판에서 발견할 수 있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적 혁명은 ‘자율적 에고 같은 것은 없다’는 인식과 관련이 있다. 이 점에서 라캉은 프로이트에 매우 충실하다. ‘이드’와 ‘에고’와 ‘수퍼에고’ 등은 욕망하는 주체의 변증법을 설명하기 위한 개념적 도구로 고안된 것이다. 그런데 에고심리학은 에고를 욕망하는 주체를 초월하는 자리에 놓음으로 하여 데카르트적 의식(cogito)을 상식적 수준에서 복원한다. 또는 에고를 둘로 쪼개어 본능에 연루된 에고와 본능을 초월하는 (conflict-free) 에고를 제시한다. 이 지점에서 에고심리학은 영미의 (경험론적) 과학주의의 입장에 매우 밀접하게 접근한다. (이와 관련하여 [순자(荀子)]의 해폐(解蔽)의 인식론을 참조하기 바란다. 로크나 흄에 비해 매우 간명하게 제시된 경험론을 발견할 수 있다.) 라캉은 ‘보편타당한 진리’의 담지자로 전제되는 의식(에고)을 해체함으로써 에고심리학과 경험론적이고 실증주의적인 과학(주의)를 동시에 비판한다.

 

그런데 과학 지식이 보편타당성을 갖는다고 가정해 보자. (이 가정은 화이트헤드에 의해 철저하게 비판되고 있다.) 그러면 이 보편타당한 지식이 삶을 총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 이 점은 서양 근대 철학을 관통하고 있는 문제의 하나이다. 예를 들면 칸트는 순수이성과 실천이성을 구별한다. 보다 상식적인 수준에서 인간의 모든 문제를 육체적 활동으로 설명하는 입장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삶의 모든 영역이 육체적 활동과 연관되어 있다는 주장과 육체적 활동으로 환원될 수 있다는 주장은 다르다. 과학주의는 실천이성을 순수이성에 포섭하려는 시도처럼 보인다. (내가 현재 염두에 두고 있는 과학주의는 도킨스 등의 진화론에 잘 나타난다.)

 

과학은 욕망하는 주체의 삶에 한 부분으로만 참여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과학 활동의 밖에 놓이는 주체들의 삶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도킨스 등은 문학 예술 종교 등에 연루된 주체들이 살짝 또는 심하게 돌았다고 말할 것이다. 그의 최근 책의 제목이 ‘God Delusion’은 우연이 아니다.

 

그런데 라캉은 delusion을 다룸으로써 과학주의의 보루가 되는 ‘오류없는 의식’의 가능성을 비판한다. 라캉이 이 세미나에서 다루고 있는 현상은 정확하게는 ‘hallucination (환각)’이다. 라캉은 말한다. “But whatever progress has been made here, the problem of hallucination remains just as centered as before on the attributes of consciousness. This is a stumbling block for a theory of thought that sought the guarantee of its certainty in consciousness.” (E. p.320; F. p.384) 심지어 라캉은 과학이 망상(delusion)이라고 주장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다만 라캉은 도킨스처럼 delusion에 극단적으로 부정적인 함축을 부여하지 않는다. 과학이 망상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프로이트의 비유를 빌면) 삶에서 빙산의 일각의 한 부분을 차지할 따름이다. 과학자의 욕망에서 구축된 세계에 과학의 밖에 서는 타자들을 늘이고 잘라 배치하려는 시도는 폭력이다.

 

이 세미나에서 라캉은 ‘the symbolic (상징계)’와 ‘the imaginary (가상계)’와 ‘the real (실재계)’의 개념을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상세한 설명이 없어서 나는 이 세미나를 통해서는 이 개념들이 정확하게 갖는 함축들을 파악할 수 없다. 이 개념들 가운데 가상계에 대해서는 이전의 논문들에서 충분히 설명되었고 상징계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해명되었다. 특별히 나는 현재 라캉의 상징계에 관심이 많은 데 주체의 진리(truth)가 드러나는 곳이 상징계로 보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라캉의 상징계는 억압이 아니라 해방의 공간이다. 또는 억압과 해방이 변증법적으로 교차하는 공간이라고 할까? 이를 다루기 위해 라캉은 담화(speech)와 언어(language) 그리고 담화(speech)와 담론(discourse) 등의 짝-개념들을 활용하고 있다. (이 개념들에 대한 이해가 나의 당면 과제가 될 것이다.)

 

주체의 상징화가 (상대적으로) 매끄럽게 이루어지 않을 때 주체의 실재계가 모습을 드러낸다. 라캉의 말을 직접 인용한다. “[Expelling from the subject] constitutes the real insofar as it is the domain of what which subsists outside of symbolization” (E. p.324; F. p.388). 상상계이든 상징계이든 실재계이든 라캉에게 있어서 이는 ‘개별적’ 주체의 영역이다. (라캉에 보다 충실하게 말하면 계(界)들은 간주관적(intersubjective) 영역이다.) 라캉이 말하는 진리는 주체의 외부에 존재하면서 주체에게 강요되는 것이 아니라 주체가 독특하게 발견하는 (또는 구성하는) 것이며, 이 “진리의 생산 (the production of truth)”를 설명하기 위해 도입된 것이 (개념으로서) 세 가지 영역들이다.

 

이러한 나의 생각들은 라캉의 중요한 개념들을 파악하기 위한 출발점이라는 의미를 가질 뿐 어떤 종국성(finality)도 전제하지 않는다. (또는 주장하지 못한다.) 이미 내가 잘 모르는 것에 대해 너무 많이 말했다. 여기서 멈춘다.

'서양철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라캉을 만나다 20  (0) 2009.04.07
라캉을 만나다 19  (0) 2009.03.28
라캉을 만나다 18  (0) 2009.03.25
서양철학사  (0) 2009.03.21
라캉을 만나다 17  (0) 2009.02.17

댓글